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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대공수사 秘話(비화)

醉月 2008. 11. 21. 12:44

故(고) 金昊翊(김호익) 총경의 對共(대공)수사 일기, 경찰 威力(위력)에 압도된 공산당 지하로 잠적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1949년 8월 12일 낮 한 경찰관이 공산당의 흉탄에 맞고 쓰러지면서 절규했다. 약관 30세의 金昊翊(김호익) 총경. 그는 국회에 스며든 공산당(국회 프락치), 공산당 총수 朴憲永(박헌영)이 지하에 심은 세포조직들을 一網打盡(일망타진) 한, 빨갱이 잡는 명수였다. 그는 빨갱이의 흉탄에 맞고 쓰러지던 그날까지 박헌영과 그 졸개들을 쫓아 침식을 잊고 뛰었다.
그의 외아들 英政(영정-67)씨가 故人(고인)의 59주기 제사를 지내면서 한권의 낡은 책을 발견, 본지에 보내왔다. 아버지 김 총경이 남기고 간 일기책이다. 이름 하여 金昊翊 搜査日記(김호익 수사 일기). 공산당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상이라 했다. 그의 절절한 애국심과 충성심, 직무에 대한 남다른 열정 그리고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빨갱이 잡기에의 집념, 잊혀졌거나 가리어진 진실, 새로운 사실 등--- 생생한 史實(사실)로서의 가치가 있어 본지는 고인의 수사 일기를 연재하기로 했다.(편집실)
그런데도 좌익 박 모  변호사는 한겨레신문에 국회프락치 사건은 날조󰡑��라는 글을 실었다.(89.8.24)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고인의 아들 영정 씨가 아버지의 생생한 증언록을 한국논단에 가지고 왔다.
공산당의 악랄하고 비인도적인 파괴행위에 대한 경찰관 김호익의 직무에 대한 충성과 정치적 신념 그리고 절절한 반공정신은 오늘의 대한민국 경찰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아울러 당시의 거리풍경, 경찰관행 그중에서도 특히 증거포착을 위해 분명한 용의자를 앞에 놓고도 체포하지 않는 신중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나 지금이나 악랄하기 짝이없는 빨갱이들의 행태는 흥미진진하다.
당시의 관행대로 지나치게 많은 한자와 구투를, 文意(문의)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대어로 고쳐 싣게 됨을 애독자 여러분께서 양해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단기 4279년(1946년) 7월 20일>
밤 12시를 알리는 천주교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나는 이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오늘은 그 말썽 많은 박헌영에 체포령이 내렸다>
워낙 몸이 비대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나면 몸에 땀이 배서 양복에서 땀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런고로 집에 돌아오면 수도물을 온몸에 끼얹어 목욕하는 습성이 나에게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 일기를 쓰는 시간이 또한 나의 즐거움이다.
오늘은 그 말썽 많은 박헌영에게 체포령이 내렸다. 박은 변장 잘하기 조선제일이라고 하니, 그자가 또 어떠한 姿態(자태)로 변모 했을까?
지금쯤은 어디 숨었을까? 어떤 좌익청년 집에 숨어 있겠지. 이건 나의 가장 큰 흥미를 끄는 사건이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그러나 이리 생각, 저리 생각해봐도 박의 행방은 알도리가 없었다.
박헌영! 그는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미군정이 길러준 방화, 파괴의 두목이다. 국립경찰은 이때일수록 실력을 발휘하여 건국도상의 조국을 좀먹는 소련방의 맹목추종자를 숙청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박이 이북으로 도피하였다고 하자.(실제로 박은 棺(관)속에 시체로 둔갑하여 38이북으로 도피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까지의 사업을 포기하고 가지는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 나로서의 할일이 많아짐을 느끼게 되었다. 새벽 한시가 돼간다. 자야겠다.

