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용틀임 일격필살 위세
무술이란 건 참 묘하고도 어렵다.
‘대가(大家)’가 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차례로 정성껏 수련을 해야하는데 그게 정말 쉬운 노릇이 아니다.
자칫 한가지라도 소홀히 할라치면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혹독한 수련을 거쳐도 결과는 보장받지 못한다. 무술수련에도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범상치 않은 자질을 타고난 재사(才士)한테는 대개의 경우 강도높은 수련을 기대하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래서 더더욱 무술의 창조적 발전이란 ‘만(萬)에 하나’도 나오지 못할 만큼 힘들단다.
팔괘장(八卦掌). 수련법이 독특한, 대표적 고급 무술로 통한다.
타고난 재주와 평생의 정제된 수련을 통해 그 비밀을 풀어낸 고수를 찾았다.
베이징시(北京市) 광시먼 베일리(光熙門 北里)의 한 중산층 아파트.
열 다섯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노부부가 서로를 다독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팔괘장사(八掛掌師) 쑨즈쥔(孫志君·70) 선생이 기자 일행을 맞는다. “집이 작아서 미안합니다….”
일신의 무공이 고강하기로 소문난 선생은 이제 평범한 노년을 맞고 있었다.
차를 곧 끊여내올 테니, 침대에라도 걸터 앉으라는 선생의 환대가 고맙다.
“팔괘장은 정파(程派)와 윤파(尹派) 팔괘로 나뉘지요.
나머지는 다 거기서 갈라져 나온 거에요.” 팔괘장이 개창된 이래 팔괘 유파만 10개 가까이 만들어졌지만
정, 윤파를 빼고는 제대로 팔괘장의 정수(精髓)가 전해지지 못했다는 게 선생의 설명.
허베이성(河北省) 출신인 쑨즈쥔 선생은 14세때부터 청요우셩(程有生) 노사(老師)한테 정파팔괘장을 사사했고,
현재도 새벽마다 아파트옆 공터에서 하는 수련을 거르는 일이 없다.
“청 선생 기예요? 뭐 달리 특기를 꼽기가 힘듭니다.
굳이 밝히지면 팔괘 64장(掌)을 임기응변하며 마음대로 쳐낼 수 있었는데,
그게 장기라 할 수 있을까요?” 청요우셩 선생은 지난 37년 허베이성에서 열린 천하무술인 대회에서 우승했다.
지금의 이종격투기 대회라고나 할까. 각 유파가 다 참석한 대회에서 팔괘 연환장(連環掌) 하나로 천하를 호령한 것이다.
청 선생은 상대의 공격이 들어오면 막아내고는 빈틈을 뚫고 들어가 상대를 굴복시키는 받아치기 전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단다.
쑨 선생은 수련한 세월이 꽤나 지난뒤에 사부의 공격 명령에 따라 공격해 들어간 일이 있었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대가 보이질 않터란다. 깜짝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청 선생은 자신의 뒤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고 했다.
이름하여 창니보(走尙泥步)란 것이다.
팔괘장의 요체는 소위 창리보에서 시작된다.
진흙탕 위를 걷는다는 보법(步法).
손 선생은 이를 운보(涌步)라 했다.
팔괘장을 익히려면 처음 3년간은 운보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한다.
다리힘을 길러주는 최고의 공법(功法)이다.
실전에서는 상대를 향해 쾌보(快步)로 나서거나,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데 이만한 보법이 없다.
지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재미를 붙이고 나니 수련이 즐거웠단다.
행보여수(行步如水). 팔괘 걸음은 물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야 한다.
내딛는 다리를 꼿꼿히 편채 1족장을 크게 내딛는데,
발다닥은 지면과 평행이 되게 해 1촌(약 3㎝)의 공간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허리는 의자에 정좌한 모양으로 반듯하게 편다. 낙각이채니(落脚似採泥).
단, 발이 지면에 놓여질 때는 다섯 발가락이 땅을 움켜쥐듯 굳건해야 한다.
운신(運身)은 유룡(遊龍)이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과 같다.
머리가 방향을 틀면 순차적으로 몸통과 꼬리가 그 동선(動線)을 유영하며 쫓는 것이다.
장(掌)을 치켜든 손과 머리가 먼저요, 어깨와 몸통, 또 디딤발이 순서대로 따라간다.
자연스런 걸음은 아니다. 쑨 선생은 그러나 익숙해지면 보통 걸음보다 훨씬 빨리진다고 했다.
주먹이 훨씬 위력적일 것 같기도 한데 장(掌)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예측 불허의 변화가 묘미다.
권(拳)은 일단 쳐낸 뒤 가격에 실패하면 허리까지 되돌아와야하는 수고를 해야한다.
재차 공격이 늦어지는 이유다. 반면 장(掌)은 회수하지 않은 채 상대의 허점을 연이어 공격할 수 있다.
손바닥을 전후좌우로 뒤집어 가며 상대공격을 걷어내거나 급습을 노린다.
장의 종류만도 64가지.
정파 팔괘장은 장심(掌心·손바닥)을 중심으로 손을 죽 뻗어내는 반면
윤파 팔괘는 엄지를 장심에 붙인 채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친 뒤 응용, 변화하는 장법을 구사한다.
임기응변. 상대와의 공방(攻防) 동작에 따라 자유자재로 장을 쳐낼 수 있어야 진정한 묘미를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재빠른 해석에 따르기 보다는 수련을 거치면서 체득한 감각에서 터진다.
“변화, 좋습니다. 그렇다면 위력은 어떨까요? 아무래도 주먹만치 못할텐데….”
노사(老師)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흠’하는 구령과 함께 두 손을 모아 짧은 장을 쳐낸다. 힘줄이 툭 불거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다지만 기자 일행중 한 사람이 저만치 방구석으로 나가 떨어졌다.
선생은 자신이 가진 힘에 절반만을 사용했단다.
허리힘이다. 장(掌)은 힘의 끝에 불과하다. 근본은 허리다.
보법이 어우러져 내공(內功)·외공(外功)의 절묘한 결합을 꾀한다.
노사는 선채로 배를 축구공처럼 불룩하게 키워보였다. 기자가 만져보니 딱딱하다.
뭘 말하려는 건지. 한데, 공처럼 부풀어 오른 그의 배가 단전 아래로 쳐졌다가는 가슴 밑까지 치겨 올라간다.
이후 여기저기로 움직이는데 신기하기 짝이 없다. 수련을 통해 얻은 내공이라 했다.
설혹, 따라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쑨 선생이 아파트옆 강가의 공터에 턱하니 섰다. 팔괘장 기본동작을 취한다.
유순하게만 보이던 노인네의 안광(眼光)이 순간 번뜩인다. 주위가 서늘해질 정도. 투로(套路·권법). 예의 그 용보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보폭이 훨씬 컸다. 보통사람의 뜀 걸음폭과 비슷할까. 사정사우(四正四隅), 팔괘다.
동서남북, 즉 전후좌우와 각각의 대각을 노닌다. 치켜든 쌍장(雙掌)을 돌려치고 교묘히 움직여 대는데,
빠르기도 하거니와 부드러운 움직임에 탄성이 절로 터졌다.
선생의 어깨를 쓸어대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그의 몸이 휘청인다. 노인네의 그것이 아니다.
무술이 최고 경지에 올라선 뒤에나 가능할 법한 움직임이다.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마리의 고고한 백학(白鶴) 같았다.
기자가 감히 손 얽어보기를 청했다. 대가(大家)의 풍모를 일견하고 싶었다.
손 선생이 흔쾌히 받아들인다. ‘진퇴(進退)하라’. 기자가 익숙한 권(拳)을 선생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그런데 선생은 두발로 땅을 움켜잡은 채 허리만 틀어 왼손으로 기자의 공격을 살포시 흘리며 오른손으로 기자의 등뒤를 밀어낸다.
3~4m는 족히 밀려났다. 대단한 힘이다. 부드럽게 민듯한데도 제풀에 나가 떨어진듯 방향을 돌이켜 재차 공격을 가할 수 없다.
재합(再合)을 청했다. 이번엔 서로 선장(先掌)을 팔뚝으로 맞섰다.
기자가 왼손으로 선생의 손을 아래서 위로 걷어 올리며 우장(右掌)을 쳐냈다. 먹히질 않는다.
서로 장을 맞댄 상태에서 힘의 이동을 간파당한 까닭이다.
기자의 출수(出手)를 정확히 읽어냈던 것. 선생은 어깨를 ‘퉁’ 튕겨 기자의 걷는 동작을 무위로 만들었고, 선생의 손속은 연체동물의 촉수처럼 기자의 손에 와서 착 달라붙는다.
이어 선생은 쌍장을 모아 기자의 가슴에 대고 천천히 밀었다.
물 표면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움 감촉을 느꼈는가 싶었는데 강맹한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강과 유의 적절한 조합이었다. 경모할 따름이다.
“청 노사 문하에서 선생보다 뛰어난 기예를 보인 제자가 있었습니까?” “허허, 없었습니다….”
자신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수련에만 몰두했다는 말로 빗댄다.
“노니는 용(청 선생)의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더니 지금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글쎄요, 무예 역시 발전하기 마련 아닐까요….” 50년 넘는 공력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신묘한 보법과 영활하기 짝이 없는 신법(身法), 변화무쌍한 장법을 구사하는 선생은 자못 경이의 대상이었다.
기자 일행과 점심을 마주하며 한 잔 기울인 마오타이술이 반병 넘게 남아있었다.
애주가 선생에게 “가져 가시겠냐”고 묻자, “좋은 일이지요”라며 받는다.
챙겨나온 손가방에 술병을 갈무리한 채 앞뒤로 흔들며 표표히 사라지는 선생의 뒷 모습이 애틋한 감정을 전달한다.
평생 연공을 통해 이룬 신기(神技)를 일면식도 없는 기자 일행에게 아낌없이 풀어준 대가(大家).
기자는 그저 선생의 무운(武運)을 빌어볼 따름이었다.
氣·力70년 내공의‘용호몸짓’ 형의권 뤄다청
창송불로춘(蒼松不老春) 70년 가까이 무술 수련에 정진해 온 고수라면 일신에 지닌 신공(神功)이 어느 수준일까.
초동 때부터 무술을 배워,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찾아 평생동안 수련해왔다는 고수.
소나무는 결코 늙지 않아서 새봄엔 또다시 푸른빛을 발하는 법이라 했던가.
고희를 넘기고도 몇 해가 지났건만 여태껏 새벽 연공을 거른 일이 없고,
무술도관에서는 아직도 후학들을 지도하는 사람. 빠르고 강맹함을 특징으로 한다는 형의권(形意券).
그 무술을 평생 수련하고도 아직 모자람이 많다는 형의권사 뤄다청(落大成·74) 노사(老師)를 찾았다.
베이징 류팡베일리(柳芳北里)의 뤄다청 노사의 아파트. 선생은 이른 아침 거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중국내 형의권 초절정 고수이자 최고 원로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허리도 휠 만큼 휜 할아버지를 연상했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꼿꼿한 풍채의 뤄 노사는 “차를 하겠나, 아니면 맥주를 하겠나”고 대뜸 묻는다. 차를 청한 뒤 선생의 무술 연원을 풀어나갔다.
