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노래 속의 맹자 사상 仁義, 萬物一體, 與民同樂, 終身之憂…
홍호표 동아일보 어린이동아팀장, 공연예술·커뮤니케이션학 박사 honghopyo@hanmail.net
가수가 지속적으로 노래를 히트시키고 자신도 대중의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면 그 이유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시대와 호흡을 함께하고 대중의 마음과 늘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과 가수가 한마음이 되는 ‘공식’은 없다. 가수나 제작자는 최선을 다하되, 히트 여부는 하늘에 달렸다. 여기에서 ‘하늘’이란 바로 민심(民心)이다.
‘두루 통한다’는 것, 즉 보편성을 지닌 히트는 한국인의 본질적 요소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너’와 ‘나’는 똑같아야 한다는 정서가 있다. ‘너’와 ‘나’는 ‘하늘로 연결된 우리’이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모두 한국적인 것이다. 인내천은 ‘하늘과 인간은 하나’라는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天人無間)’ 사상의 맥을 잇는다.
목은과 양촌 권근 등을 거쳐 퇴계 이황으로 이어진 한국의 성리학은 우주 발생보다는 ‘인?심성’을 중심으로 다룬다. 추만 정지운이 그리고 퇴계가 수정한 ‘천명도(天命圖)’ 등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관을 보여준다. 그 결과 한국의 성리학은 인간을 하늘과 같은 차원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띤다. 특히 단군신화 등에서 보듯 한국인은 현세에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려는 특징을 지닌다.
조선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이황의 천명도는 하늘로부터 직접 본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현세에서 어떻게 그 심성을 구현하며 살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결국 하늘은 저 멀리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 마음속에 존재하며, ‘하늘의 마음’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임을 말해준다.
인간의 심성을 강조한 한국 철학의 전통은 욕심을 줄여 인간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되고, 결국 하늘의 일을 하게 돼 왕도가 이뤄진다는 맹자의 인간중심 사상과 맞닿는다. 심성이 중심이 되면 수양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마음을 다하는 것(盡心)과 욕심 줄이기(寡欲)로 상징되는 맹자와 직결된다. 결국 맹자 사상은 한국 사상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맹자 사상의 틀’을 바탕으로 ‘국민가수’ 조용필의 노래를 분석해볼 수 있다.
‘슬퍼질 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
조용필의 자전적 노래 ‘꿈’(조용필 작사·작곡)은 고향과 화려한 도시를 대비한다. 도시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춥고 험한 곳이다. 도시의 ‘초라한’ 문턱에서 눈물을 삼키는 주인공은 ‘화려한’ 모습이 아님을 안다. 사람들은 모두 고향을 찾아간다고 했다. ‘남이 가면 나도 가야 한다’는 것은 천인합일, 즉 ‘우리는 하나’라는 맹자의 사고에 닿아 있는 한국적 정서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이 도시에 온 목적은 ‘꿈’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리던 꿈은 없다. 도시에 대비되는 고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를 듣는 사람은 ‘그냥’ 안다. 고향은 태어난 곳이다. 바꿔 말하면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품속은 바로 하늘이다. 고향을 꿈꾸는 것은 곧 하늘을 꿈꾸는 것이다.
‘고향’을 그리지만 가지 못하는 주인공의 마음엔 응어리가 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꿈을 찾아온 것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으려는 것이고,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시골에 비해 경제적으로 윤택한 곳으로 인식된다. 인간이 개발한 그곳엔 선택할 것이 많다. 이러한 의식화를 통해 주인공의 꿈은 도시가 된다. ‘화려한 도시’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막상 찾아온 도시엔 ‘빌딩 숲’은 있지만 ‘내것’은 어디에도 없다.
주인공은 ‘선택의 자유’와 ‘자유의 선택’을 놓고 고민한다. 주어진 수많은 재화 가운데 고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재화의 과다에 관계없이 자유 자체를 찾는 ‘자유의 선택’을 할 것인가. ‘초라한 골목’에 쪼그리고 앉은 주인공은 결국 그리던 도시가 허상임을 깨닫는다. 원래 자유가 있던 고향, 즉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갖는다. ‘욕심의 꿈’이 ‘순정의 꿈’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자유의 선택으로 나타난다.
