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의 江湖동양학

醉月 2014. 2. 27. 22:53

목차

☞ 사주명리학이란
☞ 장제스와 사주의 대가.. 대만 웨이첸리
☞  일본 아베 다이잔
☞  조선의 역술가들
☞  MBA vs 계룡산 출신
☞  박도사의 내공증진법
☞  지리산대학 낭인과

☞  주역을 실천한 가문들
☞  솥단지와 밥
☞  아들은 조상신의 환생
☞  역술계의 빅3
☞  노무현 대통령 사주
☞  사주고수들 이북출신

 

사주명리학이 '아하! 그렇구나'

 

이번 주부터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의 '강호(江湖) 동양학'을 연재합니다. 음양오행.사주명리학.풍수 등 한국인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분야들을 역사적.문헌적 배경과 함께 알기 쉽게 풀이할 것입니다.

필자 조교수는 지난 15년간 한.중.일의 사찰.암자 6백여곳을 답사하는 등 천문.지리.인사의 삼재사상을 중심으로 동양학에 몰두해왔습니다.

조용헌(趙龍憲) 1961년생. 원광대에서 불교민속학 전공. '능엄경 수행법의 한국적 수용'으로 박사학위. 저서 '나는 산으로 간다''(1999.푸른숲).'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2002.푸른역사).'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2002.생각의 나무).<중앙>


인생사에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게 마련이다. 동양학에 있어서도 강단동양학(講壇東洋學)이 있으면 거기에 대비되는 '강호동양학(江湖東洋學)'이 존재한다.

강단동양학이란 대학의 강단에서 통용되고 인정받는 동양학을 가리킨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논문의 생산자와 이를 읽는 소비자는 모두 교수.박사.전문연구자들이다. 강단 또는 분필과 관련돼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강호동양학은 강단 밖의 강호에서 유통과 소비가 이뤄진다. 대학과 강단이라는 보호막 없이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에서 풍찬노숙하는 동양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호동양학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강호파가 강단파와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이 '잡초 같은 생명력'에 있다.

조선 강호파의 3대 과목은 사주.풍수.한의학이다. 3대 과목은 천.지.인 삼재사상(三才思想)과 관련돼 있다. 천시(天時)를 알기 위해 고민하였던 한자문화권의 천재들이 내놓은 이론체계가 바로 사주다. 천시란 타이밍이다.

'과연 어느 때 베팅을 해야 하는가?' '내 인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사주명리학을 낳았다. 인생을 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들이다. 사주가 시간이라면 풍수는 공간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

즉 환경과 인간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풍수다. 과연 인간은 어떤 땅, 어떤 환경에서 거주하는 것이 좋은가?

그 핵심에는 지령(地靈)이라는 개념이 있다. 땅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걸 받아들일 때 비로소 풍수가 이해된다. 지령이 어린 곳에 인간이 거주하면 일단은 건강해지고, 그 다음은 영성이 개발된다. 인간은 우선 건강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자유와 깊이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게 영성이다.

'건강'과 '영성'은 풍수가 추구하는 양대 목표다. 한의학은 존재의 문제다. 존재를 압축하면 인간의 몸이다. 인체라는 소우주는 과연 무엇인가를 천착한 것이 한의학이다.

강호동양학은 해방 이후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대학의 커리큘럼이란 것이 서구적인 세계관의 반영이고, 서구적인 세계관에 비춰볼 때 사주.풍수.한의학은 이해할 수 없는 매직(magic.마술)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배제되다 보니 이들 3대 과목의 맥은 재야의 기인.달사들에 의하여 그 전승이 이뤄졌다. 쉽게 말하면 '변두리 인생'들에 의하여 그 맥이 이어져 왔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1970년대 초반 경희대와 원광대에 한의학과라는 게 개설되었다. 제도권 내로 진입한 것이다. 그동안 양의학으로부터 '약초 뿌리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원시적 치료행위'로 멸시받던 한의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마침내 학문적 시민권을 딴 것이다.

시민권의 획득은 강호파의 대중적 지지도와 아울러 강단파의 권위까지도 확보하였음을 의미한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의학과는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 중의 하나로 부상한다. 한의사가 되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데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양의에 비해 스트레스가 덜하고, 평상시 동양철학까지 공부하며 살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한 탓이다.

박사학위 소지자, 서울대와 포항공대 졸업생,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에 몇년 다니다 그만 둔 사람들이 한의학과에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조직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해보니까 '인생 사는 게 별 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생계수단도 되면서 자유롭게 공부도 병행할 수 있는 분야가 한의학이라고 여긴 것이다.

머리도 좋고 인생경험도 쌓은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투입되다보니 앞으로 강호동양학의 대가들은 한의사들 가운데서 배출될 가능성이 크다.

풍수는 어떤가. 학문적 영주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시민권보다는 보호를 덜 받지만 영주권이라도 혜택이 많다. 풍수가 영주권을 받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다.

'묏 자리 하나 잘 쓰면 팔자 고칠 수 있는 황당한 잡술'로 여겨지던 풍수를 '동양의 고유한 생태철학'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사람이 최창조 교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울대 교수가 풍수를 연구하니까 뭔가 있기는 있다는 식으로 국민 인식이 바뀌었다.

아쉬운 것은 최교수가 대학에서 일찍 나와버린 점이다. 부대끼더라도 대학에 좀더 남아 있는 쪽이 풍수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성싶다. 문파를 하나 이끈다는 것은 그래서 힘들다.

사주는 어떤가. 불법체류자 신세다. 연금혜택도 없고, 공식적인 취업도 불가능하다. 국가와 법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미신(迷信) 종사업자'일 뿐이다.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그러니 보따리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 불법체류자들에게 영주권을 얻게 해주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문제다.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음양오행 사상을 공통분모로 하는 풍수와 사주의 세계를 week& 독자여러분과 함께 주유(周遊)해보기로 하자.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2003.07.24

 

 

[江湖동양학]

장제스가 신봉하던 ‘사주의 대가’

韓·中·日 고수들 대만 웨이첸리

 

인텔리 출신… 재물운·처복·관운 잘 봐
공산화로 쫓겨온 중국인들에겐
"기다리면 좋은 운 온다" 희망 줘


한.중.일 삼국은 한자문화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바둑.삼국지.사주팔자와 같은 문화코드들이 바로 그것이다. 코드가 비슷하기 때문에 문화의 호환작용(互換作用)도 활발하게 진행된다. 호환작용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고수(高手)'의 출현이다. 이창호라는 천재의 등장이 삼국 바둑의 끝내기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처럼, 한 나라에 고수가 나타나면 다른 두 나라는 갑자기 공부할 거리가 많아진다. 사주명리학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근래 세 나라의 명리학 고수는 누구인가. 먼저 중국을 보자. 1980년대 후반에 작고한 웨이첸리(韋千里)를 꼽을 수 있다. 대만의 장제스(蔣介石)가 그를 아주 좋아하였다. 장제스는 인생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팔자가 있다고 믿었다. 장제스 총통의 사진을 보면 머리도 큰데다 눈.코가 부리부리해 대단히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운명 따위는 저리 가라고 할 성싶은 강인한 관상의 소유자가 내면적으로는 운명론자였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신상에 관한 문제를 상담할 때는 웨이첸리를 자주 만났다. 때로는 국가적인 결정에 관계되는 문제까지도 그에게 상의하였다고 전해진다. 웨이첸리는 대만의 비공식적인 국사(國師)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장제스의 부인이자 대부호의 딸이었던 쑹메이링(宋美齡)도 그를 신봉하였다. 원래 사주팔자는 남자보다도 여자들이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은 당장 눈앞에 현찰이 걸려 있는 도박을 좋아하지만, 미래의 안정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점(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불안한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여자나 남자나 구분 없이 모두 미래의 운명을 알고 싶어한다.

웨이첸리가 동북아시아 명리학계의 스타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시대적인 불안이 있었다. 그 불안의 요인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 정권의 등장이었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많은 사람이 자기 근거지를 버리고 대만이나 홍콩으로 이주해야만 하였다. 졸지에 집과 직장을 버리고 객지로 쫓겨난 사람들이 직면한 감정은 불안과 상실감이었다. "내 인생은 이러다 끝나는 것인가?" "언제 다시 본토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좌절에 빠진 대만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 웨이첸리였다. 짐작컨대 그가 내린 처방전의 주종은 "지금은 운이 좋지 않다. 몇 년만 참고 넘기면 좋은 운이 온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50년대 대만사람들의 집단불안을 극복하는 처방전 가운데 하나는 사주팔자였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이후 대군벌과 고급관료, 그리고 부자들은 팔자를 믿었고, 웨이첸리를 신뢰하였다. 네 기둥(四柱)에 새겨진 여덟 글자(八字)의 효과는 때때로 카를 융과 상담심리학을 능가할 수 있다.

웨이첸리는 인텔리 출신이었다.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역술가들이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었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의 대졸 학력은 돋보이는 부분이다. 영어실력도 상당하였다. 5.4운동 이전까지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각국의 조계에 출입하는 서양인들과 교분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수시로 그를 찾아와 팔자를 문의하였다. 그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재물복과 처복, 그리고 관운이 언제 오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사주라고 하는 오리엔탈 어스트롤로지(Oriental astrology)의 적중력에 감탄한 서양인들 가운데는 팔 걷어붙이고 배우겠다며 제자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 명의 '코 큰'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이 사람들이 후일 유럽 본국으로 돌아가 사주를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천주교 신부들도 그 밑에서 사주를 배웠다고 한다.

웨이첸리의 대표작은 '팔자촬요(八字撮要)'다. 골방에 들어있던 명.청대의 명리학 고전들을 꺼내서 20세기의 현실에 맞게 응용한 책이다. 말하자면 고전의 이론과 현실의 '임상 경험'을 결합한 작품이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부 좀 했다고 하는 이론가들은 거의 이 책을 보았다. 책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모모 정치가들이나 기업총수들도 60, 70년대 홍콩에 가서 웨이첸리를 직접 만나보았다는 소문이다.

