'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거짓말] 혼혈 원주민 아동들에게 '문명화' 혜택을 줬다?
우리가 이 거대한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습니다. 아서 필립(1738~1814, 영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행정관)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타고 항해한 결과 1788년 1월 26일 드디어 시드니 항구에 도착했거든요. 그렇게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를 건설한 거죠. 그때의 시드니는 허허벌판이었고 '빈 땅'이었어요. 그 땅을 개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런데 그곳에 '원시인'이 살고 있더군요. 우리는 그들을 애버리진(Aborigine)이라고 부릅니다. 'ab-(떨어져서)'과 'origine'이 결합된 말로, '원래부터 있던 사람'이라는 의미죠. 줄임말로 'Abo.'라고도 표기한답니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웠어요. 굉장히 미개했죠.
그런데 이 호주 대륙에 영국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백인 이민자들과 미개한 원주민들 사이에 혼혈아가 태어나기 시작한 거죠. 이 야만적인 원주민 사회에서 혼혈 원주민 아이들-저희들은 이들을 '하프캐스티드피플(half casted people)이라고 부릅니다-을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문명화된 백인들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아이들 아닙니까.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자 우리는 이 혼혈아들을 애버리진의 마을에서 구출해낸 후 문명화 교육을 받게 하고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애버리진으로부터 떼어놓아야 백인사회에 흡수될 수 있고 애버리진의 흔적을 영원히 없앨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그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00년에서 1972년 사이 적어도 3만5000명의 아이가 이런 '혜택'을 받게 되었죠. 어차피 호주대륙에 함께 사는 이들이니 '동화정책'을 편 거죠. 그 원시적인 마을에서 열악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진실] 10만 혼혈아동들, 백인들의 노예로 '도둑맞았다'
1992년 12월 10일, 역사적인 연설이 있었다. 당시 호주 총리이던 폴 키팅(Paul Keating)이 남긴 '레드펀 연설(Redfern Speech)'이 그것. 폴 키팅은 시드니의 원주민 밀집지역인 레드펀에서 행한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원주민-백인 간의 국민적 화해를 촉구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비원주민인 호주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따라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그러한 잘못에 대한 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수탈을 자행한 사람들은 바로 백인들이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원주민들의 전통적 삶도 망가뜨렸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 병균을 가져왔으며, 술도 가져왔다. 우리는 살인도 저질렀다. 또한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다. 우리는 인종적 차별과 인종적 배제를 서슴지 않았다.
그건 모두 다 우리의 부주의와 편견으로부터 나온 결과였다. 이러한 일들이 백인들에게 일어났더라면 하는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조차 무시하였으며, 그들의 마음과 몸이 되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우리 모두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애버리진이라고 불리는 호주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 사이의 관계가 그간 어땠는지, 이 연설에 모든 해답이 나와 있다. 백인 이주민들은 원주민의 모든 것(땅과 생활방식, 심지어 가족까지)을 박탈하고 파괴하고 빼앗았다. 하지만 폴 키팅이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1992년 전에는 백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원주민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리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사실 원주민들은 애버리진이라는 말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을 타자로 만들어 버린 단어 아니겠는가. 대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이름으로 부리는 것을 좋아한다. 호주 동부와 남부에서는 자신들을 '우리 사람'이라는 뜻의 '쿠리'라고 부르고 서부에서는 '녕가', 북부에서는 '요잉구', 중앙에서는 '아낭구', 남부에서는 '넝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반면 최근 진보적인 호주인들은 원주민을 가리킬 때 '최초의 호주인(The First Australians)'이라는 말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이 까만 피부의 호주인들은 적어도 4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에서 호주로 건너왔다고 추측되니 말이다. 백인들이 호주를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원주민들에게는 모욕인 셈이다.
백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오던 당시 원주민 인구 수는 25만~75만 명으로, 대략 500~600개 정도의 독립된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럽인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가던 1860년에 원주민의 인구는 2만2000명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통계는 알지 못한다. 1967년까지 원주민들은 아예 사람으로 취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967년에 열린 국민투표에서야 90.8%의 호주인은 원주민도 호주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땅과 언어, 목숨과 가족까지 빼앗겨온 호주 원주민들
도대체 원주민들은 얼마만큼 '미개'했기에 불과 30년 전에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이 된 걸까?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들의 조상은 백인이 이주할 무렵에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분명 그들만의 엄격한 사회적 체계와 지도자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체계와 지도자의 통솔 하에 경제활동도 영위하고 있었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모임을 갖고 전통의식도 치렀다는 사실에서 그들만의 전통적 문화요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원주민을 접한 백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주체 없이 살아가는 원시인 정도로 비춰졌다. 그래서 백인들이 그렇게도 쉽게 원주민들을 학살했는지도 모르겠다. 백인들은 말에 올라탄 채로 총을 쏘아가며 '인간사냥'을 했고, 기록으로 남은 사건인 1928년 노던 테리토리지역의 '코니스톤 대량학살'에서도 확인됐듯 원주민들의 음식물과 물에 독극물을 넣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백인들이 호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곳을 마치 사람이 안 사는 것처럼 '빈 땅'이라고 발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원래의 주인과 협상해야 할 법적인 필요성을 애초에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땅을 쉽게 차지했다. 이는 원주민들이 영토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밀가루 몇 포대와 농기구 몇 개에 엄청나게 넓은 땅을 넘기기도 했고, 그러다 때로는 무참히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탈취한 땅에 백인들은 양, 토끼, 소를 들여와 목초지를 만들었다. 유럽식 양목산업의 발전으로 가축들이 넓은 오지를 점유하게 되고, 그만큼 원주민들의 야생 활동은 위축됐다. 또 이 가축들이 목초를 먹어치우면서 비옥했던 토양이 점차 사라지고 토종동물들도 멸종돼 사냥으로 지탱되던 원주민 경제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뿐이랴. 백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질병들(수두, 천연두, 독감, 성병, 홍역 등)은 유전적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의 생명을 추수하듯이 앗아갔다. 특히 시드니 인근에서는 천연두로 인해 2년 새 절반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호주대륙은 '백인천하'가 되어갔고 반면 원주민들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원주민들의 언어만 봐도 그렇다. 원래 원주민들은 250개에 달하는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쓰며 살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50개 언어는 현재 완전히 소멸됐다. 간신히 살아남은 언어들도 그 대부분은 사멸의 위기에 몰려 있다. 이같이 백인들이 원주민에게 가한 잘못은 수도 없이 많다.
굶주림과 구타... 악몽으로 남은 수용소 안의 삶
하지만 제일 경악할 만한 범죄는 따로 있다. 바로 백인들과 원주민 간 '동화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은 일이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이 늘어나자 이들을 백인사회로 흡수시키기 위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가족와해정책'은 연방정부 특별법에 의해 일괄적으로 시행됐다.
호주 정부는 각 주의 법령을 통해 원주민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놓는 것을 인가해 190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전체 원주민 아이의 10~30%로 추정되는 최소 10만 명(원주민 측 주장)의 혼혈아동들이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그 미개한 사람들과 미개한 곳에서 살지 않도록 '구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남은 원주민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시행된 정책인 만큼 주로 피부색이 하얀 원주민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강제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 때문에 원주민 부모들은 일부러 자기 아이들의 피부를 검게 만드는 일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수용소 등에서 백인화, 문명화 교육을 받은 후 순수 원주민에 가까운 혼혈은 강제노역 현장으로, 백인에 가까운 혼혈은 신문광고 등을 통해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행복했을까? 오히려 생지옥으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애초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서 강제로 떨어지는 것 자체가 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거침없이 쓰던, 원주민의 말을 해서도 안 됐다. 이렇게 전혀 다른 생활환경 속에서 적응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얌전히 '문명화' 과정만 거쳤다면 사실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열악한 수용소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예컨대 3살 때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 했던 로이 스튜어트(Roy Stewart)는 그가 수용됐던 뉴사우스웨일즈 킨첼라수용소(Kinchela Boys' home)에서 겪은 기억 때문에 77살에 죽을 때까지 평생을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수용소에서 술 취한 감독관이 때려죽인 아이들을 땅에 묻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안에 있던 혼혈아동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셈이다. 이들이 수용됐던 고아원이나 교회 시설의 담벼락에는 탈출을 막기 위해 철망을 쳐놓기도 했다고 하니, 사실상 감옥과 다름없었다.
노동착취와 성폭행... 백인 가정의 '노예'였을 뿐
그렇게 '문명화' 과정을 거친 아이들이 마침내 백인 가정이나 선교기관에 도착한 순간,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 아니,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여자아이들은 가정부로, 남자아이들은 농사나 노동일을 돕기 위해 백인들에게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구타당하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거의 노예와 맞먹는 수준의 노동착취까지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중 10분의 1이 넘는 아이들은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1941년생 발레리 리노우(Valerie Linow)이다. 그녀는 2살 때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보매더리수용소(Bomaderry Children's home)에서 살다가 1958년 16살 때 백인 목축업자 가족의 하녀가 되었다. 사건은 그녀가 17살이 되었을 때 일어났다. 발레리가 우유 양동이를 엎지르는 실수를 하자 목축업자가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것.
"그는 갑자기 내게 '들어가 있어' 하고 소리쳤고 몇 분 뒤 울타리용 가시가 박힌 철사로 제 다리를 때렸지요.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려 몸을 웅크렸고 결국 다리에 흉터가 생겼어요."
그의 폭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발레리를 폭행한 그는 그녀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더니 따라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던진 후 성폭행했다. 만신창이가 된 발레리는 용기 내어 경찰에 신고했지만 역시나, 그 목축업자는 기소되지 않았다. 경찰에게 있어서 혼혈아동의 인권은 지켜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권이란 '백인의 권리'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이들에게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제로 고아가 된 그들은 평생을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백인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낮은 자존감, 우울증, 불신, 자괴감, 분노 역시 몸집을 불려갔다.
이 같은 학대와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들은 썩은 동아줄을 잡듯이 약물과 알코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잃어 버렸던 것이다. 이 불쌍한 고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가족을 찾고 있으며 자기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Stolen Generations(도둑맞은 세대)'라고도 부른다.
2008년 호주 총리의 '공식 사과'... 하지만 계속되는 아픔
그렇게 애버리진의 가족들은 와해되었다. 이제 그들은 호주 전체 인구로 따지자면 약 2% 50여만 명에 불과하다. 그 50만 명 중 약 4분의 1이 '도둑맞은 세대'다. 이 '도둑맞은 세대'의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호주 원주민은 문맹률과 빈곤율이 높다. 평균수명도 백인보다 17년이나 적다. 실업률은 백인보다 3배나 높고, 범죄로 구속되는 비율도 2.8배에 이른다. 자살률도 일반 호주인들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백인 사회나 정부는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가 호주 백인 사회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며 걱정하고 있는 상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같은 상황에 맞서 최근 원주민 사회에서 호주 백인 사회에 무조건 동화되기보다 원주민 통합과 함께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도둑맞은 세대'들의 권리 찾기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1995년 호주 연방정부는 지난날 원주민 아이들에 대한 강제입양 및 분리정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질의를 개최했고 이어 1997년 4월에는 인권 및 평등위원회가 연립정당 정부에 '집으로 데려오기(Bring them Home)'라는 보고서를 전달하며 '도둑맞은 세대'의 가족을 찾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연방의회에서 당시 총리였던 케빈 러드는 "우리는 동료 호주인(원주민)에게 깊은 슬픔과 고통, 손실을 안긴 역대 정부 및 의회의 법률, 정책들에 대해 사과한다"며 용서를 구했고, 의회도 러드총리가 발의한 원주민에 대한 사과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을 위해서였다"고 홍보하고 자위했던 정책이 사실상 거짓이었고 실패작이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부 공식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호주 백인 사회에는 아직도 원주민아동 강제분리정책이 당시로서는 원주민 아동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36년간 식민지배를 해놓고 그것이 한국을 개화시켰다고 이야기하는 일본 극우파의 논리와 똑같다. 일제강점기 우리네 할아버지·할머니들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당하고 일본말을 써야 했다. 원주민의 언어를 쓰지 못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던 혼혈아동들의 상황과 무엇이 크게 다르랴. 하지만 호주 정부는 '공식 사과'라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감감 무소식이다. 우리는 언제쯤 일본의 공식 사과를 들을 수 있을까.
당신의 통화, 미국에서 엿듣고 있을지 모릅니다
[거짓말] 미국이 전 세계를 도청한다니, 그건 음모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미국이 '에셜론'이라는 비밀 도청 시스템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의 통화까지 일괄적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아무리 미국이 세계 최고의 첨단 기술 국가라고 하지만, 미국이 전 세계를 도청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만에 하나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테러리스트와의 전쟁만으로도 벅찹니다. 제발 그렇게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진실] 미국은 일반인의 전화까지 모두 도청하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 민간 위성 통신을 모두 엿듣고 있다. 미국은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함께 '에셜론(ECHELON)'이라는 도청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 말을 한 사람의 정신 상태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니 미국 정부가 세계의 모든 통신을 엿듣고 감시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미국이 무슨 신도 아니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구먼.'
