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음식과 藥의 道를 말하다_59

醉月 2017. 11. 2. 12:05

생강나무

병이 깊고 위급해도 희망 버리지 말고 토종약초에 입문하라


‘천하의 명약’ 생강나무로 냉증과 호흡곤란을 고친 사연

생강나무는 이른 봄철 꽃이 먼저 피는 나무 중 하나다. 산수유꽃을 닮은 노란 꽃이 개나리꽃보다 먼저 피어 봄을 알린다. 가지를 꺾으면 생강 비슷한 내음이 나는데, 생강처럼 톡 쏘지 않고 은은하면서도 산뜻한 냄새다.

우리나라 산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생강나무는 알고 보면 천하의 명약이다. 산 속에서 다리를 삐거나 넘어져서 상처를 입었을 때 구급약으로 귀하게 쓸 수 있다. 부산에 살고 있는 김○○님(57)이 생강나무로 자신의 질병을 고친 사례를 여기 소개한다.


100m를 두 번 쉬어서 가다 자살 결심

나는 몇 해 전부터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 차츰 더 악화되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하루에도 20여 차례씩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심한 감기를 앓을 때처럼 가슴속이 따갑고 답답하다가 정신이 아뜩해져서 털썩 쓰러지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멀리 나가는 것을 삼가게 되고 자동차 운전 중에 이런 경우를 당하면 큰 사고를 낼 것 같아서 오랫동안 운전하지 않았더니 나중에는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늘 누워서만 지내되 반듯하게 누워 있으면 숨쉬기가 더 곤란해지므로 이불과 베개를 높이 쌓아놓고 거기에 기대어 앉아서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집에서 100m가량 떨어져 있는 체육공원까지 10분씩 두 번이나 쉬어서 가야 했고, 공원에 가서도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운동하는 것을 멀찌감치 구경만 해야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내가 너무 심약하고 소심해서 병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운동장을 한 바퀴 반쯤 걸어보았더니 갑자기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얼른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고 한참 서 있다가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동안 몸살을 앓았다.

참으로 기 막히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내 몸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내 한 평생이 종말을 맞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서글프기 이를 데 없었다. 마지막 소원은 가족한테 폐를 끼치지 말고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까지 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를 골라서 가족이 장례를 치르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때를 택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육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어 버리고 자유로운 세계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동안 집사람의 권유에 못 이겨 종합건강진단을 받아 보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집 근처 병원에서도 호흡곤란의 원인을 알 수 없고, 아무 치료법도 없다고 하며, 탈수 증상을 없애기 위해 영양제 주사를 맞으라고 권할 뿐이었다.

혹시 코에 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종합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와 상의해 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호흡곤란 증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마침 약침 시술을 용하게 하는 한의원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큰 맘 먹고 멀리까지 가서 시술을 받아 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물론 한 번의 시술로 효과를 볼 수 없겠지만, 차 안에서 심한 멀미를 하는 바람에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앉아서만 세월을 보내며 무료함을 달래려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국토종약초연구학회 회장인 최진규 선생이 토종약초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보았다.

토종약초의 효능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듣고 시내 대형서점까지 택시를 타고 나가서 <약이 되는 우리 풀 꽃 나무>라는 책을 구입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밤낮 가리지 않고 읽었다.

책을 읽고 보니 꼭 최진규 선생을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드렸더니 여직원이 두 달 반이 지나야 뵐 수 있다고 했다. 그 두 달 반의 세월은 생과 사의 갈림길인 것 같았다.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최진규 선생의 사무실 위치를 지도책을 뒤적여 그림을 그리고 이용할 교통편과 경비, 체력 등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나의 현재 몸 상태를 적어 보았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내 몸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가다가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혹 기차 안에서 호흡곤란으로 죽을지도 모르므로 유서를 써서 연락처와 약간의 돈과 함께 윗주머니에 넣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다행히 한때 서울 도심에서 살아본 적이 있어서 사무실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마침 전국에 폭설이 내려 내가 서울에 도착한 뒤 전국의 곳곳에 교통이 두절되어 최진규 선생과 면담하기로 약속한 분들이 대부분 오지 못했다. 덕분에  최진규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면담한 뒤에 최 선생이 추천해 준 약재 중에서 생강나무를 달여서 먹어 보기로 했다.

생강나무를 달여서 먹었더니 등 뒤가 후끈해지면서 다음에는 위장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등 뒤가 싸늘해지면 영락없이 감기가 들어 애를 먹곤 했는데, 등 뒤가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았다. 위장이 따뜻해지니 속이 편안해지고 마음도 한결 느긋해졌다.

그러나 호흡곤란 증세는 호전되는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약초도 같이 달여 먹을 걸’ 하고 후회도 되었다. 그러면서도 생강나무의 약효를 실험해 보는 계기로 삼자 하고 열심히 달여서 마셨다.

생강나무의 어린잎을 작설차라고 한다.

생강나무 달여 마신 지 20일 만에 호전

생강나무를 달여 마신 지 20일째였다. 면도와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느라 잠시 벗어 두었던 마스크를 깜박 잊어버리고 쓰지 않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이 마스크가 그동안 숨을 쉴 때 온도와 습도를 적당하게 조절해 주는 까닭에 지금껏 생명을 지켜 주었다. 사시사철 세수하고 식사 할 때 말고는 잠시도 벗어 본 적 없이 늘 착용하고 있어서 마치 내 몸의 일부와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 뒤로 마스크를 다시는 쓰지 않아도 되었다.

며칠 뒤 한국토종약초연구학회에서 주관하는 약초관찰을 하러 선운산에 오르는 대열에 합류했다. 만약을 걱정해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나로서는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만큼이나 큰 모험이었다. 몇몇 회원들이 초면에 마스크를 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았으나 속으로 ‘선배님 제발 좀 이해해 주십시오’ 하고 열심히 빌었다.

3월 중순이었지만 잔설이 남아 있어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나는 낙오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걸었다. 1박2일 동안 몇십 리를 걸었더니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더없이 상쾌했다. 100m를 두 번씩 쉬어 가야 하던 내 몸으로 선운산 꼭대기를 오른 것도 대견스러웠고,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몸에 탈이 없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호흡곤란, 위장과 손발의 냉증, 어지럼증, 기침, 이명증, 알레르기 증상 등이 거의 대부분 없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생강나무를 한 달 동안 달여 먹고 그 이상은 복용하지 않았다. 토종약초의 효과를 믿지 않던 내 매제도 효력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누나와 자형도 내가 먹던 생강나무를 달여 먹고는 신통하다고 할 만큼 큰 효과를 보았다.

그 뒤에 꽤 여러 사람들한테 토종약초를 권해 보았는데, 대부분 효과가 있어서 이제 온 주위 사람과 가족, 친지들이 토종약초 신봉자가 되어 나를 명의로 치켜세우고 있다.

최진규 선생은 “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약이 있다” 했고, 스스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온갖 질병을 토종약초로 고치는 모범을 보였으며, 그 방법과 길을 제시해 주었다.

아무쪼록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은 아무리 병이 깊고 위급하다고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토종약초에 입문해 보기를 권한다. 현재 나는 아침 일찍 두세 번 재채기를 하는 것 말고는 몸에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걷거나 뛰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었으며 내 몸이 이처럼 회복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