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活人山 소백을 가다

醉月 2015. 6. 17. 12:33

무위자연에 융화된 유학자들 별곡·구곡 조성

  • 글·박정원 부장대우, 사진·이신영 기자
    • 우리나라 첫 서원인 백운동서원도 있어… 영남 사림의 유람처로 儒彿仙 유적 많아
      소백산의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아무래도 죽령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아달라 이사금 5년(158)에 죽령(竹嶺)길을 열었다’고 나온다. 서기 158년 소백산 자락에 있는 죽령길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국보 5점과 보물 6점을 보유한 영주 부석사의 전경. 오른쪽에 있는 탑이 신라 때 건립된 삼층석탑이다. 한국 10대 사찰에 꼽힌다.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는 둘째 문제로 치자. 왜냐하면 신라는 BC 57년에 나라를 건국했으나 고대국가의 틀은 4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갖추기 때문이다. 경주 주변의 일개 부족국가에 불과한 신라가 당시 막강한 국력을 가진, 수·당나라의 침략을 거뜬히 물리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 자체가 의문이고, 더더욱 ‘여러 부족국가가 존재했던 영주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까’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의문은 가질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반박기록이 없으니 일단 역사적 기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어쨌든 2세기에 소백산 그 자체는 아니지만 소백산 자락의 죽령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래 무려 2,000년 가까이 한민족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고갯길이다.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희로애락을 겪어 왔다. 그러면서 역사와 문화가 형성됐다.

     

    죽령에 이어 소백산에 대한 기록은 고려 초 세워진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939년)에 처음 나온다. 대경대사탑비와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에 ‘소백산’이라는 명칭이 등장, 아마 이때부터 소백산이란 이름을 자연스레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2세기의 죽령과 더불어 10세기에 소백산이란 지명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아, 소백산은 한반도의 어느 산보다 역사성이 오래됐다.


    따라서 소백산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정중앙에 우뚝 솟은 명산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지형은 백두대간이 남하하면서 태백산에 이르고, 다시 서남으로 허리를 틀어 소백산을 근간으로 하부의 맥을 이으며 영남을 구획한다. 즉 소백산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3도의 경계를 이루며, 각각의 문화를 형성케 했다. 특정 지역의 정치나 문화와 성격은 지리적 환경의 영향으로 결정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에 따라 영남은 타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명 풍수지리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극찬
    풍수적 관점에서도 소백산은 지덕(地德)이 높아 십승지지(十勝支地)로 손꼽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지리가이자 실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죽령을 넘어 가다 소백산을 보고는 “사람 살리는 산”, 즉 활인산(活人山)이라 말하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정감록>의 십승지지의 첫 번째 장소가 바로 소백산 아래 풍기 차암 금계촌이다. 실제로 풍기엔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정착해 살고 있다.

     

    풍기의 금계동은 ‘정감록 마을’이라고도 불렸을 정도다. 전쟁이나 사화(士禍) 같은 정치적 파란이 일 때마다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소백산 자락으로 몰려들었다. <정감록> 사상은 병화를 피하겠다는 소극적인 은둔사상에서 출발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는 반왕조적인 색깔이 짙어지면서 반란이나 민중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소백산이란 지리적 조건은 이 지역만의 문화적 특징을 낳기에 충분했다. 소백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은 불교와 유교, 도교 3교가 고루 섞여 있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때의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된 부석사와 봉화군 물야면의 지림사, 풍기의 희방사는 이곳이 불교문화가 만개했던 지역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 순흥 출신의 문성공 안향은 고려 말기에 성리학을 수용해 안착시킨 공로를 세운 인물이고, 순흥은 주세붕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건립된 지역이다. 명종은 이 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내려, 우리나라 최초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이처럼 순흥은 불교와 유교의 문화의 중심지였다.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은 유학의 한 분야로서, 이미 도교와 상당히 융화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현세를 중시하고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 예(禮)를 다하는 유교는 12세기를 지나면서부터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과 결합하면서 은둔하는 지식인의 형태로 나타났다. 최치원이나 퇴계 이황, 신재 주세붕 등이 신선이 되기 위해 산으로 간 것도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특히 소백산의 지리적 영향이 큰 영주나 안동지역의 유학자들이 무위자연에 융화된 성향을 강하게 보였다.


    별곡이나 구곡도 도교의 영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도학자보다는 도교에 융화된 유학자들에 의해 별곡이나 구곡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안축의 ‘죽계별곡’의 배경인 죽계구곡과 연화봉에서 이어진 희방계곡이 뛰어난 계곡을 이루고, 북으로 흐르는 계곡들은 단양팔경의 절경이 되며, 계곡의 암벽 사이는 희방폭포를 비롯한 많은 폭포를이루고 있다. 이 절경들이 모두 별곡이나 구곡의 단초가 되는 것들이다.


    소백산은 또한 역대 왕과 왕비의 태를 안치했던 곳으로, 경원봉(慶元峯)은 고려 충숙왕의 태, 윤암봉(輪庵峯)은 조선 소헌왕후의 태, 초암동(草庵洞)은 고려 충렬왕의 태, 욱금동(郁錦洞)은 고려 충목왕의 태를 안치했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삼국사기>에 가장 오래된 길로 나오는 죽령고개에 장승이 서 있다.

    퇴계 이황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유소백산록>을 남겼고, 초암골에는 조선 후기 사림들이 경영한 죽계구곡이 남아 있고, 인근의 백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수서원이 설립된 곳이다. 금강산, 지리산, 가야산 등에 비하면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주변 지역에 생활하는 문인 학자들에게는 평소의 독서처로서, 노년의 은둔처로서 널리 사랑 받았다. 따라서 자연히 유산록이나 제영시 등 수많은 시문도 대부분 이곳에 살던 영남 사림들에 의해 창작됐던 것이다.


    소백산의 자연경관과 인문환경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우선 안축의 문집인 <근재집>에 수록된 ‘죽계별곡’이 있다. ‘죽계별곡’은 고려 말의 경기체가로,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 역사의 고장 풍기와 순흥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느낀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과 사람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안빈낙도의 철학을 보여 준다.


    유불선 3교 융화된 문화적 특징 드러내
    소백산이 본격적으로 문학창작의 공간으로 활용된 것은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비롯된다. 주세붕 이전의 문사로 조선 전기의 문신 정사룡(1491~1570) 등이 소백산을 다녀간 적이 있지만 한두 편의 시구만 겨우 전할 뿐이다. 주세붕은 50세 되던 1544년 가을에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1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는 후일 퇴계가 소백산을 유람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했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건립하고 나서 서원에 관한 기록을 수집해 <죽계지>를 편찬했다. 이는 소백산의 인문적 환경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는 “산을 유람하는 사람에게는 기록이 없을 수 없으며, 기록은 유산에 유익하다”고 말했다. 다만 “산행에서의 감흥을 너무 많이 시로 풀어내어 황잡(荒雜)한 데로 흘러 상지(喪志)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경계했다.


