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구례 산수유 꽃대궐

醉月 2010. 5. 6. 08:56

노랑을 찍어 새봄을 색칠하다

구례 산수유 꽃대궐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개울가에 핀 산수유꽃이 봄의 전령처럼 당도했지만, 뒤편의 지리산 자락에는 희끗한 잔설이 남아있고, 천변에는 지난 가을의 억새가 아직 성성하다.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다.
‘봄의 색깔’이라면 아무래도 노란색이지 싶습니다. 봄의 노란색에서는 솜털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살포시 쥘 때와 같은 촉감이 느껴집니다. 지리산 자락 아래 구례 땅은 그런 노란빛으로 가득합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일대의 마을에는 온통 산수유꽃들이 만개해 봄의 노란빛을 화사하게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즈음 산수유꽃으로 사태가 난 구례의 마을에 들어선다면 가볍게 쥔 손바닥에 전해지는 병아리의 심장이 가늘게 팔딱이는 듯한 느낌이 전해질 겁니다.

봄 여행을 떠나자면 전남 구례 땅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지리산과 섬진강을 넉넉하게 품고 있는 구례의 너른 들에는 지금 발목까지 올라온 보리밭과 밀밭의 초록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구례읍에서 지리산 자락에 바짝 다가붙어 산동면 일대로 접어드는 길에는 온통 노란 산수유꽃으로 사태가 났습니다. 산동면 일대에서는 굳이 산수유마을로 이름난 상위마을까지 찾아들지 않아도 됩니다. 지리산 다름재와 숙성치 아래 달전마을에도, 견두산 아래 계척마을과 현천마을에도 죄다 산수유꽃이 꽃대궐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을의 돌담길 안쪽에 드문드문 순백의 꽃망울을 틔운 매화도 노란 산수유꽃 무더기 속에서 더 찬란합니다.

이즈음 구례를 찾아간다면 지리산 자락에 깊이 들어선 이름난 절집들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구례의 화엄사. 어찌나 꽃잎이 붉은지 검은빛이 돈다 해서 ‘흑매’란 이름이 붙은 화엄사 각황전 앞에 피어나는 매화는 그야말로 ‘봄의 절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그득히 담긴 천은제를 끼고 있는 천은사의 맑은 기운도 못잖습니다. 여기에다 피아골 계곡의 연곡사를 보탭니다. 피아골은 단풍이 붉게 물드는 가을이 제철이라지만 연곡사는 오히려 이른 봄의 정취가 더 낫습니다. 연곡사의 산문을 지나 절집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일렬횡대로 둘러친 매화며 산수유들이 온통 꽃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비누조각을 다루듯 ‘가릉빈가’(전설속의 새)의 모습을 선명하게 새겨낸 부도탑을 둘러보는 맛도 있습니다.

구례를 찾아간 날은 마침 지리산에 폭설이 쏟아진 이튿날이었습니다. 남원 쪽에서 지리산을 넘는 861번 도로는 폭설로 통제됐지만, 지리의 남쪽사면인 구례 쪽에서 재를 지나 성삼재까지는 오를 수 있었습니다. 봄을 만나러 구례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지리산의 아랫자락을 둘러가는 길보다는 지리산의 중심을 관통하는 이쪽 길을 택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 길로 들어선다면 겨울과 봄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습니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지리산의 겨울과 그 겨울에서 봄으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을 지나서 남도 땅의 봄의 정취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요.
 

겨울이 남긴 하얀 캔버스…꽃들아, 맘껏 그려봐 !

 구례 산수유 꽃대궐


구례는 늦도록 겨울이 머무는 지리산을 끼고 있어 봄과 겨울이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지난 겨울의 폭설과 잦은 봄비로 이즈음에도 우렁차게 쏟아지고 있는 수락폭포의 푸른 이끼 위로 때늦은 눈이 내려 덮였다.

연곡사 산문 옆의 텃밭에서 주민들이 파릇파릇 돋아난 산나물을 캐고 있다.
# 겨울에서 봄으로…계절을 관통하는 길을 넘다.

봄에 가장 먼저 환한 꽃불을 달아매는 곳은 전남 구례다. 첫 개화시기를 따지자면 광양의 매화가 산수유에 앞서지만, 일제히 ‘꽃폭죽’을 터뜨려 흐드러지는 풍경은 매화보다 산수유가 한발 더 빠르다. 때늦은 폭설에다 꽃샘추위까지 겹쳐 당초 평년보다 이를 것이라던 꽃소식이 늦어지면서 광양의 매화는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구례의 산수유는 이번 주말쯤이면 절정으로 다가서게 된다.

산자락 마을마다 노란 꽃불을 켠 구례의 산수유를 만나려면 남원에서 지리산 자락을 둘러 돌아가는 19번 국도를 택하는 것보다는 남원의 인월면에서 지리산의 복판을 관통해 넘어가는 861번 지방도로를 택하는 편이 더 낫겠다. 달궁계곡과 심원계곡을 따라 지리산을 넘는 그 길로 들어서면 아직 물러가지 않은 지리산의 겨울풍경을 거쳐 구례의 봄 정취로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지리산 도로는 공간뿐만 아니라 겨울에서 봄으로 시간을 관통하는 길이 된다.

