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新 한국의 명장_02

醉月 2014. 3. 17. 23:25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보자기에 수를 놓는 예술가 자수장 김현희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남다른 섬세함으로 이름 높은 자수장 김현희(金賢姬·67)의 전문 분야는 보자기다. 우리 전통 조각보와 수 보자기를 멋지게 아우른 그의 보자기는 조선시대 궁수 전통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조화시킨 작품이다. 예술성과 작가주의를 추구하는 김현희의 독특한 색감과 구성, 빼어난 수를 곁들인 보자기는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명품이 됐다.

자수장 김현희가 사는 곳은 선경(仙境) 같다. 정갈하며 아름답다. 그리고 꽃과 나무가 많다. 거실과 이어진 베란다 사이에는 전통 미닫이문을 달았는데, 닫으면 겨울 햇살이 다사롭게 비쳐들고, 열면 봄날처럼 베란다를 꽉 채운 꽃밭이 펼쳐진다.

“제가 꽃을 워낙 좋아합니다. 빨간색도 좋아하고요.”

꽃이 핀 선경에서 김현희는 선녀처럼 앉아서 수를 놓는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왔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수놓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꽃 나라에서 노니는 선녀 그대로다. 조선시대 관(官)에서 수를 놓는 장인을 ‘화아장(花兒匠)’이라 불렀으니, 선녀는 선녀로되 꽃 선녀고, 결혼하지 않았으니 영원한 ‘꽃의 아이’다.

 

규방공예 가운데서도 천을 짜거나 옷을 짓는 기본적인 일을 하는 이들과 매듭을 꼬거나 수를 놓는 장식적인 일을 하는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창조의 열정을 막힘없이 분출하는 편이라면, 후자는 꼼꼼하고 세련되게 표현한다. 물론 자수에도 탱화처럼 큰 작품이 있지만, 김현희는 작은 보자기를 더욱 사랑한다. 근사한 흉배도 있고 아름다운 병풍도 있는데, 왜 하필 범용한 보자기인가.

“수는 흉배나 활옷 등 격식을 차리는 의례용 옷부터 병풍, 주머니, 보자기, 노리개, 안경집, 가구 등 일상 물품까지 다 꾸밀 수 있습니다. 워낙 쓰이는 분야가 많은데, 하다보니 무언가 특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세계 사람이 다 좋아할 만한 보자기를 선택했지요.”

그의 보자기에는 천을 이어붙인 조각보 형태도 있지만 대개는 수 보자기다. 1995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작품은 조각보 가운데 연꽃을 수놓아, 조각보와 수를 결합한 형태다. 그의 작품은 수도 아름답지만 직접 천연염색한 독특한 색감과 조각을 이어붙인 구성까지 모두 그만의 개성으로 넘쳐난다. 가장 즐겨 놓는 문양은 역시 그가 좋아하는 꽃과 나무, 새다. 그의 집처럼 그가 만든 보자기에도 알록달록 꽃나무에 꽃이 피었고 새가 노래한다.

 

왕진기 사진만 보고 복원 꽃나무와 새를 상징적으로 처리한 수 보자기.

 

그의 집에는 198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은 대형 왕진기(王鎭旗·왕의 진영에 세우는 깃발)도 있고, 왕보(왕의 옷에 부착하는 둥근 보), 문무관의 흉배 등도 걸렸는데, 왕진기는 특별히 아름답다. 우아하고 따뜻한 황금빛과 갈색 색조의 왕진기에도 목단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새 마흔두 마리, 거기다 천리마와 해태, 봉황까지 있다. 궁중유물박물관에나 가야 만날 법한 이렇게 크고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 그이지만 이 작품 이후 보자기에 더 집중하게 됐다고 한다.

 

“저 왕진기를 만드는 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거의 하루 내내 매달리다시피 하면서요. 하루 여덟 시간 일하는 걸로 치면 3년은 족히 걸린 셈입니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답니다. 생각보다 짧아요. 하나에 집중하기에도 부족한 세월이지요.”

 

수를 놓은 시간만 따져 그 정도지, 그 왕진기의 도안 작업까지 따지면 꽤나 힘들고 까다로운 과정이었다. 이 멋진 왕진기 원작은 일본에 있고, 그래서 김현희는 실물을 본 적이 없다.

“동국대 학술조사단이 일본에 갔다가 조선 왕진기를 발견했다는 김사엽 교수의 글을 신문에서 보고 예용해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 선생님이 김 교수를 소개해주셔서 김 교수께 왕진기 사진과 자료를 받을 수 있었지요.”