    영남 출신이 아닌 인물로 소백산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다. 그는 <記嶺南山水(기영남산수)>에서 단순한 여행의 느낌을 기록한 주관적 기록에 머물지 않고 인문적 성격의 현장적 가치를 묘사하고 있다.


    ‘소백산은 영주와 풍기 사이에 있다. 죽계를 따라 십여 리 오르면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한데 안평교를 건너면 백운대가 나오니, 청류와 격단(激湍: 매우 빠르게 흐르는 여울)이 흘러 깊은 못을 이루었다. 신재 주세붕이 이름한 곳이다.


    태봉의 서쪽에서부터 시내 하나를 건너 앞으로 가면 철암과 석륜사가 있거니와 철암이 가장 소쇄하다. 맑은 샘물이 암자 뒤 암석 사이에 솟아나는데 물맛이 매우 달면서도 차갑다. 석륜사의 북쪽에 암석이 있는데, 매우 기이하니 마치 커다란 새가 머리를 들고 날으려 하는 모습이다. (후략)’


    산수기행은 사대부들의 여가활동의 하나였다. 이를 통해 심신을 수양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방편으로 활용됐다. 소백산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인문적 환경은 유산하는 이들에게 의식을 제어하는 기제로 작동했으며, 또한 유산의 과정과 결과를 정리한 기록 자료는 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산수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성리학적 인(仁)과 지(智), 체(體)와 용(用)을 체험하고 도를 구현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유산 기록의 학습을 통해 내적인 성찰을 이루고자 했다.


    모든 산은 유생들이 학문을 닦는 도량으로 활용됐다. 소백산에 있는 금석문 자료로, 939년 비로사에 건립된 진공대사 보법탑비와, 941년 명봉사에 건립된 자적선사 능운탑비, 그리고 11세기 중반 부석사에 건립된 원융국사비가 현존한다. 소백산의 불교문화적 환경은 조선시대 들어 억불정책으로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민간신앙이자 문화로서 백성들은 불교의식이 이미 생활화된 상태였다. 국가에서는 불교의 역사성과 현실성을 다방면으로 고려해 유불 공존의 형태로, 정책은 유교에 기반하되 노역과 세금 확충에 불교를 활용했다.


    부석사에만 국보 5점, 보물 6점 보유
    웅장한 산세, 많은 계곡과 울창한 숲은 자연스레 시대를 흐르면서 많은 문화유적을 만들었다. 현재 주변에 남아 있는 국가지정 문화재만을 한 번 살펴보자. 특히 부석사에만 국보 5점, 보물 6점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불상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으며, 배흘림기둥은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국보 제18호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 


    국보 제17호인 무량수전 앞 석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등의 형태를 띠고 있다. 1967년 학술조사단의 발굴을 통해 석등에서 무량수전까지 지면에서 약 2척 깊이에 묻혀 있는 48척의 석룡의 일부를 확인했다. 이는 부석사의 창건설화와 연관된 선묘낭자가 석룡으로 변한 설화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신 목조건물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어, 그 역사적 자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조사당 내부의 벽화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눠 그렸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국보 제46호. 후대에 덧칠한 부분이 많고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됐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다. 형태상으로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불상이다.


    보물 제220호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는 원래 부석사 동쪽 산 너머 절터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 왔다.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부석사 자인당에 모셔져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3층석탑은 보물 제249호. 전형적인 신라 중대의 석탑 형식을 띠고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 부석사 고려각판은 보물 제735호. 부석사 오불회괘불탱은 보물 제1562호.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보물 제1636호.


    의상조사가 화엄의 도량을 창건하기 위해 영주 주변에 왔을 때 임시 거처로 있었다고 전하는 성혈사 나한전은 보물 제832호. 신라 화엄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 주며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보물 제996호.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은 사적 제264호. 삼국시대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길인 죽령은 명승 제30호. 충북 단양에 있는 신라 적성비는 국보 제198호. 진흥왕 16년(551) 10월 왕이 직접 북한산을 순행해 척경을 하고 11월 왕성으로 돌아오면서 주군현에 교하여 1년간의 토지세와 지역특산물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인을 사면해 준다. 이때 단양지방 부근을 순시하면서 건립한 비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창녕 진흥황순수비보다 10년 전에 만든 국내 최고의 금석문이다.


    이와 같이 소백산 주변에 문화유적들이 수두룩하다. 결국 소백산은 왕의 태를 묻은 명산으로, 또한 사람을 살리는 산으로 시대를 흐르면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명산의 반열에 있지만 자료를 좀더 찾아보면 현재의 평가보다 더욱 가치 있는 산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보인다.

     퇴계退溪 이황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 글·사진 | 윤호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남명학연구소장
    한시는 있지만 유람록 중 가장 앞서… 백학봉·자하대·죽암폭포 등 이름 붙이며 올라

    소백산은 요즈음 철쭉축제와 그곳에 세워진 천문대로 일반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음은 소백산에 대해 남긴 글이 많지 않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소백산을 유람하고 지은 한시를 남긴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유람록을 남긴 사람은 퇴계 이황 이외에 흔하지 않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퇴계 이황

    퇴계 이전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유람을 하고 <유산록(遊山錄)>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신재는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소백산에도 올라갔다 와서 최초로 소백산에 대한 유산기를 남겼다. 이러한 내용은 퇴계의 유람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퇴계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신재를 따라 소백산을 유람하고 유람기를 남겼는데, 이것이 현재 전하는 소백산 유람록으로는 가장 앞선 <유소백산록>이다. 퇴계는 자신이 이 산에 오르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영주(榮州)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했다. 그때 소백산은 머리만 들어도 바라볼 수 있고 발만 내딛으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허둥지둥 살아오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워하고 마음만 달려간 것이 지금까지 40년이다.


    작년 겨울에 풍기군수로 와서 백운동(白雲洞)의 주인이 됐다. 사적으로 남몰래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며 숙원을 풀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겨울과 봄 이래로 일찍이 일 때문에 백운동에 이르렀으나, 문득 산문(山門)을 엿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번이었다.


    4월 신유일에 오랜 비가 막 개니 산 빛이 목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에 여러 유생들을 백운동서원에 가서 보고, 이내 머물러 잤다. 다음날 드디어 산에 들어가니, 상사(上舍) 민서경((閔筮卿)과 그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갔다.’


    퇴계는 이 글의 맨 뒤에서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라고 했다. 이를 통해 그는 1548년 10월 풍기군수가 됐고, 이듬해 1549년 4월 소백산 유람을 했다. 이 글은 유람을 마친 뒤 5월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40년 동안이나 ‘오직 꿈에서나 그리고 마음으로만 달려갔다’고 하며, 49세의 나이로 소백산 유람을 한 뒤의 소감을 밝혔으니,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소백산을 오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소백산 유람은 조촐하기 짝이 없어, 서명응이 갑산부사에 부임하자마자 결행한 백두산 유람에 100여 명이 동행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물론 백두산을 오르는 것과 소백산을 오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옛날 1,400m가 넘는 높은 산을 진사 민서경과 그의 아들 응기 단 두 사람과 산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고을 원님으로서 너무나 조촐한 산행이라 할 것이다.


