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앞장서 가는 돌담이 걸음을 이끈다. 솟을대문이 우뚝한 기와집과 조개껍데기처럼 낮게 엎드린 초가집이 번갈아 객을 반긴다. 이곳에서는 그 무엇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껴안고 보듬어 절묘한 조화를 직조한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다.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듯, 익숙한 걸음으로 이 집 저 집 들르기 마련이다.
충남 아산시 외암민속마을을 찾아가면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이 땅에 우리 고유의 풍경을 간직한 전통마을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정다운 느낌을 주는 곳이 외암민속마을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옛 정취가 웅숭깊게 다가선다. 많은 이들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이 마을을 일러 ‘살아있는 생활박물관’이라 부른다.
#외암민속마을 =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마을은 고요 속에 잠겨 있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조차 안 들린다. 마을이 전하는 평화와 안온의 기운이 고스란히 안겨온다. 아! 하지만 모두 잠든 것은 아니었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다 보니 아낙네들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새벽부터 시작한 모양이다. 농촌 일이 그렇지. 품앗이인지 놉을 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먼저 솔밭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내를 따라 우회하거나 한가운데로 곧장 들어가는 길 등 마을 길이 몇 개 있지만, 내 경험으로는 왼쪽에서부터 걷는 게 가장 좋다. 뒤쪽으로는 설화산(雪華山)이 우뚝 서 있고 앞쪽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어린 벼들이 막 뿌리를 내리는 논을 지나면 마을의 초입이다. 초가집 몇 채를 지나 솟을대문이 우뚝한 기와집과 만난다. 담 앞의 안내판에 감찰댁이라고 써놓았다. 옛 주인의 관직에서 이름을 따온 모양이다. 문은 잠겨 있지만 담이 높지 않아 집 안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안채 동쪽에 대나무 숲이 있고 그 앞으로 정원과 정자가 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잡초가 키를 재는 마당에는 설화산에서 내려온 뻐꾸기 소리가 연신 들락거린다.
고샅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다. 눈은 집들보다 돌담에 빼앗긴 지 오래다. 외암마을을 빛나게 해주는 것은 누가 뭐래도 돌담이다. 마치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된 미로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담장 길이를 모두 합치면 5.3㎞나 된다니, 어느 정도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담을 어쩌면 이렇게 정겹게 쌓았을까. 이곳의 담은 배척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그어놓은 최소한의 경계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집은 모두 들여다보인다. 뜰 안의 나무와 장미·찔레도 낮은 담을 넘어 바깥세상을 구경하러 나왔다. 아무리 봐도 걷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다. 이 풍경을 무슨 말로 그릴 것인가. 가난한 언어 앞에 다시 한 번 절망한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외암(巍巖) 이간(李柬)이 출생했다는 건재고택을 보고 난 뒤 바깥마당 은행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는다. 풍경과 그늘의 유혹을 도저히 물리칠 수 없다. 걸음이 좀 늦어지면 어떠랴. 조금 떨어져 앉으니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담장 밑의 키 작은 꽃들이 보인다. 자칫 못 보고 지나갈 뻔했구나. 누가 특별히 챙겨주지 않아도 받은 몫의 생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들. 그들이 있어서 풍경은 완성된다. 사람 사는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돌담을 따라 걷는다. 참새들이 부지런히 초가지붕의 처마를 드나든다. 아직까지 나락이 남아있을 리는 없고, 새끼들이 눈을 뜨고 먹이를 조르는 것일까? 희미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골목 끝에서 불현듯 뒤를 돌아본다. 아! 내가 지나온 길에, 지금까지 본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앞으로 갈 때는 보지 못하던 것들. 자칫 그냥 지나갈 뻔했다. 언제 어디서든 가끔 돌아볼 일이다. 사는 것도 그렇지 않던가.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는지. 진정 아름다운 것은 내 뒤에서 머뭇거리며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수댁에 들른다. 건재고택, 송화댁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는 집이다. 마당에 수로를 만드는 등 정교하게 조성한 흔적이 역력하다. 바깥마당에는 세월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버드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다. 그 옛날 말이라도 매어 두었을까? 운치 있는 집은 발길을 오래 붙잡아 두기 마련이다.
