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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醉月 2009. 9. 16. 08:43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범죄자의 글씨는 따로 있다. 글씨 오른쪽을 올려 쓰기만 해도 인생이 바뀔 것”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 글씨를 보면 사람이 보인다
● 항일지사·친일파 글씨 1000여 점 수집한 까닭
● 어떤 사람이 목숨 걸고 불의에 맞서는가

● 부자·정치인·학자를 만드는 글씨체

 

항일지사와 친일파의 글씨 1000여 점을 소장한 글씨 수집가 구본진 검사.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꽂히는 일이 있다면, 나에게 그것은 글씨였다. 글씨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열쇠였다. 왜 어떤 사람은 목숨을 바쳐 불의에 맞서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좇는가. 그 해답을 글씨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구본진 저 ‘필적은 말한다’중에서)

 

구본진(44)씨는 검사다. 서울대 법대 재학중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조직폭력 마약 살인 등 강력범죄를 주로 수사하며 잔뼈가 굵었다. 살인범, 강도, 거짓말쟁이 틈바구니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게 그의 일이었다. 피조사자의 말투, 행동, 표정 하나도 가볍게 넘긴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그들의 필적을 유독 주의 깊게 살피고 있음을. 자필진술서 필체, 조서 끝에 휘갈겨놓은 서명 한 줄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되곤 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비뚤어진 인격을 드러냈고, 단정하고 깔끔한 필체는 진실성을 담보했다.

 

글씨는 곧 글쓴이 자신이었다.

항일지사와 친일파의 간찰(선인들이 주고받던 편지)을 모으며 글씨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서 극명하게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의 글씨는 그들의 삶만큼이나 확연히 달랐다. 그때부터 범인을 잡아내는 열정으로 글씨를 탐구했다. ‘글씨가 품고 있는 비밀’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수집한 간찰이 1000여 점. 항일지사 400여 명, 친일파 150여 명의 친필이 그에게 있다. 독보적인 컬렉션이다.

 

글씨에 미친 검사

경기 용인시 법무연수원 검사교수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무실 문을 열자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는 광암 이규현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한 획 한 획 반듯하게 내리그은 필체가 문외한이 보기에도 단정하다. “글씨는 곧 글쓴이”라는 그의 이론이 맞다면, 광암은 분명 고결하고 꼿꼿한 성품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보름 전쯤에 산 글씨지요. 새로 구입하면 눈에 익힐 겸 이렇게 사무실에 걸어둡니다. 이규현 선생은 구한말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에요.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았지요. 정사각형 모양과 각지고 힘찬 느낌이 전형적인 항일지사의 필체입니다.”

눈을 돌린다. 구한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의 유묵 소품, 의병장 곽종석의 간찰 등이 벽마다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후에 누군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김병조 선생의 글씨를 보내오기로 했단다.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인데 북한 쪽에서 주로 활동해 글씨를 구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친필로 확인되기만 하면 바로 구입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뜬 듯이 들렸다.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의 글씨가 이리로 오고 있다! 이 사실이 그를 설레게 만드는 듯 싶었다.

 

▼ 글씨가 꽤 많은데 계속 구입하시나 봅니다.

“일주일에 한두 점쯤은 삽니다. 주로 고서점이나 경매를 통해서 구하지요. 오늘처럼 글씨가 저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요.”

 

▼ 독립운동가들의 글씨는 이미 상당수 소장하신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에 건국훈장을 받은 분만 1만명이 넘습니다. 그분들의 글씨 중 10%도 채 못 모았지요. 제가 소장한 글씨 주인공 가운데 일반인이 알 만한 분은 많지 않습니다. 주로 지역 유림 출신의 항일지사들이지요.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역사 뒤편에서 잊힌 분이 많아요. 그분들의 글씨를 계속 찾고 있지요.”

글씨를 수집하면서 그는 ‘점잖은 미치광이’(gentle madness·열광적인 수집가를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가 됐다.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집에 돌아가면 컬렉션을 들춰본다. 새벽에 잠을 깼다가 글씨가 보고 싶어 벌떡 일어날 때도 있다. 새로운 글씨를 구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감이 솟아난다. 타고난 수집가인 그에게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수집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종의 ‘창작’이다. 이런 희열을 느끼게 해준 건 글씨가 처음이라고 한다.

