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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왕국 日本

醉月 2009. 9. 24. 08:30

日流 Story , 부럽다 그리고 두렵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도쿄=김동운 통신원 dogguli@hotmail.com

‘발매 일주일 만에 10만부 판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가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거둔 성과다. ‘1Q84’ 한국어판은 8000만 엔대(10억원 이상)에 이르는 선인세 등으로 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8월25일 발간된 ‘1Q84’ 1권은 교보문고 8월 5주차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발매 일주일 만인 9월1일 현재 10만부 가까이 팔렸다.

 

‘상실의 시대’ ‘도쿄기담집’ ‘해변의 카프카’ 등 하루키 전작들의 판매 또한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가히 ‘하루키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외에도 한국에서 일본 작가들은 아주 ‘잘나간다’. 그 중심축에 있는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 그의 대표작인 ‘공중그네’는 현재 80만부 이상 팔렸다.

 

또 다른 히트작 ‘남쪽으로 튀어!’ 역시 40만부 넘게 판매됐다. 오쿠다 히데오라는 ‘대박상품’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등 소수 유명작가의 작품에만 관심을 가졌던 국내 출판계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중그네’와 ‘남쪽으로 튀어!’를 낸 출판사 ‘은행나무’의 주연선 대표는 “2005년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가 발간된 이후 국내에 ‘진출한’ 일본 작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다양한 작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했다.

 

실제로 교보문고의 ‘연간 소설분야 동향자료’에 따르면 100위권에 든 일본 소설이 2005년 25종, 2006년 31종, 2007년 39종에 이른다. 2008년 26종으로 다소 주춤했으나 2009년 들어선 상반기에만 25종을 순위에 올렸고, 여기에 ‘1Q84’ 발간에 따른 ‘하루키 특수’까지 누리고 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추리, 판타지, 공포물 같은 일본판 장르소설의 인기다. 최근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은 ‘용의자 X의 헌신’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작품 8종을 2009년 상반기 100위권 내에 올려놓았다. 장르소설가로 분류되는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역시 국내 마니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또 일본에서 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애니메이션풍(風) 장르소설인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은 특히 10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한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만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 라이트 노벨의 특징. 교보문고 관계자는 “라이트 노벨은 4~5년 전부터 별도 코너를 마련할 정도로 인기”라며 “대부분 시리즈물이라 판매가 꾸준하다”고 말했다. 8월31일 현재 일본 라이트 노벨로 분류된 발간 도서는 1755종에 이른다.

소설뿐이 아니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이래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일본 문화 콘텐츠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우리 문화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 과거 ‘해적판’으로만 접하던 일본 만화는 개방 이후 정식 한국어판으로 들어와 국내 팬들을 사로잡았고,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는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일문화연구소 정지욱 학예연구관(영화평론가)은 “특이하고 독특한 이야기를 다룬 일본 만화에 빠져들던 마니아들이 ‘누구나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을 만나 그 속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등 일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작품은 마니아를 넘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고, 개방 직후 ‘흥행 참패’를 면치 못하던 일본 영화 역시 소소한 일상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을 중심으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의 문화 콘텐츠 중 가장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애니메이션은 각종 장르의 다양한 작품이 전 세계적 사랑을 받고 있다. 케이블TV에서는 일본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2004년 이후 케이블을 통해 방영된 일본 드라마는 200여 편에 이른다. 일본 작품에서 ‘스토리’만 가지고 와 리메이크하는 경우도 많다.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일본 작가 요코 가미오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

 

배우 김명민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은 MBC 드라마 ‘하얀 거탑’과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 역시 일본 소설 및 드라마가 원작이다. SBS는 일본 작가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한일 합작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일본 문화 콘텐츠는 우리나라에서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그의 작품은 30여 개국에서 번역, 판매된다.

 

유럽, 북미권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일본과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많이 얽힌 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아 하루키는 민간 외교관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일본 영화의 대부’라 불리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서구의 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1960년 율 브린너, 스티브 매퀸 등 유명 배우가 참여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황야의 7인’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를 모티프로 제작됐다.

‘킬빌’과 ‘펄프픽션’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 문화의 팬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는 일본 문화 콘텐츠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비결’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읽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많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일본에서는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관련 책을 다양하게 쏟아낸다”며 “최근 양극화가 문제가 되자 1917년에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이라는 책을 복간했는데, 그것이 40만부나 팔렸다”고 말했다. 책의 내용은 지금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빈곤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책을 산 사람이 40만명에 이른다는 것.

 

이처럼 일본은 책을 내면서 사회문제를 공론화하고, 일본인들은 책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일본 출판시장의 규모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일본 출판연감에 따르면 신간의 경우 1990년 4만 종을 넘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증가해 2005년 7만8000여 종으로 늘어났다. 총 발행부수는 1997년 15억7000만부를 정점으로 감소했지만, 2005년에도 14억부 수준이다.

 

물론 인구에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2007년 신간 발행량이 만화를 포함해 4만1000종, 총 발행부수가 1억3000만부(대한출판문화협회)에 불과하다. 한기호 소장은 “잡지와 출판이 연계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도 일본 출판의 특징이자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잡지는 1994년 이후 매년 4000여 종을 발행하고 있다. 발행종수는 월간지와 주간지를 합쳐 모두 42억8000부에 이른다.

 

발행하는 잡지 수와 이를 사보는 독자 수가 많은 만큼 작가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잡지를 기반으로 한 전문 라이터로 활동할 수 있다. 그 결과 자신만의 풍부한 콘텐츠를 모아 단행본을 내고, 잡지에서 글을 접한 ‘골수’ 독자들이 다시 단행본을 사서 읽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진다는 것.

도쿄 신바시 역에 있는 서점. 전문가들은 소설이나 만화 등 일본 문화 콘텐츠의 인기 비결로 ‘읽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많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는다(좌). 오랜만에 ‘하루키 특수’를 누리는 국내 출판업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온·오프라인 예약판매로 이어지고 있다(우).

대상 세분화, 맞춤형 콘텐츠 제공

다양한 대상을 겨냥한 ‘스토리텔링’도 일본 문화 콘텐츠의 경쟁력을 키우는 요소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차이를 들자면 스토리텔링의 대상에 있다. 일본의 경우 성인용과 어린이용, 소녀용과 소년용, 직장여성용 등 고객층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거기에 맞춰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이는 출판만화도 마찬가지). 반면 디즈니의 경우 대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이 소재와 내용 등이 특이하고 독특한 이유도 대상을 최대한 세분화해 이들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려 하기 때문. 영화도 마찬가지다. 성인물만 예로 들면 성기가 직접 노출되는 하드코어물, 성기를 모자이크 처리한 소프트물, 10대 후반~20대 초반 여성이 비키니 등의 가벼운 옷차림으로 몸매를 한껏 자랑하는 그라비아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시스템

생존경쟁이 치열한 것도 일본 문화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경쟁 시스템 역시 콘텐츠를 키우는 힘이다. 컬처매거진 ‘브뤼트’의 김봉석 편집장(문화평론가)은 “만화잡지의 경우 매호 인기투표를 해서 하위권에 있는 만화는 연재를 중단한다. 그러니 작가는 더욱 독특한 소재, 탄탄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디렉터도 “수많은 젊은이가 만화 산업에 뛰어들지만 그중 극히 소수만이 출판계에 등단해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고, 무수한 작품 중 다시 극소수만이 좀더 큰 규모인 TV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또 그중에서 선택받은 몇몇만이 ‘극장판’ 애니메이션 시장으로 진출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피라미드 구조의 생존경쟁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특히 스토리를 발전시키는 비결이 된다.

 

미디어믹스

소설과 만화, 영화, 드라마는 물론 캐릭터 사업 등 여러 산업 간 교류를 일컫는 ‘미디어믹스’(원소스 멀티유즈)는 일본 문화 콘텐츠를 읽어내는 주요 키워드다. 서경대 일어학과 이즈미 지하루 교수는 “1970년대 출판사가 영화 산업에 진출하면서 미디어믹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출판사 소유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를 보여주면서 소설도 같이 파는 전략이었다.

이즈미 교수는 “지금은 영화 한 편을 만들 때도 ‘영화제작위원회’가 꾸려져 영화를 소설로 각색해 출판할 것인지, TV 드라마로 만들 것인지, 캐릭터 상품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다 미리 기획한 뒤 제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장르 문학도 비슷하다. 김봉석 편집장은 “순수문학과 달리 장르문학의 경우 창작 단계부터 편집자와 작가가 긴밀히 상의해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다른 장르로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콘텐츠는 ‘유료’

‘B급 문화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아키하바라(秋葉原)는 흔히 ‘일본의 용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의 용산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짝퉁’ 소프트웨어, 즉 불법복제 CD나 DVD가 없다는 것. 일본인은 음악이나 영화가 수록된 CD나 DVD,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개인의 창의력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는 당연히 돈을 지불해서 구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P2P 사이트를 이용해 음반이나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하는 광경을 일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불법복제 때문에 누수될 뻔한 금액을 고스란히 수익으로 돌릴 수 있으니, 그 혜택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일본이 전 세계를 사로잡는 콘텐츠 왕국이 된 이유를 ‘스토리 본연의 힘’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상상력, 소소한 일상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능력, 인간 본성을 자극하는 흡인력 강한 콘텐츠 등 일본만의 스토리가 전 세계인을 빨아들인다는 것. 과연 일본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스토리의 힘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한국과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드코어 ‘사무라이’ 디테일의 숨은 힘 ‘오타쿠’
일본 문화 특징 형성한 4대 토양의 ‘복합 하모니’ 디테일, 성(性), 폭력, 추리, 하드코어…. 소설이나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일본 문화의 강력한 키워드들이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기 힘든 일본식 상상력이 가미돼 인간 본성을 자극하는 이러한 콘텐츠들은 왜 일본에서 활발히 생성, 융성, 진화할 수 있었을까.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디렉터는 “일본 스토리의 힘은 인위적이거나 일시적인 사회현상에서 태동한 게 아니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역사와 사회적 배경의 연속적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스토리, 그 힘의 원천이 된 역사적·정신적·지리적 토양은 뭘까. 탄탄하고 다양한 스토리의 ‘발전소’ 구실을 하는

일본 콘텐츠의 뿌리를 살펴봤다.

[역사적 토양] 조몬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 역사가 빚은 문화

서경대 일어학과 이즈미 지하루 교수는 일본인의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려면 기원전부터 3세기까지 이어지는 조몬(繩文)시대와 야요이(彌生)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이 두 시대의 전통이 현대 일본인의 습성이나 문화 발달에 밑거름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수렵 및 채집생활을 하던 조몬시대에는 남성적이면서도 활동적이고 정복적인 기질이, 벼농사와 농경문화가 보급된 야요이시대에는 화합적이고 조화로운 기질이 발달했는데 이 시대들의 정서적 배경이 일본인을 규정하는 양 극단적 성격으로 나타나게 됐다”고 분석했다.

조몬시대는 요괴나 숲을 중심으로 한 기담의 형성과 샤머니즘적 전통에, 그리고 야요이시대는 ‘와(和)’를 바탕으로 한 일본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에 영향을 끼쳤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중기인 10세기 전후에는 현대 일본 소설에까지 입김을 미치는 또 다른 틀이 뿌리내리게 된다. 이즈미 교수는 “이 시기에 싹튼 독자적인 문화가 현대 일본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 무렵 여성과 아이를 중심으로 한자가 아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보급, 애용되기 시작하면서 ‘겐지 이야기’ ‘침초자’로 대표되는 모노가타리(物語) 문학이 융성할 수 있었다. 주로 1인칭 시점으로 개인의 얘기를 전하는 일본의 대표적 문학 형태인 사소설(私小說)은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이다.

현대 일본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대중문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꼽히는 시기는 에도(江戶)시대(1603~1867)다. 무사정권인 막부(幕府)체제가 출범하면서 이전의 귀족문화 대신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때다.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김봉석 편집장(문화평론가)은 “이 시기에 전쟁이 줄어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은 여유 시간을 오락문화를 향유하는 데 보냈다”며 “이로 인해 현대 일본의 문화 콘텐츠 중 노골적으로 성(性)과 폭력을 다룬 소재들에는 하드코어적인 사무라이식 전통이 깃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무라이의 정신세계와 문화는 일본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한국외대 문화콘텐츠학 조소연 강사는 “이는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도 칼로 상징되는 일본적 정서의 주요 코드로 소개됐으며,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사무라이 전통 자체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가 일본 문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에도시대에 발달한 서민 문화와 근대 상업주의의 융합은 성적 콘텐츠의 발달에 불을 붙였다. 일본 춘화에서 드러나는 낯 뜨거운 성기 묘사, 성을 파는 게이샤 문화 역시 이 시기에 싹텄다. 성에 대한 일본인들의 개방적 성향이 기여한 바도 크다. 중앙대 일어일문학과 이재성 교수는 일본 신화에서 한 여성이 여러 남성과 정을 통하는 얘기를 흔히 발견할 수 있고, 형이 사망하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거나 사촌 간 결혼을 허용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됐다는 점을 들어 일본인의 성적 개방성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 문화의 큰 축을 이루는 성적 콘텐츠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승, 심화될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일본 현대사와 연결해 해석할 수 있다. 세명대 일본어학과 김필동 교수는 “전후(戰後)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지는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일본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하는 데 대해 저항 세력이 생겨났고, 이 세력들은 기득권에 대한 불만을 성이나 폭력과 관련된 극단적인 문화 콘텐츠로 표출했다”고 말했다.

