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고려불교에 있어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

醉月 2013. 10. 22. 01:30
고려불교에 있어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

問題의 所在
한국불교의 전체상을 규명하는데 있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려불교이다. 고려불교는 신라불교의 맥과 전통 내지는 사상을 이어받음과 동시 한편으로는 조선불교를 낳은 산파로서의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잘 고려불교를 秘密佛敎 儀禮佛敎 祈禱佛敎로 평가를 한다. 무엇이 고려불교를 이렇게 성격 짓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것을 密敎라 생각한다. 곧 밀교야 말로 고려불교의 핵심으로서 고려불교를 규명하는 열쇠(key)로서의 위상을 가짐과 동시 나아가서는 폐불기 조선조 500년이란 동면의 역사를 지탱케 해준 등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밀교의 연구는 한국불교의 실상을 규명하는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될 것이다.
본고 <고려불교에 있어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은 그 논제가 말해주듯 고려불교사 속에서 밀교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고찰로서 이 고찰은 우리 모두의 과제인 한국불교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큰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Ⅰ. 서론

고려불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祈福攘災와 密敎儀禮와 鎭護國家의 특성을 가진 불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사서인 {高麗史}는 護國 및 消災에 관한 密敎道場佛事의 기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고려불교를 護國과 消災의 불교로 특징 지우게 한 根底에는 후삼국통일이라고 하는 대과업을 완수하고 高麗라고 하는 통일국가를 건립하려 했던 太祖王建의 佛心과 건국이후 끊임없이 고려를 침공해 온 遼.宋.元 등의 隣國에 고통을 당했던 역대 제왕들의 護國과 護法理念,말하자면 이와 같은 課業과 災難을 佛法에 의해 완수하고 拔除시키려고 했던 왕건을 비롯한 고려역대 왕의 信仰이 있었으며, 그리고 이와 같은 <護國卽是護法> 이라고 하는 國家理念이 굳건히 다져지게 된 데에는 護國과 祈福을 기본이념으로 삼는 密敎思想이 뒷 받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고려는 建國 初부터 祈福攘災와 鎭護國家를 기본이념으로 삼는 밀교를 국가의 庇護下에 두면서 護法卽是護國이라고 하는 國家佛敎의 실현에 매진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태조왕건은 한반도 통일 이후 신라의 정치이념으로 민중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던 불교사상을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도입하여 나라와 주인이 바뀌어 不安해하고 있던 민중들의 동요를 최소화 하였으며 여러 가지의 불교사상 가운데 특별히 고려의 통일완수에 기여가 많았던 밀교종파 神印宗에 큰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곧 {三國遺事}에는
[내가 창업 당시 해적의 來侵이 있어 安惠와 朗融의 후예인 廣學과 大緣 등의 두 大德을 청해 물리쳤으니 이들 모두는 龍樹의 法을 이어 받은 密法 九祖인 明朗의 후손들이다. 나 태조는 이들 두 대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賢聖寺를 창건하여 神印宗의 본거지로 삼을 것이니라]하여 태조가 고려의 수도인 開城에 신인종의 本山인 賢聖寺를 창건(936년)하고 신인종의 종조인 明朗法師(612∼682)를 龍樹菩薩을 初祖로 하는 金.胎兩部 正純密敎付法의 第 九祖로 인정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신인종 종조인 명랑법사를 중국의 神異軍國佛敎家로 유명한 密敎의 大家 不空三藏의 손 제자로 명시했다는 상기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밀교종파 신인종에 대한 왕건의 의지 말하자면 신인종을 고려를 鎭護하는 신이군국종파로서 인정하겠다는 왕건의 신념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불교를 논함에 있어 앞의 기사와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종파가 또 하나의 밀교종파인 總持宗이다. 현존자료만으로는 이들 두 밀교종파 신인종과 총지종의 종파적 성격 말하자면 그들의 宗旨가 무엇이며 이들 두 종파가 갖는 특징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현존의 여러 가지 사료를 종합해 볼 때 신인종은 護國을 그리고 총지종은 祈福消災를 종지로 삼은 종파였으리라 추정된다.