“1998년 미국 뉴욕으로 연수를 갔어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의 기증유물관을 보며 그 규모와 수준에 감탄했지요. 어릴 때부터 뭐든 모으는 걸 좋아했는데, 이왕이면 좋은 주제를 정해서 박물관에 기증할 만한 컬렉션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운명적인 만남

그때 운명처럼 간찰이 다가왔다. 귀국 후 우연히 들른 고서점에서다. 수북이 쌓인 옛 글씨 속에 능성 구씨 조상들의 작품이 없나 뒤적이는데, 문득 동판으로 찍어낸 듯 반듯하고 규칙적인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곽종석이라는 분의 간찰이었어요. 집에 와서 찾아보니 구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항일지사였지요.”

일제 침략에 항의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고, 유림 총궐기를 요구하는 격문도 돌린 이였다.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끝에 병사한 그는 1963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 저기 벽에 붙어 있는 글씨인가요?

“네. 최초로 수집한 간찰이에요. 그때는 선생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이상하게 저 글씨에 시선이 갔지요. 보고 있으면 글씨가 글쓴이에 대해 뭔가 얘기해주는 것 같았어요.”

▼ 글씨가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요.

 

구 검사가 좋은 글씨의 전형으로 꼽은 독립운동가 부재 이상설의 글씨.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에서 글쓴이의 강직한 기품이 느껴진다.

“검사 생활을 하면서 그전에도 몇 번쯤 한 생각이지요. 수사를 하다보면 사건 관계자들의 글씨를 많이 보게 돼요. 언제부턴가 글씨만 봐도 대충 사람의 성품이 그려졌습니다. 진실한지 거짓말에 능한지, 고집이 센지 유연한지, 소심한지 대범한지 등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글씨가 말해주는 것 같았지요. 글씨를 본 뒤 사람을 만나면 제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끔은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 피조사자들한테 자필진술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제 앞에서 감추고 있는 진짜 모습이 글씨를 통해 드러날 테니까요.”

 

선생의 이력을 추적하고 편지 내용도 해석해보다가 그는 무릎을 쳤다. 독립운동가의 간찰이야말로 최고의 수집품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평소 글씨에 대해 품고 있던 호기심을 푸는 길도 될 것 같았다.

그때 우연 같은 운명이 한 번 더 찾아왔다. 독립운동가의 간찰을 수집하기로 작정하고 처음 방문한 고서점에서 기려자 송상도의 글씨를 구한 것.

기려자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항일지사의 행적을 기록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기려수필’ 덕분에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이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선생의 글씨를 사들고 돌아오면서, 내게도 선생처럼 전국을 찾아다니며 항일지사의 글씨를 수집해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 건 아닐까 생각했지요.”

 

안중근 의사의 서예작품. 각이 두드러지고 장중하며 높은 기상이 느껴진다.

‘운명’이라는 느낌은 낯설었지만 선명했다. 2000년, 햇수로 꼭 10년 전의 일이다.

 

포스 컬렉터

그날 이후 그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았다. 낮에는 검사, 퇴근 후엔 글씨수집가였다. 전국의 이름난 고서점을 훑고 광복회 소식지 등에 ‘항일지사 글씨를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좋은 간찰이 나왔다’는 연락만 받으면 달려갔다. 지방 고택에서 옛 문서 무더기가 발견됐다는 얘기를 듣고 쫓아내려간 적도 있다. 애를 먹이는 작품을 만나거나 헛걸음을 칠 때면 송상도 선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 수집에 빠지면 대들보가 뽑혀나가는지도 모른다면서요.

“간찰의 경우는 좀 달라요. 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것에 비하면 무척 싸거든요. 바인더 한 권에 수백점씩 보관할 수 있으니 보관비용도 거의 안 들고요.”

 

▼ 종종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몇 억원대에 팔렸다는 보도가 나오던데요.

“그건 아주 드문 경우지요. 제가 수집을 시작할 때만 해도 10만원이면 간찰 서너 점씩을 사곤 했습니다. 이상용 유인석 같이 꽤 알려진 분의 글씨도 수십만원 선에 구했고요. 즐거웠지요. 하지만 가끔은 세상이 이분들의 가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합디다.”

 

▼ 수집을 하다보면 명망가의 글씨에도 욕심이 생기지 않나요.

