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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지리산 묘향암이 신선의 터인 이유

醉月 2021. 7. 28. 19:33
▲ 개운조사의 마지막 수도 터로 알려진 지리산 묘향암.

중년 남자의 로망이 있다. 할리 오토바이도 아니고, 오디오도 아니고, 세계여행도 아니고, 바다낚시도 아니고, 야생화 찍는 것도 아니다. 산 밑에 텃밭 있는 조그만 집 하나 지어 놓고 밥 먹고 나서 뒷산 오솔길 산책하며 사는 삶이다.
   
   남자는 숲에 들어갔을 때 원초적 편안함을 느낀다. 여기서 원초적이라는 의미는 깊은 편안함, 만족감, 살롬을 뜻한다. 숲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필자는 장성 축령산 편백숲 밑에다가 지어 놓은 황토집 글방에 많이 머무른다. 15평(50㎡) 넓이에 방 2개와 부엌 하나의 단순한 구조이다. 아침저녁으로 글방에서 나와 편백숲 사이로 걸어 다니면 편백나무에서 풍기는 피톤치드 냄새가 세포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샤넬5 향수도 여기에 비할 수 없다. 소나무 숲의 송진 냄새도 기가 막히지만 편백의 냄새도 뇌세포를 청소하는 것만 같다. 숲속에서 왜 이리 깊은 만족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 근원을 생각하다 보니까 진화론이 생각났다. 아프리카에서 유인원이 점차 진화하여 현재의 호모사피엔스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아프리카 시절의 추억, 그것은 숲속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유인원은 숲속에서 생활하였을 것이고, 그 숲속의 체험이 DNA에 저장되어 있는 게 아닐까.
   
   
   숲에서 느끼는 원초적 편안함
   
   현재의 인간이 문자를 쓰고 집단을 이루어 도시에서 살게 된 것은 5000년의 역사밖에 안된다. 그 이전 수백만 년 동안의 삶의 방식은 숲속 생활이었다. 어떻게 5000년과 진화해 온 기간인 수백만 년을 비교한단 말인가. 수백만 년의 취향과 생활습관이 내 몸 안에 축적되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문명 생활의 추억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작동되면서 나를 숲속으로 끌어당긴다고 분석하였다.
   
   한반도는 7할이 산이므로 거의 산악국가에 가깝다. 산도 히말라야나 스위스 같은 눈이 쌓여 있는 설산이 아니다. 인간이 오르락내리락하기 좋은 높이의 500~1000m급 산들이다. 토질도 비옥하고 비가 적당히 와서 동식물이 풍부한 산들이다. 한반도에서 이러한 한국 산이 지닌 쾌적함과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산이 지리산이라고 생각한다. 가로 40㎞, 세로 30㎞에 걸쳐 있는 넓은 산악지대이다. 1000m급 봉우리만 해도 40여개쯤 될까. 더 좋은 점은 1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도 물이 나온다는 점이다. 지리산은 물이 많은 산이다. 고지대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동식물의 식생에 아주 유리한 점이다. 나무와 각종 식물이 우거지고, 식물이 우거져야만 동물도 살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지리산은 유인원 시절의 숲속 생활 추억을 환기시켜주는 산이라는 말이다. 깊은 충만함을 주는 산이다.
   
   이 충만감은 도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깊은 숲이 있고 땅에서 올라오는 강력한 지기(地氣)가 어우러져 있어야만 제대로 된 도사가 나온다. 도사는 깊은 충만감을 맛봐야 하고, 항상 깊은 충만감에 사는 사람이 도사이니까 말이다. 지리산은 이런 산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역대로 많은 신선이 배출되었고, 다른 산에서 공부하다가도 이곳으로 들어와 큰 공부를 성취하는 수가 많았다.
   
