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
위기에 몰린 신라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9월에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별 성과 없이 회군하자 가장 낭패한 것은 신라였다. 당 태종의 친정(親征)으로 고구려가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국력을 기울여 <황룡사구층탑>(11회 도판 5)을 세우며 3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었는데, 정작 당 태종은 수십만 군사를 몸소 지휘하여 두 달 동안이나 안시성을 공격하고도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채 물러나게 되었으니 신라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황룡사구층탑> 건립 의미가 불확실하게 되어 국민적 결속력이 금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선덕여왕 측근의 진골 세력은 반(反)진골 세력을 회유하고 단속하기 위해 반진골 세력의 핵심이자 석(昔)씨 계열의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그 해 11월에 수상 자리인 상대등(上大等)으로 발탁해 들인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황룡사구층탑을 완성해내는 것으로 겨우 민심을 다잡아간다.
그러나 여왕 15년 3월에 수도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이 다음 달인 윤 3월에 용동성 일대 점령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신라의 위기감은 극도에 다다른다. 결국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승에 상대등 비담이 보수 계열의 반진골 세력을 이끌고 그들의 근거지인 왕성 동쪽 명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성을 공격해 들어온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한다.
이는 선덕여왕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 세력이 몹시 강성하여 일시 왕성의 안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니 당시 신라의 민심이 얼마나 불안하였던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이 탁월한 기지와 지휘력을 발휘해 결국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비담 일당을 1월17일에 모두 처형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짓는다. 이때 비담 등 반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당했다 하니 오히려 이 반란 사건을 계기로 진골귀족들은 신라 불국토 사상을 거침없이 펼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사실상 진골세력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결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진골 세력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진골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선덕여왕을 잃은 것이다. 반란군과 대치하던 중에 큰 별이 왕성으로 떨어지는 현상이 있었는데, 선덕여왕은 ‘여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반란 구호에 상심한 데다 별이 떨어지는 흉조가 겹치자 낙담하여 1월8일 68세 쯤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에 김용수(金龍樹)와 김춘추 부자를 중심으로 한 김알천(金閼川) 김술종(金述宗) 김유신 등 왕실 측근 진골 세력은 곤혹스러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신라에 출현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굳게 믿어 최초로 보위에 오르게 한 여왕인데 국가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이를 잘못 수습하면 민심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질 염려가 있었다. 더구나 황룡사 구층탑을 이제 막 건립해 놓고 그 공덕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구한(九韓)으로부터 조공받는다고 선전하지 않았던가.
새 미륵보살의 탄생
이에 신라에 하강했던 미륵보살은 그 역할을 끝내고 수미산 위에 있는 도리천(利天)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미륵보살 화신이 이를 계승하여 신라를 이끌어간다는 내용의 후계 구도를 마련하는 듯하다. 그래서 선덕여왕을 장사 지낸 낭산(狼山)을 도리천이라 하고 뒷날 그 아래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어 이를 현실로 증명해 보인다(도판 1).
이 내용은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이 미리 세 가지 일을 알다(善德王知幾三事)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왕이 병이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이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에 죽을 터인데 나를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가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이냐고 아뢰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돌아가니 여러 신하가 낭산의 양지에 장사지냈는데 10여년 뒤에 문무대왕이 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하였으니 이에 대왕이 신령스러웠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뒤를 이을 미륵화신으로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의 따님인 승만(勝曼) 군주(郡主)를 지목하니 이분이 진덕여왕이다. 승만군주 역시 미륵선화인 원화로 뽑혀 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왕력의 제27대 선덕여왕조에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그런 까닭으로 여왕이 섰다. 왕의 배필은 음(飮) 갈문왕(葛文王)이다”라고 하여 선덕여왕에게 음 갈문왕이라는 부군이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책 권1 ‘선덕왕지기삼사조’에서는 당 태종이 나비 없는 모란 꽃 그림을 보낸 것이 짝없는 자신을 기롱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선덕여왕은 분명 자신이 출가하지 않은 처녀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력의 기록은 성골 남자가 끊어져서 여왕을 세웠다는 일연의 이해 한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덕여왕조에는 배필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이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어떻든 이때 진덕여왕의 나이도 60세 가까웠을 듯하니,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으로 거의 같은 시기인 진평왕 22년(600) 전후한 시기에 원화로 뽑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덕여왕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통을 이었다.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이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에 의해 신라 개국 이래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였고 화랑의 구심점을 이루면서 민심을 규합하여 힘겹게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대응하다가 반란을 만나 공방전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그 충격으로 갑자기 돌아갔는데, 창졸간에 그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총공세에 직면해 있었다. 바로 전 해에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소득없이 회군하여 고구려의 기세가 한없이 높아진 데다 신라는 당 태종의 부탁을 받고 3만 군사로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적은 병력을 끊임없이 보내 고구려를 괴롭힘으로써 고구려를 말라죽게 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이 해 2월에 확정한다.
그래서 3월에는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대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로 산동반도 내주(萊州)를 출발하여 바다로 진격하게 한다. 한편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 592∼667년, 고종 때 태종의 이름인 세민을 피휘하기 위해 세자를 떼어 이적으로 개명하게 함)은 요동도 행군대총관이 되어 군사 3000여명을 거느리고 육로로 진격하게 한다.
