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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교수의 옛지도로 본 山의 역사_05

醉月 2015. 10. 1. 11:52

(5) 서울 남산] '목멱대왕' 칭호 받아 국가 제사 지내

  • 글·사진 최원석 교수 
국사당 건물 일제 때 헐려 인왕산으로… 군사요충지이자 지정학적 거점

산과 여자를 비유한 남자들의 우스갯소리로 50대는 남산이라서 옆에 있어도 안 올라간다고 하지만, 요즘은 세월이 변해 남산은 수많은 서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쉼터이자 문화공간이 됐다. 조선시대의 영광부터 일제강점기의 굴욕까지 남산이 품고 있는 다사다난한 역사와 경관에 아로새겨진 모습은 서울의 자취와 생활사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옛 지도에도 남산은 서울을 구성하는 공간적 요소로서 다양한 모습과 형식으로 표현됐다(지도2).

조선시대 이래 남산은 수도의 공간적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남산은 한성부의 도시 공간구조를 결정하는 데에도 큰 작용을 했다. 북악, 인왕, 낙산과 함께 한양의 네 산 중 하나로서, 북악산과 상대하여 도성공간의 남북축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를 보면, 도성의 짜임새를 결정한 서울 산줄기에서 남산이 차지하는 위상이 한눈에 드러난다(지도3). 삼각산에서 백악(북악산)을 거쳐 목멱산(남산)으로 이어지는 종축과 함께, 좌우의 인왕산과 낙산으로 펼쳐진 횡축의 좌표로 서울 도성이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산을 기준으로 자연지형을 따라 건설된 성곽은 성안과 성 밖을 가르는 주거공간의 계층적이고 차별적인 분포를 나타나게 했다.


	경조오부도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도성 산줄기와 남산.
▲ 경조오부도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도성 산줄기와 남산.
비숍(Bishop)이 네 차례에 걸쳐 한양을 비롯한 조선 곳곳을 여행한 후 1897년에 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아름다운 남산으로부터 산에 둘러싸인 서울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듯이, 남산은 한양의 랜드마크이자 왕궁의 방어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남산은 조선왕실에 의해 왕경을 수호하는 산으로서 작위를 가지고 제사를 받는 위엄하고도 성스러운 신산(神山)이었다.

목멱산이 남산 공식지명… 종남산·인경산으로도 불러

고작해야 높이가 262m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에 지나지 않았던 남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는 고려 문종 21년(106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정작 역사에서 남산의 지리적 중요성이 명실상부하게 갖춰지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던 시기는 조선의 이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던 때부터다. 조선 왕조가 주산을 북악으로 삼고, 좌청룡 낙산과 우백호 인왕산 그리고 안산으로 남산을 삼는 도성의 풍수적 국면을 구성하면서,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을 떠받치는 산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이름도 한양의 남쪽에 자리 잡은 산이라고 하여 남산이 되었다. 공식 지명인 목멱산(木覓山)과 함께 종남산(終南山), 인경산(仁慶山·引慶山), 열경산(列慶山), 마뫼 등 다른 여러 이름도 있지만, 서민들에게는 남산이라는 쉬운 이름이 대표지명으로 굳어지게 됐다.

조선시대에 남산의 위상은 수도 한양의 중심에 있는 위치로 말미암아 나라에서 중요한 산의 반열에 들었고, 그 자취는 고지도에서도 전국의 주요 명산과 함께 뚜렷하게 재현됐다(지도1). 남산이 차지하는 국가적 위상과 가치평가는 조선 왕조에 의해 상징적 작위까지 받는 신성한 남산으로 탈바꿈시켰다. 태조 4년(1395) 12월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칭호로 봉작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조선의 명산과 함께 표현된 남산(목멱산)이 두드러진다.
▲ 조선의 명산과 함께 표현된 남산(목멱산)이 두드러진다. 조선총도(지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대 규장각 소유 도성도(1788년). 회화적으로 묘사된 남산의 모습이며, 도성 안에서 바라본 것이다.
▲ 서울대 규장각 소유 도성도(1788년). 회화적으로 묘사된 남산의 모습이며, 도성 안에서 바라본 것이다.
 남산의 정상부에는 봄·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목멱신사가 도성의 남산 꼭대기에 있고 소사(小祀)로 제사 지낸다’고 적었다. 목멱신사는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국사당(國祀堂·國師堂)’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남산의 국사당 건물은 일제시기에 조선신궁이 강점하면서 헐렸고,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청구도>의 ‘오부전도’를 보면, 남산의 제사처인 목멱단(木覓壇)(옛 식물원 자리)도 표기됐고, 남산의 군사경관으로서 다섯 개의 봉수대 모습도 앙증맞게 그려졌다(지도4).


	오부전도 (청구도)의 남산 봉수대 모습과 목멱단, 남산동 표기.
▲ 오부전도 (청구도)의 남산 봉수대 모습과 목멱단, 남산동 표기.
 남산은 한성에서 군사적 방어의 요충지이자 지정학적인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찍이 태조는 남산을 외적 방어의 자연 장벽이자 방패로 삼기 위해 1396년 남산의 능선을 따라 도성을 쌓고 보수했다. 이어 태종 6년에는 조선팔도와 연결되는 봉수대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만전을 기했다. 조선 후기에는 남산 기슭에 병영으로서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과 금위영의 분영인 남별영도 자리 잡았다. ‘도성도’(대동전도)를 보면 남산의 능선을 따라 수축한 성곽의 형태도 뚜렷하고, 남사면 기슭에 남소영(장춘동 2가 소재)과 남별영(필동 2가 소재)도 표기됐다(지도6).

