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대봉산 무장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억새 능선. 20여 년 전까지 있던 목장이 문을 닫고 난 뒤에 초지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억새평원이 됐다. 부드럽게 휘어진 길이 운치를 더한다.
운곡서원 뒤뜰 400세 은행나무 “거 참, 잘 생겼네”
동양그룹 목장 부지였던 무장봉
폐쇄후 몇년만에 억새로 뒤덮여
은행나무 정면에 운곡산방 찻집
잎 떨군 노란 마당도 운치있을듯
구미산 아래 용담정 단풍 일품
계곡·폭포·돌다리와 어우러져
경주의 계절은 ‘봄’입니다. 봄이면 대릉원에 유채꽃이, 보문정에 벚꽃이, 불국사에는 목련이 구름처럼 피어납니다. 봄꽃으로 뒤덮인 경주 어디서든 화려한 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주의 가을은? 그 해답을 찾으러 나선 여정이었습니다. 유적이 즐비한 경주는 딱히 계절을 가릴 게 없는 여행지입니다만, 그래도 계절을 대표하는 곳은 있습니다. 가을이 경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돼주지는 못하겠지만, 가을날 경주 여행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은 있습니다. 모두 익숙지 않은 곳입니다. 다음은 억새와 단풍을 찾아 나선 가을 경주 여행. 우리가 몰랐던 경주 이야기입니다.
# 경주에서 ‘산’이라니….
경주에서 ‘산’은 뜻밖이다. 토함산은 익숙하긴 하지만 탐방이나 등산코스보다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이름값에 얹혀 기억된다. 산의 형세나 풍경은 아는 바 없다. 기림사가 깃든 함월산도 산행 목적지로 익숙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 가을에 경주사람들이 줄지어 오르는 산이 있다고 했다. 가을이면 능선에 눈부신 억새꽃이 파도치는 산이라고 했다.
경주 무장산. 다들 그렇게 불렀지만, 실은 무장산이 아니라 동대봉산의 정상 무장봉(624m)을 말한다. 처음 산 이름을 듣고는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다’라는 뜻의 ‘무장(武裝)’일 거라 짐작했다.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 수도의 산에다 붙인 이름으로는 제격이란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무장봉 정상 표지석을 찬찬히 보니 웬걸, 이름이 품은 뜻은 정반대다. 무장(鍪藏). ‘투구 무(鍪)’에 ‘감출 장(藏)’ 자를 쓴다. ‘투구를 감추다’라는 의미다. 왜 이런 이름이 지어졌을까. 그 이유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통일 후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평화의 시대를 기원하며 쇠붙이 무기를 모조리 무장봉 아래 골짜기에다 숨겼다는 얘기다. 지명이 드러내는 역사다. 창을 두들겨 보습을 만들고, 칼을 녹여 낫을 만드는 일. 그건 오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왔음에 대한 선포다.
그러고 보면 이름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주는가. 무장봉을 정상으로 삼은 ‘동대봉산’의 이름은 어디서 나온 걸까. 조선 시대 수군이 군함을 만들 때 자재로 쓸 나무가 자라는 산이라 입산이 금지돼 ‘봉산(封山)’이라 불렀다고 전하니, 동대봉산은 ‘동쪽의 큰 봉산’을 부르는 이름이었겠다. 봉산은 통제영에서 파견된 벼슬아치가 관리했는데, 그 관리의 수탈과 비리가 어찌나 심했던지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산에 방화를 일삼았다. 동대봉산에 산불이 끊이질 않으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산불이 마치 흥미진진한 이벤트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관리의 학정에 대한 불만으로 댕긴 불이 온산을 다 태우는데, 불을 끄기는커녕 불구경을 하는 민심이 무섭다.
혹시 동대봉산 무장봉 능선에 거대한 군락을 이룬 억새는, 민중의 불만이 산불이 돼서 다 타고 남은 자리에서 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눈부신 솜털로 환하게 피어나는 억새는 역사의 은유가 아닐까.
운곡서원 뒷마당의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유난히 이파리의 노란색이 짙고 화사하다. 나무 옆의 한옥이 찻집 ‘운곡산방’이다. 방에 앉아 창호문을 열고 은행나무와 마주하고 차를 마실 수 있다.
# 눈부신 억새가 파도를 이루다
무장봉 일대는 1960년대 자활정착사업단인 갱생법인이 자립을 위해 정착한 곳이었는데, 1975년 동양그룹이 그 부지에다 오리온 목장을 조성해 우유를 생산했다. 먹고살 게 부족했던 시절, 정부의 최고 목표는 ‘국민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었다. 당시 전국에 기업이 운영하던 목장이 적잖았던 건, 당시 목축업의 밝은 사업성도 있었겠지만, 이런 정부의 정책 방향과 기업에 부여된 의무 아닌 의무 때문이기도 했다.
