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우리 시대 대표 고전학자 한양대 정민 교수

醉月 2024. 2. 15. 10:11

우리 시대 대표 고전학자 한양대 정민 교수

“西學이 우리나라 18세기 지식인들한테 미친 영향은 일종의 지각 변동급”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제가 무슨 사문난적입니까?”
⊙ 고전문장이론 전공 후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등 18~19세기 조선 유학 지식인의 지적 담론에 빠져
⊙ “18세기 중국發 백과전서식 지식이 당대 조선 지식인들 자극… 잡식성의 왕성한 지적 욕구에 불타”
⊙ “해는 뉘엿한데 갈 길은 멀다. 공부의 길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 “18세기 지식인들, 경전이나 서학 문장과 내용을 베끼고 끌어와 자기 식으로 소화”
⊙ “천주교 박해로 18세기 지식인들, 자기 검열하며 서학 관련 행적 모두 지워”
⊙ “박지원의 《열하일기》 초고본에 베이징 방문 당시 천주교와 관련해 나눈 대화 나와… 훗날 다 지워”
⊙ “정약용은 배교했으나 말년에 천주교 다시 믿으며 스스로 허리에다 쇠사슬 묶고 苦行”

鄭珉
1961년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 한양대 교수,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학장 역임 / 백남석학상, 한국가톨릭학술상, 롯데출판문화대상, 지훈학술상, 월봉저작상 수상 / 80여 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사진=조준우
  2023년 12월 26일 오후 한양대에 도착해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전날 잠을 설쳤다. 오래전부터 정민 교수(국문학)의 ‘문장’을 흠모했었다. 격이 있는 옛 말투로 쓰인 그의 노작들 앞에서, 기자의 궁상스러운 잡지 투의 글이, 연암(燕巖 朴趾源·1737~1805년) 투로 말하자면, 비쩍 말라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질문을 A4 용지로 9장이나 준비했지만 만날 시각이 다가올수록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인문관 4층 연구실 문을 두드리니 정민 교수가 소설가 박태원(朴泰遠·1909~1986년)이 즐겨 쓰던 대모(玳瑁·바다거북)테 같은 돋보기 안경을 벗고 활짝 웃고 있었다.
 
  기자가 장황하게 질문을 늘어놓아도 그는 핵심을 간파해 간결하게 답했다. 비병내빈(非病乃貧), 즉 병든 게 아니라 그저 가난할 뿐인 청빈소박한 옛 선비처럼 말했다.
 
  정민 교수는 19세기 고전문장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문에 대해 서로 상이한 이해를 가졌던 문장가 집단이 시대에 따라 교체되는 과정을 짚은 연구였다. 그리고 연암과 정면으로 만난 뒤 이덕무(李德懋·1741~1793년), 박제가(朴齊家·1750~1805년) 등 연암 그룹들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들이 18세기에 논하던 생동감 있는 지적 담론에 빠져들었다.
 
  18세기 유학 지식인들이 빚어낸 바탕 위에 19세기 다산(茶山 丁若鏞·1762~1836년)이 우뚝 서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시,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를 파고들면서 초기 천주교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고 천주교, 즉 천주학 내지 서학(西學)이 조선 후기 사회에 일으킨 소용돌이를 발견했다.
 
  옛 문헌에 담긴, 정확히는 1770년대 중반 서학의 태동기부터 1801년 신유(辛酉)박해 당시 다급한 현장의 비명과 절망과 탄식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파란》(2019)을 시작으로 《칠극》(2021),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2022), 《송담유록》(2022), 《눌암기략》(2022)에 이어 《서양 선비, 우정을 논하다》(2023)까지 초기 천주교 교회사에 대한 저서와 역서를 잇따라 펴냈다.
 
 
  一期一會
 
50대 초반 무렵의 정민 교수. 한양대 인문관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찍은 모습이다. 당시 750쪽이 넘는 대작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펴냈었다. 사진=조선DB
  ― 교수님의 글 중에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더군요. ‘매 순간은 최초의 순간이고 모든 만남은 첫 만남이다. 우리는 경이(驚異) 속에 서 있다.’ 오늘 만남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정민 교수는 살짝 미소만 짓고 별말이 없었다.
 
  ― 뭐랄까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교수님의 지적 연대기를 들여다보니 여러 인물이 겹쳐져 큰 물줄기를 이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부를 하다 보면 다 연결이 돼요. 깊이 파야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을 얻을 수 있어요.
 
  사실 주제를 다양하게 글을 썼지만 그 뿌리를 보면 하나에서 이렇게 퍼져나간 거거든요. 이게 나와서 그것과 만나고 이게 또 저것과 이어지는…, 천주교 교회사 연구도 ‘다산’을 공부하다가 흘러간 거거든요.
 
  뭔가 자료가 자료를 불러내고 인연이 계속 끊임없이 이어진달까?”
 

  ― 뿌리는 연암에서 시작됐더군요.
 
  “연암의 사유를 더듬고 자취를 찾아 헤매었지요. 어설프게 시작한 연암 공부가 이덕무와 박제가 등 연암 그룹들을 만나게 했고 그들의 그 시대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신줄을 놓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삶에 유용한 처방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 시대의 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그러니까 18세기 때 중국발(發) 백과전서식 지식이 들어와 당대 유학 지식인 사이 정보의 우선순위를 바꿔놓았고, 유교 지식시장에 ‘정보편집’ 현상이 도래했지요. 그 변화가 유학 지식인들이 가진 생각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고요. 요즘 말로 치면 뉴밀레니엄이 도래해 지식시장에 빅뱅이 일어나고 정보화 사회가 도래한 것이죠.”
 
 
  18세기 유학 지식인의 ‘정보편집’
 
2009년 9월 29일 정민 한양대 교수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여민해락(與民偕樂)〉전을 찾아 관람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청나라 때 쓰인 《사고전서(四庫全書)》(1781) 간행을 전후로 조선에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들과 정보의 범람은 정보 가치의 우선순위를 일거에 바꾸어놓았다. 수집벽과 정리벽은 이 시기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표징이었다.
 
  대표적으로 흑산도로 귀양 갔던 정약전(丁若銓·1758~1816년)이 물고기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 《현산어보》를 남겼고 일본에 가본 적도 없던 이덕무가 일본 관련 정보를 편집해 《청령국지》를 정리했다. 유득공(柳得恭·1749~?)이 관상용 비둘기 사육에 관한 《발합경》을, 이서구(李書九·1754~1825년)가 앵무새 사육에 관한 《녹앵무경》을 지은 것도 똑같은 저술 원리를 통해서였다.
 
