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설연휴 추억속으로...순천,합천,경주 "촬영장"

醉月 2020. 1. 26. 17:29
전남 순천의 드라마촬영장에 만들어진 달동네 야외 세트. 1980년대 서울 변두리의 산동네를 감탄이 나올 만큼 감쪽같이 모사해 놓았다. 골목과 집들은 시간이 깃들지 않은 ‘가짜’지만, 골목의 과거 풍경에서 ‘진짜’ 추억이 떠올려진다. 중년의 관광객은 물론, 젊은이들도 자주 찾는 관광지인데 젊은이들은 주로 교복 등을 대여해 입고 기념촬영을 한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
‘사랑과 야망’등장한 달동네
골목 낙서까지 디테일 돋보여
부모세대 교복 빌려 입고
촬영장 활보하는 기회까지

日帝 관사마을·농협창고 등
시간 수북이 쌓인 공간도

합천 ‘영상테마파크’
영화 ‘암살’‘택시운전사’ 등
국내 최대 시대물 오픈세트장
종로 전차·남영동 뒷골목…
1920∼1980년대 서울 재현

경주 ‘추억의 달동네’
옛날 담배·껌·양은 도시락 등
방대한 양의 ‘7080 소품’ 인기
규모 작지만 젊은층 많이 찾아



‘라떼는 말이야….’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어른을 비꼬는 유행어입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곤 하는 어른들의 일장연설을 풍자하는 말이지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혹여 명절 밥상 앞에서 ‘왕년’ 운운하다가는 소위 ‘꼰대’ 취급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괜찮지 않을까요. 추억을 차곡차곡 담아놓은 오래된 상자를 꺼내볼 수 있는 곳. 중년 이상 나이의 독자들이 ‘나 (젊었을) 때’로 되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전남 순천의 ‘드라마촬영장’, 경남 합천의 ‘영상테마파크’, 그리고 경북 경주의 ‘추억의 달동네’.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위해, 또 관광객 유치를 위해 만든 세트장입니다만, 오래전의 경관을 정교하게 모사한 공간이 마술처럼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다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잊힌 줄 알았던, 그래서 기억의 저편에 가둬져 있던 따스한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납니다. 긋는 순간 화르르 성냥에 불이 붙어 환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웃과 나누며 살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았던 이런 누추한 마을에, 희망이 깃든 새해는 축복처럼 왔습니다.

이제 곧 설 명절입니다. 명절을 귀찮고 불편한 구습처럼 여기게 된 시대에 ‘나 때’의 설레던 명절을 생각해봅니다. 돌이켜보면 다들 없이 살았지만, 나누는 마음만으로도 풍족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설을 앞두고 낡고 오래된 것들을 꺼내봅니다.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추억을 호명하는 시간이 된 건 말입니다. 감쪽같이 한 세대 전의 거리 풍경을 복원해둔 곳을, 명절을 앞두고 찾아간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 드라마로, ‘과거’가 지어지다

당연한 얘기지만, 관광지로 개방된 드라마 촬영장은 히트작 드라마의 인기에 기댄다. 사극 ‘태조 왕건’의 경북 문경 세트장이 그랬고, 드라마 ‘올인’의 제주 세트장이 그랬다. ‘해상왕 장보고’의 전남 완도 세트장도 마찬가지다. 뜨겁게 달궜던 인기는, 식을 때도 금방이다. ‘신드롬’이라 불렸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 드라마를 다 찍고 부숴버린 세트장을 태백시가 다시 짓기까지 하면서 관광객을 받았지만, 지금은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이 드라마에 함께 출연했다가 결혼까지 골인한 송중기·송혜교 커플의 이혼이 아니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전남 순천의 드라마촬영장. 여기도 시작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김수현 극본의 2006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 1987년 처음 방송돼 엄청난 성공을 거뒀던 주말연속극을 2006년에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드라마는 196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상반된 성격의 두 형제가 겪는 인생 역정과 가족사를 다뤘다. 순천의 드라마촬영장에 가장 먼저 들어섰던 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어렸을 때 살았던 순천읍내, 서울로 올라가 살게 되는 달동네와 1980년대 서울 변두리다.

