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조용헌의 영지 순례]설악산 늑대소년 통해 속세로 나온 3000년 무술의 정체

醉月 2021. 1. 27. 21:09
▲ 3000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계룡산 ‘기천문’의 본산(왼쪽)과 돌비석.

기(氣).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을까.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온 것이 기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무게도 형체도 이름도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기천(氣天)이라 하느니라.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나니 스쳐 보아야 그 위력을 아느니라.’
   
   단군 이래 내려오는 전통 무술을 연마하는 단체인 ‘기천문(氣天門)’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이다. 단군 이래라고 한다면 적어도 3000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이다. 고조선 시대 이래로 고구려의 조의선인(早衣仙人)을 거쳐 고려·조선 때도 끊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는 얘기다. 그 끊어지지 않는 전통이 뭉쳐 있는 장소가 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 있다. 계룡산 연천봉 바위 맥이 갈지자(之)로 내려오다가 끝자락에 국을 이룬 자리이다. 여기에 한옥집 두 채가 있고 그 한 채에 기천문의 2대 문주(門主)인 박사규(73) 선생이 머무르고 있다. ‘기천문 계룡본산’이라는 돌비석도 서 있다. 그런가 하면 주변에는 여기저기 깃발을 꽂아 놓은 무속인의 집들도 포진하고 있다.
   
   원래 세상은 용사혼잡(龍蛇混雜)인 법이다. 주변에 무속인들이 포진하고 있으니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무은(巫隱), 즉 무속에 숨는다. 이 동네의 무속인들이 가끔 이 터를 지나가다가 ‘학 수십 마리가 떼로 모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곰들이 이 터에서 우글거리네요’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간다고 한다.
   
   20년 전 박사규 선생을 만나 기천이라는 생소한 무술문파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는 연개소문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기천의 고단자였다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고단자였나? 상박권(上膊拳)을 구사하는 단계까지 올라갔던 무술 고단자가 연개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박(膊)은 ‘팔뚝 박’ 자이다. 상박권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솟구치는 자세에 해당한다. 솟구치면서 이마와 팔꿈치를 사용하여 상대의 관자놀이나 턱을 강타해 버린다. 파괴력이 살인적이라고 한다. 타격을 받은 상대는 턱이 나가 버리는 중상을 입거나 사망에까지 이른다. 원래 이북에서는 평안도 박치기가 유명했다. 3~4m 거리에서도 상대방을 박치기로 가격하는 실전 무술이다. 3~4m를 점프하는 탄력과 상대방의 부위를 정확하게 겨냥해서 타격하는 기술이 연마되면 실전에서 아주 무섭다고 한다. 지금 UFC(이종 종합격투기대회)에서도 박치기는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반칙이다. 그러나 평안도 박치기 전문가들은 실전에서 박치기로 어지간한 상대 서너 명을 기절시켜 버렸다는 무용담을 들은 바가 있다. 레슬링으로 서로 엉클어진 자세에서 굳이 손으로 파운딩할 것 없이 박치기로 상대를 갈겨 버리면 간단하다.
   
   
   연개소문 무공의 밑바탕은?
   
   이 평안도 박치기도 지금 생각하니 상박권의 파생 기술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천에서도 이 상박권은 아주 고급 자세에 속한다. 그만큼 배우기 어렵다는 말이다. 뭘 제대로 배우려면 피·땀·눈물이라는 3가지 액체를 바가지로 흘려야 한다.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험난한 육체적 고행을 거쳐야 도달하는 단계이다.
   
   기천의 구전에 의하면 강인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연개소문도 상박권을 완전히 마스터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중간에 포기하였다. 하지만 중간 정도의 실력만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어도 강호 어디다 내놔도 꿀리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보따리 하나 들고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중국에 들어가서 중원 천지의 내로라하는 고수들과도 붙어 봤던 모양이다. 중국 두광정의 소설로 알려진 ‘규염객전’의 규염객은 모델이 연개소문이라고 추정된다. 규염객은 ‘용의 수염을 기른 사내’라는 뜻인데, 연개소문이 중국 천지를 돌아다니며 각 문파의 고수들과 겨뤘던 이야기가 세간에 떠돌아다니면서 소설의 소재가 되지 않았나 싶다. 중국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할 만큼 당시 연개소문의 무공은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 무공의 밑바탕이 상박권으로 상징되는 기천의 무예였다.
   