뤄다청 노사는 허베이성(河北省) 무가(武家)에서 태어났다.
부친 뤄싱우(洛興武)는 무관출신으로 30년대 전국 무술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고수.
워낙 기골이 장대했던데다 강맹하기로 유명한 형의권과 특유의 원운동을 중시하는 팔괘장을 동시에 익힌 고수여서,
민간에서는 ‘흑선풍(黑旋風)’으로 알려진 걸출한 기인(奇人)이었다.
흑선풍은 한겨울에도 내복 한번 입지 않던 강골로, 아침마다 20㎏ 짜리 쇠몽둥이 휘두르는 수련을 즐겨했단다.
지난(至難)한 무술수련을 맏아들에게 만큼은 강요할 수 없었던 것일까.
뤄다청 선생은 부친의 의형제 왕펑창(王鳳章) 사부한테 형의권을 배운다.
왕 선생은 사부는 ‘철비박(鐵臂??)’ 샹윈상(尙雲祥). 역대 형의권사중 최고 무명(武名)을 날렸던 인사다.
왕 선생은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올때를 기다렸다가 뤄 노사에 형의권과 서예를 가르쳤다.
“수련을 게을리하면 밥을 얻어먹질 못했지.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무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런데 형의권 묘미를 차츰 알아가면서 수련을 거르면 왠지 끼니를 거른 것 마냥 허전해지지 않았겠나….”
뤄 노사는 샹 선생 문하에서 그렇게 12년간 수련을 쌓았다. 혹여, 다른 무술을 배우고 싶기도 했을텐데 형의권만을 고집한 이유를 물으니, 선생은 “아직도 형의가 뭔지 잘 모르는데, 어찌 다른 무술을 익힐 생각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고 반문했다.
곧 현재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는 형의권 고수 디궈용(邸國勇) 선생조차 뤄 노사한테만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이유리라.
식간의민, 학이습난(式簡意繁, 學易習難). 형의권은 얼핏 단순하고, 한편으론 시시해 보이기까지 한다.
직선적이고 빠르고, 또 강맹한 주먹이 전부인양….
일반인들은 아무리 쳐다봐도 상대 허리위로 쭉쭉 내지르는 주먹과 재빠른 보법 외엔 별다른 묘미를 찾을 수 없다.
평생을 들여도 그 묘를 깨닫기 힘들다는 속설을 캐물어보니, 선생이 한 마디 ‘툭’ 내던진 것이다.
형의권은 간단해 보일 수 있지만, 기실 그 의미는 복잡하기 이를데 없고 최소 10년 넘게 수련해야 그 흉내라도 비슷하게 낼 수 있단다.
3년 수련이면 소성(小成)이고, 6년이면 중성(中成)이요, 10년이라야 대성(大成)의 공력을 꿈꿔볼 수 있다 했다.
뤄 선생이 강조하는 형의권 ‘공식’은 이렇다. 6합(六合).
손과 발이 상응해야 하고 팔꿈치와 무릎이 원활히 따르며, 여기에 신법(身法)을 좌지우지하는 어깨와 고관절이 절제된 움직임을 보탠다. 더 구체적으론, 디딘 다리모양은 닭의 다리(鷄腿·계퇴)를 닮고, 몸통의 움직임은 꼿꼿한 용신(龍身)을 좇는다.
편안하지만 견고한 어깨는 곰(熊膀·웅방)의 그것을,
머리는 범의 위상(虎抱頭·호포두)을 본떠 두 손을 밀어내는 힘이 안으로 옥죄도록 해야 한다.
최상의 양기법(養氣法). 무턱대고 10년이 아니라,
절제되고 조화를 이룬 형의권 동작을 정성들여 연공했을 때에서야 힘쓰는 법을 조금이나마 터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술수련이 어렵다고들 하는 이유가 된다.
여기에 내3합(內三合), 즉 의(意)·력(力)·기(氣)가 갖춰지면 자연스레 고수의 풍모가 나타난다.
정신과 물리적인 힘 쓰기가 통일된 뒤 폭발력이 배가되는 이치. 쉽고 간단히 풀어보자면,
일반인들이 흔히 자신도 놀라고 마는 ‘위급상황에서 터져나오는 무의식적인 힘’을 평정심을 갖고 주먹에 실어 연이어 쳐낼 수 있는 것과 같다.
묘리(妙理)를 깨친 뤄 노사의 명쾌한 설명. 선생의 형의권 논문은 중국내에서도 최고의 무술 명저로 꼽힌다.
베이징 시내의 중샨(中山)공원. 도복 매무세를 깔끔하게 고친 뤄 노사는 신고온 구두를 흰색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늙은 몸 움직이는 게 뭐 볼게 있다고 하는지….”
오형권(五形拳) 주먹이다. 탄알같은 포권(砲拳)과 도끼처럼 쪼개 내리는 벽권(劈拳). 권풍이 인다.
먼저 보이는 것이 빠르기다. 10여m를 순식간에 나아가며 쳐내는 주먹 위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어 형의권의 강맹함이 극대화됐다는 붕권(崩拳). 묵직하다.
형의권 장(掌)과 권(拳)은 팔꿈치가 초생달 마냥 안으로 접혀 구부러진 게 특징. 빠른 공격속에서도 변화의 여지를 두기 위한 것이다.
또 체중을 실어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설명. 똑같이 빠르고 용맹한 주먹이돼,
소림권에선 주먹이 몸을 이끌고 나가고 형의권은 몸이 주먹을 쳐내는 것과 같다 했다.
형의권의 힘은 직선적이고 파괴적이며, 권과 장은 모두 상대의 목과 단전 같은 급소만을 노린다.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 형의권사 곽운심의 기예를 일컬어 칭찬한 명구다.
뤄 노사의 형의권은 3개 유파중 곽운심이 속한 하북파의 그것. 곽 명인과 샹윈상은 사형제간이다.
반보만 들어서며 쳐내는 주먹만으로도 천하를 호령했다는 곽운심,
또 일단 출수(出手)하면 상대는 내상을 당해 피를 토하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는 샹윈상의 공력이 엇비슷했을 것이라고
뤄 선생은 잠정 평가를 내렸다.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오행권과는 달리 부드러움을 간직했다는 12형권(形拳)이 펼쳐진다.
뤄 노사가 평생의 공을 들여 수련했다는 후권(?拳). 원숭이의 빠른 보법과 연이어 쳐내는 장(掌)에 눈이 어찔해 온다.
돌연 퍼부어지는 연타공격에 상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정수를 익힌 형의권 고수한테는 상대의 진공(進攻)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
역시 몸이 주먹을 이끈다. 발을 무릎만치 들어 올렸다가는 내딛으며 전진하는 동작으로 체중을 실은 주먹을 쳐낸다.
가슴에서 모아졌다가 서로 엇갈리며 번갈아 쳐 나가는 손속이 쾌속무비하다.
한발로 땅을 구르는 진각(震脚)은 정자를 쿵쿵 울리는 위력을 토해낸다. 상대의 발이 밟힌다면 으스러진다는 위력을 품었다.
이번엔 도광(刀光). 형의도법이다. 머리위를 감아 내려치는 벽도(劈刀)와 다리를 들어 찔러대는 자법(刺法)이 특색이다.
수련용 연검(軟劍)이 ‘휘릭’하는 파공음을 흘린다. 바람소리와 쇳소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절제된 움직임에 탁월한 도법임이 감지된다.
노사의 기예는 10년도 채 안된 기자의 수련세월로는 감히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10성의 기운을 싣지 않은 선생의 장이였지만 빠르기만은 청년 고수들의 그것과 진배없다.
나름대로 용을 쓴 기자의 순간적인 출수 역시 선생의 눈을 속이진 못한다.
노사의 권을 막아내자면 선생의 손이 기자의 방수(防手)를 감아내리며 목 울대를 노리는 천장(穿掌)을 내치는 식이다.
5형권과 12형권, 그 각각의 특색을 갖춘 권과 장이 그때그때 자유자재로 변화한다.
30대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단다. 6세때 무술연공을 시작, 20대 중반에 그 맛을 알았다.
그 무술이 설핏 몸에 배었을 때가 30대. 배울 것은 많고,
또 혈기왕성한 힘도 자랑할만 하였으니 당시 무술 연공의 재미는 현재까지 잊지 못할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선생은 회상했다.
그래서 였을까. 선생의 거실에 “푸른 소나무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액자가 걸려 있었던 것이….
초가을 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던 날.
노신(老身)을 이끌고도 사진촬영에 대한 기자일행의 청을 마다치 않고 비를 맞으면서도 시연에 열중했던 노사.
뤄다청 노사는 기자 일행이 자신을 찾은 것도 전생의 인연이 있어 가능했을 터,
아름다운 인연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며 잔주름이 빼곡히 배어있는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서푼 힘으로 태산 움직인다” 태극권 펑즈창
중국 무술중에 ‘내가(內家) 3권’이란 게 있다. 형의권(形意拳)과 팔괘장(八卦掌), 태극권(太極拳)이 그것이다.
강맹한 신체의 힘(外功·외공)을 빌려 대적하는 소림권등 외가권과 비교해 내공의 힘을 중시한다는 권법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힘보다는 의식과 정신의 내기(內氣)가 운신(運身)의 근본이 된다.
태극 진인(眞人) 펑즈창(馮志强·75) 노사(老師). 태극권을 수련한 지 어언 60여년이 가까워온다.
1갑자(甲子)의 정묘(精妙)한 내공과 허허실실의 교묘한 수법(手法)으로 진인의 경지에 오른 펑 노사를 찾았다.
베이징시 류팡베이리 펑 노사의 소탈한 아파트 거실은 온통 선생의 평생 수련모습을 담은 사진 액자와 각종 상패, 표창들로 가득했다.
배사(拜師)한 제자만 100여명, 문하생이 전세계 10여만명에 달한다는 선생.
펑 노사는 태어나서 돌아갈 때까지 배우고, 익혀도 모자라는 무술이 태극권이라고 한다.
허베이성(河北省) 출생. 8세 때 삼촌뻘인 왕윈(王運) 선생께 소림(小林) 참공(站功)을 배워 8여년을 수련했다.
16세 이후엔 통비권(通臂拳)과 철사장(鐵沙掌), 주사장(朱沙掌)을 연마한다.
이들은 모두 한 주먹으로도 벽돌 너덧 장은 쉬 깨어낸다는 파괴적인 무공들.
젊은 시절에 이미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근력은 다 키운 셈이다.
특히나 권신(拳神)으로 일컬어지던 후야오디엔(胡耀殿)선생을 모셔 형의권을 사사하는 복을 누리기도 했다.
베이징에 들어와 진가(陳家) 태극권의 태두 천파커(陳發科) 진인으로부터 태극권을 전수받기 시작한 것이 지난 48년.
펑 선생은 천 진인이 고희가 갓 넘은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6년 동안 태극권을 사사했다.