그런데 미국이 전 세계의 통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위의 주장은 유럽의회가 공식적으로 채택해서 공개한 '에셜론 도청 시스템의 존재에 대한 보고서'의 결론이다. 졸지에 그 고명한 유럽의회 의원나리들이 죄다 음모론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유럽의회는 2001년 9월 5일 산하 에셜론위원회가 지난 1년여에 걸쳐 조사한 끝에 제출한 보고서와 에셜론 방어책으로 권고한 44개 사항을 367 대 159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에셜론위원장인 게르하르트 슈미트 의회 부의장은 이메일, 전화, 팩스 등 위성중계 통신 중 에셜론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이 에셜론을 부인하고 있으나 "법정에서 당당히 제시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의회는 140쪽에 달하는 에셜론위원회의 보고를 그대로 채택한 뒤 암호체계강화 등 위원회가 권고한 에셜론 방어책 44개를 승인했다. 에셜론위원회는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이 합동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에셜론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민감한 정보에 대한 암호 사용을 일상화하고 기존 암호를 강화할 것을 권고했다. 유럽의회는 또 회원국인 영국에 대해 유럽연합 관련 법규에 어긋난다며 에셜론에서 탈퇴할 것과 지상 에셜론기지 폐쇄를 요구했다.
도대체 에셜론이 무엇이기에 전 세계를 도청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유럽의회에 음모론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것인가? 그 진상을 살펴보자.
에셜론을 주도하는 미국국가안보국(NSA)
원래 군대의 사다리꼴 편제를 뜻했던 에셜론은 냉전시대 초기에 공산권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미국 주도로 창설된 국제 정보 감시망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미국과 영국은 정보 분야에서 상호협력을 약속하는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양국은 독일군의 일급암호체계인 이니그마를 해독하는 데에 성공해 2차 세계대전에 큰 도움을 얻는다. 이들은 1946년에 UKUSA라는 협정으로 기존의 협정을 갱신했는데 여기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에셜론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에셜론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 NSA(국가안보국)이다. UKUSA는 처음에는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었다. 그저 서로 수집한 정보를 주고받고 이를 중앙정보처리본부로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미국 NSA가 출범한 뒤 양상은 달라졌다. NSA는 끊임없이 새로운 첩보 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을 회원국에 공급했다. 회원국들은 대신 NSA 측에 감청 기지를 제공했다.
NSA는 미 국방부 산하의 비밀정보기관으로서 그중 하나인 DIA(국방정보국)와 함께 미국의 전자정부 첩보활동 기능을 하고 있다. 워싱턴과 볼티모어 중간의 메릴랜드주 포트미드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예산이나 인원은 국가기밀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대략 3만8000명의 인원에 1년 예산이 수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6000평의 지하에 설치된 수퍼컴퓨터들을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FBI나 CIA와는 별개의 조직이며 미 육군 안전국 및 해군과 공군의 통신정보기구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감독권을 갖는다.
에셜론은 고주파, 위성, 광섬유 등 모든 방식의 통신에 대해 도청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회의 2001년 보고서에는 '에셜론이 지구 주요 지역에 도청 기지를 설치하여 활용한다면, 이론적으로 그들은 위성을 통하는 모든 통신을 도청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해저케이블은 보안을 필요로 하는 국제통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1971년 10월 미국 잠수함 핼리벗(Halibut)호가 동부 소련의 오호츠크해에 들어가 캄차카반도로 가는 군용 케이블 통신에 직접 도청 장치를 설치할 정도이니 그 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래에는 2001년 유럽의회 보고서에 등장하는 지상 기지들의 목록이다.
▲ 위성 도청의 가능성이 있는 기지
홍콩(현재 폐쇄)
오스트레일리아 방어위성 통신기지 - 오스트레일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멘위드힐(Menwith Hill)기지 - 영국 요크셔
미사와 공군기지 - 일본
GCHQ모웬스토(Morwenstow)기지 - 영국 콘월주
파인갭(Pine Gap)기지 - 오스트레일리아 노던준주
슈거그루브(Sugar Grove)기지 -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야키마(Yakima)훈련센터 - 미국 워싱턴주
GCSB와이호파이 - 뉴질랜드
▲ 그 외 잠재적으로 관련된 기지들
아이오스니콜라오스기지 - 키프로스
배드에이블링(Bad Aibling)기지 - 독일 배드에이블링(그리스하임(Griesheim)으로 2004년 이전)
버클리(Buckley)공군기지 - 미국 콜로라도주 오로라
포트고든(Fort Gordon) - 미국 조지아주
갠더(Gander)기지 -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괌기지 - 미국 태평양
쿠니아(Kunia)기지 - 미국 하와이주
라이트림(Leitrim)기지 - 캐나다 오타와
래클랜드(Lackland)공군기지 내 메디나 아넥스(Medina Annex) - 미국 텍사스주
당신의 전화 '수다'도 에셜론의 도청 대상
이처럼 위성이나 자체 설치한 도청시스템으로부터 들어오는 전화, 팩스, 이메일, 휴대폰 등의 모든 통신내용은 에셜론기지의 슈퍼컴퓨터를 통해 분석된다. 물론 전 세계 통신량은 엄청나기 때문에 에셜론의 슈퍼컴퓨터는 주로 주요단어(keyword) 검색 방법을 사용해서 데이터를 분석한다. 검색 단어들은 '테러', '폭탄', '핵', '대통령', '백악관' 등의 중요한 단어들이다. 문자든 음성이든 이런 단어들이 있으면 슈퍼컴퓨터는 해당 통신을 선별해서 체계적으로 분류해놓는다.
캐나다 정보기관 CSE에서 20년간 스파이로 일한 마이크 프로스트(Mike Frost)는 2000년 2월에 TV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CSE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여성이 저녁에 아이의 학예회에 갔어요. 아이가 학예회에서 너무 엉망으로 한 거예요. 다음 날 아침에 그녀는 친구와 전화로 통화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어휴, 대니(Danny)가 어제 밤에 완전 망쳤어(bombed).' ('폭발했다'는 뜻의 'bombed' 때문에) 컴퓨터에 그 대화가 떴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본 분석요원은 그 대화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확실히 몰랐죠. 만에 하나 있을 가능성 때문에 분석요원은 그녀와 그녀의 전화번호를 테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명단에 올렸습니다."
에셜론, 경제 문제에도 개입
도청과 감청 |
* 도청 : 사익(단체, 개인)을 위해서 타인(개인, 기업, 국가)의 승낙과 동의 없이 사생활 침해 및 각종 신상 파악과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
* 감청 : 국가(법원)의 허가를 필요로 하여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각종 정보를 파악하는 것. 감청은 국가(법원)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 |
더욱 큰 문제는 에셜론이 경제 문제에 개입하면서 노골적으로 미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4년 브라질은 아마존 전역을 사정권 안에 두는 레이더 시스템으로 환경파괴를 감시하자는 SIVAM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14억 달러가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미국의 레이시온(Raytheon)사와 맞붙은 프랑스의 톰슨CSF사는 수주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5년 2월 이 프랑스 기업이 브라질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려 한 것을 CIA가 적발했다는 기사가 미국 언론에 났다. 에셜론을 이용해 양측의 대화를 도청했을 가능성이 컸다. 뇌물 공여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톰슨의 입찰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의 레이시온사는 계약을 따냈다. 재미있게도 몇 달 후 브라질 언론에는 레이시온사도 브라질 관리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기사가 났다.
레이시온사는 나중에, 프로젝트를 따는 데 미국 상무부가 미국 회사들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고백했다. 레이시온사는 슈거그로브(Sugar Grove)에 있는 NSA 기지의 에셜론 위성감청 시스템의 유지와 기술지원을 맡고 있다.
또한 프랑스 에어버스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항공사 및 사우디 정부 간 팩스와 전화를 모두 도청하여 에어버스사 직원이 사우디 관리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실을 포착하고, 이를 보잉사 및 맥도널 더글러스사를 지원하고 있던 미 행정부 관리에게 통보했다. 결국 1998년 미국 회사가 60억 달러의 항공기 판매계약을 체결했다.
우리나라도 도청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1998년 2월 28일자 <파이낸셜 포스트>에서 캐나다 정보기관 CSE의 암호해독 요원인 제인 쇼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1년 한국정부와 캐나다가 캐나다형 캔두 원전 3기 건설문제로 협상할 때 한국 외무부장관의 전화를 도청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국은 에셜론을 통한 민간 경제정보 첩보활동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2000년 2월 23일 <BBC> 보도에 따르면, 제임스 루빈 미국 전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 정보기관들은 민간기업들을 돕기 위해 산업무역정보를 빼내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도 "그런 일들은 엄격한 규정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NSA 활동을 감독하는 미 하원 정보위원회의 포터 고스 위원장은 "NSA는 일반인의 통화를 포함한 어떤 전화통화도 도청할 수 있으며, 내 전화까지도 들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심지어 이들은 자국의 도청을 상대국에 요청하는 방식으로 자국법을 교묘히 피해가면서까지 정보를 수집해왔다. 다시 말해 영국 스파이가 미국 시민을, 미국 스파이가 영국 시민을 대상으로 도청하고 이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패킷감청이 도마 위에
한편 국내에서는 최근 '패킷감청'이라는 것이 이슈가 되고 있다. 패킷감청은 인터넷 회선을 통해 전기 신호 형태로 흐르는 데이터 패킷을 제3자가 중간에 가로채서 내용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소위 '미네르바 사건'을 계기로 많은 네티즌들이 국내 이메일 서비스는 언제든지 국가기관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해외에 서버가 있는 지메일(Gmail)로 '사이버 망명'을 갔다. 하지만 국가기관에서는 패킷감청으로 얼마든지 지메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필자가 IT관련 벤처기업을 다닐 때 직접 경험했던 일이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필자는 업무 시간 중에 잠시 필자가 소속된 정당에 개인적인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얼마 후 회사의 팀장이 필자를 불러서 무슨 시민단체 같은 데서 활동하느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회사 측에서는 필자를 포함해서 회사의 직원들이 보내는 이메일과 인터넷 접속 기록을 끊임없이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회 경험이 일천했던 필자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대기업에서는 일상적으로 그런 감시를 한다고 듣긴 했지만 작은 벤처기업에서조차 그러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현대 사회는 철저한 감시사회다. 곳곳에 달린 CCTV와 당신이 사용하는 교통카드, 그리고 당신의 휴대전화나 회사에서 목에 걸고 다니는 RF ID 카드를 통해 원한다면 당신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당신이 사용하는 신용카드 정보로 당신의 소비패턴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정부의 비밀정보기관들은 패킷감청을 통해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컴퓨터 사용 화면을 옆에서 보듯 들여다볼 수 있다. 휴대폰 감청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도청을 하는 미국의 도청기관 에셜론의 존재가 음모론으로만 치부되다가 결국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보라. 숨이 막힌다고? 이것이 현실이다
"군대 안 가도 돼요... 이 주사만 맞으면"
[국가의 거짓말③] 흑인 대상으로 매독 생체실험 자행한 미국 정부
| ||
ⓒ 위키피디아 | ||
터스키기 |
[거짓말] 미국 정부는 흑인의 매독을 무료로 치료해줬다
여러분, 많이 아프시죠? 여러분은 현재 '나쁜 피(bad blood)'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겁니다. '나쁜 피'는 약한 에너지 같은 건데요. 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정부가 무료로 병을 고쳐주고 음식도 드릴 테니까요.
못 믿으시겠다고요? 얼마 전에 집에 배달된 편지를 보시고도 못 믿겠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미국 정부의 로고가 새겨진 희고 깨끗한 봉투에 담긴 그 편지 말입니다. 모두들 읽어보셨겠지만 다시 한 번 읽어드립니다.
"정부 의사들이 주관하는 치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특별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하십시오, 단, 반드시 간호사와 상담해야 합니다."
저희 의사들이 드리는 약을 꼬박꼬박 먹고 채혈도 하고 저희가 안내하는 치료 절차를 꼬박꼬박 따르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나쁜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국가파견 의사라면 실력이 검증된 의사들 아니겠습니까? 저희들만 믿으시고 치료혜택을 꼭 잡으세요!
[진실] 미국 정부, 멀쩡한 흑인도 매독에 감염시켜 생체실험
1997년 5월 16일,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 아주 특별한 손님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특별한' 그들의 면면은 초라했다. 4명의 손님은 이미 휠체어에 탄 백발의 노인이었다.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이 87세였으며, (출생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100세에서 109세 사이였다. 그리고 클린턴은 이 초라한 노인들 앞에서 담화문을 읽었다.
