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시스터스 브라이턴 코츠월드 이처럼 독창적이고 경이로운 풍경이라니요. 까마득한 높이의 수직 직벽이 바다를 마주보고 우뚝 솟아있습니다. 잘린 석회암 직벽은 거칠게 잘라낸 두부의 단면 같고, 직벽 위는 초록의 잔디로 융단을 깔아놓은 듯 합니다. 이런 직벽이 파도 같은 구릉을 이뤄 아득하게 이어집니다. 영국 런던에서 남쪽으로 110㎞. 프랑스와 마주보고 있는 영국해협 해안의 ‘세븐 시스터스’의 경관이 이렇습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수직의 절벽 봉우리 숫자를 헤아린 것일테고, ‘자매’는 짐작컨대 절벽의 근육질이 아니라 순백의 색감에서 웨딩드레스를 연상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은 다양한 이미지를 품고 있는 도시입니다. 낡고 지저분한 지하철, 강렬한 빨간색 이층 버스, 템스강변의 빅벤과 국회의사당, 뮤지컬과 떠들썩한 펍, 위병교대식, 회색빛 건축물과 종잡을 수 없는 날씨…. 다른 유럽도시와 견줘보면, 런던은 무뚝뚝합니다. 우아하고 낭만적인 느낌의 프랑스 파리나 시간의 무게로 치장한, 장중한 이탈리아 로마의 장식미와 비교한다면 검박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초라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럼에도 런던은 세계적인 관광 도시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도시 안에 촘촘히 박혀있는 극장과 박물관에서 흘러넘치는 문화의 향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오래되고 낡은 도시임에도 다인종, 다문화 사회 특유의 역동성이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시 곳곳에 입장료를 받지 않는 미술관이며 박물관이 즐비하고, 세계적인 작품이 연일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극장이 늘어서 있습니다. 젊음이 끓어넘치는 거리가 있는가 하면, 최고급 명품숍들이 휘황한 거리도 있고, 자정이 넘도록 흥청거리는 펍이 즐비한 거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런던을 여행하는 방법에서 정답이란 없습니다. 누가 따로 일러주지 않아도 저마다의 관심사에 맞춰 헤아릴 수 없는 명소들로 얼마든지 여행일정을 빽빽하게 채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런던의 도시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길 포기하기로 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찾아간 곳이 런던 근교의 자연경관 명소입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런던을 영국의 전부로 알고 가지만, 런던 인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매혹적인 경관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웅장한 흰색 석회암 직벽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런던 남쪽의 ‘세븐 시스터스’였습니다. 여기다가 중세시대 영국 평민들의 삶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가장 영국적인 풍경’이라 일컬어지는 런던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코츠월드의 매력적인 풍광을 덧붙입니다. 런던 근교 명소들을 둘러보고 난 뒤에 알게 된 건 영국은, 그리고 런던은 좀 더 시간 여유가 필요한 여행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런던뿐만 아니라 ‘좋은 여행지’는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놓고 싶은 풍경… 세븐 시스터스 ‘세븐 시스터스’라고 했다. 무슨 걸그룹 이름도 아니고….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그 웅장하고 독창적인 풍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곳. 영국 런던의 정남쪽으로 110여㎞. 런던에서 열차를 두 번 갈아타고 가야 하는 곳. 프랑스와 마주한 바다에 막혀 땅이 끊긴 자리에 ‘세븐 시스터스’가 있었다. 바다에 바짝 붙어 병풍처럼 이어진 최고 160m 높이의 까마득한 해안 절벽. 절벽의 절개지는 놀랍게도 눈부신 순백색이다. 그곳에 가보면 알게 된다. 흰색이 이리도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영국해협의 푸른 바다와 마주 선 장쾌한 흰색 절벽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야말로 그곳이 ‘죽기 전에 가볼 곳’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다. 어떻게 해변가에 이런 독특한 흰색 절벽이 만들어졌을까. 세븐 시스터스 일대의 땅은 석회암이다. 