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팔색조 같은 매력 강원 동해

醉月 2019. 1. 24. 22:59

강원 동해시의 한섬해변에서 천곡항으로 이어지는 해변길의 중간쯤에 있는 갯바위 해안. 손대지 않은 날것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숨겨두고 싶은 곳이다. 이 일대가 내년 연말까지 해안 덱과 전망대를 갖춘 ‘말끔한 관광지’로 조성된다.


강원 삼척과 강릉 사이에 끼어 있는 동해시는 ‘지배적인 이미지’가 없습니다. ‘동해시’라고 하면 대번에 딱 떠오르는 게 없다는 얘기지요. 1980년에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의 통합으로 출범한 신생 도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동해’라는 밋밋한 보통명사를 지명으로 가져다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동해라는 이름이 차갑고 싱겁다면, 통합 전에 읍이었다가 지금은 동 이름이 된 ‘묵호(墨湖)’란 지명은 거꾸로 뜨겁고 끈적끈적합니다. 묵호란 유독 물새들이 많이 몰려들어 ‘새도 검고, 바다도 검다’고 해서 ‘먹 묵(墨)’ 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정작 묵호의 지명에서는 새와 바다보다는, 쇠락하고 누추한 포구의 복합적인 정서가 먼저 떠오릅니다.


# 뜨겁고 끈적이는 이름… 묵호

묵호를 말할 때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여자, 허름한 부둣가 다방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먼바다 기상예보, 폭풍주의보로 어선의 발이 묶이자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사내들, 만선 깃발을 단 고깃배가 가득 싣고 돌아온 오징어의 배를 따는 아낙네들….

묵호에는 이런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논골담길’이 있다. 논골담길은 동해시문화원이 ‘묵호의 재발견’이란 취지로 묵호항에서 묵호 등대로 오르는 달동네 골목길 담벼락에다 벽화를 그려 넣어 조성한 길이다.

그 길에는 머리 위로 전선이 어지럽게 지나가고, 처마와 처마가 잇닿은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1941년 묵호항이 개항하자 일자리를 찾던 사람들은 무연탄과 시멘트에, 더러는 고기잡이에 생계를 의탁하기 위해 묵호로 모여들었다.

묵호에서 일자리를 찾은 이들은 일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뒤편 묵호진동의 비탈진 언덕에다 얼기설기 판자를 덧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누추한 달동네를 ‘논골 마을’이라고 불렀던 건 골목마다 질척거리는 진창 때문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곳. 질퍽거리던 논골 마을의 골목이 지금의 ‘논골담길’이 됐다.

논골담길 벽화에는 전성기 묵호의 달동네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으니, 전성기라고는 해도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먹고사는 게 해결된다는 것만으로 묵호는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넘쳐났다.

벽화에 그려진 전성기 무렵의 묵호 풍경은 ‘과거의 영광’이라기보다 ‘애잔한 추억’에 가깝다. 가난하고 누추했던 때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불러내는 건 따스했던 과거의 추억이다. 삶은 고단하고 가진 건 적었지만, 그걸 기꺼이 이웃들과 나눌 줄 알았던 때의 이야기들이 논골담 마을의 벽화 속에 있다.


# 추억에서 낭만으로 건너가는 길

묵호진동에서 등대로 이어지는 논골담길의 골목은 모두 4개다. ‘논골 1길’부터 ‘논골 3길’까지 3개의 길이 있고, 반대쪽 등대 너머에는 ‘등대오름길’이 있다. 그중 어떤 길이든 한번 발을 들여놓았다면, 쉽게 돌아서 나갈 수는 없다. 처마와 처마 사이로 이어지는 굽은 골목이 보여주는 매력과 굽은 골목을 돌 때마다 나타나는 따뜻한 벽화가 저절로 발길을 이끌기 때문이다. 한번 골목에 들어서면 십중팔구 모든 길을 다 걷게 된다는 얘기다. 전국 곳곳에 벽화 마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곳만큼 한 줄의 시처럼 뭉클한 감동을 주는 곳은 드물다. 그건 바로 포구마을의 따스했던 삶을 그림으로 풀어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리라.