"오늘날 미국은 잘 알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않은 채 연구에 이용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원도 없고 대안도 없는 가난한 흑인들인 그들은 미국 공중보건국(The United States Public Health Service)에 의해서 의료적 돌봄을 제공받았을 때 희망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배반당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행한 일은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른바 대통령의 공식사과였다. 클린턴의 특별한 손님들은 대통령의 사과 담화문 속에 등장하는 당사자였다. 인생의 늘그막에서 대통령의 사과를 끌어낸 사람들, 그들에게 어떠한 사연이 숨어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은 그들에게 백 번 사과할 만했다. 미국 정부가 1932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0년간 가난한 흑인 600명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매독 생체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매독을 치료하지 않고 오랜 기간 방치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건강 문제를 알아내기 위해 치료하고 있다고 환자들을 속이며 가짜 약을 주고 병의 경과만을 관찰하는 실험, 백악관의 백발노인들은 이 '미국판 마루타'의 생존자였다.
매독 생체실험은 미국에서 매독의 발생률이 높은 앨라배마 주 매콘카운티(Macon County)의 터스키기(Tuskegee) 지역 흑인 남성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곳의 지명을 따서 흔히 '터스키기 매독연구(Tuskegee Syphilis Study)'라고 불린다.
"매독 치료해드립니다"... 흑인들 속인 공중보건국
흑인들이 노예였던 시절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비인간적인 생체실험에 흑인들이 동원될 수 있었을까. 사실 당시 흑인들의 처지는 노예시절과 비교해 그리 크게 나아진 게 없었다. 192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거의 의사를 만날 수 없었다. 열악한 경제적·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당시 매콘카운티만 해도, 개업한 개인병원의 거의 90%가 백인의사로 주로 백인들이 사는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집중되었고, 흑인들이 주로 사는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는 병원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매독과 같은 만성질환이 흑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1932년 당시 앨라배마 주는 미국 전체에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주였고, 특히 매콘카운티는 흑인이 전체 인구의 82.4%를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인 흑인 거주지역이었다. 그들 대부분(약 88%)이 농촌지역에서 플랜트농장의 차지농이나 소작농으로, 또는 생계형 소농으로 경제생활을 영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콘카운티의 백인 플랜트 사업자들은 자신의 농장에 고용된 흑인들이 매독 때문에 제명을 다 못 채우고 일찍 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흑인의 건강은 생명이 아니라 돈이었으니, 얼마나 깜짝 놀랄 사실이었겠는가.
이때 "매독 환자들이 어떻게든 치료될 수 있다면 그 결과로 양질의 노동 능률을 통해 비용이상의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공중보건국의 한 의사가 지적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의학연구가 시급했다. 그리고 공중보건국은 매독의 치료로부터 대부분 방치돼 있는 터스키기 지역을 주목했다. 희대의 임상시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공중보건국 입장에서 본 터스키기의 흑인 매독환자들은 '자연적 표본군'이었다. 치료받지 않은 상태로 인해 매독질환의 '자연적' 경로를 보다 분명하게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5년 이상 매독을 앓고 있는 잠복기나 후기(3기) 상태의 25세 이상 흑인 남성을 연구대상으로 선정해 매독의 초기 병리현상과 그 전이과정, 특히 심장이나 혈관, 신경계에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을 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매독 치료가 아닌 매독 연구를 위한 실험 대상자를 모집하는 것은 역시나 힘들었다. 후에 웰즐리(Wellesley) 대학의 수잔 리버바이(Susan Reverby) 교수(의학사)가 수집한 공중보건국 개인 서신에 나타난 것처럼, "무지하고 게으르다고 조롱했던 가난한 문맹 흑인 노동자들" 중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무료치료'를 제공한다고 속임수를 쓰게 된다. 거짓말을 한 이후부터는 상황이 아주 쉽게 돌아갔다.
자신이 '나쁜 피'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말기 매독을 앓고 있는 거의 400여 명의 흑인 남성 소작인들과, 대조군 역할을 하게 될 201명의 건강한 흑인 남자들이 등록했다. 환자들은 그런 연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운이 좋다고 여겼다.
"앞문에 정부 문장이 그려진, 간호사가 손수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을 출입하며 이웃들 앞을 지나갈 때 손 흔드는 것을 좋아하는 많은 남자들에게는 일종의 명예였지요."
이 연구를 위해 특별히 고용된 흑인 간호사 유니스 리버스(Eunice Rivers)는 이렇게 회상했다.
군대까지 동원된 치밀한 실험... 150여 명의 죽음
단순히 그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속아넘어간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 주도면밀한 작전을 짰던 정부의 행태를 곱씹어보면 말이다. 미 공중보건국은 실험대상자들에게, 편지 머리에는 "매콘카운티보건국(Macon County Health Department)"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고, 편지 말미에는 "터스키기연구소와 함께 일하는 앨라배마주보건국(Alabama State Board of Health)과 미 공중보건국"이라는 문구가 적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당신은 철저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들은 당신이 나쁜 피에 대한 많은 치료를 받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이제 두 번째 검사를 받을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 검사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검사 후에 당신이 치료를 견뎌낼 조건이 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특별한 치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특별한 치료'란 신경매독(neurosyphilis)에 대한 척수천자(속이 가는 침을 몸 속에 찔러넣어 척수를 뽑아내는 일)였다. 반복적인 척수천자는 지망막염, 요통, 발열 등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하지만 실험의 성공에 눈이 먼 공중보건국 의사들에게 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실험대상자들은 '무료 치료를 위해' 터스키기연구소병원(Tuskegee Institute Hospital)으로 데려다줄 공중위생 간호사를 만나도록 지시받았다.
이것이 특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당신의 마지막 기회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간호사를 만나는 것에 착오가 없게 하십시오.
이처럼 흑인들은 이 매독 연구과정에서 철저히 '실험용 쥐' 신세였다. 그들은 연구의 의의나 내용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고 동의과정도 없었다. 만약 실험대상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들이었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모든 과정을 숨길 수 있었을까.
이는 흑인들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지 반 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적 의식은 남아 있었음을 방증한다. 미 공중보건국의 주요 의사결정권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34년 공중위생국장(Surgeon General)을 지낸 토마스 파란(Thomas Parran) 박사가 사업을 앞두고 했다는 발언내용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남부에서 특히 흑인들은 본능적으로 백인을 신뢰한다. 너무 못살게 굴던가 혹은 의심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들은 의사들을 신뢰한다. 우리의 많은 남부 농촌 의사들의 친절에 감사하고 있다. 정부도 신뢰한다. 정부가 자신들의 친구이며 자신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의사라면 당연히 신뢰를 할 것이다. 그가 공정하고 사려 깊게 임하면 협력을 얻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흑인들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거짓말과 무시가 실험과정에서 난무했던 것이 이상할 게 없었다. 1932년 플랜트농장에서 피를 뽑는 혈청검사를 하면서 당시 플랜트농장 사업주의 승낙을 받았을 뿐, 흑인 참여자들의 동의를 받거나 그 취지를 설명하는 절차도 이뤄지지 않았다.
| ||
ⓒ 연합뉴스 | ||
국가의 거짓말 |
치료를 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가짜 약(placebo)'도 동원됐다. 당시 연구 참여자를 관리하였던 간호사 유니스 리버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항상 철분약, 아스피린, 비타민제를 들고 다녔다. 그것은 우리의 약 처방의 일부였다. 그들은 이 약을 먹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결국 흑인들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갔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들을 지켜보며 단지 기록만 했다. '기적의 치료제'라고 일컬어진 페니실린이 1941~1943년 무렵에 개발되어 1946년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음에도 실험대상 흑인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페니실린을 한 번도 맞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연구에 참여한 한 연구자에 따르면, 정부 의사들은 현지 임상의들을 만나, "그들을 치료하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약물로 치료하면 그들이 나중에 죽었을 때 시체를 오염(실험결과를 대조할 수 없는 상태)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2차 세계대전 동안 연구자들은 지역 징병위원회와 접촉해서 실험대상자로 적격인 사람들을 징병하지 않도록 했다. 혹시나 군의 의료서비스로 그들이 매독 치료를 받을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설사 군대 입대했더라도 데이터 결과를 보존하기 위해 지역 징집위원회와 공모하여 군에 입대한 터스키기 실험 대상자는 군대의 표준매독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했다. 그 치밀함의 결과, 매독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28명이 사망하고, 매독 후유증으로 100명이 사망했다. 이들의 부인 중 40명이 매독에 감염되었고 19명의 신생아가 매독으로 사망했다.
한 공무원의 폭로로 40년 만에 중단된 '살인 실험'
| ||
ⓒ The New york times | ||
터스키기 |
조용히 진행되던 '살인 실험'은 한 젊은 공무원의 폭로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주인공은 피터 벅스턴(Peter Buxtun). 1966년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미국 공중보건국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의 성병 조사자로 부임한 그는 몇 달 후 터스키기 연구를 알게 된다. 그는 여전히 그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공중보건국 관리들에 대해 의문을 갖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1957년 연구의 책임이 공중보건국에서 '질병통제및예방센터(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로 이전되자, 그때까지 그 연구와 연구결과의 수집을 감독하는 의사들이 새로 창설된 애틀랜타 주의 CDC로 옮겨갔다. CDC의 관리들은 벅스턴이 연구의 윤리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을 귀찮게 여겼다. 심지어 아이러 마이어스(Ira Meyers, 1951년부터 1986년까지 앨라배마 주 보건국장을 지냄)는 터스키기 실험 대상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환자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치료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벅스턴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살인에 가까우며 말하자면 제도화된 형태의 살인"이라고 느꼈다. 그는 6년 동안 상사들에게 우려를 표시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연구의 혜택에 대한 "엄격한 설교"뿐이었다. 이윽고 1972년 7월, 벅스턴은 <AP(Associated Press)>의 기자였던 한 친구에게 터스키기 연구에 대한 내용을 제보하게 된다. 그 결과 또 다른 <AP>의 기자 진 헬러(Jean Heller)가 그 이야기를 기사화하게 되었고, 1972년 7월 26일 아침 그녀의 기사가 <뉴욕타임스>의 1면에 실렸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흑인 남자들이 "앨라배마 주의 터스키기에서, 연방정부의 기금으로 수행된 의학 연구에 실험대상(guinea pigs)"으로 사용됐다는 내용이었다. 진 헬러는 매독의 끔찍한 결과를 지적한 다음, 터스키기 실험에 참가한 276명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1969년에 실시한 연구결과를 폭로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7명의 피험자가 매독의 직접적인 결과로 죽었다는 것이다.
반향은 컸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포럼을 개최했으며, 연방정부는 명망 있는 흑인운동가 브러더스 버틀러(Broadus N. Butler) 딜라드대학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8명의 위원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실험의 전 과정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조사 결과에 따라 공중보건국의 상급기관인 보건복지교육부(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는 이 연구를 공식적으로 중단시켰고, 1973년 3월 3일에 보건복지교육부 장관이던 캐스퍼 와인버거는 생존자들을 위한 치료를 지시했다.
사과한 사람도, 처벌받은 사람도 '없다'
너무나 '몰상식'적이었던 매독생체실험은 이렇게 실험이 시작된 지 근 40년 만에 종말을 고하게 됐다. 하지만 놀랍게도 누구도 이 실험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몰상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실험을 주관하고 실험의 지속을 위해 투쟁했던 백인 의사들 가운데 공식적으로 사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희생자에 대한 보상은 있었으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연구자들은 흑인 참여자들을 인간이 아니라 질병이 발현되는 단순한 숙주나 배경으로 간주하거나 의사의 치료활동의 단순한 대상으로서 환자를 보았다. 사회적으로 가장 열악한 삶을 사는 흑인들을 부지불식간에 '실험동물(laboraory animals)'로 여긴 것이다. 사과해야 마땅했고 법적 처벌도 받아야 했으나, 결론적으로 연구자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였을까. 하긴 오늘날에도 사람을 대상으로 의료 실험하는 일이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법적 처벌' 운운할 만큼 희귀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자들은 '현대의 터스키기 흑인들'이다. 제약회사들은 가난한 학생이나 노숙자들에게 약간의 금품을 제안하면, 쉽게 지원자를 모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현재 미국제약업계 임상 시험센터는 대학 캠퍼스 옆에 있다. 화이자의 새로운 임상시험센터는 편리하게도 예일대학 옆에 있고, 브리스톨-마이어즈스큅은 프린스턴 대학 옆에, 영국의 제약사 글락소도 영국 런던의 임페리얼대학 옆에 임상시험센터를 두고 있다고 한다.
터스키기 매독연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탄생한, 생명윤리의 주요 윤리원칙을 담은 '벨몬트(Belmont) 보고서'는 돈이나 다른 보상으로 인간 피험자를 위험한 실험에 유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의료윤리와 현실과의 이 커다란 괴리.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도덕적 성실성을 시험하는 줄다리기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군인 아니다"... 조국은 그를 부인했다 [국가의 거짓말④] '북파공작원'의 진실
[거짓말]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을 보낸 적이 없다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 고정간첩과 무장간첩을 보내서 주요 시설을 폭파하고 요인 납치 및 살해, 서류 절취, 정보 수집, 사회 불안 조성 등의 비밀공작을 실시했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짓은 '북괴'나 하는 짓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애국심에 불타는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한 행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절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단언합니다.