<7월 23일>
아직도 박헌영의 행방은 오리무중에 쌓여 수사의 단서조차 찾기가 곤란하다. 어떤 정보에 의하면 장의차를 타고 가두에서 연락을 한다고 하는 설도 있고, 또 어떤 정보는 38선 이북으로 도망하였다는 설도 있다.
박헌영이 설사 이북으로 도주했다고 해도 그 측근들은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것이 확실하다고 우리 경찰은 인정한다. 따라서 그들의 거처를 탐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박이 도망갔더라도 그냥은 안갔을 것이다. 그는 보통 공산도배들과는 달리, 조직력이 강한것을 우리 스스로가 솔직히 인정한다.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틈에 雨後竹筍(우후죽순)격으로 이곳저곳에서 공산당의 세포조직은 여전히 팽창해 감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민족이 완전독립을 하여 안전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소련의 走狗(주구) 공산도배를 완전히 西伯利亞(시베리아)로 추방하여야 한다.
보라, 공산주의를. 칼 마르크스가 제창할때는 인류전체를 구하겠다는 몽상적 이상에서 터무니 없는 철학적, 사회적, 경제적 學理(학리)로서 빚어내었지만, 오늘의 공산주의는 가는곳마다 인류의 적이되어,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며, 방화, 살인, 파괴등으로 세계평화를 교란하는 하나의 괴물이 되고 말지 않았던가.

<박헌영, 그는 우리민족 최대의 반역자.
그를 체포 하는 건 우리민족 잘살게 하는데 도움 된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다는 이 주의와 사상은 노동자와 농민의 행복 된 생활은커녕 무고한 양민들까지 감금하여 입을 봉쇄하고, 몸서리나는 피의 숙청을 무참히도 감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잔인무도한 사상이 우리 민족에게 만연되는 날에는 멸망의 길만을 밟게 될 것이다.
모든 정치의 가치와 목적이 그 나라 국민의 행복된 생활을 하기 위하는데 있다고 하면, 공산주의처럼 신흥계급을 만들고 공포와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지 않으면 안될 정치 밑에서는 행복을 찾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정치는 이미 그 가치와 목적이 상실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사찰경찰도 이 나라 이 땅의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하여 밤을 새워가면서 악질 공산분자들을 취조하고 內査(내사)하고 체포하는 것이다.
박헌영. 그는 우리 민족 최대의 반역자다. 그를 체포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민족이 잘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도 이런 생각으로 보냈다. 밤이 깊었다. 옆에서 누워있는 천진난만한 내 딸은 코를 색색 골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나는 무심히 그애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언부언 했다. 󰡒��너는 공산주의에 물들지 마라󰡓��고.

<위폐제조, 철도총파업, 폭동, 국대 안 반대 동맹휴학, 살인-방화-파괴--->

<7월 29일>
몹시도 무더운 날이다.
박헌영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그러나 그 측근들(비서진)은 점차로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지난 7월 9일에 탄로된 精版社(정판사) 僞幣(위폐)사건에 약간의 연관성이 있는듯 하여 이러저리로 탐사해 보았으나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李觀述(이관술-조선공산당 재정부장)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미루고 함구무언이다. 이들의 조직력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사건에 대한 책임은 아무리 무서운 형벌을 받을지라도 자신만이 진다. 다른 동무들에게는 책임을 돌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박헌영의 비서진은 윤곽만은 잡혔으나 구체적인 단서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군정 하에서는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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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時未詳(일시미상)>
세월은 흘러 해가 바뀌고 날이 갈수록 박헌영에 대한 거처가 민중들 사이에서도 수수께끼가 되고 있었다. 단기 4280년경(1947년경)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결렬됐다)무렵 그는 이북에 가 있었고 남한에서는 許憲(허헌)이 좌익의 총지휘자 격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동안 좌익 공산도배들은 남한까지 적화할 의도로 남한의 발전을 저해하고 각처에서 사건을 일으키곤 했다.
단기4279(1946)년 7월 9일 정판사(위폐제조)사건을 위시하여 9월에는 철도총파업을 10월에는 개성 영남 등지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1947년 2월에는 소위 國大(국대)안 반대 동맹휴학, 3월에는 24시간 총파업 지령을 내려 살인-방화-파괴행위를 자행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런 만행은 재건될 조국의 발전을 의도적 고의로 방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젖먹이 어린이까지 때려죽이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단기4280년 7월 27일에는 소위 인민대회라는 기만적 동원으로 무지한 농민과 노동자를 쌀과 돈을 준다고 집합시켜놓고,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에서 우익과 민족(보수)진영 정당을 배격하자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그후 얼마 안가 미소공위는 결렬되고 그해 11월 14일 󰡐��탁치 없는 한국독립 안󰡑��이 유엔총회에서 43대 0으로 결의되었다.