“감히 제가 어찌 스승의 기예(技藝)를 논하겠습니까. 하늘과 땅 차이에 가깝습니다.”
후세 천 진인과 같은 기예는 결코 다시 나타나기 힘들 것이라 했다.
천 진인이 돌아갈때까지 제자들에게 전수치 못한 기예만도 엄청났다.
착각(脚)과 사권(査拳) 등 빠르고 강맹한 기운을 주로 토해내는 권법들이 각광받던 시절,
천 진인이 베이징에 단신으로 홀연히 나타나 기예를 선보이자 태극권 열풍이 불었다.
한번은 천 진인이 관중을 체육관에 모아놓고 태극권을 시연하는 도중
파각(破脚·다리를 곧게 펴 밖으로 후려차는 동시에 손으로 발등을 치는 수련법)을 하자
체육관 창문이 일제히 크게 울려 사람들이 놀랐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펑 노사 말로는 창문을 울리는 정도는 아주 쉬운 기술에 불과한단다.
천 진인이 성벽을 쌓는 커다란 벽돌로 만들어진 바닥에서 발을 한번 구르면(震脚·진각) 벽돌이 깨어져 나갔다 했다.
또 가볍게 밀기만 해도 상대가 2∼3장(약 6∼9m)이나 나가떨어지기가 일쑤였고,
앉아 있는 사람을 치자면 공처럼 상대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했다.
일본인들은 이에 천 진인을 권성(拳聖)으로 추앙했다.
천 진인의 일부 기예만을 사사했다지만 펑 노사 무명(武名) 역시 절대적이다.
요즘 태극권 절대고수로 이름난 인사들을 일컬어 진식 태극권 4대금강(金剛)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허난성(河南省)의 진가구(陳家邱) 식솔들로 진소왕과 진정재, 왕서안과 주천제가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예도 펑 노사의 공력에는 크게 못미친다는 세평이다.
풍 노사가 천자오페이(陳照丕·천파커의 아들) 등과 함께 4대금강을 지도했다니 그럴만도 했다.
기자가 4대금강의 수준를 물으니, 선생은 “그저, 괜찮다”고 했다. 너무 나쁘다 하면 그들 명성에 좋지 않을 것이고,
좋다고 해버리면 발전이 없을까 우려된다는 게 선생의 얄꿎은 해명.
그런데 일반인들은 태극권 시연을 찬찬히 지켜보자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저런 느긋하고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동작에서 위력적인 공격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기자가 물어봤다. 선생은 태극권은 심성(心性)을 수련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밥 먹는 것도, 술 마시는 것도 다 수련이다.
천 진인이 만사(萬事)에 초연할 수 있는 청정지정(淸淨之精)을 이룬 데 반해 자신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수준 밖에 도달치 못했단다.
태화(太和). 어떤 일을 행하든지 모자라거나 과해서는 안된다는 태극 사상이다.
신체단련을 위한 마음가짐과 행동 양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가 적어도,
또 너무 많아도 그 해 농사가 망쳐지는 이치와 같단다.
“태극권을 셋으로 나누면 의(醫)와 도(道), 무(武)로 나눌 수 있는 거죠”
태극권은 암과 심장병 등 질병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다 했다.
기공을 연마하면 몸안에 내기(內氣)가 쌓이게 되고, 내기는 곧 인간의 오장육부를 튼실히 해준다.
원기(元氣)가 일어나니 치고 때리는, 무술로써 밖으로 표출되는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펑 노사는 태극권은 전생의 인연이 없다면,
즉 현세의 짧은 인간수명으로는 결코 십성(十成)의 성취를 이루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태극권을 수련한 경험조차 없는 기자에게 한두 마디 설명으로는 이를 납득시킬 수 없단다.
선생을 따라 나섰다.
제자들이 현재 베이징 시내에 펑 노사의 이름을 딴 도관을 건립중이라지만
펑 노사는 매일 새벽 협소한 아파트 공터에서 태극권을 풀어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사레가 돌아간다.
허리는 편하고, 팔과 다리는 크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어댄다. 태극권 포추(?錘) 권법.
평생 내공을 쌓았다는 연공법중 하나다.
시연이 중간쯤을 넘어서자니 펑 노사는 권추(拳錘·한손 팔꿈치와 다른손 손바닥을 부딪치는 수법)를 힘차게 쳐낸다.
기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
가슴 안으로 양팔을 둥그렇게 모았다가 한손 권면(拳面)으로 장심(掌心)을 치는 진각(震脚) 동작도 깔끔하다.
손과 다리의 힘이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순간순간 펼쳐지는 절도있는 동작은 강한 기운을 머금고 있다.
태극 13검. 2㎏쯤 되 기자도 손쉽게 휘두를 수 없는 검이 자유자재로 돌아간다.
부드러운 곡선은 태극권의 묘리를 따랐으돼,
일순 찔러대는 자검(刺劍)은 검법 특유의 날카로움이 배어있다.
찔러 내고는 검을 회수, 다시 태극 모양의 부드러운 원운동을 반복한다.
꼭 한번만 기술 시연을 해달라 청했다. 처음 펑 노사는 손을 내젓는다.
쉽게 부딪치고 하는 것은 태극권사가 할 도리가 아니란다.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했다. 반복해 청했다.
그러니 노사는 마지못해 기마(騎馬)자세로 버텨서서는 자신의 양손 팔목을 잡아 힘껏 밀어보란다.
어찌된 일인지 왜소하게만 보이던 노사의 몸이 밀려나지가 않는다.
도리어 어깨와 허리를 틀어내며 잡힌 팔로 홱 뿌려대는 노사의 힘에 떠밀려 기자가 옆으로 크게 튕겨져 나갔다.
여러번 시도해봤으나 노사는 이번엔 왼쪽, 다음엔 오른쪽 하는 식으로 상대한다.
사량발천근(四兩拔天斤). 서푼의 힘만으로 천근의 힘을 상대한다는 태극권 기법.
노사는 기자의 밀어내는 힘을 이용, 기자를 농락한 것이다.
이번엔 기자가 주먹을 쳐댔는데, 노사가 부드럽게 팔을 감아대며 기자의 공격을 막아낸다.
얼핏 부드러운 동작같지만 그 부딪치는 감각은 통나무와 진배없다.
노사는 기자의 팔을 안에서 밖으로 감아 돌려내며 일보를 전진, 기자의 왼 허리를 움켜잡았다.
들어온 다리로는 기자의 발을 잠그었고, 다른 손으로 기자의 가슴을 밀었다. 기자가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내친 김에 전사(纏絲·팔과 허리를 비틀어 찌르는 태극권 특유의 주먹)까지 청했다.
그런데 노사는 팔을 힘껏 움켜쥐고 버텨보라더니 팔과 허리, 어깨를 차례로 울려내며 기자가 십성의 힘을 쓴 손을 가볍게 떨쳐낸다.
또다시 덤벼대니 선생은 궁보(弓步·한걸음을 벌려 선채 앞발 무릎을 90도로 굽힌 채 뒷다리를 펴고 선 자세)를 내디딘
기자의 발목을 안으로 차내며 몸통을 크게 돌려놓는다.
낑낑대는 기자와는 달리 노사는 호흡하나 거칠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힘은 하나도 사용치 않은 것이다.
내공과 더불어 태극권의 신묘한 퇴수(推手·일종의 대련)로 명성이 높은 선생의 기예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의 유력(柔力)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준 것에 감사한다며 사인을 부탁했다.
워낙 바쁜 일정에 쫓기는 노사였다.
그러자 노사는 1시간여 동안 기자 일행을 지켜보고 곁에 섰던 문하생 해군 장성(將星)을 아랑곳않고
기자의 노트에 태극권 권결(拳訣)을 일필휘지로 적어준다.
부디 태극권을 수련하는 인연을 찾길 바란다며….
長刀의 위용...칼바람서늘 통비권 궈루이상
무술시우의지교량 (武術是友誼之橋梁)
고수들끼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며 우의를 다진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250km 가량 떨어진 중소도시 창저우(滄州).
알이 굵고 달기로 소문난 대추와 가문 대대로 비전(秘傳)되는 전통무술이 많기로 유명한 그곳에서
지난 9월 천하 제일고수(第一高手)를 뽑는 무술대회가 열려 관전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산둥성(山東省)과 허베이성(河北省) 등 중국 전역에서 각계 유파의 숱한 청년고수들이 몰려와 자웅을 겨룬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창저우 무술대회는 중국내에서 그 평판이 높다. 때문에 각계 무술 원로들이 이 대회에 참석,
개막식때면 무술시연을 펼쳐 분위기를 돋우거나 심사를 맡곤 한다.
무술 본고장 창저우에서도 최고 무술명가로 꼽히는 통비권(通臂拳) 궈루이샹(郭瑞祥·73) 선생 가문을 찾았다.
中 10대 무술 名士로 추앙
중국무술은 대개 가전(家傳)된다. 고급 기예(技藝)일수록 집안 이외 사람에게 전수하기를 꺼려한다.
사사는 커녕, 수련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절기(絶技)는 자신들만의 것으로 지키려는 속성이 지독히도 강하기 때문이다.
실전 권법이라는 통비권과 벽괘권(劈掛拳) 중 각각의 장점을 딴 가전무술 벽괘통비권을 부친으로부터 사사했다는 궈루이샹 선생은
창저우에서 최고의 무명(武名)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중국을 통틀어서도 10대 무술명사(名士)로 추앙받는 고수다.
궈 선생의 부친 궈장셩(郭長生)은 전성기때 상대를 만나서는 손과 발이 ‘제비’처럼 빨라져 ‘곽연자(郭燕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궈 선생은 엄격했던 부친에게 6세때부터 통비권과 장도(長刀)의 대명사 격인 묘도(苗刀)를 배웠다.
그는 이제 비전 무술서를 정리하고, 70여년간의 연공을 통해 깨우친 무술 정수(精髓)를 활자화하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곽 선생은 자신이 손수 그림을 그리고, 무술 이론을 정리한 무술서를 다수 꺼내 보였다.
그런데 벽괘권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았으나, 선생은 오히려 통비권을 강조하는 데 놀라 이유를 물었다.
“통비권이 훨씬 고강한 무술이에요. 실전에 들어가자면 벽괘권보다 몇 갑절의 위력을 나타내죠.
통비권이 비전 무술이라 덜 알려졌을 뿐입니다.
사실, 통비권은 남들 앞에서 시연해 보인 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통비권은 중국에서 신성시되는 하얀 원숭이(백원·白猿)가 팔을 길게 늘여 먹이를 취하는 모습을 흉내낸 권법으로 알려져있다.
때문에 통비권은 다른 무술 유파보다 유난히 팔과 다리를 길게 늘여 휘둘러 치거나,
큰 동작으로 신속하고 강맹하게 쳐내는 주먹이 특징적으로 두드러진다.
한편으론 춘추전국시대 백원이란 무관이 통비권을 창시했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 통비권도 여러 유파로 나뉘었으니,
궈 선생은 집안 대대로 24식(式) 통비권을 연마해 왔단다.
