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이 물었다 “그대는 지금 천국에 사오?”라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려보내기 위해, 지상에 천국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 거기가 지금의 한국이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은 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이 땅을 신들이 사는 곳이란 의미에서 신시(神市)라고 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만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만족하며 사는 나라가 천국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산다. 우리나라는 지상에 건설한 천국이었다. 그 천국에 살았던 경험이 아직도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인은 늘 천국을 꿈꾼다. 그럴수록 혼란한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마음은 안타깝다. 안타까우면 안타까울수록 천국 건설을 향한 꿈은 더욱 강렬해진다.
천국 건설의 꿈은 비단 단군신화, 국조신화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불교는 불국토(佛國土) 건설을 꿈꾸었고, 한국의 유교는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상사회의 건설을 향한 강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조광조 선생이 있었다. 유학에서 이상사회는 그 사회에 사는 사람이 모두 군자(君子)가 될 때 찾아온다. 그런 사회를 건설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미 군자가 된 사람이 나서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왕이고 신하다. 그러므로 왕과 신하는 반드시 군자여야 하고 성인이어야 한다. 정암 선생은 군자이고 성인이다. 그러므로 그가 성스러운 임금을 만나기만 하면 이상사회 건설은 가능했다. 정암 선생은 중종을 살펴보았다. 당장은 성인이 아니더라도 성인의 충분한 자질이 엿보였다. 때는 왔다. 지금의 임금을 성인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정암 선생은 중종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공부시켰다. 임금이 공부하는 공간을 경연(經筵)이라고 한다. 정암 선생은 경연에서 열심히 임금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병폐를 제거하고 제도를 고쳐나갔다. 그런 정암 선생의 노력은 남곤, 심정 같은 소인배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고 선생은 희생되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정암 조광조와 기묘사화
이를 지켜보아야 했던 정암 선생의 제자 김인후 선생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던 하서 선생에게도 기회가 왔다. 하서 선생은 중종의 아들 인종의 스승으로서 인종이 세자였을 때부터 가르쳤다. 인종은 너무나 훌륭했다. 성군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서 선생은 스승 정암 선생이 꾸었던 천국 건설의 꿈을 다시 불태웠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었다. 인종이 독살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30세로 즉위한 인종은 즉위 8개월 뒤 삶을 거뒀다. 하서 선생이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었다. 야사(野史)는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건넨 오색떡을 먹은 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야사뿐 아니라 당시 사림(士林)도 인종의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서 선생에게도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그는 모든 꿈을 접고 고향 장성으로 내려갔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죽고 자신의 아들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다.
장성에 내려온 하서 선생은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 해마다 인종의 기일이 되면 뒷산으로 올라가 통곡을 했다. 아무리 통곡을 해도 이룰 수 없는 꿈.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다. 하서 선생은 생각했다.
“좁은 공간에서라도 천국을 건설하자. 그러면 그것이 불씨가 되어 온 세상에 천국이 찾아오겠지.”
때마침 친구이자 사돈인 양산보(梁山甫)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서 선생은 양산보가 가진 땅에 천국을 건설하기로 했다. 양산보 역시 정암 선생의 제자였다. 현재 전남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은 그렇게 하서 선생과 양산보 등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맑을 소(瀟), 깨끗할 쇄(灑), 동산 원(園). 인품이 맑고 깨끗해 속기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산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란 뜻이다.
세상살이가 심란하면 반드시 찾아보는 곳 중의 하나가 소쇄원이다. 천사들의 천국에서 가장 먼저 반겨주는 이는 대나무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대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다. 그런 대나무 숲을 걷노라니 내 마음도 쭉쭉 펴지기 시작한다. 내 마음은 세파에 시달려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일이 뒤틀릴 때도 꼬였고, 남에게 무시를 당할 때도 꼬였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을 볼 때도 꼬였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볼 때도 꼬였다. 그렇게 꼬이기만 하던 나의 마음이 쭉쭉 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그 바람소리는 막혀 있던 내 가슴속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간다. 심신이 상쾌해진다. 선경(仙境)으로 들어서는 나를 느낀다.
