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도시.’ 강원 춘천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춘천의 안개가 환기하는 건 바로 ‘낭만’입니다. 이즈음에는 좀 달라졌지만 춘천에는 한때 젊은 청춘을 불러들이던 낭만이 있었습니다. 소양호와 의암호에서 무시로 피어나는 촉촉한 안개도 그렇거니와 호수를 끼고 있는 수평의 차분한 도시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춘천은 이제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도시’입니다. 규칙적인 레일음을 이끌고 달리던 경춘선 열차에 얽힌 추억이나 공지천의 오래된 커피숍 ‘이디오피아’의 커피향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 추억은 더 각별하겠지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해도 춘천의 오래된 골목들은 젊은 날의 추억을 가져다 줍니다. 오래전 낭만의 기억을 쫓아 춘천으로 갑니다. 낡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은 추억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 춘천, 안개와 추억의 도시
춘천의 겨울 안개는 기습적이다. 다른 계절이라면 이른 아침부터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끼는 날이 적지 않지만, 대기가 건조한 겨울에는 그런 안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하지만 소양강댐 아래쪽의 동막골 일대에는 무시로 강물과 함께 겨울안개가 피어오른다. 댐 아래 얕은 물이 서걱서걱 얼어있다가 소양강댐에서 발전을 위해 방류를 시작하면 안개가 쏟아져 내려온다. 댐에 갇혀 있던 깊은 수심의 물이 댐 아래 차가워진 물과 만나 섞이면서 안개는 만들어진다. 수면 위로 물안개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강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고 수몰버드나무에 온통 들불이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치는 날이라면 이렇게 피어오르는 안개가 수몰나무의 빈 가지와 억새 따위에 달라붙으며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순백으로 화려한 서리꽃을 피워낸다. 서리꽃은 흔치 않지만 춘천 시내 몇 곳의 다리에는 이른 새벽부터 이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동호인들이 몰려든다. 쩡쩡 얼어붙은 새벽에 피어난 서리꽃은 해가 뜨고 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 호반의 서리꽃은 드물게 피기도 하거니와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의 짧은 몇 시간 동안만 피었다가 이내 지고마는 것이어서 더 마음을 붙잡는다. 이렇게 강물 위로 피어난 안개는 낮게 깔려 번져나가면서 강과 산과 마을을 지웠다가 토해놓기를 반복한다. 어쩌다가 밀려드는 안개 속에 갇히기라도 하면, 마치 몽환의 세상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모든 것이 다 모호하고 불안했던 젊은 날에 춘천에서 만났던 안개도 그랬다. 그때를 기억해보자면 안개가 피어나야 춘천은 비로소 춘천다웠다. 그 안개 속에서 더러는 전설처럼 회자되던 공지천의 커피숍 이디오피아를 찾아갔고, 다른 이들은 푼돈을 모아 찾아간 닭갈비 골목에서 서로의 상처에다 술잔을 부었다. 낭만도 사치였던 청춘을 보낸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 춘천은 그런 곳이었다. # 추억의 장소…춘천의 소양호 지금은 위세가 영 예전만 못하지만 소양강댐은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첫손으로 꼽히던 관광명소였다. 1973년 완공된 소양강댐은 사력댐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컸다. 소양강을 댐으로 막아 만든 호수는 춘천, 홍천, 양구, 인제를 두루 끼고 있는, 말 그대로 ‘내륙의 바다’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댐과 호수는 그 자체로 경제성장을 증거했고, 토목기술을 과시하는 자부심 넘치는 공간이었다. 댐 완공 기념탑과 기념비를 배경으로 관광객들은 너나없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다들 그런 것들에 감탄했고 탄성을 지르던 때였다. 그 무렵 춘천 여행에서 소양호를 빠뜨릴 수 없었고, 소양호에 갔다면 누구나 유람선 관광을 했다. 댐이 완공된 이듬해인 1974년부터 소양호에는 여객선과 관광유람선이 운항됐다. 호수가 생기면서 길이 잠겨버린 산중의 마을을 여객선이 뱃길로 이었다. 호수가 길을 막으면서 오히려 명소가 된 절집 청평사를 오가는 배가 떴고, 더 멀게는 양구의 석현선착장까지 잇는 유람선이 운항했다. 춘천에서 양구까지 하루 서너 번씩 다니던 유람선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1977년에는 하루 12번씩이나 오갔다. 그럼에도 배표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바다로 가는 먼 여행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 배를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춘천에 갔고, 소양호를 찾아 유람선을 탔다. 이즈음의 소양강댐은 쇠락한 관광지의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양구까지 가는 뱃길은 한여름 성수기에나 몇 번 오갈 뿐이고, 호수를 끼고 있는 깊은 마을들에도 육로가 이어지면서 손님이 뚝 끊긴 여객선은 정기운항을 포기하고 손님이 모일 때마다 드문드문 운항하고 있다. 개점 휴업인 선장은 낡은 선착장의 여객선 뱃전에서 하릴없이 낚시대만 드리운 채 빙어나 피라미를 낚아올릴 뿐이다. 그나마 청평사를 오가는 여객선만 가벼운 나들이 삼아 찾아온 연인이나 가족을 태우고 오가고 있지만 그것도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손님이 뜸하다.
