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누구는 동해안의 백사장에서 바다 위로 시뻘겋게 솟아오르는 첫 해를 보았을 것이고, 누구는 자신이 믿는 신 앞에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 첫날을 그저 일상처럼 덤덤하게 보낸 이들도 마음으로나마 두 손을 모았겠지요. 새해가 되면 다들 무엇인가를 기원합니다. 이맘때의 기도는 종교를 넘어서는 듯합니다. 기원의 장소와 방법은 다르지만, 간절하다는 것 하나만은 같은 듯합니다. 속칭 ‘기도발’이 좋은 명소가 진짜로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른바 기도로 신념을 강화하는 ‘신념 효과’는 분명히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성취는 어쩌면 그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달린 것이겠지요. 이제 출발의 총성이 울린 한 해의 시작점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빌고 있으신지요. 그 기원을 안고 동해의 ‘푸른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해안 오솔길을 걸어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붉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기도처럼 걸어보았습니다. 새해 첫날은 이미 지나버렸지만, 그래도 1월 한 달 동안 뜨는 해는 새해에 대한 소망과 기도를 걸어놓기에 유효합니다. # 영덕의 ‘푸른 바다’를 끼고 걷는 가장 아름다운 길
영덕의 ‘푸른 바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은 강구항 북쪽 창포말등대에서 경정해변, 축산항과 죽도산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20번 지방도로 구간이다. 20번 국도의 오른편으로 바다와 더 가까이 붙어서 영덕의 해안도보길 ‘블루로드’가 지나간다. 블루로드란 부산에서 강원 고성에 이르는 770㎞의 도보여행길인 ‘해파랑길’의 영덕 구간만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정확히는 ‘영덕대게공원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조성한 64.6㎞의 도보 코스 구간이다. 블루로드는 다시 A, B, C, D 4개의 코스로 나뉜다. 영덕의 남쪽부터 북쪽으로 순서는 D, A, B, C다. 질문 하나. 왜 D가 맨 앞에 있을까. 답은 코스를 만든 순서에 따라 알파벳을 매겼기 때문이다. 가장 남쪽의 D코스가 A, B, C 코스를 다 만들고 나서 가장 나중에 만들어 붙였다는 얘기다. 블루로드의 네 개 코스를 하나하나 보자. 읽다 보면 헷갈리겠지만 그래도 뭐 상관없다. A코스는 강구항에서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풍력발전단지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B코스는 해맞이공원에서 죽도산을 잇는 길이다. C코스는 축산항에서 괴시리 마을을 지나 고래불해수욕장까지 가고, D코스는 대게누리공원에서 삼사해상공원을 잇는다. 길의 특징은 길 이름에 다 있다. A코스는 ‘빛과 바람의 길’이고, B코스는 ‘푸른 대게의 길’, C코스는 ‘목은 사색의 길’, D코스는 ‘쪽빛 파도의 길’이다. 블루로드를 A코스부터 D코스까지 다 걷기를 권하지만, 가장 긴 코스는 17.5㎞, 짧은 코스라고 해도 14.1㎞다. 하루에 한 코스씩 네 코스를 다 걷자면 나흘, 바삐 걸어도 사흘은 필요하니 체력도, 그리고 시간도 충분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압축적으로 즐길 수밖에…. 블루로드 전체 코스 중에서 짧으면서도 가장 풍경이 좋은, 그래서 두 시간 남짓이면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을 찾아보자.
# 해파랑길 중에서 블루로드, 블루로드 중에서 B코스 길이 만들어진 순서대로 알파벳을 달아주었다니 블루로드를 조성하면서 가장 먼저 놓은 길은 A코스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길’에 대한 추론은 두 가지다. 경치가 가장 좋거나, 아니면 관광객의 방문이 가장 많은 곳이거나. 정답은 두 번째다. 영덕군이 관광객을 가장 많이 불러오고 싶어 하는 곳이, 그리고 실제로 영덕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강구항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게’ 때문이다. 대게 집산지인 강구항이야말로 영덕 경제의 원동력이다. 겨우내 관광객을 상대로 대게 판 돈으로 지역경제가 굴러간다. 블루로드의 첫 코스인 A코스가 강구항에서 출발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가장 경관이 좋은 블루로드 코스는 어디일까. 추호도 망설이지 않는다. 단언컨대 B코스다. 본래 해안침투 간첩을 막기 위한 군 초소 길이었는데, 철조망을 걷어내면서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된 곳이다. B코스는 소박한 어촌마을과 기이한 갯바위가 늘어선 해안, 해송 아래 푹신한 흙길,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백사장이 교차하는 길이다. 푸른 바다 해안길을 걷는, 거의 모든 즐거움이 이 길에 있다.