지리산 관통도로의 정상인 성삼재를 넘어서 만나는 지리의 남쪽 자락에는 거짓말처럼 푸릇푸릇한 봄이 찾아와있다. 시암재 휴게소에서 발아래로 멀리 내려다보는 구례의 들판에는 진초록 보리밭과 밀밭이 가득 펼쳐져 있다. 아릿아릿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구례의 들판과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시암재는 가히 봄의 전망대라 할만하다. 시암재를 내려서는 길도 온통 짙푸른 소나무 숲들이 가득해 초록으로 샤워를 하는 듯하다.

# 구례의 마을을 온통 뒤덮은 노란 산수유꽃

산수유를 둘러친 마을은 경북 봉화에도, 의성에도, 경기 이천에도 있지만 그중 구례의 산수유를 더 쳐주는 것은 다른 곳들에 비해 나무가 많기도 하거니와 가장 먼저 꽃을 틔우기 때문이리라. 사실 산수유 꽃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자면 꽃송이가 자디잔 것이 그다지 볼품이 없다. 여름철에 피는 꽃이었다면 어디 눈길 한번 제대로 받았을까. 그러나 이른 봄, 무채색의 들판과 마을에 붓질을 하듯 노란빛으로 화사하게 피어나니 가히 ‘봄의 꽃’이라 할만하다.

구례에서 산수유를 가장 운치 있게 볼 수 있는 곳이 해마다 축제가 열리는 산동면 상위마을 일대다. 흔히 구례의 ‘산수유마을’이라면 상위마을을 일컫는 것이지만 구례의 산수유가 축제로 북적이는 상위마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락폭포 쪽의 달전마을에도, 견두산 아래 계척마을과 현천마을에도 온통 노란 산수유꽃들이 꽃담을 두르고 있다. 지리산 자락을 타고내린 물이 산동정수장에 모였다가 다시 흘러내리는 대평리 일대는 여울을 이뤄내리는 물과 널찍한 암반이 꽃과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물가로 내려서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마에 흰 눈을 두른 채 우뚝 서 있는 만복대의 위용도 올려다볼 수 있다. 상위마을의 주민들도 “마을이 예쁜 걸로 보자면 그쪽이 더 낫다”고 할 정도다.

산동면사무소로 되돌아 내려와 19번 국도 건너편 쪽의 현천마을이나 계척마을의 산수유도 못지않다. 현천마을은 마을입구에 자그마한 저수지가 있어 저수지를 둘러친 산수유꽃이 수면에 반영되는 운치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또 마을 곳곳에 대숲이 울창해 선명한 초록과 노랑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놓은 듯한 색채감도 느낄 수 있다. 여기다가 간간이 지난가을 수확하지 않은 산수유 붉은 열매까지 남아 색을 더한다.

#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까지…. 절집의 정취.

구례를 찾았다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러가는 곳이 바로 화엄사다. 구례에는 지리산 자락의 화엄사와 천은사, 연곡사, 문수사 등 이름난 절집들이 즐비하다. 화엄사는 장중한 절집의 분위기에다 단청이 지워져 말갛게 세수한 듯한 각황전과 쌍사자석등, 그리고 절집 뒤편의 작은 암자인 구층암의 정취만으로도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다. 그러나 봄날의 화엄사에서는 뭐니뭐니해도 각황전 옆의 ‘흑매(黑梅)’를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나 꽃잎이 붉은지 검은빛이 감돈다 해서 흑매란 이름이 붙었다. 척척 늘어뜨린 가지마다 붉은 매화가 피어나면 어찌나 색감과 향기가 요염한지 자칫 수행의 마음까지 흔들릴까 걱정이 앞설 정도다. 그러나 화엄사의 흑매는 광양의 매화가 분분히 꽃잎을 흩날려갈 무렵에야 피어나니 때가 아직 이르다. 아마 내달 초순쯤이라면 흑매와 함께 구층암가는 길의 화엄사 올벚나무도 함께 만나볼 수 있겠다.

화엄사의 흑매가 아직 이르니 대신 연곡사를 찾아가보면 어떨까. 매화가 피지 않았더라도 화엄사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그러나 피아골 계곡의 연곡사는 단풍이 물드는 가을철을 제외하고는 고즈넉한 곳이다. 피아골 계곡에는 활엽수들이 많아 아직 새잎이 돋지 않은 지금은 을씨년스럽지만, 연곡사 경내에는 산수유와 매화가 한껏 피어올랐다. 산문을 하나하나 들어설 때마다 일렬횡대로 심어진 매화며 산수유나무들이 꽃을 틔워 꽃담을 이루고 있다.

