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주’ 싹 자르는 투수 혹사 잔혹사
“스트라이크, 아웃!”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포수의 글러브에 내리 꽂히자 주심이 큰 소리로 외친다. 배트 한번 휘둘러보지 못한 타자는 고개를 떨구고, 투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한다. 2사만루 위기의 순간을 오로지 공의 위력으로 돌파해 낸 투수의 뚝심에 관중은 기립박수를 보낸다.
야구의 주인공은 투수다. 그래서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한다. 선수가 짊어진 경기의 ‘무게’를 봐도 투수는 독보적이다. 선발 투수가 한 경기에 던지는 공은 100개를 훌쩍 넘곤 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아무리 선수라지만, 이런 혹독한 경기를 과연 몸이 버텨낼까.
어깨와 팔꿈치 부상은 야구 선수의 ‘직업병’
“야구선수는 ‘괴물’이에요.”
이승준 양산부산대병원 교수가 말했다.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짬짬이 스포츠 선수, 특히 야구 선수들의 어깨와 팔꿈치를 진단하고 있다.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박진영 건국대 의대 견주관절센터장(정형외과 교수)과 함께 여러 가지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두산 베어스를 응원하는 열렬한 야구 팬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공 속도가 시속 90~100km 정도 나오면 잘 던지는 거예요. 그런데 선수들은 시속 140~150km까지 나오는 공을 막 던지죠. (상식적으로는) 회전근개(어깨와 팔을 연결하는 근육. 공을 던지는 데 관여함)가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요. 아무리 봐도 괴물이에요.”
이 교수의 말대로, 모든 투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던질 수 없는 공을 던지는 괴물이다. 그것도 많으면 100여 개씩 던진다. 선발투수는 이런 식으로 한 시즌에 스무 번 이상 등판을 한다. 아마 야구도 예외가 없다. 박 교수와 이 교수, 김용일 LG 트윈스 코치가 지난 2013년 국내 프로구단 8개팀의 신인 투수 41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프로 구단 입단 전 이들은 한 해 평균 900개 이상의 공을 던졌다. 가장 많이 던진 선수는 2000개에 이르렀다. 보통 사람이 평생 한 번 던져보지도 못할 강력한 공을 한 해에만 수천 개 던진 것이다. 그야말로 ‘괴물’이다.
하지만 괴물도 천하무적은 아니다. 선수도 인간이기에, 무리한 운동을 반복해서 하는 데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많은 투수들이 투구 동작에서 오는 어깨와 팔꿈치 부상으로 고통 받고 있다. 대부분이 만성적인 부상이다. 조사 자료를 보면, 신인 투수 41명 중 어깨나 팔꿈치에 통증이나 수술 경험이 없는 선수는 단 5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부분(88%)은 크고 작은 부상과 치료 경력이 있었다. 평균 나이가 22세인 프로야구 ‘신인’ 투수인데 말이다.
투수의 어깨 부상은 잘못된 자세와 균형의 무너짐 즉 밸런스 붕괴 탓이 크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의 자세를 사진으로 보면 천차만별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왼손투수인 K 선수는 공을 던질 때 어깨가 기울고 머리나 팔이 바깥쪽으로 심하게 뻗어 나간다. 이 자세는 어깨 부상을 불러오는 위험한 자세다. 기울어진 어깨와 지나치게 기운 상체는 상체의 힘에 의존해 던진다는 뜻이고, 이는 ‘절반 이상을 하체의 힘으로 던져야 한다’는 야구계의 불문율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박진영 교수는 많은 경우 하체가 약한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봤다.
“하체가 약하면 몸이 기울어지면서 엉덩이가 낮아져요. 그럼 투수는 (낮아진 높이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팔을 치켜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세가 무너지죠.”
유연성도 문제다. 유연해야 하체의 힘을 몸통으로 잘 전달할 수 있고, 그래야 공에 몸의 회전력을 더할 수 있다. 몸이 유연하지 못하면 투수는 어깨와 팔 힘에 의존하다 보니 무리가 가게 된다.
투수에게 자주 나타나는 어깨 부상은 두 가지다. 먼저 공을 던지는 데 관여하는 회전근개에 염증이 생기거나 심하면 파열되는 경우다. 이 교수는 “회전근개 부분 파열은 대부분의 투수들에게 있을 정도로 흔한 부상”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어깨 부상으로는 ‘상관절와순전후방병면(SLAP, 슬랩)’이라는 연골 파열 증상이다. 어깨 관절에서 팔 뼈가 만나는 부분의 연골(와순)이 떨어지는 증세다. 누가 팔을 뒤에서 당기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다. 투수뿐 아니라 검도나 배드민턴 선수 등 팔을 어깨 위로 올리는 운동을 하는 선수에게 많이 나타난다.
