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다시는 이 지옥에 오고 싶지 않다”

醉月 2008. 10. 19. 18:22

“다시는 이 지옥에 오고 싶지 않다”
매 순간 생명의 위협 속에서 알 카에다 소탕 작전을 펼치는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다. 단 1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수색작전 동참기.
바쿠바·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편집위원)
   
ⓒ김영미 제공
미군과 알 카에다의 최후 결전이 벌어지는 바그다드 북동쪽 바쿠바 시내를 미군 병사들이 수색하는 모습.
7월 어느 날, 밤 11시30분. 달빛조차 없어 칠흑같이 캄캄한 이라크의 밤, 마치 외계인처럼 야간 투시경을 헬멧에 부착한 한 무리의 미군이 조심스럽게 총을 겨누며 바쿠바 시 골목길을 순찰하고 있었다. 동행한 기자에게 소대장은 야간 투시경으로만 식별 가능한 형광봉을 헬멧에 부착해주며 “절대로 대열에서 벗어나지 말고 시시각각 전해지는 무전 연락에 귀를 기울이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무전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장된 순간이 계속됐다. 수색 목적은 주로 골목길과 민간인 주택에 있는 알 카에다의 은닉처와 무기를 찾는 것이다. 순찰하는 도중 수시로 멈추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그때마다 공격 자세를 취하며 그 자리에 멈췄다. 팽팽한 긴장 속에 침묵이 흘렀다.

특히 이런 야간 순찰은 어두운 골목 저 어디선가에 매복한 저격수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작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골목 순찰 중 어디선가 총성이 들려왔다. 영화에서 보던 다이내믹한 전투 신과 달리 총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처음 총격을 받았을 때는 얼떨떨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총성은 더욱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기자 바로 옆에서 통신을 맡던 히스패닉계 로페스 중사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건물 위로 올라가세요!”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나는 발을 떼었다. 중무장한 채 뒷걸음질 치며 나를 호위해주는 병사들을 따라 골목 안 누구 집인지도 모르는 옥상으로 뛰었다. 뛰는 도중 로페스 중사는 중대 본부에 “긴급 상황! 우리 소대가 세 발 총격을 받았다. 차량 지원 바람”이라고 소리지르며 무전을 쳤다. 옥상 위에서 2시간가량 숨죽이며 기다리는 동안에도 총소리는 계속 들렸다. 이윽고 “알 카에다로 추정되는 이라크인 저격수 2명을 잡았다”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상황이 종결되어  전 부대원이 부대로 들어온 시각은 새벽 2시께. 이것이 이라크 주둔 미군의 일상이자 현실이었다.

“긴급 상황, 우리 소대가 총격을 받았다”


이곳 바그다드 북동부 바쿠바 시는 아직까지 미군과 알 카에다의 최후 결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라크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이다. 기자가 배치된 제2 스트라이커 여단은 독일에 주둔하던 부대로 알 카에다 색출 작전을 수행하는 최전선 부대이다.

이들은 주로 본국에서 수송된 냉동식품으로 식사한다. 핫도그나 달걀 가루, 물에 풀어 만든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감자 으깬 것 따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점심은 대충 과자 같은 걸로 때워야 했고 작전을 나가면 차량 안에서 MRE(Meal ready for eat)라고 불리는 전투식량으로 해결했다. 맛이 없어 난감한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보는 기자에게 이제 갓 22세가 된 마크 상병은 “맛 없더라도 먹어요. 순찰 나가서 허기지지 않으려면 먹어야 해요. 먹기 괴로우면 물하고 삼키세요”라고 말했다.
화장실도 재래식이고 물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배달되므로 아무리 더워도 매일 샤워를 할 수 없었다. 에브라힘 하사(26)는 “50여 명이 사는 이 내무반 안에 에어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가 고장났다. 너무 더워서 잠잘 때도 계속 땀이 흐른다. 어떤 병사는 자는 동안 탈수 증세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나무로 대충 칸막이를 해 만든 내무반 안에서는 살인적인 더위와 모기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가장 위험한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평균 나이는 25세 정도다. 하사관급이나 장교를 제외하면 병사들은 주로 17세에서 23세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한창 대학을 다니며 놀러 다닐 나이에 이라크에서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전투에 투입된 것이다. 우리처럼 국방의 의무가 아닌, 지원해 군대에 들어온 이들은 정작 ‘이라크에 왜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학을 가기 위해’ ‘직업을 구하다 보니’ 군대에 지원했고, 그러다가 배치된 부대가 이라크에 파병되어 오게 되었다는 대답이 주였다.