 

[조용헌의 江湖 동양학]

일본 아베 다이잔

美 상류층도 '모시는' 생활 풍수의 중흥祖

 

5년 전쯤 한국의 계룡산과 같은 분위기를 지닌 일본의 이코마(生駒)산을 간 적이 있다.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현의 경계에 있는 해발 6백42m의 산이다.이코마산은 일본의 오만가지 토속신앙이 밀집된 곳이라서 일본을 깊이 알고 싶어하는 종교.민속학자들은 반드시 한번 들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토속신앙의 집산지인 이시키리(石切) 신사가 있고, 신사 주변의 골목길에는 수많은 점술집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추명학(推命學)'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집에 들어가 보았다.

점집 특유의 꺼림칙한 분위기가 아니고 여자들 들락거리는 의상실 분위기에 가까웠다. 복채는 3천엔(약 3만원). 정장을 차려 입은 50대 초반의 중년부인이 필자의 생년월일시를 묻더니만, 만세력을 보고 종이에 육십갑자를 적어 넣었다. 경쟁자(?)의 입장에서 일본 역술가의 내공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신기(神氣)는 별로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풀어 가는 방식을 보니 한국에서 사주보는 이론과 거의 같았다. 이론만 공부한 경우이다. 경험에 의하면 사주는 신기와 이론이라는 쌍권총을 차야만 적중도가 높다. 이론에 직감이 결합돼야 하는 것이다. 권총 하나만 가지고는 OK 목장의 결투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다. 한.일의 명리학 수준을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일본은 이론이 발달했고, 한국은 신기가 더 발달하였다. 이 역술가에게 "어떤 책을 보고 사주 공부를 했는가?"라고 물어보니, "아베 다이잔(阿部泰山)의 책"이라고 대답했다.

아베 다이잔은 현대 일본의 사주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중흥조이다. 유충엽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은 과거 중국.한국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어 왔으나, 아베가 등장하면서 서열이 바뀌었다고 한다. 아베는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왔다. 그는 누이동생 때문에 사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전해진다. 결혼한 누이동생이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여기저기 병원에 다녀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어느날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한의사는 대뜸 여동생의 사주부터 물었다. 생년월일시를 보더니만 "이 사주는 아이가 없는 무자식 팔자"라고 진단했다. 약을 먹어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말이었다. 참고로 여자 사주에 식신(食神).상관(傷官)이 없으면 대개 자식이 귀하다고 본다. 추측컨대 여동생 팔자에 식신이나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베는 동생의 불임 원인이 정해진 팔자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도대체 사주라는 게 무엇인가'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베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었다. 중.일전쟁 때 종군기자로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면서 사주팔자에 관한 중국의 고전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가 모은 자료는 자그마치 트럭 한 대 분량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 자료를 모두 가지고 왔음은 물론이다. 전후(戰後) 아베는 이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하였다. 그 결과물이 22권짜리 '아베 다이잔 전집'(1963년)이다.

대만의 웨이첸리도 그렇지만 일본의 아베가 주로 활동한 시기도 1950~60년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패전 후 사회 전체가 좌절에 빠진 시기였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주를 통하여 국민들의 상실감을 달래준 것이다. 같은 신문기자 출신으로서 전후의 일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인물이 두 사람인데, 한 명은 아베이고, 다른 한 명은 산케이(山經)신문 출신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이다. 아베는 사주팔자이고, 시바는 소설이었다.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명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난세를 먹고산다.

한국에서는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친형으로 사주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이병각씨가 아베와 교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 자주 갔던 이병철 회장이 형을 통해 아베와 만났을 법도 하다.

아베 사주의 강점은 디테일에 있다. 중국의 스타일이 전체적인 구조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는 반면, 아베 이후 일본의 방식은 세밀한 부분을 밝히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오행을 색깔.방위 쪽으로 풀이한 것이 한 예다. 사람의 사주에 화(火)가 부족하면 이사갈 때 남쪽이 좋고, 옷이나 자동차를 구입할 때 이왕이면 빨간색을 택하라고 권유하는 식이다. 화는 남쪽과 빨간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베가 기초를 다진 이 분야는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몇몇 전문가들에 의하여 가상학(家相學)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는다. 사주팔자를 생활풍수와 인테리어에 적용한 것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가상학은 홍콩의 화교들에게 역수입되었고, 다시 미국의 차이나타운으로 전파된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가상학은 미국인들에게까지 먹혀들고 있다. 중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상학은 특히 미국 상류층이 주요한 고객이다. 3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유력지 LA 타임스의 주말섹션에 생활풍수 칼럼이 정기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찌되었거나 일본에서 시작된 가상학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베가 중국에서 가져온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자리잡고 있다.

 

[조용헌의 江湖 동양학]

조선 역술가들 왕권승계 쥐락펴락

 

한국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보기 시작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그 기원을 소급해 올라가다 보면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경국대전'이 눈에 띈다. '경국대전'을 보면 과거시험을 통해서 '명과학(命課學) 교수를 뽑았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명과학 교수란 사주명리학 전문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초시(初試)에서 4명을 선발한 다음에 복시(復試)에서 2명을 탈락시키고 나머지 2명만 뽑았다. 사주팔자 전문가를 국가에서 봉급 주는 공무원으로 선발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명과학 교수에 응시하였는가. 양반이 아닌 중인들이었다. 명과학은 천문학.지리학과 함께 중인들이 응시하는 음양과(陰陽科)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교수들이란 대학의 교수를 가리키는 호칭이 아니라, 이들 음양과 출신 교수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음양과 교수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전문기술직이라서, 머리 좋은 중인들이 상당수 응시하였던 것 같다. 과거시험은 매년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만 있었다. 식년시(式年試)라고 해서 3년 간격을 두고 시행되었다. 3년에 2명을 뽑았다면 이는 매우 적은 인원이다.

'경국대전'의 성립연대가 세조 6년인 1460년에 시작하여 성종 16년인 1485년에 완성되었음을 감안하면, 사주팔자를 보는 명과학이라는 분야는 적어도 15세기 후반부터 조선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공식기록만을 가지고 추정한 연대이고, 공식화되기 전에 유행하기 마련인 비공식까지 고려하면 연대는 이보다 더 소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과학의 시험과목은 무엇이었을까. '서자평(徐子平)' '원천강(袁天綱)' '범위수(範圍數)'와 같은 책들을 외는 일이었다. '서자평'은 명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서자평이란 인물이 남긴 저서 이름이다. 흔히 '연해자평(淵海子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자평 이전까지의 명리학은 태어난 시는 보지 않고, 생년.월.일까지만 보는 삼주육자(三柱六字)의 방법에 의존하였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386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10세기 무렵 중국의 서자평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체계에다 그 사람의 태어난 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정밀도를 보강한 486 컴퓨터의 출현과 같다. 예를 들어 2003년 8월 29일 진시(아침 8시)에 태어난 사람의 간지를 만세력에서 뽑아보면 계미(癸未).경신(庚申).갑술(甲戌).무진(戊辰)이 된다. 네 기둥에다가 글자는 여덟자인 사주팔자(四柱八字)가 된 것이다. 여기서 시에 해당하는 무진을 빼면 삼주육자가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이 방법은 서자평이 창안한 방식이다. '원천강'은 관상 보는 책이다. 당나라 때 관상으로 유명했던 원천강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딴 책이다. 근래에 관상서로서 널리 알려진 '마의상법(麻衣相法)'은 송(宋)대에 저술된 것이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된 관상서가 청(淸)대에 저술된 '상리형진(相理衡眞)'이다. 요즘에는 별로 유통되지 않지만 조선초기에는 '원천강'이 대표적인 관상서로서 알려졌던 모양이다. '범위수'는 택일에 사용하는 책 이름이다. 명과학 응시자들은 시험관 앞에서 이러한 책들을 모두 암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실전문제에 응답해야 했다.

국가 공무원으로 뽑힌 명과학 교수들은 일반서민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지방출장을 다닌 것도 아니다. 오로지 궁궐 내부에서만 활동하였다. '로열 패밀리' 전용 술사였던 것이다. 이들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공주나 왕자의 혼사 때 상대방과의 궁합을 보는 등 왕실의 혼사가 주 업무였지 않나 싶다. 예나 지금이나 혼사에는 사주.관상이 중요한 예측수단으로 활용된다. 과연 두 사람이 만나 백년해로할 수 있을 것인가. 정확한 답은 살을 맞대고 살아 보아야 나온다. 하지만 살아보기 전에 미리 알자는 것이 사주.관상의 목적 아니겠는가. '지인지감'(知人之鑑 : 사람을 판단하는 감식력)에 있어서는 사주.관상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별로 없다.

명과학 교수들은 왕실 내부의 인적사항을 소상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왕자들과 공주들의 생년.월.일.시에 대한 정보를 모두 꿰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궐에서 출산이 있는 날에는 산실 밖에 이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사주팔자를 장부에 적어 놓았다. 그 외에 신랑 신부 합궁하는 날짜, 건물을 신축할 때 길일을 잡는 일, 임금의 명에 따라서 대신들 개개인의 사주팔자를 보고하는 일도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많은 자식을 낳았다. 법적으로는 장남에게 왕권승계의 우선 순위가 있지만, 실제로 장남이 승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변수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과학 교수는 왕자들의 사주팔자를 모두 알고 있으므로 대권의 향방에 관한 '일급 정보'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갑이라는 왕자가 군왕이 될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명과학 교수의 의견이 여론의 향배에 중요한 비중으로 작용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권력투쟁에 말려들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명과학 교수가 특정 대군의 사주를 조작해 유포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반대파가 그 교수를 제거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궁궐 내에 근무하는 의원과 명과학 교수는 왕권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전(?)에 개입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역대 왕 가운데 의문사한 경우가 11건이라는 통계도 있다.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궁궐의 의원은 반대파의 음식에 독약을 타고, 명과학 교수는 종종 사주를 조작했던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궁궐 내에서 근무하던 어의(御醫)는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가 개업을 할 수 있었지만, 명과학 교수는 정년퇴직하더라도 개업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만약 전.현직 대감들이 궁궐 밖에서 명과학 교수와 자주 접촉하면 역모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조선시대 명과학 교수는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쟁이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한복판에 있었다. 정치가와 역술가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던 것이다.