“창저우에서 발원한 무술이라 할 수 있죠.
다른 통비권보다 속도가 더욱 빠르고,
영활하며 폭발력이 강하게 고안됐습니다.
팔과 다리, 몸통 전체가 빠르게 돌아가며 그 묘(妙)가 나오는 것이지요.”
선생에 따르면 일반적인 통비권은 가슴으로 쳐 들어오는 주먹을 몸을 젖혀 뒤로 낚아챈다면,
24식 통비권은 손목을 팔꿈치로 내려치는 동시에 무릎공격을 가하는 식으로 더욱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고 했다.
이어 궈 선생이 의자에 앉은 채 주먹을 죽 질러 보인다.
통비권 힘쓰기의 요체라는 함흉발배(含胸拔背)의 묘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등은 곧게 펴되, 가슴은 안으로 자연스럽게 모은 상태에서 주먹을 내질러야 한다는 이치.
곧 통비권에서 말하는 발경법(發勁法·무술에서의 힘쓰기 방법)이 된다.
선생의 주먹은 연륜이 짧은 기자가 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3절(節·팔·다리·몸통)의 묘리가 녹아있다.
주먹은 결코 뻣뻣하지 않고, 허리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면서 걸리적거림 없이 부드러운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연즉생(軟則生) 생즉화(生則化), 화즉쾌(化則快)라.
부드러움에서 살아있는 주먹이 나오고, 신귀막측한 변화가 나오는 법인즉,
그런 연후에야 쾌속함이 터지는 것이다.
통비권은 역학과 음양학, 수학의 원리가 녹아있는 과학적인 권법이란 선생의 설명이 뒤따른다.
묘도(苗刀)에 대한 선생의 애착은 퍽이나 강했다.
무술 연마는 결국 병장기를 연마하기 위한 기초라는 말과 통하는 것일까.
앞발과 뒷발이 동시에 껑충거리며 진공(進攻)하는 통비권의 원후보(猿?步). 벽괘, 통비의 기본 보법인 동시에 묘도의 보법이 된다.
얘기인 즉슨, 결국 묘도를 익히기 위해 벽괘와 통비를 수련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모판에 파종된 볍씨 싹인 ‘모’의 모양을 닮았다는 칼, 묘도.
일반 도(刀)와는 달리 끝으로 갈수로 구부러지는 굴곡이 거의 없는 것이 특색.
특히 3척8촌(약 1m15)이나 되는 길이에서 뿜어지는 위력이 엄청나다.
칼이 긴 만큼 칼끝은 창처럼 사용하고, 도신(刀身)은 살상력이 큰 도법으로 운용한다.
단수(單手)로 사용할때는 팔 힘을 이용하고,
쌍수(雙手)로 운용할 때면 허리와 가슴 힘을 이용해 칼을 휘둘러 낸다. 위력이 배가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묘도는 일본도와 모양뿐 아니라 운용법 역시 흡사했다.
연유를 물으니, 가전 절예 묘도는 명나라 명장(名將) 정충두(程沖斗)가 지은 책 ‘단도법선(單刀法選)’으로부터 나왔다 했다.
왜구 침입과 함께 중국으로 유입된 일본 검법을 기초로, 새로 만들어진 도법이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 남방지역에 출몰하던 왜구는 단신임에도 5척(약 1m50)의 장도를 냅다 휘둘러대며 달려들자면
중국인들은 검을 들어 막을 생각조차 못했단다.
수만겹으로 접는 방식으로 단조된, 그래서 강도가 천하제일이라던 일본도였으니 실로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중국에 유입된 묘도법은 여타 중국 도술(刀術)이 첨가되면서 발전돼 이후에는 오히려 일본검법을 능가하는 위력이 생겨났다. 묘도는 아무한테나 함부로 전수하지 않는 최고의 가전 절예(絶藝)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궈 선생의 맏아들과 딸이 조금씩 그 수(手)를 배웠을 뿐이다.
최근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선생이 수십자루 묘도중 하나를 뽑아들고 나섰다.
궈 선생이 중국내 제작및 판매 관련 특허를 받아냈다는 묘도다. 저간도(低看刀).
한·중 수교 10주년을 기려 발매된 기념우표에 궈 선생이 취했다던 자세다.
다리는 원후보로 서고, 눈이 몸 뒤쪽 아래로 처진 칼끝을 바라보는 자세다. 조천세(朝天勢)다.
두 눈이 허공을 응시한 채 한 다리는 높게 들고, 장도를 길게 뽑아들었다.
선생의 애도(愛刀)가 아름다운 검선(劍線)을 만들어 낸다.
곽 선생의 맞아들 저량(哲良·48)을 따라 나섰다. 몸이 불편한 궈 선생에게 시연을 청하기는 무리였다.
체구가 건장한 아들이 아파트 옆 공터에서 통비권을 펼쳤보였다.
한쪽 어깨만 종(縱)으로 열리는 진격법(進擊法)이 색다르다.
역시 주먹은 회초리처럼 ‘팽’하고 돌아가는 식으로 크게 휘둘러진다.
가격하는 어깨에는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는다. 허리와 가슴의 힘이 권력(拳力)의 전부다.
속도보다 오히려 힘이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앞을 향한 머리가 오른쪽으로 90도 재빠르게 돌아가면, 오른손 훅 주먹이 전면을 강타한다.
우권(右拳)이 나가면 좌권(左拳)은 반대 뒤쪽으로 낚아채는 방식으로 파괴력이 커진다.
일순, 그가 무릎을 크게 구부리는 동시에 팔뚝으로 상대 머리와 어깨를 강타하는 파상적인 주먹을 날린다.
권(拳) 끝마무리는 마치 태극권 같이 되퉁그러지는 퉁퉁거림이 나타난다.
부딪쳐 보니 힘이 장난이 아니다. 보법은 땅바닥을 쓸어대는 걸음인데도 빠르기가 짝이없다.
그런 통비권엔 투로(套路·권법)가 없다. 실전에 쓰일 수 있는 부분 동작만 수련한단다.
저량이 시연해 보인 묘도는 칼 크기 만큼이나 검풍이 엄청났다. 쉽게 대항할 수 없는 병장기임에 틀림없었다.
시연이 끝난 뒤 그는 1년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에 철심을 심어 무릎을 구부리기 힘든 상태라
제대로 동작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했다.
궈 선생은 취재 하루뒤 기자 일행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서필을 하나 보내왔다.
“무술은 벗들이 우의를 다지는 다리가 된다는….”.
창저우 무술대회 캐치프레이즈를 본뜬 것일까,
아니면 무술 취재차 찾은 기자일행에게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을까.
기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요청에 따라 몸을 움직여준 궈씨 부자가 더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중국 10대 무술명사가 보내준 글귀가 기자의 가슴에 와닿았다.
포효하듯 무쇠같은 찰나 短打 팔극권 우롄즈(吳連枝)
八極拳 故鄕(팔극권 고향)-孟村之旅(맹촌지여)〈팔극권의 고향, 멍춘으로의 여행〉
중국 창저우(滄州)는 무술의 본고장으로 통한다.
중국 129가지 문파중 무려 54개 유파가 창저우에서 발원됐다니 그럴만도 하다.
그런데 중국무술에 정통한 사람들이라면 창저우 무술의 핵심은 멍춘(孟村)에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멍춘이 지극히 공격적인 무술 팔극권(八極拳)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타격술(打擊術)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는 무술 팔극권.
팔극문 협회장 우롄즈(吳連枝·56) 선생을 찾아 인구 17만의 회교도 차지촌락인 멍춘으로 향했다.
걸쭉한 음성과 화통한 성격의 우롄즈 선생이 기자 일행을 맞았다.
선생은 대규모 삼림지를 국가에서 임대받아 수십년 동안 백양목 묘목을 키우는 일을 해오고 있었다.
연방 찻잔에 차를 부어주는 부인을 “술 때문에 생긴 내 위병을 고쳐준 내과의사”라고 소개하면서
부인에게 100여년 가까이 전해져온 우씨 팔극권 권보(拳譜)와 계보도(系譜圖)를 내오도록 했다.
“팔극권은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무술이에요. 또 기격(技擊)을 강조하면서 실용적인 무술이 됐죠.
그래서 청나라 황제는 중국내 숱한 무술가들을 제쳐두고 팔극권 고수를 청해 무술선생으로 삼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청조 초기에 시작된 팔극권은 중화민국 개국 이후엔 군인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무술이 될 만큼
실전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팔극문파는 최근 들어서는 우슈의 이종격투기 대회격인 산타대회 중국 챔피언을 다수 배출해냈다.
반면 배우기는 수월하단다. 3~5년 동안만 고련을 거치면 실전 응용이 가능하다는 것.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 멍춘 123개 자영촌중 120여개 촌에서 팔극권을 수련할 정도로 인기다.
멍춘은 태극권(太極拳)의 고향 허난성 진가구(陳家邱)와 비견할 만한 무술 본고장인 셈이다.
우 선생은 7세 때부터 지난 58년 작고한 조부 우후이칭(吳會淸)에게 가전 무술 우씨 팔극권을 배웠다.
그의 조부는 그 무명(武名)이 중국 천하를 떠울린 바 있는 고수.
농아로 태어났지만 중국내 최고의 무술천재로 꼽혔다.
집중력이 대단했던 관계로 어떤 무술 투로(套路·권법)라도 일견하기만 하면 그 정수를 꿰뚫어 봤다는 것이다.
조부는 또 타고난 신력(神力)이 대단했다. 아침 수련때마다 양손에 각각 30㎏이 나가는 돌을 들고 행보하기를 즐겼다.
게다가 자세는 참장(站木·말을 타듯 엉거주춤하게 서서 두손으로 항아리를 끌어안는듯한 자세)에다
궁보(弓步·한걸음을 벌려 선채 앞발 무릎을 90도로 굽히고 뒷다리를 펴고 선 자세)를 취했다.
보통 걸음으로도 힘들었을텐데 중국무술 보법중 가장 힘든 자세로 수련을 했던 것이다.
‘천근대력사(千斤大力士)’란 별호가 따라왔다.
특히 조부는 10장(약 30m)을 걸어가서는 동네 누각에 매달린 철종(鐵鐘)을 쳐대는 것으로 장(掌) 수련을 해
‘철파장(鐵破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팔극권은 역경(譯經)의 팔괘(八卦)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무술이다.
흔히 단타 위주로 타격력을 극대화한 무술로 통한다.
중국 무술계는 그 타격력을 붕감돌격(崩??突擊-태산을 무너뜨리는 일격)이란 말로 칭송했다.
직선적인 팔극권은 회전하는 동선(動線)을 중요시하며 부드러운 팔괘장(八卦掌)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는 게 선생의 설명.
복싱이 상반신의 힘만을 이용, 상대를 가격하는데 반해 팔극권은 자세를 낮췄다가 튀어나가는 힘까지 사용한다고 했다.
팔극권의 위력이 큰 까닭이다. 또 팔극권은 신체의 역학을 최대한 이용한 과학적인 무술이라 했다.