# 걷기여행으로 찾아낸 꼭꼭 숨어 있는 바닷가 차유마을 차유마을은 급경사를 이룬 해안 비탈 아래에 있다. 도무지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벼랑 아래쪽에 숨은 듯이 마을이 있다. 제법 아늑한 포구까지 거느린 비밀스러운 느낌의 마을이다. 걷는 길이 놓이기 전에는 지리에 밝은 현지 낚시꾼들이나 간간이 찾아들던 곳이었다. 차유마을로 내려서면 눈길을 끄는 게 ‘대게 원조마을’ 비석이다. ‘대게의 원조’ 자리를 놓고 영덕과 울진이 십수 년째 이전투구를 벌여온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기억하기로 이 비석이 세워진 1999년은, 두 지방자치단체가 가장 첨예하게 갈등했던 때였다. 그해에 영덕은 ‘영덕 대게’를 앞세워 대게축제를 처음 열고 특산물 홍보에 나섰고, 이듬해 발끈한 울진이 ‘울진대게’ 원조설을 주장하며 대게축제를 열었다. 차유리의 ‘대게 원조마을’ 비석은 실은 마을 지명의 유래를 적은 비다. 고려 때 부임한 초대 영해부사,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영덕군수쯤 되는 이가 마을을 순시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재를 넘어왔다고 해서 ‘수레 차(車)’에 ‘넘을 유(踰)’자를 써서 차유마을이라 했다는 얘기가 적혀 있다. 여기에 영해부사에게 주민들이 영덕대게를 올렸고, 그 맛을 본 부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덧대지면서 지명유래 비석은, 대게 원조마을 비석으로 탈바꿈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명유래를 다시 읽어보고 들었던 의문. 벼슬아치가 수레를 타고 마을로 들어온 것쯤이야 무어 특별할 게 있었을까. 그럼에도 ‘수레를 타고 재를 넘어왔다’는 게 마을 이름이 된 연유는, 차유마을이 바다를 앞에 둔 거의 벼랑에 가까운 비탈면에 들어선 어촌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가보고서야 알았다. 걷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는 가파른 해안 비탈면의 마을. 그곳에 ‘군수’급 관료가 찾아온 것도, 수레를 타고 고개를 넘어 들어온 것도 ‘사건’이었을 테고, 그 ‘특별한’ 얘기가 퍼지면서 결국 마을 이름으로까지 쓰게 됐을 것이다.
# 철조망 너머, 경계근무 초병이 걷던 길을 딛다 차유마을에서 출발하면서부터 빼어난 길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마을 북쪽 해안 갯바위를 끼고 이어지는 오솔길은 걷는 길이 놓이기 이전에는 두 겹의 철조망으로 닫혀 있던 곳이었다. 해안을 경비하는 초소와 그 초소를 지키던 초병이 경계를 서며 지금 걷는 길을 오갔다. 경계와 긴장의 길이 이제 환한 겨울 볕과 파도 소리 출렁이는 평화로운 오솔길이 된 셈이다. 왼쪽 어깨에는 겨울에도 초록으로 반짝이는 해송 숲을, 오른쪽 어깨에는 코발트색 바다를 끼고 걸어가는 길. 기이하게 몸을 뒤튼 곰솔 가지도,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기묘한 무늬의 바위도 발길을 붙잡는다. 거리를 짧게 줄여놓았으니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시로 교차하는 구간도 별 부담이 없다. 천천히 걸을수록 해안 풍경은 더 잘 보이고, 파도 소리도 더 잘 들린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 숲을 벗어나면 내리막 나무 덱 길이 나온다. 망망대해가 시야로 가득 들어오는 구간이다. 나무 덱 길을 내려가면 점점 바다와 가까워진다. 갯바위들이 흘러내린 촛농처럼 기이하다. 길은 이내 백사장으로 내려선다. 긴 모래사장의 해안으로 내려서니 저 끝에 블루로드 다리가 있다. 죽산천 하구를 건너 죽도산 쪽으로 건너가는 현수교다. 날렵하고 미끈하게 잘 빠진 다리다. 블루로드 다리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백사장 주변은 한때 영덕군이 ‘신(新) 정동진’으로 이름 붙이고 관광명소로 삼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던 곳이다. 짐작대로 서울 광화문의 정동 쪽에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강릉의 정동진을 따라 한 것인데, 여기를 ‘새로운 정동진’이라고 한 건 신 행정수도인 세종시의 정동 쪽이란 이유에서다.