  ― 조금 전 ‘정보편집’이라 하셨는데 그게 뭔가요.
 
  “베껴서 한 짜깁기를 말합니다. 경전에서 끌어와 자기식으로 문맥화하는 패러디를 말합니다. 구절 하나하나에 다 전거(典據·출처)가 있습니다. 전거는 문맥을 모호하게 하거나 행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죠.”
 
  예를 들어 스페인 선교사 판토하(중국명 방적아·1571~1618년)가 천주교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쓴 《칠극(七克)》의 경우 1760년대 이전부터 이익(李瀷·1681~1763년), 홍유한(洪儒漢·1725~1785년), 심지어 사도세자(1735~1762년)까지 가까이에 두고 아껴 읽은 책이었다. 다산은 이벽에게서 《칠극》을 빌려 탐독한 일을 고백한 일도 있다. 또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허균(許筠·1569~1618년)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여왔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해당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정민 교수에 따르면 다산은 배교(背敎) 이후인 강진 유배지에서 쓴 글 중에 《칠극》에서 끌어온 표현이나 비유를 즐겨 쓰곤 했다고 한다.
 
 
  18세기 지식인들의 지식 편집 프로세스
 
  예를 들어 〈두 아들에게 써준 가계(示二子家誠)〉에서 다산은, “재화를 비밀스럽게 감춰두는 것은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만 함이 없다. 단단히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화라는 것은 메기와 같은 것이다(凡貨秘密, 莫如施舍. 揭之彌固, 脫 之彌滑, 貨也者鮎魚也)”라고 썼는데, 《칠극》에는 “너무 쉽게 흘러가 옮기는 것으로는 귀한 지위만 한 것이 없다. 굳게 붙잡으려 해도 진흙탕의 미꾸라지를 잡는 것과 같아 단단히 잡으면 잡을수록 빨리 놓치고 만다(易遷流, 莫如貴位. 欲固得之, 如据泥敏, 据愈固, 失之愈速)”고 적혀 있다.
 
  문체의 유사성뿐 아니라 비유나 예시도 《칠극》에 뿌리를 둔 것이 많다는 것이다. 다산뿐 아니라 천주교와 무관한 연암이나 조선 후기 다른 문장가의 글에서도 《칠극》에서 끌어온 비유나 표현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정민 교수는 “18세기 지식인들이 지식을 어떻게 컨트롤했나를 연구하며 쓴 책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2006)이다. 18세기 지식인들의 지식 편집 프로세스 매뉴얼에 대해 밝히는 책이다”고 했다. 수십 쇄를 찍을 만큼 베스트셀러가 됐다.
 
  “18세기 지식인들이 경험했던 정보화 사회의 양상은 그 본질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 지식 패턴의 변화와 똑같아요. 그들은 잡식성의 왕성한 지적 욕구에 불타 모든 정보를 정리하고 편집했죠. 그 이전, 경전의 구절에 대한 사소한 해석 차이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시대는 한순간에 힘을 잃고 말았죠.”
 
  “18세기 유학 지식인들은 동서남북으로 당색을 나눠, 같으면 옳건 그르건 한편을 먹고 다르면 무조건 미워하고 배격하는 ‘당동벌이(黨同伐異)’에 눈길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의 계속된 말이다.
 
  “다산은 18년 강진 유배 생활 동안 수백 권의 저술을 남겼어요. 한 사람이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이 족히 걸릴 작업을, 그는 처절한 좌절과 척박한 작업 환경 속에서 마음먹고 해냈습니다. 어떻게 방대한 작업을 소화했을까요? 그 작업의 진행 방식과 절차, 그리고 편집과 정리의 전 과정이 참으로 궁금해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펴냈죠.”
 
  정민 교수에 따르면 다산의 방대한 작업 또한 이러한 18세기적 지식 경영의 산물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역대 역사 기록 속에서 추려낸 목민관의 사례 모음집이다. 이 책을 집필하다가 형법 집행의 중요성을 절감해 따로 엮은 책이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이런 부분 작업의 결과들을 국가 경영의 큰 틀 위에서 현장 실무 경험을 살려 하나의 체계로 재통합한 책이다.
 
  포항(장기)에서 귀양살이할 때 약을 못 구해 병을 키우던 시골 사람들을 위해 쉬운 처방을 중심으로 《촌병혹치》를, 수십 종의 의학서에서 천연두 관련 항목만 추려내 《마과회통》을 엮은 식이었다.
 
 
  후지쓰카 지카시와 조선 지식인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추사 김정희 전문 연구자인 후지쓰카 지카시의 모습이다. 사진=위키피디아
  정민 교수는 2012년 8월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미국 보스턴으로 갔다. 떠나기 전 하버드에 제출한 연구주제는 ‘18세기 한중(韓中) 지식인의 문화 접촉과 교류’였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중국 쪽 자료들을 섭렵해 쌍방의 비교를 통해 균형 잡힌 연구의 시각을 마련해보리라고 다짐했다. 들고 간 자료 꾸러미 속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후지쓰카 지카시(藤鄰·1879~1948년)의 추사(秋史 金正喜·1786~1856년) 관련 자료도 들어 있었다.
 
  후지쓰카는 20세기 초 18세기 청조(淸朝)의 고증(考證) 학풍을 연구하던 일본인 학자다. 우연히 중국 문인의 문집 속에서 조선 지식인 박제가의 이름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경성제대 교수 부임 직후부터 청조의 학풍이 조선에 전해진 경로를 추적하는 작업으로 연구주제를 선회했다. 그의 연구는 “일본 학자가 중국을 연구하다가 조선에 미쳐서 정리한 내용을 한국 학자가 미국 도서관에서 찾아내 그 과정을 추적하는 다국적 작업”이었다.
 
  옌칭도서관 한국인 사서에게 후지쓰카 지카시의 장서(藏書)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누구냐?”는 응답이 돌아왔다. 일본인 사서에게도 한자로 그의 이름을 써 보여줬지만 고개를 갸웃했다. 실망스러웠다.
 
  하루는 연구실에 앉아서 막연히 홍대용(洪大容·1731~1783년)의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을 읽고 있었다. 그가 1765년 베이징에 갔을 때 만난 중국 선비들과의 대화록이었다. 문득 당시 홍대용이 만났던 이들의 문집이나 관련 기록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창에 몇몇 중국 선비 이름을 입력했더니 2종의 서목이 떴다. 《철교전집(鐵橋全集)》과 《절강향시주권(浙江鄕試硃卷)》이었다.
 
