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너머 봄으로 무릇 훌륭한 경관은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집니다. 계절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풍경은 거기서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 여기 있는 나의 마음에 따라 그 풍경이 싱겁게도, 때로는 더 아름답게도 느껴집니다. 이제 봄이 시작되는 계절. 목적지가 아니라 그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더 마음을 두었던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 지리산의 겨울에서 남도의 봄으로 가는 길 남도의 봄을 만나러 가는 길. 전북 남원에서 전남 구례 쪽으로 길을 잡는다. 인월과 구례 사이에는 지리산이 있고, 그 지리산을 구불구불 넘어가는 지방도 861호선이 있다. 지리산관광도로. 이른바 ‘성삼재 도로’라고 불리는 길이다. 구태여 이 길을 택하는 건 지리산이 여태 품고 있는 겨울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리산의 깊은 겨울에 몸과 마음을 담갔다가 내려선다면 구례와 광양에 산수유와 매화로 이미 당도한 봄을 더 극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삼재 도로는 본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지리산의 나무를 벌목하기 위해 처음 닦은 길이다. 해방 이후에는 그 길 위에 6·25전쟁의 비극이 피로 뿌려졌다. 도로가 지금처럼 말끔하게 포장된 건 지난 1985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정부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차관 63억 원을 들여와 아스팔트 포장을 했다. 성삼재 도로는 애초에 주민들을 위한 길은 아니었다. 이 길이 처음 놓이게 된 연유도, 또 도로 포장을 하게 된 것도 주민들의 편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리산 생태계 훼손 등의 문제로 성삼재 도로가 여러 번 논란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예 도로 자체를 폐쇄하자는 제안도 나왔지만 한 번 만들어진 길을, 환경을 이유로 닫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접 지자체들은 도로폐쇄를 조건으로 아예 케이블카나 산악 열차 건설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길을 닫는 대신 더 많은 생태계 훼손을 담보하자는 주장이었다. 성삼재 도로를 따라 지리산을 넘어가는 길에서 약간의 부채의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 지리산의 속살로 다가서는 그 길에서는 우악스럽게 달리거나 행락으로 들뜨기보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자연과 겸허하게 마주할 일이다. # 인월…‘달을 끌어들인 마을’에서 출발하다 지리산 아래 인월은 고요하고 소박한 산촌이다. 마을이 가장 떠들썩해지는 때는 3일과 8일에 열리는 오일장 때다. 지리산 너머 남쪽의 구례보다 봄이 꼭 스무날쯤 늦어진다는 인월의 봄은 장터에 나와 앉은 할머니들의 좌판 위에서 먼저 느껴진다. 다들 어디서 캐왔는지 좌판마다 쑥과 달래, 짙은 향의 냉이까지 한 무더기다. 인월 오일장에는 장날마다 문을 여는 팥죽 집이 있었다. 새알심을 가득 넣은 팥죽을 인심 좋게 그릇 가득 퍼주던 곳이었다. 그런데 서너 해 전쯤 새 시장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만 그 집이 없어졌다. 대신 꽁보리밥을 내는 시장통의 한 식당이 팥죽 메뉴를 이어받았다. 보리밥 메뉴를 뷔페식으로 바꾸고는 장날이면 팥죽을 한 솥 끓여놓고 손님들이 저 먹고 싶은 대로 퍼가도록 했다. 다른 날은 말고, 장날에만 추가되는 ‘서비스 메뉴’란다. 도회지식 셈법대로라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날은 ‘돈 버는 대목’이어야 마땅하겠지만, 시골 식당 주인에게는 ‘베푸는 날’에 더 가까운 모양이었다. 거기서 썩썩 비빈 보리밥이나 팥죽 한 그릇으로 지리산을 넘어 봄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시작하자. # 뱀사골과 달궁을 넘어 겨울의 시간으로 지리산을 넘어가는 성삼재 도로에 올라서려면 인월에서 60번 지방도로를 타고 산내면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산내에는 실천불교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절집 실상사가 있다.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고 있는 실상사에는 일곱 개의 보물뿐만 아니라 대안학교와 귀농 학교가 있고, 친환경 농사를 실천하는 농장과 지역공동체를 위한 법인도 있다. 산내면 쪽의 마을에 유독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온 귀농인들이 많이 정착하는 건 그곳이 지리산의 가장 밝고 유순한 품이어서이기도 하지만, 실상사가 거기 있다는 점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었다. 