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터가이스트’ 현상 그가 나타나면 사고가 난다”“
귀신놀이 같은 이 현상 때문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울리는 원자폭탄 개발계획에 참여하지 못했다.
1973년 상영된 할리우드 영화 ‘엑소시스트(The Exocist)’의 도입부. 주인공인 어린 소녀의 방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자 소녀의 어머니가 운전기사에게 딸의 방에 쥐덫을 놓아달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시간이 흐른 후 침대가 움직이고 문이 저절로 여닫히는 등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딸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결론을 내린 어머니는 신부에게 부탁해 엑소시즘(exocism), 즉 구마의식(驅魔儀式)을 치르도록 한다. 이 공포영화는 소녀에게 일어난 현상이 악령들림이라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 허구지만, 유사한 현상이 종종 현실에서 발생해 화제가 되곤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림 소리가 나거나 가구가 저절로 움직이는 등의 현상을 독일어로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라고 한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유령’이란 뜻이다. 이런 현상은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유령의 소행으로 여겼다.
‘엑소시스트’가 상영되기 3년 전인 1970년. 영화에서와 유사하게 가톨릭 신부들이 연루된 ‘폴터가이스트’ 사건이 독일 뉘렘베르크 인근의 한 시골 마을인 푸르스루크에서 발생했다. 그해 가을 한 연립주택에서 두드림과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이 내는 소리?
그 집엔 여러 가구가 함께 살았는데, 소음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했다. 소음은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연초엔 빈도와 강도가 다소 약해지는 듯했지만, 5월 말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면서 거주자들이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에 이르렀다. 두드림 소리뿐 아니라 긁거나 톱질하는 듯한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고, 머신건을 쏘는 듯한 굉음은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집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는 일대에서 가십거리가 되었고, 지역 신문에는 원인을 추정하는 기사가 연달아 실렸다. 그러자 자칭 이런 현상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수맥 전문가들은 그 집의 지하에 흐르는 수맥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진단했고, 심령술사들은 그 집에 악령이 산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누군가 실없는 장난을 하는 걸로 의심했다. 그래서 이런 장난을 칠 만한 연령대이던 13세 헬가와 11세 안나 자매를 의심했다. 조사 초기에는 두 자매가 이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도 나왔다. 이상한 소리는 두 소녀가 그 집에 함께 있을 때 강도가 제일 셌으며, 헬가 혼자 있을 때에는 그 강도가 조금 떨어졌고, 안나만 혼자 있을 때는 훨씬 조용해졌으며, 둘 다 집을 비우면 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질 줄 모르자 그 지역 가톨릭 사제인 야콥 볼프슈타이너가 직접 나섰다. 그는 두 소녀와 그들의 부모를 인근 동네에 있는 자신의 목사관으로 데려갔고, 두 소녀를 커다란 목재 테이블에 눕혀놓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두 소녀가 테이블에 눕자마자 테이블에서 두드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둘을 목사관 바닥의 카펫 위에 눕혔는데 바닥에서도 두드림 소리가 났다. 이 조사 과정은 그들의 부모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이 입회한 상태에서 이뤄졌고 모두 녹음됐다.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볼프슈타이너 신부는 소녀들에 대한 조사를 심리치료학 박사인 하임러 신부에게 부탁했다.
하임러 신부의 보고서는 좀 더 상세한 관찰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두 소녀를 침대에 누일 경우 침대에서 두드림 소리가 들렸지만, 이들을 바닥이 폭신한 해머록에 누일 경우 두드림 소리는 잦아들었고 대신 바닥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해머록에 판자를 집어넣으면 다시 두드림 소리가 들렸다. 혹시 두 소녀가 장난으로 몰래 침대나 판자를 두드리거나 해머록 바닥을 긁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소리가 나는 동안 소녀들의 손발 움직임이 면밀히 관찰됐을 뿐 아니라 소리가 단지 그들 주변에서만 국소적으로 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의심은 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진 찬장에서도 소리가 나곤 했는데 한번은 찬장 문이 굉음과 함께 열리더니 그 안에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고 한다.
‘재발성 자발적 염력’
도대체 두 소녀를 둘러싸고 이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이 무엇일까. 신부들이 내막을 조사해보니 그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죽어서 건너편 공동묘지에 묻혔던 날 밤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죽은 이의 영혼이 이승에 미련을 갖고 두 소녀를 통해서 뭔가 알리려고 한 것일까.