 

[종교적 토양] 다신교 문화, 요괴 스토리를 꽃피우다

다신교 전통이 깊은 일본에서는 초현실적 존재들과의 공생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도쿄의 한 동네 신사와 절 안에 자리한 무덤(왼쪽).

수백만의 신을 모시는 다신교 문화는 일본에서 요괴담, 귀신 얘기 등의 콘텐츠가 꽃피우는 직접적인 토양이 됐다. 전 세계적 히트작 ‘포켓몬스터’의 캐릭터들도 요괴가 그 원형이다.

이즈미 교수는 “일본에서는 요괴학회를 운영하거나 대학에서 요괴학을 가르치기도 한다”며 대학 내 요괴학 강의가 인기를 끈다는 최근의 한 일본 신문기사를 소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 기독교와 경제개발의 영향으로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급격히 유실된 기담들이 일본에서는 학계를 통해 체계적으로 계승,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

그는 일본에서는 신사, 절, 무덤이 거주 공간 가까이에 자리하는 만큼 귀신, 신 같은 초현실적 존재들이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공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특유의 정서가 생겨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귀신, 요괴와 관련된 콘텐츠가 끊임없이 확대 생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서적 토양] 추리소설에 나타난 ‘오타쿠’ 기질

 

최근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게 된 일본 추리소설은 1980년대에 대거 출간되기 시작했다. 김필동 교수는 “1980년대에 들어 일본 사회가 급격히 다양화하면서 문화나 인간 의식에도 다극화 현상이 생겨났다”며 “변화한 독자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찾으려는 시도가 추리소설을 통해서도 표현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추리소설이 지금까지 융성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인 특유의 ‘오타쿠’(집착적 마니아) 기질이 반영됐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도 많다.

 

김봉석 편집장은 “1980년대 일본의 각 대학을 중심으로 융성하던 추리소설 동호회에서는 추리소설의 스토리를 일종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범인을 색출하는 데 몰두하면서 오타쿠 기질을 드러내는 광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끝까지 파고드는 적극적, 집착적 성향이 꼬리를 문 각각의 단서를 퍼즐처럼 짜맞춰야 하는 추리소설의 본질과 맞아떨어졌기에 추리·범죄소설이 일본의 중요한 현대 문화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타쿠 기질의 기저에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인의 직업의식이 깔려 있다. 세키몬(石門)학파의 주창자인 이시다 바이간(1685~1744)은 ‘일(노동)이 곧 정신수양이자 선’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인 특유의 직업관과 근로 윤리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서진석 디렉터는 “직업 또는 일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려는 일본인의 직인(職人)정신, 장인정신, 천하제일주의가 지극히 미시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을 끝까지 파고드는 오타쿠 기질과도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와(和)를 존중하는 문화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외향은 사회공동체의 규격에 맞추되, 표출되지 못한 욕구를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산하려 한 데서 오타쿠 문화가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인의 오타쿠 기질은 일본의 스토리들이 디테일에 강하고 전문적인 콘텐츠를 담고 있다는 평을 얻게 했다. 몇 해 전 큰 인기를 끈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이나 옴진리교 사건의 재판을 10년간 방청하며 취재한 내용을 활용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 등 최근 작품들에도 이러한 기질이 반영돼 있다. 조소연 강사는 “소설가는 물론 만화가들도 취재여행을 가거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사전 조사를 하는 사례가 많으며, 이러한 노력이 ‘디테일의 힘’을 이끈다”고 설명했다.

 

[지리적 토양] 육지와 고립된 섬, 빽빽한 숲의 미스터리

도쿄 시부야에 있는 신사 ‘메이지 신궁’. 특정 인물, 신, 자연물을 신령으로 모시는 신사는 일본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섬나라로 육지와 고립된 지리적 조건은 일본이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내부적으로 신속하게 전파할 수 있게 했다. 일본 문화의 다양성 가운데 해외 문물을 일본식으로 해석한 콘텐츠가 많은 이유도 일본인의 남다른 수용력 때문이다.

또 나무가 곧고 높이 자라는 데다, 빛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고 울창한 숲이 많은 일본의 지역적 조건 역시 문화 콘텐츠 형성에 기여했다는 지적이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의 얘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 이 작품의 원제 ‘센과 치히로의 가미카쿠시(千と千尋の神隱し)’에서 ‘가미카쿠시’는 주인공이 신의 장난으로 다른 세계로 옮겨져버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조소연 강사는 “숲속에 사는 신과 정령들의 얘기, 깜깜한 숲에서 탄생한 요괴들의 얘기가 많은 이유도 일본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즈미 교수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 등 유명 감독들의 작품에는 숲과 나무에 대한 신앙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고 했다. 이는 마을을 지키는 나무 신 등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다신교 문화와도 연계된다.

한일문화연구소 정지욱 학예연구관(영화평론가)은 “습하고 음습한 지역이 많은 기후적 특성으로 실제 일본에 귀신이 많다고 말하는 무속인이 꽤 많다”며 “그러나 귀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일본에 많다는 사실이 이를 소재로 한 콘텐츠의 융성에 기여한 바 크다”고 해석했다.

일본의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는 이처럼 역사적, 지리적, 종교적, 정서적 토양을 바탕으로 생성 및 발전해왔다.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이용하는 힘, 그리고 풍부한 자본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앞으로도 이 ‘콘텐츠의 보고(寶庫)’를 무한히 확대 재생산할 수 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전망했다.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현대인 불안을 먹고 크는 ‘괴담’
언제 어디서나 등장해 공포감 키워 … 끊임없이 재탄생, 영원히 증식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는 말이 있다. ‘800만의 신이 사는 나라’란 뜻으로 일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800만’이라는 수는 양을 이야기한다기보다 그만큼 많은 신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일본 전통사상에서는 ‘산에 자라는 나무에서부터 돌 따위의 무생물까지 신은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으며, 그렇기에 세상은 사람뿐 아니라 온갖 자연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라고 여긴다. 서양의 신이 교회에 있다면 일본의 신은 발길에 차이는 돌에도 있다.

이처럼 공포와 외경의 대상인 신이 만물에 깃들어 있으니 일상이 곧 괴담의 세계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괴담 전통은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서양의 호러 전통이 특정 대상에 대한 비현실적인 폭력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일본 괴담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사는 나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서양에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악마나 괴물 같은 폭력의 집합체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삶에 급작스럽게 끼어들어 생명을 위협한다. 하지만 그들의 폭력에 영향을 받는 것은 주로 ‘어떤 이유’에 관여한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한정되고, 논리적인 이유로 그들을 피하거나 퇴치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를테면 비정상적인 폭력성을 내재한 연쇄살인범이다.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할로윈’의 마이클, ‘나이트메어’의 프레디가 대표적인 경우이며, 특히 최근에 와서는 점점 잔인한 살인마를 내세우는 영화가 주를 이룬다.

 

자가증식 거쳐 정점에 이르는 괴담

반면 일본에서 공포의 근원이 되는 존재는 폭력적이라기보다 존재론적이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 삶에 편입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존재에서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도 의미도 찾을 수 없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다. 하굣길에 만난 빨간 마스크 쓴 여자가 자신이 예쁘냐고 묻는 말에 예쁘다고 대답하면, 마스크를 벗고 양쪽으로 찢어진 입을 보이며 이래도 예쁘냐고 묻는다.

빨간 마스크를 한 여자의 정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고 등장하며 왜 이런 행각을 벌이는지 또한 짐작할 수 없다.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며, 생명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존재가 우리 삶 가까이 있다는 자체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일본의 괴담은 일상의 소소하고 보편적인 불안이 커져 발전한 형태가 많다. 실제로 일본 공포영화를 할리우드에 전파시킨 ‘링’에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공포의 근원이며, ‘주온’에서도 소름끼치는 공포를 안겨주는 것은 이불 속, 머리카락, 지붕 아래 빈 곳 등으로 우리 주변 곳곳에 있다. 공포만화의 대가 이토 준지의 작품을 보면 그런 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소재로 삼는 공포의 대상은 배수관, 허수아비, 골목길, 곰팡이, 아이스크림 버스, 전화, 달팽이, 벽, 금붕어 등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작가는 얄궂게도 삶에 가장 밀착한 사물들에서 삶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존재들을 창조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괴담이 전해져왔다. 전해져왔다기보다 사람들의 삶에 유입돼 함께 생멸했다. 에도 시대(1603~1867)부터 이어진 괴담들은 현대에 이르러 자가증식을 거쳐 정점에 다다르고 있다.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괴담 가운데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지금 일상에 맞게 변형된 것도 적지 않다. 에도 시대 한 관리가 당시의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해 기록한 ‘미미부쿠로(耳袋)’라는 괴담집은 ‘소문을 모아 수집한 이야기 주머니’라는 뜻으로 총 10권에 1000편의 기담이 담겨 있는데, 이 중에는 형태만 바뀌어 현대의 도시 괴담이 된 이야기도 많다.

실제로 이 형식을 본떠 현대의 괴담을 모은 ‘신(新)미미부쿠로’라는 괴담집과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특징들은 한국 태국 중국 등 아시아의 전통적 괴담들과 비슷하거나, 적어도 특별히 다르지는 않다. 일본 특유의 전통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점이라면 일본은 괴담을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 향유하고 재생산해왔다는 데 있다.

 

‘나 홀로 숨바꼭질’ 하는 이유

토미에는 현대 일본에서 성장하는 괴담의 생태와 닮았다.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증식한다.

최근 일본의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나 홀로 숨바꼭질’이라는 놀이가 유행처럼 번지며 특이한 일들이 벌어져 화제다.

이 놀이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정교하게 마련한 준비물로 새벽 3시에 혼자 행하는, 일종의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이다. 놀이를 한 뒤 알 수 없는 현상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는 경험담이 인터넷에 연달아 올라오면서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원하지 않은 상황에 빠져 공포나 두려움을 느꼈다면, 이 놀이에 와서는 스스로 주술을 행해 공포를 맛본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섬뜩한 경험담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자신 또한 같은 경험에 참여하고 싶다는 특이한 감성을 공유했다. ‘나 홀로 숨바꼭질’은 현대에 들어 새로 등장한 괴담이다.

 

가족이나 학교 같은 공동체는 점점 사라지고 파편화해 오로지 혼자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불안감을 표출한 괴담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로만 보면 1980~90년대에 유행한 ‘분신사바’와 닮았지만, 분신사바가 여러 명이 모여 무언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주술이라면 ‘나 홀로 숨바꼭질’은 혼자서 하는 놀이라는 특징이 있다. 일본에서 괴담은 단순히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해소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화처럼 향유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탄생한다.

 

예를 들어 ‘링’의 원작자이기도 한 소설가 스즈키 고지의 신작 소설 배경이 공중화장실이라는 점에 착안, 그 내용의 일부를 인쇄한 화장지가 생산되기도 했다.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귀신이나 도깨비 등 무서운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자리를 박탈당하거나 억눌려 있는 한국과는 다른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 작품이나 영화로 만들어진 이토 준지의 작품 ‘토미에’는 매우 상징적이다.

 

토미에는 처음 작품에서 지나친 아름다움 때문에 학생들의 질투와 교사의 욕망에 희생됐다 되살아난 존재다. 그녀는 토막난 상태로 곳곳에 버려지는데, 각각의 신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토미에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되살아난 토미에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예전보다 큰 매력을 풍기며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유혹당한 사람들은 토미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동시에 그를 살해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결국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난 토미에를 죽이지만 그 죽음 속에서 토미에는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며 영원히 증식한다. 토미에는 현대 일본에서 성장하는 괴담의 생태와 닮았다. 사람들은 무서움에 떨면서도 괴담이나 공포영화의 매력에 빠진다.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새로운 모습의 괴담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장소,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괴담에 크게 놀란 사람은, 다시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거나 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실 괴담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사거리에, 손을 씻는 세면대에, 곤한 머리를 내려놓은 베개 아래에, 심지어는 꿈속에 늘 자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공포에 익숙한 서양 사람들에게는 생경할 수밖에 없는 공포다. 일본의 괴담과 호러 전통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몇몇 작가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에 내재한 하나의 문화현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임지호 북스피어(booksfear) 편집장 jeeho.lim@gmail.com

 

세분·극단 취향의 사생아 ‘변태’
성적 개방성·다양한 만화 장르 … 자기 세계 추구가 日 대중문화의 ‘진짜’ 근간

일본인의 변태성은 종종 성적 방종으로 이해된다.

일본인의 긍정적 이미지를 몇 가지로 추려보자. 근면, 성실, 소박, 정확성, 치밀함….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일본인의 부정적 이미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잔학성, 종전 후의 뻔뻔한 태도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쌓인 또 다른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변태성’이다. 일본인의 변태성은 한국 사회에서 성적 개방성 또는 성적 방종으로 이해된다. 일본 대중문화가 철저히 제어되던 시절, 일본을 다룬 몇몇 서양 영화에서 이 같은 성향이 드러났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야쿠자’, 미니시리즈를 한 편의 영화로 묶은 ‘쇼군’ 등은 일본인-특히 일본 ‘여성’-의 성적 분방함을 상세하게 드러내 큰 화제가 됐다. 여기까지는 사실 ‘문화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정작 문제가 된 건 일본 만화가 해적판으로 우리 만화대본소를 장악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다.