지리산을 넘어가는 성삼재 도로는 산내중학교 앞 대정네거리부터 시작된다. 지리산 계곡에서 흘러드는 만수천의 물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뱀사골 계곡의 얼음은 이미 풀린 지 오래. 빈 가지의 나무들이 추워 보였지만 어느 사이 길섶으로 초록의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번져가기 시작했다. 계곡마다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렸고, 굽이치는 물길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소(沼)에는 맑은 물이 투명한 초록빛으로 찰랑거렸다. 나뭇가지들을 다 비워낸 겨울 숲이 울림통이 되는지, 새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뱀사골을 지나면 이내 심원계곡 입구인 달궁이다.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 만복대로 지붕을 삼고 있는 이곳은 2000년 전 삼한시대에 마한의 효왕이 진한의 침략을 받고 피란해 궁궐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궁궐이름을 ‘달에 있는 궁’이라 높여 불렀던 것이 지명이 됐다. 지금은 그 자리를 등산객이나 한여름 피서객들을 받는 민박집과 캠핑장, 음식점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겨울의 끝이라 인적이 없다. 달궁에서 마주 본 지리산의 능선은 군데군데 잔설이 남은 겨울 산의 모습이었다. # 겨울산을 넘어 눈 녹은 물 가득한 절집으로 달궁을 넘어서자마자 도로 옆으로 밀쳐놓은 눈들이 보였다. 제설의 흔적이다. 성삼재길이 남원을 잇는 정령치길과 만나는 달궁삼거리부터는 겨울 색이 더 짙었다. 정령치길은 아직 겨울 눈이 채 녹지 않아 아직 바리케이드로 닫혀 있었다. 정령치길은 경사가 급하고 그늘이 깊어 겨울이 가장 오래 머문다. 달궁삼거리에서 가팔라진 도로를 따라 고도를 높이자 능선의 해가 들지 않는 북쪽 사면마다 희끗희끗 잔설이 보였다. 차창 밖으로 지리산이 그려놓은 웅장한 산세가 펼쳐졌다. 그 길을 차로 달린다는 게 좀 불경스러운 것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마치 지리산의 품에 안기는 기분이었다. 나뭇잎을 다 떨군 숲은 차갑고 앙상했지만, 장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 때문인지 지리산의 품은 푸근했다. 길은 이내 성삼재 휴게소에 닿는다. 노고단은 등반의 입구이자 지리산 종주 등반의 출발지점이다. 지리산 종주의 경험이 있다면 별이 쏟아지는 새벽, 성삼재에서 첫발을 내딛던 긴장과 흥분을 기억하리라. 이즈음 성삼재는 아주 한가해서 성삼재를 둘러싸고 있는 반야봉과 임걸령, 고리봉의 능선들이 부드러운 파도처럼 일어서 있는 모습을 느긋하게 만날 수 있다. 성삼재에서 더 가면 지리산 남쪽의 바깥인 시암재 휴게소다. 여기서 바라보는 섬진강 아래의 들녘은 초록의 기운이 완연하다. 시암재에서 구례로 내려서는 남쪽 사면에는 초록의 소나무들이 울창하고 눈은 자취도 없다. 길은 자연스럽게 천은사로 이어진다. 천은사가 품고 있는 저수지 천은제에는 지리산 계곡의 맑은 물이 그득했다. 천은사의 주 불전인 극락보전 옆의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그윽한 향기와 함께 꽃을 피워냈다. 천은사에는 매화를 능히 제압하는 꽃이 또 있다. 극락보전의 내부 단청에 그려진 연꽃과 모란이다. 1774년 혜암 선사가 극락보전을 건립할 당시에 그려졌다는 꽃무늬 단청은 그 뛰어난 솜씨가 탄성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극락보전과 마주하고 있는 보제루에서는 지금 극락보전 단청을 복제해 그린 모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당대 최고의 화사(畵事)의 솜씨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 섬진강 봄꽃이 순서대로 꽃을 피우다 구례로 내려서면 거기서부터는 도처에서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남녘 봄꽃들을 만날 수 있다. 올해 봄꽃은 매화와 산수유, 거기다 벚꽃까지 두서없이 피어났던 예년과 다르다. 매화가 가장 먼저 꽃을 피웠고 닷새쯤 뒤에 순서에 맞춰 산수유가 꽃망울을 열었다. 광양의 매화도 단번에 팝콘처럼 일제히 꽃을 피우지 않고, 섬진강 변에서 시작해 슬금슬금 능선을 기어 올라가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올 봄꽃은 폭죽처럼 화려하진 않겠지만, 오래 두고 볼 수 있으리라. 이른 봄이라면 구례의 상위마을을 들렀다가 19번 국도를 따라 화개로, 거기서 남도 대교를 건너 광양 땅으로 들어가는 게 순서다. 화개에서 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가 더 이름나긴 했지만, 그 길의 주인은 매화꽃 분분하게 지고 난 뒤에야 꽃을 피우는 벚꽃이니 더 봄이 깊어야 제맛이다. 