다시 골목길 탐사에 나선다. 오랫동안 비워둔 어느 집 마당에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송화댁은 사람의 집이라기보다는 소나무의 집 같다. 사람 사는 공간을 최소화하고 정원 공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했다. 옛사람들의 여유로운 마음을 확인한다. 소나무들도 그런 마음을 아는지 꼿꼿함보다는 자유분방함을 택했다.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저희끼리 얽히고…. 파격은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다.
외암종가댁의 아담한 꽃밭과 사랑채 마루가 쉬었다 가라고 손짓한다. 이런 땐 모른 체 그냥 지나가면 결례다. 마루에 앉아 땀을 들인다. 여행 중에 누리는 이런 짧은 휴식은 또 얼마나 큰 행복인지.
외암사당을 거쳐 마을 외곽 길로 빠진다. 너른 길옆으로 내가 졸졸졸 소리 내며 흐른다. 고종황제가 하사했다는 참판댁과 풍덕댁 등을 들르며 걷다 보면 마을 입구에 닿는다. 가뭄 속에서도 과일은 열매를 익히고 밭작물은 부지런히 키를 키우고 있다. 개복숭아와 보리수가 탐스럽게 익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 풋과일을 물고 냇가에서 송사리를 쫓던 작은 아이. 그리움이 울컥 고개를 든다. 노인 한 분이 밭을 매고 있다. 이 마을은 전시용이 아니라 삶을 꾸리기 위해 농사를 짓고 일을 한다. 그 또한 외암마을의 가치다.
중간에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에 들른다. 600살이 넘은 이 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당산목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1월 14일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목신제를 지낸다. 느티나무와 인사를 나눴으니 이제 구경할 건 다 한 셈이다. 그래도 발걸음에는 아쉬움이 잔뜩 매달려 있다. 마을을 벗어나는 다리를 건너기 전 지나온 길을 슬며시 돌아본다. 몸은 여기 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저만치에서 서성거린다. 그리움 한 자락 맡겨두고 가는 수밖에 없다.
#봉곡사 소나무 숲길=‘천년의 숲길’ 봉곡사로 가는 소나무 숲길의 이름이다. 숲에게 1000년이 그리 길 리야 없지만, 거기에 ‘길’이 붙으면 무게가 달라진다. 1000년 동안 사람이 오간 길.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을까.
숲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와락 다가선다. 언뜻 봐도 100년은 넘게 산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기세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눈에 거슬리는 흉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소나무 밑동마다 V자 모양의 흠집이 깊게 파여 있다. 어느 것은 나무가 자라면서 ♡모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분명 누군가 도구를 이용해서 벗겨낸 자국이다. 보기 흉할 뿐 아니라 나무의 고통이 전이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안내판에서 쓰린 역사를 확인한다. 일제가 패망 직전에 연료용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해서 낸 상처라고 한다. 70년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은 저 상처. 이 민족의 상처이기도 하다. 소나무들이라고 그 치욕을 어찌 쉽사리 잊을까. 하지만 원망의 기색 하나 없이 청정한 숲을 만들어주고 있다.
슬픔 때문일까? 이 숲은 솔 향이 유난히 짙다. 길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숲을 열어준다. 주차장에서 봉곡사까지 이어지는 700m의 이 길은 산림청 주최 ‘아름다운 거리 숲’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생명의 숲 국민운동에서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숲길이다. 다만 포장을 해놓은 게 눈엣가시다. 가까운 숲에서 꿩이 운다. 길가의 돌탑이 침묵으로 대답한다. 이런 숲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생각마저 놓고 자연 속으로 스며들다 보면 저잣거리에서 지고 온 상처 정도는 금세 치유된다.
솔숲 사이 키 낮은 싸리나무가 수줍게 꽃을 피웠다. 그곳에서 쪼롱쪼롱 산새가 운다. 다람쥐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길을 가로지른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풍경이다. 오랜 가뭄 속에서도 숲은 끝내 푸른 기운을 놓지 않는다. 세상을 지키겠다는 의지인 것 같아 든든하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가면 봉수산 능선으로 가는 등산로고 오른쪽으로 내처 올라가면 봉곡사다. 조금 올라가니 나무들 사이로 절집들이 나타난다. 봉곡사다. 만공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 절은 규모가 단출하다. 언덕 위 삼성각을 다녀와 향각전, 대웅전, 요사채를 천천히 돌아본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부르는 이 없고, 가라고 등 떠미는 이 없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은 오롯이 내 것이다. 마당의 잔디 위로 뻐꾸기 울음이 푸르게 내려앉는다.
