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상아덤서 천신 이비가지 만나… 동생 수로는 금관가야 시조로 탄생
가야산은 고대 가야국의 진산이다.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고대국가는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국가의 통치자와 겸했다. 따라서 국가를 건국한 왕은 신격화된 건국신화가 반드시 뒤따랐다. 하늘로부터 받은 왕권을 더욱 신성시하고 통치권을 공고히 다지는 차원에서라도 신화적으로 만들었다. 왕을 낳은 부모부터 왕까지 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각색됐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 신화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고대국가들이 그렇듯이 가야도 당연히 건국신화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존재한다.
<고려사> 지리지 경상도 김해도호부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3월에 가락의 9간(干)인 아도(我刀)·여도(汝刀)·피도(彼刀)·오도(五刀)·유수(留水)·유천(留天)·신천(神天)·오천(五天)·신귀(神鬼)가 물가에 모여 술을 마시다가 귀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가서 보니 자색(紫色) 새끼줄에 매인 금합(金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합을 열고 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금빛 알이 있으므로 아도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이튿날 아홉 사람이 다 모여서 또 열어 보니 알 여섯 개가 껍질이 쪼개져 여섯 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쯤 되었고 용모가 매우 거룩해, 모두 절하며 축하했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나서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자나 됐다. 무리들이 드디어 한 사람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곧 수로왕(首露王)이다. 금합에서 났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나라 이름을 가야라 하니,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서기 41년, 박혁거세의 손자)의 일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자 헤어져 가서 다섯 가야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지금의 낙동강)을, 서남쪽은 바다를, 서북쪽은 지리산(智異山: 당시 표기는 地理山)을,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을 경계로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에도 유사하게 소개한다. 김해를 본거지로 둔 금관가야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내용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건치연혁편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다.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무릇 16세 520년이다.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그러나 가락국 고기(古記)의 육란(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서 믿을 수 없다. 또 <석이정전>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정견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참고할 것이 못 된다.’
<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는 금관가야가 아닌 대가야 중심으로 건국신화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했다.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부분만 맥을 같이할 뿐이다. 정견모주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왜 두 개의 건국신화가 존재하는지부터 한 번 살펴보자.
가야의 건국신화는 당연히 금관가야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1세기 중반 건국한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는 한반도의 철기문화를 주도했다. 족장 중심의 연방체제를 유지했다. 건국 시기는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혼인한 것으로 알려진 서기 48년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남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한 5세기부터 금관가야는 급격히 국력이 약해진다. 가야 연방제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내륙에 있던 대가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나게 많은 역사적 사실은 차치하고 대가야가 6가야의 중심이 됐다는 사실은 대가야 중심의 새로운 건국신화가 당연히 필요했을 성싶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가 혼인해서 두 아들을 낳았고, 큰아들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고, 작은아들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됐다는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형이 큰 나라인 금관가야가 아닌 대가야의 시조로 둔갑한 사실은 이 신화가 금관가야 이후 각색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는 532년으로 알려져 있고, 대가야는 562년이다. 금관가야는 광개토대왕이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한 5세기부터 국력이 쇠약해져 사실상 신라와 병합됐다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반면 대가야는 독자세력을 구축해서 6세기 중반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저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신이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가야의 후손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가야 역사에 대한 기록의 부재는 저항세력에 대한 흔적 자체를 모조리 없애 버린 영향도 컸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승자의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가야의 역사를 끝까지 저항한 대가야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평가했을 리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가야의 형제신화(또는 설화)보다는 금관가야의 ‘6란신화(설화)’에 더 힘이 실렸을 가능성이 크다.
두 역사서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형제 신화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라고 하는 사실이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형제설화든 6란설화든 이들의 어머니인 정견모주는 모든 역사서에 가야산 산신으로 기록돼 있다. 사실 가야산은 대가야의 진산으로서, 대가야가 중심이 된다. 금관가야의 진산은 김해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며, 그 산에서 알이 내려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가야산 산신을 언급하면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정견모주를 중심으로 한 가계는 남편인 천신 이비가지, 큰아들 뇌질주일, 작은 아들 뇌질청예로 구성된다. 이비가지는 일본식으로 이히고(伊日者), 즉 ‘이서국의 제사장’이라는 의미다. 정견모주도 이서국의 후예로서 제사장 역할을 한 여인으로 추정한다. 즉 이서국의 제사장 정견모주는 가야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서 천신 이비가지를 만나 혼인해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정견모주와 이비가지가 만난 장소가 가야산 만물상 끝자락에 있는 ‘상아덤’이다.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 성경호 탐방과장과 박소현 학예사와 함께 상아덤을 찾았다.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말이고, 덤은 ‘바위’를 가리킨다.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뾰족하면서 화살촉같이 생긴 바위가 땅에 있는 바위를 쪼갠 듯 양쪽으로 벌어진 그 사이에 절묘하게 꽂혀 있다. 인간의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이곳이 바로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전설이 서린 신비스런 장소다.
