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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_13

醉月 2013. 1. 28. 01:30

“輪圖에는 우주와 자연 사람의 길이 담겨 있습니다” ‘

흥덕 패철’의 전통 잇는 윤도장 김종대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바퀴 모양을 한 둥근 윤도(輪圖)는 태극을 상징하는 가운데 나침반을 중심으로 하늘의 별자리, 방위, 천간과 지지 등을 새겨 넣은 내비게이션이다. 단지 방위나 위치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와 함께 산수의 흐름까지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 역(易)의 이치와 천문학, 점술, 지리학이 그 하나에 다 담겨 있다. 윤도장 김종대(金鐘垈·78)는 ‘흥덕 패철’의 전통을 잇는 전북 고창군 낙산마을에서 홀로 윤도 제작의 맥을 이어왔다.

 

본래 허공에는 동서남북이 없는데, 사람은 한계가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어느 하늘 아래인지 늘 규정하고 확인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 위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쉽다. 자동차를 타고 내비게이션을 눌러봐도 되고,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구 위에 떠 있는 위성이 보내주는 신호로 우리 위치를 북위 몇 도 몇 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위성항법장치(GPS)를 우리는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다.

 

저 먼 하늘에서 보내준 신호로 내 위치를 알게 된다는 것은, 실감은 잘 안 나도 생각해보면 흥분되는 일이다. 그러나 윤도를 들여다보면, 현대의 똑똑하고 깜찍한 장치는 흉내도 못 낼 세계가 들어 있다.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지남철(指南鐵) 바늘이 담긴 한가운데 부분을 김종대 윤도장은 ‘태극(太極)’이라고 말한다. 태극기의 흰 바탕이 음양으로 나뉘기 전의 태극(無極이라고도 한다)을 상징하듯, 윤도의 가운데 흰 바탕도 태극이라는 말이다.

 

우주 삼라만상을 담아내다

“윤도에는 태극을 비롯해 8괘, 간지와 육갑, 음양과 오행, 24방위, 별자리 28수, 24절기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 뜻을 다 헤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김종대 장인은 윤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때 서당에도 다녔지만, 윤도의 비밀을 다 풀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침반이나 현대인이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 단지 위치나 방위만 표시하는 데 반해 윤도는 하늘의 별과 땅의 시간까지 모두 담고 있으니 이를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특히 풍수를 살피는 지관이 참고하는 ‘천산(穿山)’이니 ‘투지(透地)’ 등의 윤도 내용은 용맥(산의 흐름)과 땅의 기운을 측정하는 것이요, 풍수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분금’(分金·관을 묻을 때 위치를 정확히 정하는 것) 역시 방위가 아니라 윤도로 기맥을 정확히 측정해내는 일이니, 윤도가 나타내는 세계는 저 우주 공간부터 땅속까지, 그리고 카오스 상태의 무극의 시간부터 정확한 절기까지, 시공간을 총망라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윤도를 ‘나경(羅經)’이라 한다.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며(包羅), 천지를 날줄과 씨줄(經緯)로 조직해냈다는 뜻이다.

 

이처럼 윤도는 단순히 길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우주와 산천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 사는 인간이 자연에 맞춰 조화를 도모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그 지혜는 역(易)과 천문학, 점성술, 지리학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는 관상감에서 윤도를 제작했다.

윤도는 태극에 해당하는 한가운데 나침반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바퀴살처럼 동심원으로 퍼져 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작은 것은 3층짜리도 있고 큰 것으로는 24층까지 만들기도 한다. 중국 나경을 설명한 책에는 36층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각 층은 특별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정보 내용에 따라 층의 이름을 붙인다.

 

가운데 태극 속의 나침반이 남북을 가리키는 것은 이미 음양으로 나뉜 것이나 마찬가지니 바로 다음 칸인 제1층에는 8괘를 표시한다. 이런 식으로 각 층은 8괘와 오행, 간지, 천산, 투지, 물이 들고 나는 것(黃泉)은 물론이고 겁살과 길흉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내용이 있지만, 몇 층짜리를 만드느냐에 따라, 또 주문자의 편의에 따라 내용과 차례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어요. 특별히 몇 층에 무슨 내용을 넣어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합니다.”