 
  18~19세기 한중 문예공화국
 
조선 사신단의 중국 사행길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그린 〈연행도(燕行圖)〉. 전체 14폭 중 조양문(朝陽門)을 그린 장면이다. 이 〈연행도〉 작가는 단원(檀圓) 김홍도(金弘道)로 밝혀졌다. 사진=숭실대
  이럴 수가! 놀랍게도 두 책 모두 후지쓰카 지카시가 소장했던 책이었다. “직감적으로 후지쓰카의 자료가 옌칭 도서관에 분명히, 그것도 아주 많이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연암 관련 작업을 중단했다.
 
  2012년 9월 중순부터 이듬해 8월 귀국할 때까지 정민 교수의 하루하루는 후지쓰카 지카시의 장서를 추적하고,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정리하는 일에 소비됐다. 하루에 8종의 후지쓰카 장서를 찾아낸 일도 있었다. 그의 장서를 오래 살피다 보니 그의 성격과 학문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사소한 버릇까지도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후지쓰카의 장서 속에 수많은 메모가 꽂혀 있었는데 전용 원고지를 네모나게 잘라 그 여백에 붓글씨로 써서 본문 내용과 관련이 있는 보조 정보들을 빼곡하게 적어둔 것들이었어요. 메모를 찾으면 그 속에 적힌 다른 참고 자료가 나왔어요. 저는 그가 메모를 통해 지시한 방향을 타고 이 책 저 책 사이를 유영(遊泳)했죠.”
 
  “매일 하도 많은 책을 뒤적이다 보니 일주일만 지나도 모두 전생(前生)의 일처럼 까마득했다”고 한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날마다 작정하고 일기를 썼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운영하던 네이버 커뮤니티에 연재를 자청해 매주 50~60매의 원고를 썼고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2014)이다.
 
  정민 교수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에 나오는 문장이다.
 
  〈1805년 박제가가 세상을 뜨고 네 해 뒤인 1809년 10월에 추사 김정희가 부친 김노경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燕行)에 올랐다.
 
  당시 추사는 24세의 피 끓는 청춘이었다. 북경의 지식인들은 1801년 박제가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이후 근 10년 만에 김정희를 통해 박제가의 체취를 맡았다. 박제가의 그늘 덕분에 김정희는 단번에 북경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곡절은 있었지만 77세의 청나라 옹방강이 그와의 면담을 허락했고 김정희를 만난 옹방강은 단번에 손자뻘인 조선의 청년에게 매료되었다.
 
  이 한 차례의 만남이 훗날 19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의 단초를 여는 길고 긴 인연의 한 출발점이 되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안 간 것과 같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새 필사본. 연암 박지원의 둘째 아들 박종채가 원고를 수정하면서 붉은 글씨로 주를 달았다. 사진=양승민
  연행이란 청나라 시절, 조선 사신이 베이징에 가던 일 또는 그 일행을 말한다. 정민 교수는 “수많은 사람이 같은 연행길을 떠났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안 간 것과 같다. 또 이러한 기록을 아무나 남기는 것은 아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고통스러운 메모와 귀국 이후 몇 년간의 고심이 곁들여져서야 비로소 한 부의 책으로 묶일 수 있었다”고 했다.
 
  “설령 기록으로 남긴다 해도 투식(套式)에서 못 벗어난 상투적 일기는 쓰나마나입니다. 당시 지식인들 저마다 앞다퉈 500편이 넘는 연행 기록을 남겼으니,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그 내용이 대부분 큰 가치가 없어요. 많은 수의 연행록이 이 글은 저 글을 베꼈고, 저 글은 또 다른 이 글을 베꼈으니까요.”
 
  홍대용이 연경(베이징)에서 돌아온 지 10년 뒤인 1776년 11월에 유금(柳琴·1741~1788년)이 연행길에 올랐다. 그의 보따리에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네 사람의 시를 모아 엮은 《건연집》이 있었다. 이들은 연암 그룹으로 분류되는 신진기예의 문인집단이었다.
 
  “유금이 베이징으로 건너가 끊어질 뻔한 만남의 가닥을 다시 잇고, 이덕무와 박제가가 이를 이어 새로운 만남의 장을 구축해 한중 문인들의 문예공화국이 반석 위에 오를 수 있었어요.
 
  박제가는 그 뜨거운 마음을 《북학의》에 쏟아부었고, 이덕무는 《입연기》에 새겨 넣었어요. 박지원이 이를 이어 《열하일기》란 불후의 명편을 탄생시켰고, 이후 박제가, 유득공이 그 바통을 다시 이어받아 《난양록》과 《연대재유록》을, 박제가의 아들 박장암이 《호저집》을 남겼습니다.”
 
 
  연암과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중국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박제가는 뛰어난 학문과 글씨 솜씨로 중국 지식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 사진=문학동네
  정민 교수는 “홍대용과 박제가, 이 두 사람이야말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을 이끈 선봉장들이었다”고 했다.
 
  ― 이후 한중 지식인들은 어떻게 소통을 이어갔나요.
 
  “홍대용과 박제가가 중국에서 상대했던 문인들은 당대 1급학자요 문인이요 화가였습니다. 양측은 이후 그룹으로 만났죠. 한 사람을 통해 그의 벗들이 저쪽에 안내되었고, 저쪽도 한 번 만난 벗의 벗을 마음을 열어 환영했죠.
 
  소통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습니다. 주는 것을 받기만 하지 않았고 이편의 사유도 함께 건너갔어요. 대화의 과정에서 중국 문사들은 조선 지식인의 매력에 깊이 빠졌어요.”
 
  정민 교수에 따르면, 중국 문사들은 박제가를 에워싸고 그의 글씨 한 장이라도 받으려고 줄을 섰고, “제까짓 게” 하며 어려운 질문만 골라 근량을 달아보다가 어느덧 크게 놀라 자세를 바꾸었다고 한다.
 
  다음은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에 나오는 문장이다.
 
