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란 지명에서는 바다 냄새가 난다. 기찻길이, 고속도로가 비로소 당도하는 강릉의 끝이 바다라서 그럴까. 강릉 하면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경포대도, 정동진도, 주문진도 다 바다다. 알지만 자주 잊는 사실. 강릉에는 대관령 등줄기의 고원지대도 있다. 설악 만큼의 비경을 갖추지 못했지만, 소금강 계곡과 대관령의 숲이 있다. 어깨쯤을 고랭지 배추밭으로나 내주고 있는, 뭐 별로 특별하달 것 없는 경관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단풍색이 마구 쏟은 물감처럼 물드는 딱 보름 동안만큼은,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가 되면 대관령 일대의 숲은 붉거나 노랗거나 초록의 유화물감을 덕지덕지 겹쳐 바른 현란한 팔레트가 된다. 올가을의 ‘그때’는 이번 주말까지다. # 노추산 가는 길의 화려한 단풍 강릉시 성산면에서 오봉 저수지를 끼고 왕산면을 향해 달리는 410번 지방도로는 단풍으로 흥건하게 물든 숲 사이로 이어진다. 이 길이 보여주는 색감은 다채롭다. 사철 푸른 침엽수의 초록은, 붉고 노랗게 불붙은 단풍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서로에 의해 도드라지는 ‘보색’ 효과다. 이 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 순전히 단풍이 물든 가을이기 때문이다. 선명하게 물든 나뭇잎의 색은 유화 물감을 나이프로 이겨 바른 듯하다. 단풍나무의 빨강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복자기나무의 선홍은 또 얼마나 선명한지, 느티나무 잎과 떡갈나무 잎의 노란색이 어떻게 다른지, 가을이 절정일 때 이 숲길에 와보면 안다. 이 길이 아름다운 건 색깔 때문만은 아니다. 길이 노추산 발치를 지날 때까지 만나는 지명을 하나하나 적어봤다. 돼지바위 계곡, 찍소폭포, 참참이소 계곡, 잿물소, 닭목령, 배나드리…. 지도를 짚어가며 적은 지명이, 모두 이야기의 씨가 자라서 열린 열매 같다.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녹아서 저렇듯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된 것일까. 그 길을 달리다가 노추산 앞에서 섰다. 노추산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실타래처럼 풀어진 길은, 송천의 물길을 따라 정선의 여량면 아우라지로 흘러들게 될 것이다. 노추산에서 멈춰선 건 ‘모정탑길’ 때문이다. 노추산 아래에서 작은 계곡으로 이어지는 1㎞ 남짓한 길을 ‘모정탑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가에는 자그마치 4000기에 달하는 돌탑이 늘어서 있다. 아예 탑과 탑이 이어져 돌담이 된 곳도 있다. 돌탑을 보러 가는 게 계절을 따지는 일은 아니지만, 노추산 돌탑은 배경이 단풍색으로 물드는 이즈음이 가장 좋다.
# 3000개 돌탑의 재료가 모정인 이유 이걸 기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미스터리 같다고 해야 하나. 노추산의 돌탑은 8년 전 예순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뜬 차옥순 씨의 손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의 삶은 기구했다. 4남매를 뒀으나 아들 둘을 먼저 보내야 했고, 남편마저 정신질환을 앓았다. 의지할 곳 없이 망연자실했던 그는 어느 날, 현몽을 꾼다. 꿈속에서 나타난 산신령이 ‘3000개의 돌탑을 쌓으면 집안이 평안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강릉 시내에서 살던 차 씨는, 산신령이 탑을 쌓으라고 했던 장소인 노추산을 찾아가 탑을 쌓기 시작했다. 계곡 옆에서 토굴을 파고 기거할 장소를 마련한 그는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와 토굴에서 며칠씩 머물면서 돌탑을 쌓았다. 지고 간 쌀이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갔다가 며칠 뒤에 다시 노추산을 찾아왔다. 처음 탑을 쌓기 시작한 게 1986년이었으니, 2011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자그마치 26년 동안 혼자 탑을 쌓아온 것이다. 그는 생전에 자기가 쌓은 탑의 수를 세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에서 “왜 탑의 숫자를 세지 않느냐”고 물으면, “산신령이 몇 개를 쌓았는지 다 가르쳐준다”고 했단다. 사실 여기까지 얘기를 듣고 나서도, 사람들이 왜 돌탑을 ‘모정탑’이라고 부르는지는 의문이었다. 수천 기의 돌탑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이란 게 그냥 지레짐작이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탑 쌓기란 맹목적 종교 행위거나, 어쩌면 운동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돌탑을 쌓다가 떨어져 고관절이 부러져 오래 입원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거의 앉아 기다시피 하면서 돌탑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씨는 생전에 자식을 위해 탑을 쌓으러 노추산을 드나들었지만, 차 씨가 세상을 뜬 지금에는 딸이 어머니를 기려 이곳을 자주 찾고 있단다. # 모든 부모의 기도로 세워진 돌탑 그리고, 이 탑을 모정탑이라고 부르는 더 큰 이유는 사실, 이것인 듯했다. 