다소 변태적 성 묘사를 담은 ‘시티 헌터’ ‘정크 보이’ ‘실험인형 더미 오스카’ 등이 일본의 ‘변태문화’를 청소년에게 인식시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데크가 보급되면서 이 같은 현상은 가속화됐다. 애니메이션 마니아층이 ‘공수’해온 ‘우르츠키 동자’ ‘크림 레몬’ ‘레몬 엔젤’ 등 성인용 OVA(오리지널 비디오 아니메·극장이나 TV를 거치지 않은 비디오용 애니메이션)가 음성시장을 강타했다.

 

수많은 서브 장르가 만든 1조 엔대 거대 시장

1990년대는 일본에서도 AV(어덜트 비디오·성인용 비디오) 전성기였지만, 한국에서도 그랬다. LD(레이저 디스크)라는 새 미디어를 타고 그라비아 비디오가 노래방 화면으로 소화되고 PC통신, 인터넷을 거치면서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조차 힘든 극단적 변태성욕 자극 콘텐츠가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일본 쇼 프로그램에 AV 배우들이 버젓이 등장하고, 급기야 AV 스타 아오이 소라가 내한해 어버이날 서울시민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퍼포먼스를 벌이자 충격은 배가됐다. 일본은 ‘변태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일본은 정말로 성적 변태들의 나라일까. 다른 건 몰라도 성 상품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다.

 

일본 AV산업은 약 1조 엔대 규모의 시장이라 알려져 있다. 우리 돈으로는 13조5000억원 정도다. 한국 영화시장 전체 규모가 2008년 기준 1조2215억원이었다. 전 세계적 위용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CG산업 규모도 2조원대에 머문다. 그러나 성 상품의 인기와 ‘변태성’과의 연결고리를 쉽게 이을 건 못 된다. 우리가 일본 성 상품에 대해 가진 인식은 상당 부분 ‘지나치게’ 카테고리화한 ‘다양성’에 있다.

모델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그라비아 비디오가 있는 한편 레이프(강간)물, 난파(헌팅)물 등 기기묘묘한 특정 욕구를 채워주는 서브 장르 또한 즐비하다. 간단하게만 따져봐도 수십 종이다. 또한 장르마다 전문제작사들이 따로 있다. 그런 라벨 자체가 상품 선택의 코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장르는 이른바 ‘주류’가 아니다.

 

다른 식으로 접근해보자면, 일본 AV시장에 딱히 ‘주류’란 없다. 수많은 서브장르가 각자 극단적으로 분화된 시장을 나눠가지며 1조 엔짜리 거대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서브 장르,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서브 장르들이 한국으로 불법 유입돼 ‘변태성욕자들의 천국 일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넓게 보면, 이 같은 다양성의 문제가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에 ‘변태’ 딱지를 붙여주는 셈이다.

 

일본 대중문화 산업 중 가장 경쟁력 있는 만화시장을 살펴보자. 일본에는 장르가 많다. 학원물만 해도 학원 스포츠물, 학원 폭력물, 학원 판타지물, 학원 성애물, 학원 동성애물 등 수도 없다. 물론 우리도 이런 장르를 소화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일본에서 소화된 장르 중 상당수가 척박한 한국 만화 현실에서도 기어이 도입됐다. 그러나 한국은 ‘유행’을 탄다. 예컨대 1980년대 초반은 시대극의 시대였다.

 

항일물과 중국고전물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스포츠물이 강세를 보였다. 야구, 축구, 농구 심지어 씨름까지 만화화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시대극이 뜸해졌다. 그러나 일본 시장에는 이런 식의 붐이 없다. ‘슬램덩크’가 인기를 끌었다면 수없이 갈라진 장르 시장 중 스포츠물 쪽에 ‘농구’ 카테고리가 하나 더 정착될 뿐이다. 히트작이 늘수록 서브 장르는 더 세분화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더 고도화한다. 이른바 ‘하드코어’ 장르 만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림보다 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 더 많은 면을 차지하는 만화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현상은 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음악, 공연 등도 같은 맥락에서 세분화한다. 일본에는 아직까지도 단관상영을 중심으로 한 독립영화 시장이 살아 있고,

도쿄 시부야를 중심으로 한 인디음악 신(scene), 실험극단들이 존재한다.

이미 그 자체로 세분화 시장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더 극단화한다. 독립영화 중에서도 기괴한 취향을 챙겨주는 비디오용 영화들이 나온다. 여고생이 좀비들과 유혈낭자한 사투를 벌이는 스플래터(피가 튀고 신체가 절단되는 등 잔인한 공포영화지만 분위기는 대개 코믹하다) ‘최강 여고생 리카’ ‘오네찬바라’ 등이 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신중현 음악만을 연주하는 카피밴드 ‘곱창전골’까지 활동할 수 있는 마니아적 서브시장이 생성됐을 정도다. 한국 트로트 가수 이박사가 부도칸(武道館) 공연까지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서브 시장이 탄탄해서다. 몇십 년째 셰익스피어극만 공연하는 극단도 같은 서브 지향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 유행과 관계없는 나만의 붐

일본 만화시장에 주류는 없다. 수많은 서브 장르가 존재할 뿐이다.

일본에는 그래서 ‘마이 붐’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세상 유행과 관계없는 ‘나만의 붐’ ‘나만의 유행’이라는 의미다. 조금 기괴한 취미를 갖고 있더라도 ‘마이 붐’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마이 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건은 어느 분야라도 충실히 갖춰져 있다. 일단 그 지식적 요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출판시장이 단단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마니악한 취미, 예컨대 종이 글라이더 접기 같은 것만 해도 관련 서적이 수십 종이며, 심지어 고대 화살촉에 대한 서적도 수권이 나와 있을 정도다. 그러니 극단적 취미, 극단적으로 세분화한 취향이 만족된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변태성’으로 비친다. 일본 AV에 빠져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 쌀 한 톨에 깨알 같은 그림을 새겨넣는 취미가 있다면 우리 눈에는 그 사람 역시 변태로 보인다.

일본인이 이런 성향을 지니게 된 데는 여러 분석이 따른다. 기본적으로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面前·겉으로 드러난 태도)가 철저히 나눠진 생활양식 탓에 내적 개별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조건이 있다. 사회적 통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에 따른 개개인의 반발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원인이야 명확히 알 수 없겠지만, 이 같은 경향을 쉽게 드러내는 사회 분위기는 분명히 있다.

결국 지극히 세분화한, 극단적 성 관련 콘텐츠를 통해 널리 홍보(?)된 일본 문화의 ‘변태성’은 사실상 일본 문화 자체에 깊이 배어 있는 ‘자기 세계 추구’ ‘마이 붐’ ‘혼네’ 풍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대중문화 시장의 근간을 일궈낸다. 작지만 충성도 높은 서브 시장들이 모여 큰 시장을 만들어낸다.

일본은 이런 점에서 작은 문화 콘텐츠 공급업자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라벨이라도 자기 시장을 찾아간다. 하다못해 아마추어들이 그린 만화 동인지 시장조차 정착된 나라다. 그러나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지 말아야 부분도 물론 있다. 일본 대중문화 시장은 ‘작은 것’과 ‘세분화’한 것, ‘극단적인’ 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절대다수는 여전히 ‘해리 포터’를 보러 줄을 서고,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의 음반을 산다는 것이다.

DVD 매장의 AV 코너에는, 고객들이 여전히 서로 눈치를 보며 잘 얼씬거리질 않는다. 그들만의 ‘소중(小衆)문화’가 일본인 절대다수가 즐기는 ‘대중문화’라 착각해선 곤란하다. 일본의 문화환경은 ‘변태’도 받아들이고 만족시켜주는 환경으로, ‘변태’들이 탄탄히 기반을 받쳐주고 있을 뿐 ‘변태들이 중심에 선’ 환경은 아니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

 

유치하지만 귀여운 놀이 ‘가와이’
연령 인지력 망각시키는 무국적성 … 창의적 아이디어 경쟁 기능으로 확대

1974년 11월1일 ‘태어난’ 헬로 키티(ハロ-キティ)는 단순한 얼굴에 입도 없고, 표정도 없다. 그래서 헬로 키티 ‘오타쿠’들은 모두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볼 때마다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순수하고 착했던 과거 어느 한순간으로 귀환했다고 착각하며, 그걸 믿는 자신을 대견해한다.

헬로 키티 이미지로 집 안의 모든 인테리어와 사물(벽지, 책장, 식탁, 소파, 가전제품 등)을 꾸미고, 작은 물건에까지 헬로 키티 디자인으로 맞추기를 즐기는 마니아를 ‘키티라(キティラ)’라고 부른다(헬로 키티의 캐릭터 상품 목록을 보면, 높은 도수의 술을 제외하고는 상품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키티라’는 일종의 ‘제례적’ 행위로 스스로를 유치하지만 착하고 순수했던 유아시절의 자아로 포지셔닝한다.

역설적이지만, 여성학자들은 헬로 키티를 성적인 상품 코드로 분석하기도 한다. 헬로 키티가 지닌 순수한 ‘기표(記表)’가 다른 성적 상품 코드의 ‘기의(記意)’를 합리화하는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표정한 하얀색의 고양이가 섹시하게 느껴지는 해석 과정은 일본에서 가와이 문화가 엽기 문화와 중첩되고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독특한 가와이 문화는 유치할 정도의 귀여움을 자신만의 문화로 특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가와이 문화의 무국적성은 연령 인지력을 망각시킨다. 사람들은 귀여운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귀여움을 간접적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신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10대의 감성적 취향으로 시작된 가와이 문화가 청년은 물론 중년, 노년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대사로 임명된 도라에몽

일본 정부는 가와이 문화를 국가 브랜드로 활용해 문화상품으로 전략화하고 있다. 미국의 ‘스마트파워’에 대응하는 일본의 ‘큐트파워’로서의 문화 전략은 이른바 의식주 문화의 다양한 아이템, 즉 패션, 음식, 주거용품, 가전용품, 개인 액세서리용품 등과 연계된다.

일본 외무성은 최근 일본 패션을 세계 브랜드로 홍보하기 위해 ‘가와이 대사(大使)’ 3명을 임명했다. 가와이 대사로 뽑힌 3명의 여성은 각각 여고생의 청순한 교복 패션, 계급적 판타지를 내재한 공주풍의 롤리타 룩, 10대들의 패션 거리 하라주쿠(原宿)의 차별화한 유행 패션을 상징한다. 이런 이벤트는 일본 특유의 귀여운 패션코드가 국가적 상품 브랜드로 특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외무성은 스테디셀러 만화 캐릭터인 ‘도라에몽’을 애니메이션 문화대사로 임명, 태국 대만 등 아시아에서 홍보활동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자평했다. 미국이 소프트파워로 대변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미국식 꿈의 문화를 상품화하는 것처럼 일본도 큐트파워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연계해 일본식 문화상품의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일본 사회는 가와이 문화를 국가 브랜드로 활용해 문화상품을 만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도라에몽의 애니메이션 문화대사 임명식.

실제로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되는 헬로 키티는 여전히 가와이 키드의 표상으로 70개국에서 매년 5만 종류의 신상품이 쏟아져나올 만큼 세계적 판타지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패션업체 크리스찬 디올, 스와로브스키 등이 헬로 키티를 이용한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선보였고, 패스트푸드업체 맥도널드는 미국과 대만에서 어린이 메뉴를 구입하면 헬로 키티 손목시계를 나눠주는 마케팅을 펼쳤다. 지속적인 마케팅은 세대 간 간극을 허물며 키티 세대를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다.

가와이 문화는 좁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섬나라 사람들의 문화에서 출발한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독자층을 늘려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축소지향의 본능적 욕구와 시각적 귀여움, 순수한 감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자국 문화 덕분이다. 귀여움을 놓고 벌이는 자발적 경쟁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일본식 삶의 방식이 되고 있다.

20세기 말 일본의 세기말 증후군과 함께 개인주의가 극대화한 젊은 세대들의 소비유형이 자신만의 특화된 공간문화로 축약됐다. 오타쿠의 문화적 행태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동일화로 연계되면서 가와이 문화는 더욱 심화됐다. 가와이 문화의 여러 행태 중에서 최근 특화한 장르가 ‘모에(萌え)’다. ‘모에’는 ‘움트다’라는 뜻의 일본어 동사 ‘모에루(萌える)’에서 유래한 말로, 젊은 세대에서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쁜 느낌을 표현하는 구어체다.

휴대전화, e메일, 인터넷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최근에는 특정 캐릭터에 한정되지 않는 외형적 특징이나 성격, 그리고 직업이나 사회 지위 등 속성을 기호화하는 말로 쓰인다. 예를 들면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F4 같은 꽃미남 주인공이나 ‘바람의 화원’에서 배우 문근영의 남장여자 역할처럼 유치함과 귀여움이 심화된 코드를 문화 소비자들이 스스로 조합해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모에 문화’라고 한다.

일본에서 모에와 관련한 시장 규모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가요는 물론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 문화 전반에 모에 코드가 활용되고 있으며, 관련 상품 매출액만도 한 해 1000억 엔(약 1조3500억원)을 넘고 있다.

 

‘모에산업’ 매출 1000억 엔대

모에 상품 코드가 이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끌어내는 사회적 이유는 소비세대의 전면에 배치된 젊은이들의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베이비붐 부모세대의 산업화 노력 덕분에 경제적인 풍족함을 누리며 전쟁 없는 성장과정을 경험한 20, 30대 오타쿠 세대는 TV와 콘솔게임의 발달로 풍요로운 문화적 경험과 혜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성장했다.