[江湖동양학]

MBA 출신 vs 계룡산 출신?

 

 

점(占)은 왜 존재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미래욕'(未來慾)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이 세상에 자기 앞일을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식욕.색욕.수면욕이 인간의 3대 욕구라고 한다면, 미래욕은 그 다음의 4대 욕구에 포함될 정도로 강력한 욕망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게 마련이다. 미래욕을 충족시켜주는 점쟁이는 깊은 뿌리를 가진 직업 중 하나다. BC 3천년께부터 있었다는 직업이 점쟁이다. 아직 구조조정도 없고 명예퇴직도 없는 직업이다. 실력만 있으면 흰머리가 늘수록 비례해서 복채(?)가 증가하는 직업이다.

미래의 상황을 예언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주식시세 예측하는 기술 하나 가지고 밥먹고 사는 애널리스트나 펀드 매니저도 모두 '점쟁이 과(科)'에 속한다. 21세기의 가장 세련된 점쟁이가 이들이다. 단지 포장지만 다르다. 미국에 가서 MBA라는 과정을 밟으면 '애널리스트'가 되고, 계룡산 토굴에서 정진하면 점쟁이 딱지가 붙는다. 중요한 것은 포장지가 아니라 내공이다. 내공은 예측의 정확도에서 나온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과거 선배들의 역사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점쟁이들이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5천년 가까이 축적해온 노하우는 다음의 세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이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따라서 원인을 알면 미래에 닥칠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chaos) 원리가 좋은 예다. 베이징(北京) 상공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한 여파가 캘리포니아 상공의 비구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카오스 원리다. 예리한 술사는 나비의 날갯짓을 주목한 다음, 며칠 후의 비구름을 예측한다. 모르면 카오스로 보이지만 인과를 알면 코스모스로 받아들인다. 추사 김정희가 7~8세 때 대문 밖에다 써놓은 '입춘대길'을 보고 지나가던 영의정 채재공이 집에 들어와 "저 애는 글씨로 대성하겠다"고 예언한 것도 미세한 인(因)을 보고 미래의 과(果)를 예측한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아버지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 밖에 나와서 구두를 닦다가, 구두닦이에게서 "나도 주식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케네디 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쪽 구두도 덜 닦은 채 부랴부랴 사무실 빌딩으로 올라갔다. 회사가 가지고 있는 전 주식을 팔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후에 미국의 주식은 대폭락했지만, 케네디 아버지 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구두닦이까지 주식을 샀다는 말을 듣고 주식 폭락의 징조를 신속하게 감지했던 것이다.

뛰어난 점술가는 사건 초기 단계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을 아주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소주에 삼겹살 많이 먹으면 감각이 마모된다.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정신이 집중되면 꿈이 정확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선견몽(先見夢)을 꾸게 된다. 성공한 사업가 부인들 가운데는 영몽(靈夢)을 꾸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부인의 내조 가운데 몽조(夢助.꿈으로서 도와줌)도 무시할 수 없다.

둘째는 반복의 법칙이다. 규칙적인 반복현상은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밤과 낮, 사시사철의 순환이 바로 그것이다. 유사 이래로 밤에서 낮으로, 낮에서 밤으로의 반복이 한번이라도 고장난 적은 없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도 마찬가지다.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갑자기 동남풍을 불러일으킨 사건도 그렇다. 공명은 재야에서 공부하면서 1년 3백65일의 일기변화를 관찰한 데이터를 수십년 동안 축적했고, 이 데이터에 의해 매년 그때쯤이면 바람이 방향을 바꿔 동남쪽에서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공명의 '기도발'로 동남풍이 분 것이지만, 축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반복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음양오행은 이러한 반복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사주명리학의 이론적 체계는 음양오행이고, 음양오행은 자연현상의 반복에서 도출된 개념이다.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기질과 길흉화복에까지 연결시킨 것이 사주다. 예를 들어보자. 봄은 목(木)에 해당하고, 목은 인정 많고 적극적인 기질이 있다고 해석한다. 여름은 불(火)이고, 불은 예의가 바르고 판단이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가을은 금(金)이고, 금은 의리가 있고 결단력이 있다. 겨울은 물(水)이고, 물은 꾀가 많고 융통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음양오행을 좀더 확대 적용한 것이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다. 십간은 왜 10인가?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태양계 내의 별이 10개이기 때문이다. 십이지는 일년이 열두달이기 때문이다. 행성 10개의 움직임과 열두달의 변화는 규칙적이다. 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도표화한 것이 10간 12지이고 60갑자라고 생각한다. 이 60갑자의 규칙적인 순환에 의해 매일 매일의 날짜를 기록해 놓은 것이 만세력이다. 서양 점성술에서는 출생 당시의 각 별자리 위치, 즉 천궁도( Horoscope)를 일일이 작성해야 하지만, 사주는 그 천궁도가 60갑자로 간편하게 도표화돼 있기 때문에 만세력만 보면 된다. 종합하자면 사주는 반복의 원리를 이용한 점술이다.

셋째는 귀신의 존재다. 귀신이 앞일을 알려준다. 문제는 귀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다. '업계'에서는 존재한다고 본다. '주역'의 '계사전'을 보면 '귀신합기길흉'(鬼神合其吉凶)이라고 해서 길흉을 알려면 귀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돼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귀신을 전제하고 있다.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접신(接神)과 빙의(憑依)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접신된 무당이 그 사람의 전화 음성만 듣고도 앞일을 예언하는 것은 귀신이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귀신도 등급이 있다. 등급이 낮은 무식한 귀신이 접신되면 잘 맞지 않는다. '귀신같이 거짓말한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실력 없는 귀신은 곧잘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다. 인과.반복.귀신 이 세가지가 점의 원리다. 점쟁이는 이 세가지를 모두 사용하고, 애널리스트는 첫째.둘째 것만 사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지리산大學 낭인科를 졸업하다


중국에는 '삼국지'가 있다. 일본에는 '대망'이 있다. 조선에는 뭐가 있는가? 중국은 땅 덩어리가 넓어서 '삼국지' 같은 대하로망의 탄생이 가능했고, 일본은 외세의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끝까지 치고받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대망'아니겠는가. 조선은 땅이 좁아서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없고, 뭐 좀 할 만하면 그때마다 외세가 끼어드는 통에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이야기가 되어간다 싶으면 중간에 주인공이 죽어 버렸던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장정'처럼 주인공이 여기 저기 도망다니면서 오래 살아야만 장편 대하소설이 가능한 법이다. 한국에서는 교도소를 탈옥해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면 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10권)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의 역사와 인물과 정조가 그려져 있다. '임꺽정'이라는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박경리의 '토지'도 나올 수 있었고,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가능했다고 본다. 관찰해 보니까 장편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타고난 아이큐와 감성에다 좌절이 곁들여져야 한다. 반드시 인생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떠돌이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홍명희만 하더라도 충청도 괴산의 명문 사대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잘 나가는 인생을 살았지만, 한일병합이 되면서 군수였던 아버지가 자결하자, 충격을 받고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중국을 거쳐 싱가포르.미얀마.말레이시아 일대에서 7년 동안이나 방랑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경험이 불후의 명작인 '임꺽정'을 낳았다. 자고로 소설가와 예술가는 낭인생활이 필수적이다.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작품은 없다.

제산(박도사)도 마찬가지다.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은 신동이었지만, 6.25때 피란가면서 다리를 다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자기보다 공부 못한 친구들은 모두 대학을 갔는데, 본인만 산골인 함양에 낙오되었던 것이다. 낙오된 자의 슬픔을 이기기 위하여 그는 지리산 일대를 떠돌았다. 돈 한푼 없이 춥고 배고픈 상태로 떠돌았다. 지리산 둘레는 대략 6백리다. 한국의 실크로드가 지리산 로드다. 그 골짜기마다에는 천년이 넘게 축적된 유.불.선의 향기가 어려 있다. 수많은 고승과 선비, 도사들의 향취가 배어 있는 것이다. 봐주는 사람이 없는 들풀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머리 좋은 수재가 인생에 낙오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 절망감을 보상해 주었던 것은 지리산의 영봉(靈峰)과 구름 그리고 소나무였다. 현재에도 지리산 일대에는 대략 3천명의 낭인과(浪人科)가 운집해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직업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만 산이 좋아서 지리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지리산에는 인삼만 빼고 없는 약초가 없다고 한다. 봄이 오면 취나물도 뜯고 고사리도 뜯고 더덕도 뜯고 당귀도 캐고 황정(黃精)도 캔다. 재수 좋으면 산삼도 발견한다. 허름한 토굴을 짓고 사니까 생활비도 별로 들지 않는다. 필자가 올 봄에 화개(花開) 골짜기 쪽에 찻잎을 따러 갔다가 지리산의 전형적인 낭인과 한명을 만났다. 40대 중반인데 독신이다. 20대 중반부터 설악산.오대산.태백산 등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다가 지리산에 정착한 지 6년째라고 한다. 의외로 얼굴빛이 밝고 소박한 표정이었다.

"이 생활이 좋은가?" "좋다. 무엇보다 신간이 편하다" "무엇을 먹고 사는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등산객들이 자주 오가는 고개마루로 나가서 앉아 있으면 먹을 것은 해결된다. 등산객들이 산을 올라올 때는 준비해온 식량을 주지 않지만, 하산할 때는 짐이 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주고 간다. 제일 어려운 시기는 지금 같은 봄철이다. 산불예방 때문에 등산객이 별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는 화개의 차 만드는 일을 도와주면서 두어달 아르바이트를 한다. 먹는 문제는 해결된다."