    ‘스님 종수(宗粹)는 내가 왔다는 것을 듣고 묘봉암(妙峰庵)에서부터 이곳에 와서 보았다. 인하여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두어 순배 술을 마셨다.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했으나, 나도 비록 병을 앓기는 했지만 반드시 올라가 보고자 했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견여(肩輿)가 아니면 안 됩니다. 옛날 주태수(周太守)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故事)가 있습니다”고 했다. 내가 웃으며 수긍했다. 조금 뒤에 “견여가 마련됐다”고 알렸다. 모양은 간단하고 쓰임은 편했다. 드디어 서경과 헤어져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승려들이 혹은 인도하고 혹은 따라왔다. 태봉(胎峯)의 서쪽에 이르러 시내 하나를 건넌 뒤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리가 아프면 견여를 탔는데, 그 힘을 교대로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로부터 산을 나올 때까지 대개 이 방법을 썼으니,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고, 명승을 구경하는 좋은 도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 본 바를 기록했다.’


    주세붕의 유람에 대한 소감
    퇴계의 유람은 이처럼 진사 민서경과 그 아들 두 사람하고 조촐하게 시작했다. 그나마 민서경은 학질을 앓게 되어 일찍 돌아가 버렸으니, 그 아들하고 단 둘이 산행을 한 셈이다. 하지만 다행히 스님 종수를 비롯해 견여를 메는 여러 명의 승려들이 있어 산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견여를 타는 것은 신재가 이미 앞에서 사용한 바가 있어 승려들이 추천하는 방법이었고, 퇴계도 매우 만족하여 견여에 대해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도구”라고 예찬했다. 이는 옛날 선비들이 높은 산행을 하던 방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백산 유람록 중 가장 앞선 이황의 <유소백산록> 사본.

    퇴계가 견여를 탄 것은 주세붕이 이미 시도했던 것임을 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퇴계의 이 글에는 주세붕과 관련된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세붕이 자신에 앞서 소백산을 유람했던 것을 밝힌 것도 소중한 기록이고, 더구나 그가 남긴 유산록이 있었음을 밝힌 것은 매우 귀한 정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주세붕의 소백산 유람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유람록이 현재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계(竹溪)를 따라서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가 어둡고 깊었으며 숲과 계곡은 그윽하였다. 때때로 물과 돌이 흐르며 부딪혀서 메아리가 절벽과 골짜기 사이에 진동했다. 안간교(安干橋)를 걸어서 건너 초암사(草庵寺)에 이르렀다. 초암사는 원적봉(圓寂峰)의 동쪽 월명봉(月明峰)의 서쪽에 있는데, 뻗어 나온 산봉우리 가운데 양쪽 봉우리에서 나온 것이 암자 앞을 감싸서 산문(山門)이 됐다. 암자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는데 그 아래는 맑은 시내가 거세게 흐르다가 모여서 웅덩이가 됐다. 그 위는 편평하여 앉을 만했는데, 남쪽으로 산문이 바라보였다.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를 굽어서 들으니 참으로 뛰어난 경치였다. 주경유(周景遊)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했는데, 나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으니, 이 이름이 혼동되지 않는가, 백(白)을 고쳐 청(靑)이라 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소백산 등산 코스는 죽령코스, 비로사코스, 희방사코스, 천동리코스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퇴계는 소백산을 오를 때 죽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암사, 석륜사를 거쳐 올라가는 이른바 배점리 코스를 통해 갔다. 이 등산로가 당시에는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신재도 바로 이 코스를 따라 올라갔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초암사 곁에 있는 높다란 바위에 백운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퇴계는 백운동, 백운암 등 백운이 너무 많으니, 청운대라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한시는 있지만 유람록 중 가장 앞서… 백학봉·자하대·죽암폭포 등 이름 붙이며 올라

    다음 글에는 퇴계 당시의 소백산 유람을 할 만한 곳과 등정이 가능한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퇴계는 대체로 구경할 만한 골짜기가 세 곳이 있다고 했다. 산의 가운데 있는 초암과 석륜사 골짜기, 산의 동쪽에 있는 성혈사와 두타사 골짜기, 산의 서쪽에 있는 세 가타암 골짜기다. 이는 아마도 죽계를 통해 올라가다가 나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개 이 가운데 한 곳만 갈 뿐이고, 그것도 산행이 가장 편한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길을 간다고 했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퇴계는 소백산뿐만 아니라 청량산에도 오르면서 ‘독서여유산’이란 명언을 남겼다.

    신재는 그의 유산록에서 여러 골짜기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기는 했지만, 그가 유람한 것도 초암과 석륜사로 가는 가운데 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곳의 내용은 산승에게 물어서 듣고 기술한 것이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했다. 퇴계는 세 골짜기 가운데 동쪽 골짜기는 다음날 하기로 남겨두고 서쪽 골짜기로 올라가며, 백학봉·백련봉·자하대·연좌봉ㆍ죽암폭포 같은 절경에 마음대로 이름을 지으며 갔다고 했다.


    ‘무릇 소백이란 산에는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의 뛰어난 경치가 있으나, 절이 있는 곳과 사람의 자취가 통하는 것은 대개 세 개의 골짜기가 있다. 초암사와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짜기에 있고, 성혈사(聖穴寺)와 두타사(頭陀寺) 등의 절은 동쪽 골짜기에 있고, 삼가타(三伽) 등의 암자는 서쪽 골짜기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이 초암사와 석륜사에서 국망봉으로 오르는 것은 길이 편한 코스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 몸이 피곤하고 흥이 다하면 마침내 돌아온다. 비록 주경유처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도 지난 곳은 가운데 한 골짜기에 그친다.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기술한 것이 매우 자세하지만, 실상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광풍대·제월대·백설대·백운대는 모두 가운데 골짜기에 있는 것이니, 동쪽과 서쪽은 미치지 못했다. 나는 쇠약하고 병이 들어서, 한 번 가서 온 산의 승경을 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침내 동쪽은 훗날의 유람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 오직 서쪽 골짜기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짜기에서 얻은 승경, 예컨대 백학봉(白鶴峰)·백련봉(白蓮峰)·자하대(紫霞臺)·연좌봉(宴坐峰)·죽암폭포(竹巖瀑布) 같은 것에 대해 문득 마음껏 이름을 지으며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또한 경유가 가운데 골짜기에서 만났던 곳에 했던 일과 같이 한 것이다. 나는 처음에 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有司)인 김중문(金仲文)이 있는 곳에서 얻었는데, 석륜사에 이르니 <유산록>이 현판에 씌어 벽에 걸려 있었다.’