전설에 따르면,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마련하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천신 이비가지는 어느 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에 내려왔다. 천신과 산신은 성스러운 땅 가야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아들 둘을 낳았다. 형은 아버지 천신을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아우는 어머니 여신을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됐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최치원의 <석순응전>과 이를 인용한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하지만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나온 <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될 정도면 당시까지는 존재했다는 얘기다. 그 이후 전란 등으로 소실됐거나 분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순응과 이정은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들이다. 최치원이 이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기 형태로 쓴 책이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이다. 여기에 가야산 산신과 해인사 창건에 관련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사실 한 국가의 건국은 어느 날 갑자기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듯 뜬금없이 생겨날 수 없다. 수많은 단계를 분명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건국신화는 그 이전 단계는 모조리 무시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시조부터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변신한다. 가야도 마찬가지다. 가야는 <일본서기>에 나오듯 이서국이라는 소부족국가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서국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가야라는 연맹체로 성장하고 이후 국가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름에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왕이며, 다른 이름은 뇌질주일 또는 내진주지였다. 여기서 ‘뇌질’의 뜻은 노리들 또는 누리들이며, 노리와 누리는 고어(古語)로 ‘세상’이란 의미다. 이는 평원을 나타낸다. 내진이나 이진도 음은 다르나 그 의미는 비슷하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특히 이진(伊珍)에서 ‘이’는 위(上), ‘진’은 들이나 도리의 뜻이 되어, 귀인의 존장이라는 의미로 결국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란 뜻이 된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리산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신관(神觀)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의 아들인 천신이 강림해서 땅의 신과 혼인해서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이 지상의 통치자가 되고 신격화된다. 이른바 천신인(天神人)이고, 신인복합(神人複合)이다. 고대사회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신인복합은 사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인지 구별할 수 없다. 기록(fact)적 역사와 허구(fiction)적 신화가 혼재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구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신화를 무시할 수 없다. 신화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례도 세계사적으로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노아의 방주’나 ‘트로이전쟁’ 같은 것들이다. 특히 트로이전쟁은 터키의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수천 년간 구전되어 오던 신화가 마침내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됐다. 가야 건국신화도 어디까지가 신화고, 어디까지가 역사인지 실제로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역사적 사실로 하나씩 구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견모주는 ‘한 부족의 제사장’으로서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구체성을 띤다. 그런데 정견모주가 가야 건국 이후 한참 지나서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견이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특성과 건국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비교할 때 연결되지 않은 부분, 즉 의문의 여지가 많이 남기 때문이다.
정견모주는 기본적으로 불교식 명칭이자 개념이다. 정견(正見)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취해야 할 8가지 바른 자세 중에 으뜸으로, 글자 그대로 ‘바로 본다’는 의미다. 불교에서 세상을 바로 본다는 의미는 매우 심오한 뜻을 지닌다. 모주(母主)도 성모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이자 정견모주의 10세손으로 알려진 월광태자도 불교식 명칭이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처음 도래한 시기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다. 신라에는 이보다 몇 십 년 뒤인 거의 4세기 말에 들어온다. 가야가 건국될 시기인 1세기 중반에는 불교보다는 샤머니즘 같은 종교 이전의 신앙이 지배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정견모주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건국한 가야가 불교식 명칭과 개념을 사용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최소한 5세기 이후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관가야 쇠퇴하면서 형제신화 탄생한 듯
그러면 어느 때, 누가 건국신화를 새롭게 각색했을까?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학자들은 월광태자와 그의 측근이나 후손들이 불교적으로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금 합천 야로의 월광사는 월광태자가 창건한 절이며, 그 이후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과 이정은 의상의 법손이며 월광의 후손으로 추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제신화’는 대가야가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했던 6세기 당시의 상황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봐야 한다. 가야산은 대가야시대 당대부터 가야 건국의 성소로 인식됐고,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는 대가야 왕실의 최고 정점에 있는 인물로서 신화적으로 탄생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고 가야산을 소사인 가량악으로 편제한 것은 가야산이 가지는 상징성과 전통 제사장소를 계승하는 의미도 함께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통일신라 때 도입된 삼산오악은 국가의 제사와 호국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삼산(大祀三山)·중사오악(中祀五岳)·소사(小祀)로 나눴다. 대사삼산은 첫째가 경주에 있는 내력(奈歷)산, 둘째가 영천에 있는 골화(骨火)산, 셋째가 청도에 있는 혈례(穴禮)산이다. 수도 경주를 방어하기 위한 주변 3개의 산을 삼산으로 삼았다.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은 백제 지역이었던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은 고구려 지역이었던 태백산, 그리고 중악은 공산(지금 팔공산)으로 지정, 기존 지배세력들을 다스릴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선택했다. 중사를 지낸 곳은 이 외에도 전국의 군사적 거점지역을 골라 해안 등지에 사진사독(四鎭四瀆) 등도 있었다. 소사를 지낸 곳은 고성 상악(霜岳), 북한산주 부아악(負兒岳), 청주(지금의 고령) 가량악(加良岳, 현재 가야산), 무진주(지금 광주) 무진악(무등산) 등지다.