우 선생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 힘의 작용방향처럼 팔극권의 힘 작용점 역시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다”면서
“상대의 대응 방식에 따라 주먹과 보법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우씨 가문에서만 비전된, 남들에게 수련 모습을 뵈주지 않기위해 새벽에만 수련했다는 우 선생의 절기를 감상했다.
우 선생이 도복을 차려입고 자신이 운영하는 백양나무 묘목밭에 우뚝 서니 그 기풍이 좌중을 압도한다.
결코 단순한 무술이 아니다. 꼭 촉(蜀)의 장비(張飛)가 환생해 펼쳐 보이는 거친 싸움기술 같다.
솥뚜껑 같은 손과 건장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기력이 대단하다. 행기(行氣).
순간순간 숨을 토해내며 발력(發力)하고, 숨을 들이쉬면서는 진기(鎭氣)한다. 대신 기격(技擊)시에는 숨을 멈추도록 돼 있다.
철갑을 두른 몸으로 만든다는 수련법 철포삼(鐵布衫).
상대의 공격이 내 몸에 닿기 1촌(寸)을 앞서 내 몸통을 퉁겨 부딪쳐내면 상대의 손과 발이 오히려 부러지는 중상을 면치 못하게 된다.
진보(進步)와 동시에 폭발되는 주먹의 위력은 펄럭이는 도복바람에 묻어 나왔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생각이 들 정도.
소가 1로(小架 一路). 팔극권 기본 투로다.
상대를 향한 진공 방향과 90도로 비틀어선 기마식(騎馬式)을 서며 쳐내는 주먹이 바람을 가른다.
팔극권 특유의 틈보(闖步). 적의 공격권 안으로 갑자기 들어서는 보법이다.
발딛는 각도를 틀어대고, 허리와 어깨를 크게 휘두르며 기합과 함께 주먹을 연이어 쳐냈다.
소가 2로. 깨끔발로 시작된 보법이 땅을 힘차게 구른다.
기(氣)를 아래로 내리기 위한 방법. 땅이 쿵쿵 울릴 정도다.
이어 양장(兩掌)을 쭉 펼친 뒤 찬권(鑽拳).
좌수(左手)가 가슴아래로 쓸어내리는 동시에 지면을 향했던 권면(拳面)이 하늘로 비틀어 올려치며 우권이 터진다.
교묘하게 어깨와 허리를 틀어내는 그의 동작에선 한치의 허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병장기 역시 심후한 위력을 뽐낸다.
마른 뒤에도 물에 띄우면 가라앉고, 쇠의 강도를 자랑한다는 황화이(黃花梨) 나무로 만들어진
중봉(중봉·1.5m 가량의 길이)을 머리 위로 막고, 크게 돌려 내려쳤다.
단병기임에도 장병기 못지않은 힘이 실려있다. 팔극도(八極刀)는 주로 베는 식으로,
팔극검(八極劍)은 점혈을 위주로 운용되는듯 각각의 묘미가 살아았다.
그가 든 검은 태극권 4대 금강(金剛) 진정재가 선물한 것이라 했다.
감히 선생앞에 쌍수를 들고 기자가 나섰다. 자신있는 오른 주먹을 쳐냈다.
우 선생은 가슴을 뒤로 빼며 그대로 받는다.
그러더니 우 선생은 가슴을 뒤로 젖히며 기자의 손목을 비틀어 낚아 뒤로 확 잡아챘다.
선생이 십성의 힘을 썼다면 기자의 손목은 대번 부러져 나갔을 것이다.
주먹 힘의 뿌리는 어깨에 있다.
완전히 펼쳐진 기자의 주먹은 힘이 이미 다한 상태지만 어깨에서 가슴으로 안아쥔 선생의 수법(手法)은
허리와 어깨를 트는 동작으로 힘이 배가된다.
연이어 주먹을 쳐봤다. 나름대로 힘과 스피드에 자신있는 주먹.
그러나 오 선생은 철저히 횡(橫)으로 공격을 차단한다.
기자를 보고 한쪽 어깨만 보이는 기마식으로 선 자세에서 양팔을 앞으로 휘둘러 대며 한손은 기자의 손목을,
다른 손은 팔꿈치를 틀어 쥐고는 뿌리친다. 손목과 팔목이 서로 다른 각도로 꺾여진다.
강맹한 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금나’(擒拿·관절을 움켜잡는 기술)를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신 횡적인 공격은 종적인 수비로 무마한다.
선생이 복부를 노린 기자의 주먹을 자세를 낮추며 내려치니 기자의 팔 전체엔 섬뜩한 고통이 엄습한다.
8타(打). 머리와 어깨, 엉치는 항상 수직을 이루고, 양손과 팔꿈치, 대퇴부와 무릎은 파상적인 공세를 취하도록 안배돼 있다.
공격을 걷어내고 쳐들어오는 팔꿈치에는 턱뼈가 으스러지거나 늑골이 부숴지는 위력이 담겨있다.
특유의 팔극권 주먹과 함께 기마보로 내딛는 무릎은 상대의 정강이를 노리고 들어간다.
땅을 구르는 탄력이 실리면 상대는 부러진 다리뼈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내뒹굴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 멍춘의 최고수임에 틀림없었다.
“무술은 단순히 치고 박는 타격기술이 아니에요.
선조들의 체취와 지혜가 묻어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곱게 간직해야 할 것들입니다….”
선생의 조부는 말년에 팔극권에 대한 애착과 자신감을 한구절 글귀를 적어 표현했다.
“중국의 무술은 창저우에서 비롯됐고 창저우 무술은 멍춘으로 통한다.
멍춘 팔극권을 수련한 나는 곧 중국 무림의 최고수다….”
〈중국무술루창주(中國武術樓滄州), 창주공부루맹촌(滄州功夫樓孟村), 맹촌루아(孟村樓我)〉.
호흡모은 一擊 巨松도 바르르 기천문 박사규
11월 초 충남 계룡산. 하늘은 푸르고 단풍은 타는 듯 붉다.
그 자락에 자리한 신원사(新元寺)를 훑고 지나는 바람은 이미 차가워,
산사(山寺)에 깃든 만추(晩秋)도 깊어만 간다.
절 밑 식당가엔 기인이 하나 기거한다. ‘도(道)’ 닦는 사람이다.
계룡산에 들어온 지 벌써 5년째. 인연이 닿아 ‘기천문(氣天門)’을 익힌 뒤 계룡산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수행은 먼산 오르듯이 하라’. 기천이 이르듯 그는 이제 매일 계룡산에 오른다. 기천문 박사규(54) 문주다.
일출을 보기위해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계룡산 정상으로 향했다.
앞장 선 문주가 비추는 손바닥 만한 손전등에 의지해 기자, 사진기자가 뒤를 쫓았다.
나이 쉰을 훌쩍 넘긴 문주가 익숙한 산길을 쭉쭉 치고 올랐다.
“묘한 매력이 있어요. 한번 들면 떠나기가 쉽지 않지요. 몇 백년 동안 수양인들이 수도 없이 거쳐간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계룡산 곳곳엔 아직도 수양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아니나 다를까.
“움치~움치….” 등산로 옆 바위에 정좌한 도인이 보인다.
몸을 가린 담요 밖으로 얼굴만 빼곡히 내민 채 통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고 있었다.
문주는 “토속 신앙인이지. 자시(子時·밤 11시)부터 있었을 거요”란다.
반면 무술 수련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이 불가 승려거나 무속인들이다.
기천문도 정신적인 수련을 강조한다. 이는 기(氣) 수련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문주 말대로 기천은 종교가 아니다.
그는 무도인(武道人)이다. 단지 주먹 지르고, 발차기 해대며 싸움기술 익히기 보다는 정신, 내적 수양을 강조할 뿐이다.
산 중턱쯤에서 문주가 발길을 멈췄다. 뒤쳐진 기자일행을 위해 잠시 쉬기로 한 것.
기자의 질문에 그가 지나간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박 문주는 고등학교 때부터 합기도를 배웠다. 근데 체구가 작은 게 콤플렉스였다.
그래서 자기보다 큰 사람들이 시비라도 걸어올라치면 시쳇말로 ‘거의 반’ 죽여놨단다.
또 무술 잘한다는 사람 소리만 들으면 찾아가 한바탕 붙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대련 만큼은 적수가 없었다.
그러던 지난 79년, 임자를 만났다. 막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합기도대회에서 시범단으로 뛴 직후였다.
서울 약수동에 엄청난 고수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동자승 같은 외양이었는데, 글쎄 나보다도 몸집이 훨씬 작질 않았겠나.
그 정도라면 한 다섯쯤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
도장에서 정식 대련이 벌어졌다. 어이가 없었다. 처음 보는 무술에 처절하게 당한 것이다.
상대는 허리에 척 손을 얹고는 태연한 모습이었는데 별안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연비파문(燕飛波紋).
셋이면 독수리도 떨어뜨린다는 돌제비가 독수리를 내리 쫀다는 초식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바람처럼 몸을 돌려 들어오며 연타를 쳐오는데 뒷손이 보이질 않터란다.
몇 차례를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 동자승은 기천을 세상에 처음 알린 1대 문주 박대양(53) 진인.
어릴 적부터 설악산 등지에서 자라며 무술만을 수련한, 그야말로 도인이었다.
박 문주는 20여년간 박 진인으로부터 무술을 사사했다.
처음 3년간은 묵언(默言)했다. 감히 ‘수(手)’ 풀이를 청하지도 못했다. 주먹이 먼저 날라왔다. 감각부터 익힌다.
반복해 두들겨 맞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무술을 배울 수가 없다. 죽도(竹刀)에 맞은 온몸은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일쑤.
강한 것을 먼저 배워야 부드러움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욕심쟁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지요. 내가 어렵게 한 공부인데 (아무리 제자라도) 쉽게 남에게 줄 수는 없었던 거요.
또 그보다는 몸에 익지 않은 무술을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입산해서야 문하생을 뒀다.
특히 주말이면 사범급 수련생들이 배움을 청하러 계룡산에 들어온다.
문필봉(文筆峰). 정상에 닿자마자 거짓말 같이 해가 오른다. 어둠이 걷히는 사이 문주가 내가신장(內家神掌)을 선다.
일종의 기수련 정공법(靜功法). 천지인(天地人). 사람이 땅의 기운을 받고, 하늘의 기를 호흡하는 것이다.
일출 때가 하루중 기(氣)가 가장 왕성한 때다.
기천은 내가신장에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그만큼 기천의 핵심, 정수가 녹아있는 중요동작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하루종일 이 내가신장을 섰다.
동틀 때 시작한 수련이 저녁이 돼서야 끝났는데, 자세를 취하는 사이 발목까지 흙에 묻히곤 했단다.
두 팔을 머리앞으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펼친 채 다리는 기마식(騎馬式)을 선다.
허리는 바르되 엉덩이를 뒤로 한껏 뺀 자세가 특이하다. 왠지 온몸이 뒤틀린, 불편한 모양세다.
발 뒤꿈치는 밖으로 크게 벌어지게 놓는다. 문주는 그걸 ‘역근(易筋)’이라 불렀다.