  〈동서남북의 색목으로 갈려 싸우고 사농공상의 신분으로 나눠 차별하던 세상에 살다가 드넓은 만주벌 앞에 선 연암은 이곳이야말로 한바탕 시원스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하고 툭 터진 흉금을 얘기했다. 서얼의 굴레에 붙들려 절망 속을 헤매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은 애초에 그런 차별을 알지 못한 채 능력대로 대접하는 중국 인사들의 허물없는 태도에 처음엔 한없이 감격했고, 나중에는 점차 당당해졌다. 이 자신감이 조선에 돌아와서도 주눅 들지 않는 배짱과 맷집을 키워주었다.〉
 
  ― 후지쓰카 지카시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그가 중요한 자료들을 우리 앞에 내놓고 갔는데 이제껏 그에 대한 학술적 음미나 진전된 논의는 충분치 못했어요.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제대에서 10여 년 교수 생활을 하는 사이에 그는 일본 학계에선 잊힌 이름이 되고 말았어요.”
 
후지쓰카가 한국으로 돌려보낸 〈세한도(歲寒圖)〉 이야기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놓는다면 김정희가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세한도>


  전남 해남 문화계와 차(茶)계를 대표하던 인물인 김봉호 선생이 1994년에 펴낸 《만나고 싶다 그 사람을》(1994)에 손재형(孫在馨·1902~1981년)이 후지쓰카에게서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 돌아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민의 책 《18세기 한중…》에도 인용돼 있다.
 
  손재형은 국전(國展) 운영위원장, 예술원 부원장, 홍익대학교 교수,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로 서화 골동의 수장으로 유명하다. 호는 소전(素筌)이다.
 
  〈나(손재형-편집자 주)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등 박사가 가지고 있는 〈세한도〉를 되찾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후지쓰카-편집자 주)가 양보만 한다면 나의 소장품 중의 무엇과도 바꿀 수 있겠고, 금액으로 나온다면 부르는 대로 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나 그 말을 선뜻 못 했던 것은 그가 워낙 완당(김정희-편집자 주)에게 심취한 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등총(후지쓰카-편집자 주)은 그들의 패망 전인 1943년 10월에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앞이 캄캄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것 같았다. 글씨도 써지지 않고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듬해에 거금 3000엔을 전대에 차고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 경복환을 탔다. (중략)
 
  나는 기어코 도쿄에 도착했다. 등은 우에노 구 망한려에 있었다.
 
  “어쩐 일이오. 소전 선생!”
 
  “예, 박사님을 뵈러 왔소이다.”
 
  첫날은 수인사만 나누고 근처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일주일을 매일 찾아갔다. 나의 소행을 이상하게 여긴 등이 먼저 말했다.
 
  “뭘 달라는 것입니까?”
 
  “〈세한도〉를 돌려주십사고 왔습니다.”
 
  병석에 누웠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아 나를 쏘아봤다.
 
  “나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을 어떤 경우 송두리째 내놓을 수는 있어도 〈세한도〉만은 내내 간직할 것입니다. 이제 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폭격도 차츰 무차별로 나오니 어서 조선으로 돌아가십시오.”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세한도〉를 양보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폭격도 아랑곳 않고 90일 동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만 되풀이했다. 90일째 되는 날 그는 아들(후지쓰카 아키나오-편집자 주)을 불러, 나와 나란히 앉혀놓고 말했다.
 
  “내가 죽거든 손재형 선생께 〈세한도〉를 내어드려라.”
 
  서로 지칠 대로 지쳤다. 그리고 더는 폭격을 견딜 수가 없었다. 등총 일가가 산속으로 피란을 가겠다 했다. 피란처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일, 나는 만사를 포기했다.
 
  ‘물각유주(物各有主)라!’
 
  허전한 마음으로 작별의 뜻을 전화로 알렸다. 한데 사정이 달라졌다.
 
  “소전, 내가 졌소, 지금 곧 오시오.”〉
 
  후지쓰카는 손재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놓는다면 지하의 완당 선생이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더구나 우리는 그분을 사숙하는 동문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후지쓰카 지카시의 결단으로 〈세한도〉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1974년 12월 31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1912~2006년)의 용단으로 2006년 1월 추사 관련 유묵 자료와 청조와 조선의 학술 교류를 입증할 수많은 문집 자료들이 한국으로 마저 건너왔다. 그해 5월 한국 정부는 도쿄대의 기증 요청을 물리친 후지쓰카 아키나오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안타깝게도 그해 7월 4일 그는 향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 다산’과 천주교
 
다산의 생가 앞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이다. 사진=조선DB
  ― 18세기 연암 그룹과 다산을 파고들다 다시 천주교와 만났더군요.
 
  “그렇죠.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 자료를 찾아 번역하다 보니 ‘젊은 다산’이 궁금해졌죠. ‘이 사람이 젊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나?’ 그리고 천주교 관련 문제로 쫓겨났다는 사실이 선명치 않았어요.
 
  그래서 젊은 다산을 들여다보니 천주교를 빼고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서학과 천주교 문제를 다산의 생애와 연결해서 다시 살폈죠.
 
  살피다 보니 천주교에 관한 내용이 굉장히 복잡하다고 느껴졌어요. 분명 행간이 있고 의미가 있는 건데 앞뒤 맥락을 알 수 없는 자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다시 공부하다 작심하고 쓴 책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입니다. 막상 발표하니 일반 독자들은 좋아했는데 교회사 연구자들은 별로 좋아하질 않았어요.”
 
  ― 왜 그랬을까요.
 
  “오히려 기분 나빠하더라고요.(웃음) 당신들이 못 한 것을 제가 자료를 막 들이대니, 그분들이 해놓은 작업이 무너지니까….”
 
  그는 “이상하게도 자료를 제공해주지도 않고, 지금도 비딱하게 제 글을 인용도 않고…”라고 털어놨다.
 
  “국학 쪽에서도 다산을 천주교와 연결 짓는 것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여요. 왜냐하면 국학자로서 다산의 어떤 순수성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서로가 ‘왜 우리 영역을 네가 건드냐?’는 식이니 양쪽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간 교회사 연구자와 국학 연구자들은 저마다의 시선으로 조선 사회 천주교 문제를 다루었다. 한쪽은 시복시성(諡福諡聖·복자로 추대하는 것을 시복,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을 시성이라고 한다-편집자 주)을 위한 신앙 행위의 증거 자료 찾기에 집착해왔고 다른 한쪽은 천주교의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 학계나 교계가 조금 편협하다고 느끼시나요?
 
  “지나친 과대평가도 곤란하지만 의도적 외면 역시 총체적 진실에는 다가설 수 없죠.
 