그렇기에 놀이문화에 대해 본능적인 동질의식을 지녔으며, 실제 공간과 사이버 공간을 혼동하는 일상 속에서도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기반으로 만화, 게임의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코스프레(‘복장’을 뜻하는 ‘코스튬(costume)’과 ‘놀이’를 의미하는 ‘플레이(play)’의 합성어) 이벤트를 일상화한 패션쇼처럼 인식하고, 시간을 앞서가는 패션의 한 유형으로 이해한다. 모에 코드는 의식주 문화의 변형을 통해 캐릭터의 판타지를 일상으로 동질화하는 기능을 한다.

 

2006년에 시작된 라이트 노벨(light novel·10, 20대를 겨냥해 만들어진 일본 소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3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교복 입은 미소녀가 주인공인 이 시리즈는 ‘우울’을 시작으로 ‘한숨’ ‘무료’ ‘소실’ ‘폭주’ ‘동요’ ‘음모’ ‘분개’ ‘분열’로 이어져 9권까지 발간됐다. 라이트 노벨은 장르의 혼합을 의미하는 ‘미디어 믹스’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미스터리, SF, 공포, 로맨스 등이 섞여 있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소설의 요소가 다른 층위에 복합화해 가와이 문화의 한 유형이면서도 모에 코드가 적절히 상품화한 오타쿠 맞춤형 장르로 분석된다. ‘캐릭터 벤토(도시락)’의 줄임말 ‘캬라벤(キャラ弁)’도 일종의 가와이 문화 음식 장르다. 본래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1970년대 이후 어린이들의 학교 도시락을 예쁘게 장식하면서 시작됐다.

캐릭터 도시락 문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 문화의 활성화로 더욱 확대됐고, 이젠 먹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캬라벤으로 특화하고 있다. 가와이 문화가 대개 자신만의 내성적인 오타쿠 문화로 출발하지만, 결국 외향적 상품으로 확대되는 전형적인 형태를 캬라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오사카 유니버설스튜디오 재팬에서 판매하는 스파이더맨 컵라면 3종 세트는 만만치 않은 가격인 1050엔(약 1만4000원)이다. 하지만 내용물을 보면 가와이 문화의 창의적인 개그 소재가 돋보인다. 우리나라 컵라면에도 많이 첨가된, ‘나루토(なると)’라 부르는 소용돌이 어묵은 ‘나루토마키(鳴門捲き)’의 약칭으로 원래 일본식 어묵 2종류를 말아서 만든 고급 음식이다.

‘스파이더맨’ 컵라면에 든 스파이더맨 모양의 나루토를 보는 순간, 가와이 문화의 창의적 발상에 웃음을 짓게 된다. 보통 초밥 1개에 밥알이 230개 정도 들어가는데, 밥 한 톨만으로 만들어진 초(超)미니초밥이 국내 TV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축소지향의 음식문화가 이벤트화하면서 가와이 문화는 일상화한 삶의 방식으로 점차 녹아들고, 의식주 전반에 새로운 아이디어의 경쟁적 지향성을 유도하고 있다.

오타쿠의 차별화한 내성적 문화로 출발한 가와이 문화. 하지만 이제는 일본 문화의 경쟁력을 키우는 스토리텔링의 한 전략이자, 창의적 아이디어의 경쟁을 일상화하는 기능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htank@sejong.ac.kr

 

“우리 것 못 만들고 남의 것 수입… 한국은 소설 식민지”
일본 문학 번역가 양억관·김난주 부부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양억관(사진 오른쪽), 김난주 부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일본 문학 번역가다. 김씨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작가들의 감성적인 작품을 주로 번역해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고, 추리소설을 많이 번역한 양씨는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일본 소설 번역의 최고권위자’란 평을 듣는다. 두 사람을 만나 그들이 접한 ‘일본 문학의 힘’에 대해 들어봤다.

 

일본 문학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본격적으로 번역하게 됐나.

♤양억관 그냥 재미있다.(웃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 좋다. 세계 어느 문학보다 콘텐츠가 풍성하다.

♧김난주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일본 문학에 관심을 갖고 번역을 시작했다.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작가들은 있을 법한 얘기를 잘 빚어내 두고두고 떠올리게 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고 나면 문득문득 사랑의 궁극적 형태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일본 문학의 어떤 점이 풍성한가.

♧ 무엇보다 문화적 기반이 풍성하다. 내가 5년간 10권으로 번역한 ‘겐지 이야기’는 만들어진 지 1000년이 넘었는데도 시대마다 재해석되면서 온갖 종류로 읽힌다.

♤ 민화, 전설 같은 문화유산이 많다. 기록도 잘 돼 있고 구전을 전달하는 공동체도 잘 살아 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의 얘기가 지금껏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자유로이 얘기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사회는 일본 극우학자가 한국에 가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해도 용인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인이 일본에 가서 한국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면 ‘박살난다’. 어느 쪽에 사고의 유연성이 더 생기겠나.

 

일본 문화의 유연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 일본은 ‘문화의 쓰레기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도교, 유교, 불교 등 온갖 것을 ‘짬뽕’해 받아들이면서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표현의 자유도 놀랍다. 우리는 문법적으로 틀리면 전부 교정을 보지만, 일본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그대로 통과시킨다. 예를 들어 ‘오늘 커피나 한잔 먹어보까’라고 쓴다고 해서 굳이 ‘볼까’로 바꾸지 않는다. 깡패가 싸우는 장면에 ‘씨팔’이라는 말을 써도 우리처럼 ‘제길’로 바꾸지 않는다. 우리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실제 상황을 보여주려면 그 단어가 필요한데도 심의에서 거르는 경우가 많다. 외설 논란을 일으킨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도 사실 그렇게까지 평가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 일본 작가들은 그보다 훨씬 심한 내용을 써도 아무 문제 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우리 문학계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 근대화 역사가 짧으니 발전할 여지는 많다. 우리 문학도 점차 자유로워지고 있다.

♤ 문학의 근간이 되는 사회가 아직도 경직돼 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지 않고, 오피니언 리더로 활약해야 할 교수들이 정권과 연관되는 일이 많다. 그런 사회적 환경에서는 유연한 문학이 나오기 어렵다고 본다.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일본과 우리나라의 환경이 많이 다른가.

♤ 일본은 문학 활동에 대한 인프라가 잘돼 있다. 소설가가 200자 원고지 100매를 쓰고도 우리 돈으로 300만, 400만원은 거뜬히 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소설 같은 문학작품을 쓰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00매 써도 100만원 벌기가 어려우니 다들 돈 되는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간다. 좋은 소설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출판사의 처지에서는 당장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가능성 있는 국내 신진 작가를 양성하기보다 상품성 있는 외국 작가의 작품을 수입하는 쪽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우리 문학사회는 우리 것을 못 만들고 남의 것을 가져와 즐기는 소설 식민지다. 비록 우리가 그 선두주자 구실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일본 문학이 사랑받는 까닭이 한마디로 뭔가.

♤ 일본과 우리의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 우리 세대는 ‘베르사유 장미’ ‘캔디’ ‘아톰’을 보고 자랐다. 나도 ‘벰 베라 베로’를 감명 깊게 봤다. 반일교육을 받았지만, 문화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문학을 보면 편안하다. 작가가 어깨에 힘주지 않고 쓴 것 같다.

♧ 우리 작가 중엔 머릿속에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잡은 이들이 많다. 작가 본인이 시대의 표상이 되고, 자신의 소설이 사상이나 기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작가는 그저 장인일 뿐이다. 자기 기술을 연마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일 뿐이니 이데올로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부담 없이 사소한 얘기를 소설로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일본 소설을 번역하면서 ‘이렇게 사소한 걸로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일본 소설 중에는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읽고 나면 ‘뭘 봤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다.

♧ 그런 생각 자체가 소설에 대단한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가 2시간의 행복을 주는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면, 그리고 생의 어느 순간 문득 그 장면이 떠올라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열심히 사고하고 뭔가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건 과거의 문학 수용 태도다.

 

번역하면서 특히 재미있었던 작품은 뭔가.

♤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가 좋았다. 굉장한 힘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가수 장기하도 죽기 전 심장의 움직임을 묘사한 이 소설이 좋다고 말하더라.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상황에 놓인 두 아이의 운명과 사람의 근원적 욕망에 관한 얘기인데, 무척 재미있다. 번역에 오자가 많다고 지적받긴 했지만(웃음), 그래도 그 소설이 좋다.

♧ 많은 작품을 하다 보니 한 작품을 콕 집어내기가 어렵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연애소설’을 눈물 줄줄 흘리며 번역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 몇 권 정도 번역했나.

♤ 10년 전에 80여 권까지 세보다가 그만뒀으니 200권은 족히 넘었을 거다. 한 달에 한 권 이상 번역 안 하면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많이 했다.(웃음) 일본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를 번역한 작가는 몇 달간 그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받았다고 하는데, 우리의 환경은 그렇지 않다.

도쿄의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본인들. 일본의 다양한 문학상은 작가들이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 출판시장의 침체 속에서도 일본 소설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일본 문학작품은 2000년대 초 300∼400종에 그쳤던 것이 2006년 581종, 2008년 837종으로 급증했다. 우리가 ‘겨울연가’로 촉발된 일본 내 한류 열풍에 도취돼 있는 사이 일본은 소리 소문 없이 ‘소설 일류(日流)’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한국 시장을 잠식해간다. 특히 일본 소설에 대한 20대 대학생들의 편애는 심각하다.

지난 2월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은 2008년 30개 대학 도서관 대출현황을 살펴보면 서울대 도서관의 경우, 대출 상위 도서 10권 중 4권이 일본 소설이었으며 그중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쓰쓰이 야스타카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국민대와 단국대는 각각 상위 20위권 이내에 일본 소설이 11권이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점 직원들이 직접 수상작 선정

일본 소설이 이처럼 한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유는 뭘까. 많은 전문가가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것 중 하나가 일본 소설이 가진 ‘스토리의 힘’이다. 게이 남편과 알코올중독자 아내의 결혼생활을 그린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하는 여성의 살인 사실을 은폐하려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천재 수학교사와 그를 뒤쫓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등 국내 문학작품에서 볼 수 없던 감각적이고 독특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앞세워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스토리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일본의 개성 있는 문학상이 기여한 바 크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문학상이 가장 많은 나라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쿠타가와상(芥川賞)’과 ‘나오키상(直木賞)’을 비롯해 ‘포프라샤 소설 대상’ ‘서점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등 위키피디아 사전에 올라 있는 문학상만 200개가 넘는다.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은 1년에 2번, 1월과 7월에 수상작을 선정해 발표한다. 아쿠타가와상이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신인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면 나오키상은 대중문학을 하는 중견 작가에게 수여된다는 점이 다르다. 과거에는 아쿠타가와상이나 나오키상을 받으면 10만부 이상의 판매량이 보장된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작가들에겐 두 상이 여전히 최고의 영예이자 흥행 보증수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1976)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350만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이 밖에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쓰지 히토나리는 1997년 ‘해협의 빛’으로,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는 같은 해 ‘가족시네마’로, 와타야 리사는 2003년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최연소 수상자(19세)라는 기록을 세우며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대중성 있는 작품에 무게를 두는 나오키상 수상작으로는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1997),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1988)가 대표적인데, 두 작품 모두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으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초등학생 이하만 응모하는 ‘12세 문학상’도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들은 ‘흥행 보증수표’로 통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런 권위 있는 문학상에 버금가는 파급력을 지니며 주목받는 상이 있다. ‘서점 직원에 의한 서점 직원의 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서점대상’이 그 주인공. 2003년 처음 제정된 이 상은 ‘상품인 책과 고객인 독자를 가장 잘 아는 서점 직원이 가장 잘 팔리는 책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서점대상은 온라인 서점을 포함한 전국 서점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투표를 해서 수상작을 뽑는다.

1, 2차 투표를 거쳐 선정된 10개 작품을 선정위원들이 모두 읽은 뒤 그 안에서 다시 3개 작품을 뽑는데, 이때 추천 이유를 반드시 적어내야 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서점 직원들이 수상작을 정하다 보니 문학성이 강한 작품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한 작품이 뽑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상을 받은 모든 작품, 즉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2005), 릴리 프랭키의 ‘도쿄 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2006), 사토 다카코의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2007),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2008)가 모두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거나 제작 중이다.

 

또 하나 화제가 되는 문학상은 ‘포프라샤 소설 대상’이다. 2005년 출판사 포프라샤가 신세대 작가를 발굴하고자 제정한 이 상은 상금이 무려 2000만엔(약 2억7000만원)에 이르며 응모작 선정을 외부 작가나 평론가에게 맡기지 않고 이 출판사 직원들이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응모하는 작가가 초등학생 이하여야 한다는 연령제한을 둔 ‘12세 문학상’도 있다. 2006년 쇼각간(小學館)에서 제정한 상으로 작문이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이야기 만드는 재미를 느끼게 할 취지로 만든 것이다. 이 밖에 일본 문학상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SF, 미스터리 등의 장르소설에 수여하는 상이다. ‘일본 SF 대상’ ‘본격 미스터리 대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 ‘에도가와 란포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에도가와 란포상은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를 기념하고자 1955년에 제정됐다. 신인작가가 대상이며, 수상작은 후지TV를 통해 단막 드라마로 제작되는 기회까지 얻는다.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방과 후’로 이 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한편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은 그해에 발표된 기성 미스터리 소설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리문학상으로 1948년부터 시행됐다.