목장을 운영하던 동양그룹은 노태우 정부 시절이던 1990년, 재벌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조치가 내려지자 목장부지를 한 축산기업에 팔았다. 부지를 사들인 축산회사는 목장을 운영했으나 1996년, 이번에는 계곡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목장은 폐쇄됐다. 목장이 문을 닫은 뒤 소가 풀을 뜯던 너른 초지에 억새가 하나둘 끼어들기 시작했고, 불과 몇 년 만에 목장이 들어섰던 능선 44만여 평(145만5000여㎡)은 억새로 뒤덮였다. 동대봉산의 무장봉이 가을이면 눈부시게 빛나는 억새평원을 이루게 된 과정이 이렇다.
무장봉 들머리는 하나지만 오르는 길은 두 개다. 하나는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길지만 완만한 길. 다른 하나는 능선을 타고 가는, 짧지만 경사가 가파른 길이다. 완만한 계곡 코스는 5.3㎞, 가파른 능선 코스는 3.1㎞다. 두 길은 무장봉 정상에서 만난다. 그러니 무장봉은 원점 회귀코스다. 어느 쪽 길로 먼저 오르든지 상관없다. ‘완만형’ 탐방로를 택하느냐 ‘경사형’ 탐방로를 택하느냐는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
완만형 탐방로, 그러니까 계곡코스로 가다 보면 딱 중간쯤에 무장사지가 있다. 통일신라 때 지어져 조선 중종 때까지 있었다던 절집 무장사의 빈터다.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제법 기품 있는 석탑 한 기와 사적비가 있다. 자그마치 1200년의 시간을 건너온 것들이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저 아래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활엽수가 다 지고 나면 불국토였던 남산의 뼈대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 은행나무 노거수가 보여주는 풍경
‘단풍 명소’로 경주를 대표할 만 곳은 없다. 경주의 봄꽃이야 어디가 더 화려하고 어디가 더 좋은지 확연하지만, 가을 단풍은 압도적인 곳이 없어서다. 그만그만한 단풍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여럿이지만, 뽐내며 선명하게 물드는 단풍 군락지는 찾아보기 쉽잖다.
그래도 단풍 좋기로 손꼽을 수 있는 곳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중 한 곳이 포항과 가까운, 경주 북쪽의 운곡서원이다. 안동 권씨의 시조를 모시기 위한 사당으로 시작했던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문을 닫았다가 1976년 인근의 절터에 다시 복원돼 시간을 잇고 있다.
운곡서원은, 사실 다른 계절에는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운곡서원은, 서원보다 서원 뒤뜰의 은행나무를 보러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생들의 공부방 격인 한옥 유연정 앞에 우뚝 서 있는 수령 400년 남짓의 은행나무 노거수 수형이 어찌나 근사한지 딱 보는 순간 ‘거참, 잘생겼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노거수 아래 바짝 붙여 지어진 유연정 지붕 기왓골이 은행잎이 떨어져 노랗게 물든 모습도 운치 있다.
은행나무 곁에는 두 동의 한옥 건물이 있다. 본디 쓰임새는 모르겠고 지금은 찻집 ‘운곡산방’이란 이름을 달았다. 그 방에 들어 창호문을 활짝 열고서 우수수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모습을 대한다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다 싶은데,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한 이들이 여간해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
경관으로 보자면 지금처럼 샛노랗게 잎이 물든 절정의 시간이 가장 좋겠지만 사진가들이 늘어서서 은행나무를 겨누고 바람에 은행잎이 날릴 때마다 기관총 쏘듯 셔터를 눌러대는 지금보다는, 은행잎을 다 떨궈 사람들 발길이 뜸해질 때쯤 빈 나무와 마주하고 앉아 차 한잔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동학의 성지인 용담정 위쪽의 계곡과 사각정. 여기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붉고 노란 단풍의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곳이다.
# 단풍 아래서 맑은 정신을 생각하다
이번에는 경주의 서쪽. 구미산 아래 ‘용담정(龍潭亭)’이다. 울긋불긋 단풍이 계곡과 어우러지는 이곳은 경주 사람들이 ‘단풍을 보러 가는 곳’이다.
본래 이곳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탄생지로 천도교 발상지다. 마흔한 살의 나이에 대구에서 체포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당한 최제우의 묘도 여기 구미산 기슭에 있다.
말하자면 ‘역적’이 나고 자라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끝내 묻힌 연고지인 셈이었으니 용담정은 오래 황폐하게 방치됐다. 그러다 1968년 4월 경주 교인들이 성금을 모아 관리하기 시작했고, 이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이곳을 직접 관할하게 되고 1974년 구미산 일대가 경주국립공원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인 천도교 성역화 운동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지금도 정문 입구 쪽의 너른 빈터에 수운기념관과 교육수련관으로 쓸 대형 건축물을 짓고 있다.