어깨 부상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전구 증상이 있다. 어깨 뼈 가운데 날개뼈(견갑골)라는 뼈가 있다. 차렷 자세를 한 사람을 뒤에서 보면 어깨 아래에 양쪽으로 툭 튀어나온 뼈다. 그런데 투수나 양궁선수 등 한쪽 팔을 집중적으로 많이 쓰는 선수를 보면 이 뼈 한쪽이 어긋나 있다. 만세 자세를 취해보거나 CT를 찍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박 교수는 황정택 한림대 의대 교수 등과 공동으로 이 증세를 측정을 통해 진단하고 병리까지 밝히는 연구를 처음으로 해, 그 결과를 지난해 ‘견주관절 외과의학 저널’에 발표하기도 했다.
어깨 부상은 수술과 재활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재활을 통해 우선 치료할 것을 권한다. 박 교수는 “재활하면 75% 이상 안정적으로 복귀를 한다”고 말했다. 슬랩으로 고생하던 K 선수와 국가대표 양궁선수 O 등이 재활을 통해 날개뼈를 바로잡고 좋은 성적을 냈다.
인류의 팔은 던지기 용이 아니다
류현진 선수의 투구 폼은 의사가 보기에도 완벽하다. 머리와 몸통이 기울어지지 않았고, 공을 뿌리는 팔도 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자세와 균형이 완벽하게 맞는 좋은 투구 자세다. 게다가 유연성도 뛰어나다. 이 교수는 “이렇게 (자세와 기술이) 완성된 투수라면 회전근개 파열이나 슬랩 등 어깨뼈에는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선수도 혹사당하면 피할 수 없는 부상이 있다. 팔꿈치다. 인간의 팔꿈치는 공을 던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투수는 반복적으로 강한 공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투수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부상이다. 류현진 선수도 동산고 시절, 최근 일본으로 진출한 오승환 선수도 고등학교 및 대학교 시절 팔꿈치 부상을 경험했다.
투수는 팔과 어깨가 여러 방향으로 유연하게 휜다는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공을 던진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극단적으로 비틀고 다리까지 뻗으며 공을 가속한다(위 ‘투구 동작의 역학과 부상 위험’ 참조). 이 동작을 통해 투수는 하체부터 허리, 어깨, 팔에 이르는 신체 각 부위의 힘을 잘 운용할 수 있고, 공은 손 끝을 떠날 때 인간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낸다.
하지만 이 과정이 문제다. 박 교수는 “팔꿈치는 굽히고 펴는 동작만 (주로) 해야 하는 관절인데 투구 동작에는 ‘회전’이라는 다른 방향의 운동이 더해진다”며 “팔이 안팎으로 휘는 동작을 막는 인대에 무리가 간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팔꿈치 주변에는 팔이 좌우로 꺾이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인대가 있다. 팔 안쪽에 있는 게 내측측부인대, 바깥에 있는 게 외측측부인대다. 이들 인대가 없다면 팔은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흐느적거릴 것이다.
투구 동작을 할 때는 팔이 바깥으로 주로 휜다. 이 때는 내측측부인대와 주변 근육이 관절을 지탱한다. 근육이 더 주요한 역할을 하는데 경기 초기에는 근육이 아직 피로하지 않아 인대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투구 수가 50~70개를 넘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근육에 피로가 쌓이고, 자연히 근육 대신 인대가 뼈를 지탱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인대가 끊어진다.
이런 팔꿈치 부상을 입었을 때엔 인공적으로 끊어진 인대를 재건해 주는 인대접합수술(일명 토미 존 수술)을 해야 한다. 손목에 있는 장장근이라는 근육을 잘라 팔꿈치 인대를 만들어준다. 국내에서는 박 교수가 1년에 약 50명 정도 시술하는 것을 포함해, 100명 미만이 시술을 받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교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팔꿈치 부상이 더 잘 발생하는 구질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포크볼이 대표적이다. 검지와 중지를 넓게 벌려 공을 잡아 공의 회전을 줄인 변화구로, 공이 느리게 날아가다가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진다. 이 교수는 “투수가 이 변화구를 구사할 때 공이 빠지면 팔꿈치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말했다. 몇 년 전 국내 최고의 포크볼 투수로 각광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C 선수가 이듬해부터 성적이 떨어진 사례가 있는데, 팔꿈치에 무리가 간 게 아닌가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이 선수는 실제로 이듬해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
구질에 따라 부상 위험이 다르다는 주장은 아직 상반된 견해가 많다.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각종 구질과 부상 위험에 대한 연구 자료는 꽤 축적된 상태다. 이를 훈련 및 재활에 적용하면 조금이라도 부상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INSIDE 참고).