이름부터 재미있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은 다카라지마 잡지사에서 1988년부터 해마다 발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랭킹이다. 국내, 해외 부문으로 나눠서 각각 베스트 10을 선정해 발표한다. 이 잡지사에서는 2002년부터 신인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도 시행하고 있다. 상금은 1200만 엔(약 1억6200만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으로는 아사쿠라 다쿠야의 ‘4일간의 기적’, 야나기하라 게이의 ‘퍼펙트 플랜’,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일본 러브 스토리 대상’ ‘휴대폰 소설 문학상’ ‘야후 문학상’ ‘어린이를 위한 감동 논픽션 대상’ 등 눈길을 끄는 문학상이 많다.

 

문학상은 작가에 대한 주목도를 높여 판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일반인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질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이 때문에 문학상이 많은 나라일수록 다양하고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문학상 수만 따지면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개성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은 많지 않다. 독자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한탄하기 전에 개성과 색깔이 분명한 문학상을 제정해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면 어떨까. 이러한 방법으로 일본 소설에 뺏긴 독자들을 다시 불러모을 수 있지 않을까.

 

애니메이션 사랑 ‘짱구도 못 말려’
재미있으면 뭐든 용서 … 보는 사람, 만드는 사람 탄탄 최강 콘텐츠 자랑 김소원 리쓰메이칸대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 wish411@hotmail.com

2009년 8월31일자 오리콘 DVD 판매 차트. 지브리 스튜디오(이하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가 34위에 올라 있다. 극장 개봉 후 DVD로 출시된 것이 2001년 9월28일이니, 무려 400주나 연속 상위 300위에 들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 영화 역대 흥행순위 10위에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4편이나 들었고, 일본 영화만 놓고 보면 1~3위가 모두 지브리 작품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일본을 넘어 세계화했다.

1970~80년대 싸구려 TV 시리즈로 세계 진출을 시작한 이후 차별화한 스타일과 이야기로 독보적 문화 콘텐츠가 된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를 제패한 애니메이션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아주 많으니 일본 애니메이션은 힘이 세다. 현재 도쿄의 5개 민영방송국에서 일주일에 방영하는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은 총 32편. 자체 제작 프로그램이 적은 지방 방송국들은 일주일에 30편 가까운 재방송 애니메이션을 편성하기도 한다.

 

이들 애니메이션의 방영시간은 이른 아침부터 심야 2~3시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후지TV는 일요일 저녁 6시라는 황금시간대에 애니메이션을 방영한다. 많이 만들고 많이 보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의 힘은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스토리텔링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처음으로 시작되고 만들어진 출판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연계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데즈카 오사무는 전후 일본 만화를 다양한 장르로 발전시킨 일본 만화의 아버지. 자신의 인기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던 그는 1963년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TV에 매주 방영되는 새로운 콘셉트의 애니메이션, 즉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특유의 스토리텔링 일요일 저녁에서 TV 방영

1964년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초고도 성장기에 돌입한 일본의 어린이들은 만화잡지를 통해 만화를 봤고, 그 가운데 인기를 끈 만화를 TV의 애니메이션으로 봤다. 거대한 만화시장과 함께 연동하며 정착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서구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다양한 장르를 장기 시리즈로 제작할 수 있었다. 많이 만들어지고, 많이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시스템이 정착된 것.

이후 1970년대 ‘기동전사 건담(起動戰士ガンダム)’과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戰艦ヤマト)’ 등의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수용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은 물론 성인층으로까지 확대됐다. 1980년대에 들어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보급된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OVA(Original Video Animation)라는 콘셉트를 발명한 것이다.

OVA는 TV 시리즈도, 극장용도 아닌 비디오테이프로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TV 전원을 켜고 채널을 돌리는 수고만 하면 무료로 즐길 수 있던 TV 애니메이션과 달리, OVA는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하거나 빌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 OVA의 주 고객층은 어린이가 아닌 경제력이 있는 성인 소비자였고, OVA 애니메이션의 스토리와 구성은 TV용 애니메이션과 달리 어른들의 눈높이에도 맞춰야 했다.

실제로 TV 시리즈로 방영됐던 애니메이션의 번외편 성격을 띤 OVA는 원작 만화에는 없는 새로운 스토리를 갖기도 했다. 이렇게 긴 시간을 거치며 탄탄한 제작 여건을 갖춘 애니메이션은 극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매년 일본 영화 흥행순위에선 애니메이션이 빠지지 않았다. 이러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성공 뒤에는 1960~70년대 애니메이션의 그림자가 있다.

 

유년기에 TV 애니메이션을 접한 중장년층에게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으며, 어린 시절 자국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감독과 제작자들은 자연스럽게 일본적 색채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탁월한 산업성은 탄탄한 제작여건과 확실한 소비계층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그렇다면, ‘소프트웨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의 강점은 무엇일까.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가 다양한 이유를 그들의 세계관과 작품에 현실을 투영시키는 영리함에서 찾고 싶다. 일본인들의 세계관 기저에는 독특한 종교관이 있다. 일본은 종교인의 비율이 매우 낮지만 대다수 일본인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새해 아침이면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빌고, 브라이들 채플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며, 장례식에서는 스님을 모셔 죽은 이의 안식을 빈다. 이런 종교적 감수성은 애니메이션에 놀라운 상상력을 제공한다. 한국에도 열혈 팬을 거느린 인기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에 등장하는 여러 용어와 모티프는 성경과 유대교에서 가져왔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화 ‘세인트 오니상(聖☆おにいさん)’은 바캉스차 일본에 내려온, 조니 뎁을 닮은 예수가 도쿄에서 부처와 친구로 지내며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예수가 쓴 가시관이 천국에서 위치 추적을 할 때 쓰는 GPS 장치라 하니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에 불가능이란 없는 듯하다.

 

재미 위해 교육과 도덕성에서 약간의 희생 감수

최근 ‘세카이계(セカイ系)’라고 분류되는 애니메이션 스토리 유형이 있다.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이란 이렇다. 정체불명의 적들이 지구를 공격하고 세계는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인공들은 타고난 특수능력 때문에 적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전쟁보다는 친구, 연인, 가족 그리고 지금의 나 자신이 중요하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치도 않는 싸움을 계속 해야 하지만 세계를 지킨다는 사명감과 의지는 별로 없다.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인 ‘별의 목소리(ほしのこえ)’와 ‘최종병기 그녀(最終兵器彼女)’의 주인공 소녀들은 끝 모를 전쟁보다는 지구에 남아 있는 친구와의 문자메시지가 더 중요하고(별의 목소리), 자신의 정체가 남자친구에게 탄로 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최종병기 그녀).

이들 애니메이션을 보는 10, 20대 젊은이들은 버블경제 붕괴 이후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자랐다. 그들에게 히어로를 꿈꿀 여유는 없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일본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경제불황 속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은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현실을 투영하는 어른스러운 이야기,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상업성이다.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가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자 설문을 바탕으로 철저히 계획되고 관리되는 잡지의 특성상 인기 잡지에 연재된 만화는 애니메이션 원작으로서 흥행성을 보장받는다. 이들 TV용 애니메이션을 극장판으로 만든 작품들도 매년 영화 흥행순위에서 빠지지 않는다.

1회 30분 분량의 TV 시리즈에서는 다 할 수 없었던 밀도 있는 이야기, 스크린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화면 구성은 극장판만의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인기 있는 작품은 몇 번이고 재생산하지만 관객을 질리게 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위해서는 교육과 도덕성에서 약간의 희생은 감수한다. 한국에서 유해 만화라는 논란이 있었던 ‘짱구는 못 말려(クレヨンしんちゃん)’는 코미디물인데도 어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릴 만큼 잘 짜인 스토리를 가진 작품이다. 수십 년 전부터 기초가 탄탄히 다져진 시스템을 이용해 재미있게 만들고, 보는 사람도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재미있으면 무엇이든 용서받는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 이상의 진리는 없다.

 

‘라쇼몽’에서 ‘오쿠리비토’까지 영화로 읽는 일본 미학
폭력과 섹스로 뒤덮인 B급 작품도 할리우드 유혹 도쿄=이윤진 자유기고가 nestra@naver.com

인기 드라마를 스크린에서 만나는 건 일본에선 흔한 일이다. 사진은 영화로 만들어진 TV 드라마 ‘고쿠센’.

지난 2월 제81회 아카데미상은 일본 영화 ‘오쿠리비토’(한국 제목·굿바이)에게 ‘외국어영화상’을 안겨줬다. ‘쓰미키의 집’까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상을 받아 일본은 2관왕이란 쾌거를 이뤄냈다. ‘일본 영화가 여전히 세계에서 통용되는 저력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도 큰 소득.

해외 유명 영화제 잇따라 수상, 자신감 회복

사실 일본에선 자국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1954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이 각각 베니스영화제와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며 서구 영화계에선 ‘아시아 영화=일본 영화=예술영화’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됐다.

특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속 일본적인 배경과 그 안에 담긴 철학적인 질문에 서구사회는 찬사를 보냈다. 개항기 우키요에(浮世繪·일본의 풍속회화)가 서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처럼, 전후 일본 영화는 서구사회에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다.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 TV가 보급되면서 일본 영화계는 쇠퇴기에 들어서고, 해외의 높은 평가에도 영화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대형 영화사 ‘니카츠(日活)’가 도산 위기의 타개책으로 에로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 우리나라에 ‘일본 영화=에로 영화, 저질 영화’라는 공식을 남겨준 ‘포르노 로망’의 시작이기도 하다.

 

니카츠의 포르노 로망은 정해진 분량의 노출과 섹스신만 들어가면 나머지는 모두 감독의 재량에 맡기는 파격적인 정책으로 표현의 자율권을 보장해줬다. 프랑스 68혁명의 여파로 학생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과감한 성적 표현에 비판적 성향을 입힌 니카츠의 포르노 로망에 지식인들은 열광했고, 이는 실력 있는 신인 감독들의 데뷔 무대로 활용됐다.

‘셸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주온’의 구로사와 기요시, 코미디 배우로 더 유명한 다케나카 나오토 등 1990년대 이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감독들이 포르노로망을 통해 데뷔했다. 야쿠자 영화, 형사물도 포르노로망과 함께 B급 오락영화의 한 축을 이뤘다. 이처럼 구로사와 아키라로 대표되는 ‘아트 무비’와 폭력, 섹스로 뒤덮인 B급 영화로 연명해오던 일본 영화는 할리우드라는 지구 정반대편에서 다시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 흥행작이 잇따라 등장한 것. 대표적인 작품이 ‘스타워즈’다. 이 영화를 만든 조지 루카스 감독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숨은 요새 속의 세 악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리들리 스콧의 누아르 영화 ‘블랙 레인’은 일본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영화다.

도쿄의 뒷골목이 주무대라는 점은 물론, 일본 누아르의 간판스타인 마츠다 유사쿠와 다카쿠라 겐이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블랙 레인’은 뒷날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제작에 영감을 줬고, ‘공각기동대’는 ‘제5원소’와 ‘매트릭스’에 영감을 줬으며, 이는 다시 2000년대 이후 일본 SF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미쳤다.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 영화에 열광하는 日 관객들

자칭 ‘일본 문화 오타쿠’라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일본 영화 ‘여죄수 사소리’를 리메이크한 ‘킬 빌’을 통해 일본 B급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담았다. 특히 ‘재패니스 호러’라 불리는 일본 공포영화는 할리우드 영화계에 새로운 공포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 작품에 대한 열광일 뿐, 정작 일본 최신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최근 몇 년간의 흥행작 대부분은 TV방송국에서 제작한 영화다. 자사에서 출자한 영화의 흥행을 위해 화려한 캐스팅은 물론, 무차별적인 홍보전략을 펼치니 방송국과 손잡지 않은 영화는 홍보전에서 뒤처지게 마련. 심한 경우 히트한 드라마의 속편을 영화로 제작하기도 한다. 방학에 맞춰 10대 취향의 모바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극우주의 영화가 화제작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일본 영화의 평가 기준이던 예술성도, 일상성에 기댄 보편적 정서도, 소재와 표현의 참신함도, 영화에 담긴 감독의 철학도 점차 미약해지는 추세다. 상당수 일본 관객은 지금까지 자국의 영화에서 접해보지 못한 다양한 소재와 힘 있는 스토리를 가진 한국 영화에 열광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말아톤’ ‘선물’ 등은 일본에서 새롭게 리메이크했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 등 한국 영화 선전에 대해 일본 영화계는 견제와 동경을 함께 표시한다. 일본 영화는 세계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 영화계는 ‘왜 더 이상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감독이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를 새로운 대안이자 경쟁자로 삼았다. 어렵게 세계 영화사의 톱니바퀴에 편입된 한국 영화와 이미 수레를 굴리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한 일본 영화, 양자의 미래는 상호협력 속에 있지 않을까.

 

2009 일본 드라마 열풍, 그 성공의 비밀
일본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진 ‘꽃보다 남자’. 지난해 ‘하얀 거탑’을 시작으로 2009년 대한민국 여성들을 열광시킨 ‘꽃보다 남자’ ‘결혼 못하는 남자’ 등 일본 드라마의 리메이크 작품이 방송가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폐해로 지적받는 소재 고갈과 패턴 반복에서 오는 스토리의 진부성을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우리의 안방을 사로잡은 일본 드라마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비밀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 스토리의 일관성
일본 드라마는 보통 9~12편을 3개월에 걸쳐 방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정확한 방영 편수와 스케줄을 미리 알 수 있으므로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사전에 결정한다.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한국 드라마 제작현장과 달리 충분한 검토를 거치고, 전체 분량의 3분의 1가량인 2~4편이 사전 제작해놓은 상태에서 방영을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중간에 내용이 바뀌거나 방영시간을 때우기 위해 졸속 제작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드라마 종영까지 일관된 스토리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TV 앞에 붙잡아놓는 기능을 한다.