모든 논골담길 끝에는 묵호 등대가 있다. 등대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묵호의 바다를 비추고 있다. 등대 아래로는 바다 풍경을 창 가득 담고 있는 카페와 펜션이 있다. 젊은이들은 등대의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야외 카페에서 따스한 커피를 앞에 두고 바다를 바라본다. 여기서 산동네 마을의 지붕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저리도 푸를 수 없다.

묵호 등대에서도, 논골담길 위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조망의 최고 명소라면 단연 논골 1길의 ‘바람의 언덕 전망대’다. 논골담 마을 언덕 능선 끝, 풍량 관측소가 있던 자리에 세운 전망대를 딛고 서면 묵호항 일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논골담길에서 느꼈던 ‘멈춰 설 자리’가 없다는 아쉬움을 이곳에서 털어버릴 수 있다. 전망대 한쪽에 고기잡이 나간 가장을 기다리는 ‘만복이네 식구들’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고깃배가 들어올 시간이면 아기 업은 마을 아낙들이 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바람의 언덕 전망대 주변에는 마을 주민 58명이 출자해 만든 ‘논골담길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주민이 주도해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금 절반을 마을 시설 보수 등에 사용한단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내려다보는 묵호항의 풍경은 낭만적이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말이다.




사진 위는 묵호 등대와 그 아래 산동네 논골담마을. 비탈진 자리에 들어선 집들의 처마와 처마 사이로 실핏줄 같은 ‘논골담길’이 이어져 있다. 오래전의 묵호를 그린 벽화 하나하나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오는 골목이다. 사진 아래 왼쪽부터 묵호진동에서 명태를 널어 만드는 ‘언바람태’, 논골담길에 그려진 벽화, 망상해수욕장에서 ATV를 즐기는 연인, 한섬 해변을 끼고 이어지는 오솔길에 있는 정자 ‘관해정’.


# 묵호의 ‘언바람태’를 아시나요

논골담길의 명성에 가려져 있던 곳이 있다. 묵호 등대를 마주 보고 있는 맞은편 언덕 위의 산동네 묵호진동이다. 묵호진동은 묵호 등대 쪽에서 보면 마치 성곽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묵호진동의 도로명 주소는 ‘덕장1길’이다. 맞는다. 물고기 말리려고 덕을 매어 놓은 곳을 부르는 이름, 바로 그 덕장이다. 덕장1길의 경로당 간판도 ‘덕장경로당’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가는, 겨울에 가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덕장1길 주변은 온통 명태를 달아맨 덕장으로 가득하다. 촘촘하게 널어놓은 명태들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건조한 겨울 바닷바람에 말라가고 있다.