지리산은 이런 산이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직장의 월급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제산이 도사 수업을 받은 곳은 바로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에 이름 없이 살던 수많은 도인들과 접촉하면서 점차로 현상세계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던 것 같다. 춥고 배고프던 20대 지리산 시절에 자주 만나던 친구가 실상사 가까운 인월(引月)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던 노개식(盧价植.65)씨였다. 한학에 밝아서 둘이 만나면 도학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黃)씨일 거야.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산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노개식은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 10시쯤 되어서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까, '하수(河洙)'라고 하지 않는가. 속으로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까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에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다 보고를 해 준다'는 뜻이다. 산기도를 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이 되는 수가 있다. 접신이 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다 대고 정보를 알려준다. '지금 저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필보(筆報)도 있다. 붓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글씨가 써지는 경우다. 귀신이 알려주는 메시지가 붓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 라고 추궁을 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서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내가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분석의 근거는 이랬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 마르면 먹으려고 흰 사기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나무 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에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듣고 보니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쯤 어느날 제산이 남원 인월에 있는 친구의 한약방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이다. 이처럼 신비의 종착점에는 합리가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朴도사, '구령呪' 암송하며 신통력 키워...朴도사의 내공 증진법

 

논리와 신비. 이 두 가지는 인류 정신사의 영원한 숙제다. 논리가 발달된 사람을 보면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이 퇴화되게 마련이고, 반대로 영감이 발달된 사람은 논리가 약하다. 월급쟁이는 논리만 가져도 충분하다. 그러나 최고경영자(CEO)를 하려면 논리에다 영감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논리를 단련하는 방법은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감을 개발하는 방법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영감이란 다차원의 복잡성을 일차원의 단순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명리학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사주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보는 단계는 논리를 학습하는 과정이다. 일단은 열심히 책을 파야 한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하는 4차원 게임은 책을 열심히 본다고 해서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직관과 영감을 길러야만 가능하다.

사주에 관한 책들은 오직 평균개념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평균은 가운데만 알 수 있고, 아래와 위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마치 주식시세의 변화를 나타내는 그래프와 같다. 일종의 통계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프와 통계를 통해 대강의 변화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시점에 닥쳐서 반드시 예전 그래프대로 움직이라는 법은 없다. 디테일을 알기 위해서는 그래프 외에 플러스 알파, 즉 영감이 있어야 한다.

도사들이 영감을 개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중의 하나가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것이었다. 소리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도 파워를 지닌다. 반복해서 어떤 소리를 내면 효과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만번 수십만번 그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주면,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소리는 또한 인체의 오장육부하고 관련 있기 때문에 특정 소리를 계속해서 발성하면 그 해당 장기가 강화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종교적인 용도의 주문은 좀더 복잡해진다. 종교적 주문은 그 소리와 감응하는 신들의 세계가 있고, 이 신들의 세계에서 그 사람에게 힘을 준다. 마치 인터넷에서 클릭을 반복해서 들어가다 보면 특정의 사이트와 접속되는 이치와 같다. 제대로 접속이 되면 그 사이트에 저장돼 있는 정보를 무한정 이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죽통병'이 그것이다. 주문수행은 '죽거나, 통하거나, 병들거나'중의 하나로 귀결된다. 담력이 약한 사람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정신착란에 빠져 버릴 수 있다.

제산이 암송한 주문은 '구령삼정주(九靈三鼎呪)'였다. 그는 명리학 책을 통해 신통력을 완성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이 '구령삼정주'를 암송해서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결론이다. 구령주는 도교의 '옥추경(玉樞經)'이라는 경전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주문이다. 조선 후기에 민간도교에서 '칠성경(七星經)'과 함께 '옥추경'은 재야의 방술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경전이었다.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효험이 즉발하였기 때문이다. '칠성경'이 북두칠성을 받드는 신앙을 담고 있다면, '옥추경'은 우레의 신을 받드는 경전이었다. 전자가 주로 명이 짧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용도로 숭배되었다면, 후자는 우레의 신을 이용하여 잡귀를 쫓는 양재초복(禳災招福)의 용도였다. '옥추경'을 추적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추사 김정희도 이 경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도사들이 애용하였던 '옥추경'판본에는 추사의 글씨가 들어가 있다. 그 서문을 추사가 써 놓은 판본이 있다. 추사에 대한 연구 논문을 보아도 이 서문에 대한 분석은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다. 아름답고 품격있는 추사체로 서문이 장식된 '옥추경'은 불교의 '천수경(千手經)'과 함께 조선후기에 가장 애송되던 주문이었다.

추사가 '옥추경'을 좋아했던 배경에는 종교적인 효험도 한편으로 작용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경에 나오는 문장이 좋아서 그랬다고 본다. 즉 이 경의 운율이 아주 기막히게 맞는다는 것이다. 운율은 리듬이다. 같은 문장이라도 운율이 맞아야 암송하는 재미가 있고, 운율이 맞다 보면 노래처럼 흥겹게 암송할 수 있다. 지금이야 운율이 퇴색해 버렸지만 조선 후기의 한문 식자층들에게는 한문 고유의 운율을 중시했던 것 같다. '옥추경'의 운율은 추사뿐만이 아니고, 조선 후기에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1826~1898)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역'의 주장은 선천과 후천의 교체다. 선천시대가 양적인 에너지가 주도하는 세상이었다고 한다면, 후천시대는 감성적인 성격을 지닌 음적인 에너지가 주목받는다고 보았다.

여자들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본 것이다. 김항은 그 변화를 '금화송(金火頌)'이라는 노래로 표현하였다. 김일부가 남긴 5개의 금화송 가운데에서도 첫째인 '금화일송(金火一頌)'의 내용이 바로 '옥추경'의 운율을 따서 지은 내용이라고 한다. 금화송을 운에 맞춘 이유는 운이 맞아야 거기에서 영적인 힘이 나온다고 본 까닭이다.

이 지적은 평생 동안 계룡산파의 멤버로서 정역을 연구해온 권영원(權寧遠.1928~)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구령주 역시 운율에 맞추어 암송하는 주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제산의 구령주를 추적하면 백운산 영암사 시절부터 지도를 받았던 윤일봉 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윤일봉은 충청도 아산 사람으로서 계룡산파와 관련이 깊었던 인물이었다. 김일부와도 모종의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지리산파였던 제산은 구령주를 연결고리로 해서 계룡산파의 김일부와 끈이 이어졌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도사가 보여주었던 가공할 만한 파워의 진원지는 구령주라고 하는 주문이었다.

박도사는 구령주의 파워를 너무 많이 발휘한 감이 있다. 세간에 너무 노출됨으로 해서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였다. 명성이 알려진 도사는 익명의 다중을 상대하여야만 한다. 익명의 다중, 그 가운데는 온갖 사람과 사건이 잠복되어 있다. 도사는 그 잠복된 지뢰를 미리 알고 피해 나가야만 하는 고난도의 직업이다. 10개의 지뢰 중에서 9개는 피하더라도 마지막 한개를 피하지 못하고 그물에 걸려들면 그야말로 처참한 망신을 당한다. '그러고도 네가 도사냐?'하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 비결은 은둔이다. 숨어 있어야 한다.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악어가죽을 거처에다 걸어두고 보았다고 한다. 왜 악어냐?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악어의 두껍고 질긴 가죽처럼 욕심이 많다는 사실을 통찰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악어처럼 물속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악어는 평상시 물속에 숨어 있는 동물이다. 오로지 두 눈만 내놓고 몸은 물속에 숨어 있으므로 밖에서 볼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악어는 밖을 잘 관찰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상대방은 물속에 숨어 있는 악어를 관찰할 수 없다. 나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나의 움직임을 볼 수 없도록 하는 처신은 천기(天機)를 다루어야 하는 도사의 필수적인 덕목이 될 수 있다. 만약 악어가 물 밖으로 나가서 바위 위에 올라가 햇볕을 쪼일 때는 대단히 위험하다. 노출되어 있으므로 사냥꾼의 집중사격을 받을 수 있다.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 해도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가면 집중사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총을 쏘면 어떻게 하겠는가. 맞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비상구가 봉쇄된 무대에 올라간 도사에겐 불행만이 기다린다. 그러므로 도사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삼십육계 놓을 자리를 미리 확보해둔 뒤에 올라가야 한다. 36번째 마지막 계책은 역시 튀는 일이다. 이 세상은 어찌 되었든 튀어야 한다.

진(晉)나라 때 저명한 풍수이자 도사였던 곽박도 도망을 가지 못해서 결국 권력자에게 희생을 당했다. 당대(唐代)의 도사 양구빈과, 송대(宋代)의 도사 오경만은 머리를 깎고 절로 숨어 버린다. 애석하게도 박도사는 튀지를 못하였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통에 마음 편하게 쉬지 못하였다. 결국 66세의 나이로 2000년에 사망하였다. 도사치고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나는 박도사의 일생을 보면서 공성신퇴(功成身退.공을 이루면 몸을 숨긴다)의 철리를 되씹어 본다.

 

주역을 실천한 가문들

수백년 名家의 비결은 善 그리고 謙

 

한자문화권에서 최장의 스테디셀러는 삼국지가 아니라 주역이었다. 인간과 우주, 대우주와 소우주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 가를 설명한 주역은 어림잡아 2천년 이상 끊이지 않고 팔린 책이다.

그렇다면 주역의 핵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 수준에서 이해한 주역의 핵심은 두가지다. 하나는 음중양(陰中陽), 양중음(陽中陰)의 이치다. 다른 하나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다. '불행 가운데 행복이 있고, 행복 가운데 불행이 있다'는 말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는 뜻이다. 전자가 주역의 철학적인 측면이라면, 후자는 도덕적인 측면에 해당한다.