 

곧 이들 신인종과 총지종이 갖는 宗旨나 특징은 한국밀교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데 있어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것으로 반듯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신인종은 그 이름 그대로 神印(Mudra) 말하자면 身密中心의 밀교로 護國的 性格이 강한 종파임에 반해 총지종은 陀羅尼(Dharani) 말하자면 口密中心의 밀교로 祈福과 消災的 性格이 강한 밀교종파였으리라 추정된다.

 

아무튼 신인종의 개종(679년)에 십여 년 늦게 開宗된(692년)총지종은 善無畏와 金剛智 兩 密敎三藏의 入唐 前 말하자면 중국에 正純密敎思想이 전래되기 이전 唐에서 聖觀音法의 大家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智通의 제자인 惠通(640∼710)에 의해 개종되었으며, 이후 明曉→惠日등으로 付囑되었을 것이 확실함으로 신라시대의 총지종은 聖觀音法을 중심으로 하는 雜密에서 金.胎兩部의 純密로 점차 발전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純密展開 이후 곧 바로 신라 말 고려 초라고 하는 과도기적 시대상황과 호국과 消災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高麗朝를 접하게 되어 대승불교의 진수를 이어받은 正純密敎로 발전하기 보다는 陀羅尼의 神秘性을 중시하는 기복과 소재중심의 밀교종파로 후퇴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Ⅱ. 고려불교사에 있어서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

본고는 高麗朝라고 하는 시대상황 하에서 전개된 高麗密敎 곧 鎭護國歌와 祈福攘災라고 하는 성격을 가진 고려불교 속에서 호국적 성격이 강한 신인종과 祈福과 消災的 성격이 강한 총지종이 가졌던 위상 말하자면 고려불교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인.총지 두 밀교종파의 위상을 념두에 두면서  {高麗史}와 그것의 밀교적 성향, 2) {高麗大藏經}의 雕造佛事와 밀교의 호국사상, 3) 태조왕건의 건국이념과 밀교보호정책, 4)道詵國師와 밀교의 만다라사상 등을 간략히 고찰하여 고려불교의 개관 내지는 고려불교에 있어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高麗史}와 그것의 밀교적 성격
고려시대의 正史 {고려사}에는 매월 아니 매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없이 많은 각종 道場佛事가 그것도 역대 제왕들의 참석 하에 개설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佛事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려불교사상의 근본이념인 護國과 消災를 위한 密敎道場佛事였다. 왜냐하면 {고려사}世家編에는 仁王百高座道場(124회),佛頂尊勝道場(40회),功德天道場(13회),消災道場(147회),文豆婁道場(5회),四天王道場(2회),無能勝道場(8회),摩利支天道場(9회),金光明經道場(27회),靈寶道場(11회),祈攘法席(7회),般若道場(20회),帝釋道場(23회),大日王道場(1회),眞言法席(1회),祈雨.止風.龍王道場(23회),閻滿德加威努王神呪道場(1회),阿 波拘神道場(1회),孔雀明王道場(1회),藥師道場(3회),北帝天兵護國道場(1회),鎭兵法席(4회),天兵神衆道場(20회),文殊道場(10회),灌頂道場(9회) 등 호국과 소재를 위한 密敎道場法會가 총 25종 511회에 걸쳐서 개설되었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에 [設齊][設道場]또는[每年常例]등의 기사 까지 포함시킨다면 고려조에 개설된 호국 및 소재도장은 1000회를 넘게 되어 고려불교를 호국불교 내지는 기복양재의 국가불교라 정의 내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또 {고려사}에는 仁宗.康宗.元宗.忠烈王.忠宣王 등의 즉위식이 밀교의 灌頂儀式으로 행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사들은 고려조에 있어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려 주는 충분하고도 확실한 근거가 되는 자료들이라 할 것이다.

