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로 마당 쓸지 말라, 타고 날아라!
낮에 기분 상한 일이 있으면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기분이 나쁜 이유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분 나쁘더라도 그 원인이 명확하면 잘 잘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원인이 분명치 않으면 잠을 못 이룬다.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일어났지만,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고민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한 원인을 찾는 행위는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국 남자들이 모여 앉으면 군대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건, 즉 ‘내가 왜 그 찬란한 젊은 날을 군대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보내야 했는가’에 대한 의미를 찾는 행위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틀에 박힌 대답으로는 의미가 그리 잘 부여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군에 가지 않는 나라도 많기 때문이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특별한 사유 없이 군에 안 가는 사람이 많다.
‘누구나 가는 해병대라면 해병대에 지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 이들도 있다. 정말 황당하다. 그러나 동네마다 해병전우회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일만 터지면 모이는 해병전우회의 단결력은 나름대로 그런 식의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내에게 군대는 평생 해결되지 않는 주제다. 그래서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에서 군대 문제는 빠지지 않고 논란이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주제도 군대 문제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남자들도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동네 예비군 의식수준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그렇게 싫어해도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끝이 없다. 특히 군대 축구 이야기는 군을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레퍼토리다. 내 군대 축구이야기도 한 편 보태고 싶다. 나는 원래 축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운동신경도 둔하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내가 갑자기 엄청나게 훌륭한 축구선수가 됐다.
그때, 강원도 화천 북방 백암산 철책 아래에서는 ‘보름달빵’과 ‘베지밀’ 내기 중대대항 축구 경기가 주말마다 열렸다. 내가 처음부터 경기에 출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반드시 경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팀이 지고 있을 때에만 나는 운동장에 교체멤버로 투입됐다. 그것도 꼭 끝나기 10분 전이었다. 그만큼 나는 마지막에만 쓸 수 있는 히든카드였던 것이다. 내가 운동장에 들어서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였다. 상대편 고참의 발을 공과는 상관없이, 냅다 걷어차는 일이었다. 느닷없는 발차기에 열 받은 고참은 바로 나를 패기 시작한다. 우리편 고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떼로 몰려와 그 고참을 팬다. 그러면 상대편 고참들도 우르르 뛰어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패싸움이 일어나 경기를 ‘파투’시키는 것이 내 임무였다. 참 여러 번 했다.
위대한 기업의 조건 ‘뻥 앤 구라’
제대 후 30년 가까이 나는 이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느닷없는 강제징집으로 어떠한 의미부여도 불가능했던 내 젊은 날을 이런 식으로라도 이야기해야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흥미로운 것은 꼭 의미가 부여돼야만 위로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한다는 행위 자체로도 우리는 큰 위로를 얻는다. 그래서 전문 카운슬러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방법이다. 내담자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까닭이다.
이야기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운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우리 아버지들이 1·4후퇴 때 동생들 등에 업고 눈바람 맞으며 피난 떠난 이야기, 우리 어머니들이 강냉이죽 끓여먹어 누렇게 뜬 상태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가 끝없이 되풀이되지 않는가. 자녀에게 무슨 교훈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 까닭 없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반복해도 의미를 그리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토록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런 심리적 과정을 직접 경험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의미요법(logotheraphy)이라는 새로운 정신치료법을 만들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과거의 기억이란 모두 이런 식의 이야기 만들기, 즉 스토리텔링의 결과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들이 개인사에 관한 기억을 구성하고, 평생 반복해 재생산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에 따라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한 개인사의 재구성과 민족, 국가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그 생성문법이 동일하다. 고대의 역사란 이전부터 구전되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활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단일민족론’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역사가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고, 의미를 구성하기 위한 이야기꾼들의 스토리텔링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스토리가 풍부하다. B&G Company, 즉 크고(Big) 위대한(Great) 기업의 조건은 B&G다. 두 번째 B&G는 ‘뻥&구라’의 약자다. 크고 위대한 기업의 이니셜과 ‘뻥 앤 구라’의 이니셜이 같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뻥 앤 구라’는 위대한 기업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요즘 위대한 글로벌 기업들, 예를 들어 GE나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들여다보자. 위기의 순간을 극복한 최고경영자의 리더십, 신상품 개발과정에 관한 신화, 직원들의 헌신 등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 광고로 부활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 관한 이야기는 참 다양하다. 이젠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버린 “해봤어?”와 같은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삼성 이병철 회장, 포스코 박태준 회장에 대한 일화들은 그 기업과 관계없는 일반인에게조차 익숙하다.
