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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영향을 미친 ‘10대 사건’은

醉月 2009. 8. 24. 08:38

전쟁과 독재에 울고 혁명·올림픽에 웃다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영향을 미친 ‘10대 사건’은?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눈물과 환호’였다.

잔혹한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기쁨도 잠시 국토는 강대국들의 이전투구 장으로 변했다.

민족적 염원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분단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한국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상혼이 채 가시기 전에 군사정변으로 독재 정권이 출현하면서 국민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민주화의 봄’이 오는가 싶더니 현직 대통령이 심복에게 피살된 틈새를 놓치지 않고 또다시 군사 정권이 등장했다.

군사 정권은 민주 인사들을 탄압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급기야 1980년 광주에서는 신군부 세력이 동원한 계엄군에 의해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6월 민주항쟁으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88 서울올림픽은 새로운 번영을 예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나라의 근간이 흔들렸다. 기업들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넘쳐났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깡통’이 된 국고를 채우기 위해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나섰다.

집안 곳곳에 꼭꼭 숨겨놓았던 금붙이를 들고 나와 금 모으기에 나서면서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렇듯 우리 현대사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국민을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하고 때론 환호성을 지르게 한 일도 있었다.

각 분야 전문가 1천명이 뽑은 ‘광복 후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0대 사건’에는 무엇이 있을까.

   


▒ 1위 : 한국전쟁(1950년)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했다. 북한군은 보병 7개 사단, 기갑 1개 사단, 여러 개의 특수 독립연대 등 총 병력 11만1천여 명을 동원했다. 전차와 자주포도 2백80여 대에 이르렀다.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국군은 대구까지 밀려났다.

국제 사회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의했다.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미국·영국·터키 등 16개국이 군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다.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해 10월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북측 지역의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되고, 남한 정부는 1951년 1월4일 또다시 서울에서 철수하게 된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에 조인하면서 사실상 3년여에 걸친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유엔군과 한국군 18만명이 전사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90만명 등 약 1백4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도 엄청났다. 전쟁 기간 중 남북한을 통틀어 10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

행정 관료들이 한국 전쟁을 1순위로 꼽은 비율이 가장 높았다(64%). 교수(60%), 언론인(57%), 법조인(48%), 정치인(46%), 기업인(40%)이 뒤를 이었다. 나머지 분야 전문가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이어 2순위로 꼽았다.


   

 ▲ (왼쪽부터)5·18 광주 민주화운동. 5·16 군사쿠데타. 4·19 혁명 당시 사망한 전한승군에 대한 명예졸업장 수여 장면.

 
 

▒ 2위 : 5·18 광주 민주화운동(1980년)

1979년 10월26일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들은 순식간에 군부는 물론 정치권을 장악했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에는 정부 기능을 말살하고 민주 인사들을 투옥했다.

군사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경계한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 확산되어갔다.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때 전라남도와 광주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5월18일 광주 대로인 금남로에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했고, 공수부대원들이 주축이 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일부는 무장을 했고, 시민군과 계엄군이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 ‘피의 화요일’로 불린 5월27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진압 작전에 나서 시민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9일간에 걸쳐 벌어졌던 시민군의 항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전쟁 이후 최대 희생자가 나왔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망 1백91명, 부상 8백52명이었다. 이후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 회복, 희생자 묘역 성역화 등이 이루어졌다.

종교인들(48%)이 ‘광복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1순위로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문화예술인(42%), 금융인(40%), 사회단체(38%) 순이었다.

▒ 3위 : 5·16 군사정변(1961년)


군인 신분이던 박정희 소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사건이다. 1961년 5월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은 군사 정변을 감행한다. 여기에는 장교 2백50여 명과 사병 3천5백여 명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이후 제2공화국인 장면 내각이 총사퇴하고,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해 3년간의 군정 통치에 들어갔다.

군정 기간 중 군사 혁명 세력은 정치적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CIA(미국 중앙정보국)를 모방한 ‘중앙정보부’를 창설했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후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행정 관료와 언론인들이 이 사건이 광복 이후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하는 비율이 높았다. 반면, 정치인과 사회단체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을 보였다.

▒ 4위 : 4·19 혁명(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영구 집권을 막고 제2공화국을 출범시킨 사건이다. 4·19 혁명은 1960년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라고 외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서울, 대전, 수원, 부산 등지에서 연속적으로 데모가 일어났고, ‘부정 선거 규탄’ 등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갔다.