# 죽도산, 해발 78m의 높이 품은 경관들 블루로드 다리를 건너면 죽도산이다. 죽도산은 축산항 뒤에 병풍처럼 버티고 있는 자그마한 산이다. 지금은 내륙과 연결됐지만 죽도(竹島)는 한때 이름처럼 대나무가 우거진 섬이었다. 해발 78m에 불과하지만, 등대가 있었던 자리에 2011년 지은 죽도산 전망대에 올라가면 축산항 일대와 블루로드가 지나온 영덕 남쪽 해안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이런 경관을 보여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죽도산을 ‘블루로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걷기 여행자나 관광객은 죽도산에서 전망대만 다녀오지만 죽도산의 가장 아름다운 경관은 바다를 끼고 이어진 나무 덱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죽도산 아래 푸른 바다색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초록과 파랑이 섞인 투명한 물색을 내려다보면서 해안 절벽을 끼고 나무 덱 길을 걷는 맛이 참 각별하다. 짧은 걷기의 종점이자, 블루로드 B코스의 종착지는 축산항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축산항은 일제가 약탈자원을 실어나르기 위한 전진기지로 건설됐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 축산항에는 부산, 원산, 울릉도 등을 오가는 여객선이 정박했다. 축산항은 당시만 해도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특히 울릉도까지 월 4회 정기여객선이 운항하자 울릉도 오징어잡이 배를 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축산항 일대가 북새통을 이뤘다. 축산항의 명물은 물가자미다. 뼈째 먹는 물가자미회도 좋고, 통째로 들고 뜯어먹는 말린 물가자미 구이도 좋다. 물가자미의 제철은 4월부터 8월까지. 하지만 다른 계절에도 맛이 그리 빠지지는 않는다. 이즈음 축산항에서 한창인 것은 청어다. 지금 잡는 청어로는 과메기를 만드는데, 영덕읍 창포마을에는 청어과메기를 말리는 집들이 해안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과메기가 꽁치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본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드는 것이었다. 연근해에서 청어가 잘 안 잡히자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꽁치였다. 10여 년 전쯤 연근해에서 청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하자, 사라졌던 청어과메기를 살려낸 게 창포마을이었다. # 해안 드라이브와 한옥마을, 오래된 술도가 영덕에서는 걷기 말고 운전하는 여행도 추천할 만하다. 영덕의 강구에서 축산까지 수없이 S자를 그리며 이어지는, 이른바 ‘강축해안도로’는 걷기뿐만 아니라 차로 운전하며 드라이브하기에도 그만이다. 차로 이 구간을 달린다면 도리 없이 멈춰야 하는 곳이 영덕읍 창포리의 창포말등대다. 대게 집게발이 감싸고 있는 형상을 한 창포말등대는 그 자체로도 볼거리지만, 운치 있는 해안 산책로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전통 한옥이 몰려 있는 괴시리 전통마을도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다. 영해 일대는 대갓집이 많고 문중의 종가들이 즐비해 예부터 ‘작은 안동’이라 불렸다. 괴시리는 영양 남씨 괴시파의 400년 세거지다. 너른 영해의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에는 대남댁, 물소화고택, 해촌고택 등 전통 한옥들이 흙담을 끼고 옹기종기 맞붙어 있다. 더불어 가볼 만한 곳이 근대건축물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영해면 옛 장터거리다. 영해면에는 등록문화재만 11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이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영해양조장과 옛 건물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해금융조합이다. 영해양조장이 여태 남겨두고 있는 옛 자취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옛 한옥의 뼈대가 남은 술도가와 오래된 술독에서 세월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오래된 건물과 자취를 유물로 본다면, 오래된 도정기와 먼지 앉은 술독으로 가득한 허물어져 가는 양조장 뒤편 창고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늙고 쇠락한 것들 사이에서 지나쳐온 영해면 괴시리 마을의 목은 이색 선생 유적지 빗돌에서 읽었던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회상컨대 몇 년 새에 선배들은 다 떠났고/아침까지 지저귀더니 어느덧 또 황혼일세.” 고려 말의 정치가이자 문호 이색. 영해 해돋이를 보고 나서 쓴 이 시에서 일출을 새로운 희망 대신 ‘저물어가는 석양’으로 읽었던 것을 보면, 그때 그는 아마도 쓸쓸한 황혼의 나이였던 모양이다. ■ 푸른 동해를 보며 가장 걷기 좋은 길 그런 길이 영덕에 있다. 이름하여 ‘블루로드’다. 사나흘 동안 길게도, 또 두어 시간에 짧게도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이제 새해의 문을 연 지 열흘 남짓. 그 길 위에 서서 솟아오르는 해를 봐도 좋고, 망망한 바다를 봐도 좋다. 그러고 나면 한 해를 살아갈 힘이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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