<5-10선거 방해공작 위해 파견된 일본공산당 행동대원 13명 체포>

<1948년 5월 9일>
아침에 수도(경찰)청(당시 수도경찰청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영 플라자 옆 한진 빌딩 자리에 있었음)에 나가보니 이 곳 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5-10선거(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일본공산당(당시는 일본공산당도 의회진출 대신 파괴공작을 주로 했다)이 파견한 행동대원 일당을 마포경찰서가 일망타진 했다는 것이었다. 일본공산당은 북괴와 연계하여 5-10선거 파괴-방해를 목적으로 13명을 선발, 남한에 침투시켰던 것. 이들은 살인-방화-폭동-파업을 계획하던중 다른 계열의 공산당원인 民愛靑(민애청)원이 구속되어 자백하는 바람에 잡혔다. 다음은 자백내용.

<계동 아지트를 급습 5명 체포, 이들이 검거 안됐다면 5-10선거도 지연 됐을 것>

내일 오후 2시 정각에 화신 앞 아세아다방 앞에 가면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녹색 책보를 옆에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내일 그 청년에게 내 이름을 대면 마포 서에 체포되었다고 전하고 桂洞(계동)에 연락해 달라고 하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그리로 가서 말을 전하는 사람의 암호를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수첩을 보이면서 손을 들어 보시오. 그러면 무어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보시오.
윤 서장은 자신의 심복이며 새로 전근해온 형사 한 명을 불러 그대로 시켰다. 이 형사는 화신 앞에 가서 가두 연락원을 1분도 틀림없이 두시 정각에 청년을 만나,  서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내일 오후3시 계동 XX번지로 오시면 다 연락될 것입니다. 그 집은 대문에 파란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그 집으로 꼭 오시오. 그러시면 대장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은 왼쪽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형사는 서장께 경위를 보고했다. 서장은 즉석에서 형사대를 편성, 그 형사 지시대로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형사는 형사를 이끌고 계동의 공산당 아지트 부근으로 가,  여기저기 배치해놓고 오후3시 되기를 기다렸다. 약속시간보다 5분쯤 늦게 전날 약속한 청년이 나타나 형사를 반가이 악수하고 그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형사들은 긴장된 얼굴로 그 집 대문만 바라보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한사람이 나타나 그 집으로 들어가는걸 보고 형사대 7명은 권총을 손에 들고 앞뒤 문에 두 명씩 파수를 지키고 세 명은 안으로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15분쯤 후 일당 5명이 체포되었다. 나머지 일당도 다른 곳에서 모두 체포되었다. 윤 서장은 수도경찰청장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만약에 이 일당들이 체포되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5-10총선은 상당히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남로당 계열 공산망국도배들은 우리 대한민국 경찰의 위력에 압도되어 점차 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조직망은 강력했다.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공산당 타도에 일로매진 하였다.