“몇 년 전에 본 이육사 선생의 글씨가 그랬지요. 주머니 사정 때문에 바로 눈앞에서 놓쳤는데,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아 한동안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어요. 김구 선생의 글씨를 꼭 사고 싶어서 무리한 적도 있습니다. 최대로 생각했던 금액을 넘겨 700만원에 구입했지요. 하지만 그런 건 아주 드문 경우예요. 수집을 계속하려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간찰과 잘 맞아요. 어떤 분의 글씨를 소장하느냐 못지않게 얼마나 많은 분의 글씨를 모으는지도 중요하니까요. 덜 유명한 분, 이제껏 세상에 한 번도 글씨가 공개되지 않은 분의 간찰을 찾아내는 것도 저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는 매년 연봉의 10% 정도를 글씨 사는 데 쓴다. 그와 아내가 ‘취미생활’로 용인할 수 있는 상한선이다. 대신 열정과 노력만큼은 아끼지 않는다. 수준 높은 컬렉션을 만들기 위해 간찰을 구입할 때는 글쓴이의 삶과 시대 상황, 편지에 담긴 내용을 꼼꼼히 분석한다. 진품 여부를 판정하려고 종이 재료와 먹의 종류, 함께 나온 자료까지 살핀다. 말 그대로 ‘글씨 수사관’이다.

“한번은 일주일을 꼬박 들여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나온 간찰 1000여 장을 본 적이 있어요. 퀴퀴한 옛 종이 냄새를 맡으며 꼼꼼히 뒤졌는데 항일지사의 글씨는 한 점도 못 찾았지요. 보통 그렇습니다. 늘 쫓기는 생활을 했을 독립운동가들이 편지를 많이 썼을 리 없고, 어렵게 틈을 내 안부를 전해도 가족들이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 시대 글씨는 이래저래 참 구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한 작품 한 작품을 볼 때마다 더 공을 들이게 되지요.”

 

▼ 수천 장의 옛 문서 사이에서 독립운동가의 간찰을 찾는 건 웬만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엄두도 못 낼 일 같은데요.

“공부를 계속 하지요. 유명한 수집가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수집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얻은 것보다 더 많다’고 했어요. 저도 그 말에 100% 동의합니다. 간찰을 해독하려고 전서, 초서, 한학, 고문에 서예까지 익혔어요.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고미술전문가들에게 묻고, 한문 번역이 막히면 한학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가끔은 사법시험 볼 때도 공부를 이렇게까지는 안 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의 서가를 본다. ‘중국역대서론’ ‘영남선유묵적’ ‘서예이론과 실기’ 등 글씨 관련 서적과 필적학, 필적심리학 등을 다룬 원서, 시대별 종이·인장 등에 대해 설명해놓은 각종 전문서까지 빼곡히 꽂혀 있다. 다른 칸에는 ‘기려수필’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등 독립운동 통사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일대의 항일운동을 기록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류의 향토사, ‘항일투쟁가 왕재일의 생애와 사상’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평전도 있다. 이런 그를 보고 소설 ‘영원한 제국’을 쓴 친구 이인화씨는 ‘포스 컬렉터’(force collector)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 구 검사는 이 단어를 e메일 ID로 쓰고 있다.

 

▼ 서가를 보니 정말 ‘포스’가 느껴집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10년쯤 되니까 이젠 간찰을 보면 무슨 내용인지, 어떤 종이를 썼는지, 내용이나 종이에 비춰볼 때 진품인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어요.”

 

글씨 컬렉션을 보여주는 구본진 검사. 그는 지치고 피로할 때 글씨를 보면 힘이 솟는다고 한다.

글씨는 말을 한다

그가 그동안 수집한 글씨를 모아놓은 바인더를 펼쳐 보인다. 수백㎞를 운전해 마침내 손에 넣었다는 유동열의 글씨, 비좁은 고서점 구석에 앉아 종이 더미를 뒤지다 발견했다는 임한주의 글씨가 거기 있다. 경매에서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한 글씨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다른 바인더에는 친일파의 글씨만 모아놓았다. 항일운동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악명 높은 이들의 글씨를 하나 둘 구입하다보니 또 하나의 컬렉션이 만들어졌다. 그가 두 권을 나란히 펴놓고 묻는다.

“딱 보고 어느 쪽이 독립운동가의 글씨인지 아시겠어요?”

간찰이 제법 모였을 때, 그는 이런 실험을 했다. 거실 바닥에 간찰 200여 점을 뒤섞어놓은 뒤 서명을 보지 않고 직감만으로 분리해봤다. 독립운동가의 글씨로 느껴지는 것은 왼쪽, 친일파 글씨로 느껴지는 것은 오른쪽에 뒀다. 예감은 90%이상 맞아떨어졌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라는, 수사 검사로 일하며 오랫동안 품어온 짐작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 뭐가 어떻게 다르던가요.

