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의 단풍도 그렇고, 붉게 타오르는 낙조도 그렇습니다. 저물어가는 것들의 빛은 저리도 찬란합니다. 이제 가을의 한복판을 건너왔습니다. 이제 올해도 남은 날은 딱 두 달 뿐. 저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가장 화려하게 볼 수 있는 곳, 바로 전남 영광입니다. 영광의 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16.8㎞의 백수해안도로야말로 저무는 하루를 가장 아름다운 노을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칠산바다를 회유하던 조기떼도, 500년을 며느리에서 며느리로 이어오다 꺼지고 말았다는 고택의 화로 불씨도 저문 것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저무는 것들은 때로 쓸쓸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장한 아름다움도 품고 있습니다. 전남 영광에서 저무는 것들의 시간 속으로 떠납니다. # 차로 달리는 낙조 명소…백수해안도로 전남 영광을 대표하는 건 ‘영광’이란 지명 뒤에 입말로 딱 붙는 ‘굴비’가 으뜸이지만, 그건 과거에나 그랬고 지금 영광 여행의 첫 번째 아이콘이라면 단연 ‘백수해안도로’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영광의 조기떼 얘기는 뒤로 좀 미루고, 백수해안도로 드라이브 얘기부터. 백수해안도로는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백암리 석구미 마을까지 이어지는 16.8㎞의 해안도로다.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도로에는 모두 77번 번호가 붙여지는데, 이 도로의 영광군 백수읍 구간이다. 도로에 붙여진 ‘백수’란 이름은 백수읍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읍 이름 ‘백수’는 어디서 온 걸까. 백수란 ‘직업 없는 건달’을 뜻하는 백수(白手)가 아니다. ‘흰 백(白)’에 ‘산 구멍 수(岫)’ 자를 쓴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흰 산’이란 뜻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것도 아니다. ‘일백 백(百)’ 자에서 ‘한 일(一)’ 자의 획을 빼면 ‘흰 백(白)’, 희다는 뜻이 아니라 100에서 1을 뺀 아흔아홉을 뜻하는 백(白)자를 썼다. 아흔아홉이란 백수읍 한복판에 솟은 구수산 봉우리 숫자를 말한다. 구수산 봉우리가 99개나 된다는 뜻이다. 이쯤이면 구수산을 빼어나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해발 400m에도 못 미치는 마을 뒷산 같은 별 볼 일 없는 산이다. 사실 백수읍의 주인공은 산이 아니라 바다다. 백수해안도로도 마찬가지다. 백수해안도로는 빼어난 해넘이의 풍경을 보여주는 길로 이름났다. 해안도로가 특별한 것은 바다를 끼고 유연하게 굽이치는 도로다. 사실 서해를 끼고 있는 해안에서 인상적인 바위나 섬이 없다면 해 지는 경관이 뭐 다를 게 있을까. 백수해안도로에는 해안 쪽의 절경도 없고 섬은 멀다. 그럼에도 백수해안도로의 노을이 특별한 건 바다에 딱 붙어가는 길과 그 길이 만들어내는 유연하게 굽이치는 곡선 때문이다. 길 위에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칠 것 없는 시야가 펼쳐진다. 서해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바다전망의 시야다. 게다가 백수해안도로 어디서든 차를 댈 수 있도록 길옆에 주차장을 마련해두었다. 대부분의 해안도로는 도로 폭이 협소해 주차조차 쉽지 않은데, 백수해안도로에는 곳곳에 주차장을 설치해두었다. 해안도로 전망대 격인 정자 칠산정 주변에는 ‘제7 주차장’까지 있다. 전망 포인트와 주차공간이 어찌나 넓은지 도로 어디든 차를 댈 수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도로 아래쪽으로는 나무 덱을 놓아 해변 쪽으로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러니 황혼 무렵 백수해안도로를 달리며 노을을 감상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풀무를 불어넣은 듯 하늘이 가장 뜨겁고 붉게 물들 무렵에 길 어디쯤에든 차를 대놓고 바다와 마주 서면 될 일이다. 노을은 드라이브로 즐기는 게 제격이다. 영광군에서 이쪽 해안도로에다 도보코스 ‘노을길’을 조성해놓았는데, 사실 노을을 끼고 가는 길은 걷는 길로는 적당하지 않다. 우선 노을의 절정은 짧다. 뜨겁고 화려한 노을은 금세 식어버리고 이내 어둠이다. 그 짧은 시간을 위해 길게 걸어야 하고, 낙조 뒤의 어둠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백수해안도로의 노을은 해안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절정의 순간에 내려 잠깐 산책하며 감상하는 게 가장 좋다.