    이 내용에는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신재의 유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음을 밝혔다. 퇴계는 처음에 신재의 유산록에 대해 백운동서원의 유사인 김중문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석륜사에 올라보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놓았다고 했다. 현판에 새겨서 걸어 놓았다는 것을 보면 긴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재는 1495년생으로 1501년생인 퇴계보다 6세 연장이고, 1543년에 풍기군수가 됐고, 퇴계는 이보다 5년 뒤인 1548년에 풍기군수가 됐다. 따라서 퇴계가 소백산을 유람한 것도 신재가 유람한 5년쯤 뒤인 것으로 보인다. 퇴계는 선배인 신재가 지은 유산록을 좋아하여 “나는 그 시와 글의 웅장하고 빼어남을 감상하며 이르는 곳마다 펴서 읊었다. 마치 홍안백발의 늙은이와 더불어 그 사이에서 마주 이야기하고 수창(酬唱)하는 것 같았는데, 이것에 힘입어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제법 많았다”고 했다.


    조망의 철학과 단상
    소백산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원래 소백산맥 중에는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ㅂ·ㄹㅁ’에서 유래된 백산(白山)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소백산이라고 한다. 태백산(1,568m)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 중의 산으로 북동쪽에 국망봉(國望峰·1,421m), 남서쪽에 민배기재와 연화봉(蓮花峰·1,394m)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남서쪽의 연화봉에서 4km 정도 내려가면 제2연화봉(1,357m)에 이른다.


    이상의 내용만 보아도 소백산이 매우 넓고 험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내용에는 퇴계가 소백산에서 지났던 곳이 잘 드러나 있다. 철암(哲庵)과 명경암(明鏡庵)을 거쳐 석륜사에서 자고, 봉두암(鳳頭岩), 광풍대(光風臺)를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백운암을 지나 석름봉, 자개봉에 오른 뒤 최종 국망봉에 올랐다고 했다. 영주의 문화축제에서는 퇴계가 오른 코스를 따라 소백산을 오르는 ‘퇴계 등산로’를 축제 아이템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이날 철암과 명경암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다. 철암이 가장 맑고 시원했는데, 맑은 샘물은 암자 뒤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이 물은 암자의 동쪽 서쪽으로 나뉘어 흘렀으며, 맛이 무척 달고 시원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자못 높고 트였으며, 석륜사 북쪽으로는 바위가 매우 기이했다. 마치 큰 새가 머리를 치켜들고 날아가려는 것 같았으므로, 옛 이름이 봉두암이다. 그 서쪽에 바위가 우뚝 선 것이 있는데, 사다리를 놓은 뒤에야 오를 수 있으며, 경유가 광풍대라 부른 것이다. 절 안에는 돌을 새겨 불상을 만들었다. 승려들이 그것의 영험함과 특이함에 대해 말했으나 믿을 만하지 못하다. 날이 밝은 뒤 계해일에 걸어서 중백운암(中白雲庵)에 올라갔다. 이름은 잊었지만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지어놓고 그 가운데에서 좌선(坐禪)을 하고 선(禪)의 이치에 자못 통했는데, 하루아침에 떠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 승려는 없으며, 창 앞의 오래된 우물만이 완연할 뿐이고, 뜰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했다. 중백운암 이후로는 길이 더욱 높고 깎아지른듯하여 마치 바로 위에 매달아 놓은 듯하다. 있는 힘을 다하여 밟고 더위잡은 이후에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견여를 탔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쯤에 석름봉(石峰)이 있었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풀을 엮어 움막을 지어놓았고, 그 앞에는 덫을 엮어 놓은 것이 있었다. 매 잡는 사람이 한 것인데, 그 어려움을 상상할 만했다. 석름봉의 동쪽 몇 리쯤에 자개봉(紫蓋峰)이 있다. 또 그 동쪽 몇 리쯤에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니, 곧 국망봉이다. 만약 하늘이 맑고 해가 밝으면 용문산(龍門山)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보이는데, 이 날은 산 아지랑이와 바다 안개가 드넓고 아득하게 끼어서, 용문산마저도 또한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끝에 월악산(月嶽山)만이 아른 거릴 뿐이었다. 동쪽을 돌아보면 뜬구름과 쌓인 취미(翠微)가 수만 수천 겹으로 쌓여 모습은 비슷하나, 진면목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태백산(太白山)이고, 청량산(淸凉山)이고, 문수산(文殊山)이고, 봉황산(鳳凰山)이다. 그 남쪽으로 문득 숨었다 문득 보였다. 구름 낀 하늘에 떠 있는 것은 학가산(鶴駕山)·팔공산(八公山) 등 여러 산이다. 그 북쪽으로 형체를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한쪽에 아득한 것은 오대산(五臺山)·치악산(雉岳山) 등 여러 산이다. 물 가운데 바라보이는 것은 더욱 적었는데, 죽계(竹溪)의 하류는 구대천(龜臺川)이 되고, 한강의 상류는 도담(島潭)의 굽이가 되니, 이와 같을 뿐이었다.’


    퇴계는 석름봉, 자개봉, 국망봉에 올랐다. 그 가운데 국망봉이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그곳에서의 조망에 대해 말했다. 퇴계가 국망봉에서 언급한 조망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의 지리에 대한 식견이 매우 넓고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는 오대산(五臺山)·치악산(雉岳山) 등이 보인다. 날이 좋으면 용문산, 서울까지도 보인다고 했으니, 아마도 국망봉이란 이름은 서울이 바라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월악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청량산(淸凉山)·문수산(文殊山)·봉황산(鳳凰山)이고, 남쪽으로 보였다 숨었다 하며 구름 속에 아스라한 것이 학가산(鶴駕山)·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


    퇴계가 산에 올랐을 때에는 하루도 흐린 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쾌청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종수가 가을날 서리 온 뒤, 혹은 오랜 비가 내리다가 새로 갠 날이 조망하기에 좋다고 했다. 퇴계는 이에 대해서 산에 오르는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바라보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자연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즉 산 위에는 기온이 한랭하고 바람이 거세니 나무가 한쪽으로 기울고 크기도 매우 왜소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이, 식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후천적 환경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종수가 말하기를, “산에 올라 바라보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나, 혹은 여러 날 비가 내리다가 새로 갠 날이 곧 아름답습니다. 주 태수께서는 닷새 동안 비에 막혀 있다가 날이 개어 곧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고 했다. 내가 가만히 그 뜻을 헤아려 보니, 처음에는 막혀 답답했던 것이 끝내는 시원함을 얻는다. 내가 온 뒤로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찌 만 리의 시원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등산의 묘처는 반드시 시력이 다하는 곳까지 보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 위의 기온이 매우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나무가 나면 모두 동쪽으로 엎드려 있고 가지와 줄기는 굽어 작았다. 4월 그믐이 되어야 나무 잎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하여 1년 동안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튼튼하게 어려움을 이겨내어 모두 힘써 싸운 형세를 하고 있다. 그것은 깊은 숲과 큰 골짜기에서 나는 것과는 크게 같지 않았다. 사는 곳이 기운을 바뀌게 하고, 기르는 것이 체질을 바꾸는 이치는 사물과 사람이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


    그리고 퇴계는 산에 올라 8, 9리에 이어지는 그곳의 철쭉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오늘날 소백산의 철쭉 축제가 매우 유서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석름·자개·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숲을 이루어 바야흐로 한창 피어 있었는데, 활짝 피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비단 장막 사이를 다니는 것 같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것 같기도 하였으니, 매우 즐길 만하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章)을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고 하여, 소백산 철쭉에 흠뻑 취했던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전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해 일곱 장으로 이루어진 시를 지은 바 있다.


