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국의 山神_03 소백산

醉月 2016. 7. 9. 09:52

[소백산] 죽령 개척한 죽죽장군에서 다자구 할머니로… 조선 초 ‘금성대군’으로 신화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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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충청·한양 갈라지는 요충지… 평화·안녕 기원하는 산신각 유달리 많아

산악신앙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고대 문헌에 나타난 산악신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사상이다. 고대 국가들은 산에서 제사를 지내며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고, 통치권자의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가 1940년쯤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지는 ‘부락제(祭)’를 조사한 마지막 기록으로 산신제 176, 동제 126, 서낭제 99, 여신제 20, 부군제 11개 등 도합 432개로 집계됐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민속신앙에 대해서 정확한 통계가 나온 적이 없다. 이와 같이 산악신앙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심성 깊숙이 내재해 온 전통신앙과 같은 믿음이다.

민속학자들은 이러한 산악신앙과 관련, 산에도 급(級)이 있다고 주장한다. 최고의 산이 영산(靈山), 다음이 명산, 마지막으로 주산(또는 진산, 진호산)이라고 한다. 주산 이하의 산들은 낮은 급에 속하는 산으로 보면 된다.

한반도에 진산과 명산은 많다. 그런데 영산은 몇 개 안 된다고 말한다. 특히 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영산은 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다. 북한의 백두산(白頭山)과 남한의 소백산(小白山)이 영산에 해당하며, 이를 통칭 단군신화가 시작된 태백산(太白山)이라 부른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래서 명칭도 작은 백두산이라는 의미로 소백산이라 부른다고 강조한다. 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영주와 소백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소백산을 백두산과 비교해서 강조할 수 있지만 백두산의 역사성과 상징성 등 현실적인 측면에서 백두산을 소백산과 비교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백산이 영산은 아닐지 몰라도 명산의 반열에는 분명히 속한다. 조선 중기의 예언가 격암 남사고는 <남사고 비결>에서 ‘소백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주장했다. 정감록의 십승지에 속하는 피란처에 적합한 땅이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소백산 풍기 근처엔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

일부 사학자 또는 민속학자들은 소백산을 태백산과 비교해서 곧잘 설명한다. 소백산은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이면서, 태백산은 이름 그대로 ‘큰 산’이고, 소백산은 작은 산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태백산은 신라시대 북악으로 지정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만 소백산은 소백산이란 이름보다는 죽령 또는 죽령산이란 지명으로 통칭되면서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풍수가들은 소백산과 태백산의 중간 지점에 있는 땅을 양백지간으로 부르면서 명당으로 여겼다. 소백산과 태백산의 기운을 동시에 받으면서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피란처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소백산 지명보다 죽령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듯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백두대간 능선이자 소백산 고갯길 고치령에 있는 산신각. 금성대군이 영월에 유배 온 단종을 만나기 위해 이 길로 왔다갔다고 전한다.
소백산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백두산’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700년 즈음이라고 한다. 소백산에 대한 첫 기록은 고려 초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939년)에 등장하면서부터다.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939년)에도 소백산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소백산이란 지명은 아마 이 무렵부터 사용한 것으로 판단한다.

소백산이란 지명은 사실 죽령보다 훨씬 늦게 등장한다. 지금은 소백산의 한 고개로 죽령을 파악하고 있지만 옛날엔 죽령이 소백산을 대표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죽령이 역사에 훨씬 먼저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편에 ‘아달라이사금 3년(156)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가 나오고, 바로 뒤이어 ‘아달라이사금 5년(158) 3월에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달라왕은 죽죽장군을 시켜 죽령을 개척하고, 죽죽장군은 죽령을 열다가 지쳐서 죽었다고 전한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추모했다고 한다. 이것이 소백산 산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자 최초의 제사다.

<삼국사기> 권32 제사편에 따르면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눠서 大祀·中祀·小祀로 삼았다. (중략) 중사에 속하는 오악 중에 東은 토함산이며, 南은 지리산(당시엔 地理山)이다. 西는 계룡산이고, 北은 태백산이며, 中은 부악(공산이라고도 한다)이다.

중사는 또 사진 사해 사독으로 나눴다. 소사는 전국 주요 지역을 고루 나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사 중 죽지(竹旨)가 나온다. 그 죽지가 지금 소백산 죽령이 있는 영주시 순흥면이다.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신라의 9주가 창설된 신문왕 5년(685) 직후로 추정한다. 이런 사실로 보면 죽지는 소백산보다 훨씬 오래된 지명인 셈이다.