4월11일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이 떨쳐 일어났다. 4월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데모를 벌인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4월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총궐기의 선언문을 낭독했고, 학생 대표들과 면담한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이로써 12년간 장기 집권했던 이승만 정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교수, 문화예술인, 종교인들 사이에서 “4·19 혁명이 광복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 (왼쪽부터)6월 민주항쟁.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에서 유가족들이 헌화하는 모습.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 행렬.

ⓒ뉴시스, 연합뉴스, 시사저널 임준선(왼쪽부터)

▒ 5위 : 6월 민주항쟁(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다. 서울대생이던 박종철씨는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며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으나, 나중에 고문에 의한 치사 사건으로 밝혀지면서 수사 경관 등을 구속했다. 사건의 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추모 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 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 항쟁으로 이어져 1987년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등 장기 집권 음모를 노골화하던 참이었다. 6월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해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 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4~5번째로 이 사건을 꼽은 반면, 기업인과 금융인이 상대적으로 영향을 낮게 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6위 :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1979년)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된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 그곳에는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동석했다.

그런데 만찬 중에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사이에 우발적 충돌 사고가 있었고, 김재규 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러나 당시 공소장에서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를 주요 혐의로 기록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을 포함한 다섯 명이 사망했으며, 김재규는 1980년 5월24일 사형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도 동시에 막을 내렸다.

문화예술인과 사회단체 전문가들이 이 사건의 영향에 대해 낮게 응답했다. 반면, 행정 관료와 기업인과 금융인들이 많이 지목했다.

▒ 7위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2009년)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뒷산에서 투신해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고, 퇴임후에는 고향으로 귀향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 돌아간 뒤 오리 농사, 친환경운동 등에 전념하면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국민들과 소통했다. 서거 직전에는 건전한 토론 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임 중에 일어났던 각종 비리 혐의로 측근과 친형, 부인, 아들, 딸 등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지난 4월30일에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고, 그 후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서거 후 국민들에게 ‘영원한 서민 대통령’으로 남았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사저 근처에 안장되었으며,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졌다.

정치인과 사회단체, 문화예술인들이 영향력을 크게 보았다. 행정관료, 교수, 법조인 등은 작게 보았다.

▒ 8위 : IMF 외환위기(1997년)

외환위기는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 지원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을 두고 말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는 최대 위기를 겪게 되었고,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IMF 사태는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를 가져왔고, 독점 재벌의 해체, 고용시장에서의 자유 경쟁 체제 도입 등을 불러왔다. 외환위기 바통을 받은 김대중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 등의 소비 촉진 정책을 실시한 끝에 2001년 8월23일 IIMF 구제금융 관리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이는 이어진 내수 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정치인과 종교인들이 영향력을 작게 보았고, 사회단체 전문가들은 크게 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왼쪽부터)1997년 12월25일 임창열 당시 경제 부총리가 기자회견을 갖고, IMF와 선진국들이 한국에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12·12 군사 반란. 서울올림픽 개막식.

ⓒ(맨 왼쪽)시사저널 우태윤, (가운데)뉴스뱅크 이미지

▒ 9위 : 12·12 군사 반란(1979년)

1979년 12월12일 전두환·노태우가 조직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등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 반란 사건이다. 당시 사건은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면서 일어났다.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해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제압한 후 정승화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이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전두환의 독단적인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신군부 세력들은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해 정총장 연행 재가를 받았고, 결국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신군부 세력은 그 후 제5공화국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며 승승장구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조사 결과 언론인들이 이 사건의 영향력을 크게 보았고, 사회단체 전문가들이 문화예술인들은 작게 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10위 : 88 서울올림픽(1988년)

한국은 1979년 9월에 제24회 하계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정식 제출했다. 같은 해 9월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누르고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 그리고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 경기대회 개최국이 되었다.

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간에 걸쳐 개최되었다. 전세계에서 1백60개국 1만3천3백4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당시로서는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경기는 정식 종목 23개, 시범 종목 2개, 시범 세부 종목 1개, 전시 종목 2개, 전시 세부 종목 1개가 치러졌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면서 전체 4위를 차지했다.

법조인들이 이 사건이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을 제일 작게 보았고, 문화예술인들이 제일 크게 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