 

윤도를 가장 많이 쓰는 지관들이 흔히 사용하는 윤도는 9층짜리다.(김종대는 ‘태극까지 합해 10층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9층짜리일 경우 1, 2층에는 묏자리나 집터의 향(向)을 잡는 데 필요한 정보를 넣고, 3층에는 오행의 삼합을, 4층에는 용(龍·풍수에서 말하는 산이나 능선의 흐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담는다. 5층 ‘천산’으로는 후룡(혈 뒤의 산)을 볼 수 있고, 6층 ‘중침 24산’은 배경이 되는 산수를 전체적으로 판단하는 데 쓰인다. 7,8층에는 입수와 득수의 길흉을 가늠하는 내용을 포함하며 마지막 9층은 하관할 때 망자의 사주에 맞춰 관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120분금을 새겨 넣는다. 특히 분금을 잘 맞추면 집안의 발복과 후손에서 큰 인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예부터 분금하는 것이 지관의 능력을 결정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기도 하여, 윤도로 정확한 각도를 재어야만 제대로 분금할 수 있다.

 

거북바위에 윤도를 올려놓고 남북을 확인하는 김종대 윤도장. 낙산마을 윤도는 만들어진 다음 이 거북바위에서 남북이 제대로 맞춰졌는지 확인해야 비로소 ‘흥덕 패철’로 인정받는다.

 

24층, 36층짜리 윤도는 더욱 정밀하다. 120간지에 360도수를 나누어두어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정도면 윤도와 풍수지리는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실제로 예전에는 사람이 사는 양택(집)이든 죽어서 들어가는 음택(산소)이든 풍수가의 정확한 진단 없이 함부로 터를 잡는 것은 위험한 일로 보았다. 터럭 같은 호리(毫釐)의 차가 나도 한 집안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의원보다 지관의 책임은 더욱 무거웠다. 역의 이치부터 산수의 위치와 흐름, 땅속의 맥까지 치밀하게 계산하고 연구했던 예전 지관들 입장에서는 오늘날 몇몇 지관이 윤도도 필요 없다며 그저 산수를 눈으로 훑어보고 터를 잡는 행위야말로 위험한 미신으로 보일 것이다.

 

김종대 장인이 나서 살고 있는 전북 고창군 성내면 낙산마을은 조선시대 흥덕현(興德縣)에 속했다. 조선시대 윤도를 만드는 곳은 많았지만 일찍이 흥덕 패철(佩鐵· 지관이 윤도를 몸에 차고 다니기에 패철이라고 불렀다)은 정확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흥덕 패철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인지 이 고장은 윤도와 남다른 인연을 강조한다. 우선 낙산(洛山)이라는 지명부터 그렇다. 역의 원리를 담은 괘의 원형이라 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가운데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새겨진 점이 바로 낙서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장 지형이 마치 낙수에서 나온 거북을 닮았다 하여 낙산이라 이름 붙인 듯하다.

 

 

‘흥덕 패철’의 명성 잇는 낙산마을

 

 

 

“그뿐만 아니라 마을 뒷산인 제성산에 거북바위가 있어요. 동서로 놓인 이 바위에 새로 만든 윤도를 놓으면 남북이 제대로 맞춰졌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고장에서 만든 윤도를 놓으면 잘 안 맞지만 이곳에서 만든 윤도는 꼭 들어맞지요.”

지구의 자기장은 장소와 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본래 나침반은 쓸 때마다 미세하게 조정해주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지방에서 만든 윤도의 자침(磁針)이 이곳에서 꼭 들어맞지 않는 건 큰 흠이 아니겠건만, 그래도 흥덕 사람들은 흥덕 패철에 대한 자부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김종대 윤도장과 함께 그가 만든 윤도를 들고 제성산에 올라 거북바위 위에 놓아보니 과연 남북을 가리키는 바늘이 바위와 직각을 이룬다. 거북바위 등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듯 구멍이 일곱 개 파여 있다. 이 마을과 윤도의 깊은 인연을 증명하고 싶었던 어느 누군가 팠을 법하다. 실제로 윤도의 전신이라 할 낙랑고분에서 나온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은 하늘을 나타내는 둥근 원반과 땅을 나타내는 네모난 방반(方盤)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하늘을 상징하는 원반 가운데는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고 주변에는 간지가 적혀 있다. 또 땅을 나타내는 방반에는 8괘와 10간,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28수가 새겨져 있는데, 방반 위에 원반을 얹고 돌려 북두칠성이 가리키는 지점으로 점을 쳤다. 나중에 원반 대신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국자를 놓고 돌려서 점을 쳤다. 결국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방반과 원반, 북두칠성이 하나가 되어 윤도가 완성된 셈이다.

 

낙산마을의 자부심은 이 마을의 역사와도 관계가 깊다. 전(全)씨 성을 지닌 사람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는 낙산마을에서 처음 윤도를 만든 이는 전씨였다고 하니, 마을이 생길 때부터 윤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전씨는 나중에 같은 마을에 사는 한(韓)씨에게 윤도 제작 기술을 물려주었고, 한씨는 또 서(徐)씨에게, 그리고 서씨는 다시 ‘한운장’이라 불리는 한씨에게 물려주었다가 마침내 김종대 장인의 할아버지인 김권삼에게 전수됐다.