순천 드라마촬영장이 다른 세트장과 다른 건 드라마가 인기를 얻기 전부터 촬영장을 관광지로 삼고자 했다는 것. 세트장 건물은 합판을 덧대 대충 만들어서 촬영을 끝낸 뒤에 곧 허무는 게 보통인데, 이곳의 세트장을 실제 건물을 짓듯 공들여 콘크리트로 지었던 건 그 때문이다. 순천의 촬영장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디테일’이다. 다른 촬영세트장이 드라마의 인기나 주연 배우의 명성에만 기댈 때, 이곳은 작고 사소한 옛것의 풍경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TV 화면에서뿐만 아니라, 육안으로도 진짜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정교한 디테일을 추구했다. 서점에는 오래된 책을 사다 꽂고, 문방구에는 한 세대 전의 학용품을 가져다 놓았으며, 골목에는 그 시절의 낙서까지 했다.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드라마촬영장이 순천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가 된 배경이다.


1980년대 서울 남영동 뒷골목쯤을 재현해놓은 합천 영상테마파크 공간. 순댓국을 파는 국밥집과 40년 전통의 만둣집, 지금으로 치면 정육점인 식육센터 점포가 나란히 있다. 오른쪽 원 안의 사진은 1980년대 서울 도심의 옥외 간판. 전봇대나 전깃줄, 간판 등 사소한 것들의 재현도가 훌륭하다.



# 그때는 그랬지…사소한 풍경들

그때는 그랬다. 시멘트벽에 붙여놓은 오래된 쥐잡기 포스터, 후미진 골목 구석의 가위그림과 소변금지 글씨, 얼음을 ‘어름’으로 쓴 얼음 가게…. 순천 드라마촬영장에 들어서서 옛 거리를 재현한 골목을 걷다 보면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추억은 길어 올려진다. 예컨대 이런 것들. 붉게 녹슬어 있는 양철지붕, 드르륵 열리는 구멍가게 진열장의 유리 미닫이문, 대나무 살로 만든 파란색 비닐우산, 우량아 얼굴이 그려진 분유통, 주근깨투성이 못난이 인형, ‘둘만 낳자’는 가족계획 표어, 안장이 높은 낡고 투박한 짐자전거…. 이런 것들은 금세 그 시절의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순천 드라마촬영장은 크게 세 구획으로 나뉜다. 촬영장에 들어서면 먼저 1980년대 서울 변두리 풍경이 펼쳐진다. 구멍가게도 있고, 극장도 있고, 사진관도 있고, ‘고고장’도 있다. TV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주 무대였던 순양극장의 간판 그림 속 영화는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 영화관의 ‘다음 푸로’는 ‘영자의 전성시대’다. ‘맨발의 청춘’이 1964년 작이고, ‘영자의 전성시대’가 1975년에 개봉됐으니 시간차가 10년이 넘지만 뭐 그런 것까지 따질 일은 아니다.

극장 주변에는 교복 등을 빌려 입을 수 있는 ‘추억여행관’이 있고, 사진 등을 출력할 수 있는 ‘청춘사진관’도 있다. 교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건 주로 젊은이들이지만, 간혹 교련복을 빌려 입은 중년의 남성들도 눈에 띈다.

드라마촬영장의 다른 구획에는 1960년대 순천의 옥천 냇가와 읍내 거리가 재현돼 있다. 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양철지붕의 판잣집과 일제강점기 풍의 낡은 건물들이 추억 속의 시골을 보여준다. 누추한 골목과 낮은 처마의 대폿집에서는 고단했던 삶이 느껴진다. 전혀 시간이 깃들어 있지 않은, 가짜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거기서 받는 느낌은 진짜에 가깝다.


# 부모세대가 여행의 주도권을 되찾다

▲ 순천 드라마촬영장의 달동네 중턱쯤에 있는 연탄가게. 짐칸에 실은 철제 석유통과 짐자전거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을까.

순천 드라마촬영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곳은 단연 언덕 위쪽의 달동네 세트다. 처마와 처마가 잇닿은 누추한 집들이 마치 성곽처럼 펼쳐지는 규모도 대단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해낸 1980년대의 달동네 풍경도 감쪽같다. 달동네의 비탈을 따라 이어지는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은 물론이고,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장, 그 시절의 전봇대와 가로등까지 정교하게 되살려냈다. 달동네 초입에는 백열전구 아래 젓가락 장단이 울려 퍼질 것 같은 대폿집도 있고, 뜨끈한 국물에 푸짐하게 밥을 말아줄 것 같은 해장국집도 있다. 달동네의 골목 끝, 그러니까 산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는 마치 은유나 상징처럼 교회가 있다.

순천 드라마촬영장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여기서는 예외 없이 가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한다. 여행의 주도권을 잃은 지 오래인 부모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여기서만큼은 주인공이다.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나 때는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다. 중년 이상의 나이라도 지나온 시간이 마냥 행복했을까. 그래도 과거에는 지금보다 젊고, 어렸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과거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고, 되새기고 싶은 추억이다.