    유람록을 남기는 까닭과 그 의미
    퇴계는 유람록을 남긴 까닭을 ‘기록을 남기면 후대에 산을 유람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선대에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 그리고 특히 그곳에 터전을 잡고 오랫동안 살아온 순흥 안씨들도 이에 대해 남긴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했다.


    
	[창간46주년 ‘活人山’ 소백을 가다 | 소백산 문화와 사람들]
    ▲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오르면서 ‘등산’이란 시를 지었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기록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유익함이 있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느낀 것이 또 있으니, 경유(景遊) 앞의 문사로서 와서 유람한 사람 가운데 산인(山人)들이 일컫는 바는 오직 호음(湖陰) 정선생(鄭先生)과 태수 임제광(林霽光)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기술한 것을 찾아보자면, 임태수는 편언척자(片言隻字)도 찾을 만한 것이 없고, 호음의 시는 겨우 초암사 가운데에 있는 절구 한 수가 보일 뿐이다. 또 그밖의 것을 찾아보면 석륜사의 승려가 황금계(黃錦溪)의 시를 가지고 있고, 명경암 벽에 황우수(黃愚)의 시가 있을 따름이며, 이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아아, 영남은 곧 사대부에게 기북(冀北) 같은 고을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에는 홍유와 석사들이 잇달아 일어나서 환히 빛났으니, 와서 유람한 사람이 고금에 어찌 한이 있으랴? 기술하여 전할 만한 사람이 또한 어찌 이것에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竹溪)의 여러 안씨(安氏)들은 이 산 아래에서 빼어남을 길러 이름을 중원(中原)에 떨쳤다. 그 가운데에는 반드시 여기에서 노닐고 여기에서 즐기고 여기에서 읊고 노래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는 벼랑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들이 입으로 외는 것도 없으니, 사라져버려 찾을 수 없다. 무릇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아려(雅麗)함을 좋아하지 않고, 전술(傳述)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명성을 세우기를 드높이 여러 안씨들과 같이 하고, 큰 산과 이름난 구역이 높기가 이 산과 같은 경우도 끝내 전할 만한 문헌이 이와 같이 없으니, 다른 곳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산언덕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천년 동안 참다운 은자(隱者)가 없었으니, 참다운 감상(鑑賞)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관청의 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의 문 앞이나 거니는 우리들 무리가 어찌 이 산의 경중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퇴계는 산을 찾아가고 산을 즐기며 산을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함을 말했다. 그 산을 제대로 알고 산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했다. 위에서 퇴계가 말한 ‘참다운 은자’는 산을 진정으로 좋아하여 산을 찾아들어간 사람이고, ‘참다운 감상’이란 바로 산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산을 찾으면서 등산의 즐거움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퇴계와 같이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산의 가치를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우리가 산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옛날 유람록을 발굴해 읽어야 하는 이유를 퇴계가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이다.

     

    소백산 주능선 조망하며 걷는 멋진 능선길

    • 글·김기환 차장 ,사진·염동우 기자

    도 솔봉(兜率峰·1,314.2m)은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지만 사실 죽령에서 또 하나의 산군으로 분리된다.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에서 봐도 도솔봉은 소백산과는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독립성이 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큰 집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산이다.

    이 산군의 도솔봉이나 묘적봉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이름을 지녔다. 단양 사동리(寺洞里)에 큰 절이 있었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그 지역에서 보면 도솔봉 정상부의 장쾌한 암봉이 정면으로 솟아 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산이다.

    
	도솔봉 정상에 바라본 죽령 방면의 백두대간
    ▲ 도솔봉 정상에 바라본 죽령 방면의 백두대간
    도솔봉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소백산 주능선에 버금가는 철쭉과 진달래 군락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봄이면 산자락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붉은 꽃을 연화봉~비로봉~국망봉 구간과 달리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어 눈과 마음이 즐거운 산이다.

    소백산국립공원 구역 내에 위치한 도솔봉의 정규 등산로는 백두대간 줄기인 묘적령~죽령 구간뿐이다. 나머지 지능선의 산길은 비정규 등산로로 묶여 있다. 묘적령에서 도솔봉을 거쳐 죽령까지 산행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백두대간 구간 종주 방식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저수령~죽령 구간의 거리가 19.3km로 만만치 않다. 새벽부터 꼬박 하루를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아니면 죽령에서 도솔봉까지 왕복 산행을 해야 한다.

    백두대간 구간 종주 산행은 저수령(低首嶺) 표지석 뒤편의 계단을 오르며 시작한다. 낙엽송이 울창한 초반부의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수풀이 우거진 촛대봉(1,080m) 정상이다. 여기부터 완만한 경사의 산릉이 이어진다. 전망이 시원한 투구봉을 거쳐 시루봉과 배재, 싸리재, 흙목 정상에 오를 때까지 숲길의 연속이다. 조망이 조금씩 터지는 능선을 타고 솔봉(1,103m)을 거쳐 묘적봉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저수령에서 출발해 묘적령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숲길의 연속이다.

    
	묘적봉에서 도솔봉으로 이어진 능선길의 바위지대.
    ▲ 묘적봉에서 도솔봉으로 이어진 능선길의 바위지대. 구름이 백두대간을 넘으며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백두대간은 길이 좋지만 여름이면 수풀이 우거진 곳도 많다.
    ▲ 백두대간은 길이 좋지만 여름이면 수풀이 우거진 곳도 많다.
     소백산국립공원 경계에 있는 묘적령(1,015m)은 작은 고갯마루다. 바로 앞에 묘적봉과 남쪽의 솔봉이 없었다면 안부로 치기 어려울 정도로 고도가 높은 장소다. 하지만 야영산행을 하는 이들은 이 구간이 가장 마음 편한 장소다. 국립공원 구역 밖이라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발 1,000m 고도의 고개라 한여름에도 기온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비박하려면 보온 대책을 잘 세워야 한다.

    국립공원 구역으로 접어드는 묘적령에서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2.6km 구간의 오르막은 경사가 매우 급하다. 하지만 넓고 튼튼한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바위지대가 수시로 나타나는 묘적봉과 도솔봉 주변이 가장 전망 좋은 곳이다.