연곡사에서는 봐야 할 것은 단연 부도다. 절집 뒤편으로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가면 동부도와 북부도, 서부도를 만날 수 있다. 화강석 기단과 몸돌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팔부중상과 불교의 낙원에서 산다는 극락조 가릉빈가가 정교하게 새겨진 모습을 보면 ‘장엄’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어디 이곳뿐일까. 지리산 관통도로 아래 천은사도 이즈음 절집이 끼고 있는 저수지 천은제에 물이 그득한데다 얼음이 풀리면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어 그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찾아갈 보람이 있다. 구례읍내에서 섬진강 너머 올려다보이는 오산 자락 아래 사성암도 산 정상의 바위에 기대고 선 절집의 아슬아슬한 모습뿐만 아니라 섬진강과 구례의 들판을 내다보는 맛도 빼어난 곳이다.

구례=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 munhwa.com

가는길

수도권에서 가자면 호남고속도로까지 가서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완주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를 따라가면 남원을 지나 구례로 가닿는다. 지리산 도로를 넘어 구례에 가닿으려면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타고 함양분기점에서 나와 88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지리산나들목으로 나와 남원시 인월면을 거쳐 861번 지방도로에 올라야 한다. 지리산을 넘는 이 도로는 가파른데다 굴곡이 많아 운전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길이 구불구불해 동승자가 멀미를 할 수도 있으므로 이에 대비해야 한다.

묵을 곳 & 먹을 것

구례는 일찌감치 관광지로 개발된 만큼 다양한 숙소들이 많다. 화엄사입구에는 한화리조트 지리산(061-782-2171)을 비롯해 지리산 스위스관광호텔(061-783-0156) 등의 대규모 숙소들도 있고, 마산면 일대에도 운치 있는 한옥펜션인 ‘쌍산재’(011-635-7115)와 ‘곡전재’(019-625-8444) 등이 있다. 봄철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숙소찾기가 쉽지 않아 미리 예약을 하고 떠나야 한다.

구례읍내 ‘영실봉식당’(061-782-2833)은 얼큰하게 조려낸 갈치조림이 일품이다. 섬진강변 신원리의 천수식당(061-782-7738)이나 전원가든(061-782-4733) 등에서는 참게탕 등을 맛볼 수 있다. 가벼운 식사로는 화엄사 입구의 우리밀식당(061-781-5700)의 팥칼국수를 추천한다.
 

“봄마다 맑은 꽃 피우니 언제나 나보다야 젊지”

수령 1200년 산수유나무 평생 돌봐온 유재문 옹

전남 구례군 산동면 달전마을. 이곳에는 1200년을 헤아리는 수령의 ‘할아버지 산수유나무’가 있다. 공식적으로 우리 땅에서 가장 오랜 산수유나무는 1000년 전 중국에서 씨앗을 가져다 심었다는 계척마을의 ‘산수유 시목(始木)’이지만, 최근 조사결과 달전마을의 산수유가 그보다 더 오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구례 사람들은 달전마을의 산수유나무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척마을의 시목을 ‘할머니’라 부른다. 산수유나무에 암수 구별이 있을 리 없지만, 두 나무 중 어느 하나를 첫 나무로 정할 수 없어 궁여지책 끝에 나온 묘안이다.

평생 한번도 고향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달전마을의 유재문(85·사진)씨는 평생 ‘할아버지 산수유나무’를 곁에 두고 지켜봐 왔다. 나무는 3대에 걸쳐 한약방을 하던 집안에서 애지중지하며 길러왔던 것이라고 했다. 산수유 열매가 한약방에서 지어주는 한약재로 쓰였으니 마을주민들도 이 나무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나무였던 셈이었으니 왜 안 그랬을까.

“나무가 쬐깐해(작아) 보이는데, 내가 소학교 다닐 때도 저만했어. 산수유는 꺾꽂이도, 휘묻이도 안되니 천상 씨를 심어 키워야 하는데, 씨를 3년을 묵혔다가 심어야 겨우 싹이 난다네.”

유씨는 봄마다 화사하게 피어나 마을을 환히 밝히는 산수유나무가 ‘마을의 보배’라고 했다. 지금이야 산수유 열매가격이 인건비에도 못 미치는데다 중국산까지 몰려들어와 아예 수확을 하지 않는 곳들이 허다하지만, 한때 시세가 좋았던 시절에는 산수유나무 몇 그루면 아이들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젊은 시절을 추억하던 유씨는 곧 씨름판을 누비던 시절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183㎝의 키에 지금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유씨는 “젊은 시절 씨름판에서 타온 송아지를 다 합치면 22마리나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타온 송아지는 가계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았던 것이, 꽹과리를 앞세워 송아지를 끌고 돌아와서는 잔치를 벌여 나중에 셈해보면 늘 손해가 났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산수유나무를 올려다보던 유씨는 “나이 들어가면서 나는 다 옛일로 살아가는데, 저 나무는 여전히 봄이면 말간 꽃을 피워내니 내보다 훨씬 더 낫다”며 산수유나무 가지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