낚시꾼들이 놓친 고기
이야기가 없는 기업은 위대한 기업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과거의 영웅신화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지금 할 이야기가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반복해서 재생산할 수 있는 의미부여의 과정이 없다는 뜻이다. 꼭 위대한 영웅신화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회사 구석구석에서 아주 작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회자될 때, 그 회사는 살아 있는 회사가 된다. 그러나 직원들이 모여 앉아 어젯밤 술자리 2차 갔던 이야기, 필름 끊어진 이야기, 상사 욕하는 이야기나 나누는 회사는 곧 망한다. ‘남의 돈 따먹기’ 위해 일하는 이들만 있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에 대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것은 사는 재미가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모여 앉으면 누가 아파트 팔아서 돈 번 이야기나 주고받는 삶은 삶이 아니다. 자기가 찾은 작은 즐거움에 관해 가슴 벅차올라 이야기를 나누는 삶이 진짜다. 대통령이 어떻고, 국회의원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진짜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날씨 이야기만큼이나 허망한 이야기다.
낚시꾼들의 이야기는 늘 자기 이야기다. 그래서 참 즐겁다. 모여 앉으면 놓친 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놓친 고기는 언제나 팔뚝만하다. 그 찌의 움직임, 그리고 손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함에 대한 자세한 서술. 그리나 모두 다 끌고 와서는 눈앞에서 놓쳤다고 한다. 그 팔뚝만한 놈을. 그러곤 한 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잡아 표시하며 흔든다. 그러나 모두 다 안다. 그가 놓친 고기가 사실 손바닥만한 놈이었음을.
그럼에도 이 단순한 스토리 구조는 언제, 누가 해도 흥미롭다. 서로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낚시의 본질이다. 꼭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는 것만 낚시가 아니다. 낚시가 주는 정말 큰 즐거움은 놓친 고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도 많은 낚시꾼이 낚시 TV 앞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듣는다. 한 시간 내내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그 황당한 프로그램을.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창조적 행위의 조건이자 결과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모든 창조적 행위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스토리텔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 구성의 원리를 이해하면 창조적 행위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기업에서 그토록 목말라 하는 창조경영의 본질 또한 이 스토리 구성 과정을 이해하면 아주 간단해진다.
일단 단어의 의미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창조경영’이란 단어는 엄밀히 말해 그리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엄밀히 말해 창조라는 단어보다 ‘창의’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의미상 정확하다. 그러나 언어의 프래그매틱스, 즉 화용론(話用論)적 관점에 따라 창조경영을 창의성의 개념으로 이해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다.
창조경영의 본질, 스토리텔링
창조경영에 대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네이버의 지식인에 들어가 검색해봤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특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창의성이 정의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 아니 도대체 그런 것을 어느 누가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일단 머릿속에 떠올라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려면 어디선가 본 적은 있어야 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행위를 심리학에서는 ‘표상(representation)’이라 한다. ‘보여주다’의 ‘presentation’ 앞에 ‘다시’를 의미하는 ‘re’를 붙인 것이다. 즉 생각한다는 것은 어디선가 본 것을 머릿속에 ‘다시 보여준다’라는 의미다. 머릿속에 무언가를 다시 보여주려면 어디선가 본 적은 있어야 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절대 처음 보는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생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징과 문장. 예를 들어 내가 “창조경영이란 표현은 틀렸어”라는 식으로 중얼거릴 때, 내 생각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고는 논리적으로, 즉 문장으로 그 틀린 내용을 서술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망사 스타킹’을 떠올린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내 생각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망사 스타킹이라는 상징으로 매개된 일련의 장면, 예를 들면 ‘빨간 망사’ ‘파란 망사’ ‘찢어진 망사’ 등을 떠올린 후, 비로소 나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내 의견을 문장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견조차 논리적 서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타지에 근거한 생각이다. 예를 들면 ‘구멍이 큰 녹색 망사 스타킹을 신은 여성이 왠지 사랑스럽다’와 같은 아주 황당한 이야기를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사고의 과정을 가능케 하는 문장과 상징을 러시아의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생각의 도구’ 또는 ‘기호(記號)적 매개(semiotic mediation)’라고 정의한다. 사용되는 도구에 따라 사고방식도 달라진다는 것이 비고츠키 문화심리학의 핵심내용이다.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 사람과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사고방식을 매개하는 매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고츠키의 이론을 좀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알파벳 문자, 즉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민족과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의 사고체계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표의문자(상징)로 매개되는 사고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축약적이고 다의적인 반면,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로 매개되는 사고체계는 논리적이고 명확한 의미전달에 유리하다. 예를 들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와 같은 선문답은 알파벳 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인에게는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이 황당한 문장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며 심각해하는 동양인들이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황당한 문장에 관해 동양인들은 오늘도 참 많은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산이 물이 되지 못하고, 물이 산이 되지 못하는’ 존재의 본질로부터 ‘산은 산이고, 물은 셀프다’에 이르기까지….