1억3000만 년 전쯤 죽은 조개의 껍데기가 바다 속에서 산을 이뤄 석회암이 만들어졌다. 그 땅이 융기한 뒤 강이 흐르면서 석회암이 깎여 웅장한 절벽이 된 것이다. 강과 바다가 번갈아가며 조각칼이 돼서 석회암을 조각했던 셈인데, 그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절벽은 지금도 매년 바닷물에 깎여 30∼40㎝씩 뒤로 물러난다. 세븐 시스터스에서 해야 하는 건 트레킹이다. 세븐 시스터스 초입 ‘컨트리 파크’에서 양들이 풀을 뜯는, 야생화 핀 초지를 가로질러 사행천 물길을 따라 자갈해안 쪽으로 산책하다가 절벽 위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는 코스다. 절벽 위 초지는 석회암 위에 초록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하다. 파크에서 절벽 아래와 위를 짧게 돌아보는 트레킹 코스는 1시간 30분쯤이 걸린다. 내내 탄성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내친김에 능선으로 이어지는 일곱 개 석벽 위를 다 돌고 동쪽 끝의 아스라이 보이는 등대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이렇게 걷는다면 한나절로도 모자란다. 까마득한 절벽 위의 초지를 걷는 이들이 어김없이 하는 일이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손가락 반 마디 크기의 작은 석회석 돌을 주워서는 능선의 초지에 늘어놓아 글씨를 만든다. 애인의 이름을 쓰거나 하트 따위를 그려넣는 것인데, 돌로 이름의 글씨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써넣고 싶은 풍경이라면, 애인과의 사랑을 맹세하거나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지 않는가. # 빅토리아 시대의 우아함으로 가득한 휴양지… 브라이턴
브라이턴은 해수욕이 처음 유행했던 18세기 중반부터 각광받던 휴양지다. 영국왕 조지 4세가 왕자 시절 요양차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조지 4세가 1823년에 브라이턴에 여름별궁을 지은 것을 계기로 런던의 상류층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다. 1860년대에는 런던에서 브라이턴을 잇는 직행열차가 놓였다. 그 뒤부터 여름이면 브라이턴을 찾는 인파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지금도 런던 시내의 런던브리지 역에서 기차를 타면 딱 한 시간 만에 브라이턴에 닿는다. 자를 대고 그은 듯 직선으로 이어지는 브라이턴의 해변은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기는 휴양객들로 가득했다. 해변 휴양지 특유의 들뜬 분위기가 대기에 가득 녹아있었다. 해변에는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오락시설들이 여전히 남아서 제 구실을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브라이턴 피어’다. 브라이턴 피어는 해변에 잔교를 놓아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들일 수 있게 만들고 장식케이크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인공섬으로, 사교장으로 쓰였다. 지금은 어린이들 대상으로 작은 유원지와 게임센터, 펍, 레스토랑, 점성술사의 텐트 등이 빼곡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과 시설들이 남아있는 도시와 해변을 둘러보다 보면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여기서는 흰색 외벽의 건물 앞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휴양지의 들뜬 분위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 이 도시는 걸음을 늦추게 하는 대신, 달콤한 휴식을 즐기며 ‘여행자의 본분’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만 휴양지의 우아한 레스토랑들도 음식 맛은 좀 실망스러웠다. 그거야 뭐 영국의 어디든 마찬가지지 않은가. # 가장 영국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코츠월드
코츠월드는 ‘가장 영국적인’ 공간이다. 왕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13∼15세기 중세시대 영국 서민들의 거친 삶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도회지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들도 한옥이 늘어선 옛마을에서 저절로 고향을 떠올리듯, 영국인들도 코츠월드를 보면서 가장 이상적인 은퇴와 귀향, 그리고 로망의 꿈을 꾼다. 코츠월드 안에 있는 50여 개에 달하는 마을들은 평온한 영국의 시골 정취로 그득하다. 취향에 따라 이런 마을을 하나씩 찾아가는 게 곧 코츠월드를 여행하는 방법이다. 마을은 담쟁이넝쿨이 휘감고 올라간 벽체와 야생화로 화려하게 꾸며진 작은 정원을 거느린 벌꿀색 벽돌집이 모여 이뤄져 있다. 