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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무협’ 선구자 용대운

醉月 2008. 7. 23. 14:08

평범한 로맨티시스트들이 축조하는 비범의 美學

무협영웅들의 숙명은 최고의 무도(武道)를 익혀 한 맺힌 복수에 성공하는 것.
그러나 PC통신 무협작가 1세대 용대운은 무도의 완성을 통해 자아의 완성을 일궈내는 낭만주의적 무협영웅을 탄생시킴으로써 ‘신무협’의 새 장을 열었다.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용대운(龍大雲)의 위치는 독특하다. 1961년생으로 서효원이나 야설록과 동년배인 용대운은 신인작가가 유명 기성작가의 이름을 빌려 출판하는 관례에 따라 첫 세 작품인 ‘마검패검(魔劍覇劍)’ ‘철혈도(鐵血刀)’ ‘유성검(流星劍)’을 야설록의 이름으로 출판했다. 그가 첫 작품 ‘마검패검’을 출판한 1988년은 소위 창작무협소설계가 전반적으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때다.

 

비록 야설록과 공저였지만, 용대운은 네 번째 작품 ‘탈명검(奪命劍)’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내걸 수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용대운은 작품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토록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당시 쓰여진 무협소설들은 지금 보아도 자못 주목할 만한 참신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검왕(劍王)’을 마지막으로 1990년 무협소설계를 떠났던 용대운은 4년 뒤인 1994년 화려하게 복귀한다. 서효원의 ‘대자객교’가 재출판되어 독자들의 환영을 받은 직후이다. 필자는 용대운의 복귀 경로에 주목한다. 용대운은 PC통신 무협소설 동호회인 하이텔의 ‘무림동’에 “‘검왕’ 탈고 이후 출간하려고 구상했다가 절반 정도 쓰고 중단했던 작품”인 ‘태극문(太極門)’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같은 시기 연재된 ‘퇴마록’의 조회 수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소위 창작무협소설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복수는 武道 완성의 동기

세간의 관습에 따라 ‘태극문’ 이후 한국무협소설은 ‘신무협(新武俠)’이라고 불린다. 신무협은 구무협과 스타일에서 구분될 뿐 아니라, 만화방용 출판 위주였던 구무협과 달리 PC통신(나중에는 인터넷) 연재와 도서대여점용 출판을 두 축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태극문’은 가히 스타일과 매체 특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신무협의 효시, 혹은 선구자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태극문’을 시작으로 용대운의 무협소설 세계에 대해 고찰해보자.

 

‘태극문’의 줄거리는 ‘복수’라는 무협소설의 고전적 주제와 ‘무도(武道)의 완성’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주제의 중첩에 의해 구성되었다.

주인공 조자건(趙紫巾)의 형 조립산(趙立山)이 화군악(華君嶽)의 손에 죽고 그리하여 조자건에게는 형을 위해 복수해야 한다는 사명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 복수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조립산의 죽음이 정당한 비무(比武)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화군악은 당대 최고수들(조립산은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고수였다)과의 비무에서 모두 승리하여 자신이 천하제일의 고수임을 입증했고, 그후에도 더 높은 경지, 궁극의 경지를 향해 홀로 수련한다.

 

그러니 조자건의 복수는 단순히 화군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화군악과 비무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화군악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화군악이 무도의 완성에 접근해가고 있으므로 화군악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곧 무도를 완성시킨다는 것, 혹은 완성에 좀더 가깝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도의 완성이지 복수 그 자체가 아니다. 무도의 완성이 복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복수가 무도 완성의 한 동기이며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평범 속의 비범 성취한 조자건