남산의 존재로 인해 자연지형을 따라 수축된 도성은 한성의 성안과 성밖을 구획하는 공간구조를 결정했다. 한양의 도시공간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현 세종로의 관아공간과 종로의 상업공간, 그리고 주위의 주거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계층적 분포를 보면, 종로 북쪽은 양반관리의 주거지인 북촌(계동, 가회동, 원서동, 안국동 등)이 있었으며, 중간의 청계천 방면(누하동, 적선동, 사직동 등)에는 중인계층과 상인들이 살았다. 남쪽에는 하급관리와 선비들이 남촌(회현동, 필동 등)에 살았다. 남산골 딸각발이, 남산골샌님이라는 말도 벼슬 없고 가난한 선비들이 나막신으로 다녔지만 고고한 기상으로 붙여진 별칭이다.

남산은 당시 주요 생산기반인 누에로 비유

풍수사상은 남산의 생김새와 결부되어 한성부 공간에 문화생태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남산은 누에로 비유됐다. 18세기 후반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남산의 서쪽 봉우리 중에 바위가 깎아지른 곳이 누에머리(蠶頭) 모양이다’고 했고, ‘도성도’에는 남산의 잠두(蠶頭) 위치가 표기됐다(지도6). 누에는 뽕 잎을 먹고 살기에 마주 보이는 한강 건너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하며, 그래서 잠실동, 잠원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양잠업은 백성들의 의생활에 직결되는 중요한 산업으로서 중시됐으며, 왕조는 잠실(국립양잠소)을 전국 및 서울에 설치했다. 이렇듯 남산의 풍수는 당시의 산업생산과 결부되어 이해되기도 했다.

조선 왕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시행됐던 남산의 자연생태 보호에도 풍수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남산의 주요 식생인 소나무는 남산의 지력을 보존하고 배양하는 중요한 식물로 여겨졌고, 그래서 소나무의 생육은 조정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관리됐다. 국초부터 남산은 소나무를 베지 못하는 금송(禁松) 지구로 지정됐던 것이다. 애국가에서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고 하여, 흔히 남산의 나무 하면 소나무가 떠오르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사산금표도 (1765).
▲ 사산금표도 (1765). 한양 도성 주위 사방의 산에 대해 소나무 벌목을 금지한 범위를 나타낸 그림 지도이다.
 태종 15년(1415) 4월에는 송충이로 인해 산림 피해가 심해지자, 한성부에 명해 송충이 구제에 나서도록 하고, 서울 도성 사방의 산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했다. <경국대전>에는, 도성 사방의 산에 입산금지표를 세우고 벌목과 채석 등을 금하는 내용도 명문화했다. 1765년에 그려진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남산을 포함한 주위 네 산에 소나무 벌목(禁松)과 매장을 금지(禁葬)하는 범위가 그려져 있다. 그 남쪽 범위는 남산을 넘어 한강까지 포함된다(지도5). 오늘날 산지관리 및 그린벨트를 지도화한 시원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남산은 산천의 자연미학이나 인문학으로도 의미가 각별했다. 위치적으로 한성부의 생활권 내에 있기에 접근성이 좋아서 남산의 승경을 찾아 풍류를 즐기던 관료들과 도덕을 연마하는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이상향이자 신선경으로 이름난 청학동 골짜기가 남산에도 있을 정도로 남산의 산수경관은 아름다워서, 선비와 관료들이 풍류를 즐기고 도덕과 심성을 닦는 장소가 됐다.


	잠두(蠶頭) 위치가 표기된 영남대박물관 소장 ‘도성도’ (대동전도, 1861).
▲ 잠두(蠶頭) 위치가 표기된 영남대박물관 소장 ‘도성도’ (대동전도, 1861).

	'한양도’(1902, 영남대박물관 소장)에 표기된 쌍회정과 재산루.
▲ '한양도’(1902, 영남대박물관 소장)에 표기된 쌍회정과 재산루.
 세조도 왕위에 오른 이듬해(1456) 청학동을 찾아 거동했다는 왕조실록의 기사가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은 남산의 청학동에 관해, “도성의 남촌 필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가운데로 한줄기 산골물이 흐르니 곧 남산의 산록이다. 곁에는 금어영 화약고가 있다”는 상세한 변증도 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1863)에도 한양의 남산 남쪽(잠두산 북쪽)에 청학동이 있었다는 표기가 확인된다. 그래서 도성 안 남산의 북사면 기슭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이루어 많은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마련했다.

관료와 학자, 문인들이 남산에 살거나 남산을 찾아 풍치를 즐기고 남산을 노래한 시문을 남기고 꽃을 피웠다. 유학자들은 남산의 아름다움을 인격 수양에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1902년에 만들어진 ‘한양도’의 남산 북사면 자락에는 쌍회정(雙檜亭)과 재산루(在山樓) 등의 누정이 한글도 병기되어 있어 흥미롭다(지도7). 쌍회정(현 일신교회 정문 앞)은 이항복(1556~1618)이 집 앞에 지은 정자이고, 재산루는 정약용도 22세 때(1783) 거처한 적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굴욕과 생채기 그대로 남아

조선왕조에서 남산이 누렸던 영예는 일제강점기에 굴욕과 생채기의 모습으로 아로새겨진다. 뒤이은 한국전쟁 전후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남산의 역사는 얼룩지고 굴곡졌지만, 지금도 서울의 심장으로서 그 자리에 푸르게 의연히 있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물밀 듯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