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식으로 만들었더니 ‘과학적으로 최고’ 라네요”
경북 문경에서 전통 한지를 뜨는 김삼식(68)장인은 평생 옛 방식대로 종이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한 일본식 쌍발뜨기와 화학약품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홀로 종이를 만들어오던 그는 뒤늦게 경북 무형문화재가 됐다. 과학적인 조사 결과, 그의 종이가 나라에서 으뜸가는 품질로 밝혀져 고려 초조대장경 복원과 조선왕조실록 복제 사업에 들어가는 종이를 만들게 됐다.
양심, 진실, 전통
김삼식 장인과 후계자인 아들은 천년을 가는 ‘고려지(高麗紙)’를 만드는 데 열심이다. 그의 공방 ‘삼식지소(三植之所)’에 심은 세 가지 뜻은 양심과 진실, 전통이라고 한다.
찬바람 부는 섣달, 경북 문경 농암면 내서리 골짜기에는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솔솔 피어난다. 고구마를 굽는가 싶어 따라가보니 닥나무를 찌는 냄새다. 언덕바지에 자리한 한데 아궁이 속은 활활 타고 있다. 닥나무 150단을 차곡차곡 쌓은 닥무지는 왕릉의 봉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롤케이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커다란 쇠 닥솥에 물을 붓고 닥무지를 쌓은 다음 그 아래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물이 끓어 올라온 수증기로 닥이 쪄진다. 닥 껍질이 쉬 벗겨질 만큼 충분히 찌는 데는 여덟 시간 정도 걸린다.
“닥나무에는 피부를 곱게 하는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장품 회사에서도 이 닥나무를 쓰지요.”
불을 때던 아들 김춘호(36) 씨는 인사말 대신 얼른 닥무지에서 나는 증기를 쐬라고 권한다. 아궁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는 김삼식 장인이 맨 땅바닥에 앉아서 닥나무를 손질하고 있다. 닥나무는 추워지는 11월경 잘라서 이렇게 잔가지를 손질해 20kg 정도 되게 한 단씩 묶어 닥무지를 한다(‘닥무지’는 닥나무를 쌓은 무더기를 말하지만, 닥무지를 찌는 과정 자체를 ‘닥무지’ 또는 ‘땅무지’라고도 한다).
불과 물이 씨름하며 나무를 익히는 여덟 시간이 지나 마침내 닥을 걷는 시간, 닥무지를 덮었던 비닐 덮개를 열자 닥무지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으로 주위가 자욱하고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김삼식 씨를 비롯해 아들 춘호 씨, 부인 박금자 씨, 딸 순연 씨까지 모두 닥무지에 달려들어 닥나무 단을 옮기기 시작한다. 부인 박 씨는 “이때만큼은 춥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며 웃었다.
종이 만드는 일은 추위와 씨름하는 일이기도 하다. 달력의 날짜보다 자연현상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옛사람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서리 내릴 때 시작해 진달래 피기 전까지”가 종이 만들기에 최적기다. 게다가 종이 제작의 정점이라고 할 종이뜨기는 아예 차가운 물통에 손을 담그고 해야 한다. 전통 공예는 모두 자연에 순응하면서 발전해온 것이라 농작물처럼 저마다 ‘제철’이 있는데,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전통 종이는 철저하게 겨울이 제철인 공예품이다.
아홉 살부터 종이 만들어
김삼식 장인이 종이 만드는 힘든 일에 뛰어든 것은 겨우 아홉 살 때다. 일제의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해방둥이인 어린 장남은 옆 마을 갈골로 시집간 누이의 시아주버니였던 유영운 장인의 닥 공장에 나가게 됐다. 평생 몸무게가 50kg을 넘어본 적이 없는 그가 아홉 살 적엔 얼마나 자그마했을까. 어린애에 불과한 그 나이에 닥나무를 등짐 져 옮기고 껍질을 벗기고 찬물에 손을 담가야 하는 종이일은 틀림없이 고되었을 터다.
“밥줄이 걸린 일인데 싫다, 힘들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그저 일만 했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남보다 세 배로 일할 만큼 힘이 좋습니다.”
소매를 걷어 보여주는 팔뚝을 만져보니 정말로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그 작고 단단한 몸으로 그는 농번기에는 집에서 농사짓다 겨울에는 종이를 만들며 가족을 부양했다. 땅이 없어 남의 농사를 품팔이로 하고, 1년 내내 노동하고 종이까지 팔러 다니는 고된 세월이었다. “열다섯 살 겨울, 종이 20kg을 지고 보은 가까이 있는 화령으로 팔러 간 적이 있어요. 왕복 40km 거리였는데, 가보니 눈이 많이 내려 장이 서질 않은 겁니다. 첫새벽 누님 집에서 아침을 먹고 지게 지고 걸어왔는데, 한 장도 못 팔고 돈도 없어 쫄쫄 굶은 채로 돌아오다가 길을 잃었어요.”
