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내 가서 지식 자랑 마세요’
생명운동의 본산 지리산 실상사와 산내면 사람들
이상락│작가 writersr@daum.net
“초기 사찰들의 기록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사찰과 지역주민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을 실천했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이념이 퇴색하고 변질되어 이해관계로 흘러서 갈등을 불러오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사찰이 지주(地主)로 군림하면서 공동체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저는 실상사가 소유한 농지를 귀농학교에 내놓아서 귀농인들을 위한 실습장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서는 먼저 귀농 희망자들의 세계관이 변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12년 전인 1999년 봄, 나는 ‘신동아’의 인물탐방 꼭지 ‘이 사람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로 내려갔다. 당시 주지이던 도법스님은 사찰 울타리 밖의 실습지 이곳 저곳을 분주히 오가면서, 이제 막 문을 연 귀농학교의 갈피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은 어딘지 어색하고, 서툴고, 자신 없고, 서먹한 표정이 역력했다. 거기 비하면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농촌공동체의 복원을 역설하는 도법스님의 설...
농사짓지 않아도 시골 사람
산내 지역에 살고 있는 도시 출신의 귀농자 대부분은 치열한 자기 모색과정을 거친 뒤에 농촌에 귀의해 육체노동의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을 텐데, 내 처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몸뚱이만 지리산으로 옮겨왔을 뿐 여전히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그쪽에다 전적으로 생계를 의탁하고 있는 터에 누구한테 염치없이 ‘나 지리산으로 이사와 산다’고 얘기를 건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 전 텔레비전을 켰다가 마침 도법스님이 출연한 대담 프로를 접했는데 그 발언에 솔깃한 바 있었다.
“농촌 어른들은 대개 지금도 괭이나 삽을 들고 땅을 파거나 경운기로 짐을 나르거나 혹은 톱질을 하는 등 오직 육체노동 하는 것만을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사가 있는 산내지역의 어른들은 다릅니다. 귀농자들을 많이 접하다보니 어떤 사람에게는 그림 그리는 일이 밥벌이가 될 수도 있고, 풍물놀이만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며, 책상에 앉아서 하루 종일 글만 쓰는 것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다 압니다. 산내면은 산촌이어서 농지가 턱없이 부족한데 도시의 귀농자들이 어떻게 다 농사만 짓고 살 수 있겠습니까.”
도법스님의 그 발언은 내게 ‘그럼 나도 산내면 주민 행세를 해볼까?’하는 용기를 갖게 하는 한편으로 ‘귀농학교 그 후 10년’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주었다. 그러다 어느 비 오던 날, 나는 실상사 극락전으로 향했다.
도법스님은 2003년에 주지를 그만두고 회림원이라는 암자로 올라가 거처해왔는데 지금의 주지스님이 내려오라 청해 실상사 안의 극락전으로 옮겨와 지내고 있노라 했다.
“초기에 귀농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전업농부가 될 결심이 안 된 사람들은 귀농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귀농학교를 운영하면서 관찰해보니 그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서 현대사회의 삶을 살아간다는 건 아무리 소박하게 산다 하더라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처음에 반농반업(半農半業)을 제안한 것입니다. 부부가 귀농했다면 한 사람은 농사를 짓고 또 한 사람은 다른 쪽에 종사해서 용돈을 벌어 쓰자는 거지요. 우리 농촌사회는 너무 단조로워서 현대 도시적 삶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오기에는 너무 삭막해요. 기존에 살고 있는 농촌의 주민들을 위해서도 농촌사회의 정서와 문화가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든 농촌으로 돌아온 것 자체를 통칭해서 귀농으로 봐야 합니다.”