2. 탄탄한 원작
일본 드라마는 만화나 소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인기 블로그에서도 소재를 발굴한다. 이미 원작을 통해 스토리를 검증받은 만큼 재미는 물론, ‘원작의 팬’이라는 고정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다. 또 등장인물의 캐스팅, 캐릭터 구축부터 광고의 사전판매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만큼 탄탄한 원작이 일본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3. 원소스 멀티유즈
일본에서 성공한 드라마는 드라마로 끝나지 않는다. 시즌3까지 나온 ‘고쿠센’이나 올해로 시즌4를 맞은 ‘구명병동 24시’처럼 시리즈화는 기본. 미완성으로 끝난 결론을 ‘극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스크린에서 펼치기도 한다. 드라마와 관련한 상품 판매에도 적극적이다. 예전엔 드라마를 소설화하거나 사진집을 출판하는 정도였지만 요즘에는 DVD 발매나 드라마 관련 잡화를 개발해 각 방송국에서 직영하는 캐릭터숍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기무라 다쿠야 주연의 드라마 ‘화려한 일족’은 식품회사와 손잡고 ‘화려한 카레빵’을 한정판매해 수익을 창출함은 물론 드라마 홍보 효과를 높이기도 했다.


4. 폭넓은 배우층
종종 주인공의 연기력 부족 등을 지적받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 드라마에선 캐스팅을 둘러싼 잡음이 거의 없다. 이는 일본 드라마가 폭넓은 배우층을 확보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 주연급 배우가 풍부하기 때문에 특정 배우가 매 시즌 연속으로 주인공을 독점하거나, 인지도만 높은 아이돌 그룹 출신의 새내기 연기자가 단숨에 주인공 자리를 꿰차거나, 전편에서 연기력 논란을 겪고도 다시 주연급으로 캐스팅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덕분에 드라마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짜릿…감동…반전… 이것만은 꼭 챙겨보자!
정지욱 영화평론가·한일문화연구소 학예연구관 nadesiko@unitel.co.kr

일본의 이야기보따리는 어릴 적 할머니 무릎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무궁무진하다. 일본 스토리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이를 위해 몇 개 작품을 엄선했다. 일본 문학의 대명사 격으로 여기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제외했다. 많은 일본인이 말하듯 그는 일본 작가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작가의 위치에 오른 만큼, 작가 본인은 물론 작품까지 ‘일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영화에서도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이의 작품은 제외했다. 문학,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를 통틀어 엄선한 아래 작품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거나 최근 국내에서 출간, 또는 상영된 작품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소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ジョゼと虎と魚たち) 다나베 세이코(田邊聖子), 작가정신

연애를 취미의 하나로 여기는 여성들. 그들은 연애를 생활의 중심에 두거나 인생의 한가운데 두지 않고 그저 즐기듯 삶과 연애를 함께 향유해나간다. 국내에 영화로 소개돼 큰 인기를 모은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모두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소설집이다. 계산적이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인간 본능을 그려내는 작가의 탁월함이 엿보인다.

밤의 피크닉 (夜のピクニック) 온다 리쿠(熊谷奈苗), 북폴리오

누구에게나 10대 때의 가슴 시린 설렘, 그리고 비밀스런 고민이 있다. 이런 추억을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중독적인 이야기로 담아낸 청춘소설이 ‘밤의 피크닉’이다. 고교생활 마지막 이벤트인 24시간 행군, 야간보행제를 배경으로 각자의 고민을 나누는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작가 온다 리쿠는 미스터리, 판타지, 호러, SF는 물론 청춘소설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작가로,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고 불릴 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상실감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데 능하다.

공중그네 (空中ブランコ) 오쿠다 히데오(奧田英朗), 은행나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우울함.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지만 책을 읽으며 그 내용에 킬킬대다 결국 박장대소하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존중해야겠다는 ‘교훈’까지 얻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마 같은 덩치의 엽기적인 정신과 의사 아라부와 간호사 마유미 황금 콤비가 그들만의 치료법으로 환자뿐 아니라 독자들까지 치료해주는 못 말리는 행복 바이러스가 책에 가득하다. 엽기적인 인간군상은 곧 다양한 현대인의 진솔한 모습이고, 이들의 독특한 치유법을 읽는 동안 독자들의 우울한 현대병도 말끔히 사라진다.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에선 일본 사회에 담긴 모순을 작가만의 유머와 비아냥거림으로 끄집어내 마음껏 조롱하는 능력이 느껴진다.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가게 (まほろ驛前多田便軒)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 들녘

상처받고 버림받은 세상살이. 대충대충 얼렁뚱땅 손쉬운 일만 하면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한숨만 쉬며 지낼 건가. 가정이 해체되고 혼자가 된 주인공이 정반대 성격의 고교동창생과 심부름가게를 운영하며 빚어내는 일상을 흡인력 강한 스토리로 펼쳐 보인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울고, 웃고, 찡그리고, 미소 짓고, 한숨 쉬고, 안도하게 된다.

[만화]

세상이 가르쳐준 비밀 (雨柳堂夢)하츠 아키코(波津 彬子), 시공사
일상 속 모든 물건에는 숨결, 손결 등 사람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이런 흔적은 희로애락을 자아내는 여러 사정과 함께 사람의 이야기, 물건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우유당이라는 골동품점을 배경으로 하는 이 만화는 고미술품에 담긴 슬프거나 무섭고, 때론 기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천일야화처럼 들려준다. 회화, 도자기를 비롯한 전통미술, 노(能)를 비롯한 전통예능, 전통다도 등 일본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깊지만 쉽게 느낄 수 있는 묘미가 탁월하다. ‘우유당 꿈 이야기(雨柳堂夢)’라는 원제로 11년 동안 모두 12권이 발행된 수작.

 

[애니메이션]

썸머워즈 (サマㅡウォㅡズ)호소다 마모루(細田守) 감독
인터넷 속 가상 생활과 실제 생활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시대. 인간에 대항해 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컴퓨터 바이러스를 일본의 전통놀이, 화투로 해치운다는 내용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가족과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를 가시 돋친 경고를 섞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재치 넘치는 위트와 정겨운 시골 풍광, 맹랑하지만 순박한 고등학생들의 여름방학 추억을 맛볼 수 있는 ‘강추’ 작품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千と千尋の神隱し)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
일본에는 각종 요괴를 다룬 이야기가 넘쳐난다. 일본 요괴들은 한국의 민화 속 호랑이처럼 인간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있다. 또한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인간의 곁,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이다. 한국인에게 일본 문화 중에서 이해하기 힘든 문화의 하나가 ‘가미카쿠시’(神隱し·신의 장난 때문에 다른 세계로 흘러가는 현상)일 것이다. 이 가미카쿠시를 통해 또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인간처럼 슬퍼하고, 기뻐하고, 질투하고, 가여워하는 감정을 가진 요괴의 세상으로 떠나보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과 일본의 전통사상, 정령문화가 가장 깊숙이 응축된 작품이다.

 

[영화]

굿‘ 바이 (おくりびと)다키타 요지로(瀧田洋二郞) 감독
회자정리(會者定離).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섭리다. 하지만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참으로 슬프고 극복하기 힘들다. 음습하기만 했던 죽음이란 소재를 아름답고 경건하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다룬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한국과 사뭇 다른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장례문화를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상영되던 초기에 배우 히로스에 료코의 이혼 후 첫 주연작 또는 멜로라는 장르에 초점이 맞춰져 잘못 소개된 영화지만, 자세히 본다면 그 안에 담겨진 아름다운 장례문화에 매료될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눈을 떼지 말 것. 죽은 이를 대하는 손사위 하나하나가 놓쳐선 안 될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구구는 고양이다 (グ-グ-だって猫である)이누도 잇신(犬童一心 ) 감독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얘기할 때 ‘고양이와 개’로 비유할 만큼 일본인과 고양이는 잘 어울리는 짝이다. 일본 문화에서도 고양이를 떼어놓고 말하기 힘들다. 13년간 함께 지내온 고양이 사바가 죽은 뒤, 순정만화가 아사코는 의욕을 상실하고 병까지 얻는다. 하지만 새로 키우게 된 3개월 된 아메리칸 쇼트 헤어종의 고양이, 구구를 통해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는 이야기. 고양이를 통해 현대 일본인의 고독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순정만화가 오시마 유미코의 에세이를 이누도 잇신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비밀의 화원 (ひみつの花園) 야구치 시노부(矢口史靖) 감독
만일 은행 강도의 인질이 됐다면 그 후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변할까. 돈이 세상의 전부인 평범한 여은행원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종잡을 수 없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 전개와 끊임없이 샘솟는 상상력은 일본 문화에 깊숙이 자리잡은 스토리텔링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영화 ‘산전수전’의 어설픔에 실망했던 당신이라면, 원작이 주는 감칠맛 나는 재미와 니시다 나오미의 열혈연기,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연출력에 심청이 만난 심봉사처럼 두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폐쇄된 사적 공간에서 자신을 코딩, 디코딩
일본 현대미술, 순수 감수성 담은 다양한 ‘개인 이야기’ 서진석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jinloop@hanmail.net

1 가네우지 뎃페이 ‘White Discharge’, plastic figure, gesso, wood, 2009. 2 스즈키 히라쿠 ‘GENGA 001-1000(10X)’, 2min 49sec, 2009. 3 게이스케 곤도 ‘NEW GREEN’, color on paper, 65.2x200cm, 2007. 4 아사카이 요코 ‘Home Alone’, Tokyo, c-type print, 453x560cm, 2007.

일본은 ‘와(和)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의 쇼토쿠 태자가 제정한 헌법 1조가 바로 ‘와를 존중하라’였다. 와는 전체를 위해 개개인이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조화를 뜻한다. 오타쿠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지만 자신만의 관심 영역에 몰입함으로써 일탈을 꿈꾸는 마니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본 특유의 문화현상이다.

전후 일본에서 조직 우선의 집단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의 특정 관심사 속으로 침착한 것이 바로 오타쿠다. 즉 고도산업사회에서 나타난 일본식 집단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셈. 오타쿠들은 지극히 미시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 집요할 정도로 파고든다는 특징이 있다.

 

대상에 솔직하게 반응, 주류사회와 구별짓기

일본을 비롯한 현대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고도산업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공적 간섭이 축소됐고, 개인의 주체적 영역이 확대됐다. 2000년대 이후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더욱 활발해졌고, 계층 간 세대 간 문회위계가 해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개인을 기반으로 생산된 문화들은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위계적 차별 없이 대중에게 소비됐다.

1980년대 이후 일본 현대미술계는 이러한 모든 특성을 담고 있다. 우선 고도산업사회의 징후를 반영한다. 고도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애니메이션, 게임, 비디오 등 이른바 ‘서브컬처’라 불리는 개인의 유희 대상은 넘쳐날 정도로 풍부해졌다. 주체적이고 심지어 자폐적인 경향까지 유발하는 사회 환경은 일본 작가들에게서 독특한 이미지를 끌어냈다. 그들의 독자성과 개성은 현실의 삶에 정제되지 않은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고, 인위적인 사회화를 거부하며, 주관적 자아 안에서 순수성을 그대로 표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많은 일본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면 대단히 폐쇄된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코딩(coding)’, ‘디코딩(decoding)’하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벼워 보이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런 작업은 현대사회 구조와 환경, 흐름에 비춰볼 때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대상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주류 사회에 대해 무의식적 구별짓기 등을 하는 유희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사회와의 관계성은 작가의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주관적으로 만들어진다. 심지어 매우 가벼운 유희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은 주류 사회의 거대 담론이나 진지한 주제를 다루기보다 단편적 이야기나 분화된 담론, 개인적인 소소한 이야기 등을 늘어놓으며 자아의 자유로움과 인식의 즐거움을 누린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는 사회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오늘날 폐쇄된 자아 영역에서 사회와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며 작업하는 일본의 젊은 작가들은 물론,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작가들조차 ‘사회’라는 대상을 직접 대응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본인의 자아를 이야기하며 그 안에 담긴 사회를 끄집어내 보여주는 간접적인 방식을 이용한다. 비판과 정제를 통해 사회의 문제를 도출하고 해결 방향을 제시하며 변화를 유도하는 기존의 사회성 짙은 작업과는 판이한 양상이다.