내가신장 뒤엔 소도, 범도 등 역근법 동작이자 내공법인 육합단공(六合丹功)이 이어졌다.
기천 역사에도 달마대사가 등장한다. 달마가 장백산(백두산)에 와 산신(山神) 천선녀로부터 역근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무술에서의 역근은 조금 다르다.
단련을 통해 근육을 강하게 만든다는 중국식 수련방법이 역근.
반면 기천은 인간이 취하기 힘든, 즉 관절을 꺾는 자세로 근육에 긴장을 줌으로써 힘을 기르는 것을 역근이라 설명한다.
문주가 이어 검을 들고 운기한다. 다리는 금계독립(金鷄獨立). 한 다리를 무릎위로 들고 선 자세다.
위험천만이다. 문주는 정상 가장자리에 서 있는데 불과 1족장 뒤가 낭떠러지다.
혹여 실족이라도 하면 대형사고가 날 판이다. 기자가 “조심하시라”고 이르자, 문주는 “알고 있다”며 빙긋이 웃는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사진촬영에 들어갔으니 다리가 후들거릴만도 할텐데 그는 한껏 태연하다.
하산길에 믿기 힘든 얘기가 이어졌다. 기천은 본디 ‘산중무술’이다. 1대 문주 박대양은 ‘산사람’이다.
그의 스승이라는 원혜상인도 산에서 살다 산에서 돌아갔다. 그의 나이 160이 넘어서였다.
박 진인이 하산해 적수가 없었다지만 원혜상인은 더 대단했다.
축지법을 썼고 발차기 한번이면 바윗돌도 연탄재처럼 부서져 내렸으며,
쌀 한가마니 정도는 공기돌 다루듯했다. 그러나 원혜상인 이전의 기천 전인은 누군지 알 방도가 없다.
“처음엔 저도 믿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산속 생활을 사부한테 많이 물어도 봤지요. 뾰족한 대답이 없었어요.
하지만 기천을 수련하면서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중요한 것은 믿고 따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박 문주는 기천은 단군 이래 면면히 전해져온 민족고유의 전통무술이라 했다.
사료를 찾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전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일파를 이룬 한 검도단체 회장과 수벽치기의 고수조차 기천문 출신이라는 주장도 덧붙인다.
몹시 궁금했던 그의 무술을 감상했다.
신원사 앞 공터. 칠보절권(七寶切拳)이다. 걸음이 빠르고 가볍다.
3박자인 3성보(三星步). 공방 의도를 노출시키지 않는 최고의 보법이다.
잰 걸음으로 쳐들어가는 보법도 있다. ‘또르륵보’란다.
두팔을 들어 몸 안으로 휘둘러 치는 동작이 특이하다. 태껸의 활개짓과 닮았다.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안으로 말아 쥔 것도 특징. 대풍역수(大風易手) 초식.
앞차기를 날리는가 싶더니 연이어 장을 쳐낸다.
마무리 동작은 한 손을 펴 다른 손 팔목을 냅다 후려치는 동작으로 끝난다. ‘퍽’하고 둔탁한 소리를 낸다.
일보삼권(一步三拳). 한 걸음에 주먹을 세번 내친다. 특이한 것은 허리를 뒤로 크게 꺾는 동작이 불쑥불쑥 나타난다는 점이다.
얼핏 중국무술 ‘취권’ 동작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기천의 위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작이란 게 문주의 설명.
신체의 ‘반탄력’을 이용, 타격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는 그 힘으로 튀어나간다. 발차기와 주먹도 모두 여기서 출발된다.
손가락을 벌려 편 채로 안으로 접어 장(掌)을 쳐낸다.
금화장(金花掌). 거송의 밑동을 쳐 솔잎을 떨구어 냈다는 솔장법의 일종.
이런 기예는 기수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몸 안에 내공이 쌓이면 육체적인 힘은 최고 2배까지 위력이 배가된다.
더 중요한 것은 내공법엔 활생(活生)의 묘리가 녹아 있다는 것.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은 물론, 운기를 통해 질병 자가치료도 가능하단다.
“고수요? 그저 수양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기천은 정신을 깨치는 공부인 거지요.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은 사람이 찾아오면 그걸로 족합니다. 글쎄요, 계룡산엔 얼마나 더 있을지 아직 모르겠네요…”.
40년 입산내공 ‘파죽의 飛脚術’ 동이무예 택견 박성호
박성호가 동이 무예택견 특유의 발길로 대나무를 잘라내고 있다.
고수 찾기는 참 행복한 일이다.
무예하는 사람들이 항상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어찌 무술대가(大家)를 두루 만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겠는가.
게다가 주워들은 풍문은 많아서 ‘이것도 해봐라,
저것도 보여달라’고 ‘생떼’를 쓸 수 있는 입장이다보니 고수 만나는 재미가 더 쏠쏠해지는 것이다.
고수의 기예를 보고, 살아온 얘기를 듣다보면 왠지 오랫동안 알고지내온 사람처럼 전해지는 따듯한 감동은 또 무엇일까.
그래서 무림일가(武林一家)라 했던가.
설렘을 안고 강원도 홍천을 찾았다. 산 좋아하는 이들이 홍천 팔봉산(八峯山)을 ‘도사’가 살만한 명산이라 일컫더니,
그곳에 ‘비각귀(飛脚鬼)’ 박성호(46)씨가 살고있다. 그의 무술은 동이무예택견으로 알려져있다.
산사람. 7세 때 칡 캐먹으로 고향 충남 아산 영인산에 올랐다가 백발의 도인을 만난다.
마을서 3시간쯤 올라야 되는 먼 산중에 토담집이 한 채 덩그러니 있었는데,
웬 노인 하나가 손질, 발질을 해대는 게 꼭 학(鶴)같은 움직임이었다.
임태호 선생. 박성호는 그 모습에 매료돼 13년간 임 선생의 기예를 전수받는다.
마지막 5년간은 아예 약초 캐고, 물지게 지며 선생과 함께 살았다.
“‘수밝기’라고 하셨죠. 나중에 세상에 나와보니 택견이란 것이었지요.
동이무예택견은 후에 내가 붙여낸 이름이고요.” ‘수’는 천지도수(天地度數)요, ‘밝기’는 이치를 밝힌다는 뜻이란다.
도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이치를 밝히는’ 무술이 곧 스승의 무예였다.
택견도 지방마다 다르다. ‘동이무예’는 평안도 지방의 무예 특색을 드러내기 위해 생각해 낸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 임 선생 나이가 98세. 나중에 천수를 다했음인지 표연히 사라지셨을 당시엔 이미 111세였단다.
임 선생은 100세의 나이에도 얼르기(그는 택견 ‘품밟기’를 이같이 표현했다)를 매일같이 하고,
날아차는 비각술(飛脚術)도 간간히 수련하는 정력적인 모습이었다.
순 거짓말일까.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마시고 생식을 했으며,
산을 돌아다니며 운동도 충분히 했다니 모든 장수 조건이 갖춰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믿을 수도 있는 일이다. 박성호는 ‘내가 떠난 지 5년 안에 하산하라’는 선생의 말을 좇아 4년6개월만에 세상에 나왔다.
대나무 자르기. 발질(발차기)로 대나무를 격파한다고?
그런데도 ‘격파’보다는 보검으로 베듯하는 ‘자르기’가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홍천 내려가는 차안에서 가슴을 연신 콩닥거리며 어떻게 가능할까하고 궁리했던 일이다.
박성호가 택견하면 ‘허접’(?)한 궁둥이 춤으로 오인되는 세태가 안타까워 마지못해 짜낸 격파술이었다.
죽은 나무와 돌을 차대면 뼈와 근육이 다친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기자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속물들을 일깨우기 위한 방법이었다.
‘빠각’. 경쾌한 파격음. 너무도 쉬웠다. 수련생 하나가 어른 팔뚝 3분의 2쯤 되는 굵기의 대나무를 세워 잡고 있자니,
박성호가 쓸어차듯 몸을 휘둘러 냅다 발질을 해댄다.
오호, 이런 것이었구나.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다. 놀라울 뿐이다.
탄성이 대단한 대나무를 아무일 없듯이 잘라내는 폼이라니.
더군다나 그 표면이 예리한 칼날로 쳐낸듯 말끔하게 ‘싹둑’ 잘려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대나무 마디를 잘라낸 것도 아니다.
미리 잘라놓거나 물에 푹 불려놓은 대나무는 아닌지 기자가 몰래 땅에 쳐보고 했던 대나무였다.
자세히 보면, 어렴풋이 나마 그 비술의 비밀을 풀어볼 수도 있다.
먼저 체중을 몽땅 발질에 싣는다. 이 때문에 디딤발은 발차기 뒤에는 한발짝 앞으로 나가게 돼있다.
속도는 최대한 빨리 찬다.
또 대나무와 90도 각도로 부딪치는 발 면적을 최소화한다. 박성호는 발목을 안으로 당겨 굽혀 마치 ‘낫’처럼 만들어가지고는 발질을 한다. 이 상태에선 발목 인대와 뼈 조직이 마치 칼날처럼 뻣뻣하게 융기함을 알 수 있다.
방법을 안다고 흉내낼 수 있다면 어찌 비술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기자도 호기롭게 대나무를 차봤다. 차마 수련안된 발목으로 차지는 못했고,
발등으로 대나무를 부러뜨리려 시도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대나무가 꺾여나가기는 했다.
그러나 대나무는 결대로 쪼개지면서 터져 부러져나갔을 뿐이다.
“따로 격파 단련을 한 것은 아니예요. 오랫동안 수련하면서 응축된 힘이 다리와 몸에 자연스레 쌓이게 된 거죠.
” 야구 배트를 부러뜨리는 발차기라도 박성호 처럼 대나무를 난도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고수가 이같은 발질을 해내겠는가.
수련의 기본은 얼르기에 있다. 고(故) 송덕기 옹이 ‘품밟기가 택견의 전부’라 했듯이 박성호도 얼르기를 강조한다.
동이택견의 보법은 크게 4개지로 나뉜다. 삼수, 디듣자, 품자 보법이 있는데 그중 ‘갈지자(之) 얼르기’가 핵심이다.
몸을 앞으로 전진하며 다리를 눌러 밟듯이 한다. 골반은 전진 방향을 향하되 허리를 반대로 크게 틀어댄다.
고관절과 무릎, 오금과 허리 근력을 키우는 데 그만이다. 또 호흡법을 같이해 숨이 고르고 깊어진다.
비각술은 또 어떤가. 그의 택견은 특히나 공중에 몸을 날려 차내는 발질로 유명하다.
박성호가 몸을 날린다. 휘몰차기. 머리를 상대 앞으로 쭉 밀듯이 나가는 동시에 땅을 힘차게 차내며 위로 솟구친다.
곧 머리는 땅쪽으로, 허리를 심하게 틀어대는 힘으로 몸을 홱 돌리며 발을 쭉 뽑아 찬다.
공중 발차기인데 참 묘하다. 몸을 던지듯 체중을 고스란히 실어내는 모습이 뛰어나다.