도농공동체
실제로 도시에서 산내면에 내려와 사는 사람들의 경우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의 교사로 일하기도 하고, 여성농업인센터에서 운영하는 방과후학교나 혹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산내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건축에 관심 있는 귀농자는 거주지를 산내면에 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생태주택을 짓는다.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은 산림청의 숲 해설사로 일하기도 하고, 혹은 지리산 둘레길의 안내 일을 맡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다양한 직종의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농촌사회의 문화를 훨씬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법스님이 주춧돌을 놓거나 계기를 마련해서 생겨난 모임이나 기구나 시설들이 하도 여러 가지여서 한달음에 정리를 해내기가 쉽지 않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귀농학교를 해보자 해서 시작됐는데 이후에 도시와 농촌을 연결할 도농공동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 차원에서 대안중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가 생겼고, (사)한생명, 여성농업인센터, 인드라망 생활협동조합, 실상사작은마을, 우리옷인드라망 등이 생겨났다. 이 기구나 모임들이 저마다 하나의 구슬이 되어서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구슬그물로 통합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실상사라는 사찰의 운영방식이다. 도법스님이 주지이던 시절에 귀농학교, 작은학교 등 실상사가 중심이 된 공동체사업을 추진해왔는데 2003년에 주지를 그만두게 되자 이 사업들이 흔들리게 된다. 이후 세 번째로 주지를 맡은 지금의 해강 스님이 도법스님이 해오던 활동에 찬동하고 이를 수용해 “사부대중공동체를 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사찰의 운영방식이 재가자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실상사는 사부대중 공동체입니다. 물론 출가자와 재가자가 신앙적으로는 위계질서가 있으나 사찰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서는 동등한 위치에서 논의하고 협의합니다. 스님들은 주로 종교적 의식을 집행하거나 불교를 가르치는 등 수행과 교화활동을 하는 데에 열중하고 사찰의 관리와 운영은 재가자가 중심이 되어 이뤄집니다. 실제로 실상사를 운영하는 데 출가자 중에서는 주지스님 한 사람만이 행정적인 소임을 맡습니다. 나머지는 행정을 총괄하는 종무실장이 중심이 되어서 재가자들이 운영해나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사찰 차원에서 “사부대중공동체를 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동안 도법스님이 해오던 제반 사업을 실상사 차원에서 맡아서 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최석민(52)씨는 귀농학교 초창기인 1999년 서울에서 내려와 산내면에 살고 있는 귀농 1세대 격이다. 맞벌이를 하던 남편이 귀농을 하겠다며 내려간 뒤 부인 정상은(55)씨는 남편의 귀농이 미덥지 못해 5년 동안이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더 하다가 합류했다.
일반인이 실상사 운영
“실상사 귀농학교에서 받은 교육 내용은 크게 두 가집니다. 농촌에서 어떻게 하면 적게 쓰면서 생태적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관한 정신교육이 우선이고, 그 다음으로 갖가지 작물에 대한 유기농 농사법을 익히는 공부였지요.”(최씨)
실상사 귀농학교는 한 해에 봄·가을로 두 차례 학생을 받는데, 3개월간의 교육과정을 마친 졸업자 중에는 마음이 흔들려서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도 하고, 혹은 고향이나 다른 농촌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이곳 산내면에 남기도 한다. 어쨌든 절반 정도는 농촌으로 들어감으로써 귀농 성공률이 50%는 된다는 것이 최씨의 얘기다.
최씨는 졸업 후 아예 실상사 농장에 남아서 7년여 동안 다른 귀농학교 졸업생 10여 명과 함께 실상사의 땅을 빌려 함께 농사를 지었다. 공동작업 공동분배 방식으로 영농을 했는데 결산해보니 대개 월 평균 50만원가량이 돌아오더란다. 그래도 최씨는 초기에 일찌감치 귀농하는 바람에 서울의 전세금을 뺀 돈으로 헐값에 땅을 사서(이후 귀농자가 몰리면서 산내면의 땅값이 만만치 않게 올랐다) 그 터에 자기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농지를 살 여유는 없었으므로 실상사 농지를 빌려서 농사를 지었다는데 2010년의 농사를 결산하면 이렇다.
‘벼농사-3300㎡(1000평), 고사리-660㎡, 고추-330㎡, 감자-330㎡, 콩-660㎡, 참깨-660㎡, 들깨-330㎡. 총소득=500만원.’
전업농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취미로 짓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월평균 소득이 50만원이 채 안 되었다. 부인 정씨가 숲해설사로 일하는데 월급이 100만원이다. 도법스님이 언급한 ‘반농반업’을 실천하는 경우다. 이들 부부는 자녀가 없어서 형편이 괜찮은 편이지만 학교에 보낼 자녀를 둔 경우는 사정이 훨씬 어렵다.
귀농자 중에는 드물게 축산업이나 비닐하우스 농사 등 규모를 갖춘 농사를 지어서 전업농 소리를 듣는 이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귀농한 사람들은 그런 욕심 비우고 내려온 사람들이에요. 농촌 사람들이 수지가 안 맞으니까 너도나도 농사 포기하고 도시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고서 내려왔거든요.”