자유의 선택은 맹자적인 것이다. 속박과 제한이 없는 자유란 천심(天心)이 현실에 두루 적용되는 상태다. 천심은 동심(童心)과 통한다. 동심이 살아 있는 곳은 고향이다. 고향은 측은지심이 절로 이는 곳이다. 고향을 선택하는 것은 마음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순자(荀子)적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보는 순자적인 것은 이익의 조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물질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예(禮)로써 규격화한다. 순자적 선택이 하늘인 줄 알고 그 길을 걷던 주인공은 다시 맹자적 선택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희망의 종착지라 생각한 ‘도시’가 실제로는 욕심이 빚어낸 허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는 표현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고 하고,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뜨거운 눈물’과 ‘슬픈 노래’는 맺힌 마음의 표출이다. 그 한은 남을 원망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천심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것이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중화(中和), 천하의 근본인 중(中)이 중심이 되고 결과적으로 화(和)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情)은 맹자적 바탕에서 발현된 것이다.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은 마지막 부분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에서 절정을 이룬다. 눈은 감각기관이다. 눈을 감으면 일단 시각이 멈춘다.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의 경우 논리적으로 고향의 향기를 ‘들을’ 수는 없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듣는 것이 아니다. 감각기관이 생존에 필요한 기능 외에 불필요한 기능을 정지한 곳, 그곳에 바로 ‘고향’이 있고, 그게 바로 주인공이 돌아가기를 꿈꾸는 그곳이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조용필의 자작곡 ‘아이마미’는 ‘아름답고 이성적이고 마음씨 고운 미인’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제목이다. 꿈속에서 아이마미를 보고 깨어나 현실에서 아이마미를 찾고자 한다. ‘어둠 속에 있을까’ ‘꿈 속에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이마미는 이상적인 여성일 수도 있고 이상향의 세계일 수도 있다.
아이마미는 꿈속에 있건, 어둠 속에 있건 ‘존재한다’. 여기서 어둠은 감각기관이 작동하는 현실이다. 잠든 상태에서 나타나는 꿈속은 감각기관과 의식의 작용이 멈춘 상태, 즉 존재와 존재자가 일치하는 상태를 상징한다. 의식이 일시 잠든 세계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는 ‘차이’가 있다. 꿈속에는 있었는데 깨어보니 없다. 그런데 주인공은 꿈속의 현실인 ‘아이마미’를어둠의 현실에서 재현하려 하고 있다.
‘친구여’(하지영 작사, 이호준 작곡)는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노래다. 친구는 어린 시절 친구일 수도 있고 함께 음악활동을 했던 동료일 수도 있다. ‘친구여’에서 ‘꿈’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성(性)을 갖췄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꿈이 포근하게 잠들어 꿈꾸는 곳’이 하늘이다. 그 꿈은 더 이상 의식이 잠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꿈이 아니다. 깨어 있고 잠잘 수 있는 꿈, 즉 살아 있는 꿈이다. 꿈은 이제 생명을 지닌 현실의 일부로 만물일체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잠자는 이 ‘꿈’은 성의 작용이 없다면 잠을 잘 수 없다. 현실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곳은 어머니 품밖에 없다. 이 꿈이 미래의 꿈을 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에도 ‘꿈’은 생명을 갖는다. 그 꿈은 ‘내 몸’과 친구의 몸에 깃들어 있다. 친구가 현실에 같이 있을 때는 미래의 꿈이었지만, 친구가 가버린 상태에서는 하늘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가사는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네’로 이어진다. 잠들고 꿈을 꾸는 것은 성의 작용이지만 ‘추억’은 정(情)의 작용이고 의식 속에 쌓인다. ‘친구여’에서는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로 표현된다. 조용필식 ‘꿈’은 잠 잘 수 있지만, 의식은 흐를 수밖에 없다. 잠과 꿈은 작용을 멈출 수 없지만 의식의 작용은 멈출 수 있다. 정은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조용히 눈을’ 감아 시각을 정지하고 감각기관의 무화(無化)로 본성에 따라 ‘꿈’에 이르려 한다.