 

그 사진을 바탕으로 미대 출신 여동생이 극사실화로 그려 이를 확대해 찍어서 원본 사진과 비교해 수정하는 방법으로 밑그림을 확정했다. 그 과정이 번거롭고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사진을 잘 찍고 그림을 세밀하게 그렸다 해도, 수의 기법을 일일이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은은한 바탕색을 내려고 물을 여덟 번이나 들이는 시도를 했고, 모든 색깔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고풍스러운 맛을 주려고 연한 밤색을 섞어 수놓는 등 이만저만한 공력을 들인 게 아니다. 그런 노고가 아우러진 그의 왕진기는 말 그대로 왕의 품격과 고아함이 풍겨난다.

   

공예가 아니라 예술

 

호랑이를 수놓은 조선시대 무관의 흉배. 반면 문관 흉배에는 학을 수놓았다.

 

김현희처럼 꼼꼼하고 치밀한 완벽주의자는 대형 작품을 내는 데 불리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기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들은 스스로 정한 높은 기준에 도달하려고 혼자 무진 애를 쓰고, 그 결과 엄청난 시간을 바치거나 채 완성하기도 전에 탈진하기 십상이다. 천재 예술가의 작품이 미완인 채로 남은 것도 이 완벽주의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품이라면 예술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들이 주로 주옥같은 소품을 많이 내고, 때로 그 소품이 대작을 뛰어넘기도 한다. 김현희가 큰 작품보다 보자기를 택한 것은 아마도 그에게 남은 세월과 완벽주의, 그리고 창작 욕구를 모두 고려한 최선의 선택인지 모른다.

 

많은 장인이 대형 작품을 만들 때면 제자들의 손을 빌리는 것도 워낙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인데, 그게 딱히 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명장들도 자기 작품을 따로 만들면서 제자들과 함께 주문받은 작품을 만들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공예의 세계에서 ‘공방’ 작품을 제자들과 함께 만들면서 기술을 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현희에게 자수는 공예가 아니라 예술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예술작품은 그래서 협업이 불가능하다. 바탕천 염색부터 수실 염색까지 모두 그의 의도와 마음을 담아 작업한다. 그런 그이기에 간혹 아프거나 할 때 실 꼬기(우리 자수는 실 한 올을 나눠 꼬아서 다시 한 올로 합친 ‘꼰사’를 쓴다)를 도와주는 이는 두어도 같이 수를 놓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제자를 가르치긴 하나 작업은 늘 혼자 한다. 따로 공방도 없다. 집에서, 그것도 한 사람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방 하나가 그의 작업 공간이다.

그에게 자수는 처음부터 예술이었지 돈벌이가 아니었다.

“수를 가르쳐주신 윤정식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네 바느질은 팔 게 아니니 작품으로 하라’고요. 그래서 한때 꽃꽂이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자수는 돈을 위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 꽃꽂이 강사를 업으로 한 적이 있다. 꽃을 워낙 사랑하는 데다 솜씨가 좋으니, 꽃꽂이는 그에게 꼭 맞는 일이었지만-꽃꽂이 역시 화아(花兒)의 일이긴 하다-손이 잘 망가지고 꽃은 이내 시들고 마니 아쉬움이 커서 그만두고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수에만 전념하게 됐다.

 

수방(繡房)의 솜씨를 잇다

 

김현희가 쓴 책들과 그의 작품을 소개한 일본 책자들.

 

그는 열아홉에 스승 윤정식을 만났다. 스승을 만나기 전에도 타고난 재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이나 붓글씨에 두각을 나타냈다. 화가인 여동생도 있고 의사인 오빠는 어려서 만화도 잘 그렸다. 어머니가 손뜨개와 붓글씨를 잘했다고 하니, 솜씨는 내림인 모양이다. 군목(軍牧)인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근무하던 1946년 유성에서 태어난 김현희는 아버지의 부임지가 바뀌어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살던 마포 서강동 동회에서 윤정식 선생이 부녀자들에게 자수를 가르쳤는데, 마침 그곳에 그의 어머니가 배우러 다녔다.

 

“어른들이 배우는 곳이어서 어린 제가 낄 수는 없었고, 집에서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해보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윤 선생님이 집에 놀러와서 보시고는 ‘얘는 내가 끼고 가르쳐야겠다’며 저를 개인지도 해주셨어요.”