겨우내 명태를 말리는 덕장이라면, 다들 황태덕장이 있는 강원 인제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여기 동해의 묵호진동 덕장길에서도 명태를 말린다. 같은 명태라지만 인제에서 말린 명태와 동해에서 말린 명태는 다르다. 인제에서 말린 명태를 보통 ‘황태’라고 부른다. 다들 알다시피 황태는 살이 부드럽고, 푸슬푸슬하다. 반면 동해에서 말린 명태의 이름은 생소하기 짝이 없다. ‘언바람태’. 황태가 부드럽다면 언바람태는 딱딱하고 쫄깃하다. 맛도 다르지만, 그보다 식감이 더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쉽겠다. 생맥줏집에서 주문하는 ‘먹태’가 바로 언바람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바람태일 ‘가능성’이 높다. 본래 먹태는 언바람태를 만들다가 비를 맞거나 해서 건조 과정에 이상이 생겨 검게 변색된 부적격 상품을 일컫는 말이었다. 먹을 수 있기는 하지만 상품성이 없는 하급품을 뜻하는 말이었던 먹태는, 그러나 지금은 황태와는 다른 식감의 명태, 즉 ‘언바람태’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이쯤 되면 동해의 덕장 사람들이 말린 명태를 소비자에게 익숙한 ‘먹태’로 내놓을 법도 한데, 주민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무리 익숙한 이름을 쓰는 게 판매에 도움이 된다 해도, 공들여 생산한 제품을 하급품을 뜻하는 먹태로 부르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 명태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풍물 이야기는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하는 법. 이쯤에서 동해의 언바람태와 인제의 황태 얘기를 좀 해보자. 둘 다 명태를 말려서 만든 것이지만, 언바람태와 황태는 만드는 과정부터가 사뭇 다르다. 재료도 좀 다르고 건조 과정에서의 기온과 습도, 바람이 서로 다른 맛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언바람태와 황태의 가장 큰 차이는 건조 기간이다. 동해의 언바람태는 눈비를 가려주고 건조한 대기에서 한 달 남짓 바싹 말려 순차로 내다 팔지만, 인제의 황태는 눈비를 맞혀가며 겨우내 4개월 동안 말린 뒤에 한꺼번에 출하한다. 언바람태가 수분이 다 빠져 딱딱하고, 황태가 촉촉한 느낌을 주는 건 이 때문이다. 재료는 같은 명태지만, 크기가 좀 다르다는 것도 차이다. 언바람태는 러시아산 명태 22㎏ 한 상자 기준 20마리 남짓의 굵고 큰 고기로 만드는 반면, 황태는 같은 22㎏ 한 상자 기준 36마리 안팎의 작은 고기를 쓴다.

동해의 언바람태는 10월부터 12월에 잡힌 러시아산 명태를 수입해다 만든다. 여름에 잡은 고기를 동해의 덕장에다 걸면 건조 과정에서 배배 꼬여 상품성이 없기 때문이다. 언바람태는 가장 최근에 어획된 명태를 쓰고, 황태에 비해 말리는 기간도 짧으니 상대적으로 신선한 명태를 재료로 쓰고 있다는 게 묵호진동 사람들의 자랑이다.

사실 언바람태와 황태의 차이는 품질이라기보다 기호의 차이다. 딱딱하면서 쫄깃한 맛의 언바람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푸슬푸슬하고 부드러운 황태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딱딱한 언바람태를 재료로 쓰는 게 어울리는 음식도 있고, 부드러운 황태를 쓰는 게 제격인 음식도 있다. 모양과 맛은 다르지만 언바람태나 황태 모두 겨우내 고된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같다.

지금 묵호진동 덕장1길에서 덕장을 두고 언바람태를 출하하는 가구는 8호에 불과하다. 그래도 한 집 한 집의 덕장이 제법 커서 겨우내 이곳에서만 언바람태 35만 마리가 생산된다. 25만 마리면 15만 상자니까, 5t 트럭으로 환산하면 100대쯤 되는 양이다. 묵호진동에서 2대에 걸쳐 덕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상천(72) 씨는 “한창때는 묵호진동의 60여 가구가 덕장 일을 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여기 덕장에서 출하한 언바람태가 적게 잡아도 150만 마리가 넘었다고 했다. 지금도 골목 곳곳에 명태를 가득 매단 덕장의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인데, 그때는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 한섬… 파도의 결이 가장 아름다운 바다

동해시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동해의 바다라고 어디나 다 같은 건 아니다. 여러 번 가봐서 비로소 안 것이지만, 해변마다 바다의 느낌은 조금씩 다르다. 동해에서 이름나기로는 추암해변이 으뜸이고, 명성으로 치면 망상해수욕장도 못지않지만, 누군가 동해시에서 가장 호젓하고 아름다운 바다 한 곳만 꼽으라고 한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곳을 얘기할 수 있다. 동해선 철길 아래 한섬 해변.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맑은 날 오전 시간이다. 한섬 해변에서는 오전 나절의 황금빛 햇살이 파도의 결에 묻어 반짝인다. 파도가 높은 날이라면 그 모습이 더 황홀하다. 매번 다른 모양과 다른 결로 밀려오는 파도가 아침 볕을 받아 다른 색으로 빛나는 모습이라니….