조용필의 히트곡에서 꿈은 현실에서의 꿈이고 현실은 꿈을 전제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의 노래는 종교적 의미에서 현실과 분리된 내세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현세를 표현한다.
역진(逆進)의 꿈
맹자는 “대인이란 적자(赤子)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적자는 갓난아이를 말하므로 적자지심은 동심(童心)에 가깝다. 맹자의 관점에서는 동심을 지녔으면 대인에 가깝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이 순정으로 발현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갓난아이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여기서는 ‘적자지심=동심’으로 보기로 한다.
인간은 자라면서 감각기관이 작용하고 나와 남을 구별하려는 의식이 생긴다. 여기서 욕심이 생기고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어른이 되면 현실적으로 동심을 지니기 어렵다. 따라서 되도록 동심을 잃지 않으려 힘써야 하고, 동심이 가리면 되살리려 애써야 한다. 집을 나간 본마음을 되찾아오는 행위인 수양을 통해 오르려는 경지가 바로 동심의 세계다.
조용필 노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동심이다. 조용필의 동심 지향은 ‘고추잠자리’(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곡의 노랫말은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보고 싶지…’로 돼 있다.
노래의 주인공이 몇 살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어머니와 ‘몸’이 분리돼 있는 상태다. ‘들꽃’과 ‘고추잠자리’는 주인공의 마음이 시골에 가 있음을 암시한다. ‘들꽃 따러 왔다가’ 잠이 들어 의식이 정지한 상태에서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물어본다. 비록 들꽃을 따러 나왔지만 세상은 세상이다. ‘성인’인 주인공은 어머니의 품속이 그립다.
‘나는야 언제나 술래’
주인공이 잠들어 꿈을 꿨다는 전제 아래, 그 꿈이 노인으로 태어나 거꾸로 자라서 어린이가 되고 아기가 되어 결국 태어난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역진(逆進)의 꿈이라면 주인공은 라캉식으로 표현해 ‘스스로의 퇴행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목격자’이고 그의 꿈은 ‘환상적 해방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어머니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품속에 함께 있고자 하는 주인공의 바람을 드러낸다. 그것이 완전한 상태이고, 완전한 상태는 본성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갓난아이의 마음을 되찾는 과정은 본성을 향한 역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꿈은 역진의 꿈이다.
동심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못 찾겠다 꾀꼬리’(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로 연결된다. 이 노래는 ‘못 찾겠다 꾀꼬리… / 나는야 오늘도 술래…엄마가 부르기를 기다렸는데… /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라는 가사로 돼 있다.
주인공은 술래잡기를 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어렸을 때 그는 언제나 술래였고 숨어 있는 친구들을 찾아야 했다.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찾으러 오는 엄마가 있다. 이때 ‘나’는 더 이상 술래가 아니다. 술래는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계속 술래 상태로 있어야 한다. 주인공은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던 시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찾으러 오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주인공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술래’라고 고백한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다. 주인공은 그 꿈을 ‘찾을 때도 됐는데 보일 때도 됐는데’라고 하며 안타깝게 찾아 헤맨다. ‘못 찾겠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술래’라고 강조함으로써 포기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한마음으로 놀던 고향의 어린 시절, 특히 밤이 늦으면 아이를 찾으러 동네를 다니며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에 대한 꿈은 결코 포기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 노래는 단순히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잊고 사는 것, 잃어버린 것 등 본질적인 것들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지향성을 담고 있다. ‘고추잠자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는 주인공의 욕심 줄이기 과정과 함께 존심(存心)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맹자는 “누구나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고 성을 알면 하늘을 알며 그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면 하늘을 섬길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진심은 ‘철이 든’ 사람이 욕심의 꺼풀을 하나씩 벗겨 순정으로 돌아가는 과욕으로 구체화하며, 존심은 그 순정을 간직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노래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욕심을 하나씩 걷어내고 순정으로 돌아가려는 지향성이며, 주인공은 순정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조용필 노래의 꿈은 이제 동심을 넘어 문자 그대로 적자지심으로 들어간다. 7집에 실린 ‘내가 어렸을 적엔’(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에서는 동심의 역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 내용은 ‘맹자 그 자체’라 할 만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 우는 것밖에는 몰랐겠지요 누구나 그랬잖아요… / 그 후 사랑을 알게 되고 눈물을 배웠지요…’. 갓난아이로부터 시작해 세상사에 시달리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두 그렸다.