  언젠가 강진을 찾았다가 다산 제자의 후손가에서 차계가 오랫동안 못 찾아 사라진 줄 알았던 다서(茶書) 《동다기(東茶記)》를 발견했죠. 이 놀라운 자료를 설명해보려고 동분서주하다가 차 공부를 하게 됐는데 차계에서 어마어마한 거부 반응을 보이더군요. 왜냐하면 기본 담론을 다 무너뜨렸으니까.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제 연구가 통설이 됐죠. 서학 문제도 그렇게 결정이…, 왜냐하면 저는 팩트로 이야기했고 소설을 쓴 게 아니니까….”
 
 
  西學이 일으킨 지진
 
  ― 초기 교회사 연구자들이 놓친 부분은 뭘까요.
 
  정민 교수는 “기록의 문면(文面)에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는 점이 천주교 관련 기록이 갖는 한계”라고 했다. 박해에 엮인 자는 자신의 사활과 가문의 명운으로 인해 필사적으로 신앙을 감췄다.
 
  “《사학징의》 《송담유록》 《눌암기략》을 보면 기록자는 얽어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거짓 정보를 쓰고, 피기록자는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굴절시켰죠.
 
  다산이 1795년 5월 당시 중국에서 온 주문모(周文謨·1752~1801년) 신부를 탈출시킨 주인공이고, 금정찰방(각 도의 역참에서 역마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종6품 벼슬-편집자 주)에 있으면서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이존창(李存昌·1752~1801년)을 검거한 당사자였다는 것이 명백한데 관변 쪽에 명시된 기록이 없어요.
 
  심문장에서 ‘정약망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다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리 집안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어요. ‘약망’은 다산의 세례명인 요한입니다. 그런데도 정약망을 모른다 한 건 자기부정의 극치죠.”
 
  정민 교수는 “천주교 교회사 연구자들이 한문 원전을 보는 데 상당히 제약이 있었다”고 했다.
 
  “연구자들이 대개 한문학을 한 분들이 아니잖아요. 한문 원전을 보는 데 상당히 제약이 있거든요. 사실, 한문 문장을 보면 겉으론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아도, 속내는 다른 말을 하는 게 많거든요. 제가 고전문장론을 연구했으니까 한문 문장의 문법이나 화법에 익숙하니 행간을 따지기는 낫죠.
 
  서학이 조선 사회를 관통하면서 일으킨 지진은 생각보다 충격파가 컸어요. 지금은 다 덮여 보이지 않지만, 여진이 깊고도 길게 갔어요.”
 
  ― 서학이 18세기, 19세기 유학 지식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 예로 판토하가 쓴 《칠극》을 번역하며 깜짝 놀랐어요. 당대 지식인들의 저서를 보면 이 《칠극》에서 가져온 글이 아주 많아요.
 
  자기식으로 완전히 소화시켜가지고 싹 베꼈는데 《칠극》을 보면 ‘이게 여기서 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연암도 이덕무도 다산도 다 마찬가지예요.”
 
  그는 초기 교회사 관련 연구나 서학서 번역을 계속할 뜻을 내비쳤다.
 
  “한국 천주교에 103위 성인이 계신데 전부 1839년 기해(己亥)박해로 순교했거나 그 뒤 절명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1830~50년대 순교자들이죠. 초기 천주교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는 한 분도 안 들어갔어요.
 
  왜 그러냐? 우리나라 시복시성을 준비할 때 프랑스에서 먼저 시작했어요. 조선 땅에서 돌아가신 프랑스 순교자들을 시복시성하려니까 한국 교회에서 ‘같이 순교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고 해서 들어간 거예요. 신유박해 당시엔 프랑스 신부님들이 없었으니까 그때 돌아가신 신앙의 선조(先祖)들이 여백(餘白)으로 남게 된 것이죠.
 
  제일 먼저 시복시성을 요청해야 하는데… 이제 교황청 재판에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이 전부 眞空化”
 
  ― 교수님의 연구 업적과 자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겠네요.
 
  “그쪽에선 제 작업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활용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시성시복은 한 사람 개인의 문제잖아요. ‘누가 어떻게 신앙을 지키다 박해를 당해 어떻게 순교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복자가 돼야 한다, 성인이 돼야 한다’는 것인데 천주교 자료들은 ‘믿었다, 지켰다, 죽었다’는 짤막한 서사(敍事)만 있습니다. 파편화된 서사 외에 역사적 사실이 전부 진공화(眞空化)가 됐어요.”
 
  ― 진공화라니요?
 
  “사실만 나열해버리면 그 서사가 똑같으니까 역사적 시간이 진공 상태가 되는 겁니다. 1839년에 순교한 분이나 1801년에 순교한 분이나 (서사가)다 똑같아요.
 
  초기 교회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갔는지, 그때 여성들의 역할은 어땠는지, 각 구역장들은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있었는지, 그다음에 조직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는 어떤 게 있었는지 등등의 질문들이 초대 교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복자냐 성인이냐는 개인에만 치중하니 안 나오는 거죠.
 
  제가 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이 시스템 문제였거든요. 좀 더 초기 교회 문제에 천착해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들을 심문한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를 꼼꼼하게 읽는 작업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발표는 안 했지만 이미 번역을 마친 상태입니다.”
 
 
  “이덕무도, 연암도 한 문장씩 살짝살짝 끼워 넣어”
 

  정민 교수는 16~17세기 동서양 문물 교류의 선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년)의 《교우론》과 마르티노 마르티니(Martino Martini·1614~1661년)의 《구우편》을 새롭게 번역한 《서양 선비, 우정을 논하다》 또한 몇 달 전 펴냈다.
 
  “두 서양 선교사들이 기독교 이전 그리스 철인(哲人)들의 이야기들을 막 가져와 인용하니까 중국 지식인이나 조선 지식인들이 느끼기에 신앙 포교서라는 느낌이 없었어요. 글쓰기 맥락이 꼭 《논어》에서 ‘자왈(子曰)~’ 하는 방식이거든요. 서양 사람들이 중국 선비들한테 자기의 신념을, 신앙을 전달하는 데 중국어 코드로, 중국의 제자백가서(百家書) 형식으로 전달하니 오히려 놀랐지요.
 
  ‘봐라. 뭐가 다르냐? 너희도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있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우정에 관해 너네도 한 번 들어 봐!’ 이런 식의 화법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소통의 가교를 만들어냈죠. A라는 포맷이 성공하면 ‘A 다시’가 나오고 ‘A 다시 다시’가 나오고….”
 
  ―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과 마르티노 마르티니의 《구우편》도 우리나라 유학 지식인들한테 인용이 많이 됐습니까.
 