스릴러 영화에서와는 다르게 신부들은 “이 사건이 어떤 원혼이나 악령과 관련됐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그것이 초심리학에서 ‘염력(psychokinesis)’이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관련자들의 무의식에 의해 생긴다고 설명했다. 그날 헬가는 창문 너머로 죽은 이가 집에서 맞은편 공동묘지로 이송되어 묻히는 장면을 봤고, 몇 달 전 선생님이 해준 유령 이야기가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 두드림 소리를 들었을 때 죽은 이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고 믿었다. 어떤 이가 침대 맡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이런 식의 스트레스가 확대 재생산되어 무의식으로 발현됐다고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초심리학적인 것으로 판정한 두 신부는 인근의 프라이베르크 대학의 초심리학자인 한스 벤더에게 좀 더 전문적인 조사를 의뢰했다. 그는 주로 심층심리학 및 초심리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벤더는 두 소녀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들의 영상을 찍었는데, 그 영상 중에는 카펫이 저절로 말리는 장면이 포함돼 있다.
벤더는 그런 증상의 완화를 목적으로 가상의 실험을 제안했다. 두드려대는 존재가 실제로 어떤 영혼이라고 가정하고 그에게 질문을 해서 두드림 횟수로 O/X를 표시하도록 했다. 두드림 소리는 이런 시도에 적절히 반응하지 않았고, 마침내 두 소녀는 장난으로 두드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더 이상 그 집에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분노가 일으킨 파괴력
오늘날 초심리학자들은 폴터가이스트를 대표적인 ‘재발성 자발적 염력(Recurrent Spontaneous Psycho-kinesis· RSPK)’ 발현 현상으로 꼽는다. 문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염력이 스스로 발현되어 지속되는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주로 사춘기 소녀들과 같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이들에게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그들의 불안정한 정서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런 현상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푸르스루크 사건이 있기 3년 전 독일 남부의 로젠하임에서 일어난 폴터가이스트 사건은 엄청난 수준의 파괴력이 동반됐는데, 그 핵심에는 역시 소녀가 연관돼 있었다. 이 사건은 가정집이 아니라 법률사무소에서 일어나 더욱 화제가 됐다. 그곳에서 갑자기 과전류가 흘러 전구가 터지고, 200kg이나 되는 무거운 파일 박스가 저절로 몇 미터나 움직이고, 달력이 저절로 찢어지거나 액자가 떨어지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게다가 누군가가 아무도 몰래 한 달 동안 수천 통의 서비스 전화를 사용했다. 10초에 한 번꼴로 유료 서비스에 접속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당시의 수동식 전화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두 물리학자 프리드베르트 카르거와 게르하트 지카가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카르거는 나중에 막스 플랑크 연구소 핵융합 실험 총괄 책임을 맡은 실험물리의 대가인데, 초심리 연구에도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그 현상이 이론물리로 설명할 수 있는 한도를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물체들의 움직임은 정체를 밝혀내기 어렵고 지능적으로 조종되는 힘 때문에 생겨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현대 물리학으로는 이 사건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고 카르거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그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두 물리학자가 자신들의 방법론적 접근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깨달았을 즈음 한스 벤더가 조사에 나섰다. 그는 곧 안네마리 슈나이더라는 19세의 여비서가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전등이 깜빡거리거나 전등이 흔들렸던 것이다. 벤더는 그녀가 자신의 직업과 직장 상사를 극도로 혐오하지만 가까스로 분노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녀는 곧 해고됐고 사무실에는 평온이 찾아왔다. 슈나이더는 그 후 옮기는 직장마다 문제를 일으켰는데,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을 하면서 그녀 주변에 이상한 현상이 더는 발생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그녀의 행적을 추적했던 벤더는 결혼과 함께 그녀가 어느 정도 정신적 강박에서 벗어나고 안정을 찾았으며, 그럼으로써 폴터가이스트 현상도 잦아들었다고 결론지었다.
자발적 염력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였던 한스 벤더는 1950년대부터 정신분석학 대가인 카를 G 융과 긴밀하게 교류했다. 융이 그를 얼마나 신뢰했던지 초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미국 듀크 대학의 조지프 라인 교수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초심리 관련 연구 내용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것일 수 있지만, 한스 벤더가 확보한 실험적 결과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융과 프로이트의 결별 암시
카를 융이 초심리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자주 일어났던 폴터가이스트 현상과 관련이 있다. 학생 시절이던 어느 날, 그가 방에 있는데 부엌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달려가 보니 통나무로 만든 식탁이 두 동강 나 있었고, 식사 준비를 하던 어머니가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또 다른 날엔 칼이 부엌 서랍 속에서 폭발해서 네 조각으로 부서지는 일도 발생했다. 어머니와 누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식탁이 쪼개진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습도가 높은 여름철이라 통나무가 저절로 갈라질 가능성도 없었다. 전문가들은 저절로 칼이 부서진 사건에 대해서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거나 무거운 망치로 내리치기 전에는 이렇게 산산조각 부서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체 응력에 의해서라면 균열이 생기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이었다. 융은 이 사건들의 원인이 어머니나 누이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재발성 자발적 염력은 그의 어머니나 누이와 무관하게 융의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그의 스승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있을 때 발생했다. 1909년 융은 프로이트의 자택을 방문해서 그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어느 날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후계자이자 양자로 삼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날 서재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융은 프로이트에게 심령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프로이트는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무시해버렸다. 이때 융은 눈의 망막이 마치 시뻘겋게 달군 쇠처럼 뜨거운 느낌을 받았고, 그 순간 책장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둘 다 깜짝 놀랐는데, 융은 순간 그 소리가 자신의 심령 능력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고, 프로이트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응대했다. 융은 프로이트를 반박하면서 그런 소리가 다시 한 번 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의 말은 적중했다. 융이 그런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눈이 데인 것 같은 느낌을 또 다시 받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가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그가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융을 맏아들로 입양하기로 공식 선언한 바로 그날,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점이 기이하다고 쓰고 있다. 융은 프로이트가 그날의 일로 기분이 크게 상해 자신을 불신하게 됐다는 기록을 남겼다. 아마도 그날의 폴터가이스트 사건은 이 둘의 결코 융화할 수 없는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리라.