    묘적봉(1,156m)을 지나 도솔봉으로 오르는 급경사 구간에서 긴 계단이 있다. 폭은 넓지만 경사가 급한 곳도 많다. 계단길이 끝날 즈음 나타나는 널찍한 헬기장에 도솔봉(1,314m) 정상석이 있다. 이곳은 잡목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조망이 좋지 않다. 여기서 100m쯤 더 가면 작은 도솔봉 정상석이 있는 암봉이 나오는데, 이 구간에서 가장 조망이 뛰어난 장소다. 죽령에서 소백산 연화봉과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굵은 능선길이 한눈에 드는 장소다.

    도솔봉에서 삼형제봉을 거쳐 죽령으로 이어지는 6km 능선길 역시 만만치는 않다. 삼형제봉과 흰봉산 삼거리로 이어지는 급경사 오름길 구간에서 오버페이스를 하기 십상이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이정표에 적힌 거리 역시 조바심이 나게 만든다. 흰봉산 삼거리를 지나면 죽령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길도 넓고 안전해 속도를 낼 수 있다.

    한참을 내려서면 능선 오른쪽에 있는 샘터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잣나무 숲으로 내려선다. 초입의 경사가 조금 급한 편이지만 크게 위험한 곳은 없다. 밧줄이 설치되어 있어 길이 미끄러울 때도 쉽게 내려설 수 있다. 내리막을 통과해 잣나무 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죽령 0.5km’ 안내판이 보인다.

    
	도솔봉 꼭대기 세운 작은 정상석
    ▲ 1 도솔봉 꼭대기 세운 작은 정상석 / 2 36번 국도가 나 있는 죽령 고갯마루. 죽령터널 개통 이후 이용객이 드물어졌다 / 3 구름이 걸린 백두대간의 능선길을 걷고 있는 답사팀.
    여기서 산자락을 돌아 조금만 더 가면 죽령주막이 눈앞에 나타난다. 산행은 이곳에서 끝난다.

    백두대간 저수령~죽령 구간을 당일 산행으로 마치려면 체력적으로 준비가 필요하고, 짐 지고 야영 산행을 하려면 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저수령의 휴게소는 문을 닫았지만 예천 방면으로 조금 내려가면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죽령에는 식수대가 있고 도솔봉 방면으로 1.3km 떨어진 능선 왼쪽에 샘터도 있어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하룻밤 야영하려면 확실한 샘이 없어 물은 지고 가야 한다. 소백산국립공원 경계인 묘적령에 소형 텐트 3~4동을 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막영지로 적합하다. 도솔봉 정상의 헬기장이 가장 넓고 평탄하지만 국립공원 구역 내라 야영은 불법이다.

    
	묘적봉~도솔봉~죽령 개념도

     교통

    산행기점인 저수령과 죽령은 단양군 대강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죽령은 영주시 풍기읍 방면에서 오르는 이도 많다. 단양에서 대강면을 거쳐 죽령이나 저수령을 오가는 군내버스가 운행하고 있으나 횟수가 적어 불편하다. 대부분의 백두대간 종주객들은 단양에서 택시를 이용하고 있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까지 하루 13회(06:59~18:00) 직행버스가 운행한다. 2시간 30분 소요.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과 풍기를 경유하는 무궁화호, 새마을호 열차가 평일 기준 하루 9회(06:40~21:13) 운행한다. 약 2시간 소요.

    단양에서 저수령이나 죽령까지는 택시가 편하다. 차량을 저수령이나 죽령에 세우고 종주를 마쳤을 때는 대강면 택시를 부르는 것이 빠르다. 문의 대강택시 043-422-0004단양시내버스 043-422-2239

     

    숙식(지역번호 043)

    산행기점인 저수령에서 가까운 민박집으로는 단양 대강면의 감나무집 민박(422-8494), 대강면 방곡토속식당/민박(422-3636), 경북 예천 상리

    두메산장(054-653-0500등이 있다. 죽령에서 가까운 희방사 입구의 시설지구나 풍기읍내의 숙박시설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대강면의 사인암기사식당(422-7366)은 부담 없이 식사하기 좋은 곳이다. 그 옆의 장림산방(422-0010)은 약선정식과 황태구이가 유명하다.

    옥녀봉자연휴양림

     도솔봉에서 가까운 옥녀봉자연휴양림도 숙박지로 좋다. 하지만 주말에는 방을 잡기 힘들다. 예약은 홈페이지(www.oknyeobong.com)나

    전화(054-636-5928로 가능하다. 온라인 예약은 전달 1일 오전 9시부터 인터넷을 통해 받는다. 숲속의 집 4인용(26.44㎡) 6동. 6인용(39.66㎡)

     2동. 콘도형 연립산막은 5명 기준(11평) 8실 . 단체용 15명(14평) 기준 복합산막 1실(총 2실)이다.

    데크를 설치한 야영장에는 화장실과 취사장이 딸려 있어 호젓한 막영을 즐기는 이들에게 적합하다. 하지만 11월부터 3월까지는 급수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야영장을 운영하지 않는다. 야영데크는 총 25개가 있다.

    굽이도는 열두 자락 사과밭~산골~유적 따라 스스로 즐기며 걷는다

    • 글·박정원 부장대우, 사진·이신영 기자
    11자락 부석사~좌석리 14.7km 답사… 금계 등 십승지 중 4곳이 인근에 있어

    소백산 아래 굽이도는 열두 자락, 360리길. 깊은 골짜기 따라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바라보며, 이름 모를 들꽃

    즐기며 한가로이 여유를 가지고 걷는다. 모처럼 길을 걸으며 소백산 자락의 자연을 마음껏 향유한다.

    조선 중기의 풍수가인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말을 타고 가면서 소백산을 바라보고는 즉시 말에서 내려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넙죽 절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그 모습 그대로 감상하는 듯하다. 이른바 소백산자락길이다. 제주올레와 같이 소백산을 한 바퀴 돈다.

    
	소백산자락길의 과수원길을 걷고 있다.
    ▲ 소백산자락길의 과수원길을 걷고 있다. 무려 6㎞ 이상 되는 길이 계속 사과밭으로 연결돼 있다.
    소백산자락길을 만든 (사)영주문화연구회에서는 자락길을 ‘自樂길’이라고 칭한다. ‘스스로 즐기며 걷는 길’이라는 의미다. 걷는다는
    자체가 스스로 하는 행위다. 즐거움 없이 할 수 없다. 길에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사색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불세출의
    시인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그렇다, 길은 과거를 보여 주며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사색의 공간이다. 과거와 미래를 공유한 가치의 결과가 현재 방향을 정하고 걷는 길이다.
    길에서 묻고 길에서 답을 구하며 길을 걷는 것이다.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로서, 소백산의 문화와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이다.
    ▲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로서, 소백산의 문화와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 본 소백산자락의 전경
    ▲ 1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 본 소백산자락의 전경. 첩첩산중 풍광이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은 지역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 2 소백산자락길 배영호 위원장이 소백산자락길 이정표에 얽히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소백산자락길은 모두 12자락으로 이뤄졌다. 각 자락은 짧게는 1구간, 길게는 4구간으로 다시 나눠진다. 소단위 문화권으로 구분했다.
    작은 문화적 특성에 따라 선비길, 구곡길, 달밭길 등의 작은 별칭이 붙인 것이다. 따라서 소백산 자락에는 모두 26개 소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12자락 26소문화권으로 이뤄진 360리길, 즉 143km가 소백산자락길이다. 2011년에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소백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를 볼 수 있는, 자연과 문화재, 이야기가 살아 있는 길이다.