# 가장 아름다운 낙조가 있는 곳…백바위 영광의 백수해안도로가 드라이브로 만나는 절정의 해넘이 풍경을 보여준다면, 제 자리에 서서 오래 마주하는 낙조 풍경으로는 백수읍 남쪽 염산면 두우리의 백바위가 으뜸이다. 순전히 낙조 경관의 우열만으로 판단해서 백수해안도로와 백바위를 비교한다면, 백수해안도로가 감히 백바위를 따를 수 없다. 바위와 바위 끝의 정자와 한데 어우러지는 낙조의 색감도 훌륭하지만, 인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젓해 감동적인 낙조풍경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백바위가 있는 두우리 일대는 드넓은 갯벌, 그리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염전이 인상적인 곳이다. 백바위는 두우리 갯벌의 북쪽에 있다. 백수해안도로의 백(白)이 아흔아홉을 의미한다면, 여기 백바위의 백(白)은 이름 그대로 ‘흰 바위’를 의미한다. 해안가에 거대한 흰 바위 무리가 갯벌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바위 해변에 서면 멀리 송이도와 낙월도, 각이도가 아스라하다. 백바위 해변에는 바다 쪽으로 길게 밀려 나간 갯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해변에서 갯바위로 이어지는 자그마한 목조 다리도 있다. 갯바위의 정자는 낙조를 바라보는 전망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서 보면 붉은 낙조 풍경의 포인트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을의 청명한 대기 속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해는 선혈처럼 뜨겁게 붉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였다. 백바위 남쪽 두우리와 송암리 일대에는 영백염전, 군유염전 등 드넓은 천일 염전이 펼쳐져 있다. 염산면의 ‘염산(鹽山)’의 이름이 이곳에서 왔다. 소금을 땅이름으로 쓰는 유일한 곳이다. 백바위의 낙조를 찾아 나선 길이라면 해지기를 기다려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 오후 나절에 둘러보기에 딱 좋다. 소금 만들기도 끝물이어서일까. 쇠락한 염전은 쓸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빈 염전의 소금밭에는 흰 소금 대신 붉은 칠면초가 자라고 있고, 염전 두둑을 따라 이어지는 길의 자취마저 노랗게 반짝이는 억새와 갈대가 다 지웠다. 쇠락한 염전은 쓸쓸했지만, 이런 분위기는 가을과 썩 잘 어울렸다. 이런 염전 풍경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듯 어촌 마을 두우리 너른 밭에는 진초록 대파가 드넓게 펼쳐졌다. 쇠락해 스러지는 것이 보여주는 낡은 갈색 곁에, 새로 자라는 것들이 생명력 넘치는 푸른 빛으로 빛났다. # ‘좋았던 시절’의 전설이 되다…영광굴비
법성포 굴비 가게 상인들은 ‘어디서 잡힌 것이냐’가 아니라 ‘어디서 말린 것이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맛이 달라진다고 입을 모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곳에서 잡았다고, 같은 생선의 맛이 얼마나 다를까. 하지만 이 말이 군색하게 느껴지는 건 칠산바다에 굴비가 사라지고 난 뒤라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기억은 다 ‘좋았던 시절’로 추억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전의 영광굴비가 지금의 것보다 더 짭조름했고 맛도 있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한낱 밥상 위의 한 끼 반찬거리였던 영광굴비. 일상이었던 굴비가 명실상부한 전설이 됐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건 전시된 조기박제 앞에서였다. 굴비 관련 상인단체인 법성포 영광굴비 특품사업단 건물에 굴비 전시장이 있다. 이곳에 41㎝짜리 조기 박제가 있다. 10여 년 전 누군가 잡아 서울의 한 백화점에 납품했던 것인데, 천신만고 끝에 그걸 백화점으로부터 기증받아 박제로 만들어 전시했다. 조기 파시가 있던 시절에도 드물게 잡히던 큰 놈이라니 그럴 법도 하건만, 그래 봐야 밥상의 반찬이던 생선 한 마리가 전시관 한가운데 마치 무슨 귀한 유물 모시듯 전시해놓은 게 낯설다 못해 공연히 심사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다. 법성포의 상인들에게 41㎝짜리 조기 얘길 하자 ‘그만한 크기는 지금도 나온다’며 큰소리를 쳤다. ‘10마리 한 두름에 300만∼400만 원 정도’라며 가격까지 얘기하는 상인도 있었다. 그러나 ‘있다면 보여달라’는 말에는 모두 ‘지금은…’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나저나 이즈음 굴비 시세가 말이 아니다. 김영란법의 후폭풍으로 수요가 급감했는데, 어획량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가격마저 천정부지라 더 찾는 사람이 없단다. 법성포 일대를 굽어보는 빼어난 자리가 포구로 흘러드는 와탄천 물길을 끼고 있는 대덕산 정상에 있다. 산에 오르면 둥글게 휘어진 물길과 함께 법성포 일대의 전경을 굽어볼 수 있다. 말이 산이지 등산로를 따라 산책하듯 20분 정도만 걸으면 정상이다. 해발고도는 240m에 불과하지만, 조망은 거침없다. 정상의 정자 아래 서면 포구 건너편으로 가을걷이가 끝난 드넓은 논, 백수해안도로로 이어지는 영광대교, 법성포 일대의 마을들이 죄다 발아래에 있다. 이곳에 오르거든 조기 파시가 서던 시절 법성포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칠산바다의 조기잡이 배들의 불빛이 꽃처럼 빛나고, 세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한양으로 떠나고, 법성포 일대가 객지의 상인들로 북적이던 때의 모습을….
