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부처 머물던 불도량, 삿된 마음 디딜 곳 없구나 |
회색빛 가득한 새벽에 찾은 오대산의 맑은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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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중에서
10년 전 오대산에서 사람을 만났었다. 5월의 신새벽이었다. 절집은 졸지에 찾아든 객을 마다하지 않았다. 차 한잔으로 몸을 녹였고 ‘식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하고 온포(溫飽)에 생해태(生解怠)한다’는 말로 사람에 지친 정신을 보듬었다. 배가 고파야 도를 구할 수 있고 추워야 게을러지지 않는다는 말에 세상을 바꾸겠다며 앞장섰다가 세상을 닮아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버릴 수 있었다. 산문을 나서는 객에게 스님은 ‘내 탓이오’라는 글을 선물로 주었다. 지장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 지장암에서의 일이었다. 다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이고 사람들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보듬고 얽히며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잠이 든 그리운 사람 사는 세상은 발 아래 능선과 능선이 품은 계곡에 있을 터였다.
하늘이 그린 풍경화, 눈 덮힌 산세
산중에 어색할 정도로 큰 하얀 차돌이 선 차돌백이를 지나고 신선목이를 지났다. 여명 속에서 동과 서의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동쪽 하늘엔 온통 구름뿐이고 서쪽 하늘은 동쪽으로 모이는 구름들이 빠르게 지날 뿐이다. 사방 두루 거칠 게 없어 두루란 이름을 얻은 두루봉을 지났다. 날은 밝았지만 사위는 온통 회색이다. 동과 서의 풍경은 비로소 하나가 되었지만 세상은 온통 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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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오대산을 강릉의 명산으로 꼽으며 ‘봉우리 5개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이라 한다’ 했다. 진고개에서 구룡령까지 백두대간 능선도 높고 멀었지만 높낮이 변화는 적어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그 길을 오르고 걷고 미끄러지며 걸었다. 눈 덮인 산은 하늘이 그려낸 풍경화와도 같았다. 어느 화가도 흉내낼 수 없는 풍경은 홍천의 내면과 양양을 잇는 구룡령에서 다시 어둠 속으로 잦아든다. 노을 지는 하늘에 대간 길은 오른쪽으로 크게 휘돌고 아득히 멀리 구름 위로 우뚝 솟은 설악산 대청봉이 이제 남은 길이 멀지 않았다며 위로를 건넨다.
신선목이, 신배령, 약수산… 진고개에서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에서 만난 이름들은 사람 살았던 흔적이다 . 그 이름들은 능선 아래 깊디깊은 계곡의 끝 어디쯤 얕은 산에 기대어 “서로 미워서 잡아 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신경림, ‘산에 대하여’ 중에서) 삶을 살아내던 이들에 대한 추억이다. 가진 것 없어 나눠야만 살아낼 수 있었던 시절 그들은 능선을 가로질러 다른 마을로 오가며 가진 것을 내주고 가지지 못한 것을 구하며 서로 기대어 살았다. 삶을 살았던 시절 오대산은 성지였다. 오대산을 이루는 5개의 봉우리에는 각각 1만의 부처가 거주한다고 믿었고, 매년 초파일이면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수십 리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산을 내려와 해를 넘기고 해를 맞으며 오대산의 품속으로 다시 길을 잡는다. 오대산에 부처가 산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문수보살을 현신하기 위해 오대산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부터라고 한다. 자장율사 이후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태자와 효명태자가 오대산에 들어와 살면서 오대산에 5만의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류성중 신앙으로 발전했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대산은 월정사와 상원사를 비롯해 5대에 각각의 암자를 두어 5만 불보살을 위한 공양이 끊이지 않는다.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찰
5만 불보살이 상주하는 성지를 수호하는 나한은 산들이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우백호를 이루고 오른쪽으로는 호령봉을 이루는 장령산맥이 좌청룡이 되어 오대산을 수호한다.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 사리를 봉안했다는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북쪽 상왕봉에는 석가여래부처(혹은 미륵보살)가, 동쪽 동대산에는 관세음보살이, 남쪽 기린산에는 지장보살이, 서쪽 호령봉에는 아미타여래가 상주한다는 것이 보천태자와 효명태자의 믿음이었다. 두 태자는 불보살들을 공양하기 위해 각 대에 암자를 둘 것을 당부했다. 비록 각 대의 암자들은 세월의 흐름에 이름이 바뀌었지만 1천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굳건해 오대산이 불교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가늠하게 한다. 오대산의 일주문이 다른 절들과 달리 ‘○○산 ○○사’라는 현판 대신 ‘월정대가람’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연유도 오대산 전체를 하나의 사찰로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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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은 많은 면에서 변했다. 일주문에서 월정사까지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전나무 숲길은 인공적인 포장을 거두고 다시 흙길로 돌아갔다. 이제 1천 년 숲길의 전나무들은 포장으로 물길이 막혀 습해를 입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불행을 피하게 됐다. 월정사에서 지장암을 지나 부도밭까지는 아스팔트길이지만, 나머지 상원사를 지나 북대 미륵암까지 오르는 15km의 길은 여전히 흙길이다. 2000년대 초반 아스팔트 포장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오대산 스님들의 반대로 포장 공사는 무산됐다. 앞으로도 포장될 염려는 적은 것 같다. 이미 도로는 지방도로 지정이 폐쇄되었다. 오가는 이들이 많은 상원사까지의 길은 어쩔 수 없겠지만 상원사 앞으로 지나 북대를 지나 홍천 내면으로 이어지는 길은 무너져도 복원하지 않는 채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산을 산으로 돌려주는 일은 지난해 국립공원 수목복원사업으로 확장됐다.