[진실]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더 많은 공작원을 보냈다
"1964년 2월 23일 강원도 평강에 침투한 후 중앙분계선을 넘다가 지뢰를 밟아 부상, 삼청동에 있던 수도육군병원에 3개월간 입원했다. (줄임) 나의 임무는 강원도 평강군 보수 옆에 있는 인민군 박격포 연대의 기밀서류를 절취해 오는 것이었다. 침투되기 전에 배선상이라는 사람과 숙식을 함께하며 반복적으로 정신 교육을 받았다. 침투 후 붙잡힐 경우에는 죽으라고 했다. '붙잡히게 되면 도로 이중간첩으로 남파된다. 남파되면 여기(남한)서 죽는다'고 했다. 내려오다가 지뢰에 부상을 당했다. 지뢰 파편에 왼쪽 볼이 관통당해 구멍이 난 것이다. 구멍이 난 줄도 모르고 웅덩이에 고인 물을 먹으려니 목구멍으로 물은 넘어가지 않고 계속 구멍 난 볼로 물이 샜다. 나중에 볼에 난 구멍을 손으로 막고 물을 먹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때의 심정은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입원한 후 바로 해고되었다. 그동안 보상금을 받은 적도 없고 민원을 낸 적도 없다."
| ||
ⓒ 한겨레출판 | ||
김성호 |
2004년에 북파공작원을 위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과 '특수임무수행자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16대 국회의원 김성호의 책 <우리가 지운 얼굴>에 나오는 북파공작원 김종복씨의 인터뷰 내용이다.
대한민국 정부도 북한에 간첩을 보냈다. 게다가 북한보다도 더 많이 보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까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 의해 확인된, 1951~1972년에 사망하거나 실종된 북파공작원의 비공식적 숫자는 총 7800여 명이었다. 이후 실제 북파공작원 숫자는 점점 늘어나 정보사의 애초 주장과 달리 1만여 명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사가 2002년 9월 18일 제203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보고한 북파공작원의 숫자는 모두 1만3835명이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전까지 실제 북파를 수행한 '북파요원'은 1만1273명이고, 북파를 목적으로 양성했으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거나 필요시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훈련을 시킨 '양성요원'은 2562명으로 집계됐다.
실제 북파공작원 숫자는 '북파요원'만을 기준으로 할 때도 정보사 통계인 1만1273명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상 대상에서 기준으로 삼고 있는 '군 첩보부대' 소속뿐 아니라 일반 보병 등 육군부대에서도 자체적으로 북파공작원을 보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고, 방첩부대였던 기무사에서 보낸 '위장납북어부요원', 그리고 당시 정보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가 독자적으로 보낸 엘리트 스파이인 '고정간첩'과 해병북파특수공작대(MIU) 등도 있으나 정보사 통계에는 제외되어 있다.
한편, 2000년 11월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1950년부터 1999년까지 파견한 남파공작원 건수는 2252건이고, 남파공작원의 숫자는 6446명이다. 이 가운데 3177명은 생포되고, 1644명은 사살되었으며, 275명은 자수했다. 그 수가 모두 5096명이므로 나머지 1350명은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숫자만 보더라도 북파공작원의 숫자는 남파공작원의 숫자보다 최소 2배 이상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 '북파공작원'
이렇게 대규모의 북파공작원을 운용하면서도 정부가 지속적으로 북파공작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력 도발이나 침투를 중단하도록 규정한 정전협정을 위반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지 않기 위해서 대한민국 공작원 시신의 확인조차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파공작원이었던 김상학씨의 얘기다.
김상학씨는 1968년 10월 1일 특수 공장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GP(경계초소) 전방에 있는 인민군 부대의 보급 담당 운전병을 납치하라는 임무였다. 김씨와 다른 5명의 공작원들은 전방 철책선을 넘어 다음 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6시에 작전을 개시하려는데, 미리 인민군들이 알고서 둘러싸고 있었다. 공작원 중 한 명이 전날 밤 잠복 중에 담배를 피워 북한군에 위치가 노출되었던 것이다. 클레이모어(claymore mine : 사람이 직접 조작해 폭발시키는 다연발 지뢰)를 터뜨린 뒤 동료들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김씨의 증언이다.
"인민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난 뒤 침투 전 약속했던 대피처로 집합했는데, 공작원 중 한 명이 오지 않았다. 인민군 GP에 동료의 시체가 옮겨지는 것이 쌍안경으로 보였다."
며칠 후 판문점에서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통해 침투 중 숨진 동료 공작원 사체의 확인을 요구했다. 한국군 측에서는 "우리 군 병사는 아니다"라며 부인했다. 당연히 시체의 송환은 거부되었다. 사체를 한국 군인이라고 확인하는 경우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북파공작원을 군인 신분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으로 보내는 이유도 이처럼 발각됐을 경우 존재 차제의 부인을 통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가 199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후 41년 동안 정전협정 위반 건수는 북한 측이 42만여 건, 남한 측이 45만여 건이다. 이처럼 상호간에 수십만 건의 정전협정 위반 사례가 있는데, 정전협정 위반이 두려워 북파공작원의 시신을 송환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탈영병에 '배신자' 간판 걸고 때려 숨지게 해
북파공작원은 이렇게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과연 북파공작원들은 자신의 처지가 그리 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원한 사람들일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김일성의 목을 따겠다고 모집한 실미도 부대원들조차도, 영화 <실미도>에서는 사형수 출신 등으로 그려져 있지만 사실 부대원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1971년 실미도사건 당시 공군본부 검찰부장(법무관)으로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1998년 8월 8일자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수사한 바로는 훈련병들을 모집했다. 대부분 충청 출신 민간인을 요원으로 임의 차출했으며, 이들에게는 군번도 주지 않은 채 장교 계급을 달아주었다. 훈련병 중 범죄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밝혔다.
한 동네에 사는 일곱 명이 한꺼번에 훈련병으로 갔던 충북 옥천의 유가족들도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서 서울로 갔다. 돈을 많이 벌어 오겠다며 정체불명의 남자를 따라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취직을 준비하던 청년들로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북파공작원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훈련과정에서도 인권유린이 상상을 초월했다. 외출이나 면회 금지는 기본이고 부모가 돌아가셔도 통보해주지 않았다. 가혹한 훈련을 못 견뎌 탈영하거나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북파공작원들에게는 즉결 처분이 내려졌다. 1983년 2월 설악개발단(북파공작원 양성소)에서 '훈련 중 사망'한 목철호씨는 실제로는 탈영했다 붙잡혀 구타당해 죽었다. 목씨 동기인 김아무개씨의 증언이다.
"목철호는 탈영을 했다 잡혀왔다. 기간요원들은 그를 당구대에 묶어놓고 훈련병들에게 구타와 폭행을 지시했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목에 '배신자'라는 간판을 걸고 40여 명의 동기들로 하여금 3시간여 동안 끌고 다니면서 싸리나무 등으로 때려죽이게 했다. 그 친구가 기절하면 물을 뿌려 깨어나게 한 뒤 다시 때리고, 반복의 연속으로 그렇게 때렸다. '동기들아, 한 번만 살려달라'는 그의 절규가 눈에 선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인자가 되었다. 저 놈 때문에 우리가 죽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동기를 죽이느냐 내가 맞아죽느냐는 상황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파공작 실무 책임자로 활동한 임덕삼씨의 증언은 아무리 전쟁 기간 중이라 하더라도 충격적이다. 임씨는 '임추삼'이라는 가명으로 HID 북파공작원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직접 북한 지역에 들어가 공작활동을 해 많은 전과를 올린 그는 북파첩보부대 중대장이 되면서 북파요원들을 수송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씨의 증언이다.
"정보사에서는 원래 두세 번 써먹다가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버렸지. (침투했던 대원을) 받으러 가질 않는 거야. 상부에서 가지 말라고 하면 어쩔 수 없잖아.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일단 배를 타고 나가면 그때부터야 내가 상황를 보고 배를 대야겠다, 안 대겠다는 것을 판단하지만 상부에서 데리러 가지 말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정보부대라는 것들의 본질이 그래. 나도 몇 번 명령을 받아보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어. 아마 데리러 가지 않은 대원들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서) 죽었을 거야."
"내가 같은 HID 요원들을 배에 태워서 데리고 가다가 총으로 쏴서 죽인 적도 있어. 물론 상부의 명령을 받아서 행한 것이지만…. 다른 때는 목선을 타고 가는데 그때는 발동선을 타고 갔었어. 가기 전에 미리 돌멩이를 새끼줄로 감아서 준비해두었지. 밤에 다들 자라고 해놓고 잠든 사이 총으로 쏴서 돌멩이에 감아서 바다에다가 버렸지….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지…. 보통 사람들이야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하겠지."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보며 무슨 생각 했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북파공작원들을 철저하게 도구로 이용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정당한 보상 요구는 무시해왔다. 북파공작원 하아무개씨의 인터뷰는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제대할 때에는 700만~800만 원을 받았는데, 집에서는 행불자로 신고한 상태였고, 예비군 훈련 기피자로 처리되어 있어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다. 운전면허 적성검사도 못 받아 운전면허증을 다시 따야 했다. 부대에 있는 동안 일체의 외박이나 외출이 허용되지 않아 어머니는 내가 나올 때까지 속앓이를 하여 속병을 앓고 계셨다. 지금은 첩보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훈련받을 때의 인권유린뿐만 아니라 계약했던 내용도 하나도 지키지 않고,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사회로 내몰아버린 국가가 원망스럽다."
북파요원추모사업전우회 회장 김정식씨가 2001년 3월에 김성호 의원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에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북파공작원들의 분노가 잘 담겨 있다.
"우린 범법자나 불량한 깡패들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민간인들을 감언이설로 꾀어서 살아 돌아오면 1967년 당시 기준으로 500만~700만 원의 보상과 사회에 나갈 때에는 국가기관 특채를 약속했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우리는 그들이 언급한 내용을 문서로 받아낼 수 없었고, 막상 사회로 내보낼 때 관계자들은 피신해서 책임을 회피할 뿐, 현재까지 군사기밀 운운하면서 피해 당사자들의 말문과 목줄을 죄어왔던 것입니다.
(줄임) 북한은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인 남파공작원들을 대대적인 환영 행사로 맞이하며 그들 모두가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데, 북파공작원은 1970년대까지 활동한 요원들이 대부분이 죽고, 살아서 귀환한 극소수의 부상자와 건강하지만 과거의 전력이 원인이 되어 사회생활이 결코 순탄치 못해 소외 계층으로 전락한 요원들이 이제 와서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길거리에서 시위를 펼치며 국가를 원망해야 되겠습니까?"
다음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에 나오는 장면이다.
"간난신고를 이겨내고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안긴 태양의 전사들을 환영하는 노랫소리, 하늘땅을 진감합니다. 한 평도 못 되는 살인먹방에서 시들어가던 우리에게 그 백 배도 넘는 고대광실을 안겨주신 분은 우리의 삶의 태양이신 김정일 장군님이시다."
이런 북한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지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인파가 비전향 장기수를 맞이하는 영상은 충격적이다. "사회주의 조국의 품에 안긴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라는 거대한 선전판을 본 북파공작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 정도의 대우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는 떳떳함과 자부심이라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북파공작원의 존재 자체를 철저히 부인해왔다. 다행히 사회적 여론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우여곡절 끝에 2004년에 북파공작원을 위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과 '특수임무수행자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북파공작원들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북파공작원 문제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분단이 낳은 생채기 중의 하나다. 이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고 남과 북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 큰 과제가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다.
목 졸려 죽은 아내..."그녀는 간첩이었다"
이유리 (sempre80) 기자
[거짓말] '수지 김'은 북한공작원, 한국 상사원 남편을 납북하려 했다
1987년 1월 8일, 북한 공작조직이 홍콩에 살고 있는 한국 상사원 윤태식씨를 납북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의 공작조직은 윤씨에게 "당신의 부인 수지 김을 일본의 술집에 팔아넘기겠다"고 협박해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관에 유인한 뒤 그에게 스위스로 망명해 기자회견을 열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윤씨에게 "과거 유성환 의원과 문익환 목사에 정치자금을 댄 것이 문제가 돼 한국에서의 영화 사업이 망했으며 이 때문에 홍콩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한국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신변위협을 받았다"고 망명이유를 내세우라고 지시하기도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 수지 김도 북한 공작원이었으며 윤씨 망명공작을 위해 '미인계'를 써서 그와 결혼한 것으로 밝혀졌지 뭡니까. 그러나 윤씨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 자유대한의 품에 무사히 다시 안겼습니다.