   
ⓒ김영미 제공
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군 병사(위)의 평균 나이는 25세가량 된다.
스트라이커에서 저격수로 복무하는 스티븐 일병(21)은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대가 이라크에 파병되면 본인이 오기 싫어도 임무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와야 한다. 만약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오고 싶겠나?”라고 대답했다. 그와 절친한 소대원 에릭 일병(20)은 “이라크는 미친 나라다.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 두 번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이라크 전쟁 이후 네 번 파병된 병사도 있다. 난 다시 오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기자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까닭


조금 높은 계급 장교들을 인터뷰하면 “우리는 이라크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이곳에서 싸운다”라는 대답이 즉각 나오지만 어린 병사들에게 이라크는 그저 오고 싶지 않은 테러 국가이다. 미군에게 “당신들은 누구와 싸우나?”라고 물으면 주로 많이 쓰는 표현이 ‘Bad guys(나쁜 사람들)’라고 말한다. 누가 나쁜 사람들인지 구체적 대답을 원했으나 그들은 그 이상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알 카에다 같은 테러 집단이나 시아파 민병대 정도가 고작이다.
기자가 취재를 하던 어느 날, 중대장이 나에게 와서 휴대전화를 달라고 했다.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그에게 “왜 남의 휴대전화를 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단지 안전 문제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한 뒤 내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취재진에게  통신수단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심히 불쾌했으나 지휘관이 안전상의 이유로 종군기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거절할 수 없다는 규칙 때문에 내주어야 했다. 가져간 휴대전화는 2일 만에 되돌려 받았다.

나중에서야 휴대전화를 수거해간 이유를 알게 됐는데, 그 내용이 소름 끼쳤다. 바로 옆 중대에서 공격을 받아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했는데, 한 명은 머리를 크게 다쳤고 또 다른 병사는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대 안에 희생자가 생기면 지휘관이 병사들의 모든 통신수단을 차단한다고 한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희생자 가족에게 오로지 지휘 체계를 통해서만 그 소식이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 뒤로도 두어 번 지휘관이 내 휴대전화를 가져갔는데 그때마다 소름이 끼치곤 했다. 누가 죽었구나!’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미군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기자에게 이 모든 이유를 귀띔해주었던 병사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모두 말이 없어진다. 나는 희생당한 사람이 누군지조차 모르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그리고 순찰을 나가면 모든 이라크 사람이 다 싫고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 나도 언젠가 그들에게 희생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동료의 죽음은 그들을 공포스러울 뿐 아니라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 때문에 이라크 민간인이 희생되고, 다시 미군의 희생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어찌되었든 이들은 이라크에 왔고 그것도 가장 위험한 전투와 작전에 투입되었다. 알 카에다 색출을 위한 순찰은 거의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이루어진다. 더위와 30kg이 넘는 군장, 무기는 그들을 더욱 힘겹게 했다. 이들이 주로 다니는 순찰 코스에는 항상 매복 위험이 도사렸다. 도로 매설 폭탄이나 저격병이 그들을 노리고 있으며 폭탄 테러는 이제 이라크에서 일상이 되었다.

   
ⓒReuters=Newsis
미군 스트라이커 부대 병사가 알 카에다를 색출하기 위해 민가를 수색하고 있다.
미군의 마을 수색은 모든 집을 방문하는 게 기본이다. 스트라이커를 타고 마을에 도착하면 저격수만 남겨둔 채 중무장을 하고 마을로 걸어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이라크 사람들의 긴장된 표정이 역력히 보였다. 아이들은 집으로 뛰어 들어가고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적막감이 흐른다. 미군은 수색 중이라는 주황색 표식을 출입문에 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은 구석으로 도망가고 얼굴 가리기에 바빴다.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마구 울어댔다. 아마도 이 아이들에게 미군에 대한 두려운 기억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미군 앞에 선 이라크인의 공포와 적개심

병사들은 여자들이 기거하는 방과 부엌은 물론이고 옥상까지 올라가서 무기나 은닉처가 없나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고 가족을 거실 한가운데 다 모이게 해서 구성원을 조사했다. 아버지나 남편 등 남자에게 가족이 몇 명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시아파인지 수니파인지를 물었다. 이라크 사람들은 미군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군이 물어보면 마지못해 대답은 해도 그들의 눈에서는 공포와 적개심이 느껴졌다.

마을 주민인 알리 씨(45)에게 “미군이 좋으냐?”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황당한 표장을 지으며 “어떻게 우리가 미군을 좋아하겠느냐. 이 마을에도 미군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이 많다. 지금 미군의 방식은 과거보다 많이 우호적이지만 우리는 그런 일련의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대장 마이클 상사(32)는 “이라크인이 미군을 좋아하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이다. 이제 주민들은 미군에게 호의적이다.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수색을 가면 여자들이 구석으로 도망가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가 들고 있는 총이 무서워서이지 미군이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라크 주민과 미군의 생각은 ‘극과 극’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이라크의 현실이다. 아마도 미군이 이라크에 있는 한 이 두 생각은 전혀 합치점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후 4200명이 넘는 미군 사망자와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이라크 민간인 희생자라는 끔찍한 수치로 이어졌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이라크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불러왔다. 아마도 이것이 전쟁의 생리가 아닌가 싶다.

수색을 마치고 오후 늦게 부대로 돌아와서야 병사들은 그 무거운 방탄 장비와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더위와 피곤에 지친 병사들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그 위에 땀에 젖은 군복을 말렸다. 그들은 신발도 벗지 않은채 여기저기 놓인 간이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들은 달력에 X표를 해가며 적어도 오늘까지는 무사하다고 표시했다. 기자가 그들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하고 싶으냐?”라고 묻자 모두 입을 모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데릭 상병(24)은 “가족이 너무도 그립다. 나는 두 번의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를 이라크에서 보냈다. 어떻게든 살아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꼭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데릭 상병뿐 아니라 이라크에 있는 모든 미군의 한결같은 소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