  “그럼요. 서양 고전 속 참된 우정의 가르침에 열광했지요. 연암은 ‘벗’에 대해 ‘한방에 살지 않는 아내’ ‘피만 나누지 않은 형제’와 같은 표현을 더 얹으며 진심이었죠.
 
  이덕무도, 연암도 자기 글 안에 한 문장씩 살짝살짝 끼워 넣었는데, 서사 자체는 완전히 자기 글이에요.”
 
  정민 교수는 “이런 서학서가 우리나라 18세기 유학 지식인들한테 미친 영향이 일종의 지각 변동급”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계속 천주교를 박해하자 지식인들 모두가 자기 검열을 하며 수면 밑으로 내려갑니다. 다산도 연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암의 《열하일기》 초고본이 있어요. 초고본이 세 종류인데, 연암이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와 관련해 대화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중 다 덜어내고 제목도 바꿔버립니다. 시비가 될 대목을 자기 검열로 고친 거지요. 오늘날 우리가 읽는 《열하일기》는 전부 ‘터치’가 된 글들이에요. 일종의 오염된 ‘소스(source·원본 자료)’들이죠. 오염됐기에 행간 분석이 아주 필요해요.”
 
  정민 교수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게 다산이, 연암이 감춰놓은 행간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학계에서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나오면 그다음엔 대화가 안 되죠.”
 
  ― 다산은 자기 글에서 신앙을 모두 지웠습니다. 일부에선 ‘다산, 정약전, 권철신, 이가환 같은 인물은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갖긴 했으나 신자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으로서 서학을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복잡한 퍼즐을 다 맞춰야 그림자가 드러난다”
 
  정민 교수는 “다산이 숨긴 진실은 행간에 가려져 있다. 복잡한 퍼즐을 다 맞춰야 그림자가 드러난다”고 했다.
 
  “일부에선 ‘서학을 학문으로 바라봤지 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게 ‘너무 천주교와 연관 짓지 마라’고 당부하죠. 근데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신앙을 믿다 잡혀간 이들의 공초(供草) 기록을 보면, 예를 들어 이가환(李家煥·1742~1801년) 집안이 전부 잡혀가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가환만 자유로울 수가 있어요? 이가환만 학문으로 서학을 봤다고요?
 
  당시 행간들이 지시하는 지점들을 면밀하게 살펴야 하는데 그건 안 보고 ‘명확한 근거 내놔 봐!’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죠.”
 
  정민 교수는 이 대목에서 말이 빨라졌다.
 
  “당시 어마어마한 폭풍이 왔는데 21세기 관점에서 잔잔히 가라앉은 것만 보이니까 ‘뭐, 믿는 놈들 좀 있었는데 국가에서 검열하니 저절로 잦아들었지…’. 그러나 이런 정도로 해결해선 안 된다는 거죠. 천주학은, 이 서학은 너무너무 명백하죠.
 
  서학의 영향력이라는 게 거의 정말 매머드급이었는데 살기 위해 스스로 검열한 기록만 놓고 보니까 ‘찻잔 속 태풍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그는 서학이 조선의 민초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초기 교회를 보면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받으러 2박 3일을 걸어와요. 아줌마들이 할머니들이 말이죠. 저 배론성지(충북 제천) 쪽에 와서 밤새 기다려 고해성사를 받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새벽에 다시 떠나갑니다. 이 사람들은 살아 고해성사 한 번 받는 게 인생의 구원인 거예요. 정말로….
 
  그랬을 때, ‘이네들에게 죄 사함이라는 게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 생각 심각하게 해볼 필요가 있죠. 그런데 복자 담론, 성인 담론에서는 이런 행간들이 진공이 돼버려 아무 의미가 없는 정보가 돼버려요. 다산이 바로 이런 케이스거든요.”
 
 
  조선을 관통한 서학
 
이승훈 등이 서울 명례방(현재 명동 충무로 일대)에 있던 역관 김범우 집에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공적 집회를 갖는 장면이다. 탁희성 화백이 그렸다. 사진=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그는 숨을 돌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교회사 쪽에서는 다산은 영양가가 없어요. 믿었다가 배교했고, 배교한 걸로 끝났으니 복자도 안 되고 성인도 안 되니까 자기들(교회사 연구가)은 ‘난 관심 없어’라고 내버리죠.
 
  그런데 ‘다산이 믿었다, 안 믿었다를 떠나 천주교가 이 사람의 삶에 어떤 질량(質量)이었는지 살펴야 해!’라고 저는 말하는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당대 천주교인의 사유(思惟)에 들어갈 수 없어요!”
 
  정민 교수가 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에는 형조에서 ‘서학쟁이’들을 잡아다가 주머니를 뒤졌더니 예수 형상이 그려진 상본(像本)이 쏟아져 나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신부처럼 지녀 아침저녁으로 기도할 때 받들어 섬겼다는 것이다.
 
  〈형조판서 김화진이 염탐하여 김범우가 붙들려와 감옥에 갇혔다. 장물(贓物) 중에 예수의 화상이 몹시 많았다. 사학을 배우는 자들은 저마다 작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주머니 안에는 화상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바로 예수가 형벌을 받아 죽어 하늘로 올라간 뒤에, 서양 사람들이 그 모습을 그려 늘상 몸 가까이 차고서, 아침저녁으로 경문을 외며 높여 받드는 것이다.〉
 
  이 문장에 나오는 김범우(金範禹·1751~1786년)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다. 1785년 이벽(李檗·1754~1786년)·이승훈(李承薰·1756~1801년)·정약전·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다 당국에 발각되어 귀양을 갔다. 김범우는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다만 그의 유배지가 충청도 단양인지 경상도 밀양의 단장인지 논란이 있다.
 
  정민 교수에 따르면, 밀양부 단장면 법귀리 7통 3호로 명시된 호구단자(戶口單子)가 김범우 후손가에서 발견되고, 1989년 단장면(밀양시 삼랑진읍)에서 김범우의 무덤을 찾았다고 알려지면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장이라는 주장이 큰 힘을 받아왔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충청도 단양에서 돌아가신 분을 밀양에서 돌아가신 걸로 꾸며놓은 거거든요. 지금 밀양에 가짜 묘를 세워가지고 몇백억원을 들여 성지로 조성해놓았어요. 제가 만일 틀렸으면 바로 명예훼손 고발이 들어와야 하거든요. 그렇잖아요? 어떤 반론도 없습니다.”
 