신라 이후 소사 가량악, 즉 가야산에서 매년 수차례 국가 제례인 산신제를 지냈다. 기우제까지 지낸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명산으로 등재되어 국제(國祭)가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그 전통은 계승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가야의 건국신화가 그대로 인용돼 있고, ‘정견모주를 모시는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해인사 경내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은 정견천왕사는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해인사 내 국사단에서 정견모주의 흔적을 유일하게 찾을 수 있다. 정견모주와 두 아들을 그린 산신화도 걸려 있다.
합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이병생 소장의 안내로 국사단을 찾았다. 국사단은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가기 전 중간 지점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국사단 앞 안내문에는 ‘국사단은 국사대신을 모신 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산국(山局)을 관장하는 산신과 토지가람신을 가리킨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지가 생략)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아들 수로왕은 금관가야국을 각각 건국했다고 한다. 국사대신은 인간 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하면서, 신비스런 현풍(玄風)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고 돼 있다.
이병생 소장은 “가야산 상아덤에는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를 만나 몸을 합하는 돌 모양이 상징적으로 아직까지 전한다”며 “만물상 끝나는 지점 하늘과 통하기 가장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정견모주는 가야산 산신일 뿐만 아니라 해인사 보호신으로서도 자리매김 한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거나 나라가 힘들 때 국사단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말했다.
가야산에서 조선시대 때 산신제나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한 번 살펴보자.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합천군조편에 ‘산형이 천하에 뛰어났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정수(精修)할 땅이다’고 돼 있다. <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2월 6일에 ‘내시 별감을 보내어 가야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권174 선조 37년 5월 26일에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이 장계하기를, “한재(旱災)가 너무 심합니다. 가야산·우불산·주흘산 등의 곳에서 기우제를 지낼 향축(香祝)과 예폐(禮幣)를 내려 보내주소서”라고 했는데, 예조에 계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담당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사 가량악으로서 제사를 지내던 장소를 찾아 수년째 가야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우두봉에서 찾은 기와조각은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연대를 추적할 수 있다. 이는 이곳에 분명 제사를 지내던 어떤 형태의 사당이나 암자와 같은 건물이 존재했을 것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우두봉에서 국가 제례를 지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조선시대 들어서부터 산 아래로 내려오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사당은 사당대로 분명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가야산 이름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소머리산 또는 우두산이라 불렸고, 불교 전래 후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므로 가야산이란 이름이 정착됐을 것으로 본다. 또한 가야산은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서 신성시되는 산이라 불교 성지로 꼽힌다. <동국산수기>에는 우두산(牛頭山), 비봉산(飛鳳山), 또는 상골산(象骨山), 상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기록돼 있다. 다양한 산 이름을 거치면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산의 산신이 정견모주라는 것이다.
정견모주의 영정을 얼마 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살려냈다. 역사적 인물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다. 역사 속의 정견모주와 신화 속의 정견모주, 그리고 산신으로서 정견모주에 대해서 정리된 기록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 정부 표준영정으로 제작
고령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잠정 등재목록에 올라 활용키로
대가야 건국 시조의 어머니이자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의 영정이 정부 표준영정으로 제작됐다.
대가야의 주요 근거지였던 고령군에서 건국신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나아가 가야국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가야고분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15년 12월 완성했다고 밝혔다. 고령군은 2014년부터 영정작업을 시작해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고증과 수정작업을 거친 끝에 표준영정 제96호로 공식 지정받았다고 확인했다.
정견모주 표준영정은 가야국 시조의 어머니로서 위엄 있는 여성상을 나타내고, 가장 왕성하면서 활동적인 40대 중반의 나이로 설정했다. 위풍당당한 국모의 풍모와 근엄함을 동시에 갖추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표현해 냈다. 정제된 안정감을 나타내도록 전체적으로 철선법을 사용했으며, 특히 쌍구법을 많이 사용해서 부귀와 권위를 강조했다. 복식도 깊이 있게 고증했다. 머리는 고구려벽화고분에 등장하는 여인상을 참고, 중후한 이미지를 살려내려고 했다. 또 권위의 상징으로 가야 금관의 입식 장식을 고졸(古拙)하게 표현한 관장식을 배치했다. 의상도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복식을 토대로 참고했다.
고령군은 “표준영정을 기반으로 가야라는 고대국가의 역사적 사실을 가야문화권에 속한 지자체간 공유하며,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고령의 지산동고분군과 김해 대성동고분군 및 함안 말이산고분군과 함께 가야고분군에 대한 인식을 공동으로 확산시켜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가야문화권의 통합 정견모주 사당건립과 영정봉안 및 ‘정견모주제’ 봉행 등의 후속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있다.
정견모주 표준영정을 제작한 손연칠 경주 동국대 명예교수는 그간 성삼문·이익 선생 등 다수의 표준영정을 만든 전문가다.
현재까지 정부에서 지정한 표준영정 중 대가야 및 고령과 관련한 영정은 1997년 제작한 우륵과 함께 2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