중세까지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국이 근대발전에 뒤지고, 서양에 형편없이 당한 것은 그들의 표의문자가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매개하기에는 너무 다의적이고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이 근대 이후 서양의 근대성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중국을 제치고 동양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를 동시에 사용하며,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편의에 따라 사용하던 일본인들의 언어습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서양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번역하기에 아주 좋은 실용적인 문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상징적 사고 vs 논리적 사고
합리적 사고에 근거한 과학적 세계관의 근대사회에서는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21세기엔 상황이 사뭇 달라진다. 세계가 탈중심적인 네트워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황한 근대주의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후기근대’라고 한다. 여전히 근대의 연속성으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탈근대’라고 한다. 더 이상 근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탈근대’이든, ‘후기근대’이든, 세상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다의적이고 상징적인 사고가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21세기 들어 아시아가 새롭게 주목받는 것이다. 서양은 말 그대로 해가 지는 서쪽일 뿐이다.
전세계에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를 동시에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근대 이후, 한국과 일본이 이룬 그 유례없는 발전과 두 나라가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두 나라의 언어, 즉 사고의 도구가 특별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얄미울 만큼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전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글’ 때문에 어렵게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 있다. 사고방식의 거대한 두 축, 즉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아주 쉽게 사용할 수 있음에도 한 쪽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오렌지’냐 ‘오륀지’냐 와 같은 영어몰입교육 논쟁은 정말 미시적이고 철없는 이야기다.
표의문자, 표음문자에 관한 이야기를 요즘 젊은이들에게 피부에 닿게 설명하려면 컴퓨터에 비유하면 된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차이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 GUI)의 애플컴퓨터와 도스(Disk Operating System, DOS)에 기반을 둔 퍼스널컴퓨터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는 기본적으로 문장형 명령구조를 사용한다. 그러나 애플컴퓨터의 그래픽 운영체계는 컴퓨터 화면상의 상징들을 마우스를 통해 움직이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상징체계에 의존하는 표의문자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빌 게이츠의 도스는 문장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근대적이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상징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탈근대적이다. 그래픽과 동영상 같은 상징으로 매개되는 디지털 환경에서 애플이 유리함은 당연하다. 빌 게이츠가 윈도즈라는 운영체계를 뒤늦게 도입해 애플의 운영체계를 흉내 내지만, 그 내재적 사고방식의 차이를 좁힐 수는 없었다. 윈도는 무늬만 상징적 언어일 뿐, 기본적으로 문장언어인 도스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요즘 애플 사용자들과 윈도즈 사용자들의 사고유형 차이를 연구 중이다.
빌 게이츠 vs 스티브 잡스
운영체계의 수준이 한참 뒤떨어진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단지 규모의 경제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싸움은 홈비디오 시장의 소니와 마쓰시타 간의 싸움과 비교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훨씬 뛰어났던 소니의 베타 방식이 마쓰시타의 공격적 시장정책에 밀려 VHS로 비디오시장이 통합된 것처럼, 미래지향적인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적극적 마케팅 전략에 밀려 지난 10여 년간 엄청나게 헤매게 된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차이는 그들의 스토리텔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2005년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며 연설한다. “늘 갈망하라. 늘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로 유명해진 이 연설은 사실 잘 들여다보면 스티브 잡스의 ‘꼬인 속’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자신의 출생과정에 관한 이야기, 애플에서 쫓겨난 이야기, 암에 걸렸던 이야기 등 온통 괴로웠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한술 더 뜬다. 자신의 가장 훌륭한 판단이 대학을 집어치운 일이라 하고, 짧은 대학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여기는 일은 서체 과목을 들었던 일이라는 등 미국 최고 대학의 교수와 졸업생들의 자부심을 밟아버리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것도 그 자랑스러운 졸업식장에서. 그리고 늘 ‘배고프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라고 빈정대듯 조언한다.
빌 게이츠는 전혀 다르다. 그는 중퇴한 지 32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따는 것에 너무 기뻐한다. 그리고 앞으로 빌 게이츠 재단 일에 몰두해 질병과 가난을 퇴치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한다. 하버드대 졸업생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 많이 베풀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을 역설한다. 그리고 30년 후에 모교를 찾았을 때, 얼마나 성취했는가보다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하버드 졸업생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성취를 빌 게이츠의 스토리를 통해 다시 확인한다.