[진실] '수지 김'은 여간첩의 누명을 쓴, 살인사건 피해자일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윤태식은 살인자다. 북한에 납치될 뻔한 적도 없다. 그저 낯선 이국 홍콩에서, 돈 때문에 힘없는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연하의 남편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살인자가 고국에서 '반공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남편에게 목숨을 빼앗긴 비련의 여인 수지 김은 어떻게 해서 갑작스럽게 남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한 '여간첩'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을까. 바로 그들의 조국, 대한민국이 그렇게 만들었다.
수지 김의 원래 이름은 김옥분이다. 그녀는 1952년 충북 충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1남 6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가난에 쫓겨 갓 스물의 나이에 상경한 김옥분은 밥벌이를 위해 시내버스 안내양, 호스티스 등 일자리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마 김옥분에겐 탈출구가 절실했을 것이다. 그때 떠오른 곳이 홍콩이었다. 결국 그녀는 1976년 중국계 남성 량칭화와 위장 결혼해 홍콩으로 나가게 됐지만 홍콩에서의 삶도 서울에서와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또 다시 호스티스가 된 김옥분은 이때부터 '수지 김'이란 이름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1986년 비디오 수입업을 하기 위해 홍콩에 온 윤태식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 그녀는 이 여섯 살 연하의 남자가 자신을 살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신혼이 채 세 달도 지나기 전인 1987년 1월 3일 새벽, 윤태식의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 홍콩 자택에서 살해된다. 둔기로 맞아 실신한 상태로 여행용 가방을 묶는 끈에 의해 목이 졸린 채 서른다섯의 나이에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체는 침대 안 매트리스 안에 숨겨져 있다가 20일이 더 지난 후에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채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억울하고도 슬픈 개인사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비극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김옥분의 죽음은 엉뚱하게도 희대의 북한 여간첩 사건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옥분이 피살된 1987년 1월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시기였다. 문익환 목사가 5·3 인천사태 배후조종자로 구속되고, 유성환 의원(당시 신민당)은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주의가 아닌 남북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정치적 혼란기였다.
국민적인 저항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던 시기에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 직후 발생한 '이한열 치사사건'은 전두환 정권을 코너에 몰아넣고 있었다. 이때 기적처럼 나타난 인물이 윤태식이었다. 그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나타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 수지 김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감시 소홀을 틈타 탈출했다"고 거짓 신고했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전두환 정권의 입맛에 꼭 맞는, '안성맞춤형 진술'이었다.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국민의 저항을 일거에 잠재워줄 '국면전환용' 사건 아닌가. 전두환 정권은 그 즉시 이 사건을 '북한의 공작원인 수지 김이 미인계를 써서 해외 주재 한국 상사원을 납북하려 한 대공사건'으로 규정했다.
전두환 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판으로 번쩍거리던 국민들의 눈은, 수지 김 사건을 계기로 이내 움츠러들었다. 거대한 외부의 적(북한)이 위협해오는 한, 내부의 적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굳건한 반공의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결국 김옥분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에겐 '행운' 그 자체였던 셈이다.
민주화 바람 잠재울 사건... 전두환 정권의 '행운'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여인의 죽음이 무시무시한 간첩사건으로 조작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국민들이 이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까. 이 거짓말의 시작은 굉장히 허술했다. 아내를 살해한 윤태식은 사실 처벌이 무서워 월북을 기도했다. 살해 다음 날 홍콩을 떠나 북한 대사관이 있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윤씨는 북한 대사관에 입북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그는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망명의사를 밝혔지만, 한국 대사관으로 신병이 넘겨졌다.
대사관에서 안기부 요원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윤씨는 결국 아내 살해와 입북 시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만다. 그의 거짓 진술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안기부는 그것도 모자라 윤씨의 기자회견까지 두 차례씩이나(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마련했다.
기자회견을 마치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줄 알았던 윤씨,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한 기자회견 뒤 곧바로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되어 홍콩을 떠난 이후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받게 된다. 안기부 직원 앞에서도 기자회견 때와 같은 거짓말을 했던 윤씨는 "북한은 그런 식으로 공작하지 않는다"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안기부 직원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후, 다음날 새벽 "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월북을 시도했다"고 실토했다.
이때 안기부는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안기부는 진상발표를 하는 대신 철저히 수지 김 사건을 '대공사건'으로 만들어나갔다. 기자회견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윤씨에게 싱가포르 주재 미국 대사관에 들렀던 사실까지 숨기도록 지시했으니 말이다.
또 이후 4개월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윤씨는 살인, 납북미수, 폭행치사 등 3가지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를 숙지하는 교육까지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에도 안기부는 윤씨를 10여 년간 출국금지 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런 뻔뻔한 행동을 저지른 안기부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한 말을 옮겨 적는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공수사국장이 저에게 윤태식의 자백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보고를 받는 순간 너무 황당해서 짜증이 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남북한이 서로 헐뜯는 민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역선전 빌미를 주지 말고 상황을 고려해서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잘 처리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사법처리를 할 적당한 시점까지는 일단 덮어두고 있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허위 기자회견을 한 후라 '조직이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가벼운 부담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관계자들이 윤태식을 조용히 검찰에 송치할 걸로 알았죠. 사실 윤태식은 평범한 홍콩교민이고 정보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처리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해 5월 26일 갑자기 안기부장 직위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윤태식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떠났던 게 아쉽습니다."
13년이 지나 드러난 진실... "사건을 묻어달라"
결국 윤태식은 살인자로서 법의 처벌을 받는 대신 국가에 의해 '반공투사'로서의 이미지를 얻은 채 석방됐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밤,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된 김옥분은 홍콩 카오룽(九龍) 지역 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된다. 이때도 윤씨는 "내가 그들의 납치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조총련이 나 대신 아내를 보복 살해한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 그러나 김옥분의 가족들은 김씨는 간첩이 아니며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홍콩 경찰 역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홍콩 경찰은 한국에 수사요청을 했으나 한국의 협조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김옥분의 억울함은 영영 풀리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신동아> 이정훈 기자의 추적으로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995년 한 언론계 선배의 귀띔을 받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정훈 기자는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김옥분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사건을 한 꺼풀씩 파헤쳐나갔다.
결국 취재를 시작한 지 약 5년 후인 2000년 1월 <신동아>의 보도를 시작으로, 한 달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사건을 보완 취재해 보도하며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SBS는 이 사건을 수사해온 홍콩 경찰에 국내 언론 최초로 접근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BS는 남편 윤태식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도 이 부분을 방송에 내보낼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한 안기부와 그 후신인 국정원(국가정보원)이 취재에 협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태식이 법원에 신청한 방송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면서 결정적인 대목이 방송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옥분의 가족들이 방송을 본 뒤 용기를 내어 2000년 3월 윤태식을 검찰에 고소하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그해 12월 서울지검 외사부가 홍콩 경찰의 '수지 김 살인사건' 수사 자료를 입수하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2001년 10월 24일 윤씨를 긴급체포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다시, 진실을 파헤칠 기회를 국가가 묻어버렸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2000년 1월 28일, 홍콩 주재 외사협력관 조아무개 경정은 김옥분 가족들의 제보에 따라 홍콩 현지에서 취재를 벌이던 SBS 취재팀과 만났다고 한다. "윤씨가 부부싸움 중 김씨를 살해했는데 납북미수 사건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를 취재진에게서 전해 들은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 당시 경찰청 외사관리관이던 김아무개 치안감에게 보내게 된다.
보고서에는 "홍콩 경찰이 수지 김의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윤씨를 지목하고 있으며 사법공조조약에 따라 한국 측에 관련증거 일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에 따라 김 치안감은 1월 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하고 내사토록 지시해 사건 발생 13년 만에 수지김 피살사건에 대한 경찰 내사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정보를 입수한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도 이를 엄익준 당시 2차장(작고)에게 보고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에 따른 국제문제, 남북문제, 국가정보원의 위상문제 등을 고려, 기존 방침대로 단순 살인사건임을 발표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정원은 이어 경찰이 2월 14일 윤씨에 관한 조사기록 열람을 요청함에 따라 경찰의 내사사실을 알게 됐고, 엄 전 차장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으로나 북한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무영 경찰청장을 만나 수지 김 사건을 설명하고 수지 김 사건이 공개되면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라"고 김 전 국장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 전 국장은 다음 날 오전 10시께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을 방문, "국정원 방침 상 자료제공은 힘들다. 윤씨가 87년 처를 살해하고 이를 대공 사건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면 외교 및 대북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사건내막을 설명했다. "사건을 묻어달라"는 김 전 국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 전 청장은 다음날인 2월15일 김 전 치안감을 불러 "수지김 사건을 국정원에 넘겨주라"고 지시함으로써 수지김 사건에 대한 내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윤태식은 감옥에 갔지만... 풍비박산 난 김씨의 가족
그 사이 윤태식은 지문감식의 첨단 기술을 가진 '패스21'의 벤처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언론인들에게 돈과 회사 주식을 뿌렸다. 돈을 받은 언론인들은 윤태식을 유망한 벤처기업가로 포장해 보도하였다. 한 경제지의 전 사장은 뇌물로 받은 주식 수만 주를 매각하여 64억 원의 차익을 남겼고, 그 대가로 윤태식을 정관계 거물들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언론보도를 믿고 패스21의 주식을 산 보통 사람들은 졸지에 쪽박을 찼다. 이른바 '윤태식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주가조작 및 가장납입 등을 통해 수십억 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뒤 이 돈으로 정치권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혐의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그는 마침내 살인행위에 대한 처벌까지 받게 되었다. 검찰은 사체의 머리 부분이 베갯잇으로 가려져 있었고 김씨가 혀를 깨문 흔적이 있는 등 교살(絞殺)의 흔적을 포착, 취조를 통해 윤씨로부터 범행사실을 자백 받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서울지검 외사부는 김씨가 남편인 윤태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 짓고 2001년 11월 윤씨를 살인 및 시체 유기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 기소했다. 그 후 2002년 5월, 검찰은 윤씨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사기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3년씩 모두 6년을 구형했다. 이어 2003년 5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윤씨는 징역 15년 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한편 억울하게 '간첩가족'으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어온 김옥분의 유족들은 2002년 5월 국가 등을 상대로 108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리고 서울지법 민사합의41부는 2003년 8월 14일 "국가는 유족들에게 4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가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씨가 윤씨에게 살해됐고, 김씨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북관계 등을 고려한다는 명목 아래 진실을 은폐·조작함으로서, 원고들이 김씨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고 법적으로 고인의 원한을 풀어줄 기회를 박탈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 뭐하랴. 승소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김씨 유족들은 그 세월 동안 온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어머니 김성순씨는 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실어증을 앓다가 1997년 화병으로 사망했다. 언니 김옥녀씨는 '간첩가족'의 낙인이 찍혀 직장에서 해고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같은 해 겨울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씨의 오빠 김만식씨 역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 운전을 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주위에서 당한 비인간적 대우를 참지 못해 알콜중독자가 된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주변의 눈총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무렵 중퇴했다. 여동생들도 이혼, 울화병과 노이로제, 대인 기피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김옥분의 가족들이 많이 배우고 힘이 있었다면, 과연 국가가 나서서 한 가족을 '국면전환용'으로 희생시킬 수 있었을까. 혹시 김옥분이 '수지 김'이라는 이름의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인권쯤은 간단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고 판단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지 김 사건을 '정치적 대공사건'으로 조작하는 데 참여한 1987년 당시의 안기부뿐 아니라 민주적이라는 '국민의 정부'하에서도 그에 대한 재수사를 방해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오만하고 잔인했다.
김옥분의 가족들은 보상금 42억 원으로 그들을 간단하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간첩이라는 허울을 억울하게 뒤집어쓴 채 14년 동안 울면서 구천을 헤맸을 김옥분의 영혼도 대한민국을 용서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임승수 (reltih) 기자
[거짓말] 일본 정부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니, 말이 됩니까?
아니, 우리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으로 자살을 하라고 부추겼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당시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에서 결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군이 상륙하는 과정에서 궁지에 몰린 주민들 가운데 가족 모두 집단자결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일이죠. 하지만 제발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제했다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후에 일본군들과 동사무소 직원들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습니다. 그것은 자결 명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수류탄의 폭음과 비명, 통곡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011년 10월 10일자 <프레시안> 기사에 실린 긴조 시게아키의 증언이다. 그는 1945년 3월 말, 고교 2년생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가랑이 찢겨 죽고, 여자는 능욕을 당한 후에 죽는다'며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그의 증언은 계속됐다.
