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백산은 요즈음 철쭉축제와 그곳에 세워진 천문대로 일반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음은 소백산에 대해 남긴 글이 많지 않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소백산을 유람하고 지은 한시를 남긴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유람록을 남긴 사람은 퇴계 이황 이외에 흔하지 않다.
-
- ▲ 퇴계 이황
-
퇴계 이전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유람을 하고 <유산록(遊山錄)>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신재는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소백산에도 올라갔다 와서 최초로 소백산에 대한 유산기를 남겼다. 이러한 내용은 퇴계의 유람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퇴계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신재를 따라 소백산을 유람하고 유람기를 남겼는데, 이것이 현재 전하는 소백산 유람록으로는 가장 앞선 <유소백산록>이다. 퇴계는 자신이 이 산에 오르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영주(榮州)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했다. 그때 소백산은 머리만 들어도 바라볼 수 있고 발만 내딛으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허둥지둥 살아오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워하고 마음만 달려간 것이 지금까지 40년이다.
작년 겨울에 풍기군수로 와서 백운동(白雲洞)의 주인이 됐다. 사적으로 남몰래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며 숙원을 풀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겨울과 봄 이래로 일찍이 일 때문에 백운동에 이르렀으나, 문득 산문(山門)을 엿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번이었다.
4월 신유일에 오랜 비가 막 개니 산 빛이 목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에 여러 유생들을 백운동서원에 가서 보고, 이내 머물러 잤다. 다음날 드디어 산에 들어가니, 상사(上舍) 민서경((閔筮卿)과 그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갔다.’
퇴계는 이 글의 맨 뒤에서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라고 했다. 이를 통해 그는 1548년 10월 풍기군수가 됐고, 이듬해 1549년 4월 소백산 유람을 했다. 이 글은 유람을 마친 뒤 5월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40년 동안이나 ‘오직 꿈에서나 그리고 마음으로만 달려갔다’고 하며, 49세의 나이로 소백산 유람을 한 뒤의 소감을 밝혔으니,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소백산을 오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소백산 유람은 조촐하기 짝이 없어, 서명응이 갑산부사에 부임하자마자 결행한 백두산 유람에 100여 명이 동행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물론 백두산을 오르는 것과 소백산을 오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옛날 1,400m가 넘는 높은 산을 진사 민서경과 그의 아들 응기 단 두 사람과 산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고을 원님으로서 너무나 조촐한 산행이라 할 것이다.
‘스님 종수(宗粹)는 내가 왔다는 것을 듣고 묘봉암(妙峰庵)에서부터 이곳에 와서 보았다. 인하여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두어 순배 술을 마셨다.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했으나, 나도 비록 병을 앓기는 했지만 반드시 올라가 보고자 했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견여(肩輿)가 아니면 안 됩니다. 옛날 주태수(周太守)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故事)가 있습니다”고 했다. 내가 웃으며 수긍했다. 조금 뒤에 “견여가 마련됐다”고 알렸다. 모양은 간단하고 쓰임은 편했다. 드디어 서경과 헤어져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승려들이 혹은 인도하고 혹은 따라왔다. 태봉(胎峯)의 서쪽에 이르러 시내 하나를 건넌 뒤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리가 아프면 견여를 탔는데, 그 힘을 교대로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로부터 산을 나올 때까지 대개 이 방법을 썼으니,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고, 명승을 구경하는 좋은 도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 본 바를 기록했다.’
주세붕의 유람에 대한 소감
퇴계의 유람은 이처럼 진사 민서경과 그 아들 두 사람하고 조촐하게 시작했다. 그나마 민서경은 학질을 앓게 되어 일찍 돌아가 버렸으니, 그 아들하고 단 둘이 산행을 한 셈이다. 하지만 다행히 스님 종수를 비롯해 견여를 메는 여러 명의 승려들이 있어 산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견여를 타는 것은 신재가 이미 앞에서 사용한 바가 있어 승려들이 추천하는 방법이었고, 퇴계도 매우 만족하여 견여에 대해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도구”라고 예찬했다. 이는 옛날 선비들이 높은 산행을 하던 방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
- ▲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백산 유람록 중 가장 앞선 이황의 <유소백산록> 사본.
-
퇴계가 견여를 탄 것은 주세붕이 이미 시도했던 것임을 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퇴계의 이 글에는 주세붕과 관련된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세붕이 자신에 앞서 소백산을 유람했던 것을 밝힌 것도 소중한 기록이고, 더구나 그가 남긴 유산록이 있었음을 밝힌 것은 매우 귀한 정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주세붕의 소백산 유람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유람록이 현재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계(竹溪)를 따라서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가 어둡고 깊었으며 숲과 계곡은 그윽하였다. 때때로 물과 돌이 흐르며 부딪혀서 메아리가 절벽과 골짜기 사이에 진동했다. 안간교(安干橋)를 걸어서 건너 초암사(草庵寺)에 이르렀다. 초암사는 원적봉(圓寂峰)의 동쪽 월명봉(月明峰)의 서쪽에 있는데, 뻗어 나온 산봉우리 가운데 양쪽 봉우리에서 나온 것이 암자 앞을 감싸서 산문(山門)이 됐다. 암자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는데 그 아래는 맑은 시내가 거세게 흐르다가 모여서 웅덩이가 됐다. 그 위는 편평하여 앉을 만했는데, 남쪽으로 산문이 바라보였다.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를 굽어서 들으니 참으로 뛰어난 경치였다. 주경유(周景遊)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했는데, 나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으니, 이 이름이 혼동되지 않는가, 백(白)을 고쳐 청(靑)이라 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소백산 등산 코스는 죽령코스, 비로사코스, 희방사코스, 천동리코스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퇴계는 소백산을 오를 때 죽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암사, 석륜사를 거쳐 올라가는 이른바 배점리 코스를 통해 갔다. 이 등산로가 당시에는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신재도 바로 이 코스를 따라 올라갔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초암사 곁에 있는 높다란 바위에 백운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퇴계는 백운동, 백운암 등 백운이 너무 많으니, 청운대라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