주역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주역이 한국의 명문가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15년 동안 한국의 명문 집안들을 조사한 바 있다. 그런 집안의 후손들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4백~5백년 동안 명문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였다. 공통적인 답변은 '적선지가 필유여경'이었다. 명문가의 유지비결은 바로 주역의 원리에 있었던 것이다.

충남 논산에 가면 광산 김씨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 ~ 1631) 종택이 있다. 우암 송시열 집안, 명재 윤증 집안과 함께 충청도 3대 명문으로 꼽히는 집안이다. 사계 집안의 적선에 관한 이야기다. 집안의 제삿날이었다. 제삿날에 사용하기 위해 백정 집에 가서 돼지고기를 샀다고 한다. 그 돼지고기를 부엌에다 걸어 놓았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던 개가 부엌에 들어가 그 돼지고기를 덥석 뜯어먹고는 얼마 있다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 끝에 죽어버렸다. 돼지고기가 상한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사계의 아버지는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고깃집에 다시 찾아가 나머지 돼지고기를 모두 사오도록 조치하였다. 2 ~ 3마리 분량의 돼지고기를 다시 구입해 모조리 땅에 묻어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묻었다고 한다. 만약 그 상한 고기를 동네 사람들이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니까 땅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보통의 인품 같았으면 상한 돼지고기를 팔았던 백정을 잡아다가 사정없이 볼기나 때렸을 것이다. 이러한 가풍에서 사계가 태어나 성장하였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양진당(養眞堂)과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양진당은 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1539 ~ 1601)이 살았던 집이고, 충효당은 겸암의 동생인 서애 류성룡이 살았던 집이다. 겸암은 도학자로, 평생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편에서 묵묵히 동생인 서애를 도왔다. 겸암은 29세 때 하회마을 건너편의 산자락에 정자를 하나 짓고 이를 겸암정(謙菴亭)이라 했다. 이유는 스승인 퇴계가 겸암이라는 호를 주었기 때문이다. 겸(謙)은 주역의 64괘 가운데 15번째에 해당되는 괘로서, 위에는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가 있고 아래에는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가 배치되어 있다. 줄여서 '지산겸(地山謙)'이라고 부른다. 지산겸은 산이 땅 위에 있지 않고 땅 밑에 있는 형상으로서 겸손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퇴계가 64괘 가운데 하필 겸괘를 제자에게 준 것은 과격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다스려서 겸손해지라는 의미에서 겸괘를 준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겸암정의 위치부터가 겸양한 자리다.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 건너편에는 '부용대'라고 불리는 바위절벽이 솟아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부용대 위에다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겸암정은 부용대에서 한참 왼쪽으로 내려온 중간 지점의 어슴푸레한 위치에다 자리를 잡았다. 하회마을에서 건너다 보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범상한 지점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정상이 아니고 약간 들어가는 중간 지점을 택해 정자를 지었다는 것은 정자 이름 그대로 겸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징표다.

겸괘에 맞는 적선도 있었다. 1859년 여름에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배를 타고 하회마을로 건너오다가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가 집에 갔다 오던 사람들 수십명이 탄 배가 홍수로 인해 불어난 물살 때문에 전복된 것이다.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가로등이나 손전등이 없던 시절, 마침 강변에는 춘양목(春陽木)들이 쌓여 있었다. 서애의 10대 후손으로서, 당시 경상도사를 지냈던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이 집을 짓기 위해 3년 전부터 애지중지 건조시켜 오던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구명선박 대신으로 강물에 밀어 넣었다. 나머지 목재들에도 불을 붙여 캄캄한 주변을 밝혔다. 그렇게 해서 많은 목숨을 구했다. 류도성은 이후 다시 홍송을 구해 3년 동안 말린 후에야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 집이 바로 하회에서 가장 품격있는 저택으로 알려진 북촌댁(北村宅)이다. 한국의 명문가들은 이처럼 적선을 실천한 집안들이다. 그리고 그 적선이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약한 주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솥바위 부근서 國富 3명 난다"..솥단지와 '밥'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 경계에는 남강이 흐르고, 그 남강의 중간에는 흡사 솥단지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솥바위'(鼎巖)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물속에 반쯤 가라앉아 있는 형국인데,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물속에 솥단지의 다리처럼 세 발이 달려 있다고 한다. 솥도 구분이 있다. 다리가 없는 솥은 부(釜)라 하고 다리가 있는 솥은 정(鼎)인데, 솥바위는 다리가 있기 때문에 정(鼎)에 해당한다.

솥바위는 10여명 정도가 앉아 놀 만한 공간으로 때로는 사람들이 올라가 낚시를 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이곳을 '정암진'(鼎巖津)이라고 불렀다. 남강을 건너던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령군 쪽에서 뻗어온 암맥(岩脈)이 힘차게 뻗어가면서 남강 가운데까지 돌출돼 나갔으므로 나룻배를 대기 좋은 지점이었다.

지맥이 힘차게 내려와 강물 쪽으로 뻗어나간 지점은 풍수적으로 보아도 명당이다. 용과 호랑이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러한 포인트는 바위에서 나오는 화기(火氣)와, 물에서 나오는 수기(水氣)가 교접하면서 묘용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바위의 화기는 호랑이와 인물로 보고, 물에서 나오는 수기는 용과 재물로 보기도 한다.

솥바위가 있는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던 전적지이기도 하다. 1592년 5월 하순께 왜군들은 함안 쪽에서 의령 쪽으로 넘어오기 위해 정암진 도하 작전을 전개했다. 일종의 상륙작전이었다.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곽재우 장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건너오던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정암진은 군사적인 요충지라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이곳이 뚫렸다면 왜적은 호남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암진 승전은 임진왜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솥바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곳에서 부자가 배출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어느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놀면서 "앞으로 이 근방에서 나라를 크게 울리는 국부(國富) 세 명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솥바위 인근에서 삼성(三星)의 호암(湖巖) 이병철, 금성(金星: 현재는 LG로 바뀜)의 연암(漣巖) 구인회, 효성(曉星)의 만우(晩愚) 조홍제가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세 그룹의 창업자들이 솥바위로부터 반경 20리 이내에서 탄생했다. 의령군 정곡면 증교리에서 이병철이 태어났고,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에서 구인회가, 함안군 군북면 신창마을에서 조홍제가 태어났다. 이 세명의 생가는 솥바위에서 따져보면 남과 북, 그리고 동남방에 자리잡은 셈이다. 세 사람 모두 솥바위에서 직선거리로 20리 거리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세 사람이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점이다. 진양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지수 초등학교 동창들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2002년 초에 지수 초등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어떤 터에 학교가 자리잡았기에 큰 부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는가도 관심사였다. 지수 초등학교의 위치는 구인회씨 집에서 가까웠고, 구씨들이 사는 동네 바로 옆에는 허씨들이 살고 있었다. 허씨라고 하면 삼양통상의 허정구(許鼎九)도 포함된다. 알고 보면 구씨들과 협력하여 LG를 공동 창업하였던 허정구씨도 지수 초등학교 출신이다.

솥바위를 둘러싼 경남의 의령군.함안군.진양군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솥바위 전설을 듣고 자랐다. 의령 출신으로 정암진 일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임조(우주산업 대표)씨는 강변으로 소에게 풀을 뜯어 먹이려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저기 강물 속에 있는 바구(바위) 이름이 뭔지 아나?" "솥바구라 카데예" "하모, 솥바구다. 밥도 해묵고 국도 끓여 묵고 하는 솥이다." "솥 맨치로 생기지도 않았는데예?" "아이다. 물 우(위)에 비(뵈)는 저건 소 디빙이(소뎅) 뿐이다. 물 속으로 자멱질해 들어가 보믄 억시기 큰 솥 몸도 있고, 또 억시기 큰 솥 다리 세 개가 강바닥에 박혀 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많이 흐르면 솥이 넘어지겠네예." "아이다. 무지무지하게 지프게(깊게) 박혀서 끄떡없다. 수 천년 수 만년 동안 솥바구는 저기 저렇게 있었는 걸." "저기 물 짚어예?" "하모 짚으고 말고. 명주실 한 구리를 풀어내려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지프단다." "오메! 그라믄 예, 저건 누구네 솥이라예?" "글쎄나… 아마도 용왕님의 솥인 것 같아…" "용왕님? 토깡이(토끼)가 거북이 타고 가서 만났다는 그 용왕님?" "하모." "그런께네, 저 솥바구 다리는 용궁의 정지(부엌) 부뚜막에 걸려 있을끼구만…" "!!!…" 하씨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용왕님이 밥도 해 잡수시고 국도 끓여 자시는 용궁의 솥이 여기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때부터 솥바위를 우러러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지나갈 때마다 솥바위에 인사를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 한글을 매우면서 이름 석자 다음으로 쓴 글씨가 '솥바위'였을 정도였다('배곡'의령군 향우회). 솥바위는 이처럼 전설적인 바위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솥'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밥'과 관련 있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한국 사람은 밥을 먹고 산다. 그 밥을 짓는 기구가 솥이다. 말하자면 한민족의 밥줄이자 생명줄이 솥단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솥은 한국 불교의 미륵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한국 미륵신앙의 발원지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다. 금산사에는 10m 크기의 미륵불을 모셔 놓은 미륵전이 있다. 그런데 이 미륵불의 발바닥 밑에는 쇠로 만든 솥이 놓여 있다. 불교적 표현으로는 '수미좌'이지만, 보통 이 근방 사람들은 '쇠솥'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금지돼 있지만, 30년 전만 하더라도 금산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참배가 끝나면 이 미륵불 발 밑의 '쇠솥'을 손으로 한번씩 만져보는 습관이 있었다. 나도0 어렸을 때 어른들을 따라 이 쇠솥을 두 손으로 만져보던 기억이 난다. 미륵전의 솥을 손으로 만지면 복이 온다는 소박한 믿음이었다. 불교 신앙이 없더라도 금산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미륵전의 솥단지를 꼭 만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 민족의 깊은 무의식에서 솥단지는 밥을 담는 그릇이자, 생명의 그릇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 역사에서 미륵신앙은 역사적 전환기에 유행했다. 미륵이 나타나 고통받고 있는 민초들을 구제해준다고 믿었다. 그 고통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배고픔이다. 쌀밥에 쇠고기 국이 한국 사람들의 행복이었다. 미륵은 한국적 메시아였다. 미륵신앙의 발원지인 금산사 미륵불의 발 밑에 솥단지가 있다는 사실은 그 상징하는 의미가 심장하다. 미륵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금산사 주변의 김제평야는 한국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다. 호남 사람들이 그 많은 쌀을 가을에 추수한 뒤에 일종의 '추수감사제'를 올리던 곳이 금산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쌀이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미륵불 발 밑의 솥단지에서 나왔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구한말 전북에서 발생한 민족종교 지도자들의 호를 보면 솥단지와 관련이 많은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일순(姜一淳:1871~1909)의 호가 시루 증(甑)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다. 시루는 솥단지 위에 얹는 물건이다. 민초들에게 떡을 만들어주겠다는 의미다. 원불교의 2대 지도자인 송규(宋奎:1900~62)의 호는 정산(鼎山)이다.