   
   신선이 됐다는 개운조사
   
   지리산에서 수도했던 도사 중 대표적인 인물이 개운조사(開雲祖師· 1790~?)이다. 출발은 불교 스님이었지만 도달한 경지는 신선이다.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보통 전설과 다른 점은 현재도 개운조사가 살아 있다고 믿는 열성 추종자가 500~1000명은 된다는 점이다. 1970년대 후반에도 지리산 인근의 군부대 책임자가 휘하의 군인들 수백 명을 풀어서 개운조사의 수도처를 찾으려고 수색까지 했던 일도 있었다. 수도처는 지리산 반야봉 밑에 있다는 금강굴이었다.
   
   필자도 1983~1984년에 개운조사 이야기를 듣고 그 자취와 수행의 방법을 추적해왔다. 박사 논문도 개운조사가 남겼다는 ‘유가심인능엄경(瑜伽心印楞嚴經)’을 가지고 썼다. 밀교(密敎)적 관점에서 불교의 ‘능엄경’을 해석한 책인데, 도교와 불교, 그리고 요가의 수행체계가 서로 녹아들어 통합된다는 밀교적 관점이 아주 매력적인 책이었기 때문이다.
   
   핵심은 항복기심(降伏其心)에 있었다.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는 상태의 마음을 유지해야만 신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서 몸 안에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쓸 수 있다. 개운조사는 이를 대력백우(大力白牛)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있는 에너지 힘이 아주 세므로 소에 비유한 것이다. 이 힘센 흰소를 잡으면 수백 살 사는 신선이 된다고 나온다.
   
   경북 상주와 속리산 사이에 십승지가 있다. 우복동(牛腹洞)이다. 소 뱃속같이 편안한 곳이라 전쟁도 피하고 굶어죽지 않는 한국인의 유토피아이다. 우복동 입구에 용유동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 옆의 집채만 한 바위에 ‘洞天(동천)’이라고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천바위라고 부른다. 이 글씨는 개운조사가 주먹으로 썼다고 한다.
   
   도력이 있는 도인은 바위를 떡 주무르듯이 만진다. 주먹으로 바위에 손을 대니까 물렁물렁해져서 글씨를 쓸 수 있었다고 개운조사가 쓴 책의 말미에 나온다. 이 동천 글씨를 쓰고 우복동 근처의 심원사에 계시다가 지리산 반야봉 밑으로 수도처를 옮겼다. 1980년대 초이던가. 우복동 근처에 효창선원이라고 조그마한 수행처가 있었고 이곳에 개운조사의 제자였던 양성 스님이 살았다.
   
   

▲ 묘향암 입구의 돌문, 이 돌 틈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 묘향암 입구의 돌문, 이 돌 틈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지리산으로 사라진 개운조사
   
   어느 날 효창선원에 개운조사가 왔다. 밥해주던 공양주 보살의 증언에 의하면 언덕길을 공중에서 나는 듯이 올라오더라는 것이다. 개운조사가 양성에게 “지리산으로 가자”고 하였지만 우매한 양성은 “제가 속가의 딸에게 간다는 말만 하고 가겠습니다” 하고 머뭇거렸다. 이 말을 듣고 개운조사는 “지금 보니까 저녁 석양이 한 자쯤 남아 있어서 지리산에 충분히 갈 수 있겠구나” 하면서 공중을 나는 듯이 축지법을 써서 남쪽 산으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공양주 보살의 목격담에 의하면 개운조사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중키 정도의 체격에 옥양목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로 깔끔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스승이 지리산으로 가자고 하는데 머뭇거리다가 티켓을 놓친 제자 양성은 100살을 조금 더 살다가 돌아가셨다. 양성은 일생일대의 후회스러운 일이 이때 스승을 따라 지리산에 못 간 일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 이 양성이 나중에 계룡산에 와서 스승이 집필한 필사본 ‘유가심인능엄경’을 책으로 출판한다. 출판 비용을 함양의 박 도사, 즉 이병철과 박태준의 장자방 역할을 했던 제산 박재현이 부담했다. 필자도 이 계룡산에서 출판한 책을 당시에 구할 수 있었다. 계룡산 법정사에서 책을 펴낼 때의 제목은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이었다.
   