이렇게 낙산마을은 혈연과 상관없이 재주 있는 이에게 윤도 제작기술과 도구, 나침반의 자침(磁針)을 만들 수 있는 자석 원석을 물려주어왔기 때문에 1996년 김종대 장인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열어 축하해주었다.

 

“돈 안돼도 가업으로 맥 이으라”는 백부 유언

 

나침반에 들어갈 자침을 만들기 위해 활비비(돌대 송곳)로 쇠에 구멍을 뚫고 있다.(오른쪽) 바늘을 다 만들어 아래쪽 바늘만 자석 원석에 30분간 붙여두면 남극을 가리키는 자성을 띠게 된다. 이 작은 자석 원석은 한 씨가 만주에서 구해온 것이라는데, 본래 물속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돌로 자력을 입히면 바늘이 매우 정확해진다고.

 

김종대 윤도장은 윤도를 만들던 할아버지와 둘째 백부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바로 이웃에 살던 할아버지와 백부가 작업하면 저는 어깨너머로 보면서 심부름을 했어요. 특히 백부님이 작업하던 시절, 윤도의 인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둘째 백부인 김정의 씨는 조각솜씨도 뛰어나 사대부들이 들고 다니던 부채 꼬리에 다는 선추에 들어가는 작은 윤도와 휴대용 거울을 곁들인 면경철도 만들었는데, 당시 지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멋을 위해, 또는 명품을 소장하는 기쁨으로 윤도를 곧잘 구입하던 때라 백부의 사랑방에는 윤도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고 한다.

 

“일주일씩 백부님 댁 사랑방에서 숙식하면서 기다려서 윤도를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윤도를 두세 개 팔면 땅 한 마지기는 살 수 있었으니 백부 댁은 큰 부자가 되었지요.”

백부의 아들은 윤도 제작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이 있어서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 정치에 몸담았고, 그 때문에 많은 땅도 팔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 백부 김정의의 곁을 지킨 이는 첫째 백부의 아들과 김종대 씨였다. 김종대는 당시로는 드물게 정읍 호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농협에 근무해 백부 곁에서 많이 배우지 못한 반면 종형은 백부와 함께 줄곧 윤도를 제작해왔다고 한다.

 

“종형이 저보다 더 윤도 일을 많이 하셨고 능숙하셨어요. 저는 학교 다니고 군대 갔다 오고 직장생활 하느라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요.”

그런데도 윤도 제작의 가업을 물려받은 이는 김종대였다. 종형은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김종대는 성격도 차분하고 인내심도 대단한데다 조각솜씨도 뛰어나 둘째 백부는 막내조카 김종대에게서 가능성을 본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마흔일곱 살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늦은 나이에 윤도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30년 넘도록 윤도를 연구하고, 그의 아들도 훌륭한 전수자로 키워냈으니.

“백부가 돌아가시면서 제게 유언으로 ‘비록 돈이 되지 않더라도 가업의 맥을 끊지 말고 꼭 이어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 유언이 숙제처럼 남았지만 윤도에만 매달려서는 당장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직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부의 유언을 결코 잊지 않았다. 농협에 다니는 동안 젖소를 길러 4남 1녀를 다 교육시키고, 살림이 안정되자 그는 마침내 직장을 그만두고 윤도 제작에 전념하는 제2의 인생, 어쩌면 본래 그가 가려고 했던 길을 가게 되었다.

“농협에 다니는 동안에는 주로 수리를 맡아 했어요. 할아버지와 백부가 제작하시던 윤도와 심지어 ‘한운장’이 제작한 윤도까지, 이곳 흥덕에서 만든 윤도는 죄다 맡아서 수리했지요. 한학에 밝아 윤도를 잘 이해했던 종형이 살아계실 때는 종형에게 많이 묻고 배웠는데, 종형이 돌아가시고 나면서는 저 혼자 독학하듯 해야 했습니다.”

 

  젊었을 때 백부에게 상세하게 배워두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수리하면서 윤도 제작법을 익히고 물려받은 관상감 윤도 판본(현종 14년, 1848년 관상감에서 만든 24층 윤도 판본)을 연구하며 그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때로 백부가 만든 윤도가 수리차 들어오면 그가 참고하기 위해 구입하려고 해도 원 구입자들은 절대로 팔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흥덕 윤도는 대추나무로 만드는데, 24층짜리 윤도를 만들 만큼 큰 대추나무 재목을 구하기 힘들어 예전에도 24층 윤도를 쉽게 만들지 못했어요. 그만큼 24층짜리 윤도는 구하기 힘든 거지요. 한번은 깨져서 수리 들어온 24층 윤도가 있었는데, 보니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들었더군요.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하니 아예 찾아가지 않아 그 덕분에 깨진 24층짜리 윤도를 갖게 되었어요.”