이러한 해석은 복수라는 사명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조자건이 천하제일고수를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아 혹독한 수련을 시작했다는 데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조립산이 세운 교육과정에 따라 조자건은 아홉 살 때부터 10년간 남들의 싸움을 구경했고, 그 다음엔 매일 1000번의 도끼질과 100번의 육합권(기초 무술인)을 연습 했다. 그 다음에는 심등대법(心燈大法)을, 또 그 다음에는 불괴연혼강기(不壞練魂�氣)를 배웠다. 조립산의 죽음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무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인물은 여럿이다. 섭보옥(葉寶玉), 모용수(慕容修), 위지혼(慰遲魂 : 필자가 알기로 慰遲라는 성은 없다. 있는 것은 尉遲이고 울지라 읽는다), 번우량(飜宇亮)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화군악과의 비무로 인해 목숨을 잃은 고수들의 후예라는 점과, 무도의 완성을 위해 태극문의 무공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태극문의 창시자 위지독고(慰遲獨孤)는 전대의 천하제일고수였다. 그러나 그의 무공을 유일하게 계승한 현재의 태극문 문주 냉북두(冷北斗)는 삼류 무공밖에 알지 못한다. 냉북두가 배운 것은 육합권, 복호장법, 산화수, 원앙각, 비응십팔조, 유운지, 포천삼, 용협십이로, 대좌골, 복마검법 등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삼류 무공 열 가지뿐이다. 그렇다고 위지독고가 자신의 무공을 다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열 가지가 실제로 위지독고 무공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위지독고는 그 무공으로 천하제일고수가 되었으나 냉북두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재질(才質)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말하자면 위지독고는 평범 속의 비범을 성취할 재질이 있었으나 냉북두는 재질이 부족해 평범에 머무르고 만 것이다. 평범 속의 비범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것은 ‘완전해지기’를 통해 성취된다. 평범한 무공도 그 자체로 완전해지면 이미 평범이 아니라 비범이 된다는 것, 무도의 완성이 가능할 정도의 비범이 된다는 것(이 발상은 다분히 도가적이다)이 ‘태극문’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다.

 

그러나 다섯 명 중 끝까지 태극문의 무공을 배우는 것은 조자건 한 명뿐이다. 다른 네 명은 평범의 반복을 견디지 못해 결국 하나씩 다른 길로 떠난다. 모용수는 천기노인(天機老人)을 따라가고, 번우량은 소림사의 속가제자가 되고, 위지혼은 일본도를 배우러 떠난다. 섭보옥만이 무공이 아니라 감정 문제로 떠나는데, 그것은 섭보옥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완성을 이루는 것은 끝까지 태극문의 무공을 배워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어 평범 속의 비범을 성취하는 조자건 뿐이다.

 

낭만주의적 자아 추구

물론 완성을 이루기까지 조자건은 무수한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 비무행(比武行), 화군악에의 도전권이 걸린 영웅대회, 친구 동생들의 배신, 거듭되는 구호당(九號黨)의 음모, 최고수들과의 대결…. 이를 통해 조자건은 자신의 무공이 가진 허점을 발견하고 이를 하나씩 없앤다. 허점을 모두 없앤 조자건은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고 검도의 최고 경지라는 화군악의 무형검(無形劍)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태극문’은 한 자아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조자건의 무도 완성은 곧 자아 완성을 뜻한다. 조자건의 경쟁자들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상관없이 그가 자아의 완성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존재이다. 가령 모용수나 위지혼, 번우량, 섭보옥 같은 우호적 경쟁자들은 조자건에게 중요한 도움을 준다. 섭보옥은 위불군의 치명적 공격을 막아주고, 위지혼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통해 화군악의 무공을 알려주며, 모용수는 조자건의 마지막 허점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들은 조자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무공을 상실하거나(섭보옥),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위지혼과 모용수).

 

어쩌면 이들은 조자건과 별개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조자건이라는 한 자아의 여러 다른 측면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과자옥 같은 적대적 경쟁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련이 필요하듯, 적대적 경쟁자들로 인해 시련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자아 완성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또한 적대적 경쟁자들은 자아의 다른 측면, 즉 부정되거나 배제되거나 억압되어야 하는 측면일 수도 있다. 자아의 완성은 통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통합은 하나의 헤게모니하에 한 편의 측면을 포섭하고, 또 다른 편의 측면은 배제한다.

그렇다면 화군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화군악은 절대적인 타자이다. 절대적으로 강하고 스스로 완벽한 자아인 화군악을 물리친다는 것은 독립적인 완전한 자아 성립의 징표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 성립 이야기는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무협소설에 나타나는데, ‘태극문’은 그 농도가 유난히 짙은 경우다.

 

좀더 생각해보자. 가령 대만 작가 워룽성(臥龍生)의 작품 속 자아는 주어진 질서에 대한 무반성적 순응을 통해 형성되는 데 비해, ‘태극문’의 자아는 주어진 질서의 정당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탐색하며 스스로 새롭게 형성해나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조자건은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무도를 위해서 자신도 모르는 새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할 줄 안다. 또한 조자건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게 있어 그건 분명 진실이오”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주관이 있다.