적자는 ‘우는 것밖에’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 우는 것밖에는 몰랐겠지요’라고 노래한 뒤 ‘누구나 그랬잖아요’라고 해 성은 천명으로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내’가 그랬을 것이므로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갓난아이 시절 ‘우는 것’과 ‘받는 것’밖에 몰랐다고 고백한다. 갓난아이가 우는 것도 자연의 이치고, 일방적으로 받는 것도 자연의 이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개입해야 어머니와 다르다고 생각하므로, 받기만 했다고 해서 욕심이라고 볼 수 없다. ‘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인 것이다. 받기만 했어도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친친의 원초적 형태일 뿐이다. 즉 순선이다.
주인공은 성장하면서 ‘분리’를 경험한다. 자라면서 감각기관을 통해 바깥을 경험하고 의식이 생겼으며 적자 시절에 알 필요도 없던 사랑을 알게 되고 눈물을 배운다. 또 ‘인생 가는 길에 눈물의 강은 깊어’지고 ‘세상을 알게 되고 고독을’ 배운다.
세상에는 순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른 욕심도 있고 그 욕심의 지배를 받는다. 욕심은 거래로 나타난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바깥의 거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어린아이 시절에 우는 것밖에 몰랐던 것에 대해 ‘어려서 그랬다 이야기할 수 있죠’라고 한다. 이 말은 지금은 ‘주고받는 관계’, 즉 이해관계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의미다.
주고받는 것은 ‘거래’다. 사랑을 줬으면 받아야 하는데 되돌려 받지 못하면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랑의 결과가 이별로 나타날 경우에는 ‘눈물의 강’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알게’ 되고 고독을 ‘배웠다’고 말한다. 본성에는 사랑도, 이별도, 고독도 없다.
주인공은 여기서 철없던 시절을 떠올리고 어머니와 하나이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말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세계를 갈구한다는 의미다. 조용필 노래의 동심은 이런 성격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오호라 해는 동쪽에서요 오호라 비는 하늘에서요 / 오호라 바람 구름도요 오호라 그냥 지나가네요’로 맺는다. 해, 비, 바람, 구름은 모두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있는 것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자연이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지만 자연은 ‘그냥’ 지나간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어머니 품으로 구체화되는 사랑(仁)을 찾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상호감응의 사랑
조용필의 사랑 노래 중 ‘여와 남’(김형윤 작사, 조용필 작곡)은 ‘쉬운 만남 쉬운 이별은 바람처럼 바람처럼 /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데…지구위의 반은 남자 지구위의 반은 여자 / 아- 너는 나의 밤을 밝히는 달 / 나는 너를 지키는 해가 되리라 / 너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너가 있다’라는 가사로 돼 있다. 이 노래는 만물일체에 다가가면서 상호감응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와 남’은 ‘쉬운 만남 쉬운 이별은 바람처럼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데’라고 해 이별 노래임을 암시하지만 ‘너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너가 있다’고 맺음으로써 사랑의 승화를 제시한다.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라 상대가 수없이 많지만 ‘홀로 굴러가야 할 바퀴’는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뜻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한다.
확률의 논리로 보면 지구 위에는 남녀가 반반씩이므로 ‘선택의 자유’는 거의 무한하다. ‘쉬운 만남 쉬운 이별’이 ‘바람처럼’ 흔들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왜 ‘쉴 곳’조차 없을까. 이는 양(量), 즉 개체의 수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감응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남녀의 사랑은 수요와 공급의 시장경제원리로 설명하기 어렵다.