 

그 윤도는 그에게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어 윤도를 혼자 제작해나갈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비록 뒤늦게 윤도 제작에 뛰어들어 혼자 그 길을 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이미 오십 줄에 드는 나이에도 눈이 워낙 밝아 섬세한 선을 긋고 글자를 파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은 것은 축복이었다. 눈 밝은 것은 집안 내력인지 그의 아들이자 전수자인 김희수 씨(50)도 눈이 좋다고 한다.

“일흔이 넘어서 돋보기를 쓸 정도였으니 눈은 타고났지요. 24층짜리 윤도에는 무려 3000자가 들어가니 윤도 일에는 눈이 보배지요. 지금은 눈이 어두워 주로 자침을 만들고 아들이 각자를 하지만 한창때는 하루에 120자도 팠습니다.”

 

윤도 제작에는 여러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나무를 다듬고 파고 새겨야 하니 나무를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작은 철을 다듬어 자침을 만들 때도 남과 북을 가리키는 바늘의 무게가 조금만 달라져도 균형이 맞지 않게 되니 극도로 섬세한 솜씨가 필요하다. 또한 윤도의 각 층을 나누는 것도 그렇지만 층마다 칸을 만드는 정간(定間) 작업 역시 위층에서 0.01mm만 어긋나도 아래층에서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리고 글자를 파는 각자(刻字) 작업에서는 한 획이라도 잘못되면 그 순간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윤도를 만들 때는 밝은 눈과 함께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백부 김정의 씨가 작업할 때는 온 가족이 숨을 죽여야 했다고 한다. 드로잉으로 남아 있는 김정의 씨의 얼굴에는 장인의 섬세함과 고집, 까탈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있다.

“집중이 잘 안될 때 무리해서 하다보면 실수하게 되니, 그때는 차라리 조금 쉬는 게 좋아요. 백부는 일이 잘 안될 때면 들에 나가 단소를 불며 긴장을 푸셨고, 저는 농사일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풀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되고, 자식에게도 모두 윤도 가르쳐

 

 

후계자인 장남과 함께. 묏자리와 집터를 정확히 잡을 수 있는 윤도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지만, 낙산마을에서 윤도 제작의 맥은 이어지고 있다.

 

윤도 제작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그는 1990년대 중반, 고창 군청에 가서 지방무형문화재 신청을 했다.

“도에서는 윤도가 지방무형문화재가 아니라 국가가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돼야 한다며 서울로 자료를 보냈어요. 그런데 가타부타 영 소식이 없더군요. 그렇게 3년이 다 되어가는 가을, 대학 교수들이 이곳 흥덕에서 만든 윤도와 백부가 만드신 선추를 보러 와서, 제가 ‘문화재로 지정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봐야 한다’고만 해요. 그리고 그해 겨울 12월 말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고 연락이 오더군요.”

 

그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을 때의 기쁨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끼는 것 같다. “혼자 외롭게 해오다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아마 백부가 남긴 유언을 마침내 실현했다는 성취감과 함께 ‘인간문화재’라는 자부심이 힘들고 외로웠던 지난 세월을 어느 정도 씻어주었을 것이다. 무형문화재 지정은 사실 백부 김정의가 못다 이룬 꿈이기도 하다. 김정의는 1971년 한국일보 주최 공예대회에서 2등 상을 받으며 윤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냈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으나,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니 그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은 백부가 받았어야 하는 것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이룬 셈이다.

 

비록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만약 김종대가 젊을 때부터 윤도에만 매달렸다면, 어쩌면 사양길에 접어든 윤도를 끝까지 지켜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젊어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했고, 땅도 마련해서 생활이 안정된 다음 윤도에 몰두함으로써 오히려 돈과는 상관없이 윤도를 끝까지 이어나갈 수 있었으니, 이는 그의 지혜이자 행운이었다. 그의 지혜는 후계자를 키우는 일에도 빛을 발한다.

 

무형문화재가 되면 후계자를 키워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그는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이미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기에 네 아들에게 모두 윤도를 가르쳐왔다. 그러나 모두 번듯한 직장을 가진 자식들에게 돈이 되지 않는 윤도 제작을 종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 큰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돌아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나섰고, 둘째 아들 역시 착실하게 윤도를 배워왔다. 후계자로 지정된 장남 김희수 씨는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나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빨리 내려와서 윤도를 배우라고 ‘은근한 압박’을 넣었다고 전한다.

