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춘천

醉月 2014. 2. 6. 01:30

아침 햇살이 막 피어오를 무렵 춘천의 소양강댐 아래 습지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치는 날에는 이렇게 피어난 물안개의 수분이 빈 나뭇가지와 억새에 얼어붙어 황홀한 서리꽃을 피워낸다. 안개는 봄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짙어져서 춘천을 온통 안개로 휘감는다.


‘안개의 도시.’ 강원 춘천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춘천의 안개가 환기하는 건 바로 ‘낭만’입니다. 이즈음에는 좀 달라졌지만 춘천에는 한때 젊은 청춘을 불러들이던 낭만이 있었습니다. 소양호와 의암호에서 무시로 피어나는 촉촉한 안개도 그렇거니와 호수를 끼고 있는 수평의 차분한 도시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춘천은 이제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도시’입니다. 규칙적인 레일음을 이끌고 달리던 경춘선 열차에 얽힌 추억이나 공지천의 오래된 커피숍 ‘이디오피아’의 커피향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 추억은 더 각별하겠지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해도 춘천의 오래된 골목들은 젊은 날의 추억을 가져다 줍니다. 오래전 낭만의 기억을 쫓아 춘천으로 갑니다. 낡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은 추억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 춘천, 안개와 추억의 도시

▲ 꽝꽝 얼어붙은 춘천댐 상류는 지금 온통 순백의 세상이다. 얼음낚시를 즐기지 않더라도 호젓한 빙판의 호수로 걸어들어가 녹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춘천이 안개의 도시가 된 건 1967년 북한강 줄기의 신연강을 막은 의암댐이 지어지면서부터다. 춘천의 안개는 기억 속의 과거에는 더 짙었다. 지금은 좀 색이 바랜 듯하지만, 과거에 춘천을 두고 다들 ‘낭만의 도시’라고 불렀다. 그 낭만의 팔할쯤은 춘천의 안개가 피워올리는 것이었다. 의암댐 주변에도, 중도와 고슴도치섬 일대에도, 소양강댐 아래 동막골 쪽에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안개가 지금도 피어올랐다. 하지만 매끈한 수도권전철이 경쾌한 속도로 미끄러지듯 달리는 지금보다는, 덜커덕덜커덕 규칙적인 레일음을 끌고 비둘기호 열차가 느릿느릿 다니던 시절의 안개가 훨씬 더 짙고 몽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춘천의 겨울 안개는 기습적이다. 다른 계절이라면 이른 아침부터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끼는 날이 적지 않지만, 대기가 건조한 겨울에는 그런 안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하지만 소양강댐 아래쪽의 동막골 일대에는 무시로 강물과 함께 겨울안개가 피어오른다. 댐 아래 얕은 물이 서걱서걱 얼어있다가 소양강댐에서 발전을 위해 방류를 시작하면 안개가 쏟아져 내려온다. 댐에 갇혀 있던 깊은 수심의 물이 댐 아래 차가워진 물과 만나 섞이면서 안개는 만들어진다. 수면 위로 물안개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강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고 수몰버드나무에 온통 들불이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치는 날이라면 이렇게 피어오르는 안개가 수몰나무의 빈 가지와 억새 따위에 달라붙으며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순백으로 화려한 서리꽃을 피워낸다. 서리꽃은 흔치 않지만 춘천 시내 몇 곳의 다리에는 이른 새벽부터 이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동호인들이 몰려든다. 쩡쩡 얼어붙은 새벽에 피어난 서리꽃은 해가 뜨고 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 호반의 서리꽃은 드물게 피기도 하거니와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의 짧은 몇 시간 동안만 피었다가 이내 지고마는 것이어서 더 마음을 붙잡는다.

이렇게 강물 위로 피어난 안개는 낮게 깔려 번져나가면서 강과 산과 마을을 지웠다가 토해놓기를 반복한다. 어쩌다가 밀려드는 안개 속에 갇히기라도 하면, 마치 몽환의 세상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모든 것이 다 모호하고 불안했던 젊은 날에 춘천에서 만났던 안개도 그랬다.

그때를 기억해보자면 안개가 피어나야 춘천은 비로소 춘천다웠다. 그 안개 속에서 더러는 전설처럼 회자되던 공지천의 커피숍 이디오피아를 찾아갔고, 다른 이들은 푼돈을 모아 찾아간 닭갈비 골목에서 서로의 상처에다 술잔을 부었다. 낭만도 사치였던 청춘을 보낸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 춘천은 그런 곳이었다.