 

스승을 만나면서 김현희의 재능과 솜씨는 수로 집중됐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해도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분야를 찾게 마련인데, 그의 성정에는 수가 꼭 맞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작품성을 추구하는 윤 선생님의 가르침 역시 그의 마음에 맞았을 것이고, 깔끔한 성품과 외양은 제자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자가 기억하는 스승은 ‘물 긷고 연탄을 다루면서도 가르치러 오실 땐 모시옷이나 버선, 고무신까지 정갈한’ 모습이었다.

수는 예부터 아름답고 고상한 여자의 세계였고, 그래서 공주님도 수를 놓고 양반집 규수도 수틀 안에 자신을 표현했다. 서양에서도 여자의 수 솜씨는 남성의 칼솜씨와 비교될 정도로 중요한 여성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수가 꼭 여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스승 윤정식 선생은 궁수(宮繡)를 놓던 남자 박(朴) 씨에게 수를 배웠다고 한다.

 

윤정식 선생은 개성 사람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음에도 어린 나이에 전통 궁수를 먼저 배운 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여학교의 수예 교육은 일본 자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 여파에 시달린 우리 자수계는 한동안 그 잔재를 씻어내기 위해 장인들이 애를 써야 했다. 윤 선생이 궁수를 배우게 된 것은 개성 정화여학교 설립자 김정혜 여사 덕이라고 한다. 김정혜 여사는 부녀자 교육에 뜻을 두고 1908년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사립학교를 세웠는데, 윤 선생은 김정혜 여사가 특히 아낀 인물이었다.

“윤 선생님이 정화여학교에 다녔는지 다른 학교에 다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김 여사님이 윤 선생님을 유학까지 보내주셨답니다. 아무튼 김 여사님이 수예와 주산 등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해 온 사람 가운데 궁중 수방에서 일했던 박 씨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통 수방나인은 여자였으나, 조선 후기 비단실을 많이 생산했던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남자 장인도 많았다. 특히 평안도 안주 지방에는 남자 장인들이 전문적으로 놓은 수가 널리 보급돼 민수(民繡)로서 ‘안주수’의 명성이 자자했다. 남자 장인들 중 뛰어난 이는 궁에도 불려가 일을 했다고 하니, 박 씨도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윤 선생님은 여학교 수예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스물여덟에 결혼하시고 손을 놓으셨다고 합니다. 결혼하고서도 수를 놓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결혼하셨는데 막상 결혼하고서는 수를 놓지 못하게 했답니다.”

 

열아홉 제자와 예순다섯 스승

어쩔 수 없이 자수를 그만두게 된 윤정식이 열아홉 어린 소녀 김현희를 만난 것은 한참 뒤 예순다섯 살 때였다. 윤 선생은 6·25전쟁 후 마포에 유린보육원을 차려 전쟁고아를 거두고 나중에는 탁아소를 운영하다 모든 걸 원불교 재단에 기부한 사람이다. 윤 선생이 보육원을 운영하던 당시 동회에서 자수를 가르치던 중 김현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됐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불교 신자였던 윤 선생은 목사의 딸을 정성으로 가르치면서 ‘세상에 태어나 세 가지를 잘하면 극락 가는데, 그중 하나가 제자를 기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윤 선생에게 제자 김현희를 키우는 일은 젊은 시절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잇는 것이자 극락 가는 공덕을 닦는 길이었을 테니, 그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은 10년 동안 주로 저희 집으로 오셔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정성이 대단하셨지요. 수강료도 못 드리고 대신 제가 작품 할 때 늘 두 개씩 해서 하나는 선생님께 드리는 걸로 수강료를 갈음하곤 했습니다.”

김현희가 궁수를 배운 윤 선생에게 수를 배운 건 행운이었다. 그런데다 윤 선생은 일본 수도 알았고, 전통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윤 선생님은 일본 유학파라 왜색풍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 관장이 모은 전통 자수를 보신 뒤로 너무 사실적으로 놓는 것은 일본 자수 영향이라는 점을 의식하신 것 같아요.”

윤 선생은 제자를 만난 뒤 가르치는 데 열중했기 때문에 작업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그런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아쉽게도 윤정식 선생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정화여학교에서 언젠가 선생님 박물관을 지어드리려고 작품을 많이 소장했는데, 사립학교 분규에 휩쓸리는 바람에 항의시위대가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해학 가득한 보자기 자수

 

섬세한 바느질로 곱게 이은 조각보에 살짝 강조하듯 수를 놓았다.