코츠월드를 대표하는 마을이라면 단연 ‘바이버리’다. 코츠월드에서 딱 한 곳의 마을만 가야 한다면 무조건 이곳을 선택해야 한다. 언제고 런던 여행을 꿈꾸고 있다면 꼭 기억해 둘 이름이다. 바이버리에는 이렇다 할 관광명소나 유적지는 없다. 대신 역사가 100년이 넘는 송어양식장이 있고, 담쟁이넝쿨이 온통 벽을 휘감은 근사한 영주의 대저택이 있다. 바이버리 마을 중에서도 가장 이름난 곳이 13세기에 벌꿀색 돌로 지어진 양모 보관창고 ‘알링턴 로’다. 지붕과 벽체를 이어 길게 지은 돌집인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시간의 깊이가 짙게 묻어난다. 여기는 한때 양모를 세척하고 보관하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었으나, 이젠 은퇴한 노인들의 거처로 쓰이고 있다. 바이버리와 돌집 ‘알링턴 로’에 반한 이들이 여럿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모리스는 바이버리를 두고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일본 히로히토 왕은 왕세자 때이던 1920년 유럽투어 때 여기 바이버리에서 하루를 묵어갔다.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 창설자인 헨리 포드도 이 집을 보곤 ‘건물째 뜯어다가 미국 미시간으로 옮겨 지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포드는 주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탐내는 이들이 많아지자 자연보호와 역사유적 보존을 위한 민간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가 1928년 이 건물을 사들여 지금껏 보존해 오고 있다. # 영국의 시골 마을에서 고향의 따스함을 보다 코츠월드에서 바이버리 외에 또 들러볼 만한 곳이 ‘버턴 온 더 워터’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으로 강이 흘러서 ‘영국의 베니스’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게 마을 주민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수량이나 폭이 강은커녕 개울물 수준에 불과한데다, 수심도 고작 발목을 적시는 정도라 이런 비유가 터무니없어 실소가 터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마을은 나름의 매력을 품고 있다. 물가에서 가지를 늘어뜨려 그 끝을 물에 담근 풍성한 버드나무가 특히 인상적이다.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가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보는 영국인들의 표정에서 시골마을 개울물에서 멱을 감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보는 한국 중년의 얼굴이 겹쳐졌다. 뒤로 밀리긴 했지만, 코츠월드에서 가장 평화로운 정경을 가진 마을이라면 버턴 온 더 워터의 교외에 있는 어퍼슬로터와 로어슬로터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상(上)슬로터 마을’과 ‘하(下)슬로터마을’쯤 되겠다. 어퍼슬로터 마을은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있는 작은 개울을 끼고 고즈넉하게 들어서 있는데, 개울 양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물레방앗간까지 걸으면 청량한 느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곳의 느낌을 담기에는 그저 ‘평화롭다’는 한마디의 말로는 한참 모자란다. 여기는 어느 곳에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 풍경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고 느껴질 정도다. 코츠월드의 작은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서 드는 의문 한 가지. 양모산업으로 번성했던 작은 마을들이 어떻게 개발의 삽날을 피해 600년이 넘는 시간을 가둬둘 수 있었을까. 대답은 ‘도태’와 ‘소외’다. 코츠월드의 마을은 양모와 직물산업의 중심이 맨체스터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가 항구도시에서 차로 30분 거리라는 입지를 앞세워 승승장구하는 동안, 코츠월드의 마을들은 몰락했다. 이렇게 도태되고 소외된 마을들은 예전의 경관을 고스란히 갖게 됐고, 그 모습에서 과거의 향수와 고향을 보게 된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코츠월드에 남아있는 건 영국의 과거지만 국적이 달라도 보편적인 경험은 공유하는 것인지, 동아시아에서 12시간을 날아온 한국인들도 그곳에서 시골과 고향의 푸근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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