‘시경’의 ‘출기동문(出其東門)’도 “동문 밖에 나가보니 여인들이 구름처럼 모였네 / 구름처럼 많아도 내 마음은 거기에 없네 / 흰 비단저고리 연두색 수건만이 오직 내 마음을 흔드네…”라고 감응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시의 ‘구름처럼’ 많은 여자와 조용필의 노래 ‘여와 남’에서 ‘지구위의 반은 여자’ 부분은 서로 대응한다.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내 마음을 흔드는’ 사람과 ‘이 마음의 뜻을 펼칠’ 대상은 딱 한 사람만 존재한다. 핵심은 감응 여부에 달렸다.
주인공의 ‘자유의 선택’은 분명하다. 보편적 사랑을 통해 이별을 승화하는 것이다. 상대는 자신의 밤을 밝혀주는 ‘달’이므로, 주인공은 상대를 지켜주는 ‘해’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하늘의 도는 음양(陰陽)이고 땅의 도는 유강(柔剛)이며 사람의 도는 인의(仁義)다. 따라서 상대가 달이므로 자신은 해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천도(天道)를 따르겠다는 의미다. 이는 만물의 생성원리이자 선(善)이며 이에 따라 상호감응하며 결혼해 사는 것이 대륜(大倫)이다.
‘여와 남’은 ‘너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너가 있다’고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너와 나는 개체로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로서 우주에 조화를 이뤄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해와 달은 몸은 다르지만 세상을 비추는 원리는 같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나눠주는 존재다. 남녀가 개체 간의 물리적 결합을 넘어 자연의 조화로서 부부가 되는 이치다.
무한한 하늘, 유한한 개체
‘주역’은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서로 부딪히고 8괘가 서로 움직여 천둥과 벼락으로 고무하며 바람과 비로 적시며 해와 달이 운행하며 추웠다 더웠다 하여 건도에서는 남성을 만들고 곤도에서는 여성을 만든다. 건(乾)은 위대한 창조를 주관하고 곤(坤)은 만물을 완성하는 일을 한다’고 설명한다.
‘여와 남’에서 말하는 해와 달의 역할은 이 내용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남과 여는 각각 해와 달이 되어 ‘위대한 창조’를 주관하고 ‘만물을 완성’하는 일을 하겠다는 뜻이다. 창조가 없는 완성이 있을 수 없고, 완성이 없는 창조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너’와 ‘나’는 서로가 있기에 존재하고, 둘은 상호감응의 관계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이자 인간의 이치이므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다.
‘여와 남’에서 이러한 상태가 실현됐다고는 보기 어렵고, ‘되리라’는 표현에 비춰 그 상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해와 달로 상호작용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도를 이어받아 작용을 계속하는 것은 선이다. 선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생기는 것 자체이며 어떤 지향성을 갖고 새로운 질서에로 조화되는 작용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주역’의 ‘함괘’는 ‘중용’에서 ‘군자의 도는 단서가 부부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천지에 드러난다’고 한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군자가 가야 할 길은 그 실마리가 부부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가 시작된다는 말이고 확대되어 천지, 즉 우주에 가득 펼쳐진다는 의미다. 가정의 기초인 부부 사이가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결국 젊은 남녀의 사랑이 1차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부부가 되는 것이다. 부부가 되어 하나임이 확인되어야 결과로서 자녀를 낳아 다시 친친을 확인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계속 확대하는 것이 곧 성을 아는 것이고 천명을 아는 것이 다.