# 문득 뒤돌아보는 시간이 있는 곳…고택 영광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집안의 전통이 스며있는 제법 운치 있는 고택이 몇 곳 있다. 저물어 가는 것들, 그래서 쓸쓸해 보이는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중 하나가 군남면 동간리의 연안 김씨 종가다. 고종 때 지어진 고택은 바깥 대문채가 인상적이다. 대문의 네 귀에다 다시 기둥을 놓고 ‘삼효문’을 올려 독특한 형태의 2층 문을 만들어 세웠다. 삼효문은 연안 김씨 가문에서 효성이 지극한 3명을 기리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지어졌다. 조선왕조의 기운이 기울면서 지방의 토호세력들이 기승을 부리던 때 지어진 것이라, 집 규모가 154칸이나 되고 궁궐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용 문양을 삼효문에 새기기도 했으며 안채에는 왕가에서나 허락되던 5계단을 놓기도 했다. 안채는 기거의 공간이라 닫아두었지만, 관람객들을 위해 대문을 활짝 열어 연못과 잘 가꾼 마당이 있는 사랑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영광읍 입석리에는 영월 신씨 종가가 있다. 이곳은 집보다 오래 이어온 정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종가는 자그마치 500여 년 동안이나 불씨를 이어왔다. 부엌을 지켰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돼서 다시 며느리에게 전해준 불씨가 꺼지지 않고 그만한 시간을 지나왔다. 지금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 신호준(84) 씨의 19대조가 둘째 아들에게 불씨가 담긴 화로를 전해주며 “항상 불을 중히 간직하라”고 당부했고, 자손들이 이 당부를 500년 동안 지켜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전쟁을 거치면서 엄동의 섣달이나 오뉴월 삼복에도 꺼지지 않았던 불씨는 1990년에 “이제 그만 꺼라”는 종손 신 씨의 결단으로 꺼지고 말았다. 불씨를 그만 끄고 만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신 씨는 “하나도 아쉬울 거 없다”며 “세상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사는 것이 바른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 씨는 불을 꺼뜨리기 전에 불씨를 담아둔 화로를 보여주겠다며 놋쇠 화로 다섯 개를 광에서 꺼내놓고는 가을 햇살이 노랗게 반짝이는 툇마루에 앉아서 감회가 새로운 듯 오래 만지작거렸다. 어느덧 저물어서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저물어가는 것과 쓸모를 잃은 것 그리고 쓸쓸한 것들이 모두 다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지금은 가을이다. ■ 가는길 묵을곳 먹을것 법성포에 갔다면 굴비 맛을 보는 건 필수다. 법성포 식당들은 대부분 굴비와 함께 한정식을 차려 내는 ‘굴비정식’을 낸다. 굴비정식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전통의 강자’는 일번지 식당(061-356-2268)이다. 이즈음 가장 평판이 좋은 곳은 다랑가지식당(061-356-5588)과 갈매기식당(061-356-7991)이다. 007식당(061-356-2216)이나 명가어찬(061-356-5353)도 알려진 맛집이다. 만나식당(061-356-2377)은 조기구이보다 자작하게 조기매운탕을 끓여내는 매운탕으로 손님들을 불러모으는 집이다. 영광읍의 해촌(061-353-8897)은 고사리 등 나물을 넣고 칼칼하게 끓여내는 굴비조림으로 이름났다. 녹차에 만 밥에다 마른 굴비를 내는 마른굴비녹차얼음밥도 인기 메뉴다. 불갑사 입구의 할매집(061-352-7844)은 보리 비빔밥을 내면서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을 풍성하게 내놓아 지역주민들도 식사시간이면 줄을 서는 집이다. 영광을 간 김에 굴비를 구입하겠다면 법성포 초입의 대형 매장보다는 되도록 포구 가까운 쪽의 작은 점포에서 사는 게 가격 면에서 낫다. 조기 어획량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어 가격이 좀 비싼 편이다. 한 두름에 5만 원은 줘야 그나마 먹을만한 걸 고를 수 있다. 굴비만큼은 아니지만 영광의 특산품으로 모싯잎 송편도 이름났다. 농약을 쓰지 않고 재배한 모싯잎을 넣어 빚은 송편인데, 크기가 보통 송편의 2배가 넘어 옛 농가에서는 ‘머슴 송편’으로도 불렸다. 송편 속에는 일반 송편과 달리 동부를 통째로 넣어 식감과 맛이 독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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