    12자락 중 자연과 문화재가 살아 있고, 영주를 대표할 수 있는 11자락을 (사)영주문화연구회 배용호 위원장의 안내로 함께 걸었다.
    과수원길·올망길·수변길로 이어지는 11자락은 부석사~소백산예술촌~사그래이마을~단산저수지~좌석리 소백산자락길 게스트하우스까지
    총 14.7km가량 된다. 나머지 자락은 11자락 안내를 마치고 간단한 코스 소개로 대체한다.

    
	사과밭에서 예술촌을 지나면 산속 숲길로 이어져 살짝 소백산 등산하는 맛을 보게 한다.
    ▲ 사과밭에서 예술촌을 지나면 산속 숲길로 이어져 살짝 소백산 등산하는 맛을 보게 한다.
     부석사는 의상이 전파한 화엄종 중심사찰

    소백산자락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부석사 입구에서 만나 출발했다. 부석사가 어떤 사찰인가. 한국의 10대 사찰로 꼽히는 곳 아닌가.
    국보만 해도 5점이나 보유하고 있다. 첩첩산중에 터전을 잡아 웬만한 전란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즉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의 선견지명 때문이라고 전한다. 의상이 전란을 미리 예견하고 변방에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설명이다.

    의상은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 문하에서 화엄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라의 화엄도량으로 부석사를 창건했다. 그 때가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왕명으로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같이 나온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이 신라를 침범할 계획을 듣고 즉시 귀국, 이를 왕에게 알렸다. 이에 왕은 의상이 닦은 교리로 국론을 통일하고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부석사 창건을 지시했다고 전한다. 그게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된 것이다.

    신라의 3대 승려인 원효와 자장도 화엄의 대가였다. 특히 자장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상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화엄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귀국한 뒤에는 중국의 화엄 신앙을 한반도 오대산에 그대로 옮겨놓은 주인공이다.

    부석은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바위다. 아래 위가 붙지 않고 떠 있다고 해서 뜬돌, 즉 부석(浮石)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사찰 이름으로 사용하게 됐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불교 문화재 중 석조건축물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를 전후해서 축조됐으며, 목조 문화재는 고려 말기인 14세기
     전후 축조됐다. 부석사도 마찬가지다. 대석단을 비롯해서 당간지주, 석등, 자인당 석불, 삼층석탑, 부석 등은 신라시대 유물이고, 무량수전을
    비롯해서 조사당, 화엄경판, 조사당벽화 등은 고려시대 유물에 해당한다. 특히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다.
     
    길에서 만나는 문화재를 찬찬히 한 번 살펴보고 지나간다. 그냥 바라만 봐도 빛을 발하는 듯하고, 감격스러운 문화재들이다.
    계속 이어지는 사과밭 길

    부석사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사과밭으로 연결된다. 천지가 사과밭이다. 하얀 사과꽃이 만발한 시기를 조금 지나 꽃과 잎이 공존해 있다. 조금 더 일찍 왔으면 볼 만했겠다. 배 위원장은 “이 길은 봄에는 사과꽃 하얀길, 여름엔 녹음 짙은 녹색길, 가을이 되면 빨간 사과길로 바뀌는 카멜레온 길이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런 길이 계속 이어진다. 마을마다 계속 사과 과수원길이다. 영주 사과생산량이 전국 최고라는 말이 실감난다. 눈이 닿는 곳은 전부 사과밭이다.

    사과는 배수가 잘 되고, 일교차 크고, 일조량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 당도가 높고 맛있다고 한다. 영주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곳이다. 소백산 남쪽은 화강암 지역으로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지만 북쪽은 석회석 지대다. 소백산 남북의 지질이 완전 다르다.

    
	소백산자락길은 때로는 정겨운 시골길로 연결된다.
    ▲ 소백산자락길은 때로는 정겨운 시골길로 연결된다. 시골집을 빠져나와 고향길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과밭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마을이 속두들이다. 두들은 ‘둔덕’의 경상도 사투리로 작은 언덕을 말한다. 속두들이니 안쪽으로 살짝 감춘 작은 언덕마을이다. 실제 작은 분지 같은 마을이 평화롭고 한가롭게 자리 잡고 있다. 속두들마을엔 귀농인들이 제법 내려와 터전을 내리고 있다. 그만큼 살기 좋다는 말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제일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소백산자락길 이정표는 곳곳에 나온다. 처음 찾아온 사람들도 이정표만 잘 찾으면 길을 잃거나 헤맬 우려가 없다. 중간중간에 붙은 스티커도 파란색은 시계방향으로, 빨간색은 역시계 방향으로 가라는 표시다.

    자락길 143km 중 유일하게 일반 가정집 안으로 통과하는 길이 있다. 애초 길을 우회하기도 마땅찮아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집주인도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보객이 점차 많아지고 시끄러워지자 조금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한다. 아직 대안이 없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집을 나오면 전형적 시골 마을길로 연결된다.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흙길이다. 정겨운 고향길 같은 길이다. 사과밭 사이로 지나는 길은 가을 되면 사과밭 주인이 걱정되겠다. “사람들이 그냥 따 가지 않느냐”고 하자 배 위원장은 “여태 그런 불만을 제기한 주민은 없다”고 했다.

    사과나무가 머리에 닿을 정도로 가지가 널려 있다. 가을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유혹하기 안성맞춤이다. 누구나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 같은데….

    
	배우 조재현이 분양받은 폐교를 예술촌으로 조성해서 지역주민과 함께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치고 있다.
    ▲ 3 배우 조재현이 분양받은 폐교를 예술촌으로 조성해서 지역주민과 함께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치고 있다. 4 소백산자락길 뒤로 백두대간 마구령이 보인다. 백두대간 종주꾼들의 쉼터이자 옛날 보부상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길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소백산자락길 11자락 개념도
    배우 조재현이 지은 예술촌도 지나쳐

    길 끝 즈음에 예술촌이 나온다. 배우 조재현씨가 폐교를 분양받아 예술촌을 조성했다. 안내문에는 ‘부석북부초등학교 폐교를 활용해 지역예술가들이 예술촌을 만들었다. 지역문화의 발전과 예술 창작을 위해 설립된 소백산예술촌은 방문객들을 위한 사과꽃따기 체험, 여름가족캠프, 달빛 별빛 공연이야기 등 다양한 예술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색다른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지역행사인 3도접경면 어울림 한마당, 부석사 화엄축제 등을 주관하기도 한다. 손진책, 이두식 등 국내 저명의 예술가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마침 손진책씨의 부인 배우 김성녀의 연극 공연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마을 뒤로 백두대간 능선이 완만하게 흐른다. 그 중간쯤 마구령이 보인다.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소백산 북동쪽 끝자락쯤 된다.