 

그냥 사회와 ‘응답적인 메시지’ 교환

그들은 주관적 기억과 일상들을 연결하며, 자신 안에 생성 혹은 반영된 사회를 독창적인 감성으로 나타낸다. 일본의 젊은 작가들은 객관적, 보편적이라는 상식적인 준거의 틀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사적 영역에 반영된 사회구조를 관찰하고 도출함으로써 좀더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그들만의 사회비판적 시각을 사용한다. 즉 사회를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사회가 담긴 거울로 보고 이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일본의 작가들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복잡한 과정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실 작업의 결과물은 복잡하고 압축된 시간의 단면일 뿐, 결과물 뒤에 감춰진 과정적 행위들이 그들에겐 더욱 중요하다. 작업과정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종종 마지막 결과물인 작품에 사적인 내러티브와 사회적 도큐멘트의 과정을 동시에 심는 행위로 나타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만나며 자신과의 관계성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아사이 요코, 자기만의 기호문자를 만들어 대중과 소통을 시도하는 스즈키 히라쿠 같은 작가들이 작업에서 보여주려 하는 것은 사회와 자신 간의 일시적이고 주관적인 반응이다. 체계 속에 담긴 진정성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작업은 우리에게 다른 각도로 사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의 팝아트에는 매스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문화적 시각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에 수용,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불식하고자 한 예술적 의도가 담겨 있다. 1980년대 일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무라카미 다카시, 나라 요시모토 등 ‘재팬 애니팝’ 작가들은 서구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전략에 따라 작품활동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 현대미술 작가들은 그런 사회적 전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단지 산업사회의 서브컬처가 지닌 시각적 가벼움과 키덜트(kid+adult·성인이 된 뒤에도 유년의 취미나 성향을 가진)적 문화의 부박함이 일치할 뿐, 자신만의 순수한 감수성을 예술 언어를 통해 원하는 주제로 표출한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작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나 장소에 의해 확보하는 태도에서 벗어났다. 그냥 사회와 ‘응답적인 메시지’를 교환함으로써 사적인 경험의 기억을 표현한다.

버블경제 세대인 30대 참여작가들은 주체적이고 작위적인 자아의 영역 안에서 사적인 유희를 즐기며, 심지어 사회와의 관계성조차 내면의 주관적 시선 안에서 바라본다.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개인적 취향과 의식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의 결과물에 비칠 때, 이는 일본 현대미술을 읽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즉 일본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이라는 ‘지붕’ 아래, 사적인 경험이라는 ‘방’에서 이뤄지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아이돌=상품 … 무대 위 숨쉬는 인형
치밀한 스토리텔링으로 콘셉트 판매 … 말 한마디·행동까지 사전에 철저히 준비 김범석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bsism@donga.com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를 담은 일본의 옥외광고판.

# 1 일본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의 멤버 구사나기 쓰요시가 4월 말 도쿄 경찰에 체포됐다. 혐의는 ‘공공외설’. 이른 새벽, 도쿄의 한 공원에서 체포됐을 때 그는 술에 취한 채 알몸 상태로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날 아침,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다.“착하고 성실한 이미지였는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한국 팬들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002년 한국에서 ‘초난강’이란 이름으로 싱글 음반을 냈고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도 출연해 ‘곧바른’ 이미지를 쌓아놨기 때문이다.

# 2 1987년 아이돌 가수로 데뷔해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인 사카이 노리코가 최근 마약 성분 각성제를 복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데뷔 초 밝은 느낌의 노래를 부르며 깜찍한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터라 팬들은 “상큼한 이미지에 각성제라니…”라며 한숨만 내쉬었다.

한국만큼이나 늘 시끌시끌한 일본 연예계. 최근 아이돌 스타들의 사건,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유독 아이돌 스타들의 사건에는 몇 배의 충격이 뒤따른다. 평소 이미지와 조금만 다른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냉혹해지기 때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상향, 꿈을 대입하며 위안을 얻던 아이돌 스타. 그래서 아이돌은 잘 만들어진 ‘조각상’이라 불린다. 때로는 “자기 것은 없는 거품이요, 이미지에 불과하다”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럼에도 일본 대중문화의 주연은 철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콘셉트가 만들어진 아이돌 스타다.

‘아이돌=이미지’, 한 단계 더 나아가 ‘아이돌=상품’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콘셉트 때문이다. 아이돌은 사소한 표현방식 하나에도, 무대 위 사회자의 질문 하나에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사전에 철저히 정해진다. ‘콘셉트 전쟁’이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일본 아이돌 역사의 전성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를 이끌어나간 쌍두마차가 있었으니, 바로 여성 아이돌계 대표 스타이자 라이벌인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다.

 

1980년 데뷔한 마쓰다 세이코는 일본 오리콘차트에서 24장의 싱글 음반을 연속으로 1위에 올려놓는 기록을 세웠고, 1982년 데뷔한 나카모리 아키나는 연말 가요대상 격인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여가수로는 최초로 1985년, 1986년 2회 연속 대상을 받는 등 두 가수의 활약은 대단했다.

하지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까닭은 콘셉트에 있었다. 마쓰다 세이코는 밝고 경쾌한 장조 노래만 부르는 반면 나카모리 아키나는 슬픈 단조 음악 위주로 노래를 불렀다. 무대 퍼포먼스 역시 마쓰다 세이코는 경쾌하게 손을 흔들거나 웃음 띤 얼굴로 남성 팬들을 유혹했고, 나카모리 아키나는 허스키한 목소리, 카리스마가 묻어나는 몸짓으로 여성 팬들을 불러모았다. 마쓰다 세이코를 ‘태양’, 나카모리 아키나를 ‘달’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

 

이는 두 가수의 의지라기보다 데뷔 이전부터 계산된, 소속사의 의도에서 비롯된 결과다. 하지만 ‘밝거나 혹은 어둡거나’라는 두 사람의 2강 구도도 1980년대 후반 2인조 여성 듀오 ‘윙크(Wink)’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 듀오의 콘셉트는 ‘절대침묵’이었다. 그전까지 여성 아이돌 스타는 TV에 나와 핑크빛 미소를 보여주고 백치미 풍기는 표정으로 “전 아무것도 몰라요”를 외치는 것이 공식처럼 여겨졌다.

반면 이 듀오는 진지하리만큼 굳은 표정으로 곱게 노래를 불렀다. 곧바로 “특이하다” “신기하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남성들은 “뭔가 슬픔이 서려 있다” “보호해주고 싶다”며 이들의 팬이 됐다. 이른바 아이돌 스타 홍수기에 틈새 콘셉트를 노린 이들은 급기야 1988년 발표한 세 번째 싱글을 오리콘 싱글차트 1위에 올리며 A급 스타로 각광받았다.

 

소속사, 칼날 마케팅 통해 이미지 관리

지난 3월 새로운 싱글 앨범을 발매한 아무로 나미에.

콘셉트 경쟁이 여성 아이돌 스타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1987년 데뷔해 엄청난 인기를 모은 7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히카루 겐지(光 GENJI)’는 데뷔 초부터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무대를 누벼야 했고, 17년 후 같은 소속사에서 데뷔한 후배 아이돌 그룹 ‘칸자니 에이또’ 멤버들은 댄스 그룹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외모와는 딴판으로 구성진 엔카(演歌)만 불러야 했다. ‘엔카도 젊고 스타일리시해질 수 있다’는 게 이 그룹의 모토였다.

일본 아이돌의 경우 콘셉트 못지않게 음악의 스타일이 다양하고, 수준이 매우 높다. 이런 분위기는 남성 아이돌, 특히 ‘자니스’ 소속 가수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새 그룹이 데뷔할 때면 실력파 싱어송 라이터들을 섭외해 그들에게 곡을 받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아이돌 스타 아무로 나미에는 수준 높은 음악은 물론 앨범 전체의 콘셉트, 춤, 무대 의상까지 프로듀서가 관여해 만들어낸 ‘상품’이다. 데뷔 초 그저 그런 댄스 가수였던 아무로 나미에는 명프로듀서 고무로 데쓰야를 만나면서 유로 테크노를 부르는 스타일리시한 가수로 거듭났다. 1996년 고무로와 함께 만든 그의 데뷔 앨범 ‘스위트 19 블루스’는 370만장 판매 기록을 세웠고, 아무로 나미에는 A급 스타로 급부상했다.

일본 아이돌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소속사다. 소속사 캐스터가 발탁한 연예계 지망생은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은 뒤 데뷔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콘셉트에 따라 이미지를 완성해가고, 차트 1위에 오르기 위해 음반 발매 날짜까지도 신경 쓰는 치밀한 마케팅 계획에 맞춰 움직인다. 스마프를 비롯해 V6, 아라시, 캇툰 등 일본 최고 인기 아이돌은 소속사 자니스가 스토리와 이미지, 콘셉트 등을 불어넣은 ‘작품’이다.

아이돌에 대한 소속사의 이미지 관리는 무시무시할 만큼 철저하다. 1986년 4월8일 낮 12시5분. 일본 도쿄 시부야의 7층 건물에서 오카다 유키코라는 스타가 창문을 열고 몸을 던져 사망했다. 그의 소속사 ‘선뮤직’이 입주해 있던 건물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가던 사람들은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처박힌 그의 처참한 모습에 비명을 질러댔고, 일본 열도는 이 아이돌 스타의 자살로 발칵 뒤집혔다.

인기 절정을 달리던 갓 스물의 아이돌 스타는 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됐을까. 중년 남성 탤런트와의 교제설, 연예계 왕따설 등 소문만 무성할 뿐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가 자살 직전까지 썼다는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지금껏 그의 일기장은 소속사 비밀금고에 들어 있다.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뜻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이돌의 사후까지 이미지를 관리하는 소속사의 철저한 태도가 엿보인다.

치밀한 마케팅 역시 ‘소속사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1985년 데뷔한 여성 아이돌 그룹 ‘오냥코 클럽(おニャン子クラブ)’이 그런 단면을 잘 보여준다. 1987년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이 그룹은 20세기 일본 여성 아이돌계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을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냥코 클럽은 5인조, 7인조 같은 기존 그룹 개념에서 벗어나 20여 명의 멤버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거나 마음 맞는 멤버들끼리 음반을 내는 등 전례 없는 시스템에 따라 움직였다. 이들의 소속사는 또 평균 17~18세인 어린 여성 멤버들을 청순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꾸며놓고는 노골적인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들의 데뷔곡 ‘세라후쿠오 누가사나이데’(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는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 지금은 안 돼요… 친구들보다 빨리 성 경험을 하고 싶지만…” 등의 가사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오냥코 현상’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남성 팬들은 순진무구한 외양과 목소리로 섹스를 논하는 이들의 노래에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튀어야 하는 것이 아이돌의 숙명이요, 인생일까.

라면의 추억 … 키티의 변신 …앗, 내 이야기잖아!
스토리가 스며든 공간에서 또 다른 이야기 창출 김희경 한국외대 문화콘텐츠 전공 강사·‘이야기를 파는 나라, 일본’ 공동저자 nigajota5@hanmail.net 일상과 향수는 이야기(story)의 말하기(telling)로 실현된다. ‘스토리텔링’은 ‘story+tell+ing’가 합쳐진 용어다. 여기서 현재진행형 ‘ing’에 주목해보자.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던 이야기, 또는 미래를 그린 영화 속 이야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이야기가 ‘telling’을 통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일본은 놀이동산, 식당, 관광지 및 제품에 이르기까지 ‘스토리텔링’이 스며들어 있다. 강력한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보자.

‘도쿄 디즈니시’ 바다에서 펼쳐지는 신화와 전설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신데렐라, 인어공주 등 수많은 캐릭터와 함께 울고 웃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특히 월트디즈니 캐릭터들은 지금까지도 활발한 ‘연기’를 보여주며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출시된다. ‘남의 것’을 현지화 전략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강점인 일본에도 ‘디즈니 표’가 있다.

그런데 전 세계 디즈니 테마파크 중 일본에만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디즈니시(Disney Sea)’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다를 배경하고 한 ‘디즈니시’는 실제 도쿄만에 자리했다. 장소적 특징과 콘셉트를 조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디즈니시’의 테마는 ‘바다에 얽힌 신화와 전설’이다. 테마파크의 하위 테마는 그것의 공간 구성인 조닝(zoning·도시계획의 지대 설정)으로 입체화하는데, ‘디즈니시’는 메인 테마를 뒷받침하는 7개의 서브 테마로 구성돼 있다.

메디테러니언 하버(Mediterranean Harbor·지중해 항구), 아메리칸 워터프런트(American Waterfront·미국 부두), 포트 디스커버리(Port Discovery·디스커버리 항구), 로스트리버 델타(LostRiver Delta·로스트리버 삼각주), 머메이드 라군(Mermaid Lagoon·인어 석호), 아라비안 코스트(Arabian Coast·아라비아 연안), 미스테리어스 아일랜드(Mysterious Island·신비의 섬)가 그것이다. 7개 테마는 서로 아무런 관계 없이 독립성을 띤다.

‘머메이드 라군’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인어공주’의 평면적 장면을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은 해파리 놀이기구를 타면서 해파리처럼 움직이고, 바닥분수를 통해 물속에서 노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전체적인 조명이나 색채도 바다처럼 어둡고 푸른색을 띤다. ‘아라비안 코스트’에서는 특수영상을 통해 ‘알라딘’의 지니가 날리는 보석을 잡아보고, ‘포트 디스커버리’에서는 4D 영상을 통해 폭풍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

‘미스테리어스 아일랜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가 결박됐던 바위산과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의 스토리를 결합한 테마포트.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해저 2만리’는 1954년 디즈니가 영화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디즈니시’에서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프로메테우스 화산의 깊은 곳에 ‘해저 2만리’의 주인공인 천재 과학자 네모 선장의 기지가 있다고 설정했다.

기괴한 건축물과 탑승물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얻는다. ‘디즈니시’는 탑승물보다 주제를 중심으로 한 환경 연출에 중점을 뒀다. 7개의 테마 포트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 미래, 환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음식이나 관련 상품도 테마포트의 특성에 맞게 구성했으며 쇼나 이벤트도 마찬가지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디즈니 캐릭터들은 애니메이션에서 막 나온 것처럼 연기가 자연스럽다.