도회지에 살 때보다 소득이 많이 줄어서 생긴 빈자리를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와 덜 팍팍한 인심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채우면 된다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다는 뜻일 게다.
‘지리산에 미친 사람 서울에 더 많아’
귀농인들을 두루 만나는 과정에서 지리산이 좋아서 내려왔다는 그야말로 ‘지리산 마니아’가 상당수였다. 박재우(45)씨는 20대 시절부터 뻔질나게 지리산을 찾다가 아예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와 산내면 소재지에 ‘사랑방국수’라는 식당을 차렸다. 실상사귀농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할까 궁리하는 중에 마침 식당 자리가 나서 음식장사에 도전했다는데, 귀농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찾아주어서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겼다고.
지리산에 마음을 뺏긴 것으로 치면 박재우씨 저리 가라 할 사람이 바로 신현철(48)씨다. 20년 넘게 지리산을 다녔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지리산에 미친 사람이 지리산에 사는 사람보다 서울에 훨씬 많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지리산 산들바람’이라는 별명으로 통하고 아들 이름은 아예 지리산의 지(智)에다 호랑이 간지에 해당하는 인(寅)자를 써서 ‘지인’이다. 서울 마포의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그는 산림청 소속의 숲해설사다.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삼림에다 근래에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숲 해설’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유감스럽게도 신씨의 부인 ‘산들바람’은 지금 암 투병 중이어서 신씨는 오래전부터 부인을 위해 ‘백초효소’를 담가와 그 방면에 ‘꽂혀’ 지낸다는데, 언젠가 효소사업을 해보는 게 꿈이란다. 집 안에 효소 용기 한둘쯤 없는 집이라면 귀농자의 집이 아니다, 할 만큼 여기서는 효소가 유행이다.
산내면사무소를 지나서 조금 걷다가 왼편 언덕으로 난 길을 한참 올라가면 숲속에 포근하게 들어선 작은학교가 나타난다. 정확하게는 실상사작은학교인데 대안중학교다. 한 학년에 15명씩, 45명이 전교생이다. 이 학교에는 교장이라는 직함이 따로 없이 14명의 교사가 모두 교사이고 선생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장, 혹은 대표교사에 해당하는 이를 일컫자면 이경재씨다.
이씨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도법스님을 존경해왔다는데 그는 1998년에 서울의 직장을 명퇴하고 실상사로 내려왔다. 이씨에 대한 도법스님의 회고다.
“자기는 교육학을 공부했다면서 불교계에서도 대안학교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얘기를 건네볼 대상이 실상사밖에 없는 것 같아 찾아왔다는 겁니다. 제가 그랬지요, 취지는 좋지만 우리 실상사는 가난한 절이어서 돈이 없다, 절에서 밥은 먹여주고 잠은 재워 주겠지만 경제적 지원은 못 해준다, 그랬지요. 그랬는데 얼마 뒤에 젊은이 두세 명을 데리고 오더니 땅을 한 200평만 빌려달래요. 사찰 소유의 논 200평을 주었더니 컨테이너 박스 두 개를 갖다놓고서 하나는 교실이고 하나는 교무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안중학교 설명회를 하는 날 가보니까 15명이나 되는 학생이 왔더라니까요.”
인기 높은 대안학교
바로 그 ‘맨땅에 헤딩하겠다’고 덤벼들었던 사람이 이경재씨다. 그렇게 시작한 실상사작은학교가 올해로 개교 11주년을 맞았다. 수려한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데다 불교계 유일의 대안학교로 10여 년을 모범적으로 운영해온 덕분에 대안학교 중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것이 이경재 교사의 자랑이다. 국영수 등 지식공부는 30~40%만 하고 나머지는 철학, 명상, 토론 등 내면의 힘을 키우는 학습에다 미용, 나무 다루기, 옷감 다루기, 농사짓기, 효소 만들기 등 체험학습과 특기교육 등을 고루 시킨다. 그럼에도 검정고시는 모두 통과한다고 한다. 제1기 졸업생의 경우 중학 졸업자격 검정고시에서 전라북도 수석과 경상남도 수석을 모두 이 학교 학생들이 차지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현재 1학년의 경우 산내초등학교를 졸업한 순수한 이 지역 토박이 가정 출신은 단 한 명뿐이고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부모가 도시에서 일부러 귀농한 경우가 4가정, 이미 귀농해 있던 가정 출신이 1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 등 타 지역 출신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중산층에서 이 학교의 교육방식에 찬동해 자녀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학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학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교사들의 급여는 초기 7년 동안은 50만원이었다가 그 후 2년간은 70만원, 지금은 ‘많이 인상되어서’ 월 90만원이다.