좁은 길에 눈이 쌓이니 분간이 안 돼 길을 잃고 만 것이었다. 눈길에 엎어지면서 잠이 들었는데, 배가 고프면 지쳐 잠들기 쉽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한다. 얼마나 잤을까, 추워서 깨어보니 온몸이 땀에 젖었고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정신 차려 집을 찾아갔는데, 집이 가까워오자 발이 가렵기 시작했다. 동상 증상이었다.
“가려워지는데, 환장하겠더라고요. 그런데 동상 걸린 부위를 콩자루에 넣으면 낫는다고 하잖습니까. 2주 동안 콩자루에 넣고 살았더니 정말로 효과가 있더군요.”
동상은 차치하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그날의 기억은 서러운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듯 “음력으로 섣달 스무이레”라며 날짜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 3년 뒤 그는 다시 한겨울 길에서 자는 ‘사건’으로 또 한 고비를 넘겼다. 이번에는 종이를 팔고 기분이 좋아 술을 한잔 걸친 결과였다. 이 이야기는 겸연쩍은 듯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아홉 살에 시작한 종이 일은 열일곱 살 무렵엔 혼자 해나갈 정도로 익숙해져 더 이상 닥 공장을 오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하게 됐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식 쌍발뜨기와 화학제품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그는 평생 한 번도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일제 때 지장(紙匠)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유영운 어른은 끝까지 도망 다니다 안 잡혀갔답니다. 광복 후 돌아온 장인들이 일본에서 배운 쌍발뜨기를 퍼뜨렸을 때에도 유 어른은 옛 방식으로만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쌍발뜨기를) 못 배운 겁니다.”
“하던 대로 하세요”
우리 종이는 뜰 때 발 하나로 물질하는 외발뜨기로, 물을 전후좌우로 흘려보내(흘림뜨기) 섬유소가 우물 정(井)자 형으로 얽혀 조직이 매우 튼튼하다. 그런데 두 장을 한꺼번에 뜰 수 있도록 된 넓은 쌍발뜨기는 발에 테두리가 있어서 섬유소 섞인 물을 가두어 아래로만 흘려보낸다. 전후좌우 흔들기는 하지만 외발뜨기처럼 완전한 흘림뜨기는 못 된다. 외발뜨기처럼 발을 방향 바꿔가며 아홉 번씩 물에 담갔다 뺐다 하지도 않으니 종이를 빠르게 많이 뜰 수 있다.
“전라도 지방은 종이 만드는 곳이 많아 그곳에선 쌍발뜨기가 유행했다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전라도는 먼 곳이어서 쌍발뜨기란 게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겨우 알게 됐는데, 그때도 발틀이 비싸서 설치를 못했고요.”
제작 과정에 들어가는 잿물이나 표백, 닥풀 역시 마찬가지다. 쪄낸 닥 껍질을 벗겨 한겨울에 말렸다가 그 껍질(피닥, 흑피)에서 검은 부분을 긁어내 속껍질(백피)만 얻는데, 마른 피닥을 물에 불려가며 긁어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다. 김 장인의 삼식지소에서는 이 과정을 온 식구가 매달려 몇 달씩 걸려 하지만 화학약품을 쓰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백피를 적당히 잘라 삶아 섬유소를 분리해내는데, 이때 넣는 잿물도 그는 메밀대나 콩대 등을 태워 내린 천연잿물을 쓴다. 잿물 대신 가성소다나 소다회를 넣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천연잿물은 약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을 만들어야 하지만, 3만 원짜리 약품을 쓰면 1년치 종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처럼 하면 돈과 시간, 노동 모두 손해지요.”
전통 지키기의 역설
표백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흰 종이를 만들기 위해선 그저 더 많이 씻어 말리고, 백피 만들 때 더 많이 긁어내고, 삶아서 더 많이 씻어내고, 말릴 때 잡티를 더 많이 잡아내는 법만 알았지 무슨 표백제를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집에서 종이를 만들던 시절, 혼자 만드는 양이 한정돼 있어 그는 남은 닥나무나 피닥을 다른 종이공장에 팔곤 했는데, 공장에서 본 하얀 종이는 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전북 완주 상감면의 공장에서 처음 하얀 종이를 봤는데, 너무 좋아 제가 사장에게 어찌 만드느냐고 물어보았지요. 사장이 약품처리 했다기에 무슨 약을 어떻게 쓰면 되냐고 묻자 안 가르쳐줘요. ‘선생은 그냥 하던 대로 하시라’면서요.”
화학약품으로 손쉽게 처리하면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는다. 그러면 김삼식 씨가 다른 공장에 팔 닥나무도 없을 테니 아마 그 때문에 공장 사장님은 안 가르쳐줬을 것이다. 아니면 시속(時俗)의 흐름과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옛날식으로밖에 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삼식 씨를 배려한 건지, 무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장님이 안 가르쳐준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한때 쌍발뜨기와 화학약품으로 처리하던 장인들도 요즘엔 옛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추세다. 하지만 화학제품과 기계를 앞세운 근대화는 재래방식과 기구, 터전을 앗아가기 일쑤다. 이곳 삼식지소처럼 한뎃솥(닥솥)부터 토종 참닥나무 밭, 닥풀 만드는 황촉규 밭까지 고루 남아 있는 곳은 드물다.