# 추억의 장소…춘천의 소양호

지금은 위세가 영 예전만 못하지만 소양강댐은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첫손으로 꼽히던 관광명소였다. 1973년 완공된 소양강댐은 사력댐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컸다. 소양강을 댐으로 막아 만든 호수는 춘천, 홍천, 양구, 인제를 두루 끼고 있는, 말 그대로 ‘내륙의 바다’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댐과 호수는 그 자체로 경제성장을 증거했고, 토목기술을 과시하는 자부심 넘치는 공간이었다. 댐 완공 기념탑과 기념비를 배경으로 관광객들은 너나없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다들 그런 것들에 감탄했고 탄성을 지르던 때였다.

그 무렵 춘천 여행에서 소양호를 빠뜨릴 수 없었고, 소양호에 갔다면 누구나 유람선 관광을 했다. 댐이 완공된 이듬해인 1974년부터 소양호에는 여객선과 관광유람선이 운항됐다. 호수가 생기면서 길이 잠겨버린 산중의 마을을 여객선이 뱃길로 이었다. 호수가 길을 막으면서 오히려 명소가 된 절집 청평사를 오가는 배가 떴고, 더 멀게는 양구의 석현선착장까지 잇는 유람선이 운항했다. 춘천에서 양구까지 하루 서너 번씩 다니던 유람선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1977년에는 하루 12번씩이나 오갔다. 그럼에도 배표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바다로 가는 먼 여행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 배를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춘천에 갔고, 소양호를 찾아 유람선을 탔다.

이즈음의 소양강댐은 쇠락한 관광지의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양구까지 가는 뱃길은 한여름 성수기에나 몇 번 오갈 뿐이고, 호수를 끼고 있는 깊은 마을들에도 육로가 이어지면서 손님이 뚝 끊긴 여객선은 정기운항을 포기하고 손님이 모일 때마다 드문드문 운항하고 있다. 개점 휴업인 선장은 낡은 선착장의 여객선 뱃전에서 하릴없이 낚시대만 드리운 채 빙어나 피라미를 낚아올릴 뿐이다. 그나마 청평사를 오가는 여객선만 가벼운 나들이 삼아 찾아온 연인이나 가족을 태우고 오가고 있지만 그것도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손님이 뜸하다.

춘천의 의암호를 끼고 이어지는 403번 지방도로에서 바라본 붕어섬과 라데나콘도의 모습. 겨울숲과 호반의 전경이 고요한 겨울 호수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찍힌다.


관광객들이 떠나간 쇠락한 관광지의 겨울풍경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적요한 분위기 속에서 청춘의 추억을 곱씹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다. 이제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손글씨로 쓴 배 운항 시간표와 난로를 피워놓고 시린 손을 비비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매표소의 직원, 30인승 배에 고작 예닐곱 명만 태우고 어쩌다 한 번씩 청평사로 향하는 유람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선착장 뒤편 휴게소 건물의 커피숍에서 틀어놓은 오래된 팝송은 추억을 환기하는 썩 훌륭한 배경음악이 된다. 낡은 풍경과 오래된 음악 사이에서 하나둘 흑백사진처럼 지나가는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 그게 바로 중년 이상이 춘천의 소양호를 여행하는 방법이다.

# 추억따라, 이야기따라 가는 길, 청평사

▲ 위부터 궁궐 양식의 회랑을 갖춘 독특한 느낌의 절집 청평사, 춘천 도심 낭만골목의 입구 담벽에 그려진 민화풍의 벽화, 1970년대 의암호반에 만든 시멘트 인어상을 허물고 그 자리에 다시 세운 청동인어상, 손님이 끊긴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유람선 선장이 낚시로 소일하는 모습.

청평사는 춘천 여행에서 낭만의 정점에 있었다. 소양호에서 뱃길로 채 10분이 안 걸리는 청평사는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큰 맘먹고 떠나는 단골 데이트코스였다. 절집의 운치도, 절까지 오르는 계곡의 호젓함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배를 타고 간다’는 것만으로도 청춘들은 들떴다. 이제는 애인도 없이, 청춘의 들뜸도 없이 고즈넉한 청평사에 간다. 다시 가는 청평사에서는 젊은 시절에는 그냥 스쳐지나갔던 절집의 면모며 거기 쌓여 있는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다.

청평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절집의 마당 앞에 하늘을 찌를 듯 서서 산문(山門) 역할을 했던 두 그루의 잣나무였다. 헌데 아쉽게도 그 두 그루의 나무가 자취도 없다. 절집을 지키던 스님은 오래전에 고사한 나무를 아무래도 아쉬워 그대로 뒀다가 2년 전쯤에 베어냈다고 했다. 잣나무는 베어졌지만, 절집은 예나 지금이나 불사로 어지럽혀지지 않은 채 소박하고 단출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청평사가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야기는 이른바 ‘상사뱀의 전설’이다. 전설의 내용인즉 이렇다. 중국 원나라 때 한 미천한 총각이 공주를 사랑했다. 왕은 감히 공주를 넘본 총각을 죽였는데 총각은 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몸을 감싸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공주는 중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뱀을 떼어내려 했지만 효험이 없자 고려의 청평사를 찾아왔다. 공주가 청평사에서 불공을 드리자 뇌성벽력이 울리며 폭우가 쏟아져 뱀이 떠내려갔다.