울창한 산림을 자랑하는 오대산의 숲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역사가 70~80년에 지나지 않는다. “오대산 박달나무는 죽자왕자로 다 나가고~”라는 노랫말이 전할 정도로 오대산은 일제시대에 심한 벌목 과정을 거쳤다. 게다가 1960~70년대 산간가옥 정리사업을 하면서 과거의 밭과 집터에 일본 낙엽송과 잣나무 등이 집단으로 식재됐다. 산은 국립공원이지만 숲은 국리공원의 격에는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식재된 나무들도 간벌 작업을 거치지 않아 밀식으로 죽거나 자라지 못하는 폐단이 있었다. 상원사로 이르는 길에서 종종 벌목된 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국립공원 생태를 복원하기 위한 숲 가꾸기 일환이다.
일제시대 심한 벌목의 상처 치유 중인 숲
다가오는 5월이면 오대산에는 다시 축제가 열린다. 벌서 수년째 계속되는 걷기대회 행사는 자장율사가 산문을 연 지 근 1500여 년 동안 이어졌던 사람의 길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사람의 길은 자연과 함께하는 길이다. 막히면 돌고 나무가 있으면 피하여 난 그 길은 구불구불하고 기복이 있어 몸은 불편하지만 산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연의 길이다. 자연의 길은 상원사까지 이르는 비포장 자동차도로와 만나기도 하지만 주로 계곡의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의 길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쌓여 만들어진 길이라면 자동차길은 과거 울진·삼척 공비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군사용 목적으로 개설한 길이었다. 군사용 길은 잇는 것이 아니라 차단이 목적이었다. 산 중간에 개활지를 만들어둠으로써 적의 이동을 쉽게 관찰하기 위해 만든 길인 탓에 산의 중요 지점을 불필요하게 에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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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은 이제 군데군데 복원되고 있다. 자동차 흙먼지 대신 싱그러운 초록의 냄새가 넘치고, 엔진 소리 대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겨운 그 길에서 매년 5월이면 걷기대회가 열린다.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 1월31일에는 지난해의 잘못을 참회하며 삼보일배로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산길을 오르는 행사가 열렸다. 참회는 반성과 다르다고 한다. 반성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잘못을 저지르는 원인인 삿된 마음을 잘라내는 과정이 참회다. 걷기대회와 삼보일배 행사는 즐기기 위한, 혹은 일시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행사가 아니다. 자연에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는 행사다.
오대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5월의 오대산을 최고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산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이 그려내는 초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초록의 색을 만들고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아직은 겨울이다. 그러나 얼음장 밑으로도 물은 흘러 생명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일제시대 벌목장과 한국전쟁 와중에서 모두가 불타버린 참화를 거치면서 오대산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자연에 참회하고 자비를 구하는 낮은 자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대산의 핵심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소시지 작은 도막을 집어들자마자 어디선가 곤줄박이 한 마리 날아들어 손가락이 나뭇가지인 양 꽉 붙들고 단추처럼 빛나는 작은 눈으로 눈맞춤을 해온다. 불교의 성지 중의 성지인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선 아무도 저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일 것이다. 주변 나뭇가지에도 순서를 기다리는 박새와 곤줄박이 10여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 냄새에 찌든 손바닥에 새가 날아들다니…. 반갑고 기쁜 일이다. 이놈저놈 번갈아 날아들던 새 가운데 한 마리가 욕심을 내 두 발로 소시지를 움켜쥐고 날갯짓을 하다가 그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트린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곳곳에 절에서 마련해둔 새 먹이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새는 욕심을 낸 것이다. 목탁 소리 끊이지 않는 적멸보궁에서 다시 사람 세상을 본다. 적멸보궁에는 부처상을 따로 두지 않는다. 그곳엔 부처의 진성이 늘 있다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독경은 1년 365일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독경 소리를 타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간다. 기우는 해를 따라 법당 안 사람들의 허리도 쉼없이 굽어 스스로를 낮춘다.
궁핍과 불편함을 자초하는 그 삶 속에 행복이
한때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고향이기도 했던 오대산 골짜기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대산의 ‘귀자연’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궁핍과 불편함을 자초하고 있다. 왕위를 거절하고 오대산에서 초가를 짓고 스스로 낮추며 살았던 보천태자는 “화장사를 오대의 본사로 삼아 굳게 호지하고 향화를 받들면 세상이 풍요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 오대산에서 인물이 나면 세상이 화평해진다는 전설도 전한다. 자연과 종교의 본연으로 돌아가려는 오대산 사람들에게 삼보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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