오목하게 들어선 한섬 해변은 호젓해서 마치 섬처럼 느껴진다. 한섬 해변 부근에는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솔숲을 끼고 천곡항까지, 더 걸으면 고불개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해변 길이다. 해변 길의 일부 구간은 군사통제구역이라 해안선을 철조망으로 닫아놓은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손대지 않은 바다 경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조용한 해안을 산책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산책로에는 바다를 보는 정자란 뜻의 이름을 가진 관해정(觀海亭)이란 정자가 있고, 정자 너머에는 한겨울에도 푸른 조릿대 군락이 있다. 이 길을 걷노라면 파도 소리와 해풍이 조릿대를 흔드는 소리가 구별 없이 뒤섞인다.

같은 명소라 해도 널리 알리고 싶은 곳과 숨겨두고 싶은 곳이 있는데, 한섬 해변의 산책로는 숨겨두고 싶은 쪽이다. 그럼에도 이곳을 말하는 건 여기가 곧 관광지로 개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해시는 한섬 일원의 산책로에 2020년까지 해안 덱과 전망대, 체험존 등을 설치하는 관광지 조성 사업을 추진한다. 새로 만들 산책로에 붙인 이름이 ‘감성 바닷길’이다. 자연경관 훼손을 최소화해 개발할 예정이라지만, 공사가 시작되면 지금의 소박한 바다 풍경은 사라지고 말 게 틀림없다. 그러니 서둘러 다녀올 일이다. 묵호의 논골담 마을에서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듯, 훗날 한섬 해변에 서서 ‘손대기 전의 이쪽의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를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여행정보

동해 묵호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강릉갈림목에서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망상 IC에서 나간다. 산림조합중앙회 동부목재센터 앞 삼거리에서 동해·묵호 방면으로 우회전해 7번 국도를 타고 사문삼거리를 지나 발한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이내 묵호항이다. 논골담길은 묵호항 뒤편에 있고, 논골담마을을 마주 보고 언바람태를 말리는 묵호진동이 있다. 한섬해변은 해안선과 영동선 철로와 나란히 가는 도로인 해안로 옆에 있다. GS 천곡주유소 맞은편 철길 굴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한섬해변이다. 동해를 찾은 때가 마침 3·8일이라면 초대형 오일장인 북평장을 들러보면 좋겠다. 내비게이터에 북평 하나로마트를 입력하고 찾아가면 시장 한복판이다. 장날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 외곽에다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게 낫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동해시에는 다양한 등급의 숙소가 있다. 동해시 중심가인 천곡 중앙사거리 주변에는 현진관광호텔(033-539-2000), 도노호텔(033-534-1004), 코스모스호텔(033-535-6884) 등 관광호텔을 비롯해 제법 시설을 잘 갖춘 모텔이 한데 몰려 있다. 묵호항 부근에도 해안도로를 끼고 동해관광호텔(033-533-6035)과 꿈의궁전모텔(033-532-9996) 등이 있다. 바다 전망 객실에 투숙하면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숙소들이다. 동해까지 갔다면 회 맛은 보고와야 한다. 동해를 대표하는 횟집으로는 부흥횟집(033-531-5209)이 꼽힌다. 곁들임 음식보다 회를 중심으로 내놓는 곳이어서 푸짐한 상차림을 기대했다간 실망할 수도 있다. 묵호항에서 북쪽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까막바위회마을’에는 횟집들이 밀집해 있다. 묵호항에서 어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 변의 ‘부담 없는 횟집’(033-534-2234)을 추천한다. 상호 그대로 부담 없는 가격에 푸짐한 회를 내놓는 곳이다. 천곡동의 ‘한우설렁탕’(033-532-1589)은 고기를 넉넉하게 넣어주는 데다 국물 맛도 좋아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이름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