헌데 이 전설이란 게 좀 허무맹랑하다. 청평사는 고려 때 해마다 원나라의 왕후를 기리는 성대한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원나라 왕후가 청평사에 돈 1만 냥을 시주해 자기 아들의 발복을 기원하도록 했던 것이다. 부마국인 고려의 입장에서는 원나라 왕후가 고려의 작은 절집에 왕손의 생일잔치를 맡긴 것에 감읍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고려는 청평사에 원나라 왕후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간추려보면 ‘원나라 왕후는 은혜를 베푸는 훌륭한 인물이며 고려는 원나라의 시혜에 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 그래서 왕후의 자녀들을 정성껏 받들어 주는 게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700여 년 전에 세워진 비석은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다섯 동강으로 깨뜨려졌고, 이런 ‘감읍’의 사실 대신 전혀 다른 전설이 따라붙었다. 그게 바로 잔인한 중국의 임금이 공주의 위기에 속수무책이다가 중국의 대사찰에서도 구원하지 못한 공주를 우리나라 절에서 구원해준다는 ‘상사뱀의 전설’이다.

세상은 바뀌었고 원나라 왕후가 베푼 시혜에 대한 권력자들의 찬미는 후대 민중에게는 곧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었다.

# 청평사, 거대한 고려정원의 백미였던 곳

상사뱀과 공주이야기보다 청평사에서 기억해둬야 할 것은 고려 문종 때의 권문세도가 출신 이자현이다. 할아버지가 세 딸을 모두 문종의 왕비와 후비로 들여보낸 가문의 후손이었으니 막강한 권력과 세도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그러나 권력을 탐하는 집안 환경에 대한 반감과 아내를 사별한 아픔으로 벼슬을 버리고 여기 청평사로 들어왔다. 머리 깎은 스님이 아닌 ‘거사’였던 그는 청평사를 ‘거사불교의 성지’로 다듬어냈다. 과거 문수사로 불렸던 청평사의 이름도 그의 호 ‘청평거사’에서 따온 것이다.

불교에다 은둔과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을 결합한 거사불교의 흔적은 청평사 곳곳에 남아있다. 이자현은 지금의 청평사 자리에 따오기 알 형상의 ‘곡란암(鵠卵庵)’과 ‘식암(息庵)’이란 정자를 짓고 은둔하면서 차를 즐기고 선(禪)을 닦았다. 그는 평생을 바쳐 일대에 곡란암과 식암을 비롯해 견성암, 문성암 등 10여 개의 암자를 지었다. 계곡을 막고 수로를 놓아 정원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자연지형을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석축을 쌓아 물이 천천히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조경과 건물 배치를 넘어서 물의 흐름까지 조절했던 셈이었다.

그가 가꾼 조경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산 아래 청평사 들머리인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8분 능선의 정자 식암에 이르기까지 무려 2㎞에 걸친 절집의 경내를 하나의 거대한 정원으로 꾸몄다. 이렇게 꾸민 절집은 한때 ‘고려정원의 백미’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청평사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정원이던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곳곳에 암자터가 있고 연못 자리도 뚜렷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연못 자리 옆의 바위에 새겨진 선시(禪詩)다. 그 시의 한 구절이 이렇다. “마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생기고 /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권력과 세도를 마다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지웠던 한 사람의 발원의 자취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 청평사에는 이자현 말고도 나옹선사가 머물며 설법을 펼치기도 했고 매월당 김시습도 다녀갔다. 김시습이 청평사에서 지은 시 몇 편이 ‘매월당집’에 실려 전한다.

청평사는 그러나 6·25전쟁 당시 일대에 격전이 벌어지면서 회전문의 축대와 기둥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탔다. 절집 아래 주민으로부터 들은 청평사의 전란피해에 얽힌 좀 어이없는 일화 한 가지. 6·25전쟁 직전이던 1947년 한 대처승이 청평사를 지키고 있었는데, 청평사가 북위 38도 경계선상에 있어 어느 날 대처승이 남한 경찰서로 연행돼 사상조사를 받았단다.

그런데 차일피일 석방이 늦어지자 화가 난 스님의 부인이 ‘부처님의 보살핌(가피)이 없다’며 극락전에 불을 질러버렸다는 얘기다.