조선 성종 때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에도 죽령산은 충청도의 산에 포함돼 있고, 소사로 규정했다.

<명종실록>에도 ‘명종21년, 단양군 죽령산은 소사이고, 사당의 위판은 죽령산지신(竹嶺山之神)으로 썼다. 제를 지내던 곳을 죽령산 기슭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가에서 지내던 제사인 국행제 때 읽던 축문인 ‘소백산신치성문(小白山神致誠文)’에 따르면 국행제는 매년 원월(元月)에 조정으로부터 축문과 향을 받아서 1년에 3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월에는 고유제를 지냈다. 죽령 북쪽인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주민들은 600년 전통의 국행제를 지금도 지내고 있으며, 소백산 철쭉제 때에는 영주시와 단양군에서 소백산산신제를 지낸다.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최초의 소백산 산신은 죽죽장군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를 모신 사당과 산신각은 지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죽죽장군 산신은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소백산에는 특히 서낭당과 산신각이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지형적 조건과 관련 있어 보인다. 소백산은 백두대간의 주축으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경계에 있다. 영남에서 한양이나 충청도, 강원도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죽령을 넘어야만 한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소백산은 첩첩산중에 호랑이가 수시로 출몰하던 때였다.

우리나라의 산신각에 호랑이 산신도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랑이를 피해 무사히 산을 넘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으로 호랑이 그림을 그려 산신각에 잘 모셨다. 일종의 역설이다. 무서운 호랑이를 달래서 잘 섬긴다는 상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호랑이와 단군 영정이 그려진 산신도에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치성을 드린 후 고개를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단양 소백산 산신각은 다자구 할머니 모셔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고치령 산신각에 있는 산신도. 오른쪽 산신도가 백마를 탄 단종이 추익한으로부터 머루랑 다래를 받는 그림이다. 왼쪽은 원래 금성대군 영정이 있었으나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산신도를 걸어놓고 있다.

호랑이 외에도 도적들이 기승을 부릴 때가 많았다. 이와 관련한 전설이 바로 다자구 할머니 이야기다. 영주에서 죽령 고개 너머 단양군 용부원리에 있는 산신각에 전하는 ‘다자구 할머니’ 전설은 도적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옛날 죽령에는 산적들이 많아 백성을 몹시 괴롭혔다. 하지만 산이 험해서 관군들이 도적들을 토벌하지 못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관군과 짜고서, 큰아들인 다자구와 작은아들인 덜자구를 찾는다는 핑계로 산적의 소굴로 들어갔다. 두목의 생일날 밤, 모두 술에 취하여 잠이 들자 할머니는 도적들이 모두 다 잔다는 뜻으로 “다자구야”라고 외쳤다. 대기하던 관군들이 산적의 소굴을 급습해 산적을 모두 소탕했다. 이후 임금의 꿈에 나타난 다자구 할머니가 자신이 도적들을 잡는 공을 세웠으니 연을 날려 떨어진 곳에 신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연이 떨어진 대강면 용부원리에 죽령산신당을 지어 다자구 할머니를 산신으로 모셨다. 이후 이 산신에게 기도를 하면 나라가 평안해졌고, 개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용부원리 산신각은 도로 옆 멀지 않은 곳에 아직까지 그대로 전한다. 소백산 산신 ‘다자구 할머니’에 대한 제의는 어떤 때는 국행제로 진행됐고, 어떤 때는 무속적인 동제의 형태로 지속됐지만 지금까지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어 있다. 지금도 용부원리 주민은 관청과 합동으로 산신제를 지낸다. ‘죽령산신당’은 1976년 충북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됐다.