얼마나 대조적인 스토리텔링인가. 스티브 잡스의 동력은 결핍과 열등감에서 나온다. 빌 게이츠의 힘은 여유와 풍요로움에서 나온다. 잡스의 연설은 정서적 충격으로 가득하다. 청중은 그의 고통에 공감한다. 그러나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반면 게이츠는 논리적이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기본 논리에 충실하다. 청중은 그의 논리에 차분히 따라간다. 빌 게이츠는 문장으로 매개되는 논리적 사고를 하는 반면, 스티브 잡스는 상징으로 매개된 사고를 한다.
새롭게 보기, 낯설게 하기
기업의 창조성과 관련지어 본다면 빌 게이츠는 더 이상 창조적일 수 없다. 아니, 이전에도 별로 창조적이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장사꾼일 따름이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고통스러운 창조자다. 그의 ‘더러운’ 성격은 아주 유명하다. 빌 게이츠는 위선(僞善)적이고, 스티브 잡스는 위악(僞惡)적이다. 좌우간 둘은 여러 가지로 아주 흥미로운 비교대상이다.
창조, 혹은 창의성이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다. 다 있는 것, 다 아는 것을 새롭게 느끼는 능력이다. 이를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자 격인 슈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Ostrarenie)’라고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영향 아래서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이론을 발전시킨 독일의 브레히트 또한 창의적 예술작업의 특성을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라고 정의한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여 소외시킬 때, 현상을 새롭게 창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예술적 목적이 비로소 이뤄진다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진1’을 보자. 이 사진의 제목을 ‘시상식’이라고 붙인다면, 우리는 사진의 윗부분만 보고 넘겨버릴 것이다. 시상식의 전형적인 장면인 꽃다발, 그리고 시상자와 선수들 정도로 인식하고 넘겨버린다. 하지만 제목을 ‘아주 난감한 시상식’ 이라고 붙일 경우,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사진을 인식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난감해? 뭐가?’ 하며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한참을 훑어보다 비로소 알아챈다. 남자 선수들의 튀어나온 그 부분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시상하는 이의 눈길도 그 쪽을 향해 있다. 그냥 시상식이라고 했을 때는 눈에 띄지 않던 부분들이 새롭게 보인다. 창의력이란 이렇게 일상의 자동화한 인식체계를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낯설게 하기’는 시대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21세기의 ‘낯설게 하기’란 과연 어떤 방식일까? 21세기의 시대적 조건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21세기를 ‘지식기반사회’ ‘정보화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21세기를 시작하며 각 기업에서는 ‘지식경영’이 화두였다. 21세기 경영의 핵심은 노동력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관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정보’이고 무엇이 ‘지식’인가. 지식과 정보를 이야기하기 전에 ‘자극’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기초 단위는 ‘자극’이다.
세상에는 무한대의 자극이 존재한다. 작은 내 연구실 안에도 무한대의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 이 모든 자극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 정신병자가 된다. 청각적 자극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는 무한대의 청각적 자극이 존재한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 소리, 음악 소리…. 이 모든 청각자극을 다 받아들이면 우리는 아마도 자동차와 부딪치거나, 옆 사람의 발을 밟거나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극만 받아들인다. “불이야!” 하는 소리는 아무리 주위가 시끄러워도 잘 들린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자극이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자극의 선택적 지각’이라고 부른다.
정상과 이상의 차이는 이미 받아들이는 자극에서 나타난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을 둘러싼 자극 중에서 부정적인 자극만 받아들여 확대 해석하는 사람이다. 반면 행복한 사람은 자극을 받아들이는 습관 자체가 다르다. 부정적인 자극은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긍정적인 자극은 부풀려 받아들인다. 최근 긍정심리학을 부르짖는 미국의 심리학자 셀리그만은 ‘학습된 행복감’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젊은 시절 정리한 ‘학습된 무기력’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꼭 필요한 것에만 주목
‘사진2’는 이러한 자극의 선택적 지각 원리를 기막히게 이용한 광고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여인의 하체에 놓인 아이팟을 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봐야만 했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다. 인간은 동물이다. 모든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상대의 성기만 눈에 들어온다. 발정기 동물의 성기는 그래서 묘한 향기를 내거나 모양이 변한다. 수컷이 암컷의 배란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 특히 남자는 매일같이 발정기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적 환상에 젖는다. 따라서 여성의 나체를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성기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이는 거의 동물적 본능이거나 무의식적 차원이다. 그 자리에 아이팟을 갖다놓은 것이다. 이 아이팟은 보지 않으려 해도 볼 수밖에 없다. 정말 기막힌 광고다.