차 씨가 돌탑을 쌓는 게 알음알음 알려지자, 돌탑을 보러온 사람들이 차 씨의 정성이 깃든 돌탑 앞에서 자신들의 소망을 빌었다. 소원이 간절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차 씨는 ‘기원 탑을 쌓아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탑이 될 돌을 가져다주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돌을 가져왔고, 차 씨는 그 돌로 탑을 쌓고는 탑의 맨 윗돌에다 돌을 가져온 사람들이 소원의 대상인 사람의 생년월일을 써넣었다. 남편이나 아내의 생년월일을 써온 이도 있었지만, 탑의 99%는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것이었다. 그러니 노추산의 모정탑은, 수많은 이의 모정(母精)으로 쌓은 탑인 셈이었다. 이런 사연을 다 아는 노추산 아래 대기리 마을 주민들은, 글씨가 쓰여 있는 돌탑만큼은 ‘공든 탑’으로 여겨 이전부터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 부모들이 모정탑을 찾는다. 차 씨가 혼자 세운 3000여 개의 돌탑에다, 모정탑길을 조성하면서 들머리에 1000기 정도의 탑을 더 쌓았으니, 4000여 기의 탑으로 서 있는 기원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그러니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면 어떻게 영험한 기운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탑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만으로 어찌 효험이 있을까만, 그리고 이런 기복이 이기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대신해줄 수 없는 부모는 그저 기도로 위안받는다. 노추산의 수많은 돌탑도 그런 기도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닌가. 이런 모정을, 강릉시는 안다. 노추산의 모정탑길을 ‘시험 합격’이나 ‘취업 성공’의 명소로 이어보려는 계산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노추산 모정탑 들머리에는 아홉 번이나 과거에 급제한 율곡 이이의 친필이라는 이른바 ‘구도장원비(九度壯元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지난 2014년에 홀연히 나타나서 여기 세워졌다. 말인즉슨 노추산에서 공부해 아홉 번이나 장원한 율곡이 친필로 써서 세웠다는 비석이라는데, 우선 자신이 장원한 사실을 비석으로 세웠다는 얘기부터가 믿기지 않는다. 진짜 율곡의 친필이라면 적어도 문화재 자료쯤으로는 지정됐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슨 글씨를 새겼는지 비석에는 한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둘러대는 말이 이렇다. 구도장원비가 ‘관운’을 열어준다 해서 전국의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양반 행세를 하며 주민들을 귀찮게 하자 주민이 비석의 글씨를 쪼아서 땅속에 묻었다는 것. 그걸 누군가 꿈에서 계시를 받아 땅을 파서 찾아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행방이 묘연해졌고, 그걸 난데없이 무슨 무슨 콘텐츠 회사에서 찾아내 강릉시에 기증했다는 얘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정과 기원을 보여주는 데는 돌탑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다.
# 작고 초라한 공소에서 두 손을 모으다 강릉의 기원명소 또 한 곳.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에는 금광리 공소가 있다. 내륙의 논 사이에 띄엄띄엄 들어선 집들과 담으로 이웃하고 있는 작은 예배당이다. 공소란 신부가 부임하지 않는, 그래서 신도들끼리 모여 예배를 보던 작은 예배당을 말한다. 신부가 있는 천주교회당에 딸린 ‘출장소’ 개념이다. 초라해 보이지만 1887년 지어진 금광리 공소는, 이래 봬도 영동지역 천주교의 모태와도 같은 곳이다. 병인박해 때 여기로 숨어들어 옹기를 굽거나 농사를 짓던 이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을, 박해가 끝난 뒤에 ‘천주교회’로 문을 열었다. 신도가 늘면서 공소는 1921년 신부 부임으로 본당의 지위를 얻었고, 두 해 뒤에 1923년 인구가 많은 주문진으로 이주해 갔다. 외진 곳에 있던 본당을 신도들이 아예 대처로 들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신도들이 떠난 예배당은 다시 소박하고 고요한 공소로 되돌아갔다. 치장하지 않은 시멘트 외벽과 색 바랜 주황색 함석지붕의 공소는 소박하고 정갈하다. 청빈한 선비 같은 풍모라고나 할까. 공소 출입구에는 ‘천주교회’ ‘1887년 창립’이란 흰 글씨가 씌어 있다. 문에는 열쇠가 걸려있는데, 그 아래에 ‘열쇠가 잠기지 않았고, 언제든 들어와도 좋다’는 문구를 붙여놓았다. 누구든지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차가운 마루를 딛고 공소로 들어섰다. 밝은 창으로 드는 오후의 빛이 낮은 제대 위로 비쳤다. 제대 위의 성경책이 이쪽에서 볼 수 있도록 펼쳐져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 공소의 제대는 신도들의 것이다. 