“그냥 느낌이 달랐어요. ‘이게 항일지사 글씨 같다’는 감이 온 게 정말 항일지사의 글씨였던 거지요.”

 

▼ ‘감이 왔다’는 말은 너무 막연하게 들리는데요.

“저도 그게 고민이었어요. 두 글씨가 서로 다른 건 분명한데 근거를 밝힐 수 없으니까요. 도대체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밝혀내려고 고심하다 필적학에 대해 알게 됐지요.”

필적학은 글씨체를 통해 글쓴이의 성격과 감정 등 내면세계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필적학자들은 필적을 뇌가 시키는 대로 손이 따라간 흔적이라고 여긴다. 필적만 보면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뜻으로 “필적은 뇌의 지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아까 말씀하신 ‘글씨가 말을 한다’와 통하는 주장이네요.

“그렇지요. 필적학을 공부하며 ‘아, 이거구나’ 싶었어요. 서구의 필적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한 사람이 입이나 발가락으로 글씨를 써도 손으로 쓴 것과 똑같은 필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글씨의 어느 부분이 어떤 성격을 드러내는지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분석했지요. 필적을 통해 사람의 잠재적인 범죄 충동을 찾아내고, 실제 범죄자들이 한 행위의 특징까지도 파악해냅니다. 이렇게 필적과 범죄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건 검사로서 수사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 하지만 필적과 수사를 바로 연결짓는 건 위험하지 않나요. ‘이런 글씨체를 가진 사람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같은 범죄결정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러니까 더욱 철저한 연구와 분석이 뒷받침돼야겠지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지만, 외국의 경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신뢰도가 확보돼 있어요.”

그에 따르면 2001년 미국에서 탄저균이 든 편지로 네 명이 살상됐을 때 FBI는 필적학을 수사에 동원했다. 범인의 편지를 토대로 ‘성인 남자, 타인과 별로 접촉하지 않는 직업군, 상당한 과학지식을 보유한 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테크닉이 부족한 자,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상당히 구체적인 수준이다. 이 분석에 따라 육군전염병연구소의 세균전문가 브루스 아이빈스 박사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그가 기소 전 자살함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진 채 종결됐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아이빈스가 진짜 범인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 글씨의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상세한 정보가 나오죠?

“크기, 형태, 곧음과 굽음, 각진 여부, 글자 간격, 행 간격, 규칙성, 쓰는 속도, 정돈성 등이 각각 한 마디씩 글쓴이에 대해 말해주는 거지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i 스펠링의 점 찍는 위치, t를 쓸 때 바의 길이 같은 것까지 꼼꼼히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필적학 연구가 일천한 상황이다. 영어 원서를 뒤져가며 공부해야 했다. 그들의 풍부한 실험 사례와 탄탄한 분석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알파벳을 바탕으로 한 연구결과가 우리 글씨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그는 직접 해외 필적학의 분석틀을 바탕으로 우리 글씨를 분석해보기로 했다. 첫 대상은 자신의 컬렉션이었다. 예전에는 그저 감으로 ‘반듯하다’ ‘유연하다’와 같이 생각했다면, 이번엔 필적학이 요구하는 각각의 항목에 맞게 분해하듯 살폈다.

그에 따르면 독립운동가들의 글씨는 대체로 작고, 각지고, 붓끝이 힘차다. 글자 간격은 좁고, 행 간격은 넓으며, 모양은 규칙적이다. 반면 친일파의 글씨는 크고, 좁고, 길다. 유연하며, 획이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다. 글자 간격이 넓은 대신 행 간격은 좁다. 속도가 빠른 반면 규칙성이 떨어진다. 이 각각의 특징을 필적학 이론을 바탕으로 분석했다. 이들이 왜 국권침탈이라는 똑같은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는지가 드러났다.

“자존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기를 싫어하는 사람, 원칙주의자들은 항일의 길을 걸었어요. 반면 자유분방하고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친일을 선택했지요.”(상자 기사 참고)

 

▼ 보통은 글씨가 크면 대범하다고 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나요? 그런데 글씨가 커서 친일파가 됐다고 하면….

“필적학은 글씨가 주는 정보를 읽는 거예요. 가치판단은 그 다음 문제지요. 친일파들은 아마 대부분 평소 호탕하고 인간관계가 좋다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융통성이 많고, 국가나 민족 같은 도덕적 가치를 저버릴 수도 있던 거지요. 반면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뜻을 꺾지 않은 항일지사들은 외골수에 고집쟁이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필적학은 사람의 잘잘못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그가 어떤 성격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그는 이런 분석틀에 따라 항일·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의 삶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민족지도자라는 평가와 친일파라는 비난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한 인물에 대해 그는 “절대 친일파였을 리 없다”고 말했다.