 
  ‘여염의 여자들이 좇아서 邪學에 교화되었다’
 
  정민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이런 기록도 있어요. ‘여염의 여자들이 좇아서 사학(邪學)에 교화되었다. 그중에서도 과부들이 천당과 지옥의 주장을 깊이 믿어, 귀천을 따지지 않고 또한 많이들 빠져들었다.’ 당시 여성들이 천주의 화상이라든지 편경, 이런 것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 《송담유록》 《눌암기략》이 서학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썼지만 당시 내부에 서학의 분위기가 얼마나 팽창해 있었는지, 반대로 민중의 정서와 등을 진 조정이 얼마나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조정에선) 놀라 뒤집어졌죠. 특히 여성들한테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했거든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시어머니가 갑자기 어느 날 며느리에게 ‘내 딸보다 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못되게 굴던 시어머니가 말이죠. 며느리 입장에선 ‘이게 뭔 일이야’ 생각하는 겁니다. 그날부터 지옥이 천당이 되는 거예요.
 
  또 반대의 경우도 생겨났죠. 그렇게 못되게 굴던 며느리 년이 시어머니한테 순종하니까, 시어머니는 ‘도대체 뭐기에…’ 하고 따라나서는 겁니다.”
 
  ― 조선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네요.
 
  “백정이던 사람을 신앙 공동체가 받아들이니 이렇게 말합니다. ‘제게는 천국이 두 개다. 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천국이고, 나 죽어서 갈 곳도 또 천국’이라고요. 양반은 노비 문서를 태우고, 면천(免賤)한 노비 자식을 자기 조카와 결혼시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신앙이 메아리칠 때 지배자의 입장에선 어마어마한 공포죠. 그러니 일종의 계엄령을 발동하는 거죠.
 
  당시 ‘동정녀 열풍’이 불어서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해요. 그건 오늘날로 치면 정확히 수녀거든요. 이네들이 모여 교리 교사도 파견했습니다. 이 내용은 지금까지 교회사 연구에서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어요. 시성시복에만 눈길을 주니 안 보이는 겁니다.”
 
정민 교수가 번역한 《송담유록》과 《눌암기략》은 어떤 책?



 
  서학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저술한 강세정(姜世靖·1743~1818년)의 《송담유록(松潭遺錄)》과 이재기(李在璣·1759~1818년)의 《눌암기략(訥菴記略)》은 천주교 내부의 시선보다 외부인, 그것도 탄압에 앞장섰던 측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였다.
 
  《눌암기략》은 서학을 믿는 이들인 신서(信西)파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채제공(蔡濟恭·1720~1799년)의 행동과 서학을 공격하는 공서(攻西)파의 처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서학보다 당시 서학을 둘러싼 남인집단 내부의 미묘한 길항관계를 살펴, 신유박해의 배경 이해에 도움을 준다.
 
  《송담유록》은 철저히 서학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서학집단의 신앙 활동에 대한 관찰을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책에는 1785년 명례방집회 검거 당시 잡혀온 사람들의 소지품마다 예수의 승천 후 모습을 그린 화상(畫像)이 나왔고, 여성들이 차고 다닌 주머니에는 천주의 화상과 편경(片鏡), 즉 가톨릭 성인 메달이 들어 있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해석 없이 해설만 한다?
 
  정민 교수는 기자에게 한국천주교회가 편찬한 103위 《시성시복 자료집》을 책꽂이에서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천주교 박해 과정을 기록한 《벽위편(闢衛編)》에 이렇게 적혀 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1829~1878년) 신부의 《한국천주교사》에 저렇게 적혀 있고… 등등의 소스북이에요. ‘이런 사람이니까 성인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건데 아무 평가가 없거든요. 여기엔 아무런 맥락이 없어요.
 
  이 사람이 어떤 활동을 했고, 이 조직과 이 사람 사이에는 어떤 끈이 있으며, 어떤 연결이 있고 이런 것들에 대한 맥락이 없으니까, 진공 상태가 되거든요. 뭔가 해석이 필요한데 자꾸 해설만 하거든요.”
 
  ― 해석이 필요한데 해설만 한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해석을 하려면 관점이 들어가야 하고, 관점은 논거를 가려야 해요. 세워놓은 논거를 비판하려면 논거로 비판해야 해요. 그런데 논거로 비판하지 않고 감정으로 비판해버리면 학문적인 대화가 끊어지죠.
 
  2주 전에 어느 학술 세미나에서 〈서학의 관점에서 읽는 다산 일기의 행간〉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어요. 다산의 일기를 다 읽고 날짜별로 정리한 뒤 그 논거를 밝혀 해석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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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남은 다산 일기 중에 구체적으로 천주교를 언급한 일기가 있나요?
 
  “물론 일기에는 천주교의 ‘천’자도 없죠. 말을 다 돌려놨으니까. 예를 들어 이존창을 검거한 상황을 쓰면서 ‘성주산의 일’이라고 하거든요.
 
  ‘성주산의 일은 지난번에 보고드렸듯이…’라고요. 그 ‘성주산의 일’이 뭐냐 하면 이존창이 숨던 산에서 그를 검거한 게 ‘그 일’이에요.
 
  《조선왕조실록》에 엉뚱한 연도에 ‘옛날에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있을 때 이존창을 검거했는데’라는 기록이 나오거든요. 일기와 실록을 비교하면 ‘성주산 일’이 드러나는 겁니다, 정확히.”
 
  여기서 잠깐.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 전라도 고산, 경상도 청송과 영양 등지에 이르기까지 천주교가 확산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미친 순교자다.
 
 
  “다산은 틀림없이 천주교로 돌아왔다”
 
전남 강진군 도안면 만덕리에 있는 다산초당.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이후 19년간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용은 이곳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많은 실학서를 저술했다.
  ―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군요.
 
  “그렇죠. 그렇게 논문을 써서 발표했더니, 다른 연구자가 논평을 하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50~60개의 제 논거에 대해 한마디 말없이 그냥 자기 이야기만….
 
  이건 거의 행패죠. 제가 무슨 사문난적입니까? 세상에 다산 연구자가 많은데 저 같은 관점을 지닌 이가 한 사람쯤 있는 게 불편합니까?”
 
  ― 다산은 천주교 신자라고 봐야 합니까.
 
  “다산은 분명히 처음에는 열심히 믿었고, 중간에 틀림없이 배교했고, 나중에 틀림없이 돌아왔어요,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돌아온 이야기는 저 프랑스 신부들 기록 속에 계속 나오거든요.”
 