   상주 우복동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지리산으로 사라진 개운조사. 지리산 어디로 갔을까. 추종자들에 의하면 반야봉 밑의 묘향대(妙香臺)와 금강굴(金剛窟)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러 매니아가 반야봉 밑을 찾으러 다녔다. 이 중 묘향대는 현재 묘향암이 되어 있다. 그러나 금강굴이 어디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지리산 반야봉 일대에는 5개의 대(臺)가 있다. 묘향대, 우번대(牛翻臺), 서산대(西山臺), 무착대(無着臺), 문수대(文殊臺) 등이다. 지리산은 여러 봉우리 가운데서도 특히 반야봉을 중시하였다. 이 일대에 수도할 만한 명당이 많다는 의미이다. 반야봉이 지리산의 중심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운데에 있으면 주변 봉우리들이 반야봉을 둘러싸고 호위를 하기 마련이다. 그 터를 둘러싸야만 기운이 사방에서 집중이 된다. 연꽃의 가운데 있는 형국이나, 부용의 가운데 있는 터를 명당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반야 5대는 모두 1000m 이상에 위치해 있다. 고지대이다. 대(臺)는 바위 언덕이 대부분이다. 밑바닥에도 암반이 깔려 있고, 뒤쪽에도 바위절벽이 자리 잡고 있어야만 수행터가 된다. 그러면서도 앞이 어느 정도 터져 있어야 한다. 5대는 다 이런 공통점이 있다.
   
   
   봉우리들이 겹겹이 포진한 터
   
   또 하나 물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도를 닦는다 해도 매일 물은 마셔야 한다. 바위 틈에서 샘물이 하나 있으면 수행터가 완성된다. 석회암 지대의 물은 좋지 않다. 화강암 지대에서 나오는 물이 좋다. 유럽은 석회암이 많아 물맛이 떨어진다. 한국은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미네랄이 풍부한 약수가 나온다. 이 화강암 약수야말로 최고의 물이다. 미네랄 보충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요즘은 지리산 서쪽 끄트머리 고개 정상인 성삼재에다 차를 세워놓고 걸어서 묘향암(묘향대)까지 가야 한다. 산꾼들은 5시간 거리이지만 필자는 8시간이 걸렸다. 산길로 11㎞. 개운조사가 수도했다는 묘향암을 보니까 감탄이 나왔다. 해발 1500m 높이의 고지대 암자인데, 좌청룡 우백호 안산을 골고루 갖추었다. 천왕봉 밑의 법계사가 1450m인데, 묘향암은 이보다 더 높다.
   
   묘향암 옆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석문(石門)으로 되어 있다. 바위 돌 틈 사이를 통과해서 암자로 들어간다. 신선이 사는 수행터는 반드시 돌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운이 짱짱하게 받쳐준다. 그리고 이 석문 밑에서 약수가 나온다. 한 바가지 먹어 보니까 물맛도 범상치 않다. 묘향암 터의 압권은 앞에 포진한 산세들이다. 바로 앞에는 명선봉과 토끼봉이 감싸고 있다. 앞에 산이 없고 너무 터져 있으면 기운이 빠져나간다. 1500m 고지대인데도 불구하고 앞이 너무 터져 있지 않고 봉우리들이 감싸고 있는 점이 대단히 독특하였다.
   
   바로 앞의 명선봉, 토끼봉 뒤로 또 봉우리들이 포진해 있다.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이다. 그 뒤로 다시 또 포진이다. 영랑대,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선경, 촛대봉이 멀리서 묘향암 터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터를 앞에서 삼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터를 보고 우리나라 풍수의 최고단자가 선호했던 터의 조건이 이런 것이구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산이 겹겹이 포진해 있는 터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뒤도 바위 맥이 중요하지만 앞산이 두껍게 감싸는 게 중요하구나 생각했다. 삼복 더위에 갔는데, 밤이 되니까 온도가 20도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긴팔 입고 이불 덮고 잤다. 1790년생 개운조사가 200살이 넘게 사는 신선인데, 그 신선이 살았던 터 묘향암. 도계의 고단자가 어떤 터를 선호했는지를 파악한 것이 큰 공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