광양의 매화가 아름다운 건 군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무마다 바닥에 밝은 초록의 융단이 깔리고 강변의 푸른 대나무가 배경으로 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화나무 둥치 아래서 수런거리는 풀들이 다 자라서 푸르러진 뒤에야 섬진강 변의 매화는 꽃을 피운다. 꽃받침이 녹색인 청매화며 붉은 홍매화도 초록의 배경과 썩 잘 어울리지만, 순백의 매화와 초록의 대비야말로 가슴 뛰는 풍경이다. 지난 주말 광양의 청매실농원에는 꽃이 늦어지고 있었다. 홍매화 몇 그루와 농원에 가장 먼저 심어졌다는 100년 수령의 늙은 매화 세 그루에만 환한 꽃이 달렸다. 한껏 물이 오른 젊은 나무보다 가지가 뒤틀리고 둥치가 삭은 늙은 나무가 오히려 봄의 기미를 먼저 알아채고 꽃을 피운 것이었다. 농원의 다른 나무들도 꽃망울이 탐스럽게 달렸으니 지금쯤 하나둘 꽃을 피워내고 있으리라. 이제 길은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광양의 망덕포구까지 이어진다. 거기서 선암사의 선암매와 월등면의 매화밭을 찾아 순천으로 건너가든, 바다 건너 해안도로마다 유채와 벚꽃이 화려하게 불붙는 남해로 건너가든 그건 다들 알아서 할 일이다.
식당을 지키고 있던 김소연(여·30) 씨는 시골의 청춘들이 의기투합해서 ‘지속 가능한 시골살이’의 방편을 앞장서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맏’의 의미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식당 마지의 메뉴는 두 종류의 파스타와 여섯 종류의 피자, 그리고 탕수덮밥과 지리산나물 두유 덮밥 등이다. 되도록 지역에서 난 식재료를 쓰되 시골에서는 쉽게 먹어볼 수 없는 음식으로 메뉴를 짰다. 동업자 하경심(여·21) 씨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지만 매출액이나 손님 수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고 했다. 식당은 이들에게 상업의 공간이지만 이들이 식당을 통해 지향하는 바는 인간 중심의 이른바 ‘사회적 경제’다. 식당 운영이 좀 느슨한 편인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섯 명이 동업을 하지만, 누구도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눈치 보지 않고 2주일쯤 훌쩍 떠나기도 한다. 비운 자리는 나머지 다섯이 채운다. 김 씨는 “식당 일에 구속되지 않는 건 식당일이 사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식당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게을리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음식 맛을 보면 알 수 있다. 들깨 크림 파스타와 가지 버섯 탕수덮밥은 제법 맛있기로 이름났고, 밥 위에 고사리와 뽕잎나물을 넣고 두유를 끼얹어 내는 ‘지리산나물 두유 덮밥’ 같은 창의적인 메뉴도 평판이 좋다. 식당 마지는 이달부터 영업일을 주 6일에서 주 5일로 하루 단축하기로 했다. 개업 당시부터 화요일은 쉬는 날이었는데, 여기다 수요일을 식당영업을 하지 않는 ‘커뮤니티 데이’로 정했다. 커뮤니티 데이에는 지역의 청소년들과 워크숍을 진행한다. 김 씨는 “지리산 가는 길에 음식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와도 좋고, 워크숍에 도시 손님의 참석도 두 손 들어 환영한다”고 했다. 김 씨 역시 매출액이나 손님 숫자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걸로 미뤄보면 절대 장삿속에서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섬진강을 끼고 있는 구례나 광양, 하동 쪽에는 이렇다 할 숙소가 없다. 호텔도 있지만 대부분 낡은 데다가 모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하동의 쌍계사 바로 아래 지난해 7월 켄싱턴 리조트 지리산 하동점이 들어섰다. 115개의 객실을 갖춘 쾌적하고 세련된 리조트다. 3인실부터 7인실까지 다양한 규모의 객실을 갖추고 있고, 한식당, 카페와 아웃도어숍 등의 부대시설도 있다. 이즈음 섬진강에는 벚굴이 제철이다. 광양의 망덕포구에 벚굴을 내는 횟집들이 늘어서 있다. 어느 집이나 메뉴와 맛이 다 비슷하니 구태여 식당을 고르지 않아도 된다. 구례 일대에서는 지리산에서 나는 산채와 섬진강의 참게 매운탕이 유명하다. 매운탕은 지리산회관(061-782-3124), 전원가든(061-782-4733)이 가장 알려진 곳. 화엄사 입구의 지리산식당(061-782-4054)과 지리산온천 부근의 백제회관(061-783-2867), 혜림회관(061-783-3898)은 산채를 내는 음식점 중 대표격이다. 양미한옥가든(061-783-7079)은 닭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산닭구이로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이름이 났다. 하동의 별미는 재첩국이다. 19번 국도변에 여여식당(055-884-0080)을 비롯한 재첩국집들이 모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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