    임곡리의 숲실마을로 접어든다. 숲실 고개를 넘어서면 사그래이마을로 향한다. 마을이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십승지 중의 제일지일뿐만 아니라 소백산 주변에만 십승지 중 4곳이 있다. 지리산 못지않게 사람을 살리는 산인 것 같다. 명당은 명당인가보다.

    사그래이마을에 이른다. 그런데 사그래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한자로 모래 ‘沙’자와 글월 ‘文’자를 쓰며, 모래밭에 글쟁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완전한 내륙이지만 다른 지역보다 모래가 많고, 모래 위에 글을 써서 공부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인 것 같다. 마을 정자는 ‘사문정(沙文亭)’이라고 적혀 있다.
     

    맛있는 사과 재배 위해 산골짜기서 노래 틀어

    양지~남절~원통이라는 작은 마을들이 생명의 실핏줄처럼 올망졸망 이어진 올망길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마을의 연속이다. 양지마을에서 남절로 넘어가는 고개엔 묘지가 많다. 이승과 저승의 집을 이어 주는 길이기도 하다.

    양지마을 주변도 온통 과수원이다. 사과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마침 사과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농부를 만났다.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가면 불편하지 않냐?”

    “사람들이 많이 오면 좋죠, 뭐. 우리 마을 알리기도 하고, 사과 홍보도 할 수 있으니 좋지 않습니까.”

    시골 농부치고는 너무 전향적인 반응이다. 배 위원장은 그가 이 마을 이장이라고 귀띔했다.

    
	부석사 입구엔 연못과 더불어 화려하게 피어 있는 철쭉이 방문객을 환하게 맞아 준다.
    ▲ 부석사 입구엔 연못과 더불어 화려하게 피어 있는 철쭉이 방문객을 환하게 맞아 준다. 5월이 절정이다.

    양지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산길로 접어든다. 사과밭길, 마을길에서 산길로 이어진다. 산은 서서히 녹음이 짙어진다. 겨우내 앙상한 회색의 가지에서 녹색의 옷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있다. 지금 산에 가면, 숲에 가면 녹색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다.

    숲 속 사과밭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라디오인지 녹음기를 켜놓았다. 웬 노랫소리인지 궁금했다. 배 위원장은 “요즘 사과농장 주인들은 맛있는 사과재배를 위해 좋은 환경을 최대한 조성하려 한다. 노래를 틀어 주는 것도 그 일환이다. 좋은 노래를 듣고 자란 사과가 맛도 좋고, 잘 자란다”고 설명한다. ‘사과도 노래를 듣고 자라는 시대구나’는 생각이 든다.

    배 위원장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요즘은 기능성 시대니, 사과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 주고 이름도 특징적으로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클래플(classic+apple)이라 하면 되겠네요.”

    정말 조만간 클래플이란 사과가 나올지 모르겠다.

    산길로 접어든 자락길은 소백산자락을 살짝 맛보게 한다. 자개봉과 원적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와 연결된다. 고도를 확인하니 500m가 채 안 된다. 하지만 원체 마을길로 걷다 살짝 올라오는 것도 많이 올라온 느낌을 준다.

    남절마을과 원통마을은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마을이라기보다는 드문드문 몇 가구 안 되는 산골이다. 남절은 용수산 남쪽에 절이 있어 ‘남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남쪽 제일이라는 뜻의 ‘남제일’이 ‘남절’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용수산 제일의 명당이라고 이름 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외지로 나가고 거의 없다. 원통마을도 별로 다르지 않다. 종일 사람을 만나기 힘든 마을이다. 빈집만 몇 채 보인다. 산속이라 농토도 없다. 과수원과 밭농사 흔적만 여기저기 비칠 뿐이다. 원통마을은 옛날 원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주로 송이버섯, 산나물 등에 의존해 살았다고 한다.

    이젠 11자락 마지막 구간인 수변길이다. 원통마을을 지나서부터 좌석리까지 연결된다. 산길을 벗어나 단산저수지를 끼고 호젓하게 걷는 십리 수변길이다. 길이 왕복 2차선 도로 옆으로 나 있어 조금은 불편하다. 배 위원장은 “길 아래 저수지 바로 옆으로 길을 조성하기 위해 요청한 상태”라며 “언젠가 그 쪽으로 길이 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부석사 무량수전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소백산자락길은 한 폭의 수채화같이 운치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소백산자락길은 한 폭의 수채화같이 운치 있다.

    금성대군 넘나들던 고갯길 보며 마무리

    단산저수지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논들이 전부 사과밭으로 변해 농업용수 공급기능보다는 홍수조절기능으로 대신하고 있다.

    단산지 뒤편으로 보이는 산이 자개봉이다. 자개봉 너머에는 도화동(桃花洞)이 있다. 단산천 주변 마을에는 선비의 효성에 탄복해 천도복숭아를 내렸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천도를 얻은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석문이 자개봉 어딘가에 있다고 전하는 신비로운 마을이다. 

    이윽고 소백산 깊숙한 마을인 좌석리에 도착했다. 11자락 마지막 마을이다. 좌석리는 앉은 바위마을이라는 뜻이다. 좌석리 뒤로 넘어가는 산길이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꾀하기 위해 영월로 오가던 길이다. 고개를 들어 산길을 쭉 한번 살펴본다.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길에서 금성대군을 새로이 만나 상념에 젖는다. 조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금성대군이다. 좌석리마을에 자락길의 유일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여기서 하룻밤 쉬어가도 될 성싶다. 11자락의 끝 지점이다. 


    Information

    교통(지역번호 054)
    서울에서 승용차로 경부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영동고속도로로 바꾼다.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서 풍기IC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이나 강남터미널에서 영주행을 타면 된다. 소요시간 2시간30분쯤. 열차는 청량리에서 풍기나 영주를 운행하는 중앙선이 하루 9회 운행한다.

    영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석사행(문의 421-4400)은 55번 버스를 타면 된다. 오전 6시 10분 출발해 하루 26회 왕복운행. 좌석리행(문의 633-0011)은 54번 버스가 간다. 하루 3번 왕복운행. 문의 부석사 종합관광안내소 638-5833, 부석사 안내소 639-6498, 시내버스 정류장 633-0011, 시외버스 정류장 1577-5844, 영주역 633-7788, 풍기역 636-7788.

    숙식(지역번호 054) 영주 좌석리 소백산자락길 게스트 하우스 온돌방 8인실 6만4,000원, 게스트 1인 침대 6,000원. 선비촌(638-6444), 청소년수련관(633-0924), 풍기온천(639-6912) 등이 있다. 영주 별미로는 순흥전통묵집(634-4164)을 꼽으며, 부석사식당(633-3317) 무량수식당(634-6770) 등도 현지인들이 추천한다.

     

     

    
	소백산자락길 나머지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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