봉황을 기다리는 집
대나무 숲을 지나자 정자가 나온다. 대봉대(待鳳臺)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기다릴 대(待), 봉황새 봉(鳳), 집 대(臺). 봉황을 기다리는 집이다. 글 시작 부분에 찍는 두인(頭印)도, 끝 부분에 찍는 낙관(落款)도 없다. 누가 썼는지 알 수가 없다.
현판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고 싶어 한다. 얼마나 값이 나가는 작가의 글씨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세속인의 관심사일 뿐이다.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누가 썼더라도 모두 천국의 사람이 쓴 글씨다. 고려 자기에도 작가의 이름이 없고 조선 백자에도 작가의 이름이 없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는 천국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세속에서는 차별이 심하다. 장미꽃은 값이 비싸고 비싼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오랑캐꽃은 값이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랑캐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은 장미꽃 백만 송이를 합쳐도 흉내 낼 수 없다. 오랑캐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태양이 빛났고, 비도 내렸다. 사계절이 순환했고, 소쩍새도 울었다. 우주가 동원되어 겨우 오랑캐꽃 한 송이를 피운 것이다. 오랑캐꽃 한 송이는 우주의 주인공이다. 오랑캐꽃뿐만이 아니다. 나도 우주의 주인공이다. 우주의 주인공, 나는 봉황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다 봉황이다. 대봉대에 이르러 필자는 그것을 깨달았다. 대봉대는 바로 나와 우리를 기다리는 집이다.
봉황은 주인공이다. 봉황은 고고하다. 그 봉황이 잠깐 한눈을 팔았다. 욕심에 눈이 멀어 양심도 팔았다. 자기가 봉황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고, 아무도 그를 봉황이라 불러주지도 않는다. 내가 그랬다.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고, 나를 주인공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런 나를 대봉대는 봉황으로 맞아주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나의 본래 모습을 대봉대가 알아주었다. 남이 찾아준 나의 본래 모습, 그 본래 모습을 보고 나는 나의 본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되살아나는 것은 부활이다. 나는 부활했다. 대봉대에 이르러 나는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주인공으로 되살아난 나에게 소쇄원의 주인은 안내자를 보낸다. 그것이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대접하는 방식이다. 나를 맞이하는 안내자, 바로 담장이다. 담장이란 들어오지 말라고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소쇄원의 담장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를 안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리로 들어오라고 담이 나에게 손짓을 한다. 소쇄원 담은 유달리 정겹다. 담에 애양단(愛陽檀)이란 글자가 보인다. ‘햇빛을 사랑하는 단’이란 뜻이다. 예전에 애양단이 있었던 자리일 것이다. 애양단 앞에 서니 마음과 몸이 따뜻해진다. 애양단이 속삭인다.
“험한 세상 사시느라 고생이 많았죠? 내가 차가운 바람을 다 막아줄 테니, 이제는 내 품에서 따뜻하게 쉬세요.”
애양단을 지나자 오곡문(五曲門)이 나온다. 예전에는 담장 밖으로 오가는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숫자는 1~9까지뿐이다. 모든 수는 1에서 9까지의 수로만 구성된다. 이 아홉 가지 숫자 중에서 5가 중간이다. 1~4는 이쪽이고, 6~9는 저쪽이다. 1~4는 차안(此岸)이고, 6~9는 피안(彼岸)이다. 유명한 산수화는 대부분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차안을 표시하는 이쪽의 산수가 있고, 피안을 의미하는 저쪽의 산수가 있다. 그 가운데는 구름 골짜기가 가로질러 있다. 차안이 사바세계라면, 피안은 극락이다. 차안이 꿈같은 허망한 세상이라면, 피안은 영원히 존재하는 참된 세상이다. 참된 세상으로 가려면 구름 골짜기를 건너야 한다. 구름 골짜기는 피안으로 가는 건널목이다. 여기 쓰여 있는 5라는 숫자가 바로 그 건널목이다.