 

“사업을 접고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이참에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예 고향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작업하시는 걸 줄곧 보아왔고 짬짬이 아버지 곁에서 배운 터라 그리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후계자를 정하는 자리에는 장남과 차남이 경연을 벌였다고 한다. 장남 김희수 씨는 도구도 좋은 것을 써서 요령 있게 잘 새겨나가는데, 뚝심이 있는 동생은 옛날 도구를 고집해서 속도가 더뎌서 결국 후계자는 장남이 되었지만 동생의 실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김종대 윤도장의 집 한 켠에 세워진 윤도장 전수관 2층에 마련된 전시실에는 동생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이제 아버지 김종대 윤도장은 명예보유자로 물러나고 아들 김희수 씨에게 무형문화재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아직 작업을 하실 수 있는 한, 보유하고 계셨으면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제 부자는 대대로 살아온 낙산 고향집에서 1만여 평 땅에 홍삼을 키우며 생계 걱정 없이 윤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윤도는 예전의 영화를 찾을 수 없는 시대를 맞았고 윤도장 김종대의 삶도 외로운 길이었지만 마침내 가업을 이었고, 손자까지 윤도 제작 장학생이 되었으니 그는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셈이다.

 

   

갖가지 크기의 윤도. 각자를 한 다음 먹물을 칠하고, 글자에는 백옥가루를 입힌다. 가운데 층의 빨간색 네 글자는 동서남북을 뜻하는 자오묘유(子午卯酉)다.

 

“어렸을 때는 만드는 게 재미나고, 이것을 배우면 백부처럼 큰돈도 벌 줄 알았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저 혼자만 윤도를 만들고 있더군요. 제가 젊었을 때만 해도 무주에서도 윤도를 만들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이곳 흥덕만 남게 됐습니다. 그러니 백부님 유언대로 가업을 잇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한때 불티나게 팔리던 윤도는 1960년대 들어서 수요가 급속도로 줄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음택과 양택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발복도 하고 큰 인물이 나온다는 믿음이 갑자기 미신이 되어버린 탓이지요.”

 

윤도 사라지면, 윤도 사상도 사라진다

김종대 장인은 1년에 윤도를 약 스무 개 만드는데, 팔리는 건 겨우 10개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것도 이제는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몇몇 늙은 지관이 선물용으로 사거나 소장품으로서 가치를 인식한 사람들이 사가는 정도다. 김종대 윤도장이 만든, 뚜껑에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진 24층짜리 윤도는 하나에 1800만 원까지 나가지만 24층짜리 윤도는 지금까지 세 개밖에 못 팔았다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보관용으로 두 개를 사주었고, 전주의 어느 변호사가 하나 사갔습니다. 다 제값을 받지 못하고 싸게 주었어요.”

윤도가 더 이상 안 팔린다는 것은, 윤도에 담긴 사상도 같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신라시대 말 도선선사가 풍수도참설을 들여온 이후 고려시대 천문학은 세계적인 수준에 달했고, 조선시대에도 성리학과 주역을 숭상하는 유학의 학풍 덕에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인간은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철학이 있어서 풍수지리와 윤도는 실용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최첨단 내비게이션에 밀려 윤도는 더 이상 실용가치를 잃고 말았다.

 

오늘날 위치정보장치는 자신의 위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위치나 목적지의 교통상황까지 정확히 파악해주는 놀라운 성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놀라운 현대의 이기에도 몇 가지 약점은 있다. 우선 위성 4개(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신호가 네 개 필요하다)와 지상 제어국, 그리고 수신할 기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위성을 띄우고 제어하는 기술은 몇몇 나라가 독점하고 있기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은 이를 빌려 쓰는 신세다. 또한 사용자 역시 이 뛰어난 기기에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기기가 없으면 곧잘 길을 잃게 되고, 이 기기의 작동원리는 사용자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기기와 사용자인 인간은 가까운 듯하나 철저하게 소외된 관계다.

 

윤도는 땅 위의 위치만 알려주는 최첨단 기기보다 더 넓고 깊은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하늘과 자연, 물의 흐름과 땅속의 내용까지 관찰하고 가늠해보라고 윤도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목적지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 속에서 인간이 가야 할 길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도 원리 그 자체를 훤히 펼쳐 보이면서. 역의 원리를 궁구하던 옛사람들은 윤도를 들여다보며 무한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길을 찾아나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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