우리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정보란 ‘의미가 부여된 자극’이다. 그러나 정보는 혼자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언제나 다른 정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런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지식이다.
‘사진3’은 지식과 정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1975년의 검은 덩어리 그림은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2006년의 가느다란 그림을 옆에 붙이면 우리는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막막한 느낌의 그림에 마지막으로 플레이보이 광고를 뜻하는 아래쪽 토끼그림이 포함되면 이 둘의 관계는 비로소 명확해진다. ‘아!’ 하고 그림의 의미를 바로 알아채는 이는 ‘야동’을 많이 본 사람이다. 이 분야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파악되지 않는 이들은 이 분야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사람이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은 들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거참, 그래도 이해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힌트를 더하겠다. 2006년에 나오는 비키니는 가는 끈 정도다. 그러니 면도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배꼽 잡는 ‘동물 고스톱’
지식이란 이렇게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렇게 형성된 지식은 더 높은 단계의 지식에서는 하나의 정보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이를 일러 메타 지식이라고 한다. 새로운 지식이란 이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익숙한 정보들 사이의 관계가 낯설어지는 것이다. 창의성이란 이렇게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달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것, 즉 정보의 맥락을 낯설게 바꾼다는 이야기다.
어른들은 빗자루를 보면 청소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빗자루는 청소하는 다양한 도구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빗자루를 주면 아이들은 절대 청소하지 않는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시늉을 한다. 빗자루의 정보적 맥락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이야기로 만든 ‘해리포터’ 시리즈가 벌어들인 돈은 상상할 수 없는 액수다. 정보와 정보의 관계, 즉 빗자루의 맥락이 바뀌는 이야기로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다는 뜻이다. 21세기는 이런 세상이다.
그러면 왜 아이들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갈 생각을 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아이들은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재미있을 생각. 재미있으면 저절로 창의적이 된다. 재미는 항상 새로운 맥락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화가 재미있는 까닭은 내 현실과 다른 맥락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축제가 즐거운 이유는 내 지겹고 낡은 일상을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를 하려고 해도, 바위는 가위를 이긴다는 가상의 맥락을 끌고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부모들은 빗자루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지저분하다고 쥐어박는다. 그리고 학교로 보내 ‘사회화’시킨다. 이렇게 사회화한 아이들은 다시 우리처럼 아주 재미없고 우울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
재미는 이야기를 만들고, 낡고 진부한 정보를 새로운 맥락에 넣는다. 그 사는 게 재미없는 한국의 아저씨들도 재미있으려 노력하니 너무나 창의적이 되는 것을 보았다. 혹시 ‘동물 고스톱’이라고 들어봤는가. 아저씨들이 할 줄 아는 놀이라고는 고스톱밖에 없다. 그런데 매일 똑같은 고스톱이 재미없어진 거다. 그러자 이 아저씨들은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기존의 고스톱 게임 이외에 화툿장의 동물숫자를 가지고 돈 따먹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고스톱은 고스톱대로 하면서 내가 모아놓은 화툿장에 그려진 동물 숫자가 다섯 마리가 될 때부터 ‘쩜 천’이면 1점에 1000원씩 주기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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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비광’과 ‘팔자 십짜리’를 가져왔다. 그러자 내 친구가 1000원을 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동물은 네 마리(두꺼비하고, 기러기 세 마리)밖에 없는데 왜 1000원을 주냐고 하자, 내 친구는 ‘사람’(비광의 우산 든 사람)도 ‘동물’로 친다고 했다. 화투에 동물이 귀해서 그런단다. 한 바퀴 더 돌아 내가 팔광을 가져오자 내 친구는 쩝쩝거리며 또 내게 1000원을 주는 것이었다. 왜 또 1000원을 주느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팔광에도 동물이 있단다. 도대체 무슨 동물? 토끼란다. 달 속에 그 토끼!
정말 어마어마한 상상력 아닌가. 어릴 적, 누나하고 손 맞추며 부르던 그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의 그 토끼가 달에 있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별건가. 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는 능력이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그 아저씨들도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고스톱이 지루해 좀 더 재미있게 놀아보려니 이토록 엄청난 창의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재미있으면 저절로 창의적이 된다. 한국 사회가 창조적 사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없기 때문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 문제, 경제 문제가 아니다. 사는 게 재미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게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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