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화 속 봄을 찾아 떠나는 남도기행

醉月 2010. 5. 8. 07:29

그림 같은 풍경… 화가들 시선이 머문 자리에 서다

한국화 속 봄을 찾아 떠나는 남도기행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왼쪽은 우초 박병락씨가 화폭에 담아낸 진도의 최남단 동령개 앞에 떠있는 목섬의 모습. 오른쪽은 박씨가 그림을 그렸을 법한 장소를 찾아가 담은 사진이다. 박씨는 봄날 동령개의 바위에 앉아서 밀물과 썰물에 따라 길이 열리고 닫히는 목섬을 바라보는 정취가 그만이라고 했다.

왼쪽은 은산 강금복씨의 작품 ‘노적봉의 봄’. 오른쪽은 그림을 그린 자리에서 본 모습.
# 운림산방, 남도 풍경을 가질 수 있는 곳

진도에 들면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명소가 바로 ‘운림산방’이다. 소치 허련에서 시작해 미산 허형,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남종화 3대의 뿌리가 바로 이곳 운림산방이다. 남종화란 이른바 직업적인 전문 화가들의 장식적인 그림인 북종화와 대별되는 화풍으로 인격이 높고 학문이 뛰어난 사대부가 수묵과 담채로 그려낸 단순하되 온화한 그림을 뜻한다. 한마디로 ‘재주’보다는 ‘정신’이 앞서는 화풍이다.

운림산방은 바로 그런 정신이 담겨있는 곳이다. 운림산방에 들면 그러나 회화사적인 의미나 장소성보다는 풍경이 그려내는 단정하면서도 격조 있는 아름다움에 빠지고 만다. 첨찰산 아래 자리잡은 운림산방은 그 모습만으로도 수묵과 담채로 그려낸 듯 정갈하고 은은하다. 산방 앞에 펼쳐진 연못의 정취가 그렇고, 연못 가운데 심어진 배롱나무와 푸른 노송의 기운이 그렇고, 동백의 붉은 꽃이 또 그렇다. 그 정신이 드리우고 있는 향기는 다른 어떤 계절보다 찬 겨울을 이기고 새 잎이 돋는 봄날이 가장 진하다.

운림산방 옆에는 현대식 건물에 들어선 ‘남도예술은행’이 있다. 말이 ‘은행’이지 거래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미술품이다. 전라남도가 남도 예술의 맥을 잇기 위해 전업 미술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은행은 남도 전업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한 뒤, 매주 토요일 그 작품을 일반인에게 싸게 경매로 내놓는다. 일단 은행이 심사를 통해 검증된 작가들의 작품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이를 다시 일반인에게 30~70%까지 할인해 경매에 내놓는다.

일반적인 그림 경매야 높은 가격 탓에 웬만한 안목으로는 언감생심이지만, 이곳에서 거래되는 그림 값은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 싸다. 지난 2009년 남도예술은행을 통해 거래된 그림은 모두 1278점으로 금액은 2억6733만여원. 그림 1점당 가격으로 셈해보자면 20만9000원이다. 남도 땅을 여행하면서 진도의 운림산방에 들러 경매에 참가해 마음을 빼앗는 남도의 수묵화 한 점을 사다 걸어놓는 호사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셈이다.

# ‘노적봉의 봄’, 그림 속 봄 정취를 따라…목포

진도로 향하는 길. 그 길에서 남도예술은행이 선정한 남도 작가들의 화폭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택했다. 구태여 그림 속의 공간을 찾아간 것은 화가들이 아름다움을 보는 시선을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목포와 해남을 거쳐 진도로 향하는 길. 가장 먼저 찾아간 그림 속의 장소는 은산(隱山) 강금복씨의 그림 ‘노적봉의 봄’이다. 그림에서는 우뚝 선 노적봉의 우람한 바위 주위로 노랗고 붉은 봄꽃들이 물들어있다. 멀리 봉우리 위쪽으로 까치 두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다.