‘한계투구수’ 논란, 부상 줄어들까
투수에게서 팔꿈치, 어깨 부상을 막을 길은 없을까. 박 교수와 이 교수는 이구동성으로 ‘투구 수 제한’을 주장한다. 피로한 상태에서 던져 어깨를 다치거나, 반복된 투구로 팔꿈치가 망가지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청소년기에 엄격하게 투구수를 규제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미국스포츠의학연구소(ASMI)가 청소년 투수들의 투구수 제한을 권장하고 있는데, 나이와 휴식일에 따라 꽤 상세하다(오른쪽 표 참조). 2012년 미국스포츠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을 보면, 1년 중 최소 2~3개월은 던지는 행위 자체를 아예 금지할 것도 권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미국스포츠의학연구소는 변화구를 배우는 나이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제시하고 있다. 패스트볼(흔히 직구라고 부르는 공)은 8~10세 사이로 가장 먼저 배울 수 있고, 이후 체인지업, 커브볼, 너클볼, 슬라이더를 차례로 배우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 교수가 부상 위험이 크다고 언급한 포크볼은 16~18세로 스크루볼을 제외하면 가장 늦게 배우게 돼 있다. 기본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부상을 당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박 교수와 이 교수, 김 코치가 조사한 2013년 신인투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프로야구 투수들은 이런 권고보다 많은 양의 공을 던지고, 변화구 역시 조금 이른 시기에 시작하고 있다. 동계훈련이 있어 공을 놓고 쉬는 기간도 부족하다.
다행히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 2월 말, 문화체육관광부는 고교야구에서 경기당 투구수를 130개 이하로 제한하기로 했다. 한계투구 후에는 의무적으로 3일간 경기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아직 미국 기준보다는 가혹하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16세가 경기당 91개, 17~18가 106개까지만 던지도록 제안하고 있다. 장기적인 연구도 아직은 국내에서는 부족하다. 황승식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마추어와 프로 시절 등 여러 해 동안의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장기 연구를 하면 구단과 선수 모두에게 도움이 될 연구가 가능할 텐데, 아직은 구단을 통해 자료를 얻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투구수 제한에 대해 야구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허구연 MBC 야구 해설위원(KSN 대표이사)은 제한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허 위원은 전화 인터뷰에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며 “한계투구수를 정하고, 동계훈련, 프로 신인 지명 등의 일정을 조절해 선수가 무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명투수 출신인 선동렬 KIA 감독은 평소 “투수의 어깨는 쓰면 쓸수록 약해지지 않고 강해진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3년에는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계투구수라는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텔레비전 스포츠 전문 PD도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놨다. 그는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있는 투수 중에 (투구수 제한 등의) ‘관리’를 받은 선수를 별로 못 본 것 같다”며 “미국의 경우 선수를 많이 쓰면 소모된다고 보기 때문에 투구수 관리를 강조하지만, 일본은 많은 투구가 투수를 ‘단련’을 시킨다고 보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문제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어느 쪽을 따를 것인지는 미묘한 선택의 문제라는 뜻이다.
미처 못 피는 꽃은 없었으면
기자는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모교 야구부가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16강에 올랐을 때,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가 된 동대문야구장에 와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야구 명문 군산상고가 상대였는데, 치열한 싸움 끝에 분패하고 말았다. 결국 군산상고는 3일 뒤 벌어진 결승전에서 인천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기자는 모교의 8강 탈락 아쉬움을 ‘우승 팀이 막강해서’라며 애써 달랠 수 있었다.
당시 모교 야구부는 탈락했지만, 투수 한 명이 해설가의 칭찬을 받았다. 걸출한 신인이라는 평이었다. 기사를 쓰며 문득 생각이 나 18년 전의 기록을 찾아봤지만, 당시 뛰던 선수 누군가가 프로 구단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전도유망해 보였던 고교생 투수가 선수 생활을 접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100명에 한 명 성공하는 좁은 문’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치열한 경쟁이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말 못할 사연도 있을 것이다. 무리한 투구가 가져온 어깨 혹은 팔꿈치 부상도 있을 것이다. 재능과 인생이 욕심과 혈기에 묻히는 이런 비극은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 불꽃처럼 한 순간 사르고 사라지기엔, 꽃 피워야 할 재능과 인생이 너무나 아까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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