“이 글씨를 보세요. 각이 정확하게 져 있고, 아주 네모진 모양이지요. 행간도 무척 넓고요. 이 양반이 과연 친일을 했을까요? 이렇게 자의식 강하고, 남에게 피해주기를 싫어하는 성품의 사람이? 저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친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했지만 훗날 변절해 반민특위 법정에 선 최린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반듯하고 곧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행동을 예측하기 힘들고 내면이 안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최린이 바로 이런 면 때문에 말년에 친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고 분석했다.

 

좋은 글씨 나쁜 글씨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글씨의 성격 문제를 파헤치면서, 서구이론이라 할 수 있는 필적학을 토대로 옛 글씨를 분석한 이는 그가 처음이다. 그의 컴퓨터에는 소장품 하나하나를 필적학 이론에 따라 분석한 파일이 저장돼 있다. 이승만의 절제와 박영효의 일탈, 김구의 졸박함과 이완용의 교묘함, 이준의 웅혼함과 조중응의 경박함이 글씨를 통해 드러난다.

 

▼ 글씨는 변할 수도 있지 않나요? 글씨가 바뀌면 인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씨가 바뀌면 사람도 변하지요. 자연적으로 필체가 변했다면 그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기 때문일 겁니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노력해 글씨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도 있어요. 외국에는 글씨체를 바꿔서 성격이나 내면 문제를 치유하는 필적요법(grapho-therapy)이라는 심리요법도 있지요.”

그는 사람의 품성을 선천적인 성격을 뜻하는 캐릭터(character)와 후천적인 성격을 가리키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로 구별했다. 캐릭터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퍼스낼리티는 노력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도박중독자가 개과천선해 성실한 직장인이 됐다면 퍼스낼리티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 가끔 보면 예쁜 글씨를 만들어준다는 교정학원 같은 곳도 있더군요.

“미국의 유명한 필적 컨설턴트 바트 바겟은 21일에서 30일만 훈련하면 글씨체를 바꿀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 학원에 다니면 분명히 글씨체가 변하겠지요. 하지만 이왕 글씨 연습을 하려면 ‘예쁜 글씨’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에 맞는 글씨를 연습하는 게 좋아요.”

필적학 선진국에는 이에 대한 연구서와 실용 지침서가 꽤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책을 바탕으로 우리 글씨체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부자, 정치인, 학자의 글씨체는 각각 다르다.

 

필적과 인생의 상관 관계

부자의 글씨체는 글자 하나하나마다 힘이 있다. 특히 마무리 부분이 깔끔하다. 부자가 되려면 ㅁ을 쓸 때 끝을 단단히 맞물리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큰돈을 번 사람의 글씨는 여기에 유연함이 더해져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한자 서명을 보면 글씨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모가 나 있되 흘러내림은 부드럽다. 출세하고 싶으면 단어나 문장의 첫 자음을 크게 써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를 보면, 전반적으로 길쭉한데 유독 시작하는 자음이 크다. ㅊ이나 ㅎ을 쓸 때 윗부분의 삐침도 두드러진다.

남들 앞에 서고 싶어하는 심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학자의 글씨는 작고 균형 잡혀 있으며 가로와 세로의 획 크기 및 간격이 매우 일정하다.

최남선 유진오 김소월 등의 글씨가 이런 패턴을 보인다.

 

반면 글씨체가 불규칙하고 글자 크기나 자간, 행간 등이 들쑥날쑥한 필체는 좋지 않다. 글자 크기가 들쑥날쑥한 사람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바뀐다. 불규칙한 자간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성향을 상징한다. 행간이 불규칙하면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자신감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은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고 사고 발생 가능성도 높다. 범죄자에게 많은 글씨체다. 특히 강도 살인 등 강력범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행간이 좁거나 불규칙한 글씨를 쓴다. 판단력이 미흡하고 자기 훈련이 잘 안 돼 있으며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의 특징이다. 글씨가 심지어 다른 글씨를 침범하는 경우도 있는데 매우 충동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글자의 가로 배열에 수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수평을 유지하며 쓰는 사람은 절제력이 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지요. 이왕이면 수평 상태에서 오른쪽을 향할수록 위로 올라가는 스타일로 쓰는 게 좋습니다. 이런 사람은 낙관주의자인 경우가 많지요.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이런 양상을 보여요. 반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글씨가 내려가는 사람은 비관주의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독재자 히틀러의 글씨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필적은 말한다’(중앙북스)는 책을 펴냈다. 스스로도 몇 년 전부터 서명을 바꾸고 틈틈이 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부재 이상설의 글씨를 모델로 삼았다. 유려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필체다. 글씨를 쓸 때마다 가로 수평선이 오른쪽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데도 신경을 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아내가 “당신은 뭘 믿고 그렇게 낙관적이냐”고 할 만큼 긍정적인 성격이 됐다.