지형적 조건과 관련한 산신각은 사실 서낭당과 성격이 유사하다. 대부분 이들은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만들어졌다. 또한 호랑이와 도적떼와 관련한 전설은 우리 민속신앙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금성대군이 단종을 만나기 위해 오고갔던 고치령 고개길. 순흥에서 영월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한 산신각과 서낭당도 있다. 바로 지금의 소백산 산신으로 화한 금성대군은 역사적 인물에서 산신으로 화했다. 금성대군은 알다시피 세조의 친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이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복위를 꾀하다 형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한 의리와 충절의 인물이다. 신격화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갖춰진 인물과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백두대간 고치령 고갯길을 알리는 비석.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유(瑜·1426~1457)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이유(李瑈)와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으로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순흥으로 유배 온 금성대군, 단종복위 꾀하다 발각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소백산 능선이 구름에 덮여 신비하게 보인다.
1455년 세조는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폐위된 단종은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군 청령포 적소에 안치됐다. 금성대군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에 그해 10월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모의해 고을의 군사와 선비를 모으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했다. 이때 부사 이보흠과 순흥 관리 기관 중재(仲才), 품관 안순손·김유성·안처강·안효우와 군사 황치·신극장과 향리 김근·안당·김각 등 금성대군에게 동조하던 흥주도호부 선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금성대군은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섬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당시 순흥부는 혁파되고 그 토지와 백성들은 풍기군(豊基郡)에 속하게 했다. 이 사건을 영주지방에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한다. 정축지변 때 죽음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이들이 흘린 피가 죽계(竹溪)를 타고 10여 리를 흘러 이웃 마을인 안정면 동촌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을 ‘피끝 마을’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당시의 기록이 <세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세조 3년(1457) 10월 9일 금성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후 역모를 꾸민 안순손 등을 처벌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유(李瑜)가 순흥에 안치된 뒤로부터, 다른 뜻이 있어 기관 중재(仲才), 품관 안순손·김유성·안처강·안효우와 군사 황치·신극장과 향리 김근·안당·김각 등에게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을 시켜, 옛 종 정유재와 그의 무리인 범삼·석정·석구지·범이 및 풍산 관노 이동을 불러 군사를 일으킬 것을 공모하고, 각각 병장을 휴대하게 했으며, 또 부사 이보흠에게 금정자와 산호 입영을 주고, 또 말하기를 “공(公)은 근일에 반드시 당상관이 될 것이다”고 했다.’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금성대군이 유배생활을 했던 집 바로 뒤에 추모비석이 세워져 있다. 옆에는 당시 같이 처형을 당했던 순흥 관리들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순흥도호부가 폐부되고, 금성대군과 관련된 숱한 인물들이 죽임을 당한 것까지 역사적 사건이다.

금성대군의 신격화 과정은 이 뒤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과정은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민의역사(folk-history) 속에서 문화적 과거(역사적 사실)와의 합법적 관련에서부터 유래한 민속의 역동적 측면으로 재탄생한다. 이는 역사적 인물의 상징이 지역사회의 토착신앙과 복합되어 있으며, 상징화·신격화의 과정은 비정상적인 죽음을 해원하려는 민의의 일반적 심성에 깊게 파고든다. 지역사회 성원에게 있어 경험에 대한 동일한 상징의 공유가 제의(祭儀)를 통해 표상화될 때에는 제의의 순환적 의미에 대해 사건의 위치를 과거라는 시간 속에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이해하게 되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금성대군이 유배생활을 했던 한옥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그 뒤로 추모비가 모셔진 금성단이 있다.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은 순흥 죽동마을에 사는 이선달이라는 사람의 꿈에 나타난다. “내가 흘린 피 묻은 돌(혈석)이 죽동 앞 냇물에 있으니 찾아 거두어 달라”고 당부하면서 돌의 모양과 위치를 자세히 알려준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은 죽동 냇물을 샅샅이 뒤져 그 돌을 발견한다. 그 혈석을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한다. 그 후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정성을 모으고 소를 잡아 제사를 올리는 일을 거르지 않는다.

전형적인 신격화 과정이다. 이렇게 해서 금성대군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현재의 신으로 환생한다. 이어 다시 역사적 사실로 금성대군의 복원이 이뤄진다. 사실과 허구, 다시 사실로 확인되면서 금성대군의 신격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서민들도 과거에 실재했던 인물과 허구적 신에 대한 이미지를 동일하게 받아들인다.

정축지변이 발발한 지 225년이 지난 1682년(숙종 8)에 순흥의 유학 이정식 등이 상소를 올리자 금성대군이 복권되고, 순흥부도 다시 순흥도호부로 복원됐다. 복원은 역모의 고장에서 충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금성대군의 신격화 과정의 절정의 순간이다. 그 뒤 영조 14년(1738)에 금성대군은 복관(復官)됐고, 이듬해에는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마침내 신과 인간의 복합체로 환생한다. 이어 영조 18년(1742)에는 경상도관찰사 심성희가 제단을 정비하고 좌우 두 곳에 작은 단을 설치해 순흥부사 이보흠과 순절한 의민들에게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금성대군 신단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소백산 자락에 산신각과 서낭당이 많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두레골 서낭당과 고치재 산신각이다. 두레골 서낭당은 원래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신 죽동 서낭당을 이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태백산과 소백산은 일제에 항거하던 의병들의 근거지였다. 왜병들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순흥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죽동 서낭당도 더럽혀졌다. 이에 금성대군의 혼령이 마을 주민들의 꿈에 나타나 “죽동서낭당에 있는 혈석을 조용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주민들은 두레골에 당집을 짓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혈석을 정성껏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이 지금의 두레골 서낭당이다. 인근에 있는 금성대군당은 죽동 서낭당에서 혈석을 옮겨올 때 새로 지은 건물이다.