   현대에 들어와 2대 계승자이자 장문인 박사규는 70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보면 손이 부들부들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손에서 나타난다. 손이 굳는 것이다. 손이 부드럽다는 것은 아직 오장육부와 근육이 부드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드럽다는 것은 탄력이 있다는 것이고 아직 기가 충만하다는 증거이다. 70대에 부드러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축적해온 무공의 증거이리라. 현재 기천문 본산 터에서 계룡산 연천봉까지는 1㎞ 정도 거리이다. 바위 암벽이 험해서 일반 등산객 발걸음으로는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박 문주는 매일 아침 연천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과를 진행한다. 60대까지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다시피 해서 산을 오르내렸다. 이렇게 몸을 단련하였다. 70대인데도 아직 현역이다. 주말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제자들을 지도해 준다.
   
   “UFC에서 뛰는 코너 맥그리거 같은 선수가 만약 기천을 배우면 어떻겠습니까?”
   
   “아주 좋죠. 가만히 보니까 맥그리거는 타고난 선수 같아요. 우선 리치가 길어요. 이것도 장점이죠. 다음에는 반사신경인데,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기가 상대를 공격해 들어갈 때는 허점이 노출되죠. 근데 맥그리거는 공격하면서도 허점을 잘 노출시키지 않아요. 언제 상대방을 공격해야 하는지 타이밍을 본능적으로 캐치하는 능력이 있어요. 이 정도 되면 타고난 자질이죠. 맥그리거가 만약 기천 같은 무술을 연마했으면 상당한 경지까지 갔을 것입니다. 물론 기천의 목표가 싸움을 잘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죠. ‘천부경’에 나온 것처럼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회통하여 홍익인간이 되는 것이지만요.”
   
   “1대 문주인 대양(大洋)진인 일화 좀 소개해 주시죠?”
   
   “어렸을 때 조사부(祖師傅)님인 원혜상인과의 인연으로 일찍부터 스승(원혜상인)의 손에 이끌려 설악산에서 수련을 했습니다.”
   
  

               ▲ ‘기천문’의 2대 문주인 박사규 선생.

 

  늑대소년의 ‘도장깨기’
   
   대양진인은 5세 때부터 설악산에서 원혜상인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심산유곡에서 현대문명과 차단된 채 거의 구석기시대 사람처럼 자란 것이다. 그야말로 스승과의 철저한 일대일 지도 체제였던 셈이다. 원시적으로 살면서, 사람들과 차단된 상태로 십몇 년을 설악산의 자연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생식을 하고 나무뿌리, 약초, 산나무 과일을 먹었다. 가끔 원혜상인이 민가에 내려가 양식을 구해 오면 쌀, 보리, 콩을 먹기도 하였다. 옷은 어떻게 입었나? 광목을 구해 얼기설기 대강 엮어서 옷으로 입었다고 한다. 누더기 비슷한 옷을 걸쳤다는 이야기이다. 20세가 될 무렵인 1970년에 설악산에서 내려와 서울로 왔다. 산에서 서울로 올 때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왔다고 한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대양진인은 ‘늑대소년’으로 알려졌다. 행색이 영락없는 늑대소년이었다.
   
   서울에 처음 와서는 태권도 도장에서 청소를 해주고 도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했다. 신발공장에 가서 잡일을 하거나 청소를 하기도 하였다. 무술은 고단자였지만 세간 사회를 전혀 모르는 늑대소년이 할 일은 청소나 하는 잡역이었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대양진인은 키가 작았다. 160㎝가 안 되는 키였다. 자그마한 중학생 키였던 것이다. 그러던 도중에 부산에서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는 어떤 관장을 만나서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는 부산에서 합기도 도장끼리 실력 대결을 해서 이긴 쪽이 지는 쪽 도장을 접수하는 ‘도장깨기’ 풍습이 유행할 때였다. 지는 쪽은 도장을 내줘야만 했다.
   
   대양진인이 이 도장깨기의 선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데리고 간 합기도 관장이 사회 물정을 모르는 대양진인을 도장깨기 선수로 앞세웠던 것이다. 부산 합기도 도장을 여기저기 깨고 다니는 대양진인을 바라만 봐야 했던 쪽에서는 분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쪽에서 대책을 강구하였다. 대책이란 조폭 동원이었다. 부산의 조폭 조직인 칠성파에서 나서게 되었다. 정체불명의 이 조그만 무술고수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칠성파 행동대원 7~8명과 대양진인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혼자서 칼과 야구방망이를 든 조직원 7~8명과 대결을 한 것이다. 칠성파 쪽에서도 대양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맨손으로 나오지 않았다. 칼과 몽둥이까지 들고나왔던 것 같다. 비겁한 짓이었다. 맨손의 한 명을 상대로 여러 명이 무기로 공격한다는 것은 살상의 의도였다. 모래사장에서 칠성파와 맞부닥친 대양진인. 그는 순식간에 권법과 다리차기를 통해서 서너 명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상대측에서는 칼을 휘둘렀다. 몇 대씩 쥐어박아도 계속 칼을 들고 공격해 오니 대양진인으로서는 더 이상 싸우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 이상 공격하면 살생이 발생한다. 살생까지 가면서 싸울 필요가 뭐 있는가. “나 더 이상 안 할란다” 하고 대양진인이 현장을 피하였다.
   