남녀 간 사랑에서의 순정 발현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된다. 순정이라도 상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상대가 떠나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사랑은 그 자체로 애(哀)를 포함한다. 사랑에는 즐거움(樂)과 슬픔(哀)이 음양으로 엮여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유한한 개체 간의 사랑은 무한한 하늘을 전제로 전개된다. ‘주역’ ‘예기’ 등에 따르면 기(氣)로 구성된 인간의 몸 자체는 유한하지만, 그 기는 흩어져 혼백으로 각각 하늘과 땅으로 되돌아가며 하늘은 ‘말없이’ 귀신의 작용을 계속한다. 이러한 하늘의 작용은 맹자적인 의미에서 선(善)이다.
하늘이 명한 성(性)은 무한하지만 유한한 인간의 몸, 즉 개체에 깃들어 있으며 개체를 통해 정으로 발현된다. 그러므로 성 자체는 무한하지만, 개체에서 발현되는 정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 유한에는 이별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유한한 시기의 정이 발현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 이별을 포함한다. 따라서 개체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별을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한한 개체의 유한한 이별’인 것이다. 이별하는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시간은 무한한데, 유한한 인간이 ‘잘라서’ 만들어놓은 개념이므로 천명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시공에 존재할 뿐 ‘특별한 이별의 시기’는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별은 고통이 된다.
개체의 이별과 이에 따른 고통은 본성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만물은 다 내게 들어와 있으며 만물일체임을 알고 너와 나는 ‘우리’로 하나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며 그 과정이 과욕으로 상징되는 수양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치
‘여와 남’을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보자. 여기서 남자는 해가 되고 여자는 달이 된다. 해는 빛을 생산하고 달은 그 빛을 반사한다. 해는 ‘위’에 있고 달은 그보다 ‘아래’에 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달은 지구 주위를 돈다. 태양은 달을 ‘지배’한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 그러나 달에는 이미 태양의 ‘존재’가 있다. 밤에 태양을 볼 수 없지만 태양의 존재는 달을 통해 드러나므로 밤의 달은 곧 해의 현존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이 존재에 해당한다면 달은 존재자에 해당한다.
이 노래에서는 달이 이미 주인공을 밝혀주는 존재이므로, 주인공은 달을 지켜주는 해가 되겠다고 말한다. 나아가 달이 있음으로 태양이 있고, 태양이 있으므로 달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 경우 해와 달을 각각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에 비유한다면, 이 노래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구분이 없어짐이 확인된다.
주체, 즉 ‘나’와 그 기표인 태양의 관계는 물론 객체인 ‘너’와 ‘너’의 기표이자 ‘나’의 기의인 달과 태양의 관계도 더 이상 상하, 우열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기표는 기의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너와 나, 여와 남, 달과 해의 담론은 기표와 주체가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기표끼리의 대화’가 된다.
기표 간의 대화는 무의식의 대화이며 주체끼리의 대화다. 무의식은 본성이고, 본성은 천명이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고 작용할 뿐이다. 달과 해는 말하지 않고도 작용하므로 너와 나는 이제 말이 필요 없이 서로를 알고 의사소통을 한다.
주체 간의 의사소통은 위에 있는 해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옴으로써 가능하다. 하늘이 내려와 땅을 만나야 세상이 돌아간다. 주체가 미끄러진다는 것은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로 정신분석학자 이리가라이가 말하듯이 가부장제의 언어인 환유에서 여성의 언어인 은유로 내려와야 한다는 의미와 통한다.
맹자는 “사랑하기만 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라 했다. 상대를 공경하려면 나를 낮춰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그것을 나타내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공경이 중요하다. 공경하지 않는 사랑은 욕심의 사랑이다. 공경의 사랑은 지성이어야 한다.
본성을 알고 하늘을 알고 받드는 것은 과욕이 기본이다. 기표와 기표의 대화가 주체끼리의 대화가 되는 상태는 천인합일이다. ‘여와 남’에 나타난 감응의 사랑을 공맹 철학과 ‘주역’을 바탕으로 한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 왼쪽과 같다. 이는 조용필식 사랑법이라 할 수 있다.
‘여와 남’에서는 너, 나, 달, 해의 관계가 ‘너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너가 있다’로 표현됨으로써 천인합일, 천인무간의 상태에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라고 해 남자와 여자를 구분한다. 즉 사람의 몸으로 보면 남녀가 다르기 때문에 ‘너’와 ‘내’가 있지만,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음양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는 논리다.