삶아낸 섬유를 쳐서 으깨는 과정도 많은 한지업체나 장인들이 비터(beater)를 사용하는 데 반해 이곳은 닥방망이로 직접 친다. 기계로 자르지 않고 이렇게 손으로 두들기면 섬유소가 크게 훼손되지 않아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다. 기계로 처리하는 손쉬운 맛에 한번 길들면 이렇게 일일이 방망이로 쳐내는 고된 작업을 계속하기 힘들다.
만약 그때 완주공장 사장이 화학제품을 가르쳐줬다면, 젊은 삼식 씨는 그 약품을 썼을까. 아마 썼을 것이다. 그가 전통방법을 고수한 것은 무슨 민족의식이나 전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몰라서, 돈이 들어서 못했을 뿐이다. 전통이나 역사를 지키는 것은 때로 역설적이다. 지금 김삼식 장인은 “돈을 수백억 원 준다고 해도 이 일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가 견뎌온 세월은 만만치 않았다.
오늘날 ‘지식’이라고 하면 책과 함께 정보를 담은 컴퓨터를 떠올리겠지만, 과거 지식은 모두 종이책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정보보다는 ‘지혜’나 ‘진리’에 가까웠다. 그래서 불세출의 시인으로 꼽히는 고려의 이규보는 대장경을 ‘부처의 금구옥설(金口玉說)을 담은 그릇’이라고 했다. 지식 또는 지혜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기술, 즉 종이 제작과 인쇄기술은 고대 사회에서 문화의 척도였다. 20세기 초까지 동양에서 대장경 제작은 지식과 문화의 총화로서, 그 사업은 중국을 거쳐 고려, 그리고 일본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백번 손질한 종이
묘하게도 종이의 역사 또한 같은 궤적을 그린다. 신라시대 희고 얇은 종이에 먹으로 필사한 ‘백지묵서(白紙墨書) 화엄경’은 향수를 뿌려가며 키운 닥나무로 만든 뛰어난 종이 제작 기술을 그대로 보여주며, 문화가 꽃핀 고려시대에 이르면 ‘고려지’의 명성이 동양 전체에 뜨르르했다.
중국에서 고려지를 누에고치 ‘견(繭)’자를 쓴 ‘견지’라고 부른 것은, 고려지가 비단처럼 곱고 질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사람들은 명 황제의 스승이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이 고려지를 태워 식물섬유로 만든 것임을 확인할 때까지 고려지는 누에고치 솜을 넣어 만든 걸로 믿었다.
고려지의 명성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조선 종이도 고려지 또는 견지로 계속 불렸다. 그랬기에 명나라의 뛰어난 문인이자 서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은 조선의 고려지인 경면전(鏡面閻·거울처럼 반들거리는 종이)에 작품을 남겼고, 청나라 시대에 나온 ‘문방사고도설’에는 “도연명이 쓴 ‘난정서’에 누에고치 종이를 사용했는데, 지금 도읍에서 쓰는 고려지다”라고 했다. 난정서의 원본이 이미 사라진 시대에 이런 글을 적은 것은 그만큼 고려지를 귀하게 여겨서일 것이다.
고려지가 이토록 전설적인 명성을 갖게 된 것은 뛰어난 제작기술 때문이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참닥나무를 원료로 외발뜨기해서 내구성이 좋은 데다 종이를 만든 다음 하는 도침(두들겨 다듬는 작업) 과정은 신라시대부터 매우 발달해 우리 종이를 특별히 ‘백추지(白?紙)’라고 불렀다. 백추지란 ‘두드린 하얀 종이’라는 뜻인데, 한지장들은 흰 백(白)자 대신 일백 백(百)자를 써서 백 번 손질한 종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만큼 종이를 만드는 데 손길과 공력이 많이 든다는 뜻이리라. 김삼식 장인도 찹쌀풀을 뿌려가며 쉰 번씩 두들기는 도침 과정을 거쳐 표면이 고운 종이를 만들어낸다.
종이의 질은 문화의 성격도 결정한다. 얇아서 먹이 잘 번지는 중국 그림은 발묵법(潑墨法)이 유행했고, 우리 그림은 적절한 발묵과 사실적인 선이 함께 발달했다. 임진왜란 후 종이 제작 기술이 쇠퇴했음에도 청 황제의 조서용 종이를 조선이 공물로 바친 것은 중국에서는 먹이 쉬 번지지 않아 중후한 맛을 내는 우리 종이를 오히려 격조 높은 종이로 쳤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다시 충북대 목재종이학과를 나온 춘호 씨는 “얇은 종이를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없었을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초조대장경과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하는 데 들어가는 종이를 만들 때 주문대로 종이 두께와 평량(종이 무게를 재는 단위)을 조절하고 있다. 초조대장경 복원사업을 주관하는 대장경연구소에서 일본에서 가져온 대장경 원본을 본 김삼식 장인은 탄성을 터뜨렸다.
“1000년 이상 됐다는데, 금방 찍은 것처럼 먹빛이 살아 있어요. 1000년을 견뎌온 종이라니 얼마나 기특합니까. 저의 종이도 1000년을 갈 것이라 생각하니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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