목포의 노적봉은 유달산의 지맥이 바다로 내려가다가 솟구친 해발 60m의 암봉. 이순신 장군이 암석봉우리를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해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인 듯 보이도록 했다 해서 ‘노적’이란 이름이 붙었다. 홀로 솟아난 노적봉도 근사하지만, 노적봉 앞에 서서 유달산 쪽을 올려다보는 맛이 그만이다. 특히 개나리가 만개할 무렵의 유달산은 온통 노란 꽃치마를 두른 듯 화려하게 채색된다. 아른아른 아지랑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목포 앞바다의 풍경도 봄의 정취를 더해준다. 봄날의 목포로 여행을 떠난다면 무엇 하나 바쁠 것 없이 나른한 여정이 될 듯하다. 노란 개나리꽃과 유달산, 아릿한 바다, 그리고 근대의 기억이 잠긴 도시를 거니는 느릿느릿한 봄 여행은 생각만으로도 매혹적이다. 4월2일부터 4일까지 유달산에서는 꽃축제가 열린다. 유달산의 꽃축제는 무더기로 꽃을 심어놓은 여느 꽃축제와는 다르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유달산의 꽃은 마치 봄날의 오후처럼 나른하다.

# 첩첩이 겹친 기와지붕의 유려함…해남 대흥사

진도로 건너가려면 해남 땅을 통과해야 한다. 해남이야말로 봄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곳. 보리와 마늘, 대파들은 물론이거니와 빈 논의 둑마다 초록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중부지방에는 때늦은 눈발까지 분분했지만, 이곳 해남 땅은 진즉 봄의 한복판에 들어와있다.

해남의 최고 명소라면 단연 대흥사. 남도예술은행의 경매에 올라온 작품 중에 녹전(錄佃) 김행복씨의 ‘대흥사 입교’가 있다. 지금 해남 대흥사는 골마다 물이 넘친다. 대흥사로 드는 길고 유려한 숲길의 나무들은 이제 막 돋기 시작하는 가지와 새순들로 수런거리고, 물소리는 계곡을 따라가며 청아하게 울린다. 스님이 바삐 지나가는 그림 속의 다리는 유선여관을 지나고, 부도탑을 지나고, 산문을 지나면서 하나씩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며 지난다는 9개의 다리 중 가장 마지막에 놓여있다. 대흥사로 드는 길에서 가장 운치 있는 돌다리로 꼽히는 다리는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꼭 이 다리가 아니더라도 어떨까. 산문으로 드는 길의 해탈교를 비롯한 나머지 8개의 다리도 정취는 못지않다.

대흥사는 지금 곳곳에서 불사중이어서 다소 소란스럽다. 개울까지 포클레인이 들어가 우르릉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소란스러움에도 아랑곳없이 절집 곳곳에는 무심한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또 지고 있다. 꽃송이째 툭툭 떨어져 초록의 풀밭을 붉게 물들이는 붉은 동백의 노란 꽃술이 선명하다.

#눈 밝은 화가들이 찾아낸 풍경…진도 동령개

진도에 사는 화가들은 어디를 가장 빼어난 곳으로 꼽을까. 아름다움에 눈 밝은 이들이 꼽는 진도의 명소는 과연 어딜까. 우초(愚草) 박병락씨는 작품 ‘동령개’를 통해 작은 포구인 동령개를 첫손에 꼽았다. 간혹 외지에서 지인들이 진도를 찾아오면 그가 가장 먼저 안내하는 곳이 바로 동령개라고 했다. 진도에서 남쪽으로 불쑥 나와있는 바위해안인 동령개. 그 앞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작은 섬인 목섬이 떠있다. 동령개와 목섬까지는 썰물이면 자갈과 바위가 깔린 길이 이어져 있다가, 밀물때면 길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동령개는 사실 한눈에 감탄사가 터지는 비경이라 하기에는 모자란다. 깎아지른 기암괴석의 벼랑이 있는 것도,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이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동령개의 풍광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곳을 찾아가는 길의 상록활엽수 오솔길의 정취가 합해지기 때문이다. 진도에 내려와 터를 내린 몇몇 화가들이 그 풍광을 발견해낸 뒤 진도군은 굴포에서 동령개로 이어지는 해안 오솔길에다 ‘미르길’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미르란 용을 뜻하는 순 우리말. 길이 마치 용처럼 몸을 뒤틀 듯 바다를 끼고 구불거리며 오르내린다 해서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 나른한 봄볕이 따스한 날, 그 오솔길을 함께 걷던 박씨는 “봄이 다 가기 전에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와야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포·해남·진도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로 목포까지 가서 영산호 하구둑을 지나 영암방조제와 금호방조제를 건너면 진도대교 입구에 이른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서광주나들목이나 그 직전의 광산나들목에서 나와 나주와 영암을 거쳐 독천 방면으로 가면 된다.
해남 화원까지 가서 18번 도로를 타고 문내쪽으로 가면 진도대교를 만난다.
진도에는 운림산방이나 남도석성 등의 관광지 표지판이 잘 돼있어 지도 없이도 찾아갈 수 있다.