차안과 피안의 건널목 오곡문
오곡문 아래로 개울물이 흐른다. 이 개울물은 그냥 흐르는 개울물이 아니다. 천국으로 건너는 건널목이다. 개울물을 건너가야 완전한 천국에 이른다. 이 개울물을 건너면 나는 천국에 도달한다. 천국은 하늘 위에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땅은 원래부터 천국이었다. 하느님이 점지해 당신의 아들을 내려보낸 그런 땅이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가 천국이고, 자연 그 자체가 천국이다. 그런 천국을 사람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훼손했다. 훼손만 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천국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하면 그대로 천국이다. 소쇄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어떤 땅 하나도 손댄 것이 없다. 언덕을 깎은 곳도 없다. 태고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언덕이 있고 물이 흐른다.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소리 들린다. 비 갠 하늘에 밝은 달이 떠오른다. 제월당(霽月堂)이다. 비 갤 제(霽), 달 월(月), 집 당(堂). 비 갠 하늘에 떠오르는 달 같은 집이다. 그 달을 바라보는 집이기도 하다. 사람이 지었어도 사람이 지은 집 같지가 않다. 집을 짓느라 땅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집이 있어도 주변의 자연과 어긋나지 않는다. 자연 위에 얹혀 있는 자연의 연장이다. 제월당은 주인이 머물고 있는 집이다. 제월당에 이르러 비로소 천국의 주인을 만난다. 비 갠 뒤의 밝은 달을 본 적이 있다. 한 점의 티끌도 없이 투명하다. 제월당에 앉아 있는 주인의 마음 또한 그렇다. 천국의 주인은 나를 개울가에 있는 광풍각(光風閣)으로 안내했다. 빛 광(光), 바람 풍(風), 집 각(閣). 맑은 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은 집이고, 그런 바람을 맞이하는 집이기도 하다.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고, 비 갠 뒤에 떠오르는 밝은 달이다. 북송시대 시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은 주돈이(周敦·#54730;)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의 인품은 너무나 고상했다.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해 마치 맑은 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고, 비 갠 뒤에 떠오르는 밝은 달 같다.”
주돈이는 중국 북송 시대의 사람으로 호는 염계(濂溪)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저술해 주자학의 길을 열었다. 그는 마당의 잡초를 제거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을 사랑한 큰 철학자였다. 그가 연꽃을 사랑해 지은 애련설(愛蓮說)은 특히 유명하다. 애련설에서 주돈이는 “연꽃의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고 했다. 경복궁에 있는 향원정이란 정자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황정견은 광풍제월이라 했지, 제월광풍이라 하지 않았다. 제월(霽月)보다 광풍(光風)을 우선한 것이다. 소쇄원의 천사는 손님이 머무는 곳을 광풍각이라 하고, 자신이 머무는 곳을 제월당이라 했다. 손님을 우대하는 마음이 읽힌다.
제월당에서 보면 광풍각이 눈에 들어온다. 제월당과 광풍각은 통해 있다. 주인과 손님이 통해 있고, 나와 네가 통해 있다. 모두가 하나로 통해 있는 것, 그것은 천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는 서로 통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나머지를 담으로 막아놓았다. 담은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통해 있어도 가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 때로는 윗옷을 벗어던진 채 바람을 쐬고 싶기도 하고, 벌러덩 드러누운 채 잠을 청해보고도 싶다. 제월당의 주인은 그런 손님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주인은 담을 쳤다. 담을 쳐도 높이 치지는 않는다. 담을 높이 치는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다. 그러니 담은 낮을 수밖에 없다. 담이 낮으니 담 옆을 지나는 사람이 엿볼 수도 있다. 그러면 손님들은 또 불편해진다. 마음을 푹 놓고 쉴 수 있어야 천국이다. 조금이라도 긴장이 남아 있으면 천국이 아니다.
주인은 거리를 두고 또 하나의 담을 쳤다. 아무리 키가 큰 사람도 엿볼 수 없도록. 이제 손님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음 푹 놓고 쉴 수가 있다. 그런데도 아직 긴장되는 때가 있다. 주인에게 밥을 얻어먹을 때는 왠지 미안하고 불편하다. 오랫동안 머물 때는 더욱 그렇다. 제월당의 주인은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래서 주인은 담과 담 사이의 공간에 음식을 갖다놓기만 한다. 손님을 생각하는 주인의 마음이 이 정도다.
광풍각에는 사방에 마루가 있고 속에 온돌방이 있다. 마루에 앉아 있다가 추워지면 언제라도 들어와 몸을 데우라는 뜻이다. 광풍각에 올라앉았다. 눈앞에 흐르는 개울물이 보인다. 개울물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옛날에 공자는 냇가에서 탄식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이 물처럼 흐른다. 조금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흘러간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저 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계속 흘러간다. 흐르고 흐르다가 도달하는 곳은 죽음이라는 바다다. 그 바다에 도달하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차이가 없다.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똑똑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남과 싸워 이길 궁리만 한다. 자기가 남보다 똑똑하다고 뽐내기에 바쁘다. 바다에 들어가는 일, 그것은 조만간 다가온다.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공자는 다음과 같이 깨우친 바 있다.