“나…거기에 있었어요”
카를 융, 한스 벤더와 교류하면서 초심리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가 있다. 바로 볼프강 파울리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가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융에게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았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둘이 함께 정신과 물질의 통합 이론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이끌어 ‘자연과 심령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Nature and the Psyche)’이라는 책을 공동으로 쓰기도 했다.
그는 융처럼 재발성 자발적 염력을 발휘하면서 그때마다 징조를 알아챘던 것 같은데, 그의 이런 능력에는 특별히 ‘파울리 효과(Pauli Effect)’라는 이름이 붙었다. 파울리 본인은 자신의 그런 능력을 실재하는 것으로 굳게 믿었다. 주변의 동료들, 특히 실험물리학자들은 그의 출현 자체를 매우 두려워했다. 예를 들면 그의 친구이자 뛰어난 실험물리학자인 오토 스턴은 평생 그를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실험실의 장비들이 별의별 오작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활동 반경 안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를 가십거리로 얘기했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에겐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파울리의 놀라운 영향력에 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 다음과 같은 사례는 정말 놀랍다.
‘파울리 효과’ 피해간 맨해튼 계획
어느 날 독일 괴팅겐 대학 실험물리연구소의 한 실험실에 있는 고가의 측정 장비가 원인 모를 이유로 고장났다. 그곳은 파울리가 종종 방문했던 곳으로 그가 나타날 때마다 이런저런 사고가 났는데, 그날은 그의 부재 중에 일이 터졌다. 당시 연구소장이었던 제임스 프랑크 교수는 파울리에게 편지를 썼다. 195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프랑크 교수는 파울리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기에 편지에서 농담조로 최소한 그 사고만큼은 파울리에게 혐의가 없다고 썼다. 그런데 당시 스위스 취리히에 있던 파울리가 보낸 편지에는 아주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실험실 장비가 고장 나던 바로 그 시각, 파울리는 이론물리학자 닐스 보어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던 중에 열차를 바꿔 타기 위해 잠시 괴팅겐 역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파울리는 1940~46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과학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과 공동 연구를 했으며, 194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를 경축하기 위해 열린 한 연회에서 아인슈타인은 파울리의 업적을 자신이 시작한 연구에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평가하면서 그가 자신의 ‘영적인 아들(spiritual son)’이라고 칭송했다.
잘 알려져 있듯,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우려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최초로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한 이는 아인슈타인이었다. 당시 미국의 물리학자 대부분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진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맨해튼 계획을 주도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파울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전쟁 중이라도 누군가는 순수 이론물리를 계속 연구해야 하며 파울리가 그 적임자라고 치켜세웠다. 또 그 편지엔 파울리의 논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끼워넣음으로써 다수의 미국 물리학자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일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청도 들어 있다. 파울리가 워낙 뛰어난 물리학자라 이런 역할을 충분히 잘해낼 것이란 점에서 그가 선택됐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수긍은 가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유들로 오펜하이머가 그의 개입을 꺼렸다는 정황이 있다.
원자폭탄은 질량이 에너지와 등가라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을 만들어낸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건의했을 뿐 실제적으로 개발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미 국방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여린 성격 탓에 아인슈타인이 비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배제된 상태에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할 적임자는 아인슈타인이 학문적 후계자로 여긴 파울리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프로젝트에서 배제됐다.
수잔네 가이저는 파울리와 융의 내면 세계를 다룬 책 ‘가장 내밀한 핵심(The innermost kernel)’에서 파울리가 맨해튼 계획에서 배제된 이유 중 하나로 ‘파울리 효과’를 꼽고 있다. 악명 높은 ‘파울리 효과’를 잘 알고 있던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민감한 사안에서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돌발적인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그의 개입을 저지했다는 것이다.
한때 파울리는 자신이 맨해튼 계획에서 배제됨으로써 일종의 왕따가 된 것처럼 느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자신이 직접 연루되지 않은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원자폭탄에 의한 대량 살상에 대해 상당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이론적 연구 결과가 원자폭탄 개발의 중요한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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