‘디즈니시’는 원형 스토리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눠 환상의 이계(異界)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누구나 행복하고 안전하고 깨끗하며 어떤 짓을 해도 방해받지 않는다. 어른이 아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자나 머리띠를 쓴 채 캐릭터와 뛰고 놀아도 눈총을 받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일상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와 테마가 주는 힘이자 비일상성의 맛이 바로 이계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신요코하마 라면박물관’ 맛, 회상, 향수를 재현

‘라면’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일본 신요코하마에 자리한 라면박물관은 이와오카 요지 관장의 어릴 적 기억을 배경으로 1994년에 설립된 음식박물관이다. 그의 어릴 때 기억은 ‘어른이든 아이든 지친 하루 일과를 마친 후 편안하고 아늑하며 정겨운 우리 동네로 들어선다’로 시작된다. 시간적 배경은 1958년 해질 무렵, 공간적 배경은 서민 동네다.

이렇게 개인적인 옛 추억을 주제로 하는 것을 ‘퍼스널 노스탤지어’(personal nostalgia·이하 퍼노스)라고 한다. 라면박물관에서의 퍼노스는 맛, 회상, 향수 세 가지를 자극한다. 퍼노스는 지하 1층의 유(遊), 지하 2층의 면(麵), 1층의 지(知)로 구성됐다. ‘유’는 1958년 당시의 변두리 구멍가게, 노점, 점집, 대중목욕탕을 ‘에이징(aging)’ 기법으로 재현한다. 동화 구연, 만담 공연, 그리고 당시의 일본 대중음악은 향수를 자극하고 노을 진 인공하늘은 시간을 멈추게 한다.

‘면’은 일본 각지의 라면을 각 가게에서 직접 맛볼 수 있게 하고, ‘지’는 라면의 역사 및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관련 상품을 전시·판매한다. 라면박물관은 시각(과거를 재현한 공간과 소품), 청각(옛 대중가요와 만담, 동화 구연), 미각(각지의 라면 맛), 후각(라면 냄새)을 동시에 자극하는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관람객은 맛을 통해 놀이와 향수를 즐긴다.

서로 다른 라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민의 즐거움, 허기진 배를 채우는 포만의 즐거움, 식후 옛날 동네를 거닐면서 추억에 잠기는 즐거움, 떠돌이 만담꾼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 라면 정보를 얻고 상품을 구입하는 지식과 쇼핑의 즐거움이 한곳에서 이뤄진다. 어른에게는 추억이지만 어린이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한 개인의 경험을 살린 라면박물관은 여러 사람에게 경험과 향수를 선사한다.

‘하얀 연인’(白い戀人·시로이 고이비토) 과자 속에서 달콤한 연인의 향기를

삿포로를 포함해 홋카이도 지역은 눈이 많은 곳이다. 홋카이도에서 눈처럼 많이 볼 수 있는 상품이 있다. ‘하얀 연인’이라는 과자가 그것이다. 남색 바탕에 눈송이가 박힌 포장지를 벗기면 하얀 크림이 속에 든 쿠키가 있다. 눈처럼 부드럽고,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아버지에 이어 이시아 제과회사를 운영하던 이시미즈 이사오는 좀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싶었다.

홋카이도의 자연적 특징인 청정함, 감성적 특징인 세련됨, 감각적 특징인 감미로움을 결합하는 상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76년 시제품이 완성됐지만 이런 특성을 잘 나타내는 과자의 이름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이사오의 아버지가 눈 내리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우리의 하얀 연인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했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사오는 새 과자의 이름을 ‘하얀 연인’으로 정했다.

‘하얀 연인’은 홋카이도 지역의 깨끗한 우유와 버터, 달콤한 설탕,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이 어우러진 연인 같은 과자다. ‘하얀 연인’은 이후 인기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 등장할 만큼 대표적인 홋카이도 상품이 됐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비싼 가격에도 꼭 먹어봐야 할 과자로 인식됐다. 이시아 제과회사는 ‘하얀 연인’의 성공을 과자 판매에서만 누리지 않았다.

과자 공장을 ‘시로이 고이비토 파크’로 꾸며 하얀 연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파크 안으로 들어서면 동화처럼 따뜻한 소품들과 달콤한 냄새가 관람객을 환영한다. 과자가 만들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벽면에서는 즐거운 표정의 캐릭터가 두둥실 떠오르며 미소 짓는다. 카페엔 ‘슈거 크래프트(sugar craft)’가 앙증맞게 전시돼 있고, 초콜릿 케이크는 ‘이걸 망가뜨려도 될까’ 싶을 정도로 예쁘다.

 

작고 귀여운 하얀 암고양이 ‘키티’ 얼굴도, 자세도, 가족도 진화한다!

1974년 태어난 산리오사(社)의 ‘키티’는 세대와 지역을 초월해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키티는 왜 이렇게 사랑을 받을까? 필자는 키티의 성공요인을 4개의 키워드로 분류했다.

‘스토리’ ‘일본인들의 애호동물인 고양이’ ‘진화’ ‘감성’이 그것이다. 우선 키티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1974년 영국 런던 교외지역에서 태어난 사과 3개 정도의 무게, 사과 5개 정도의 키에 작고 귀여운 하얀 암고양이다.

명랑하고 인정 많은 어린 소녀를 상징한다. 특기는 쿠키 만들기이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엄마가 해준 애플파이다. 쌍둥이 자매 미미가 있고 친구가 많다. 이처럼 키티의 태생, 성격, 취미, 가족사항, 좋아하는 음식 등 전반적인 상황은 모두 스토리로 만들어졌다. 두 번째 성공요인은 일본인들의 애호동물인 고양이를 캐릭터화했다는 점.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앞발을 든 고양이 ‘마네키네코’는 흔히 복을 부른다고 해 일본인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세 번째 성공요인은 ‘키티를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수직적 진화뿐 아니라 수평적 진화까지 시도했다. 수직적 진화로는 1974년부터 2000년대까지 외형과 가족관계의 변화를 서서히 진행한 것이다. 외형을 보면 처음엔 외곽선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점점 없어졌고, 동그랗던 얼굴이 상당히 입체화했다. 가족관계에선 엄마, 아빠, 쌍둥이 동생이 생겼다. 수평적 진화에는 컬러의 변화, 의상의 변화, 자세의 변화가 있었다.

앉아 있는 자세였다가 서 있게 되고,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1990년대 들어 매출이 줄자 산리오사는 10대 소녀와 20대 여성이 좋아하는 핑크색을 전면 도입, ‘핑크 혁명’을 일으켰다. 의상에서도 간호사 키티, 전통복장 키티, 웨딩 키티, 호피무늬 키티, 요정 키티 등 다양한 변화를 줬다.

네 번째 성공요인은 감성에 기댄 점. 입이 없는 키티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설정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사람들이 기분이 좋을 때 키티를 보면 키티도 좋아 보이고, 슬플 때 보면 키티도 슬퍼 보이게 한다. 네 가지 키워드는 키티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부여한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키티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다시 한 번 매혹한다.

영국, 그 신비한 판타지 발전소
日과 함께 세계 문화 콘텐츠 생산 양대 축, 고대 설화와 영웅들 등장 세계인 매료 전원경 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영국은 일본과 더불어 문화 콘텐츠 생산의 최강대국으로 꼽힌다. 명탐정 ‘셜록 홈스’부터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해리 포터’까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불러 모은 작품도 많다. 섬나라 특유의 국민성, 지리적 여건 등 일본과 공통점이 많은 영국이 스토리의 ‘발전소’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을 짚어본다.
 
 

어린 시절, 필자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셜록 홈스’ 시리즈와 ‘사자와 마녀’였다. 일본어판의 중역(重譯)이 분명한 문고판 ‘명탐정 홈스’는 어찌나 많이 읽었던지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한 외국동화 전집에서 읽은 ‘사자와 마녀’의 환상적이고도 극적인 스토리가 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자와 마녀’가 실은 7권으로 이뤄진 ‘나니아 연대기’의 두 번째 이야기이며, 정식 제목은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시간이 흘러 이사를 앞두고 남편의 책을 정리해보니 ‘반지의 제왕’과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전집 시리즈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홉 살이 된 큰아이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푹 빠져서 영화와 책을 보고 또 보고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책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영국산 콘텐츠라는 점이다.

 

영국 고대문학에 뿌리 둔 ‘해리 포터’

유럽의 한 귀퉁이에 있는 섬나라, 인구 6000여 만명, 면적 약 24만3000km2의 영국은 강대국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모로 조금 모자란 나라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의 위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빛이 바랬고, 인구수나 국토의 넓이, 경제규모로도 세계적인 위치는 ‘지는 해’에 가깝다. 그러나 문화 콘텐츠라는 분야로 영역을 좁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국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제치고 몇 년째 문화수출 1위를 지키는 문화산업 강국이다.

비틀스와 브리티시 록으로 시작된 ‘영국의 문화침공’은 데미언 허스트, 앤서니 곰리, 크리스 오필리 등으로 대표되는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의 현대미술,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카메론 매킨토시 팀의 뮤지컬에 이어 현재문학으로까지 옮겨 붙은 상태다. 요즘 영국의 주력 수출상품은 설명이 필요 없는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이니 말이다. ‘해리 포터’가 출판, 영화, 캐릭터, 관광 등으로 파급력을 넓히며 거둬들인 경제효과가 300조원이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데 영국산 콘텐츠의 면면을 살펴보면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 우선 영국이라는 국가의 오래된 전통이 영국산 문화 콘텐츠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섬나라인 지리적 특성과 문화 콘텐츠의 특성 사이에 어떤 함수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통산 4억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해리 포터’ 시리즈가 대표적인 경우다.

우리는 흔히 J.K. 롤링이라는 뛰어난 작가가 ‘해리 포터’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하지만, 롤링이 영국이 아닌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태어났다면 ‘해리 포터’ 시리즈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천재 작가인 것과 롤링의 경우는 분명 다르다.

롤링은 다분히 영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스코틀랜드 특유의 기담과 전설이 혼합돼 탄생한 작가다(웨일스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의 엑시터대학을 졸업한 롤링이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중 어느 지역 작가인지는 영국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곳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다).

‘해리 포터’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영국의 고대문학과 연결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뱀, 늑대인간, 마법 등 많은 모티프는 그리스 신화, 켈트문학, 서사시 베어울프,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등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해리 포터’의 2편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는 자신이 뱀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데 이 부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 멜람포스가 뱀이 귀를 핥는 순간 마법사로서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부분을 연상시킨다.

또 1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위대한 마법사 니콜라스 플라멜은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로 실존인물이었다. 이와 함께 ‘해리 포터’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난쟁이와 거인, 앨프 등은 모두 켈트 신화의 주요 인물이다. ‘해리 포터’보다 좀더 앞선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는 영국 고대문학과의 연관이 더욱 밀접하다.

‘반지의 제왕’ 작가인 J.R.R. 톨킨은 옥스퍼드대학의 문헌학 교수로 고대 언어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그는 고대 영어로 쓰인 북유럽 신화를 연구하다 땅속에 사는 난쟁이 호빗족의 설화를 알게 됐다. 호빗족의 설화에서 거대한 서사시인 ‘반지의 제왕’이 탄생했다.

한편 톨킨의 옥스퍼드대 동료 교수이던 C.S.루이스는 교수들의 맥주 모임에서 톨킨이 읽어주는 ‘반지의 제왕’ 원고를 듣고 성경과 고대 설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7부작 ‘나니아 연대기’를 썼다. 이처럼 영국의 설화와 영국판 판타지는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소재 고갈에 허덕이던 할리우드는 고대의 설화와 영웅들이 등장하는 신비한 영국판 판타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울한 날씨 덕분에 추리소설과 아동문학 발달

전통이라는 특징과 함께 영국 콘텐츠의 탄생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바로 섬나라의 지리적 요인, 그중에서도 날씨다. 북위 55도에 위치한 섬나라인 영국은 연중 200일 이상 비가 오며 늘 흐리고 으슬으슬하다. 특히 가을, 겨울에는 회색빛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는 날씨가 반복된다. 자연히 영국인들은 실내에서 소일하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집 안에서 여가시간을 보내는 데는 추리소설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가 최고였던 것이다.

이런 날씨 때문에 영국의 추리소설과 아동문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영국의 추리소설이라 하면 흔히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보다 일찍 탄생한, 그리고 더 영국적인 추리소설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있다. 그로테스크한 고딕풍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영국의 북쪽이며 또 하나의 영국인 스코틀랜드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스코틀랜드에는 잉글랜드와 또 다른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국 성공회가 아니라 신교인 장로교를 믿었다. 겨울이면 하루 5시간에 불과한 짧은 낮과 어둡고 음산한 하늘, 엄격한 칼뱅주의의 교리가 늘 스코틀랜드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사람들에 비해 거칠고 불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작가 루이스 스티븐슨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유모도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다. 유모는 밤마다 어린 스티븐슨에게 ‘믿음 없는 자들이 죽어서 떨어지는 불지옥’을 이야기했다. 그 같은 지옥은 작가에게 두려운 동시에 매혹적인 기억으로 각인됐다. 훗날 스티븐슨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존경받는 신사와 잔인한 살인마가 실은 한 몸이라는 기괴한 설정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썼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기묘한 세계, 현실에 숨겨진 어두운 악몽은 어딘지 모르게 일본의 기담문학을 연상시킨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발표 당시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 세대 후 런던의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연재된 소설 ‘셜록 홈스’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