"불발탄이 많았던 탓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과 죽창을 들고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형과 함께 어머니를 돌로 내리쳤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때려죽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청년이 외쳤습니다. '이대로 죽느니 미군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 그런데 저를 포함해 5명의 청년들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군관민 공생공사(軍官民 共生共死)'라고 했는데,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노마 필드의 책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작과비평사, 1995년)에 나오는 나카죠 미츠토시(당시 16세)의 회상은 충격적이다. 그는 가족, 친척들과 함께 피란해 있던 동굴에 일본병들이 들어왔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우리들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며칠 전에 만든, 쉬어빠진 주먹밥 몇 개뿐이었소. 그것도 아이들 차지가 되고 어른들은 쳐다보고만 있었죠. 우리는 앉아서 군인들이 무슨 짓을 하나 보고만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생각했나 보우. 총을 꺼내들고서는 '기습공격을 나가야 하니 먹을 것을 있는 대로 내놔라' 하고 위협했죠. 하지만 우린들 왜 몰랐겠수? 저희들만 살아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란 것쯤.
그 다음 날이었소. 그들은 아이들이 있으면 적군에게 들켜 폭파될 우려가 많다, 그러니 세 살짜리 이하는 처치해 버려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세 살짜리 이하가 다섯 있었소. 주사를 놓아 죽였소. 그중에는 내 아우와 조카도 있었다오.
처음에 다섯 아이를 죽인다고 할 때 우리가 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겠다고 대장에게 간청했소만, 네놈들이 스파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안 된다고 하고는 입구 앞에 보초를 세워 두고 모두 꼼짝 못하게 해놓구서, 대여섯 명이 덤벼들어서 아이를 하나씩 집어들고 주사를 찔렀다구요.
그 다음날 아침이었죠. 민간인으로서 살아 있는 건 당신들뿐이니까 미군에게 잡혀서 탱크 바퀴에 깔려죽느니 차라리 우리 처분을 받아라, 그러더군요. 우리를 처치해 버리고 남은 양식을 차지하려는 게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었죠."
당시 19살이었던 마에히라촌 출신인 마에다 하루는 미군에게 쫓긴 일본군 패잔병들이 동굴을 습격해 들어왔을 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는 폭격이 없으니까 아침이 되면 모두들 물 길러 나갔어요. 그런데 미이쓰모의 사탕수수 깍지를 쌓아둔 곳에서 내 남동생과 계집애 동생이 울면서 날 부르는 거예요. 마에라까구아 문 부근에서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가 거기까지 기어온 거예요.
하나씩 업어다 굴 속에 뉘어놓고 어머니는 어찌 되셨냐고 물었더니 죽었다는 거예요. 세이유우도 죽었다는 거예요. 엄마가 왜 죽었냐고 물었죠. 일본 군인이 와서 여긴 몇 명이나 있느냐고 물었는데, 본토 말이 서툰 어머니는 '후이, 후이?'하고 되물었데요. '예, 예(하이 하이), 뭐라굽쇼?' 하는 뜻이었는데 군인놈은 어머니 목을 댕강 쳐버렸다지 뭐예요. 잘린 목이 올케언니 유끼의 무릎 위에 떨어졌대요. 모두들 넋을 잃었죠.
내 바로 밑의 계집애 동생이 사내 동생을 업고 도망쳐 내게로 오려다가 붙잡혀서 마에라까구아 대문 안으로 끌려들어갔대요. 사내 동생을 업고 있는 아이를 칼로 찌르니까 업힌 아이는 땅에 떨어졌겠죠. 계집애 동생은 세 군데나 찔려서 창자가 이쪽에도 삐죽, 저쪽에도 삐죽 나와 있었죠. 사내 동생은 얼마나 깊고 넓게 베였던지 창자가 몽땅 다 나와 있었어요. 금방 죽더군요."
"오키나와어로 이야기하는 자는 간첩... 처분하라"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식량이나 물을 강탈당해 굶어 죽거나,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전장으로 탄약과 식량, 물 등을 나르다가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또 일본군은 주민들이 피난 장소로 사용하던 '가마(자연동굴의 일종)'나 묘에서 주민들을 내쫓아 전장에 방치하거나, 오키나와 방언을 사용하는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일본군 상부는 "오키나와어로 이야기하는 자는 간첩으로 보아 처분하라"는 명령을 직접 하달한 상태였다.
그 이외에도 미군이 뿌린 항복권유 삐라를 주워서 보거나, 다른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사례도 있다. 또한 주민들의 피난장소로 들어온 일본군들은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유아나 어린이들을 내쫓거나 죽였다. 군 비행장이나 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주민들이 군사기밀을 유출할 것을 두려워해 미군에 투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관민 공생공사'라는 지도방침을 내려보내 많은 곳에서 부모, 형제, 자식, 친척, 지인들이 서로 죽이도록 명령하거나 이를 강요했다.
소위 '집단자결'이란 이러한 강압적인 상황 하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키나와 전역에서 벌어졌고, 특히 일본군이 전략지구전을 펼쳤던 오키나와지마 중·남부에서 많은 사례가 발견된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십만 민중의 일상생활 터전에서 대규모의 지상전이 벌어진 지역이다. 밀고 들어온 미군은 지상전투부대만 18만여 명이었고 후방 지원부대까지 합치면 5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중의 약 3분의 1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보조병력이었다.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섬의 서해안에 상륙한 미군은 82일간 일본군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전쟁이 끝난 뒤 마부니 언덕에 건립된 '평화의 초석'에는 다음과 같이 희생자의 수가 적혀 있다.
오키나와 주민 14만9000명
일본군 7만5000명
미군 1만4000명
영국 82명
대만 8명
북한 82명
한국 263명
(2002년 6월 현재)
총 24만 명 이상의 인원이 사망할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 된 오키나와는 사실상 일본 본토를 위한 총알받이였다. 역사적으로 류큐 왕국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오키나와는 1609년 일본에 점령당했다. 이후 일본 속국이면서도 자치를 유지했던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의 하나의 현으로 강제 병합되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철저하게 본토를 위해 '버린 돌'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오키나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최대한 지구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고 일본 수뇌부는 "오키나와는 100% 희생해도 괜찮다"는 전략이 짜여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본토, 나아가 천황제를 지킨다는 이른바 '고쿠타이고지(國體護持:こくたいごじ)'의 철저한 도구가 된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이중식민지', 오키나와
이런 역사적 아픔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 노마 필드의 책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잘 드러낸다.
나는 쇼오이찌에게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는 언제나 난감해집니다. 헷갈려요." 나의 과감한 안내역인 토시꼬가 거들고 나선다. 그녀는 번역본으로 탐독한 <미스터 리로이 존스씨(Mr. LeRoi Jones, 이마무 바라카)>의 예를 좇아, 자신을 류우뀨우계 일본인이라 부르기로 했단다. "난 절대 헷갈리지 않아요." 하지만 쇼오이찌는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한다. "글쎄요. 누가 내게 일본인이냐고 묻는다면, 류우뀨우인이라고 대답하겠어요. 그냥 일본인이라고 말하기는 어쩐지 싫단 말이예요."
"행정상의 관점에서는 당신도 일본인일 뿐이라구요." 토시꼬의 말이다. 이 말에 쇼오이찌는 대답한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상식을 따라서 나 자신을 일본인이라 부르기가 싫단 말예요. 물론 나를 밖에서, 가령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본다면 나는 일본인,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작자들과 일원이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일본 안에서는 달라요. 적어도 나는 '야마또족(大和族)'하고는 다르단 말예요."
일본의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미국령이 되었다. 미국 입장에서 오키나와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1972년 5월 15일에 오키나와의 영유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되었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일본과 미국의 이중식민지로서 온갖 생채기를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 안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 면적이지만 재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해 있는 곳이다. 오키나와 본도의 10% 이상이 미군기지로 덮여 있다. 미국은 그동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의 핵심적인 발진기지로 사용했다.
심심치 않게 미군범죄가 일어나고 있으며 1995년 3명의 미 해병에 의해 12살 여중생이 성폭행 당하는 사건으로 8만5000여 명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회를 열고 기지 철거를 요구하는 상황이 벌이지기도 했다. 전투기 및 수송기의 이착륙과 각종 훈련으로 인한 소음과 폭음으로 인해 주민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 우익 세력
이러다 보니 일본 천황(天皇)에 대한 인식도 본토와 무척 다르다. 이들에게 천황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가해자의 정점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지난 1975년에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지금의 천황)에게 오키나와 청년 2명이 화염병을 투척한 사건이 터지고, 일장기 '히노마루'를 불태우거나 하수구에 처박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1990년대 천황이 초청한 피로연에 참석했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끝내 '기미가요(君が代 : 천황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던 사건도 유명하다.
2007년에는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서 오키나와 전투 관련 내용이 왜곡되는 일이 벌어졌다. 문부과학성이 집단자결과 관련해서 군의 명령 및 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에 관해 검정의견을 붙여 내용을 변경시킨 것이다. 이때 오키나와현 섬 전체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 결국 11만 명이 넘는 현민대회가 오키나와 본섬과 낙도에서 개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집단행동으로 교과서 왜곡 시도는 좌절됐지만 아직도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은 일본 교과서에서 자신들이 불편한 내용을 삭제하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다. 2011년 3월 검정에 합격한 이쿠호샤(育鵬社), 지유샤(自由社)의 중학교 교과서는 오키나와 사건과 관련해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지유샤 교과서는 "미군이 상륙하는 가운데 궁지에 몰린 주민이 가족 모두 집단 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이쿠호샤(育鵬社) 교과서는 "미군의 맹공으로 피할 곳을 잃어 집단자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오키나와 집단자결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물론 희망적인 움직임도 있다. 2009년 54년간 이어진 자민당 집권시대를 종식하고 집권 민주당의 총리가 된 하토야마 유키오는 공약으로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을 내걸었다. 미국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를 중시하겠다는 과감한 그의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국과 일본 우익의 강한 공세 등에 밀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미군기지 이전에 실패하고 사임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권당이 바뀌고 총리가 미군기지 이전을 내거는 상황은 분명 이전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가끔 너무 쉽게 글로 무언가를 쓰는 것이 참 주제 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다. 오키나와라는 시간과 공간은 필자가 한가롭게 자판을 두들기며 써 내려가기에는 너무나 힘겹다. 누가 뭐라던 인간의 발명품 중 최악의 것은 전쟁임에 틀림없다.
빨갱이 20만명 죽였다? 희대의 살인극 [국가의 거짓말⑦]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거짓말] '좌익' 참여한 분들, 보도연맹 가입하면 봐드립니다
여러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야만 좋은 세상이 옵니다. 나라를 위해 가입해주세요. 해방 후 혼란통에 얼떨결에 멋모르고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 많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진짜 빨갱이가 아닙니다. 과일로 치면 토마토가 아니라 사과인 게지요. 그래서 겉은 불그스름했지만, 깎으면 하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겁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옛날엔 좌익에 참여했지만 이제는 진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비료도 배급해주고 보리쌀도 드립니다. 나라에서 이런 혜택을 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보도연맹에 가입해 똘똘 뭉쳐서 빨갱이들로부터 나라를 지킵시다. 그래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봅시다!
[진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 20만 명 학살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경기도 이천에선, 보도연맹원 100여 명이 아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후 충청남도에선 4개 지역·7개 지점에서 4000여 명, 충청북도는 6개 지역·14개 지점에서 2000여 명, 전라북도에선 500여 명, 전라남도에선 200여 명, 경상북도 9개 지역에서는 9000여 명, 경상남도 12개 지역에 2만여 명 등 전쟁 발발 직후부터 8월 말까지 불과 2개월 만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최소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대관절 '보도연맹'이란 단체의 정체는 무엇일까?
'보도연맹'은 오제도, 정희택, 선우종원 등 당시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이름을 날리던 이른바 '사상검사'들의 주도하에 창설됐다. 1949년 6월 5일 명동 시공관에서 창설식을 열고 지금의 중앙일보사 자리인 서소문 고개마루 턱에 사무실을 낸 보도연맹은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십만 장의 자수권고 삐라를 살포하고, 일간지와 라디오를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며 연맹원을 모집했다.
창설자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보도연맹의 창설 목적은 사상범을 전향시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보호·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보도연맹의 정식명칭이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좌익에 잠깐이나마 물들었던, '잘못된 길'로 빠졌던 국민을 보도(保導), 즉 '보호하여 지도'해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도연맹 창설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보도연맹이 창설되던 1949년은 좌익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47년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불법화됐고, 여순사건을 계기로 1948년에는 국가보안법 제정이 완료됐다. 그리고 1948년 말에서 1949년 봄에 걸쳐서는 군대 내 좌익에 대한 이른바 숙군총살이 시행됐다. 김구 암살사건처럼, 민족주의자를 포함한 반이승만 세력에 대해서도 철저한 탄압이 이어졌다.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보도연맹의 실질적인 결성목적은 좌익 전향자들을 정부가 관리하는 조직 속에 소속시켜 이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전위대로 활용해 남아 있는 좌익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 즉 '좌익 뿌리 뽑기' 책략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향자들은 가입 당시 반드시 같이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재한 양심서를 제출해야 했고 가입 후에도 1년 동안 계속해서 자백내용을 검열 받아야 했다.