 

2) {고려대장경}의 雕造佛事와 밀교의 호국사상
고려조에는 전 후 2회에 걸친 {대장경}의 雕造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뒤이어 {속장경}의 조조까지 이루어 지는 등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조하고 간행하였다.
곧 대장경 조조불사는 이러한[護法卽是護國]이라는 高麗朝의 國是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재 海印寺에 수장되어 있는 高宗代에 조조된 고려대장경에는 잡부밀교경전은 말할 것도 없이 善無畏(5부 17권),金剛智(8부 11권),不空(109부 152권) 등 唐代의 純密家에 의해 譯出된 밀교경전이 122부 180권 그리고 天息災(19부 58권),法天944부 73권),法賢(56부 91권),施護(115부 258권) 등 宋代의 밀교가에 의해 譯出된 밀교경전이 무려 234부 480권이나 수재되어 있으며, 또 뒤이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해 조조된 續藏經佛事에도 {大日經} {消災經} 등 11經 2論에 대한 密敎經疏가 무려 77부 266권이나 수재되어 있다. 모두가 護國과 消災를 강력히 주창하고 있는 밀교경전의 조조와 간행에 의해 국가를 鎭護하려고 했던 고려조의 佛心 말 바꾸면 밀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이 깃든 대작불사임은 말 할 것도 없다. 고려조가 밀교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라 하겠다.

 

또 고려조는 이들 고려대장경과 속장경 조조불사 이외에 {金書密敎大藏經}도 간행했다. 곧 이제현이 쓴[금서밀교대장서]에 의하면
[佛書가 중국에 들어 와 무려 천만권이나 역경되었다. 그러나 타라니는 중국에서조차 번역되지 못하였다. 옛 선학들이 타라니의 쇠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편찬하여 <密敎大藏>이라 이름하니 무려 90권이나 되었다. 90권이란 세상에 유포된 천만권의 근저이다. 주상전하(忠肅王)께서 佛典 특히 밀교에 특별한 신심을 내 보이시어 국가의 진귀한 탕재를 내리시어 구본을 다시 교정하였고 뿐만 아니라 구하지 못했던 40권까지 새로 구해 도합 130권으로 만들어 이들을 工書에 명해 모두 金書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金書密敎大藏經>이다. <금서밀교대장경>이야말로 眞法寶가 아닐 수 없다]고 하여, 충숙왕이 1328년(충숙왕 15년) 90권의 구본 밀교대장경에 중수본 40권을 추가시켜 이들을 金書로 다시 써 130권의 새로운 {금서밀교대장경}을 간행했음을 알리고 있다. 90권의 구본 밀교대장경이 언제 누구에 의해 발원되고 사경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 안타까운 일이나 1275년(충렬왕원년) 충렬왕의 발원에 의해 銀字로 寫經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不空 索神變眞言經} (菩提流志譯 대정장 No.1092 30권) 을 통해 추측해 볼 때 충렬왕이나 또는 그 이전인 고종왕 때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아무튼 고려불교계에서 밀교가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과 역대왕들이 밀교를 얼마나 중시했던가를 한마디로 알려 주는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다.

 

3) 태조왕건의 건국이념과 밀교보호정책
고려조의 밀교성행을 논하는데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태조왕건의 밀교보호정책이다. 곧 태조는 건국 초부터 신라의 정치이념이기도 했던 불교사상을 고려의 정치이념에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대업을 뒷 바침 하는 호위력 말하자면 호국불교로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다시 말해 태조왕건은 {訓要十條}라고 하는 후대제왕들이 반듯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10가지 敎則을 제정해 놓았는데 왕건은 제 1조부터 고려가 불교국가임을 명시해 놓고 뒤이은 제2조와 제 6조에 이르러서는 구체적인 지시까지 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곧
[제1조, 국가대업은 반듯이 불교의 호위력에 달려 있다. 그런 까닭에 禪敎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수행케 하고 업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제 2조, 모든 사원은 승 道詵의 말을 따를 것이며 함부로 절을 지어 地德의 손상이 없게 하라. 제 6조, 나의 염원은 燃燈과 八關에 있다. 연등이란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며 팔관이란 五嶽의 名山과 大川의 龍神을 섬기는 일이다.]라 하는 기사가 그것인데 이것을 정리하면
① 고려국의 흥망성쇠는 부처님의 호위력 여하에 달려 있다.
② 2부처님의 호위력을 받기위해서는 전국 곳곳에 사찰을 창건해야만 한다.
③ 현존하는 전국의 사찰은 그 모두가 密敎禪僧인 道詵國師가 그의 寺塔裨補法에 의해 세워 놓은 사찰이다
④ 따라서 이들 사찰 이외에 멋대로 세워서는 안 된다.
⑤ 八關齋나 燃燈會는 부처님과 그의 권속인 八部神衆을 모시고 섬기기 위한 佛事이므로 매년 반듯이 행해야 된다.
는 내용이다.