<우연히 만난 박헌영의 비서실장 박시현, 충무로 2가 55번지에 거주 확인>

<1948년 12월 18일>
오늘은 朴詩鉉(박시현=남로당수 박헌영의 비서실장)을 안국동 입구 노상에서 보았다. 아! 아직도 남한에서 무슨 공작을 꾸미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형사, 특히 사찰형사는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 직업이라, 오늘도 정처 없이 나다니다 박시현을 우연히 발견, 그를 미행했다.
박시현은 박헌영의 비서실장 격으로 남한에 남아 박헌영의 사업을 계속 실천하고 있는 자다. 그를 미행한 결과 서울시 중구 충무로2가 55번지에 거주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나는 그 집 문 앞에 가서 한참동안이나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박시현은 들어간 채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 집엘 들어가 신분을 물러볼까 하다가 그만 돌아왔다. 물어봤자 박시현에 대한 자세한 말은 아무도 안할 것이다.

<아침밥도 거르고 충무로2가 박시현의 거처로 가 망을 보기 시작>

<12월 19일>
날씨는 예년에 비해 따뜻한 것 같다. 예년 같으면 눈이 왔어도 몇 번은 왔겠는데 올에는 눈도 잘 안 오고 추위도 덜하다. 사람들은 겨울이 이렇게 따뜻하다가는 내년 여름엔 전염병이 유행될 것 같다고 걱정이 많았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안 먹고 집을 나섰다. 아침은 역시 추웠다. 미군 작업복을 입고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가방을 한손에 들고 보니 나 자신이 형용할 수 없는, 정체모를 놈팡이 같이 느껴졌다. 남들은 나를 무엇으로 볼까? 권총만 안찼으면 어느 미군부대에서 목수들을 감독하는 십장같이 볼 것이다. 걸음을 빨리 걷지 못하는 나는 중앙극장 앞을 지나 명동 쪽 고갯길로 향하였다. 극장 앞 길가에는 새벽에 夜警(야경)꾼들이 피우다 남은 모닥불이 재만 남아 있었다.
해가 돋기 시작하면서 거리에는 한사람 두 사람씩 통행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번화가 명동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카오 무역상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가 하면, 양갈보가 잘 할 줄도 모르는 영어푼어치를 하면서 미군 짚 차를 타고 시공 관 앞으로 지나가는 꼴, 국민(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담배 판을 앞에 들고 다방에 들락날락 하고 󰡐��내일아침 XX일보 나왔습니다.󰡑��를 외치며 달음박질 하는 아이들, 양말장사, 미군 잉여 품 장사, 유한마담들, 요리 집 기생들, 정치 브로커, 소위 가다(肩=어깨=당시 깡패를 이른 말)들이 옥신각신 하는 명동.
나는 이 명동거리의 훤소를 빠져나와 충무로2가 박시현이 묵고 있는 집으로 향하였다. 가로등은 아직 켜진 채고 상점 문들은 닫혀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은 노동하러 가는게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포목장사 여인이거나 혹은 야미(闇=어둠 즉 몰래 금기 품을 파는 사람)장사들이다.
나는 박시현의 집 앞까지 가서 金潤快(김윤쾌) 경사를 기다렸다. 김 군은 약 10분후 또렷또렷한 눈초리로 박의 집 이 층창을 바라보며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아침인사를 한다.
어젯밤 잘 잤어?
네, 잘 자긴 했는데요. 꿈에 박시현의 모습이 필름처럼 나타나, 아직도 머리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박시현을 따라가다 놓쳐버린 재수 없는 날>

김 경사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용의자를 꿈에서 볼 정도로 직무에 충실하다는 얘기다. 우리 둘은 교대로 가서 밥을 먹고 왔다. 그리고는 박의 집 맞은편 2층집에 방을 하나 빌렸다. 2층 방에 올라가 도적이 망보듯 기다렸더니 아침 9시 30분쯤 박시현은 문 앞으로 나와 어떤 여인과 작별했다.
그는 충무로 3가 쪽으로 향하였다. 우리도 분주히 내려와 박의 뒤를 따랐다. 박은 수도극장 쪽으로 가서 자동차를 잡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도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오는 택시마다 승객이 타고 있어, 겨우 하나 잡았지만 거리가 너무 벌어져 놓치고 말았다.
우리 둘은 을지로4가에서 껄껄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김 경사는 말했다.
오늘은 재수가 없습니다. 택시도 네 번 째 오는 걸 잡았으니 넉四(사)자는 죽을 死(사)자로 여기고 오늘은 빨리 수도청으로 돌아가 다른 일이나 봅시다.