허리 회전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치 높은 데서 뛰어내리며 상대를 밟는 듯한 파괴력이 터진다.
축구 오버 헤드킥을 연상시키는 난간차기 등 비각술 모두가 같은 특징을 보인다.
30여가지에 달한다는 비각술. 다른 무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술들이었다.
“장전한 총알을 쏘는 데 맞추지 못할 생각으로 격발할 수야 없는 일이죠.
몸의 탄력을 이용한 발질이기 때문에 곧바로 바른 자세를 잡을 수도 있어요.”
혹시 동작이 크거나, 발차기 뒤에 흐트러진 자세로 역습을 받을 우려는 없는 지 궁금해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힘이 들지 않아요. 반면 한두 달만에 그 효과를 볼려고 하면 배울 수 없는 무술입니다.
한 30년쯤 고련을 거쳐야 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헉 30년이란다. 얼르기는 그냥 걸어다니면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련이다.
반면 다리에 공력이 쌓이고 발질의 묘를 살려내려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산에 있으면 항상 푸근해요. 그래서 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구요.”
그는 여지껏 산과 함께 살아왔다. 어릴 적 양친의 재가로 산속 생활을 시작한뒤 산과 더불어 해온 인생이다.
지금 집도 팔봉산 자락에 다소곳이 홀로 얹혀있다. 마을과는 거리가 꽤 있다.
한발은 산에 담그고 다른 한발을 세상에 걸치고 있다. 사회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전수관을 몇 개 내고 제자를 키운뒤에는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동이무예택견 회장이지만 본업(?)은 심마니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강원도 산을 헤메며 산삼과 약초를 캔다. 사부로부터 산세 읽는 법을 깨쳐서 이 일엔 이골이 났다.
산삼을 찾으면 좋고, 못찾아도 그만이다.
다리 수련했다고 생각하고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터벅터벅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평생 산을 돌아다니며 기인을 두엇 정도 만났다고 했다. 축지법 쓰는 사람도 봤단다.
한번은 70쯤 돼 보이는 노인을 마주쳤는데, 도통 걸음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는 거다.
보폭이 2m쯤 돼보일 정도로 엄청났고,
일반 사람들이 걷는 11자 걸음이 아니라 두 발을 나란히 일자로 놓으며 물위를 미끄러지듯 산을 탔다.
한참을 쫓다가는 발걸음을 돌렸다.
“내 것(수밟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의 것을 배우려해서 뭣 하겠는가”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산에서 종종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곤 한다. 안타까웠다.
원체 배운 무술이 미천한데 산에만 들어가면 하늘도 날 것처럼 생각하고 입산했으니, 그 결과가 오죽하겠는가.
박성호 주장은 혼자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사부 임태호 선생 등 대부분 얘기가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진위를 가리기 힘든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자기 무술에 대한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평생을 수련해왔고,
그래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평안도 택견의 유일한 전수자일 거다.
설령 그게 아니라도 굉장한 무술 천재임에는 틀림없다.
40년 내공 ‘道통한 범’의 몸짓 선관무 원욱스님
범(虎)의 형상을 하고 서울을 내려 굽어보는 산이 호암산(虎巖山)이요,
천도해온 한양의 기(氣)를 꺾는 호암산 산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 자락에 조선 태조 때 창건한 절이 호압사(虎壓寺)다.
호랑이는 본디 꼬리를 밟히면 힘을 못쓰느 법이라하여 산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절을 세워 호압사라 칭했단다.
암벽를 타고 내린 낙수가 얼어붙고 장송이 태연히 가지를 높게 친 풍광에 가슴이 탁 트인다.
이 절 주지(住持)가 대단한 고수란 소릴 익히 들어온 터, 그를 찾아 나선 차였다.
단촐한 선방(禪房). 다상에 찻잔을 놓고 마주앉았다. 호랑이 산에 호랑이 스님이라. 주지 원욱(元旭)이다.
속가 나이 50. 단신이지만 다부진 체구에 준엄한 얼굴, 쏘는 듯한 안광이 예사롭지 않다.
고수의 눈은 다르다. 그 눈빛에 지레 질려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그래, 무술 얘기를 쓰신다더군. 그런데 잘못 찾아왔어. 난 무술의 ‘무’ 자도 모르는 사람이거든.
그저, 평생 수양을 해온 사람일 뿐이지….” 일이 꼬이는 것인가. 20대에 이미 절세고수로 알려졌던 기인.
그러나 30이 되기전에 무술을 버렸다. 무술 잘한다고 주위의 시기가 많았고,
그보다도 무승(武僧)으로 불리는 게 싫었다. 원욱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다.
그런데 처음 ‘차나 한잔 하고 돌아가라’던 원욱이 무술 얘기를 슬슬 풀어 놓는 것이다.
한달여를 연락하고 별러 찾아온 성의 때문인듯 싶었다.
“무술은 보이는 것만 가지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거요.
더욱이 불가(佛家)무술이야 불교사상을 먼저 알아야 하니 이해가 더 어려운 게지.”
그의 무예는 ‘선관무’(禪觀武·金剛乘禪觀武)다.
신라 원광법사가 천축에서 배워온 밀교 수행법에다 당대 전통무술이 결합돼 만들어진 무술.
참선과 단전호흡법 같은 정공법(靜功法)에다 발차기와 손기술 등 무술 공방(攻防)을 의미하는 동공법(動功法)이 어우러진다.
부산 범어사 양익 스님이 일제 강점기 그 맥이 끊긴 것을 노승들에게 한두 가지씩 비법을 얻어배우는 등의 방법으로
지난 60년대에 복원해 냈다. 원욱은 양익의 수제자다.
적의 허점 꿰뚫는 '경온쾌변' 보법
원욱은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지난 68년 충남 계룡산 갑사 출가를 전후해 이미 공수도와 합기도를 섭렵했다.
72년엔 범어사로 옮겨 양익의 1대 제자가 된다. 무술도 수행법의 하나라 말할 정도니 수련 강도는 일러 무엇하랴.
6년 수련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소릴 양익한테 들었다.
이후 원욱은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한다. 폭포수와 거목 앞에 서서 떨어지는 물 입자,
잔가지의 떨림을 헤아리는 등의 고감도 수련을 했다.
공중에 일단 몸을 띄우면 6~7번의 발차기를 날렸단다.
찻상위에 올려진 오래된 흑백 사진 한장.
거기엔 웃통을 벗어젖힌 청년 원욱이 엄청나게 솟구쳐 절간 처마를 차올리고 있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적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조계종 내부에서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혼자서 30여명의 오만불손한 자들을 소탕한 일과 같은 영웅담이 끝없이 이어진다.
얘기는 그쯤이면 됐다. 무술하는 이들은 대개 입담이 좋다. 첨언, 과장된 얘기도 적지 않으리라.
실제로 뭔가 보고싶어 슬슬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욱은 “무술을 안해본 지 벌써 십수년째고, 그래서 형(型)도 다 잊었다”고 딴청을 부린다.
지금은 가끔식 호흡법만 한다나. 그 나이에 경박하게 ‘폴짝’ 뛰어보일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못을 박는다.
단지, 공방(攻防)이라면 조금 보여줄 수도 있겠으나 손을 부딪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기자일행과 동행한 원욱 속가 제자는 손사래를 친다.
일전에 무술고단자들인 제자 5~6명이 한꺼번에 덤볐다가 엄청 깨졌다는 것.
그는 발차기 한대 맞고 몇달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고.
기자가 자청하고 나섰다. 영광일 따름이다. 그랬더니 원욱이 “그래, 자네는 무슨 무술을 했는고”라고 묻는다.
방에 들어서며 기자의 스승이 풀어낸 무술서를 눈여겨 본 터였다. “(책을 가리키며) A 선생께 무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했다.
그러니 원욱은 “오호라, 그렇담 적어도 (무술) 보는 눈은 있겠군”하고 껄껄 웃는다.
절 뒤 산비탈에 조그만 공터. “공격해 보게나.” 무술의 최고 경지는 결국 하나로 통한다고 했다.
절정 고수. 손을 부딪는 감각이 벌써 다르다. 원욱의 몸은 한껏 편안하되,
기자의 몸에 착 달라붙는 손놀림이 이미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무예가 일천한 기자에게는 감히 그 수준을 평하기조차 어려울 것 같은 벽이 느껴진다.
초식. 통상 주먹과 발차기가 각각 두어번씩 오가는 정도의 공방을 말한다.
기자의 공격은 단 한번씩으로 막혔고, 원욱이 되받아치는 물흐르듯한 공격은 연이어 터진다.
손에 사정을 두어서인지 1~2번의 공격은 어찌 막아보겠으나, 더 이상은 어려웠다.
기자에겐 그의 반초식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무작정 물러나서야 쓰겠는가. 뒤가 낭떠러지면 어쩌려고?” 물론,
냅다 뒤로만 튀는 것은 무술이 아니다.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장소가 좁으니,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원욱도 오랜만에 흥이 난 것일까. 대웅전 앞뜰에 섰다.
기자 무릎 관절이 대번 꺾여나가는 각도로 밟힌다.
얼굴을 스치는 원욱의 손끝에 고개가 돌아가기 또 여러차례.
명치를 피해 찬 원욱의 발차기에 가슴팍이 얼얼하도록 족히 서너대는 얻어 맞았다.
“허허, 죽은 손(공격할 수 없는 손)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시늉만 하지 말고 진짜로 들어와 보란 말이여.” 기자도 당한 만큼 오기가 생겼다.
발길질 한번에 주먹 한번쯤 질러보았을까. 원욱은 어느새 기자의 등뒤로 돌아와 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상대방 生死 아득히
보법(步法). 이것 하나만 제대로 익혀도 천하고수 행세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기자도 그런 고수를 만나본 적이 있다. 현대 격투기도 스텝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무술에서 말하는 보법은 또다른 차원의 것이다. 눈을 찌르고,
목 울대를 끊어내며 낭심을 차 올릴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는 관건이 바로 보법에 있다.
발걸음 하나에 목숨이 왔다갔다 할 판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묘(妙)가 물리적 빠르기보다는 상대적 빠르기에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허점을 헤집고 들어간다. 적의 동작 허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경온쾌변(輕穩快變). 무술이론가들은 “발걸음은 가볍고 안정돼야하고,
빠르고도 변화가 막측해야 최고의 보법”이라고 말한다. 원욱의 보법이 꼭 그랬다.
이때 기자가 갑자기 허공에 붕 뜨더니 그대로 뒤로 크게 넘어간다. 창촐간의 일이다.
크게 굴러 튀어 나갔어야 했을진대, 통 그럴 여유가 없었다.
등을 보인 채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으니 기자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다.
그런데 원욱은 놀랍게도 손가락 하나로 기자를 메다꽂았다는 것이다.
“풀잎 하나 꺾을 힘만 있어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이치지….”
(“내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찰나를 노려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챈 게로군.”)
그런데 촬영된 사진을 보니 얘기가 달라진다. 분명 원욱은 공격해 들어간 기자를 새끼손가락 하나로 낚아챘다.