“모든 것은 물처럼 흐른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몰아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 속으로 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
참으로 그렇다. 사람들은 조금도 쉬지 않고 죽음의 바다로 달려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피할 줄 모른다.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은 조만간 다가올 죽음의 바다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남과 싸워서 이길 궁리를 하기보다는 죽음의 바다로 들어가지 않을 방법을 찾는다.
죽음의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 길, 그것은 영원한 삶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다. 학문을 하는 궁극적 목표는 바로 그 길을 찾는 것이다.
공자는 “아침에 진리를 들어서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아침에 진리를 알아 영원히 사는 길에 들어서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저녁에 죽는 것은 몸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다. 지상의 대나무들이 모두 지하에서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듯, 모든 사람은 한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지하의 뿌리가 보이지 않듯이, 그 한마음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잊어버리기 쉽다. 사람이 만약 그 마음을 잊어버리면 육체적 존재로 전락해 몸과 함께 늙어가고 몸과 함께 죽어가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 한마음을 도로 찾는다. 그것이 학문의 길이다. 맹자는 말했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마음을 도로 찾는 것일 뿐이다.”
잃어버린 마음이란 한마음을 말한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은 사람은 한마음으로 산다.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만큼 고귀하다. 그의 삶은 영원하다. 지금 눈앞을 흐르는 저 물도 그러하다. 소나기가 내려 콸콸 흐르는 물은 잠깐 뒤에 말라버리지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물은 졸졸 흐르더라도 결국 먼 바다에 도달한다.
나의 소쇄원 답사기, ‘천국체험’
물을 사랑하고, 물을 노래한 철인 중에 노자를 빼놓을 수 없다. 노자는 물을 보면서 진리의 모습을 읊었다. ‘노자’ 8장에 나온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공을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므로 도에 가깝다. 낮은 땅에 거처하면서 마음은 심연으로 향한다. 남과 함께 있을 때는 늘 한마음이 되고, 말을 하면 정말 미덥다. 다스리면 잘 다스려지고, 일을 하면 큰 능력을 발휘한다. 언제나 때와 장소에 알맞게 움직이므로 어긋나는 일이 없다. 애당초 남과 다투지 않으니 허물이 없다.”
물은 ‘나’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이 없다. 아집이 없으므로 언제나 남과 하나가 된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게 되어주고, 네모난 그릇에 넣으면 네모가 되어준다. 물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평평한 곳에서는 천천히 가고, 가파른 곳에서는 서둘러 간다. 둑이 있으면 고였다가 넘어가고, 웅덩이가 있으면 채운 뒤에 간다. 돌이 가로막으면 돌아서 가고, 낭떠러지에서는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그저 자연에 맡길 뿐,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평평한 곳에서는 잔잔히 흐르고, 돌에 부딪히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낭떠러지에서는 폭포의 소리를 낸다. 한 번도 거짓 소리를 낸 적이 없다. 물은 만물을 먹여 살리면서도 공 다툼을 하지 않는다. 진리의 모습 바로 그 자체다.
소쇄원 광풍각에서 바라보는 물은 특별한 물이다. 공자도 만나고 맹자도 만나며 노자도 만나는 그런 물이다. 물을 보며 ‘나’를 버리니, 내가 물이 되고 물이 내가 된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나다. 나는 하늘이 되고 우주가 된다. 바로 ‘천국체험’이다. 천국을 체험하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된다. 돼지의 눈에는 부처님도 돼지로 보이지만, 부처님의 눈에는 돼지도 부처님으로 보인다. 돼지도 부처님으로 보이는 세상이 천국이다. 천국체험은 그만큼 중요하다. 소쇄원에서의 천국체험은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는 체험이다. 천국을 체험하고 난 뒤에 소쇄원을 나오는 것은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속세가 이미 천국으로 바뀌었다.
소쇄원을 나왔어도 가슴에 꽉 차 있는 행복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소쇄원 답사기는 천국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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