묵을 곳 & 먹을 것

진도읍의 모텔 중에서 가장 시설이 깔끔한 곳은 군청 앞의 남강모텔(061-544-6300)과 대평모텔(061-542-7000)이 꼽힌다. 의신면 일대에선 성은장(061-543-7717)이나 진도마린빌리지(061-544-7999), 그리고 낙조가 아름다운 세방마을에는 전망대 인근에 찻집을 겸한 펜션 해미랑(061-543-0034)이 추천할 만하다. 진도읍내에서는 사랑방식당(061-544-4117)이 알아주는 맛집이다. 간제미(가오리)회무침이 대표적인 메뉴인데, 회무침도 좋지만 간제미 내장에다 보리싹을 넣고 끓여내는 간제미탕의 칼칼한 맛이 그만이다.

 

붓끝을 나침반 삼아… 畵幅 속으로 수묵 향기 그윽한 진도 

實운림산방

畵운림산방
진도에 갑니다. 남도 출신 화가들의 붓끝을 지도 삼아 화폭 속으로 들어갑니다. 광양의 매화마을과 목포의 유달산, 그리고 해남의 대흥사를 지나서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는 진도 땅으로 갑니다. 한때는 쓸쓸한 유배의 땅이었던 곳. 그 유배의 서릿발 같은 정신이 남아있는 곳. 그 정신이 한자락 소리가 되고, 한 폭의 그림이 된 곳. 그런 진도에 갑니다.

진도의 첨찰산 아래에는 소치 허련이 말년에 터를 잡고 기거했던 운림산방이 있습니다. 소치 허련에서 미산 허형,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남종화 3대의 맥이 이어져온 곳입니다. 연못을 앞에 두고 선혈처럼 붉은 동백꽃과 반들반들한 수피의 배롱나무, 그리고 세월의 깊이를 증거하는 노송들이 둘러쳐진 운림산방의 정원은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입니다. 시서화(詩書畵)로 당대를 휘어잡던 눈 밝은 화가들이 가꿔놓은 곳이니 그윽하고 유현한 그 맛이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 운림산방 곁에는 은행이 하나 있습니다. 통장도, 돈도, 창구도 없는 은행에는 남도 출신 화가들의 시서화가 주르르 내걸려 있습니다. 이름하여 ‘남도예술은행’입니다. 운림산방의 그윽한 예술적 향취를 이어가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토요일마다 남도 출신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경매가 이뤄집니다. 미술품 경매라지만 주머니 두둑한 호사가들이나 화랑들이 치고받는 그런 경매는 아닙니다. 우연찮게 들른 여행자들도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서 가져갈 수 있는, 그런 문턱 낮은 경매입니다.

마침 남도예술은행은 이번 주말부터 남도의 봄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경매에 부칠 예정이랍니다. 남도의 부드러운 곡선과 화사한 꽃망울을 담은 그림 속의 세상은 봄의 정서로 가득합니다. 그 그림 속의 봄 풍경을 하나하나 찾아서 화폭 속으로 걸어들어가보았습니다.

그림을 아름다운 남도 봄 풍경의 길잡이로 세운 것은 눈 밝은 화가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화가들의 화폭 속에 옮긴 남도의 봄 풍경이란 소박하고 고즈넉하고 조용한 것들이었습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화려한 풍경을 좇는 여행자의 처지에서는 밋밋하기조차 한 것이었지만, 찾아가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울긋불긋한 꽃대궐의 화려함보다는 긴 언덕과 부드러운 구릉 그리고 사람 사는 모습이 봄의 정취에 더 다가가 있음을….

올해는 봄이 올라오는 속도가 유독 더딥니다. 남도 땅에 일찌감치 매화며 산수유꽃을 틔워올린 봄기운이 아직껏 남쪽에서만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봄을 만나러 남도 땅으로 가는 여정의 끝을 진도로 잡아보면 어떻겠습니까. 곳곳에서 새로 싹트는 남도의 봄 풍경을 돌아보고 그 풍경을 화폭으로 옮겨낸 그림 한 점 사다 내 집에 걸어놓는다면, 때아닌 한파에다 분분한 눈발에도 마음은 늘 봄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