삼성.금성.효성이라는 작명도 공교롭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모두 별 성(星)자가 들어 있다. 기업의 작명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세 기업이 모두 별 성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령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鼎巖(솥바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솥바위에서 국부가 난다는 전설을 의식한 작명이라는 것이다. 솥단지의 다리가 세 개라는 사실을 유념한 이병철은 석 삼자를 써서 삼성(三星)이라고 짓지 않았나 싶다. 풍수에서 솥바위 자체는 별로 본다. 그런데 그 별은 다리가 세 개였으니까. 그 다음에 구인회는 '황금 별'이라는 의미의 금성이었고, 조홍제는 '새벽 별'이라는 의미로 효성이라고 지었지 않았을까. 물론 추측이긴 하지만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병철의 호인 '호암'도 같은 맥락이다. 구인회의 호는 연암이다. 그런가 하면 허정구(許鼎九)의 이름 석자에도 정(鼎)자가 들어간다. 모두 정암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솥단지와 밥이 내포되어 있다.

주역의 64괘 가운데 화풍정(火風鼎) 괘가 있다. 위에는 불을 상징하는 이(離)괘가 있고, 아래에는 바람을 상징하는 손(巽)괘가 놓여 있는 형태가 화풍정 괘다. 밑에서 바람을 지피면 위에서 불이 활활 타오름을 상징한다. 불이 활활 타면 솥단지에 먹을 것을 놓고 팔팔 끓인다. 이 괘는 매우 상서로운 괘이기도 하다. 약단지에 여러 약재를 놓고 팔팔 끓이면 약물이 되어 나온다. 서로 이질적인 약재들이라 할지라도 솥단지에서 달이면 상극하는 요소가 녹아 버리고 오히려 상생하는 약물로 화학변화를 일으킨다. 화풍정 괘는 바로 그런 상황을 암시하는 상서로운 괘이기도 하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괘이기도 하다. 상극을 상생으로 전환하는 괘이기 때문이다.

남강에 놓여 있는 솥바위를 보면서 부자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부자를 보면 정경유착의 산물이라고 하겠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솥바위의 지령(地靈)을 받은 것이다. 지령을 받아서 어쨌다는 것인가. 민족의 밥을 짓는 솥단지가 됐으면 좋겠다. 옛날에는 그 솥단지가 미륵의 발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대기업의 발 밑에 있다. 2004년 새해는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을 솥단지에 넣고 팔팔 끓여 민족의 보약, 우리 민족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밥을 짓는 한해가 됐으면 한다.

 

 

 

한국 사람들은 명절이 닥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행렬이 너무 길어서 고속도로.국도.지방도가 모두 막히는 일대 진풍경이 벌어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왜 명절 때만 되면 한국 사람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귀성행렬'이라고 할 때 '귀성(歸省)'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돌아가서 부모를 뵙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부모의 개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살아 있는 육신을 가진 부모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조상이다. 죽은 조상을 뵙는 세리머니가 바로 제사다. 살아 있는 부모님이야 언제든지 뵐 수 있지만, 죽은 조상은 돌아가신 제삿날 아니면 명절 때 제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귀성행렬의 속 깊은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조상에 대한 제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제사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이유는 '죽음의 극복'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삶, 영생을 꿈꿨다. 단지 문명권에 따라 그 영생의 방법이 각기 다를 뿐이다. 이집트 문명이 추구한 영생 방법은 부활이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미라로 보존해 놓은 이유도 사자(死者)가 언젠가는 다시 이 세상에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발생한 기독교 문명권의 영생은 '내세'다.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인도 문명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윤회였다. 죽은 후에 다른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인도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비관하지 않고 인생을 낙천적으로 바라보는 배경에는 다시 태어난다고 확신하는 윤회의 사생관이 작용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가. 동이족의 사생관은 자식을 통한 해결이었다. 대를 이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고 보았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죽은 조상이 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4대 문명권의 사생관은 거시적인 틀로 보면 모두 같은 맥락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각각 차이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인도의 윤회는 다시 태어난다고 보는 측면에서는 동이족과 비슷하지만, 윤회가 다른 집안에서도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설정하는 데 반해 동이족은 그 집안내의 후손으로 다시 온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동이족의 영험한 샤만들에 의하면 통상 증조부나 고조부의 항렬에 있는 조상신들이 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왕대 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는 항간의 속담은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람들의 사생관은 조상과 후손 간에 밀접한 연결고리를 상정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조상과 후손 간의 연결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다고 보았을 때, 그 연결고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의례가 바로 제사다. 옛날 어른들은 제사 일주일 전부터 음식을 정갈하게 먹고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제사를 준비했다. 심신을 정화하여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꿈에 조상이 현몽하기 때문이다. 제사 전후 조상이 꿈에 나타나지 않으면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것이라고 반성했을 정도다. 그러니까 제사라는 조상과 후손의 공식적인 미팅을 통해 조상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확인을 했던 것이다.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적인 사생관은 기독교의 내세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이 충돌의 근본적인 성격은 사생관의 충돌이다. 사생관의 충돌은 곧 문명의 충돌과 직결된다.

족보도 제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조상과 후손의 만남을 위한 의례가 제사라면, 족보는 그 만남을 확인시켜 주는 기록이다. 중요한 만남에는 반드시 기록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래야 후대로 전승될 것 아닌가. 족보의 볼륨이 두꺼울수록 그 집안의 영생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비약한다면 족보는 죽음 극복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처럼 족보가 발달된 나라도 세계에서 드물다. 족보를 제작하는 데에 물심양면으로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이유도 사생관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풍수도 이 같은 한국인 특유의 사생관에서 바라보아야 납득이 된다. 명당에 조상 묘를 쓰면 발복(發福)한다고 믿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는데, 혼은 '혼불'의 형태로 죽기 며칠 전에 하늘로 날아간다. 지금은 시골에도 전기가 들어와서 보이지 않지만,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혼불 나가는 모습이 동네 사람들에 의해 가끔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남자 혼불은 올챙이처럼 꼬리가 있고, 여자 혼불은 꼬리가 없이 조금 작은 모습이라고 한다. 혼불이 높게 날아서 올라가면 다음에 인도 환생할 때 좋은 곳으로 태어나고, 지상으로 붙어서 발발 떨리면서 날아가면 후생길이 좋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백(魄)은 어떻게 되는가. 죽은 사람의 뼈에 남는다고 생각하였다. 명당에다가 묘를 써서 매장을 하면 평균 10일 이내에 직계 후손들 꿈에 특별한 꿈을 꾸게 된다. 망자가 깔끔한 옷을 입고 나타나거나 또는 좋은 집에 앉아 있는 모습이거나, 아니면 평소의 꿈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꿈을 후손들이 꾸는 경우가 많다. 누런 들판이 보이거나 곰이 나타나거나 하는 꿈도 꾼다. 사례를 수집해 보면 남자보다는 여자들 꿈에 나타난다. 여자들이 남자에 비해 술.담배를 적게 하니까, 화면이 깨끗하니까 잘 나타나지 않나 싶다. 아무리 그 자리가 명당이라고 하더라도 시신을 매장한 뒤에 꿈이 없으면 명당이라고 볼 수 없다. 반대로 나쁜 자리에 묘지를 쓰면 역시 불길한 꿈이 나타난다. '망자가 나타나 나 춥다. 옮겨 달라'하는 내용의 꿈이 올 수 있다. 아무 꿈도 없으면 그 자리는 꽝이다. 해도 없고 득도 없는 자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시신의 뼈다. 수십만년 전에 살았던 공룡의 뼈가 아직도 분해되지 않고 남아 있듯이, 사람의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 뼈대다. 단단한 부분에는 정신이 깃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뼈에는 백이 깃들어 있다고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 뼈는 012 삐삐와 같은 통신매체 역할을 한다. 뼈를 통해 조상과 후손이 연락을 주고받는다. '나 잘 있다 오버, 너 잘 있느냐?' 하는 식이다. 그 조상과 후손의 연락이 꿈이라고 하는 일종의 스크린에 나타난다고 보면 된다. 뼈를 통해 조상과 후손이 접선하는 것이다. 이 통신행위는 죽음의 극복을 상징하고 있다. 명당에 묘를 쓰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죽음의 극복에 목적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후손의 발복이다. 묘를 잘 써서 후손이 잘된다고 여기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라는 말이다. 문제는 명당이 아닌 곳에 묘를 쓰는 경우다. 물이 질퍽질퍽 나는 곳에 묘를 쓰면 계속해 골치 아픈 전화가 온다. '나 춥다! 옮겨 주어라!'하는 전화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달아 집안에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바에는 012 삐삐를 폭파해 버리는 것이 낫다. 골치 아픈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폭파 방법은 화장이다. 뼈를 불로 태워 재로 만들면 백도 아울러 공중분해되기 때문에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화장을 하면 무해무득(無害無得)이다. 해도 없고 득도 없다. 현실적으로 명당에 묘를 쓰기보다는 명당 아닌 곳에 묘를 쓸 확률이 높다. 사방 천지에 명당이 널려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곳은 이미 옛날 사람들이 다 써버렸다. 정확하게 명당이 어디인지를 확실하게 판단하기도 어렵다. 잘못하다가는 사기꾼들 꼬임에 넘어가 돈을 낭비하기 십상이다. '반풍수 집안 망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더군다나 요즘 국토가 좁아서 산 사람 살 땅도 부족한 판이다.