백두대간 능선 고갯길에 있는 고치재 서낭당은 산신각이란 현판이 앞에 걸려 있다. 원래는 단종과 금성대군이 각각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으로 좌정되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호랑이와 단군으로 형상화한 전형적인 산신도와 백마를 탄 단종이 추익한에게 머루와 다래를 받는 장면 등 두 개의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 고치재 산신각은 금성대군이 단종을 만나기 위해 넘나들던 영월까지의 가장 빠른 길로 알려져 있다. 고치재에서 영월 청령포까지 모두 12개의 산신각과 서낭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각 산신각에서 각각의 산신제를 올리며, 고치재 산신제의는 고개 너머  첫 마을인 마락리 새목마을에서 매년 정월 15일 자정에 지낸다.

[한국의 산신(山神) | <5>소백산]
단양 용부원리 다자구 할머니 산신을 모신 소백산 산신각.
다자구 할머니 산신을 모신 단양지역의 소백산 산신각, 금성대군을 모신 순흥지역의 두레골 서낭당과 고치재 산신각은 모두 산악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곳은 보부상들과 사냥꾼들이 안전과 평화를 기원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금성대군이 소백산 산신이 된 공간으로 소백산 민속신앙의 주된 근거지인 것이다. 특히 고치령 산신각에서는 매년 정월에 단산면 발전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양백지간 산신제’가 열린다. 이는 양백산신으로 신격화된 단종과 금성대군의 넋을 달래고 아울러 지역발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개최된다. 화재로 소실된 고치령 산신각 중건기에 ‘영월의 단종대왕은 태백산신령이요, 흥주(순흥)의 금성대군은 소백산신령인데, 이 두 산신을 모시고 동민들이 숭배하니 마락동을 잘 수호해 주십시오’라고 기록돼 있다.

영주 순흥 사람들이 금성대군을 받드는 정성은 참으로 지극하다. 그들에게 금성대군은 이미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령으로 받드는 신앙의 대상이다. 정월 대보름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이 이어온 제의는 마을사람들에게는 정월대보름 잔치와 같이 진행한다. 한쪽에서는 제의를 지내고, 한쪽에서는 마을 공동체의 화합을 다지는 행사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소백산신으로 화신(化身)은 금성대군은 전국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까지 확산됐다.

역사적 사실을 담은 문화 속에서 상징이 지니는 과정과 중요성이 주민들에게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공유되기 위해서는 지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지역사회가 지니는 제의와 제의의 상징은 지역사회의 과거를 재연하면서 재확인하는 기능을 하며, 이것은 역사의 신화화 과정이 이루어진 결과를 통해 거꾸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소백산 금성대군의 신화화 과정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서양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나는 들은 대로 (사실을) 전달할 의무는 있지만, 그것을 다 믿을 의무는 없다”고 자신의 역사기술 원칙에 대해서 말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역사가라기보다는 재담꾼으로서의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문구다. 사실에 충실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그 사실에 객관성이 보장되는 것은 별개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A. Toynbee)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사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많은 자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실재를 부여 받는다”고 말했다. 역사가는 뚜렷한 사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사관에 따라 보이는 사실과 보이지 않은 내용에 대한 기록여하가 역사가 되고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패자의 아픔은 달빛을 받아 신화·전설로…

신화학자들은 “승자의 기록은 햇빛을 받아 역사가 되고, 패자의 아픔은 달빛에 바래 신화·전설이 된다”는 말을 한다. 역사와 신화,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까지 허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트로이전쟁 같은 역사는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전으로만, 신화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19세기 들어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뒤에야 비로소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이와 같이 역사가 신화가 되고, 신화가 역사가 되기도 한다.

승자는 자기의 입맛대로 기록을 남긴다. 우리는 이를 흔히 역사라고 한다. 패자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록되거나 기록 자체가 사장될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 품어내지 못하는 사실은 신화나 전설로 녹아든다. 소백산 산신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승자인 세조의 기록은 역사로서 더욱 명료해지고, 패자인 금성대군과 단종은 신화와 전설로 남아 그 아픔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으로 재탄생한 신화에 만족할까. 아니면 미래의 어느 날에 트로이 유적같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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