 

따라서 왕건의 정책 내지 인생관과 세계관이 담겨 있는 {훈요십조}를 통해 왕건을 평가해 볼 때 왕건은[호법즉시호국]이라고 하는 鎭護國歌佛敎思想을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며, 또한 그는 이러한 그의 통치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매년 팔관재와 연등회를 국가차원에서 設行하였으며, 또 밀교선승인 도선스님을 국사로 모시고 그가 주창한 寺塔裨補宅地法에 의해 전국의 사찰을 건립하고 정비하였음을 알 수있다. 곧 고려조의 국가시책으로서 역대제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는 왕건과 불교 말 바꾸면 불교에 대한 왕건의 신앙심과 밀교선승 도선의 사탑비보설에 대한 그의 믿음과 철학이 얼마나 깊고 철저했는가를 말해주는 것으로 고려불교를 논함에 있어 밀교신봉자 왕건을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왕건이 재위기간 중 행한 여러 가지 불교적 치적들을 밀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즉위 2년째인 919년 왕건은 수도인 개성에 法王寺와 內帝釋원 등 10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법왕사를 수 사찰로 지정 法王에 해당되는 밀교의 大日如來를 主尊佛로 안치하고 법왕사의 연례행사로 매년 팔관재를 개설하였다. 또 태조 7년(924)에는 九曜堂과 神衆堂 그리고 外帝釋院을 건립하여 제석신앙에 대한 왕건의 깊은 신앙심을 엿 보게 하고 있으나 八部神衆과 九曜信仰을 포함하는 이러한 재석천왕 신앙은 삼라만상의 일체존재가 모두 法身 毘盧遮那佛의 化現이라는 밀교철학에2 근거를 둔 신앙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제석도장]이 역대제왕을 통해 23회 개설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모두가 國是인 {훈요십조}에 대한 경외와 태조 왕건이 몸소 실천했던 제석신앙에 대한 역대제왕들의 굳건한 信行의 결과라 사료된다. 또 태조는 19년(936)에 밀교종파 신인종의 고려본산으로 개성에 현성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는 {三國遺事}제6 [神呪]편의
[태조가 고려조를 창업할 때 해적의 來侵이 있었는데 廣學.大緣 등 神印宗 승려들이 밀교의 작법을 통해 이들을 물리쳐 진압시켰다. 이들은 신인종 종조인 明朗法師의 후예들로서 태조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賢聖寺를 창건하였다]
는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인종의 고려본산 현성사는 다름 아닌 밀교를 호국의 종파로서 인식한 태조왕건의 굳건한 믿음에서 건립된 사찰이었던 것이다.

 

이상 우리는 태조왕건의 밀교선승 道詵國師의 중시, 法王寺를 비롯한 內外의 帝釋院 건립과 년례행사로서의 八關齋와 제석도장 개설, 그리고 밀교의 신인종을 호국종파로서 인정하고 신인종의 고려조 본산인 현성사를 창건한 기사 등을 살펴 보았으나 이러한 기사들은 고려태조 왕건이 護國을 宗旨로 삼는 밀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했음을 의미하는 것임과 나아가서 고려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의 이와 같은 밀교중시사상은 고려불교를 호국과 소재의 불교로 방향 짓게 하는 근원적 계기가 되었음도 아울러 잘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4) 道詵國師와 密敎의 曼茶羅思想
고려불교를 밀교적 불교로 방향 짓게 한 또 한 사람의 장본인은 다름 아닌 密敎禪僧 道詵國師이었다. 까닭인즉 신라 말 禪門九山의 일파인 桐裏山의 開山祖 惠徹禪師(784∼861)의 제자인 밀교선승 도선국사(825∼898)야 말로 신라의 국운과 함께 점차 침체되고 있던 통일신라 말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사상인 密敎禪을 수용하여 꺼져만 가던 당시의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서는 삼국의 새 주인공이 된 고려조를 불교국가로 부흥케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잠시 도선이 활약하고있던 9세기경의 신라불교계의 동향을 살펴 본 후 뒤이어 도선이 어떻게 해서 밀교선을 주창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당시의 신라불교계에는 원효와 의상의 눈 부신 활약 이후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던 華嚴思想과 신인.총지 양 밀교종파에 의해 수용된 善無畏.不空三藏 등의 신 불교 正純密敎思想이 민중 깊이 신앙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새롭게 신라에 전래된 새로운 불교사상이 다름 아닌 禪思想이었다. 다시 말해 화엄과 밀교가 성행하고 또한 이들 두 종파가 상호 교섭하며 융통을 꾀하던 당시의 불교계에 선사상이 새롭게 전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롭게 전래된 신불교 禪思想 (馬祖 道一의 혈맥인 洪注宗의 계통이었음)은 처음에는 이미 민중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화엄 및 밀교사상에 의해 반발당하고 거부당했지만 新羅下代의 새로운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한 傍系 金氏 王室(후에 37대 宣德王이 된 金良相의 家系)과 지방호족세력의 도움과 보호 그리고 기존의 불교사상과의 대치적 자세가 아닌 조화와 융화로서 상호의 융합을 꾀한 선종 자체의 노력의 결과로 점차 신라불교계에 수용되고 정착하게 된다. 곧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唐留學을 마치고 귀국한 도선의 師僧 惠徹禪師는 禪과 敎의 융합과 조화를 모색하면서 桐裏山을 중심으로 선사상의 홍포에 전념했다.