# 오래된 골목서 만나는 수평의 아름다움

춘천의 분위기는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수직의 공간보다 수평으로 깊다. 도심 한복판에도 오래돼 낡았지만 단정함을 잃지 않은 주택들이 모여 있다. 시멘트블록 담벽과 낮은 처마의 양옥집들 사이에는 거미줄처럼 골목이 이어져 있다. 이런 골목에서는 어림짐작으로 방향만 잡아 목적지를 찾아가다가는 필시 ‘막다른 길’에서 길을 잃고 만다. 아파트들이 하나둘 이런 공간을 밀고 들어오고 있지만, 춘천의 구도심에는 오래된 골목의 추억을 환기하는 이런 집과 골목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런 수평의 차분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효자동 일대다. 산신령의 계시로 산삼을 구해 병든 노모를 구했다는 조선 중기 효자 반희언의 효자문이 세워졌다고 해서 동네 이름이 ‘효자동’이다. 효자동 주민들은 최근 제 힘으로 마을환경을 개선하면서 거미줄 같은 골목에다 ‘낭만골목’을 조성했다. 미술가들이 벽화와 조형물 등으로 단장한 골목이다. 좁은 골목이 시작되는 어귀에는 마치 이정표처럼 산삼을 든 청년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반희언의 이야기에서 이름 붙여진 마을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조형물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시멘트 벽에 호랑이와 십이지신이 민화풍으로 그려진 유쾌한 벽화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골목마다 그려진 벽화와 조형작품을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찾아가는 게 낭만골목을 즐기는 방법이다.

이곳의 벽화는 작가의 그림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맥락을 따라 전개되는 스토리와 기발한 아이디어는 절로 슬며시 웃음짓게 만든다. 오래된 양옥집의 오래된 담장이나 돌을 섞어 바른 석축과 거기 그린 벽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폐가전제품으로 만든 로봇과 나무를 깎아만든 로보트 태권브이 장승도 골목의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린다.

모르긴 해도 이런 조화는 작가들이 골목의 담벽을 단순히 제 솜씨를 뽐내는 화폭으로 쓴 게 아니라, 처마를 잇대고 있는 집과 골목에 딱 맞는 그림을 찾으려 고심해서 비로소 얻어진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골목도 사라질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골목 뒤쪽의 언덕 아래쪽에는 고층아파트 건축이 한창인데 개발의 바람은 머잖아 이곳까지 밀어닥칠 듯하다.

낭만골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담작은 도서관’이다. 오래된 동네 한가운데 지어진 도서관은 벽돌로 지은 외관부터 눈길을 끈다. ‘담이 작다’는 건 이름뿐 도서관은 아예 담이 없다.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1층부터 3층까지 아무 곳이나 내키는 대로 들어가서 책을 빼들면 창 가득 쏟아지는 환한 햇살 아래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정해진 자리도 없고, 신분증을 보자는 사람도 없다. ‘여행 가서 무슨 도서관이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지만, 자녀들과 함께 찾아가본다면 평화로운 반나절을 보낼 수 있다.


춘천에 가려면 새로 놓인 춘천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호반의 정취를 제대로 느껴보려면 옛 경강국도와 경춘국도를 이용하는 편이 더 낫다. 덕소에서 경강국도(6번 국도)를 타고 양수리까지 가서 조안교차로에서 좌회전, 북한강로로 이름 붙여진 45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금남교차로에서 46번 국도로 갈아타는 코스가 가장 추천할 만하다.

춘천의 낭만골목은 효자동의 ‘그린마트’를 찾으면 거기가 골목의 들머리다. 내비게이션으로는 ‘담작은 도서관’을 입력해서 찾아가면 된다. 낭만골목과 함께 중앙로의 낭만시장도 함께 찾아가볼 만하다. 소박한 좌판이 펼쳐지는 시장 골목 이곳저곳에 미술작품이 걸리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춘천시내의 세종호텔(033-252-1191)은 다소 낡은 듯하지만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데다 시내 한복판임에도 고즈넉한 정취가 느껴지는 곳이다. 엘리시안강촌(033-260-2000)이나 라데나리조트(033-240-8000), 춘천베어스관광호텔(033-256-2525) 등은 가족단위 여정에 딱 맞는 곳들이다.

춘천의 음식이라면 단연 닭갈비와 막국수. 닭갈비는 명동의 닭갈비 골목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 막국수는 샘밭막국수(033-242-1712)와 명가막국수(033-242-8443)와 부안막국수(033-254-0654) 등이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는 집이다.

사실 닭갈비와 막국수가 이름나기 전에 춘천의 음식으로는 소갈비가 첫손으로 꼽혔다. 춘천의 지주들은 소작인을 거느리고 100마리 이상의 소를 사육했는데, 일하는 소 외에 따로 콩깍지와 옥수수 등을 삶아 먹여가며 식용우를 키웠다. 이렇게 키운 소를 결혼이나 회갑 등의 대소사가 있을 때 잡아 집안마다 독특한 비법의 양념을 써서 갈비탕과 갈비찜을 냈다. 그 전통을 이어오는 곳이 소양로 3가의 ‘봉운장갈비’(033-254-320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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