관광객들이 떠나간 쇠락한 관광지의 겨울풍경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적요한 분위기 속에서 청춘의 추억을 곱씹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다. 이제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손글씨로 쓴 배 운항 시간표와 난로를 피워놓고 시린 손을 비비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매표소의 직원, 30인승 배에 고작 예닐곱 명만 태우고 어쩌다 한 번씩 청평사로 향하는 유람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선착장 뒤편 휴게소 건물의 커피숍에서 틀어놓은 오래된 팝송은 추억을 환기하는 썩 훌륭한 배경음악이 된다. 낡은 풍경과 오래된 음악 사이에서 하나둘 흑백사진처럼 지나가는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 그게 바로 중년 이상이 춘천의 소양호를 여행하는 방법이다. # 추억따라, 이야기따라 가는 길, 청평사
청평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절집의 마당 앞에 하늘을 찌를 듯 서서 산문(山門) 역할을 했던 두 그루의 잣나무였다. 헌데 아쉽게도 그 두 그루의 나무가 자취도 없다. 절집을 지키던 스님은 오래전에 고사한 나무를 아무래도 아쉬워 그대로 뒀다가 2년 전쯤에 베어냈다고 했다. 잣나무는 베어졌지만, 절집은 예나 지금이나 불사로 어지럽혀지지 않은 채 소박하고 단출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청평사가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야기는 이른바 ‘상사뱀의 전설’이다. 전설의 내용인즉 이렇다. 중국 원나라 때 한 미천한 총각이 공주를 사랑했다. 왕은 감히 공주를 넘본 총각을 죽였는데 총각은 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몸을 감싸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공주는 중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뱀을 떼어내려 했지만 효험이 없자 고려의 청평사를 찾아왔다. 공주가 청평사에서 불공을 드리자 뇌성벽력이 울리며 폭우가 쏟아져 뱀이 떠내려갔다. 헌데 이 전설이란 게 좀 허무맹랑하다. 청평사는 고려 때 해마다 원나라의 왕후를 기리는 성대한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원나라 왕후가 청평사에 돈 1만 냥을 시주해 자기 아들의 발복을 기원하도록 했던 것이다. 부마국인 고려의 입장에서는 원나라 왕후가 고려의 작은 절집에 왕손의 생일잔치를 맡긴 것에 감읍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고려는 청평사에 원나라 왕후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간추려보면 ‘원나라 왕후는 은혜를 베푸는 훌륭한 인물이며 고려는 원나라의 시혜에 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 그래서 왕후의 자녀들을 정성껏 받들어 주는 게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700여 년 전에 세워진 비석은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다섯 동강으로 깨뜨려졌고, 이런 ‘감읍’의 사실 대신 전혀 다른 전설이 따라붙었다. 그게 바로 잔인한 중국의 임금이 공주의 위기에 속수무책이다가 중국의 대사찰에서도 구원하지 못한 공주를 우리나라 절에서 구원해준다는 ‘상사뱀의 전설’이다. 세상은 바뀌었고 원나라 왕후가 베푼 시혜에 대한 권력자들의 찬미는 후대 민중에게는 곧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었다. # 청평사, 거대한 고려정원의 백미였던 곳 상사뱀과 공주이야기보다 청평사에서 기억해둬야 할 것은 고려 문종 때의 권문세도가 출신 이자현이다. 할아버지가 세 딸을 모두 문종의 왕비와 후비로 들여보낸 가문의 후손이었으니 막강한 권력과 세도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그러나 권력을 탐하는 집안 환경에 대한 반감과 아내를 사별한 아픔으로 벼슬을 버리고 여기 청평사로 들어왔다. 머리 깎은 스님이 아닌 ‘거사’였던 그는 청평사를 ‘거사불교의 성지’로 다듬어냈다. 과거 문수사로 불렸던 청평사의 이름도 그의 호 ‘청평거사’에서 따온 것이다. 불교에다 은둔과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을 결합한 거사불교의 흔적은 청평사 곳곳에 남아있다. 이자현은 지금의 청평사 자리에 따오기 알 형상의 ‘곡란암(鵠卵庵)’과 ‘식암(息庵)’이란 정자를 짓고 은둔하면서 차를 즐기고 선(禪)을 닦았다. 그는 평생을 바쳐 일대에 곡란암과 식암을 비롯해 견성암, 문성암 등 10여 개의 암자를 지었다. 계곡을 막고 수로를 놓아 정원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자연지형을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석축을 쌓아 물이 천천히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조경과 건물 배치를 넘어서 물의 흐름까지 조절했던 셈이었다. 그가 가꾼 조경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산 아래 청평사 들머리인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8분 능선의 정자 식암에 이르기까지 무려 2㎞에 걸친 절집의 경내를 하나의 거대한 정원으로 꾸몄다. 이렇게 꾸민 절집은 한때 ‘고려정원의 백미’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청평사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정원이던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곳곳에 암자터가 있고 연못 자리도 뚜렷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연못 자리 옆의 바위에 새겨진 선시(禪詩)다. 그 시의 한 구절이 이렇다. “마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생기고 /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권력과 세도를 마다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지웠던 한 사람의 발원의 자취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 청평사에는 이자현 말고도 나옹선사가 머물며 설법을 펼치기도 했고 매월당 김시습도 다녀갔다. 김시습이 청평사에서 지은 시 몇 편이 ‘매월당집’에 실려 전한다. 청평사는 그러나 6·25전쟁 당시 일대에 격전이 벌어지면서 회전문의 축대와 기둥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탔다. 절집 아래 주민으로부터 들은 청평사의 전란피해에 얽힌 좀 어이없는 일화 한 가지. 6·25전쟁 직전이던 1947년 한 대처승이 청평사를 지키고 있었는데, 청평사가 북위 38도 경계선상에 있어 어느 날 대처승이 남한 경찰서로 연행돼 사상조사를 받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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