앞으로는 검찰에 보관돼 있는 사건 파일들을 분석해 범죄자의 필적과 범행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려 한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범죄자의 필적을 갖고 있는 이들이 글씨체를 교정하도록 이끄는 것이 목표다. 그는 이 꿈이 실현되면 우리 사회에 범죄를 줄이는 데 큰 구실을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비행 청소년들에게 좋은 글씨를 익히게 해서 그들의 삶을 바꿔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모은 모든 자료를 사회에 기증하겠다는 마음도 변함없다. 더 많은 글씨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가능한 한 완성된, 좀 더 가치 있는 컬렉션을 남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글씨 수집가의 꿈

“제가 죽고 나면 아마 이 수집은 불가능해질 거예요. 광복 이후 50여 년이 흐르면서 이미 구한말 자료들이 사라지졌거든요. 그런 점에서 책임감을 많이 느끼지요. 아까 글씨를 본 이상용 선생 집안은 3대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어요. 퇴계 이황의 직계손이고, 99칸짜리 집에서 살 만큼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는데 오래지 않아 풍비박산 났지요. 가장들이 모두 투쟁하다 죽는 바람에 나중엔 자녀들이 굶어죽는 지경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런 분들의 친필이 지금 10만원, 20만원에 팔리고 있어요. 아무도 사지 않으면 그조차 곧 사라질 겁니다.

제가 잘 모아서 역사에 남겨야지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불쑥 “아까 온다던 그 글씨, 가짜였어요”라고 한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멈칫했다. 아, 김병조 선생의 글씨. 싱글벙글 마음 설레며 기다리던 그 글씨가 위작이었나 보다.

“아직은 선생과 인연이 닿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가 권병덕 선생의 글씨를 수집한 과정을 떠올렸다.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인 선생의 글씨를 수집하려다 그는 세 번을 실패했다. 누군가 글씨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찾아가면 위작이었다. 기대감이 거의 무너질 무렵, 청주의 한 소장자가 권 선생의 글씨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젠 포기하자’ 마음먹었으면서도 뭐에 홀린 듯 다시 달려간 그곳에 선생의 글씨가 있었다. 아마 그는 이제 김병조 선생의 글씨를 구하기 위해 또 그렇게 전국을 헤맬 것 같다. 그 글씨를 보고보고 또 보며 글씨가 들려주는 김병조 선생의 삶의 이야기에 빠져들 것이다. ‘글씨에 미친 검사’ 구본진이다.

필적학으로 분석한 글씨의 비밀
■ 크기
크기는 자기 이미지를 드러낸다. 큰 글씨를 쓰는 사람은 말이 많고 표현하기를 즐기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자기 과시를 좋아하고 남에게 관대하다. 작은 글씨를 쓰는 사람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내성적이며 보수적이다.
■ 형태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게 흐트러짐 없이 쓰는 사람은 규율과 도덕을 중시한다.
■ 곧음과 굽음
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향으로 곧고 일정하게 움직였는지, 글자 모서리에 각이 있는지, 모가 났는지 등으로 판단한다. 각은 의지의 표상이다. 각진 글씨를 쓰는 사람은 빈틈없고 엄격한 실용주의자다.
■ 글자 간격
마음이 넓은 사람은 글자 간격을 넓게 준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외향적이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력이 강하다. 마음이 곧고 내성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은 글자 간격이 좁다.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자기 표현과 자기 인식이 엄격하다.
■ 행 간격
행 간격이 넓은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사려 깊고, 절약할 줄 안다. 반대로 판단력이나 자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행 간격이 좁다.
■ 규칙성
들쑥날쑥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고 일을 계획하거나 관계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 속도
글씨를 느리게 쓰는 사람은 임기응변에 약하고 관습적이며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완벽주의자다. 빠른 속도로 글씨를 쓰는 사람은 활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정보를 빨리 입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