복고의 유행 때문인지 순천 드라마촬영장은 ‘레트로’ 감성을 찾는 젊은 층의 방문이 크게 늘었다. 젊은이들은 촬영장에서 아버지 세대의 교복을 빌려 입고 촬영장을 활보한다. 외국인 관광객도 적잖다. 마침 드라마촬영장을 찾았을 때 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기념촬영에 한창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곳은 과연 어떻게 보일까.


# 철도관사와 옛 양곡창고

순천에는 드라마촬영장처럼 촬영을 위해 가짜로 만든 곳 말고도, 차곡차곡 시간이 쌓여 있는 공간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순천역 인근의 조곡동 일대다. 조곡동에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순천철도사무소 직원을 위해 조성한 주거단지인 ‘철도관사마을’이 있다. 이런 관사마을은 서울·대전·부산·영주에도 있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순천의 철도관사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철도관사마을에는 152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가장 작은 것이 정원을 포함해 100평 남짓이었다니 관사는 웬만한 ‘저택’ 수준이었다. 남아 있는 일본식 관사는 50여 채 남짓. 현직 철도 직원이 사는 집도 있고, 퇴직 직원이 50년 가까이 기거하는 집도 있으며, 일반인들이 사들여 사는 집도 있다. 재미있는 건 철도사무소 직원의 관사가 당시의 간이역사와 빼닮았다는 것이다.

철도관사마을에는 옛 철도 사진과 그림으로 조성한 벽화거리가 있고,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기차를 주제로 한 카페도 있다. 마을 입구에는 승차권과 제복 등 철도와 연관된 옛 물건을 전시하는 소박한 철도마을 박물관도 있다. 박물관 위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다. 마을 인근에는 일제강점기 농협창고를 이른바 ‘레트로 감성’으로 리모델링해 젊은 층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인 ‘청춘창고’가 있다. 청춘창고 건너편에는 양곡창고의 옛 분위기를 살려 만든 세련된 느낌의 카페와 술집도 있다. 모두 추억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합천 영상테마파크의 1980년대 서울의 모습. 외형과 소품은 물론이고 주변의 분위기까지도 그 시절 그대로 모사해 놓은 곳이다.



# 추억을 되새김하는 중년의 테마파크

규모나 공간의 다양성 면에서 순천 드라마촬영장을 가볍게 능가하는 곳이 바로 경남 합천의 영상테마파크다. 여기는 국내 최대 시대물 오픈세트장이다. 촬영세트장이 규모도 클뿐더러 시대별로 다양하게 조성돼 있다. 게다가 이곳은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까지 업고 있다. 첫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택시운전사’‘변호인’‘밀정’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영화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순천 드라마촬영장이 촬영세트장을 슬쩍 엿보는 느낌의 공간이라면, 합천의 영상테마파크는 본격적으로 세트장을 놀이나 관람의 공간으로 만들어낸 곳이다. 촬영세트 앞에 세워진, 그곳에서 찍은 영화의 포스터나, 테마파크 안에서 돈을 받고 말이 끄는 마차를 태워준다는 것에서 그걸 알 수 있다.

합천 영상테마파크에는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서울이 있다. 종로4가를 달리는 전차부터, 남영역 아래 굴다리와 조선호텔 옆의 환구단, 서울역과 한국은행 건물이 그곳에 있다. 이곳이 만족스러운 건 규모나 시설 때문이 아니라 추억을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영상테마파크에 재현된 시간은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가난하고 누추했어도, 그들에게 가장 빛났던 청춘의 시간이었다. 압축성장의 시기에 젊은 날을 건너온 중년들이 추억을 되새김할 만한 공간은 다 사라지고 없으니 ‘가짜’인 줄 알면서도 이런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듯하다. 영상테마파크는 대대적인 확장을 앞두고 있다. 200억 원을 들여 조선총독부 건물 등의 세트를 더 짓고 편의시설도 늘릴 계획이다.


경주 추억의 달동네 관람 동선이 시작되는 광장에 1976년부터 생산된 포니 픽업트럭이 세워져 있다. 당시 이 차 가격이 189만 원이었다.