 

곧 文聖王의 질의에 대한 답신인 혜철선사의 [利國之要事若干條]의 기사 내용이나 桐裏山에 大安寺를 개산하면서 설파했던 宅地法에 대한 그의 철학과 사상, 또는 唐土에 서 祈雨祭를 드리면서 비를 내리게 했던 그의 神驗記事 등은 밀교에 대한 그의 해박함 내지는 당시 중국선종계의 풍조이기도 했던 禪密 交涉의 계승자로서 융통과 조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가는 모습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禪密交涉時期에 불교계에 등장한 분이 바로 道詵스님으로서 도선은 師僧인 혜철이 지향하던 선밀융합사상을 수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密敎를 중심으로 하는 禪 말하자면 密敎禪이란 새로운 장르의 불교를 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곧 도선은 밀교 특히 山川裨補思想을 그의 중심사상으로 삼고 이것을 전 국토에 적용해야 한다고 主唱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도선은 밀교경전이 설하는 건립만다라법을 응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만다라로 보고 전 국토 가운데 勝地를 택하여 그들 승지마다 사찰을 건립해야 국가와 민중이 평안하고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는다고 하는 소위 산천비보사상을 주창했던 것이다.

 

곧 {高麗國師道詵傳}의
[삼한의 산수 가운데는 3800군데 의 勝地가 있으니 이 승지 마다 마다에 점을 찍어야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이 급한 병을 당할 때 혈과 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바로 쾌차해지는 것처럼 산천의 병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서 내가 승지로 정한 곳 마다 사찰을 건립하여 부처님을 모시고 탑을 세운다면 침이나 뜸이 주는 효능처럼 나라에 큰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일컬어 裨補라 하는 것이다]
란 기사내용과 또 {白雲山內院寺事蹟}의 [산천 가운데에는 병들고 쇠한 곳이 있으니 모자란 곳에는 사찰을 세워 모자람을 보충하고 지나친 곳은 부처님을 모셔 지나침을 억눌러야 된다.

 

또 앞이 너무 트여 달아 날려고 하는 곳은 탑을 세워 이를 머물게 하고 뒤로 등을 짓고 돌아서 가려는 곳은 幢竿을 세워 머물게 한다면 도적과 전쟁을 막고 선과 길함을 드높이게 되는 것이 되어 자연히 천하가 태평해지고 불법 또한 殊勝해 지는 것이다]
란 기사내용이 바로 도선이 주창한 山川裨補思想으로서 이러한 사상은 다름 아닌 鎭護國歌와 現世利益을 위해 {蘇悉地經} 및 {蘇婆呼童子經} 등의 밀교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建立曼茶羅宅地法 말하자면 一切悉地決定成就法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의 [신라 말 僧 道詵이 唐에 들어가 一行和尙의 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秘記를 지어 전했다]

 