설교를 위해 저쪽에 서 있는 이를 위해 제대를 놓은 게 아니라, 신도들이 벽의 나무 십자가를 마주 보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놓은 것이란 얘기다. 누구든 그곳에 들어서면 기도하고 싶어질 게 틀림없다. 기도가 낯설다면 혼잣말 같은 기원이라도 하게 되리라. 종교가 없더라도 말이다. 누추하고 소박한 공간에서의 기도라면 더 소중하게 들어주지 않을까. 더구나 금광리 공소는 그곳이 ‘잠기지 않았음’을 알리고, 낯선 이들에게도 ‘머물고 기도하기’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와서 ‘탐욕의 기도’는 하지 않을 테니, 대개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겠다. 누구든 그 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초라하고 소박한 공소가, 거기 있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 기원으로 반들반들해진 맷돌 이렇다 할 게 하나도 없는 송라사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순전히 약사전 뒤쪽의 바위 아래 있는 맷돌 때문이다. 맷돌은 절을 짓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했다. 희한하게도 맷돌 위쪽이 반질반질한 대리석처럼 닳아있었다. 어디에 쓴 맷돌이었을까. 설왕설래하다가 내린 결론인즉, 맷돌 위를 주먹만 한 돌로 문지르면서 기도하던 돌이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맷돌 위쪽이 거울처럼 매끄럽게 닳아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영험한 맷돌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절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러저러한 TV 프로그램에 맷돌이 몇 번 소개된 이후에는 외지인들이 몰려들었다. 송라사의 맷돌은, 그러나 소원을 이뤄주지는 않는다. 절집의 설명은 이렇다. 소원을 빌고 나서 돌을 들어 맷돌 위를 둥글게 문지르는데,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돌이 부드럽게 빙글빙글 맷돌 위를 미끄러지고, 소원을 들어주면 돌이 뻑뻑하게 돌아가다가 맷돌과 딱 붙은 듯 멈춘다. 맷돌과 돌이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다만 소원성취의 소망이 과연 이뤄질 것인지 아닌지를 가르쳐 주는 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맷돌 위에 돌을 놓고 돌렸을까. 거울처럼 매끄럽게 갈아진 맷돌은 얼굴이 비칠 것 같았다. 손에 쥐고 맷돌에 비비는 돌 바닥도 매끄럽기가 매한가지였다. 송라사의 스님은 수많은 사람의 간절한 소망과 기원으로 손에 쥐는 돌이 닳고 닳아 얇아져 깨져버리는 바람에 몇 번이고 다른 돌로 바꿔놓았다고 했다. 지금도 절집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날 송라사를 찾은 몇몇이 간절하게 기도했으나, 모두 야속하게도 맷돌 위로 돌이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늦은 오후에 손톱만큼의 위안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수능이었을까, 취업이었을까, 아니면 건강이었을까. 부모의 기도보다, 그 기도의 간절함보다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하는 모정이다. 강릉 노추산의 모정탑에서, 또 구정면의 공소에서, 또 연곡면의 송라사에서, 이 가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의 기도가 차곡차곡 쌓일 것인가. ■ 단풍여행객이 줄어들었다 경기침체 때문일까. 올가을은 단풍행락객이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듯하다. 덕분에 예년보다 좀 더 호젓하게 단풍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올해 단풍색이 좋다. 올가을 단풍여행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다. ■ 여행정보 소돌 해변은 기암으로 뒤덮여 있는데, 앞바다에 소를 닮은 ‘아들바위’가 있다. 아녀자들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던 바위다. 딸 낳기를 빌던 바위도 있다면 모를까, 오로지 아들만을 바랬으니 지금의 시선으로는 시대착오적인 소원을 빌던 곳이다. 노추산 모정탑길이나 금광리 공소, 송라사 맷돌을 얘기하면서 이곳을 나란히 세우지 않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강릉시 대전동 산 121번지에 있는 강릉 최 씨 문중의 선영도, 오죽헌의 건축과 율곡의 탄생에 얽힌 발복지도 의미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문중의 묘역이어서 ‘가보라’고 하기가 망설여졌다. 한눈에 보아도 명당임이 느껴지는 강릉 최 씨 문중 묘역에는 최치운의 무덤이 있다. 조선 세종 때 이조참판 벼슬까지 오른 그는 오죽헌을 지었다. 오죽헌은 최치운의 아들이 살다가 그의 딸에게 상속했고, 그 딸은 또 자신의 딸에게 상속했는데, 그 둘째 딸이 바로 신사임당이었다. 신사임당은 여기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오죽헌을 짓고 그토록 기다렸던 대학자의 출현을, 그는 죽어서 이곳에 누워 마침내 보았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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