# 청와대도 가고, 영화도 보고

합천 영상테마파크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여러 층위의 시간이 지층처럼 복원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1980년쯤의 서울이다. 그 시절의 서울역과 한국은행, 남영동 뒷골목이 마치 흑백사진에서 꺼내진 것처럼 눈앞에 있다. 거리에는 주황색 공중전화기며 ‘멕시코 천연치클’ 껌 광고가 나붙은 버스 승강장, 시멘트 담에는 옛 영화 포스터가 나붙어 있다.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 풍경이 딱 이랬다. 옛 건물과 오래된 물건을 둘러보다 보면 문득 자신이 건너온 과거의 시간과 마주치게 된다. 세트장 골목을 기웃거리다 때때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영상테마파크는 그러나 지역 주민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서울사람에게는 감회가 느껴지는 서울의 옛 경관은, 서울의 기억이 없는 합천사람에게는 낯선 풍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달라진 건 영상테마파크 뒤 언덕에 청와대 세트장을 짓고 나서다. 실제 크기의 68%로 정교하게 재현한 청와대를 보러 지역과 인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청와대에 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들은 너나없이 청와대 2층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 수화기를 든 채 기념사진을 찍는다.

합천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살짝 귀띔한다. 합천박물관에서 매월 마지막 화요일 오후 2시에 ‘추억의 영화’를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12월에는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을 상영했고, 1월부터 3월까지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3편을 연이어 상영할 계획이다. 박물관 입장도, 영화관 관람도 모두 무료다. 지역주민을 위한 행사지만 관광객도 환영한다.


경주 추억의 달동네에 재현된 버스정류장. 경주 불국역에서 보문단지까지 운행하는 10번 버스를 그림으로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는 가족을 인형으로 세웠다.



# 추억의 달동네에서 옛날 신문을 읽다

유적지가 즐비한 경북 경주에도 다소 뜬금없지만 1970∼1980년대 생활상을 재현한 테마파크 ‘추억의 달동네’가 있다. 순천 드라마촬영장이나 합천 영상테마파크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곳도 아니고, 규모도 크게 못 미치지만 온 가족이 가장 압축적으로 과거의 추억을 보여주는 곳이다. 싸지 않은 입장료에도 관람객이 적잖다. 이곳은 정작 중년 이상의 관람객은 드물고, 특히 자녀를 동반한 가족 관람객이나 친구나 연인과 함께 온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역설적이지만 이곳의 매력은 ‘허술하다’는 것에 있다. 순이네 점방이 있는 골목길이며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안내문을 써 붙인 목욕탕, 대폿집과 빵집이 있는 7080 상가 등 다양한 전시공간이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에 있다. 옛 공간에다 사람 크기의 인형을 놓아두고 상황을 연출했는데 사실 공간 연출이나 전시 기법에서 ‘아마추어’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세련된 맛이라곤 전혀 없지만 ‘레트로’를 앞세워서 그런지 서툰 관리까지 ‘의도적 키치’로 읽힌다.

이곳이 자랑하는 건 엄청난 양의 소품. 오래된 악보, 영화 포스터, 양은 도시락, 옛날 담배와 껌…. 이걸 다 어떻게 구했나 싶은 것들이 잡화점이나 문방구, 만화방 등 과거를 재현해놓은 세트장 곳곳에 전시돼 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게 목욕탕에 붙인 안내문이었다.

‘국민학교’ 졸업생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안내문은 ‘이제 의젓한 중학생이니 목욕요금도 일반요금인 800원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집에서 800원을 받아다가 어린이 요금 400원만 내고 나머지로 군것질하는’ 아이를 꾸짖는 내용도 있다. ‘1979년 2월 한국목욕업중앙회 종로지부’라 적어놓은 것을 보면 실제 40여 년 전에 목욕탕에 써 붙였던 문구인 듯하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이 ‘7080 상가’ 점포 벽에 발라놓은 옛날 신문지. 신문지의 오래된 기사 속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1983년 5월 26일 한 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 ‘국채발행 취소’다. 취소의 이유가 ‘내수경기가 회복되고 세금이 잘 걷혀서’란다. 한 스포츠지의 연예기사 제목은 ‘이미자는 건재’다. 집안 살림 틈틈이 취입한 곡 ‘여객선’이 히트를 기록했단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수 이미자는 건재하다. 결과적으로 오보가 된 기사도 있다. “1990년대에는 우주관광객을 우주왕복선에 태워서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 선회 호텔로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 ‘우주관광 1990년대엔 가능’이란 제목의 기사다. 먹고사는 형편이야 상전벽해 수준으로 나아졌지만, 과연 지금 당도한 미래는 과거에 우리가 꿈꿨던 그대로일까. 명절도 이제 추억의 영역이 되고만 시대에 생각한다.


■ 오래된 것이 주는 즐거움

중년 이상 세대들이 과거를 재현해놓은 촬영세트장에서 만나는 건, 결국 자신의 과거다. 누구에겐 눈물겹고, 누구에겐 회한이며, 또 누구에겐 아련하다. 이들이 과거에 감격하는 건, 가난하고 누추했어도 그때가 가장 빛났던 청춘의 시간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