화장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 한국인의 사생관도 서서히 변화할 것이다. 사생관이 변화하면서 족보.귀성행렬.제사.씨족 개념도 아울러 약화될 것 같다. 사생관의 변화는 가치관의 근본이 변화함을 의미한다. 그 변화의 끝이 어디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천부경'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는 무시무종(無始無終: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의 변화일 뿐이다.

 

역술계의 '빅 3'.."丙申日生은 불쑥 만나는 여자를 조심하라"

 

빅 스리(Big 3)가 있었다. 다른 분야는 다 빅 스리가 있는데, 역술계라고 해서 어찌 없겠는가? 자강(自彊) 이석영(李錫暎:1920 ~ 1983),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1903 ~ 1992),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1935 ~ 2000)이 바로 그들이다. 나는 이 세 사람을 근래 한국 명리학의 3대 스타로 생각한다.

자강 이석영은 '사주첩경(四柱捷徑)'(전6권)이라는 명저를 남겼고, 도계 박재완은 무욕담백한 인품을 통해 명리학자의 품격을 끌어올린 인물이었고, 제산 박재현은 좌충우돌과 종횡무진의 삶을 살면서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한편의 드라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같은 명리학을 하면서도 서로 주특기가 달랐고 인생행보도 달랐다. 팔자가 다르므로 행보도 다를 수밖에 없다. 제산의 인생행보는 앞에서 소상하게 다루었으니까 생략하고, 이번에는 자강 이석영과 도계 박재완을 이야기해 보자.

먼저 자강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그는 '사주첩경'이라는 명저를 남기고 갔다. 사람이 죽을 무렵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을 황홀하게 했던 로맨스 건(件)수이고, 다른 하나는 저술한 책이라고 한다. 인생무상을 그나마 위로해 주는 양념인 것이다. 자강은 '사주첩경'이라는 명저를 남기고 감으로써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사주첩경'은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주 공부를 하려면 중국의 원전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중국 원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이뿐 아니라 연습문제도 수백년 전의 명.청대 사례이므로 현장감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런데 '사주첩경'은 이 문제를 모두 극복했다.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한문 원전보다 한결 쉽다. 책에 소개되는 연습문제도 60, 70년대를 전후한 한국 사람들의 팔자를 분석한 것이라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허준의 '동의보감'이 등장함으로써 한국이 중국 의학에서 독립할 수 있었듯이, '사주첩경'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명리학계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지적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독립을 해야 로열티를 물지 않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사주첩경'의 신세를 많이 졌다. '사주를 이렇게 보는 것이구나'를 알게 해 준 책이 또한 '사주첩경'이었다. 다른 사주 원전들은 아무리 읽어 보아도 사주를 해석하는 실전 감각을 익히기가 어려웠다. 핵심 노하우는 빼놓았던 것이다. 하기야 자기의 장사 밑천(?)을 대중에게 쉽게 공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확도는 복채에 비례하는 법이다. 복채도 안 내고 단지 책 한권 구입해 사주 공부를 끝내 버리면 도사는 밥 굶기 십상이다. 이석영은 수십년 동안 읽은 중국 원전과 바닥에서 갈고닦은 실전 노하우를 소화해 자신의 책에다 대부분 공개하였다. 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사주첩경'에서 배운 초식을 한가지 소개하면 이렇다. 태어난 날짜가 육십갑자로 따졌을 때 병신(丙申)에 해당하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이석영의 사례 분석에 의하면 병신일에 태어난 남자들은 확률상 집 바깥의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낳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 그런가. 병(丙)에 대해 신(申)은 재물도 되고, 여자도 된다. 병은 화(火)에 해당하고, 신은 금(金)에 해당한다. 화극금(火克金)의 관계다. 자기가 이겨 먹는 것(극하는 것)은 재물도 되고 여자도 되는 것이다. 사주에서는 재물과 여자를 같은 것으로 본다. 두 가지 모두 자기가 쟁취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재물이 없는 사주는 여자도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신이 문제다. 신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역마살(驛馬煞)에 해당하기도 한다.

재물과 여자가 역마살에 붙어 있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재물을 모으거나 아니면 여자를 만난다고 본다. 기차 타고 가다가 우연히 옆에 앉았던 여자하고 결혼하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병신일의 남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날 수 있다. 외국 여자일 수도 있다. 문제는 신 속에 물(水)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수는 화에 대해 자식으로 작용한다. 수는 화를 이긴다. 사주에서는 자기를 이겨 먹는 대상을 자식으로 본다. 신금(申金) 속에는 임수(壬水)가 숨어 있고, 이 임수가 병에 대해 자식으로 작용한다.

종합하면 외국 출장 나갔다가 우연히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여기서 자식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병신일에 태어난 남자가 그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사주첩경'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병신일에 태어난 남자는 로맨스를 조심해야 한다.

[江湖동양학]

노무현 대통령 사주

타고난 싸움꾼…항복은 없다

 

전북 삼례(參禮)에 가면 '비비정(飛飛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이지만 그 전망 하나는 일품이다. 정자 앞으로는 전주천(全州川)에서 삼천천(三川川)으로, 다시 고산천(高山川)으로 합수(合水)된 물이 느긋하게 곡선을 그리면서 감아돌고, 그 너머로는 호남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입풍운변태중'(思入風雲變態中:생각은 풍운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얻어진다)이라고 그랬던가! 끝없는 들판을 바라보아야 호쾌한 생각이 들어온다. 필자는 비비정에 오를 때마다 붓을 던져버리고 말에 올라타서 저 들판 끝까지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옛 선비들도 그랬나 보다. 비비(飛飛)라는 이름은 삼국지의 장비(張飛)와 남송(南宋)의 명장인 악비(岳飛) 장군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니 말이다. 호남의 선비들은 이 자리에 서서 장비와 악비의 무협(武俠)을 추모했던 것이다.

악비는 병법에 달통했던 명장이자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충신이다. '사주첩경'에 보면 악비의 사주팔자가 나온다. 저자인 이석영 선생은 악비 사주의 특징을 '전이불항(戰而不降)'이라고 했다. '싸움이 붙으면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세가 불리하면 항복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사주는 항복을 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그만큼 사주가 강하다. 흥미로운 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주가 악비와 비슷한 '전이불항' 사주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사주, 그리고 대통령 취임 후 1년간의 행적을 참고한 결과 내린 판단이다.

노 대통령의 생년월일시는 1946년 8월 6일(음) 진시로 알려져 있다. 만세력을 놓고 이를 환산하면 병술(丙戌), 병신(丙申), 무인(戊寅), 병진(丙辰)이 나온다. 먼저 천간에 丙이 3개나 몰려 있다. 丙이 상징하는 것은 여러 가지다.

그중의 하나는 태양이다. 태양은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丙이 3개나 있다는 것은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사람에게 돈 꾸어달라는 부탁이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서는 상사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丙이 많은 사람은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다. 필자는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노 대통령의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를 열람한 적이 있다. 과연 '자존심이 강하고 반항적인 면이 있다'고 씌어 있었다. 더군다나 태양이 3개나 떠 있는 사주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丙은 또한 주작(朱雀)을 상징한다. 주작은 꼬리의 깃털을 부챗살처럼 쫙 펴는 특기가 있다. 부챗살을 쫙 편다는 것은 구변(口辯)이 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변호사나 학교 선생, 방송국 아나운서처럼 말로 먹고사는 사람 사주 가운데 이 주작이 많다. 노 대통령은 주작의 기운을 타고난 사주다. 필자가 그의 형님인 노건평씨에게서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2002년 1월 1일 오전 8시쯤 대문 앞으로 금계(金鷄)가 날아들어왔다고 한다. 금계는 공작 비슷하게 생긴 닭인데, 동물원에 가면 볼 수 있다. 보통 애완용으로 키우기도 한다. 이 금계가 대선이 있었던 2002년 양력 1월 1일에 경남 진영군에 있는 노건평씨의 시골집으로 날아 왔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애완용으로 키우던 금계인가 싶어서 주인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건평씨의 진술이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丙은 화기(火氣)를 상징한다. 불이 많은 사주는 직설적이고 자기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 '성질 급한 사람이 술값 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불이 많은 성격은 술값을 먼저 낸다. 그뿐만 아니라 스파크가 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 발명가가 많다. 회사에서 신제품 개발하는 부서에는 불 많은 사람이 적격이다. 여자는 어떨까. 불이 많은 여자의 경우는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시작한 지 불과 3일 만에 호텔로 직행하는 경우도 목격하였다. 자신의 의사표시가 그만큼 분명하다.

화가 많으면 직감력과 순발력이 대단하다. 불이 많은 여자는 직감력이 대단해서 남자가 바람피우면 속일 수가 없다. 동물적 후각을 지니고 있다. 노 대통령의 사주도 직감력과 순발력이 대단한 사주다. 연설할 때 주어진 원고대로 하지 않고 즉석에서 하고 싶은 말을 삽입하는 이유도 이 같은 사주 때문이라고 본다.

불이 많으면 구설이 많다는 게 문제다. 말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丙이 3개나 있으면 말을 참지 못한다. 과도한 화기를 누르기 위해서는 집무실이나 침실에 어항을 하나 가져다 놓는 것이 좋다.