학비 부담 때문에 이 지역 토박이 가정 자녀가 입학을 못한다면 인드라망공동체의 정신하고는 멀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 지역에서 형편이 넉넉한 부모들은 우리 학교 안 보냅니다. 남원이나 전주나 서울로 보내지요. 3년을 마쳐도 졸업장도 안 주면서 검정고시 보라 하고, 공부는 조금밖에 안 시키면서 애들한테 삽 들고 농사일이나 하라고 하고, 밥도 직접 해먹는 그런 학교 뭣 하러 보내느냐, 이러거든요.”
귀농인과 토착인의 갈등
지역주민들의 경우 대안교육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는 얘기다. 졸업 후의 진로를 보면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3분의 1, 대안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3분의 1, 그리고 나머지는 음악·미술 등 전문분야로 진출한다. 도법스님은 졸업 후에 진로를 정하지 못해 어정쩡해하는 아이들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인드라망 공동체의 또 한 축인 ‘(사)한생명’의 이귀섭(50) 사무국장을 만났다. ‘한생명’이 왜 사단법인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우선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탄생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사무국장의 얘기.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라고 해서 스님들, 신도들, 종무실 관계자들 그리고 주변에서 절과 같이 일하고 있는 귀농학교나 작은학교 등의 구성원들이 사찰을 중심으로 일을 해가고 있는데 사실 실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속돼 있지 않습니까. 만일 실상사가 어떤 사업을 하게 됐을 때 조계종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이 지역에서 진행하는 장기적인 지역공동체 사업에 부침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형태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주체와 조직적인 틀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생긴 것이 도법스님이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전국적인 조직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다. 그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정신을 이곳 산내지역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사)한생명이다. 도법스님은 실상사가 지역주민과 자립적인 마을공동체를 형성해가는 데 산내면 규모 정도가 여러 면에서 적당하다고 얘기한다.
“산내면보다 더 커버리면 감당이 안 되고 이 정도는 돼야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면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교육적으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정도는 작더라도 운영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인구가 2000~3000명 규모가 알맞아요. 이걸 하나의 마을로 보고 이 마을을 ‘이웃사촌’과 ‘품앗이 정신’으로 운영해가는 체계, 이런 것들을 구축한다면 이것이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을공동체를 해왔는데 아직은 역량이 많이 모자랍니다.”
역량이 모자란다 했지만 산내면 주민을 상대로 이웃사촌과 품앗이 정신으로 다가가려는 (사)한생명의 노력은 쉼 없이 이어져왔다. 우선 귀농자의 제1의 관심사가 자녀교육인 점을 감안해 산내들어린이집과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사)한생명 부설로 여성농업인센터를 두어서 여성교육과 노인건강을 돌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사회건 크고 작은 갈등은 상존한다. 귀농인들과 지역민들 사이에도 매사에 장단이 척척 맞아 들어가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산내초등학교 운동장의 ‘인조잔디 사건’은 그 한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산내초등학교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까는 문제를 두고 귀농인들은 ‘인체에 해로운 인조잔디는 다른 지역에서는 다들 철거하는 추세인데 아이들 건강에 해로운 인조잔디를 왜 깔려고 하느냐’고 반발하고, 그러자 동문들이 ‘학교의 숙원사업을 하는 것이니 훼방 말라’며 격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작지 않은 소란이 일었지요.”
결국 ‘굴러온 돌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는 파르라니 인조잔디가 깔렸다. 이귀섭 사무국장은 귀농자들이 기존의 주민들을 존중하는 만큼 주민들도 지역에 유입된 귀농자들의 가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도시에서 한 가구가 귀농해오면 그 지역사회에 1억원의 경제적인 효과를 낸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일단 인구가 느니까 행정적인 지원도 증가하고, 그 귀농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가치들, 그리고 그 사람이 살던 도시와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짐으로써 나타나는 성과들, 그 사람이 인연이 되어서 또 다른 사람이 유입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대효과 등등 해서….”
흥미로운 통계다. 사람마다 약간씩 얘기가 다르지만 산내면 총인구 2000여 명 중에서 귀농인구를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많게는 500명까지 보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경제적인 효과는 얼마나 될까. 하기야 나처럼 두문불출한 채 지역사회에서 겉도는 경우 그 유입효과라는 게 별 볼일 없겠지만.