하이에나의 이상과 고독
조용필 노래 가운데 맹자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곡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종신지우(終身之憂) 자체를 노래한다. 이 노래의 주제는 “순임금도 사람이며 나 또한 사람인데 순임금은 천하에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향인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것을 근심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맹자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주인공은 다른 동물이 먹다 남긴 시체를 뜯어먹고 사는 하이에나 신세다. 그럼에도 ‘굶어서 얼어’ 죽더라도 정상에 올라가는 산의 왕자 표범을 꿈꾼다. 주인공은 현재의 자신을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는 돌아가야 할 지향점이 있는 존재임을 암시하며, 자신은 ‘하늘’이어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럼에도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고 함으로써 현실에서 초라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주인공의 고민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잖아’에 있고 그의 꿈은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에 있다. ‘순은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는데’라면서 향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과 단어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1대 1로 대응한다.
여기에 나오는 고흐는 삶이 불행했다 할 수 있지만 남긴 업적은 미술계의 ‘킬리만자로 산정’이다. 맹자는 하늘은 큰 인물을 내기 위해 반드시 시련과 고난을 주어 모자라는 부분에 대한 능력을 길러준다고 했다. 고흐는 이 고난을 이기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조용필도 개인적으로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왔다.
노래의 주인공은 왜 고난을 무릅쓰고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려 하는지 ‘묻지를 마라’고 외친다. 킬리만자로의 정상에는 무엇이 있나. ‘사랑’이 있다. 이 노래에서 ‘사랑’은 ‘이상’과 동의어다. 정상은 ‘구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곳이지만 주인공은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 ‘사랑’을 만나기 위해 주인공은 ‘고독과 악수’하는 고통을 감내한다. 사랑과 이상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매는 ‘고독한 남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이고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사랑’의 성격에 대해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 나도 밤을 사랑한다 /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고 했다. 나와 네가 사랑하는 바가 같다. 공통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지성이면 지천
인간은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공통적인 요소의 발견은 성선설의 근거다. 맹자는 맛, 소리, 빛깔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바가 있음을 들어 사람의 마음에도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면서 이것이 바로 인의(仁義)라고 했다. 인의는 인간의 본성이며 보편적 사랑이다. 따라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의의 사랑이고 하늘과 하나가 되는 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고독’은 왜 발생하는가. 주인공은 귀뚜라미, 라일락, 밤은 함께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고 할 뿐 ‘너도 사랑한다’고 덧붙이는 대목이 없다. ‘너’는 누구인가. ‘사랑’의 대상임에 분명하지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너’의 사랑을 받는 것은 ‘운명’을 거는 것이고, ‘모든 것’을 거는 대상이다.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기 때문에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라고 한다. 그렇다고 ‘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너’는 곧 ‘사랑’이며 ‘진리’ 그 자체다.
주인공은 ‘짝사랑’의 끝을 예감한다.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이라 한다. 그런데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이라며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다고 노래한다. 이것은 진심(盡心)이다. 맹자는 마음을 다하면 성을 알고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했다. ‘모든 것을 잃어도’는 과욕과 통하고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지성과 통한다.
지성이면 지천이다. 이 노래는 진심의 자세를 보여주면서 지성과 지천을 지향한다. ‘아무리 깊은 밤’에도 ‘한가닥 불빛’으로 남고, ‘타버린 땅’에도 ‘맑은 물줄기’로 남고, ‘폭풍우가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가 되겠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인공의 ‘꿈’이다.
그 ‘꿈’은 부동심의 차원이며 호연지기의 세계다. ‘구름’인지 ‘눈’인지 모를그곳을 향해 주인공은 배낭을 메고 ‘고독과 악수하며’ 수양을 계속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고난과 시련을 자청하고 있다. 그 이유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과거시제로 표현했다. 주인공이 갈망하는 ‘너도 나를 사랑하는 날’이 바로 21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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