외암마을은 약 500년 전부터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이 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은 예안이씨다. 맨 처음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예안이씨는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었다. 진한평에게는 딸만 셋 있었는데, 이사종이 진한평의 큰딸과 혼인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예안이씨의 씨족마을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길게 형성된 타원형이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흘러내리다 마을에 이르러서 완만한 구릉을 이뤘다. 따라서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춰 집이 앉은 방향은 대부분 서남향이다.
마을에는 다양한 한옥과 초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에게 하사받아 지은 아산 외암리 참판댁이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영암댁·송화댁·외암종가댁·참봉댁 등의 반가와 그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전통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계절에 따라 개성 있는 풍경을 보여주는 외암마을은 가족이 함께 찾아가기에 좋은 곳이다. 마을에서는 이에 맞춰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4∼6월에는 모내기와 감자·고구마 심기, 냉이·달래·쑥 캐기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7∼8월에는 옥수수 따기, 감자 캐기, 천연염색 등을, 9∼11월에는 고구마 캐기, 추수하기, 메뚜기 잡기 등을 진행한다. 겨울에 찾아가면 연 만들기, 썰매 타기, 김장하기 등을 체험해볼 수 있다. 문의 041-541-0848 |
매년 음력 1월 14일에는 주민들이 방문객들과 함께 장승제를 연다. 정월 대보름에는 달집태우기 행사와 쥐불놀이, 연날리기 등이 펼쳐진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봉곡사는 신라 말인 88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도선국사가 산 너머에서 절터를 닦고 목수들을 불러 재목을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들이 계속 밥을 물고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까마귀는 사라지고 그 터가 무척 좋은지라, 거기에 절을 짓고 석암(石庵)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고려 때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고 이름을 석암 또는 석가암이라 했다. 조선 세종 때 함허대화상이 중창한 데 이어 1584년(선조 17)에 화암거사가 중수하고, ‘봉황이 깃들이는 곳’이라는 뜻의 봉서암(鳳棲庵)이라고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4)에 다시 중창했다. 1794년(정조 18)에 궤한화상이 중수하고 봉곡사(鳳谷寺)로 이름을 바꿨다.
봉곡사는 근대의 선승 만공스님, 그리고 다산 정약용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만공스님은 23세 때 이곳 봉곡사로 왔다. 2년 동안 수행에 정진하던 중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고 한다. 이를 전해주는 만공탑이 언덕 위에 있다. 탑 머리에 음각돼 있는 ‘世界一花’는 만공스님의 친필이다.
다산 정약용은 1795년 겨울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된 뒤, 성호 이익의 증손자인 이삼환 등 13명의 실학자와 10일 동안 봉곡사에서 공자를 논하고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었다.
외암민속마을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천안나들목에서 빠져 21번 국도를 타고 20㎞ 정도 달리다 공주·유구 방면으로 좌회전. 송악면사무소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내려가 곧바로 좌회전하면 된다.
묵을 곳·먹을 것 = 외암민속마을 안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15명 이상 수용하는 독채(20만 원 이상)로는 소롱골, 느티나무집, 참판댁, 외암촌집, 풍덕댁 민박 등이 있다. 그보다 좀 작은 규모(10만 원 이상)로 사슴집, 신창댁, 할아버지네 등이 있고 수용인원 4명 정도(6만6000원)의 민박은 원두막, 병사댁, 솔뫼집, 교수댁 등이 있다. 예약은 모두 041-541-0848로 하면 된다. 인근의 온양온천 지역에 온양관광호텔(041-545-2141), 그랜드호텔(041-543-9711) 등 호텔 겸 대중탕이 여러 곳 있다. 외암마을 외곽에는 한옥으로 꾸며놓은 외암마을 저잣거리가 있다. 고촌에서는 소고기국밥, 병천순대국밥 등을 내놓는데 소가죽의 지방육으로 만든 수구레국밥을 많이 찾는다. 외암소야는 불고기정식과 차돌된장정식이 주 메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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