   

‘진정한 마인(魔人)’이라는 개념도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조자건이 보기에 집마부(集魔府)의 두 부주는 “자신이 추구한 바를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들”이고, “간악한 술수를 쓰는 효웅이나 뒤에서 남을 헐뜯는 소인배들과는 전혀 다른 마도인들”인 것이다. 조자건이 존중하는 가치는 중산층적 속물성과는 정반대이다. 주관적 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근거로 한 자유가 그것이다. 그러니 조추음이 조자건을 두고 “그는 마치 자유인 같아”라고 평하는 것은 썩 적절한 표현인 셈이다.

 

 

낭만적 무협영웅 자서전

‘태극문’이 자아의 완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 자아는 주관적 진실과 그에 입각한 자유를 품고 있는 낭만주의적 자아다. 용대운은 한국무협소설 작가 중 구룽(古龍)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그의 작품에서 구룽의 영향은 모티프, 에피소드, 소도구, 인물, 말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 그 중 가장 심층적인 영향은 ‘낭만주의적 자아 추구’라는 주제적, 사상적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행히 용대운은 구룽의 단순 복제품은 아니다. 구룽의 낭만주의적 자아는 비관주의와 비극적 정서에 젖어 있는 데 반해 용대운의 낭만주의적 자아는 튼튼한 낙관주의 위에 서 있다. 용대운에게 있어 ‘낭만주의적 자아’란 확고한 신뢰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용대운을 구룽보다 ‘나이브하다’고 평할 수는 있겠지만.

 

무의미한 복수극 ‘마검패검’

그렇다면 초기의 용대운은 어떠했을까?

첫 작품인 ‘마검패검’은 1988년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보아도 참신함이 느껴지는, 썩 잘 쓴 작품이다. ‘마검패검’ 역시 복수 이야기와 무도 완성 이야기를 둘 다 포함하고 있지만 ‘태극문’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복수나 무도 완성의 가치로부터 한 발 비켜 있거나, 그에 반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야기는 맹인 소년 전옥심(錢玉心)이 석벽에 천 개의 불상을 조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전옥심은 하인 신분으로 주인댁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대가로 두 눈을 잃은 아픈 과거를 가졌다. 그러나 전옥심의 천재적 재질을 알아본 천기구사 주자앙이 그를 구해주고 무공을 가르쳤다.

그런데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인 주자앙은 친구의 배신으로 두 다리와 한 팔, 그리고 한쪽 눈을 잃은 상태다. 한 맺힌 스승과 한 맺힌 제자가 만난 것이다.

 

전옥심은 감각도(感覺道)를 배우고, 이식 수술을 통해 시력을 되찾고, 여덟 가지 검법을 배웠다. 그후 괴노인이 남긴 일천영(一千影)이라는 초식과 주자앙이 창안한 단심혈한(丹心血恨)이라는 초식까지 배우고 나서 전옥심은 7년 만에 비로소 무림에 출도한다. 그러한 전옥심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여러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전옥심은 십자맹이라는 비밀조직과 대결하게 된다. 그 기나긴 대결 과정에서 전옥심은 무수한 살육을 행하게 되고, ‘검마(劍魔)’라는 별호를 얻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개의 대결이 더 주어진다. 하나는 옛 애인의 남편인 위종산을 청부 살해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라이벌인 화산파의 청년 고수 좌백(1995년부터 활동한 ‘신무협’ 작가의 필명 좌백과 같다. 우연인가?)과의 대결이다. 이 두 대결은 내용상 십자맹과 연결되므로 결국은 하나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긴 대결의 여정 중간에 전옥심은 석무군(두 사람이 부자간임이 밝혀진다)을 만나 괴노인이 남긴 일만뢰(一萬雷)라는 초식과 석무군이 창안한 우주만리붕(宇宙萬里崩)이라는 초식을 배운다. 또 전옥심은 종리을진을 만나 괴노인이 남긴 일광혼(一光魂)이라는 초식과 종리을진이 창안한 격수검형(擊水劍形)이라는 초식을 배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태의 전모가 밝혀진다. 종리을진의 사부이며 십자맹주 남궁진웅의 아버지이고 지난 백년 동안 천하제일검인 남궁산의 호승심이 십자맹과 관련한 모든 비극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일천영, 일만뢰, 일광혼은 천 년 전 무적 고수였던 검신(劍神)의 무공이었고 남궁산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세 인재에게 그 세 가지 검초를 꺾을 수 있는 무공을 창안하도록 자극을 주려 한 것이었다. 자신이 창안한 무공과 비교해보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결국 남궁산과 전옥심의 대결이 벌어지고 이 대결에서 전옥심이 승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종결된다.