화기가 많은 사주는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집이나, 또는 북향(北向)집도 맞는다. 일반적으로 북향집은 피하지만, 불이 많은 명조는 서늘한 북쪽을 향해야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진다. CEO가 불이 많으면 주변 참모들은 반대로 물이 많은 '물구덩이' 사주를 배치하는 것도 묘용(妙用)이다.

박통+YS=노통

 

 

노무현 대통령 사주는 병술(丙戌).병신(丙申).무인(戊寅).병진(丙辰)이다. 천간(天干)에 병(丙)이 무려 3개나 있다. 병은 불이라고 보니까 3개의 불이 훨훨 타고 있는 형국이다. 천간이 불이라면 지지(地支)는 어떤지를 보자. 인(寅).신(申)과 진(辰).술(戌)이 포진하고 있다. 인.신과 진.술의 배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배합은 박정희와 김영삼 사주를 혼합해 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주만 놓고 평가한다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개성 있는 사주는 박정희와 김영삼이다. 박정희 사주의 지지에는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모두 있다. 인.신.사.해가 모두 있으면 무사(武士)의 기질이 강한 사주다.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때려치우고 만주군관학교로 자원 입대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타고난 사주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구전에 의하면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박정희가 어떤 역술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역술가가 사주를 보고 나서 '학교 그만두어라. 장군이 될 팔자다'라는 조언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주를 아는 사람이 인.신.사.해를 보면 누구라도 이러한 충고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사 사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당시로서는 괜찮은 직업이었던 교사직을 미련없이 던진 일도 무사적 결단이었고,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 남긴 최후의 멘트도 "난 괜찮아!"였다. '난 괜찮아'. 이 한 마디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무사도(武士道)가 그대로 배어 있다.

IMF 때문에 스타일이 구겨지기는 했지만, YS 사주도 간단한 사주가 아니다. 진.술.축.미(辰.戌.丑.未)가 모두 들어 있다. 사고격(四庫格)이라고 해서 족보에 나오는 팔자다. 진.술.축.미는 모두 토(土)에 해당한다. 토가 많은 사주는 밑바닥 인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토는 흙이라서 밑바닥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중앙을 상징한다. 밑바닥에 뿌리를 두면서도 중앙에서 여론을 수렴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야당총재를 하던 YS는 민심을 파악하는 데 그야말로 '동물적 후각'을 지니고 있었다. YS는 79년 'YH 여공 사건'이 계기가 돼 당시 야당 당수였지만 끝내 의원직을 제명당했다. 다수당인 공화당이 표결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때 YS가 사과만 하면 의원직 제명이라는 사태는 피해갈 수 있었지만 YS는 사과를 끝내 거부했다. '동물적 후각'을 통해 자신에게 민심이 몰려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적 차원까지 진입한 YS의 정치적 후각은 후천적으로 양성된 게 아니라 타고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박정희 사주의 인.신과, 김영삼의 진.술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한 손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사적 기질과 다른 한 손에는 동물적 정치감각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쌍권총을 찬 사주다. 지난해 가을 '재신임'카드를 돌발적으로 꺼낸 일이나 '탄핵 사과 거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노통 사주의 문제는 충(?)이 많다는 점이다. 충이란 부딪친다는 뜻이다. 인과 신은 서로 충의 관계다.

그런가하면 진과 술의 관계 또한 충의 관계다. 인과 신, 그리고 진과 술은 서로 마주보는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사주의 지지가 모두 충이다. 이렇게 되면 지뢰밭 사이를 통과하는 운명이다. 매사가 순조롭게 이뤄지는 일이 드물다. 풍파가 많고 고단한 팔자다. 풍파, 즉 바람을 몰고 다닌다. 고달프고 고생을 많이 하는 팔자 센 명조이기도 하다. 조직에서 최고책임자 운명이 어떠냐에 따라 그 아래 직원들 운명도 좌우된다.

CEO 사주에 돈이 많으면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연히 먹을 것이 많아진다고 보는 것이 명리학의 입장이다. 반대로 CEO 사주에 바람이 많으면 그 회사 구성원들도 바람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노통의 지지에 깔려 있는 인.신과 진.술은 서로 부딪치면서 강렬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노통의 사주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면 재미있는 화면이 하나 나타난다. 위에는 불이 활활 타고 있고, 아래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는 화면이다. 이 장면은 주역 64괘 중의 하나인 '화풍정(火風鼎)'괘에 해당한다. 솥 단지에다 여러 가지 약재를 넣고 불로 달이고 있는 상황이 '화풍정' 괘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 솥단지에 사물탕(四物湯)을 달이고 있는 형국이다. 사물탕은 네가지 약재가 들어간다고 해서 사물탕이다. 1. 가난한 자와 부자의 문제 2. 동과 서의 문제 3. 남과 북의 문제 4. 세대간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네가지 문제가 현재 솥단지에서 펄펄 끓고 있다.

노통 사주를 보면 아래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고, 위에서는 그 바람을 받아 불이 훨훨 타고 있는 중이다. 그 불을 가지고 사물탕을 가열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풍파가 많은 운명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풍파가 솥단지를 불로 달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역의 '화풍정'은 서양의 연금술(alchemy)을 상징하는 괘이기도 하다. 중세 연금술에서 가장 중시했던 요소가 불이다. 연금술이란 구리나 철을 금으로 바꾸는 작업인데, 구리를 금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불로 가열해야 한다. 불이 없으면 물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불은 고통을 수반한다.

루마니아의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그 고통을 '고문(torture)'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 태어남(Born again)'의 과정에서도 반드시 불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거듭남. 그 거듭남을 상징하는 괘가 '화풍정' 괘이고, 그 솥단지에 열심히 불을 때는 사주가 노통의 팔자다. 여기서 유념할 부분은 화력의 조절이다. 적당히 불을 지피면 민족의 보약이 나오지만, 너무 불을 많이 때면 솥이 녹아 버린다. 아울러 불이 약해지면 장작(木)을 보강해야 한다. 목생화(木生火) 아닌가. 원만하게 약을 다리려면 장작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사주의 고수들 "北에서 왔수다"

 

'미신종사업(迷信從事業)'.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직업 분류표에는 '미신종사업'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업종이 미신종사업자에 해당하는가? 직업적으로 사주팔자를 보아주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주쟁이'에 대한 공식적 명칭은 미신종사업자였던 것이다.

90년대 들어와서는 다시 '점술업(占術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점술업이라는 명칭보다 과거의 미신종사업이라는 이름이 훨씬 낭만적인 이름 같다. 이처럼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정신(正信)'이 아닌 '미신(迷信)'에 종사하면서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을 준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미신이 파고들어갈 빈틈은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은 빈틈도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 현대사에서 미신종사업자가 최초로 출현한 시기는 한국전쟁 때였고, 그 장소는 부산의 영도다리 밑이었다. 부산으로 피란 온 사람들이 영도다리 밑에서 사주를 보기 시작했다. 그 피란민을 대상으로 사주 영업을 시작한 사람들 역시 이북에서 피란온 사람들이었다. 명리학의 고수들은 해방 이전에는 이북에 몰려 있었던 탓이다.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이라 일컬어지는 '사주첩경'의 저자 이석영도 평안북도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북사람들이 사주에 몰두했는가?

조선시대에 이북은 차별을 받았다. 이남 출신에 비해 고급 관료의 배출 숫자도 훨씬 적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소외감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가 이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이북 지역에서 환영을 받았던 배경에는 조선시대에 이북사람들이 받았던 소외감과 관련 있다. 누적된 차별과 소외감은 '주님 앞에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사주도 마찬가지다. 차별 받던 이북 사람들에게 사주의 이론은 매력적이었다. 사주라고 하는 것은 생년월시만 잘 타고나면 왕도 될 수 있고, 장상도 될 수 있다는 신념체계다. 반대로 아무리 지체 높은 집안의 자식이라 해도 사주가 좋지 않으면 별 볼일 없다고 믿는다. 사주가 좋으면 신분이 비천해도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혁명사상이 들어 있고, 그것이 타고나면서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정론이자 운명론이 내포돼 있다. 모순돼 보이는 양면이 미묘하게 배합돼 있는 셈이다. 한쪽에는 치열한 현실타파의 노선이 마련돼 있고, 다른 한쪽에는 운명에의 순응이다.

혁명과 운명론의 배합.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그 사람들이란 바로 머리는 있는데 출세 길이 막혀 버린 사람들이다. 머리는 좋은데 구조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채널이 막혀버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명리학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머리는 좋은데 왜 세상에 나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사회체제가 잘못돼서 그런 것이다.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홍경래 난을 비롯해 조선조 각종 반란사건에 감초처럼 명리학이 개입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다.

그 다음에는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는 내가 왜 이처럼 초라하게 살아야 하나. 왜 대접을 못 받고 사는가에 대한 해답이 운명론이다. 능력이 있는데 출세를 못하는가? 그 이유를 운명론이 아니면 해명할 수 없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가운데 매우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라고 평가받는 '논형(論衡)'의 저자 왕충(王充:AD 27~97))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천재였지만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데, 왕충은 그 이유가 자신의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운명이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고 여겼다. 사회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명제처럼, 사주 신봉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운명론 신봉자이지만 집단적인 차원에 진입하면 혁명론자로 전환된다. 이북 사람들, 특히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역 사람들이 일찍부터 명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배경에는 소외와 차별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한편 '사주첩경'의 저자 이석영은 1920년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명리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이양보(李陽甫)로부터 훈도를 받았다. 48년 월남해 충북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옮겨와 살다가 83년 사망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주를 연구하게 된 시기는 48년 월남한 후에 생계수단으로 삼으면서 부터다. 69년에 완성한 '사주첩경'6권은 48년부터 대략 20년간의 연구와 실전체험을 정리해 저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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