이승기 길? 아니 이성계 길!
산내면 소재지에서 승용차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인월 버스터미널이 있다. 그곳에서 함양을 거쳐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가 하루 여덟 차례 있다. 아직 서울에 볼일이 많은 내가 자주 이용하는 교통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울에서 금요일에 내려와야 할 경우 버스표를 미리 사두지 않으면 일찌감치 차표가 매진돼버려 찜질방 신세를 지기 일쑤다. 도법스님을 만난 김에 그것이 순전히 스님 때문이라고 따졌더니,
“아이고, 나도 몇 번이나 당했는걸요.”
이런 대답이 건너왔다.
주말을 이용해 서울에서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내려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둘레길 역시 그 탄생연원을 짚어 올라가면 도법스님이 맨 윗자리에 있다.
2004년에 도법스님은 수경스님과 함께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점으로 해 생명평화 탁발순례에 나섰다. 그런데 순례 도중에 정부에서 섬진강 벚꽃길을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두고 환경단체들이 들고 일어나는 등 야단이 났다. 순례를 중단한 도법스님은 수경스님과 함께 강동석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을 만나러 올라갔다. 강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지리산 둘레길 조성을 제안했다.
“지금까지의 등산문화는 어느 산 어느 봉우리를 정복한다는 식의 청장년, 그중에서도 남성 중심의 문화였지요. 남녀노소가 함께 걸으면서 자연 생태계의 가치를 깨닫고 지리산 자락에서 살아가는 농촌공동체의 생활모습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제안을 했지요.”
당시 건교부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강 장관이 그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역사적인 둘레길 조성사업이 시작됐다. 둘레길 조성을 위해서 ‘사단법인 숲길’이 만들어졌고 초대 이사장을 도법스님이 맡아서 숲길 조성작업을 추진했다.
지난 7월6일 전남 구례군의 KT 연수원에서는 ‘지리산 둘레길 2011년 상반기 현장워크숍’이 열렸다. ‘숲길’ 이상윤(49) 상임이사의 얘기다.
“지리산 둘레 100여 개의 마을을 5개년에 걸쳐서 300여 ㎞의 걷는 길로 조성하는 사업이었는데 현재 210㎞가 개통돼 있습니다. 이제 남은 구간이 구례의 토지면하고 하동군 악양면까지의 구간인데 형제봉 능선과 황장산 능선을 넘어야 하는 난코스입니다.”
난코스라고 해서 장비를 동원해 없는 길을 깎아내는 것이 아니다. 잘 찾아보면 예전의 고갯길들이 다 살아 있다. 옛길을 살리되 최소한의 인공만을 가해 이어나가기 때문에 ‘숲길’ 관계자들은 ‘길을 뚫는다’고 하지 않고 ‘길을 찾는다’고 말한다.
둘레길 현장에서 안내역을 맡은 일꾼들의 발표가 시작됐다. 산청군에서 온 최문옥씨는 자신이 맡은 구간의 화초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구상난풀, 참꽃마리, 지느러미엉겅퀴, 큰꽃느아리, 꽃개오동 등의 이름들을 척척 외우며 길안내 시범을 했다. 남원에서 온 신해정씨의 발표 제목은 ‘이승기 길? 아니, 이성계 길!’이었다. 연예인 이승기가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 촬영 때 걸었다 하여 주민들 사이에 ‘이승기 길’이라 불리는 둘레길 구간이 있는데 알고 보면 그곳은 고려 우왕 때 이성계가 왜구들을 물리친 내력이 있는 길이니, 이름을 붙이려면 ‘이성계길’이 옳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둘레길의 각 구간마다 스토리텔링을 위한 콘텐츠를 발굴해나가자는 취지다.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제발 주민들이 애써 키운 작물에 손대지 마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걸으세요. 둘레길은 공부하고 준비해서, 천천히 성찰하며 걷는 길입니다.”
이상윤 상임이사가 둘레길을 찾는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인월 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가면 지리산댐과 지리산케이블카 설치 반대를 위한 서명용지가 비치돼 있고, 대합실 밖으로 나간 다음 철제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어슬렁’이라는 이름의 휴식공간이 나온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아무나 올라가서 책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차값은 내도 되고 안내도 된다) 잠시 어슬렁거리다 내려오기 딱 좋은 공간이다. 그런데 ‘어슬렁’이라는 간판 옆을 보면 이런 현판이 함께 붙어 있다. 지리산생명연대. 예전엔 이 사무소도 실상사 앞에 있었다. 이 단체 최화연(41) 사무처장에게서 그 연혁을 잠깐 들어보자.