교인들이 종교 성지로 신성시하는 장소이니, 나들이 삼아서 단풍을 보러 가는 것이 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은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주인 행세하는 이도 없고, 간섭도 없다. 동전 한 푼 내놓지 않는(내놓을 곳도 없다) 행락객이 뭐 하나 도움될 리 없을 게 분명한데도 경내에 ‘들어가지 마시오’ 따위의 경고 문구 하나 써 붙이지 않았다. 그걸로 미뤄 짐작하건대, 가을 단풍이라도 보러 찾아와주는 사람들을 반기는 듯하다.
여기는 온통 가을이다. 용담성지로 이어지는 차로 양옆의 늘어선 은행나무도 그렇고, 주차장에서 포덕문, 성화문, 용담정, 사각정에 이르는 계곡 길의 단풍나무도 그렇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3년 만에 체포돼 죽임을 당할 때까지 가르침을 편 곳이라는 성지의 의미보다는, 그저 가을 색에 취해 그 길을 걷는다. 소박하면서도 찬란한 아름다운 가을 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름난 서원이며 사찰이 종교적 의미나 인연 없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힘은 빼어난 자연경관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용담정 경관의 절정은 완만한 오르막의 숲길을 지나서 계곡을 건너는 용담교 너머 보이는 용담정과 그 위의 사각정 일대다. 단풍잎이 원색으로 물든 계곡에서 작은 폭포가 정자와 홍교 형태의 돌다리와 한데 어우러지는데, 무위의 자연에 얹은 무심한 배치가 더없이 조화롭다. 용담정 안에는 최제우 영정과 그 앞의 제단이 꾸밈의 전부고, 그 위 계곡의 사각정도 수더분하기 짝이 없다. 화려한 치장 없이 ‘본바탕’의 민얼굴이다. 그 단정한 공간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꺾였으되 훗날 갑오농민전쟁의 밑불이 됐던 동학의 맑은 정신을 생각한다.
# 가을에 남산을 가는 이유
산자락과 골짜기마다 온통 불법을 치장하는 ‘장엄(莊嚴)’으로 그윽한 경주의 남산. 가을이 아니라도 경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만, 굳이 가을에 가보길 권하는 이유가 있다. 활엽수가 다 지고 소나무들의 초록만 남으면, 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남산의 뼈대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남산 곳곳에는 불상과 석탑이 있다. 빼어난 것은 빼어난 대로, 질박하면 질박한 대로 시간이 깊이 삭아서 저마다 아름다운 것들이다.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수십 가닥이다. 길은 산중에서 흩어졌다가 만나고, 다시 흩어지면서 골짜기마다 실핏줄처럼 이어진다. 냉골, 탑골, 절골, 웃밭골, 철와골, 국사골, 비파골…. 어림잡아 서른 개가 넘는 골짜기 사이로 1000년 전의 시간과 만나는 길이 놓여 있다. 그 길에 탑이 섰고, 불상이 놓여 있고,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확인된 절터만 150개. 불상이 130구, 탑이 99개다.
경주를 찾은 여행자들은 대개 이름난 유적들이 즐비한 시내의 월성지구만 돌아보고 지나쳐 간다. 하기야 경주의 유적을 하나하나 둘러보자면 며칠이라도 모자란다. 하지만 아무리 바쁜 여정이라도 지금 같은 가을이라면, 남산에서 딱 반나절만 시간을 내보시길 권한다. 꼭 정상을 밟을 필요도 없고, 그저 내키는 대로 숲길을 걷다가 화강석을 다듬어 세운 석탑이며 석불을 쓰다듬어 보거나 그 앞에 우두커니 앉아 상념에 빠졌다가 돌아와도 좋겠다.
그렇게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남산의 삼릉코스를 추천한다. 솔숲으로 둘러싸인 삼릉에서 상선암과 바둑 바위를 지나 금오봉까지는 편도 1시간 30분 남짓. 그 길의 압권은 비탈진 능선에 또렷하게 새겨진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솔숲 사이에서 평안한 시선으로 번잡스러운 사바세계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석가여래상이 마음에 도장처럼 찍힌다. 그 평안함이 우리에게 주는 건 위안이다. 억새꽃과 붉게 물든 단풍도, 자연이 건네는 위안이다. 위안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남산 사과밭 ‘6·25 열사 碑’ 칠순 넘은 아들, 그리움 절절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한쪽에는 민가가 있고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밭(사진)이 있다. 사과밭 끝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 가보니 ‘6·25참전열사 김상철의 비’다. 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곁에 작은 빗돌 하나가 발길을 오래 붙잡는다.
6·25전쟁 때 전사한 김상철의 아들 김재택이 5년 전에 세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글로 새긴 비다. “가슴 깊이 묻어도 바람 한 점에 떨어지는 저 꽃잎처럼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 돌아갈 수 있을까. 날 기다리던 그곳으로…(중략)…나 죽어 다시 태어나도 잊을 수 없는 사람.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나의 두 눈이 먼다 해도 난 그래도 그 한번을 택하고 싶어…” 아버지는 6·25 때 전사했고, 비석은 2015년에 세운 것이니, 아들의 나이도 칠순이 넘었을 텐데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