그래서 보도연맹은 외견상으로는 민간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무, 법무, 국방의 3부 장관과 서울검찰청이 조직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정부기관이었다. 표면적으로 전향자들로 구성된 좌익 전향자 단체임을 표방했지만, 보도연맹의 상급 핵심간부들은 모두 정부의 관리들이었고, 간부 중 좌익 전향자 출신은 간사장과 명예간사장뿐이었다. 사실 보도연맹의 창설목적을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정부의 지원 아래 이뤄진 대대적인 포섭전향 활동에다,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남로당원이나 과거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즉각 체포, 엄중 처벌한다는 경고로 인해, 각 신문사에는 전 남로당원들의 탈당 성명서와 전향 성명서들이 줄을 이었다. 또 해방 직후 남로당,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농민조합 등의 단체에 가입했거나, 각종 문화단체에 가입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강제로, 혹은 단체로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그 결과 창설 1년 만에 연맹원 33만 명을 헤아리는 거대단체로 성장했다.
"쌀 준다" 해서 도장 찍었는데, '살생부' 될 줄이야
그런데 꼭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만이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 연맹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에게 '모집 할당량'이 떨어졌고, 실적주의까지 가세해 애꿎은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농촌의 문맹률은 70%였다. 내용도 모른 채 보도연맹 가입서에 지장을 찍은 촌민들도 많았던 셈이다. 충북 청원군 오창면 박임순씨는 남편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마을 구장과 반장이 품앗이도 하고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고 남편이 도장을 찍었는데 그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이었습니다." -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인용
충북 청주시 내덕동에 살던 노학돌씨도 '내덕동 주민이 식량배급을 준다며 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수차례 강요해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해 희생됐다. 비단 충청도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울산에서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땅을 나눠주고, 버스비도 공짜이며, 비료도 공짜로 주고, 머슴살이를 안 해도 되고, 배급도 준다고 하여 가입한 경우가 있었다. 경남 김해군에서도 가입하면 양식배급도 주고 매일 경찰서로 나가 교육도 받는 등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하여 주민이 가입 도장을 찍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은 김원일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불의 제전>에서도 잘 묘사된 바 있다.
지서 순경이 과거 전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해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회원, 자주통일청년단 회원, 서북청년단원을 가입 권유자로 앞장세워 리마다 일정한 할당을 주었다. 해방 초기 좌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민족해방에 들떠 권유하는 대로 아무 단체나 가입해 겅중댄 농민들도, 당신 전력에 문제가 있다며 윽박지르면 지레 겁부터 먹고 가입명부에 손도장을 찍었다. 해방 직후, 조국건설에 따른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주최 교양강좌모임에 몇 차례만 참석했거나, 해방 이듬해 가을 인민위원회 중앙지도부의 사주 아래 남한 전역을 휩쓴 '추수 봉기' 행진에 줄을 섰어도, 당신이 과거 그런 일했잖냐는 넘겨짚기에 놀라,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 김원일, <불의 제전 1> 17쪽
한편,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통행이나 상업 등에 제한이 가해지거나 배급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업운영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다. 경북 포항시 장기면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이영택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읍내에 드나들거나 거래를 할 때마다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포항 대보면 강사리 김학출씨는 선박 기관장이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해서 훈련을 완수해야만 배 열쇠를 돌려준다고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경찰 관계자였던 사람들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경북 고령경찰서 순경이었던 전아무개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킬 때는 좋은 세상이 오고 나라를 위해 가입을 해야 된다고 꼬드겨서 가입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며 "당시 보도연맹원 10명 중 2명 정도가 실제 좌익 활동과 관계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도장 찍으라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라고 진술했다.
또 1950년에 충북경찰국 경무과에 근무했던 오아무개씨도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부분 비료를 준다는 말에 가입한, 좌우가 뭔지 분별하지도 못하는 무식자들이었다"며 "누가 좋다고 도장을 찍으라고 하면 무조건 찍던 사람들이었다"고 진술했다. 포항경찰서 경찰이었던 정아무개씨도 "책임자급을 제외하면 특별히 사상적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배급 주고 뭐하고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도장 찍고 이름 써줬다가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진술했다.
예컨대,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3만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는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5분의 1도 안 되었다. 그들은 도장을 찍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갈렸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도연맹원으로 이름을 올린 문서가 나중에 '살생부'가 됐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국민들을 보호해준다는 '나라'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위기의식에 찬 정권의 '예방학살'... 명령은 누가 했나
| ||
ⓒ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 | ||
진실위 |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전쟁이 터졌다. 가뜩이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이승만은 27일 오전 2시에 도망치듯 서울을 떠날 정도로 위기의식에 가득 차 있었다. 상황을 보자면, 위기의식을 느낄 만했다.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 황급히 정부가 빠져나간 자리에선 우익인사들에 대한 검거와 숙청, 인민위원회 건설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정부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전쟁이 터지는 그 순간부터 이승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사실, 보도연맹원들을 '진정한 우리 편'이라고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익에 한번 물들었던 이들이었으니, 바로 적으로 돌변해 자신들을 위협할 '잠재적인 내부의 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 잠재적인 적들이 무려 33만 명이었다! 그들이 뭉쳐서 바로 봉기라도 일으켜 인민군에 합세한다면? 이승만으로서는 온몸의 뼈가 후들거리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예방학살'이 펼쳐졌다. 경찰의 무선통신문은 정부가 조직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에 관여했음을 알려준다. 정부가 요시찰인을 모두 체포하고 형무소를 엄중 경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전쟁이 터진 그날 오후였다. 6월 30일에는 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구금하라는 명령을 전 경찰서에 발송한다. 치안국장명으로 발송된 이 명령서에 나타난 명령의 장본인은 당시의 치안국장 장석윤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과연 치안국장의 권한으로만 이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
보도연맹을 수속하고 처형하는 과정은 일사분란했다. 한강 이남지역에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예비검속은 주로 경찰 등이 명부를 근거로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됐으며, 소집 혹은 연행의 형식을 띠었다. 군 단위 경찰서 등에 구금하거나 주동자급은 형무소로 이송해 구금하는 등 사실상 거의 동일한 방식과 형태로 이뤄졌다. 이처럼 특정 지역만이 아닌 전국적 범위의 학살이었다는 점은 중앙정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조직적인 지휘명령계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공식 명령계통을 살펴보면 계엄군의 지휘권은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경찰의 지휘권은 내무장관인 조병옥에게, 형무소 수감자들에 대한 권한은 법무장관 이우익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권한의 최고 결정권자는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결국 그는 보도연맹 조직 결성 및 이후 학살에 이르는 전 과정의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역사적 책임은 물론 실질적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 포항에서 예비 검속자의 총살과 수장 작업을 지휘했던 전 해군제독 남상휘의 증언도 있다. "당시 군의 '처형' 명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발령해 육참총장과 해참총장을 거쳐 예하부대로, 경찰의 처형 명령은 조병옥 내무장관이 발령해 치안국장과 각 도경국장을 거쳐 예하 경찰서로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군경은 피검자들의 좌익 활동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거나 재판을 열 겨를이 없었다"고도 증언했다.
일단 죽여놓고 빨갱이였다고 하면 그만이었던 시대였다. 국가가 만든 조직에 가입하라고 해놓고, 가입하면 보호해준다고 했던 국가가, 덮어놓고 국민을 살해하는 '국가에 의한 희대의 살인극'이 펼쳐진 것이다. '계엄하 군사재판'이라는 최소한의 절차도 없었다. 즉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 북부 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남하했기 때문에 미처 보도연맹원을 구금하거나, 수감된 보도연맹원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달랐다. 충청북도에서만 7월 한 달 동안 약 3천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했다. 경남 하동·사천·진주 지역은 인민군 치하로 들어가게 되자, 군과 경찰은 후퇴하기 전에 연맹원 100여 명을 고성군 장구섬과 삼천포시 서금동 노산공원에서 집단학살했다.
산청에서는 후퇴하던 경찰이 80여 명을 총살했으며 남해군에서는 연맹원 시체 수십 구가 2, 3명씩 줄에 묶여 바다에 떠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거제도에서는 연맹원을 배에 태워 바다에 빠뜨린 다음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향해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창녕군에서는 200명의 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논바닥에서 50명의 연맹원이 학살당한 사건이 생존자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양산에서는 경남 지역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는 형편이다.
8월 초순부터 부산과 울산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양산으로 끌려와 집단총살을 당했는데, 당시의 현장인 사배골짜기와 동면 서락리 남락골짜기를 두고 사람들은 '피의 골짜기'라고 불렀다고 하니 말 다했다. 김해시 5개 지역에서도 750명의 연맹원이 집단총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전쟁 피난지인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사하구 구평동 골짜기에서 3일간에 걸쳐 수백 명의 연맹원들이 처형당했고, 해운대구 송정동에서도 상당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도 예비 검속자 200여 명이 구금되었다가 성산포경찰서에서 군에 인계된 후 실종되었다. 이처럼 전국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보도연맹 관련 혹은 좌익 혐의로 예비구금되어 실종·학살당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보도연맹사건은 전쟁 전후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때 대부분의 보도연맹원들은 군경의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이 같은 조치에 별다른 의심 없이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그들 자신이 특별한 죄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가를 믿었던 이들은 이내 죽임을 당했다.
전쟁 발발 후 안심한 채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희생당한 보도연맹 관련자들이나, 국군이 다시 들어왔을 때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다가 희생된 피학살자의 대부분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었다. 만약 자신이 즉결처형을 당할 정도의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면 이들은 충분히 피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전향을 한 자신이 대한민국에 의해 처벌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모두 체포되었으며 처형당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적극적인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이미 모두 피신하였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만 남았다.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보도연맹원은 부역·반역을 하기보다는 대부분 한국 정부에 충성을 다했다. 경상남도의 사례를 보면 자원입대와 혈서 지원자가 속출했고 궐기대회와 성금모금 등이 이어졌다.
1949년 근로인민당 재건을 위해 북한에서 파견되었다 전향해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을 맡은 정백(1899∼1950) 역시 개전 직후 한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다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총살당하기도 했다. 이는 정희택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6·25 전에 나는 정보검사로 서울의 보도연맹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6·25 1년 전쯤부터 전국적으로 조직돼 모두가 33만 명이나 됐고, 서울서만 1만6800여 명이었다. (6·25가 터지자) 일부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갔지만 1만6800명의 보도연맹원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을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군과 서울시민의 사기앙양을 위해 잔류를 권유하는 주한 미대사 무초(John J. Muccio)를 뿌리치고 국회 행정부에도 알리지 않은 채 6월 27일 새벽 제일 먼저 기차로 피난길에 오른 이승만과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학살' 유가족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한 박정희 정권
단지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의 운명은 그 자신의 비극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8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감시하였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하여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족들은 국가의 감시와 차별 속에서 사회적 소외감, 정치적 박탈감, 피해의식, 경제적 빈곤을 떠안고 숨죽인 채 살아야 했다.
이는 전쟁 후 남한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하는 친미극우 정권체제로 형성된 이유가 크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친미적 가치관은 극도의 궁핍과 혼란을 겪고 있던 1950년대 남한 사회에서 전통적 질서를 대신하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되었고, 이 같은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일상적 억압은 학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족들은 학살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할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1960년 4·19혁명 이후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되고 진상규명운동이 재개되었으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전의 조사내용 및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가족 대표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학살피해 유가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한을 삭혀야 했다. 정부의 입장은 이러했다.
"불순분자나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일부 전후세력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국정을 어렵게 할 요소가 될 수 있다. 또한 총력안보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 국군의 신뢰도를 해칠 우려가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희생자와 전 국민이 애석한 일이나 평화가 정착된 후 조치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한다"
결국 '회상이 금지된' 과거였기에, 학살은 은폐되었다. 살육의 기억은 부인되거나 망각되면서 국가의 기억에서 배제되었다. 당사자들이 이주하거나 자연사하면서 이제는 역사의 어둠 속으로 묻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네 조상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공동체의식'은 슬프게도 와해되어버렸다.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무방비 상태였던 사람들은 다시는 그 같은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 자신과 가족만이라도 지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옆의 사람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대신 군림하는 국가와 국가에 충직한 '국민'이라는 종적 관계가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말이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 명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수십만 명의 죽음을 50년간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광범한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이 땅에서 피해자도, 가해자도, 유가족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전체 구성원은 모두 사람일 수 없었다. 학살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우리가 다시는 이 땅에 학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승수 (reltih) 기자
[거짓말] 가미카제 대원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기쁘게 죽었다
국가와 천황폐하를 위해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적재한 특공기 제로센(零戰)을 타고 미군 함정에 몸통으로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정신은 우리 대일본제국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국가와 천황폐하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서슴지 않고 내놓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정신은 우리 대일본제국이 영원히 계승해야 할 사무라이 정신입니다.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1억 국민 모두가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옥쇄(玉碎)하겠다는 마음으로 국가와 천황폐화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폐하 만세!