고 하는 기사는 도선의 입당 사실을 확인시켜 줄 확실한 자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선스님(825∼898)의 생존년대가 일행화상(673∼727)의 생존년대 보다 150여 년이나 늦어 터무니 없는 허위설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터무니 없는 허위설은 어떻게 해서 세상에 유포된 것일까? 그것은 도선의 비보사상을 권위시켜 보려는 당시불교계의 움직임 다시 말하면 도선을 {宿曜儀軌} {七曜星辰別行法} {北斗七星護摩法} {梵天火羅九曜} {藥師琉璃光如來消災除難念誦儀軌}등 宿曜와 護摩 그리고 藥事法 관계의 권위자인 唐의 密敎僧 一行和尙과 관계 지어 도선의 위상을 높여 보려던 도선계 승려들의 움직임 내지는 음모에서 생긴 낭설이었다.

 

곧 도선의 입당기사 내지 일행화상으로부터의 付囑說은 도선을 선승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밀교승 일행화상의 밀교비법을 계승한 밀교승으로 둔갑시켜 보려는 도선계 승려들의 계획적인 의도에 의해 유포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진위야 어떠하든 건립만다라택지법의 권위자 밀교승 일행화상의 부촉제자로서 높이 평가받은 도선과 그가 주창한 비보사상은 고려태조 왕건의 시대로부터 고려조 500년 나아가서는 이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흥망성쇠의 척도로서 중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길흉화복의 비설로서 까지 중시되어 사회전반에 유포되어 전해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곧 고려 仁宗代의 僧 妙請의 西京遷都의 亂이라든지 몽고지배하의 三別抄의亂 또는 恭愍王代의 僧 辛 의 平壤遷都의 亂 등의 高麗朝에 있었던 사건들과 李朝 初의 개국과 건도에 따른 소동 그리고 현대 우리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풍수 등의 민간신앙은 모두가 도선의 산천비보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도선의 사상을 밀교의 택지법이 아닌 山水와 地勢의 局面을 觀相하여 그 位相의 吉凶을 점치는 말하자면 地理觀相術로서의 風水地理說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러한 학설은 도선의 활동기나 당시의 중국과 신라불교계의 시대상황 내지는 도선의 行錄이나 密敎敎理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망설임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여러 가지의 파문을 일으키면서 나날이 중시되어 온 도선의 비보사상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은 이조에 들어 와 점차 유교적 풍수도참사상으로 옷을 바꿔 입게 된다. 곧 이조태조는 새로운 국가인 이조의 정치이념으로 고려조의 정치이념으로 고려조 지탱의 근간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를 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고려조에서 성행하던 도선의 밀교적 비보사상이 유교적 풍수지리설로 둔갑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곧 {龍飛御天歌}의
[九變圖局이란 神誌가 찬술한 圖讖의 별도의 이름이다] (제 15장) [한양천도설은 신지와 도선의 도참설에 의한 것이다] (제 16장)란 기사나, 또 {李朝實錄}의
[이 곳은 송나라의 胡舜臣이 말하는 水波長生衰敗立室이란 곳이다. 호씨의 책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조2년 12월조)
라고 한 建都에 대한 찬반기사 등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이조에 들어 와 도선의 비보사상이 風水圖讖思想으로 둔갑되고 또한 도선 대신에 유교의 풍수도참사상가인 神誌와 송나라의 유학자 胡舜臣이 이 분야의 대가로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을 보여 주는 기사라 하겠다. 이러한 둔갑 내지 변화는 정치적 과도기와 시대의 흐름에서 오는 자연적 推移인 것이지만 아무튼 밀교의 만다라택지법에 근원을 둔 도선의 비보사상이 고려의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고려불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 만큼은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상 1) {고려사}와 그것의 밀교적 성격 2) {고려대장경}의 雕造佛事와 밀교의 호국사상 3) 태조왕건의 건국이념과 밀교보호정책 4) 도선국사와 밀교의 만다라사상이란 소주제를 중심으로 <고려불교에 있어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이란 주제를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밀교는 고려불교를 지탱해 온 중심사상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곧 고려불교를 일컬어 비밀불교요 의례불교요 기도불교로 특징짓는 까닭이 고려불교가 밀교중심의 불교 다시 말해 의례와 기도를 그 근간으로 하는 밀교였기 때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