  ― 그런 기록이 있군요.
 
  “한두 개가 아니에요. 제가 작년에 학계에 발표했는데 이것도 참 시끄러웠죠.”
 
  다블뤼(Marie Daveluy·1818~1866년) 주교가 쓴 《조선순교사비망기(Notes de Mgr. Daveluy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e´e)》에 초기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을 정약용이 지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것에 관한 회상록(des me´moire sur l’introduction de l’Evangile en Core´e)’에서 인용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다만 다산이 썼다고 알려진 이 회상록은 사본조차 사라져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민 교수의 말이다.
 
  “다블뤼가 1858년 11월 7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낸 보고 서한에 ‘나는 정약용에 대해 한마디 첨가하고자 한다. 그의 증언은 아주 큰 무게가 있어 보인다’고 했죠. 다블뤼는 정약용이 저서에서 자신의 배교와 그의 형제, 친척, 친지들의 배교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그의 저서에서 모순되는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확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여러 진술을 통해 볼 때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 혹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것에 관한 회상록’이 실제 다산이 짓지 않은 허구의 책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여요.”
 
 
  “다산, 종부성사 받고 죽어”
 
  달레 신부가 쓴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온 뒤 정약용 요한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다. 1801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입으로 배반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제(大齋)를 지키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극기를 고행하며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차고 한 번도 그것을 끌러놓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묵상하였다.〉
 
  정민 교수의 말이다.
 
  “말씀드렸듯이 다산은 배교했고 만년에 돌아온 것이 분명하며 종부성사(終傅聖事)까지 받고 돌아가셨다고 (기록에) 나오거든요.
 
  주문모 신부가 주살된 후 1833년 청나라 유방제[劉方濟·여항덕(余恒德)으로 알려졌다·1795~1854년] 신부가 조선에 들어와 포교했는데 이 유방제를 통해 다산은 종부성사를 받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쳐 허리에다 쇠사슬을 묶고 고행(苦行)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종교 심성
 
문학진 화백이 그린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 성인화〉.
  ― 우리나라보다 천주교 전파가 먼저 이뤄진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이 인구당 신자 비율이나 교세로 볼 때 압도적인 이유가 뭘까요.
 
  “한국인이 참 종교 심성이 독특해요. 진짜로 독특합니다. 뭐든지 들어오면 오리지널보다 더 해야 끝장이 나요. 그게 독특한 심성이라고 생각해요. 불교는 신라 시대 이차돈(異次頓·506~527년)의 순교로써 뿌리내리잖아요. 경주 남산이고 뭐고 전 국토가 불(佛)국토가 돼야 끝나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사면불 같은, 큰 바위에다 부처를 새겨 땅속에다 묻어놨잖아요. 묻은 걸 파가지고 부처님이 땅에서 올라왔다고 말하거든요. 경주 남산에 가면 전부 그런 부처들 아닙니까?
 
  또 호국불교까지 간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몽골족이 쳐들어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있는데 불경(팔만대장경)을 파고 앉았단 말이에요.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또 없죠.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와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중국에서 주자학이 양명학(陽明學)으로 다 넘어가도 우리는 ‘주자 만세, 만세’ 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마무리 지었잖아요.
 
  천주교도 신부님들이 오기 전에 자기들끼리 스터디그룹 만들어서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실천한 나라는 전 세계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 기꺼이 목숨까지 내걸었죠.
 
  “심지어 마테오 리치조차 성인이 안 됐거든요. 중국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훨씬 순교자가 많아요. 몇만 명이죠. 그런데 성인은 없거든요. 일본도 천주교 신앙이 일찍 전래됐지만 우리나라와 비교해 어림도 없죠. 영락교회나 순복음교회처럼 초대형 교회를 보세요. 외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어요.”
 
  ― 동학의 만민평등 사상이 천주학, 서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나요.
 
  “당연하죠. 동학이라는 말 자체가 서학의 개념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잖아요.
 
  동학은 서학에서 나온 것이죠. 그리고 동학의 조직 운영 방법까지 다 서학에서 가져간 거거든요. 사발통문 돌리는 것들이 다 천주교 방식을 그대로 가져간 겁니다.
 
  물론 내용이 달라졌으니 ‘이게 이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학이란 말 자체가 이미 서학을 의식하고 쓴 말이죠. ‘우리는 서학이 아니라 동학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체적’이라고 하지만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게 다 서학에서 나온 겁니다.”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정민 교수는 지난 1월 3일 대만으로 떠났다. 2월 말까지 대만중앙연구원에서 서학과 관련한 중국 쪽 자료들을 찾기 위해서다. 대만중앙연구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같은 기관이다.
 
  “대만 정부가 대륙에서 올 때 서학 자료를 많이 가지고 왔어요. 그게 어느 도서관에 콱 박혀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쪽 자료들을 들여다보려고요.”
 
  ― 늘 어디에 가시면 색다른 이야기를 찾으시던데….
 
  “정말 현장이라는 게 중요한데, 현장에 가면 생각지 않은 스토리가 나오고, 의도하지 않았던 길로 자꾸 끌고 가는 느낌이 듭니다.”
 
  ― 21세기 인공지능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문 원전을 읽고, 잊힌 옛 지식인의 사유와 그들의 지적 담론을 연구하는 까닭이 뭔가요.
 
  “공부를 하다 보면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질문의 차원은 변한 게 없고 질문의 내용만 바뀔 뿐이죠. ‘어떻게 보면 문화는 발전하지 않는다. 문화는 변화할 뿐이다’, 뭐 이런 생각이죠.”
 
  ― 그런가요?
 
  “문화 자체는 발전의 개념이 아니고 변화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되고 모든 문화는 그 시대에 가장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죠. 그런데 그 최적이라는 게 상대적인 것이기에… 신라 시대의 어떤 지식이나 고려 시대의 때의 지식, 혹은 조선의 18세기 지식 혹은 사유가 지금보다 300년 치 후지거나 낡은 게 아니거든요.
 
  요즘 젊은이가 취업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조선 시대 유학 지식인이 과거시험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다 똑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네들의 질문을 우리 시대의 질문으로 치환시켜주면 우리 삶에 유용한 처방이 될 수 있습니다.”
 
  정민 교수는 “해는 뉘엿한데 갈 길은 멀다. 공부의 길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공부와 삶이 따로 놀지 않고 서로를 간섭하며 팽팽히 지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