   그런데 피하는 동작이 당시 조폭들의 혼을 뺐다. 대양진인이 날아가면서 스치듯이 모래사장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모래밭에 거의 사람 발자국이 남지 않은 상태로 날 듯이 현장을 떠났다. 어떻게 사람이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조폭 중간간부 한 명은 십몇 년쯤 지나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호텔 커피숍에서 대양진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이야기를 박사규 문주의 친구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친구가 대양진인과 동행이었다.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행법은 기천에서 무엇이라 합니까?”
   
   “그건 비마축지(飛馬縮地)라고 합니다. 보법(步法) 중의 하나죠. 나는 말이 달리는 보법이라는 것이죠.”
   
   이렇듯 부산에서 도장깨기의 선수로 동원되던 대양진인이었지만, 세상 물정은 전혀 몰랐다. 화장실의 양변기도 부산에서 처음 봤을 정도였다. 세숫대야인 줄 알고 변기통에서 세수를 했다고 한다.
   
   
   간첩으로 오인받은 대양진인
   
   대양진인이 부산 생활을 끝내고 23~24세 무렵에 계룡산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신흥암 근처의 어느 허름한 암자였다. 대양은 매일 새벽마다 수련을 하였다. 소나무 사이를 붕붕 날아다니다시피 하면서 발차기를 연습하였다. 이 소나무에 왼발을 찍고 날아서 다음 소나무에 오른발을 찍는 식이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숲속에서 수련을 하던 대양은 간첩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공주경찰서에 간첩신고가 접수되었다. 1970년대 초반은 간첩신고 하라는 교육을 학교에서 받을 때였다. 공주경찰서에 연행되어 간 대양은 주민등록증도 없고, 거주지나 주소도 없고, 졸업한 초등학교도 없었다. 신분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공주경찰서 무술경관과 무술 대결도 했다. 태권도, 유도, 합기도의 초식을 쓰면 어느 정도 알리바이가 입증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양이 보여주는 초식은 듣도 보도 못 한 동작들이었다. 도대체 계보를 알 수 없는 무술이었다. 이건 혹시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쓰는 무술 아닌가?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려면 주변에 누구 아는 사람을 대야만 하였다. 유일한 동거인은 암자에서 밥해 주던 나이 든 보살님밖에 없었다. 양어머니처럼 이 보살을 모시고 살던 때였다. 하지만 나이 든 할머니 보살도 호적상으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냥 동거인일 뿐이었다. 어떻게 증명을 해야 하나? 그때 약간 신기가 있었던 양어머니 보살님 꿈에 원혜상인이 나타났다. 꿈에 나타난 원혜상인이 ‘설악산 죽음의 계곡으로 가면 어떤 바위 뒤에 소나무가 있다. 거기로 대양을 데리고 와라’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깨고 나니 아주 선명한 꿈이었다.
   
   경관 2명과 함께 설악산 계곡에 올라갔다. 삼복 여름이었다. 계곡을 올라가다가 땀을 씻으려고 일행이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있는데 양어머니의 뒷덜미가 쭈뼛해졌다. 갑자기 원혜상인이 나타나 일행들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원혜상인의 모습은 거의 걸레같이 해진 남루한 옷을 입고 팔뚝과 몸에 털이 수북하게 난 상태였다고 한다. 생식을 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 털이 많아진다. “이 애를 내가 가르쳤습니다.” 옆에서 원혜상인의 차림새를 본 경관들은 바로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았다. 신원보증인이 필요하였다. 그 신원보증을 오대산 월정사에 계시던 탄허스님이 해주었다. 원혜상인이 산을 내려갈 때 대양에게 당부하기를 ‘무슨 일이 생기면 탄허스님을 찾거라’ 하는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탄허스님과 원혜상인은 서로 친분이 있었다. 경찰에서 탄허스님에게 대양의 신원을 물으니 탄허스님이 “그 애는 내가 안다. 내가 보증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설악산의 원혜상인이 5살짜리 대양을 데려다가 키웠고, 다시 대양진인이 박사규에게 전수한 무술이 기천문이다. 실로 아슬아슬하고 숙생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전해질 수 없었던 수련법이다. 기천의 사상적 배경은 ‘천부경’이다. 천부경의 골자인 천지인 삼박자를 중시한다. 천부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심신수련법 기천이 단군 때부터 시작하여 연개소문을 거쳐 여기 계룡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을 만나 전수가 된다.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