<12월 20일>
오늘도 박시현의 미행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박시현은 확실한 혐의자의 한사람이지만 그자를 구속, 과학적으로 취조한다고 해도 유일한 무기인 함구무언 즉 묵비권을 행사하면 도리가 없다. 그들은 입술을 깨물고 피를 흘려도 다른 동무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그런고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두고두고 봐서 하나의 단서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당-사회단체 등록제 실시되자  나는 공산당의 원수요 기피대상 되다>

내가 박시현을 알게 된 것은 벌써 오래다. 중부서에서 형사부장으로 근무할 때 나는 박시현이가 박헌영을 따라 다니는걸 알게 되었다. 8.15후의 좌익세력은 어느 정당보다도 컸었다.
해방직후 하루 밤 사이에 급조한 組閣(조각)을 발표한 󰡐��인민공화국󰡑��이라는 세력의 정치적 조종술은 무서웠다. 나는 그들을 묵과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정당-사회단체 등록제도가 실시되면서부터 나는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당원들은 나를 원수로 여겼지만 겉으로는 웃고 지냈다. 어쩌다 만나면 다방에도 들어가고 담소도 하지만 언제든지 나에게 일격을 당할 때가 있으리라는 각오만은 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되도록 그들(공산주의자들)을 많이 알아두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것이 유일한 수사 자료이기도 했다. 박시현 역시 그때 알아둔 자의 하나다.
오후 3시가지나 수도청으로 가 보았다. 나의 책상위에는 양면괘지가 흩어져 있고 실내에는 형사가 두 명밖에 없었지만 왜 그런지 어수선해 보였다. 한 형사는 두발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잠을 자고 있고 다른 한 형사는 무언가 부지런히 쓰고 있다.
내가 들어오는걸 보고 뭔가를 쓰다가 벌떡 일어선 형사가 자고 있는 동료를 깨웠다.
어제 뭐 했어?
나는 잠이 깬 형사보고 물었다.
네. 어젯밤 몇 집을 돌아다니며 內査(내사)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사는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한다. 글을 쓰고 있던 吳(오)형사가 잠이 깬 박 형사에게 저어기 동정적인 어투로 말을 대신했다.
박 형사는 오늘 아침 밥도 굶고 이제 서야 아침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집도 없이 밥을 굶어가며 친구-친지의 집을 轉轉전전하는 경찰관의 비애 반면, 공산당원들은 돈을 물 쓰듯 한다.>

나는 박 형사가 일 열심인 것을 안다. 약 두 달 전 경상남도에서 서울시로 전근해 왔는데, 갑자기 하숙을 구할 수도 없고, 구한다 해도 경찰관 월급으로는 도저히 물수가 없어 친구집, 친지의 집을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침밥은 항상 굶는다. 나 역시 생활이 풍족치 못해 같이 있자고 도 못했다. 수도청 내에는 그런 형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공산당원들은 막대한 공작비를 쓴다. 그러나 그들과 싸우는 우리 사찰과 직원들은 대부분이 박 형사와 비슷한 처지이다.(공산당과 경찰의 처지는 오늘의 현실과도 같다-편집자 주) 그러나 모두들 일만은 침식을 잃어가면서도 열심히들 했다.
경찰의 예산이 빡빡해 급하게 쓸 일이 있어도 쓸 수가 없다. 수사비가 나와도 먹을 것을 아끼고 쓸것을 못 쓰면서 아끼고 또 아껴가며 한 범인을 체포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