‘마검패검’은 왜 복수 이야기에서 비켜서 있는가. 첫째는 전옥심이 자신을 해친 위종산과 오상에게 복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십자맹과 관련한 모든 원한이 남궁산이 조작한 결과임이 밝혀지면서 복수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1994년 낭만주의적 무협소설 ‘태극문’을 PC통신에 연재하면서 ‘신무협’ 시대를 연 용대운.

또 ‘마검패검’은 왜 무도 완성 이야기에 반하는가. 그것은 남궁산의 호승심이 일종의 완성 추구라고 할 때 그 완성은 반인간적이며 덧없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남궁산의 완성 추구에 대응하기 위해 이뤄진 전옥심의 완성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똑같이 덧없는 것으로 착색된다.

 

결말에서 이뤄지는 것은 완성이 아니라 맺힌 한이 풀리는 것이다. “따가운 햇살이 그의 전신을 따사롭게 비춰주고 있었다”는 마지막 문장은 평범하긴 하지만 해한(解恨)의 이미지로서는 더없이 적절하다.

그밖에 ‘마검패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에 사용된 부분적 기법과 장치이다. 우선 전옥심과 십자맹 사이 대결 과정 곳곳에 삽입된 추리소설적 에피소드가 눈길을 끈다. 또 사제간 혹은 형제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전옥심과 제일비의 관계, 영웅대회라는 장치, 무공 습득과정에 대한 자세한 묘사 등이 눈길을 끈다. 이러한 특징은 용대운의 이후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초기작도 낭만주의 드러내

두 번째 작품인 ‘철혈도’에서는 복수 주제가 전면에 드러난다. 주인공 유철심(劉鐵心)은 형 유철악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무림에 출도해 복잡한 내막과 음모가 개재되어 있는 형의 죽음의 비밀을 알아낸다. 그리고 유철심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뒤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다. 여기서 유철심의 복수는 무림의 대세를 결정짓는 싸움과 겹친다.

 

세 번째 작품인 ‘유성검’은 더욱 집중적인 복수 이야기이다. 주인공 조무상(曹無傷)은 최고의 솜씨를 가진 직업 살수로, 살인청부업으로 돈을 벌어 불치병을 앓고 있는 누이동생의 약값을 댄다. 조무상 남매의 불행은 천하제일고수로 유명한 소대진 암살을 맡은 데서 비롯된다. 소대진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지만 살인청부 자체가 음모였던 탓에 조무상은 마도(魔道)의 비밀조직 구중천(九重天)의 공격을 받아 누이동생을 잃고 자신도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 다음 구중천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다. 작가는 ‘소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모티프를 미국 대중소설인 퀸넬의 ‘불타는 사나이’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불타는 사나이’는 외인부대 출신의 크리시를 주인공으로 한 연작소설 ‘크리시’의 첫 번째 작품이다.

 

‘탈명검’ 역시 집중적인 복수 이야기이다. 주인공 임무정(林無情)은 대장간 일꾼으로 무림 제일의 가문인 화씨세가 외동딸과 연애를 하다 그 때문에 감옥에 종신 수감된다. 10년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임무정은 북해(北海)로 건너가 전설로 전해지는 ‘북해의 검’을 얻는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중원으로 돌아온 임무정은 복수를 시작한다. 연애가 문제되었다