엄지와 검지로 동전을 휘었다느니, 이지관수(二指貫手)로 송판을 뚫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식지만으로 진공해 가는 장정을 거꾸로 메다꽂았다는 기술은 금시초문이다.
풀어보자. 손가락은 결국 단단한 ‘고리’가 된다. 업어치기를 한 대부분의 힘은 역시 허리와 팔에서 나온다.
그렇더라도 원욱의 손가락 공력은 인정해야 한다.
손가락 하나가 아닌 손 전체를 사용했을 때 원욱이 사용가능한 무술적 힘은 상상을 불허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손과 발, 발걸음이 하나로 일치돼야 비로소 무술이랄 수 있는 거지.
무예는 곧 몸의 흐름이거든.” 기와집 처마를 차대고 손가락으로 사람을 메치는 기술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한 무서움은 원욱이 말한 절제되고 통일된 움직임, 그 ‘흐름’에서 나온다.
“그래, 자네는 무술도 하고 글도 쓴다니 참 복이 많구먼.”
호압사를 나서는 기자의 뒤통수가 따끔거린다.
행여 선승의 불심(佛心)을 잠시나마 어지럽힌 것은 아닌지….
“다 부질없는 짓인 게여.
무술이란 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생(生)과 사(死)의 문제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 하찮은 잔재주에 불과한 거거든….”
해탈의 秘技로 번뇌 끊는다
돌고 돈다. 새벽 이슬을 밟고 해질녘 스산한 바람을 쐬며 돈다.
내 몸과 자연이 곧 하나일진대, 무술의 경지는 논해 무엇하겠는가.
산수(山水)를 벗하고 또 스승삼아 무술 수련하는 즐거움이라니….
역경 팔괘철학을 근간으로 한 최고의 장법(掌法)으로 평가받는 고급무술 팔괘장(八卦掌)에 평생을 투자한 기인.
입산 15년여 세월에 모든 걸 버렸고, 동시에 모든 걸 얻었다.
인적 드문 속리산 기슭에 반듯하게 닦아놓은 팔괘 원주(圓周)는 소우주요,
신성한 제단과 다름아니다. ‘팔괘’는 그의 인생 전부였다.
“마음닦는 공부(功夫)를 하려고 조용하고 호젓한 곳을 찾아온 거죠.
내년쯤엔 속리산 깊숙이 들어가 평생을 지낼 작정이에요.”
팔괘장사 임창수(46). 무술에 홀딱 빠진 사람, 팔괘장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삶은 도인의 그것과 같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속에 묻혀 지낼 뿐이다.
지금은 속리산국립공원 입구, 터 좋은 곳에 마련된 개인별장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그 인근에 수천개의 돌을 주워다 쌓은 돌담집에서 10여년간 기거했다.
초등학생때 팔괘장을 처음 접한뒤 40년 가까이 연구에 매진해왔다. 임씨는 기자일행을 마치 가족인양 반긴다.
사람 냄새가 그리웠을 법도 하다. 그러나 속리산 생활엔 대만족이란다.
국내 팔괘장의 총본산은 인천시다.
화교 고(故) 노수전 선생이 한국전쟁 직후 인천에 정착,
70년대 후반까지 팔괘무술을 전파했다.
노 선생은 국내 중국무술의 역대 절정고수중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직도 인천 화교촌엔 그의 전인들이 팔괘장을 연마하고 있다. 임창수도 인천 사람이다.
지금은 노모(老母)를 돌보러 가끔 들른다. 그의 팔괘장도 노 선생 그늘밑에 있었다.
임창수는 무술 도적질을 했단다. 훔쳐 배운 팔괘장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스승을 모실 엄두조차 못냈다.
현재 인천에서 무예도장을 운영중인 선배, 동문들이 돈 내고 무술 배울 때 그는 어깨 너머로 익혔다.
기자에게 건넨 A4 용지 3장 분량의 글에 뼈있는 말이 담겨있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는 행운을 가졌더라면 오죽이나 행복했을까….’ ‘한(恨)’으로 남았으리라.
그래도 수련을 포기하진 않았다. 내부의 선생에 의존해 팔괘장을 익혔고, 그래서인지 자신의 팔괘를 한국형 팔괘로 칭했다.
각종 병장기를 갈무리해 별장 뜰앞으로 나섰다.
속리산의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원주가 떡하니 닦여있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지름 5m 가량의 원주는 팔괘 괘적을 따라 맨들맨들하게 밟힌 자국이 뚜렷하다.
팔괘장은 주권(走圈), 즉 원주를 도는 것부터 시작한다. 대개 수련 첫 2년간은 원주만 돈다.
내가(內家) 3권. 팔괘장은 태극권, 형의권과 함께 내기(內氣) 운용을 중시하는 무술로 통한다.
원주를 도는 사이 그 ‘공’이 쌓인다. 묘한 수련법이다. 진흙탕을 걷는 보법이라는 창니보(走尙泥步) 보법을 택한다.
다리를 끌듯 미끄러지고, 뒤뚱거리는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수련해본 이들은 그 공법에 마력적으로 끌린다. 발걸음도 빨라지거니와 발차기에도 대단한 힘이 붙기 때문이다.
전설같은 얘기도 많이 전해진다. 이런 것이다.
팔괘장을 처음 익힌 A는 미친 놈 소릴 들을까봐 한밤중에만 원주를 돌았다.
그것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남의 묘지에서였다.
그렇게 몇해를 수련하자 왠지 뭔가 차보고 싶어졌다.
눈에 띈 것이 비석. 그가 뻗쳐오르는 다리기운을 내뿜으며 돌로 만들어진 비석을 차자 그 중턱이 거짓말처럼 단번에 잘려 나갔다.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 맞을 걱정에 그길로 상경했다는 등등의 얘기다.
임창수는 30여분 동안 팔괘 투로(套路)를 시연하겠으며,
팔괘 2000여수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팔괘 창과 검, 봉, 쌍칼, 언월도 순으로 팔괘 병기 무술을 시연했다.
몸에 착 감겨 돌아가는 병장기 끝에 수련한 세월이 묻어난다.
마지막이 팔괘장 투로. 팔괘 보법에 따라 돌고, 휘둘러치는 원심력과 구심력을 사용한 힘쓰기가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반질반질한 원주의 일부분만 딛는 그의 발길엔 한치의 오차도 없다.
임씨는 “그렇게 원해도 (나는) 남들의 무술을 볼 수 없었는데 오늘 기자 양반은 호강한 것”이라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기자는 인천 팔괘장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이른바 용형(龍形), 또는 유신(遊身) 팔괘다.
청말 동해천 사조가 팔괘장을 창시한뒤 8명의 수제자가 각기 일파를 이뤄 생겨난 팔괘 유파의 한가지다.
중국에서 최근까지 유행하는 팔괘장은 모든 동작이 매우 유려하다.
보폭 넓은 보법, 허리와 장(掌)을 치켜든 손놀림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인천 팔괘는 잰걸음에다 뚜걱뚜걱 끊어지는 분절적인 장법의 모습이 뚜렷하다.
다섯손가락을 각기 떨어뜨려 안으로 자연스럽게 구부린 손모양도 독특하다.
임씨의 팔괘장에도 이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든 무술이 다 마찬가지다. 손과 발의 힘은 원활한 허리와 굳건한 다리에서 솟아나는 법이다.
그런데 임씨 투로동작엔 중간중간 허리가 보일듯 말듯 돌아가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간파되지 않는다.
중국식 팔괘와 원리는 같되,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했다.
발 앞꿈치를 안으로 틀어놓거나 원을 더 크게 도는 것과 같은 것들이 특징이란다.
그러더니 임씨는 돌연 그 이유를 발경(發勁)으로 설명한다.
중국 무술의 신비감을 무한대로 부풀려 놓은 게 발경법이다.
장풍을 쏜다느니, 태산도 무너뜨릴 힘으로 사람을 쳤다는 얘기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일반인들이 허무맹랑하다고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중국 무술가뿐 아니라 현대 격투가들도 따지고 보면 나름의 발경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1톤’(검증된 사실은 아니지만)의 위력이 담긴 펀치를 구사한다는 마이크 타이슨도 발경법을 쓴다고 풀어낸다.
무술가들은 먼저 타이슨의 무시무시한 허리놀림에 주목한다.
핵주먹의 위력은 모두 허리에서 토해진다.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스피디한 주먹을 내쏜다.
거구의 상대가 질풍처럼 달려드는 찰나에 묵직하게 체중이 실린 펀치가 작렬했을 때 무술에서 말하는 최고의 힘이 터지는 거란다.
그게 곧 일종의 발경이 된다.
임씨가 장으로 기자의 복부를 밀어보였다. 추장(推掌).
허투루 보낸 수련 세월이 아니다. ‘울컥’하는 진동이 밀려온다. 장은 보통 손목 부분에만 힘이 들어가도록 쥐기 마련이다.
팔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굽히되 의식적으로 힘을 뺀다. 대신 몸으로 미는 식으로 장을 쳐낸다.
손목을 한순간에 ‘꾹’ 내려 누르는 힘과 팔굽을 펼쳐 ‘퉁’ 튀기는 것이다.
허리힘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주먹은 표면에 부딪는 물리적인 충격을,
상대적으로 장은 내장을 상하게 하는 침투력을 최고로 삼는다.
고수의 장을 맞고 내상을 입어 몇달 동안 시름시름 앓았다는 얘기가 꾸며낸 것만은 아니다.
손바닥을 뒤집는대로 막측한 변화를 꾀할 수 있는데다
허리로 돌아갔다가 되돌아나오는 주먹보다 불필요한 예비동작이 적은 관계로 고수들일수록 장을 선호한다.
임씨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한 채 항아리를 끌어안듯하는 포장(抱掌), 손끝을 치켜 세워 도수로 쪼개는 벽장(劈掌),
장심(손바닥 중심)을 위로 떠받치듯 올려치는 앙장(仰掌) 등 8개 기본 장법의 독특한 운용법을 설명한다.
그는 이어 팔괘장은 최소 일갑자(60년)는 해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술이라 했다.
팔괘 원리에 따라 곡선의 움직임에서 직선적인 공격과 방어동작이 어우러지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무술은 고강해진다. 내공이 쌓이고, 팔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 신묘한 변화가 깊어지기 때문이란다.
원주를 돌다보면 의식과 함께 몸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원주를 돌며 얻는, 몸속에 잦아드는 충만된 에너지가 그의 삶을 지탱해준 원초적인 즐거움이요,
근본적인 힘이 됐다. 그 힘으로 임씨는 팔괘음악까지 만들었다.
‘40년짜리’ 창작곡이라는 기타 연주곡엔 ‘윤회’ ‘수레바퀴’ 등의 곡명이 달렸다.
세 곡조를 듣는 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박상문 사진부장은
“끊어질듯 이어지는 애절한 선율에 팔괘를 타고 휘도는 듯한 번뇌와 해탈이 동시에 묻어나는 것 같다”고 평했다.
배웅나온 팔괘도인 임창수는 아쉬운듯 헛개나무차 한봉지씩을 기자일행에 건넨다.
그라고는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휑하니 속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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