버스터미널의 ‘어슬렁’
“지리산운동의 연원을 올라가자면 맨 윗자리에 지리산공부모임(김지하 장회익 이학영 등 주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8년 무렵에 정부 당국이 갑자기 지리산댐 건설계획을 발표했어요.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리산에 무슨 댐이냐며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전국 300여 단체가 모여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라는 조직을 결성합니다. 그 대표를 도법스님이 맡아서 댐 반대운동을 전개해나갔지요. 그러다 2002년경에 지리산댐 계획의 백지화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자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를 해체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대부분의 의견이 지리산 부근에 지리산을 지키는 단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모아져서 논의 끝에 또 하나의 지리산 환경보호 단체인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과 통합해 ‘지리산생명연대’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지리산댐 반대 운동 과정에서 이른바 사회운동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 있었다. 도법스님과 함께 실상사에 있던 수경스님이었다.
“실상사는 실상사대로 따로 대책위원회를 꾸렸지요. 제가 주지였기 때문에 당연직 대표를 맡았고요. 당시 수경스님이 바로 이 방(실상사 극락전)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워낙 수줍음을 심하게 타는 분이라 아무리 대책위에 참여해서 함께 나서자 해도 그런 것 못 한다고 아예 도망다녔어요. 그러자 사부대중 모두가 원망했지요. 그 압박을 못 이겨서 마지못해 참여했던 것인데 그 이후에는 전위에 서서 가장 치열하게 행동하는 스님이 되셨지요.”
댐 건설 문제가 그렇게 잠복되나 싶었는데 2007년경에 정부는 일부 수정된 계획안을 들고 나온다. 10여 년 전에 나왔던 계획에 따르면 함양군 마천면 문정리에서 남원의 실상사까지 모두 수몰되는 것으로 설계돼 있었다. 그런데 반대운동이 거세고 여론이 불타오르자 계획 일부를 수정해 이번에는 실상사를 수몰지역에서 빼고 전라북도 남원시와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계까지만 물에 잠기게 하는 안을 내놓았다. 남원시는 빼고 함양군 지역만 물에 잠기도록 수정한 안이었다.
“수자원공사나 건교부에는 지리산댐이 버리기 아까운 아주 달콤한 카드인 모양입니다. 2007년도부터 재추진 움직임을 보이다가 2009년에 4대강 사업을 시행하면서 다시 추진한 것이죠.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하면 낙동강 쪽의 수질이 살아날 텐데 왜 지리산의 물을 부산·경남 시람들의 식수로 공급하겠다고 나서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는 지리산댐 계획을 이수(利水)사업이 아닌 치수(治水)사업으로 변경했어요. 수돗물 공급 사업이 아니라 홍수조절용 사업으로 바꾼 것이죠. 정부는 2008년 초에 치수사업은 타당성 조사를 제외하도록 국가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했거든요. 애초 부산지역에 물을 공급하려고 추진한 지리산댐 건설계획이 주민의 반대에 부딪히자 의도적으로 사업 목적을 바꾼 것입니다.”
이전의 함양군수는 지리산댐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는 데 반해 현재의 군수는 적어도 자기 임기 동안에는 추진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힌 상태라는 것이 최화연 사무처장의 귀띔이다. 최씨가 진주에 가야 한다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함양군·남원시 대책위원회 대표들이 진주시청에 모여서 지리산댐 건설계획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합동기자회견을 열기로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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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부운리 산간마을의 내 골방에 칩거하다시피 지내다가, ‘도법’ ‘실상사’ 등의 열쇳말 두엇을 챙겨 들고 모처럼 울 너머 마을 공동체의 활동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돌아보았다. 인월 5일장에서 만난 어떤 이가 “산내에 가서 지식 자랑하지 말란다며?” 라는 말을 툭 뱉으며 지나갔다. 내가 만난 모두는, 아직 지리산에 스며들지 못하고 ‘녘’에서 자박거리고 있는 나와 달리, 모두 똑똑하고 당당했다. 그들이 도법 혹은 실상사와 더불어 만들어갈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 갈 것인지 당분간은 반걸음쯤 비켜서서 지켜보거나 혹은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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