는 점에서 ‘마검패검’의 전옥심과 ‘탈명검’의 임무정은 비슷하다. 그러나 전옥심의 옛 애인이 자살하는 데 비해, 임무정의 옛 애인은 임무정에 대한 애정 때문에 고뇌하며 임무정과 정사를 나누는 점, 더구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는 점 등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철혈도’ ‘유성검’ ‘탈명검’의 세 작품에도 ‘무도 완성’이라는 모티프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도의 완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단지 복수를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정리해보자. ‘마검패검’은 복수와 무도 완성이라는 두 개의 모티프가 서사의 중심 축이지만, 실제 이야기는 복수와 무도 완성에서 비켜서 있거나 혹은 오히려 반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에 비해 ‘철혈도’ ‘유성검’ ‘탈명검’ 등 후속작에서는 무도 완성의 모티프가 훨씬 약해지는 대신 복수 모티프가 전면에 대두된다. 그렇다면 이 네 작품을 다른 방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중요한 것은 복수 그 자체가 아니라, 복수의 동기가 되는 피해의 경험일 수 있다. 피해의 경험으로 인해 한을 품는다는 것, 한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강력한 의지를 갖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은 특히 평범한 하인이었던 전옥심과 대장간 일꾼 임무정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유철심과 조무상 같이 본래 굳센 기질을 갖고 있던 인물들 역시 한층 더 강력한 의지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보면 용대운의 작품들은 의지에 대한 이야기, 즉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일을 추구하여 마침내 달성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달성’은 개인적 복수와 겹쳐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무림을 지배하는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내용으로 한다. 이 싸움의 승리는 주인공이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며 개별적 자아를 세운다는 것을 뜻한다. 주인공들에게는 스스로 새로운 지배 권력이 되고자 하는 의도나 욕망이 전혀 없다. 이 점은 야설록의 다수 작품들과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이다.

 

이렇게 보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용대운의 초기작 역시 ‘태극문’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 자아 추구라는 주제를 바탕에 깔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태극문’으로 돌아가보자. ‘태극문’은 ‘무도의 완성’이라는 모티프를 중점적으로 드러내면서 평범이 완전해짐으로써 비범을 얻는다는 새로운 발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밖의 작품 특징들은 초기작의 연속선 위에 있다. 추리소설적 에피소드의 빈번한 삽입, 무공 습득의 상세한 묘사, 영웅대회라는 장치 등이 그렇다. 또 ‘진표’라는 친구는 ‘철혈도’에서는 진등으로, ‘유성검’에서는 임표로, ‘탈명검’에서는 사마백혼으로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주인공들이 고독, 허무, 우울, 집념, 현명 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무도의 완성’이 핵심적 모티프가 된다는 점, 그리고 ‘평범이 완전해짐으로써 비범이 된다’는 발상은 ‘태극문’의 독자적 성취로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같은 낭만주의적 자아 추구라고 해도 그 질(質)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태극문’은 용대운 무협소설이 한 단계 도약했음을 시사해주는 작품이다.

 

새로운 영역 개척이 과제

그러나 ‘태극문’ 이후 씌어진 ‘독보건곤(獨步乾坤, 1995)’은 초기작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몰살당한 노가살수문(路家殺手門)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인의 눈을 가진’ 고독한 주인공 노독행(路獨行), 무쌍류(無雙流)라는 고도의 실전무예 습득, 천상회(天上會)와 포호산장(抱虎山莊)이라는 거대 세력과의 싸움, 허무와 퇴폐에 빠진 동방립과의 교우, 모용추수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가문의 원수이자 사부의 적수인 무림의 지배자 동방유아와의 대결, 최종적 승리 이후 북해로의 귀환…. 초기작들에 비해 서사에 훨씬 짜임새가 있어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이 무협소설은 초기 작품세계의 반복에 불과하다.

 

용대운의 최근작 ‘군림천하(君臨天下, 2001)’와 인터넷에 연재중인 ‘영웅시대’를 아직 읽지 못했기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독보건곤’ 이후 용대운은 소위 편역 작업(중국무협소설의 재번역)과 공저 작업(신인작가와 이름 함께 걸기), 그리고 출판 사업 등에 치중하면서 작가로서의 새로운 영역 개척에 별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全炯俊
●1956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중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중국문학)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충북대 중문과 교수, 서울대 중문과 교수(1999년∼ )
●저서 : ‘현대중국문학의 이해’ ‘현대 중국의 리얼리즘 이론’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지성과 실천’(문학평론집) 등

이는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검패검’에서 ‘태극문’까지 이르렀던 그의 행보가 계속된다면 본격적인 ‘신무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용대운의 ‘태극문’과 하위주체의 실존주의로 요약되는 좌백 사이는 실로 한 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 아닌가. 그러나 그 한 걸음 사이에 존재하는 생활 세계, 삶의 세계를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문학 안에 융합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