궁수 전통을 잇는 윤 선생에게 10년간 집중 교육을 받은 그는 때로 다른 장인이 잘 알지 못하는 묘수도 갖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수를 놓기 전 미리 밑수를 놓는 기법이 있는데, 그는 어떤 밑수를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훤히 꿰고 있다. 실상 그것은 묘수라기보다 기초에 속한다. 하지만 이 작은 기초가 미묘한 차이를 낸다. 밑수에 따라 나중에 표현되는 색감이나 질감, 은은하게 비치는 무늬 등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교수는 “많은 자수 작품이 이름과 제목을 떼어버리면 구별이 잘 안 되는데 김현희의 작품은 (남달라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그 말은 꼭 기법만을 지적한 것은 아니고 김현희의 작품이 개성을 지녔다는 뜻이겠으나, 개성 역시 기법을 떠나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수는 좀 특별한 공예에 속한다. 모름지기 공예품은 실용성이 첫째고 아름다움이 둘째인데, 자수는 아름다움이 우선인 공예다. 전통사회에서 여자가 해오던 천 짜기나 옷 짓기는 필수품을 만드는 일이지만 자수는 다른 물품을 장식하는 데 쓴다. 안경집이나 주머니에 굳이 수로 장식하지 않아도 쓰는 데는 불편이 없다. 그러니 자수는 어디까지나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매듭이나 자수는 공예는 공예이되 실용성보다 예술에 가까운 공예다. 특히나 자수는 그림처럼 구체적인 표현부터 추상적인 구성까지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예 중 가장 뛰어난 회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김현희의 작가주의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수가 예술이 아니라 공예인 것은 실제 물품을 장식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순수 감상용 자수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불교가 들어오면서 삼국시대 불상이나 불경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예술 자수가 크게 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금창기). 삼국시대 우리 자수 수준을 볼 수 있는 작품은 일본에 남아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자수품으로 전해지는 ‘천수국만다라수장’은 불교적 내용을 ‘수놓은 장막’(수장繡帳)으로 7세기 일본에 불교를 크게 일으킨 성덕태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작품이다. 이 수장 명문에는 밑그림을 그린 화공으로 ‘고려가서일’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이 대작(본래는 최소한 1장 6척이었다고 한다)의 책임자로 명시된 ‘양부진구마’는 백제 양부 사람 아니면 가야계로 본다.

   

고려시대는 불교와 귀족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어 종교적 열정을 세련되게 표현한 감상용 자수 작품을 가장 많이 제작한 시기다. 유물로 남은 몇 안 되는 고려 후기 작품은 비록 소품이지만 다른 고려시대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화려하면서도 은은하고 세련된 솜씨를 뽐낸다. 얼마 없는 유물보다 우리 선조의 자수 솜씨를 증명해주는 것은 여러 역사서다. ‘삼국사기’나 중국 역사서에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의 화려한 모자가 자주 등장한다. 모자는 깃털이나 구슬, 자수로 장식했고 옷에 금수도 많이 놓았다고 돼 있다.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궁중에 수놓은 휘장막이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화려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화려함을 멀리한 조선시대 자수는 실용성이 크게 부각된다. 고대사회도 그렇지만 조선시대는 수레부터 옷,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장식으로 나타내는 엄격한 제도가 있었다. 이런 장식에 첫째로 꼽히는 것이 자수다. 문관과 무관의 흉배나 관복 뒤에 늘어뜨리는 후수(後綬)에 들어가는 특유의 문양과 색깔이 정해졌고, 이를 자수로 표현했다. 왕궁에는 당연히 수방이 필요했고, 민가에서도 수 장식으로 신분을 나타냈으니 궁수와 민수가 아울러 크게 발전했다. 궁수가 고려시대 기술을 전승한 세련된 수법을 구사했다면 민수는 소박한 도안과 표현이 돋보인다.

“궁수의 문양은 용이나 봉황 등 가상의 동물 문양이 많지요. 이에 비해 민수나 보자기에는 자연물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 수는 자연물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또는 해학을 곁들여 표현한 것이 많아요. 그래서 수를 아주 재미나게 놓을 수 있지요.”

실제로 그의 보자기에는 입을 뾰족 내민 귀여운 새와, 동심원으로 퍼지는 동그라미 몇 개로 간략히 표현한 꽃이 등장한다. 그래서 수를 놓은 사람의 심성이 살짝 묻어난 것 같아 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게 한다. 이처럼 사실성과 추상성이 적절히 섞인 것이 우리 수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국 수는 화려하고 일본 수는 사실 묘사에 치중한 데 비해, 우리 수는 상징성도 풍부해서 예술적인 면이 뛰어납니다. 옛사람의 수를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하지요.”