[진실] 가미카제는 죽음을 강요당한 '살인'특공부대였다
일본의 보수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의 회장 및 주필인 와타나베 쓰네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제국대학 입학 3개월 만에 육군포병연대에 징집되어 이등병으로 군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2006년 2월 11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천황폐하 만세'라고 하며 기쁜 마음으로 돌진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들처럼 두려움에 젖어 눈을 내리뜨고 비틀거렸다. 어떤 사람은 일어설 수가 없어 억지로 비행기에 떠밀려 들어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미카제(神風)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을 한 일본 제국의 특공대이다. '가미'는 일본어로 '신(神)'을, '카제'는 '바람(風)'을 뜻하며,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가미카제는 1274년과 1281년 일본 정복을 위해 쳐들어온 몽고군의 배를 전복시켜 기적적으로 일본을 구했다는 태풍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13세기에 몽고군을 격퇴(?)한 태풍처럼, 당시 전쟁에서 코너에 몰린 일본을 구할 것이라 기대하고 지은 이름인 셈이다.
특공작전은 확실히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군 상층부는 특공대를 정규 군대로는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육해군에 명령을 내리는 최종 책임자가 천황이었기에, 자칫하면 천황이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대는 '동지 집단'이 자발적으로 편성한 것이어야 했고, 대원은 '자원'해서 기꺼이 참가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엄연히 현실은 달랐다.
일본군에서 특공대를 처음 창설했을 때 육해군병학교 출신의 직업군인 가운데 특공대에 지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당황한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오니시 해군 중장은 "지금부터 전 부대를 특공대로 지정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내가 목을 치겠다. 비판은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고 직접 훈시하고, 제201해군항공대부장 다마이 아사이치 중좌 등 그의 심복들로 하여금 해군병학교 출신 사관 몇 명에게 특공작전에 '지원'할 것을 사실상 '명령'하도록 시켰다.
필리핀 레이테만의 해군 특공작전을 인솔한 세키 유키오는 이런 식으로 동원된 것에 대해 "일본도 끝이다. 나 같은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려고 하다니…. 나라면 굳이 몸체로 부딪히는 육탄 공격을 하지 않고도 적군 모함의 비행갑판에 50번 폭탄을 명중시키고 돌아올 자신 있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전사자 4000여 명 중 3분의 2가 '학도병'... 10대 소년도
이렇게 직업군인들이 자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학도병이나 비행 예과 연습생들이 동원됐다. 사회학자 모리오카 기요미의 연구에 따르면 가미카제 특공대 전사자 3843명 중에서 학도병(장교 및 하사관 포함) 출신이 68.2%에 이를 정도였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하사관 전사자의 대부분이 미국과의 전쟁에 맞추어 모집 연령을 크게 낮추어 고등소학교 졸업생(14세)이나 구제중학교 3년생(15세), 4년생(16세) 재학생을 대상으로 선발한 10대 소년 비행병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에 부풀어 있는 미성년자에 불과했다.
소위 특공대원의 '지원'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부대원 모두가 집합한 가운데 애국심이 미덕이라든가 천황과 일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의무라고 하는 등의 일장 훈시를 들은 다음, 특공대원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식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주위의 사람들이 대부분 앞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자기만 혼자 머쓱하게 나서지 않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다.
때로는 이런 압박을 배제한다는 명목으로 눈을 가리게 한 다음에 지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수할 때에 군복 소리가 나서 많은 사람이 지원한 것을 알게 되면 주저하는 사람도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 용기를 내어 지원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에게도 '살아 있는 지옥'행 말고는 다른 선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원하지 않은 젊은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낙인 찍혀 특공대와 다름없이, 어차피 죽음이 예정돼 있는 남방 전선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또 학도병의 의사 같은 건 완전히 무시되기도 했다. 구로다 겐지로는 특공대에 지원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는데, 해군특공대 미타테 부대의 일원으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어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상관이 그의 부대원 전원이 지원했다고 보고해버린 것이다.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서 특공대에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메자와 가즈요는 1945년 4월 28일 특공대원으로 지원하여 18살에 전사한다. 그의 친동생 우메자와 쇼조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으로 지원하며, 남편을 잃고 여자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효도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특공대원에게 지급되는 연금이 가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예는 드물지 않다. 정부가 직무의 위험도에 따라 보수를 높게 책정하고 특공대원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경우에는 2계급 특진을 시켜줌으로써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소리 지르고, 어떤 사람은 엉엉 운다"... 처참한 출격 전야
| ||
ⓒ 윤성효 | ||
가미카제 |
특공대의 기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직업군인들은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학도병의 사소한 행동을 못마땅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대 전원에게도 가혹한 체벌을 했다.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학도병이 겪어야 했던 '생지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쓰치우라 해군항공대에 들어가고 나서는 얼굴 모양이 바뀔 정도로 구타당하는 '맹훈련'이 계속되었어요. 1945년 1월 2일 아침은 가네코라는 소위에게 20번이나 얼굴을 맞아 입안이 갈기갈기 찢어졌죠. 고대하던 새해 떡국도 못 먹고 피를 삼키며 지냈어요. 2월 14일은 같은 부대의 거의 전원이 외출했을 때 농가에서 주린 배를 채웠는데 그 벌로 추운 겨울밤에 7시간이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몽둥이로 개돼지처럼 엉덩이를 두들겨 맞았어요.
그리고 한 사람씩 사관실에 불려 들어갔는데 나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사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또 맞았어요. 얼굴을 걷어차고 넘어뜨리고 다시 일어서면 곤봉을 휘두르면서 '자백'을 강요하고…. 맞아서 나가떨어지는 순간 머리가 마루 끝에 부딪혀서 중태에 빠진 친구도 있었어요. 병원에 실려갔는데 결국 못 돌아왔습니다."
직업군인들은 대개 말단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지위가 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학도병들에게 심리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는 자신들과 비교할 때 학도병들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특권 계급 출신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들의 유서나 사진,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등에서는 마지막 출격을 앞두고 웃는 얼굴로 경례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은 가스가 다케오가 1995년 6월 21일에 오메자와 쇼조에게 쓴 편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쓰치우라 해군 항공기지에서 급사, 세탁, 청소 일을 담당했던 가스가는 출격 전야에 목격한 특공대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기러기 룸에서 송별회를 했다. 내일 출격하는 젊은 사관들은 데우지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거나 벌컥벅컥 마셨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관들은 어두운 막장 아래의 전등을 칼로 쳐서 떨어뜨리고, 양손에 치켜든 의자로 창유리를 와장창 차례로 부쉈다. 새하얀 테이블보도 찢어버렸다. 군가는 욕하는 소리처럼 서로 뒤섞였다.
등화관제가 실시되는 군대에서 여기 기러기 룸의 술자리는 '별세계'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엉엉 운다. 오늘 밤이 마지막인 이 목숨. 부모, 형제자매의 얼굴, 지인들의 얼굴들. 그리고 연인의 미소 띤 얼굴, 약혼자와의 슬픈 이별. 주마등같이 돌고 도는 상념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내일은 마침내 출격. 일본 제국을 위해, 천황폐하를 위해서라고, 젊고 고귀한 청춘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지만, 흐트러진 테이블에 엎드린 사람, 유서 쓰는 사람, 팔짱 끼고 명상하는 사람, 엉망이 된 송별회장을 떠나는 사람, 몇 시간이나 묵묵히 뭔가를 쓰는 사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꽃병을 부수는 사람. 이토록 처참한 출격 전야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학도병의 심경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른 아침 비행장으로 달려가 지난밤에 물이 아닌 찬 술을 나누어 마신(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경우, 술잔에 술 대신에 물을 따라 나누어 마시는 풍속이 있다) 용사는 히노마루(일장기) 머리띠를 매고 용감하게 높은 폭음을 내며 출격! 나는… 영령이 되신 분들의 일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훈련 뒤에 매일같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기합이 계속되었다.
적진 명중률은 약 10분의 1... 군사적 효과는 미미
특공대원은 죽음을 전제하는 특공 임무를 떠맡은 시점부터 이미 이 세계에는 없는 존재가 된다. 한번 출격하면 설사 적을 발견하지 못했어도 살아서 돌아오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일례로 와세대대학 졸업생 특공대원 하나는 몇 번이나 적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환했는데 9번째 돌아왔을 때는 사살되었다.
많은 대원들은 적함을 발견했어도 돌입하지 못하고 가까운 수면에 착륙하려고 시도했다. 나아가 일부러 기지 사령부 건물에 간신히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저공비행한 다음 날아가는 대원도 있었다고 한다.
특공작전의 장비는 비행기와 어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어디에도 탑승원을 위한 구명장치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로센(零戰)이라 불리는 단발엔진 탑재 함상전투기는 고도 2만 피트(약 6100미터)를 최고시속 372마일(약 600킬로미터)로 비행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고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폭탄의 무게와 가속도의 관계로 일단 급강하하기 시작한 비행기를 제어하는 것은 극히 어렵고 더구나 기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비행기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어뢰로도 공격했다. 잠수 어뢰 '가이텐(回天)'은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제1형은 길이 14.75미터, 직경 1미터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뢰는 아니었지만 탑승원이 몸체로 적의 함대에 부딪혀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비장한 이미지를 담아 '인간어뢰'라고 불렀다.
모두 세 종류가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 두 종류는 2인승이었다. 이 인간어뢰는 총 400기가 제조되었다. 탑승원은 무게 9톤의 어뢰 중앙에 쪼그려 앉아 1550킬로그램의 탄두를 가지고 30노트로 잠행했다. 어뢰는 모함에 장착되어 있고 미군의 군함 근처에서 수중으로 투하되었다. 당초의 어뢰에는 탑승원을 위한 탈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제조된 것에는 이러한 장치가 없어졌다.
특공작전은 초기에 미국인을 공포에 빠뜨렸지만 군사작전으로서의 효과는 미미했다. 작전 초기에는 반짝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전투가 거듭되면서 조종사의 기량이나 병기의 성능은 현저히 떨어지고 적의 방어 기술은 향상되었다. 적진에 위협을 가해 명중하는 비율은 11.6%, 바다에 추락하는 비율은 5.7% 수준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은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는 비행기나 어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지상에서 이륙조차 할 수 없는 비행기나 이륙한다고 해도 기계 고장으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는 비행기가 적지 않았다. 잠수 어뢰도 자주 고장을 일으켜 탑승원들은 목표로 하는 군함에 격돌할 수 없었거나 어뢰에 갇힌 채 해저에 침몰해 질식사하기도 했다.
"뭐가 애국이고 뭐가 조국이란 말인가"...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죽으라면 죽으리라> 등의 책을 통해 가미카제 특공대의 진실을 생생하게 파헤친 오누키 에미코의 책 <죽으라면 죽으리라>에는 다음과 같은 학도병과 특공대원의 수기가 생생하게 실려 있다.
뭐가 애국이고 뭐가 조국이란 말인가?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개념들 때문에 수백만의 생명을 해치고, 수천만, 수억의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빼앗는 일을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 사사키 하치로,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 징집, 향년 22살 전사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징집, 향년 24살 전사
짧은 생명이지만 추억의 순간은 많다. 많은 것을 누려온 나로서는 이 세상과 이별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되돌아볼 것 없이 나는 적진에 돌격해야 한다.
- 하야시 이치조,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징집, 향년 23살 전사
이들이 비행기나 잠수함에 몸을 실어 자살 공격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도대체 이들의 모습 어디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기쁜 마음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가? 전쟁보다 더 인간을 집단적으로 악마에 가깝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들의 애처로운 죽음조차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무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이들의 이익을 위해 미디어를 통해 미화되고 왜곡된다. 2001년 2월 9일 총리 취임을 앞두고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가고시마의 치란특공평화회관을 방문하여 그곳에 전시된 한 소년 비행병의 편지 앞에 양손을 짚고 한동안 소리 없이 흐느끼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총리 취임 즈음해서는 "총리대신의 배명을 받은 현재도 특공대 청년의 심경에 비하면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기분으로 난국에 대처해나갈 것"이라고 지껄인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천황 폐하 만세'라고 하며 기쁜 마음으로 돌진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들처럼 두려움에 젖어 눈을 내리뜨고 비틀거렸다. 어떤 사람은 일어설 수가 없어 억지로 비행기에 떠밀려 들어갔다."
앞서 언급했던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 회장의 이 발언은 바로 고이즈미처럼 특공대를 자신의 이익에 맞춰 미화하고 왜곡하려는 우익분자들의 시도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공대원들에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야스쿠니신사에 집착하는 고이즈미를 "역사도 철학도 모르고 전혀 교양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비난한 것이다.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나이원의 '중의양생' _03 (0) | 2012.02.21 |
---|---|
후나이원의 '중의양생' _02 (0) | 2012.02.15 |
후나이원의 '중의양생' _01 (0) | 2012.02.12 |
한의사 김승호의 약초 이야기_08 (0) | 2012.01.28 |
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_07 (0) | 2012.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