구성 면에서도 중국 수는 화면을 꽉 채우는 반면 일본 수는 여백을 많이 두어 동양화처럼 표현한다. 우리 수는 화면을 다 채우는 궁수나 흉배조차 숨 쉴 공간이 있고, 기하학적인 구성을 보이는 보자기에도 적당한 여유가 있어서, 채우면서도 다 채우지 않는 미학이 있다. 하지만 기법으로 따지면, 우리 수가 단연 뛰어나다. 수를 놓는 실은 대개 한 가닥이 13올 내지 스무 올로 되어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은 이를 그대로 쓰지만(푼사) 우리는 실 한 가닥을 반으로 나눈 다음 각각 꼬고, 다시 이를 합쳐서 반대로 꼬아(꼰사) 수를 놓는다. 그래서 빛이 반사되는 효과를 내니 수를 놓고 나면 반짝이는 듯 입체감이 잘 살아난다. 그러나 실 한 가닥을 나누어 한쪽 끝을 입에 물고 일일이 꼬는 작업을 해야 하니 공력이 그만큼 많이 든다.

 

세계에서 주목받는 우리 보자기

자수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예술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전문적인 분야이자 동시에 다른 공예에 비해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대중적인 공예이기도 하다. 김현희 명장이 한창 수에 몰두하던 시절에는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고 팔에 침을 꽂아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 명장은 취미로라도 수를 배우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특히 일본의 자수 인구와 열정을 보면 마냥 부러운 모양이다.

 

“일본은 퀼트와 수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우리 보자기를 특히 좋아합니다. 배우려는 의지도 많아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할 정도지요.”

그의 보자기는 고등학교 교과서 표지를 장식할 만큼 일본에서 명성이 높다. 그는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일본의 퀼트 전시회에 초대됐고,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수예 잡지에 소개된 것은 물론이고 NHK는 그의 보자기를 소개하는 35분짜리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보자기를 다룬 그의 책도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이러다가 우리 보자기가 일본으로 아예 건너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다행히 그는 제자를 많이 키우고 있다면서 여유를 보인다.

 

“한국문화의집(KOUS)에서 20년 넘게 강의를 해오면서 2000명을 가르쳤어요. 그중 충북에서 활약하는 이은실이 있고요. 제가 작품에 열중하는 편이긴 하지만 대를 이을 제자를 위해 ‘자수보자기 연구회’를 구성해 전시회도 자주 열고 있지요.”

김 명장은 10년 전 뇌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다가 뇌신경을 건드리는 바람에 한때 몸 왼쪽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고생했다. 그는 ‘열심히 살았으니 언제 가도 여한이 없다’는 담담한 마음으로 열심히 몸을 움직인 덕에 마비에서 대부분 풀려났다. 지금은 3년 뒤 칠순을 맞아 열 전시회를 위해 열심히 작품을 제작한다.

 

김 명장은 염색부터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만든 작품이라 ‘아까워서’ 잘 팔지 못한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 빈 민속박물관, 미국 시애틀박물관, 하버드대학 박물관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하버드대학 박물관은 그에게 직접 사간 것이 아니라 주한 미 대사였던 슈나이더의 부인 리 슈나이더가 구입한 보자기를 사간 것이라고 한다. 슈나이더 부인은 갤러리를 직접 운영할 정도로 미술과 공예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보자기는 그런 대로 팔기도 하지만, 자수 작품은 잘 안 판다. 몇 년 전 일본 사람이 그의 왕보를 고가로 구입하고자 했으나 거절했다. 2012년 초 롯데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했을 때 전시회가 끝난 뒤에 화랑 측에서 한두 달 대형 작품을 걸어둔 적이 있는데 그는 혹여 빛이 바랠까 속으로 애를 태웠다. 이 정도로 자신의 작품을 아끼건만 정작 작품에는 ‘서명’을 남기지 않는다.

“원래는 서명을 했는데, 일본의 유명한 도자기 작가가 낙관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 그다음부터 안 했습니다. 그 작가는 ‘한국의 뛰어난 도자기 작품에는 낙관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낙관을 남기느냐’고 했답니다.”

비록 서명이 없어도 그의 작품임을 알아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 관장이 ‘최고’라고 감탄한 솜씨와 그만의 독특한 색감은 그의 ‘서명(signature)’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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