수전에 능한 군사만 가려 뽑은 수륙양군은 7월에 고구려 영내에 들어가는데 여러 성을 산발적으로 공략함으로써 백성들이 농사에 종사할 수 없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8월에는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칙명을 내려 강남 12주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큰 배 수백 척을 건조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이므로 당 태종은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래서 진덕여왕의 등극 소식을 접하자 2월에 곧바로 진덕여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그 지위를 인정한다. 2월에 진덕여왕은 친(親)진골 귀족의 수장인 김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아 친진골 내각을 구성하여 이들에게 정치를 맡기니 국가의 중대사는 김알천, 김임종(金林宗), 김술종, 김무림(金武林, 자장율사의 부친), 김염장(金廉長), 김유신 등 6인의 원로들이 합의체 형식으로 처리하게 된다. 드디어 그 해(647) 7월에 연호를 태화(太和)라 고쳐 진덕여왕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간다(‘삼국사기’ 연표와 김유신 전에는 다음해인 648년 무신에 개원하였다 기록했다).
진덕여왕은 타고난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약 175cm)이나 되고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었다 한다.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불보살이나 전륜성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타고나는 32상 중의 한 상호에 해당하니 이런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진덕여왕도 일찍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지목돼 원화로 뽑혔던 모양이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 장군 우진달의 공격을 받아 7월에 석성(石城)과 적리성(積利城)이 함락되는 대당전을 치러야 했으므로 신라를 응징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의 위기를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고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을 보내 현재의 경북 개령, 인동 일대인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3성을 공격해와 김유신이 이를 힘겹게 물리친다.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으로 막는데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백제의 3000 군사를 당적할 수 없었다. 이에 비녕자(丕寧子)로 하여금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싸우다 죽게 하니 함께 싸움터에 나와 있던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소년 낭도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적진으로 달려들어 맹렬하게 싸우다 뒤따라 전사한다.
비녕자의 부탁으로 거진의 출진을 말리려고 말고삐를 놓지 않다가 거진의 칼을 맞아 팔이 잘린 종 합절(合節)도 주인 부자가 차례로 싸우다 죽자 뒤따라 적진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보고 군사들이 감격하여 비로소 사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래서 겨우 백제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당 태종의 집요한 고구려 침공
한편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친 자신감으로 기고만장해 있다가 당나라가 물량공세에 의한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꿔 소규모 병력을 끊임없이 보내 지속적으로 침략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크게 당황한다. 그래서 이해 12월에는 보장왕의 둘째 왕자인 막리지 고임무(高任武)를 사죄사로 보내 당 태종의 체면을 살려주며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정관 22년(648), 즉 진덕여왕 2년 무신 정월에 돈황 출신 서역계 사람으로 자신의 친딸 단양(丹陽) 공주의 부마가 된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 ?∼653년)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아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로 내주를 출발하여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게 한다. 그리고 4월에는 오호도(烏胡島; 산동반도 등주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 열도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섬) 진장(鎭將) 고신감(古神感)으로 하여금 또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계속 침공하게 하니 설만철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박작성(泊城)을 함락하고 고신감은 역산(易山)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다음 회군한다.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의지는 집요하여 이해 6월에는 고구려가 이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으므로 명년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기로 전략을 세운다. 그리하여 다시 군량선과 병선을 마련하기 위해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에 징발을 면하였던 중국의 남서쪽인 검남도(劍南道) 지역에 선박 건조를 명령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7월에는 좌우부장사(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로 보내서 나무를 베 배를 짓도록 하니 큰 것은 길이가 100자, 폭이 50자에 이르렀다.
이들 배는 물길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산동반도 내주로 집결했다. 이렇게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의지가 확고하므로 신하들은 감히 이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8학사 중 한 사람으로 사공(司空)의 자리에 있던 방현령(房玄齡, 578∼648년)이 병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 목숨을 내걸고 고구려 정벌의 중지를 간청하는 상표(上表)를 올린다. 방현령의 둘째 아들인 방유애(房遺愛, ?∼653년)는 태종의 고양(高陽)공주에게 장가들어 둘 사이는 사돈간이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부터 중국에 해를 끼쳐 근심거리가 되어 온 것은 돌궐을 비롯한 서북쪽 사막지역의 유목민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고구려는 역대로 정벌하지 못하였으나 폐하는 연개소문이 국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한다 하여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가서 죄를 묻고 요동성을 함락하여 수십 만의 포로를 잡아왔으니 전대의 부끄러움을 씻은 것이며 그 공은 전왕에 비하여 만 배나 큰 것이다.
그러니 ‘주역(周易)’에서 말한 진퇴존망(進退存亡; 나아가고 물러나며 살고 죽음)이 다 때가 있다는 이치와 ‘노자(老子)’에서 말한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음)과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음)의 이치를 깨달아 고구려 정벌을 중지해주기 바란다. 폐하의 위대한 이름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 만하다 할 수 있고 개척한 땅은 그칠 만하다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변경 오랑캐일 뿐이니 인의(仁義)로 대한다거나 상례(常禮)로 꾸짖을 일이 아니다. 만약 멸종시키려 든다면 궁지에 몰린 짐승이 대드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죄없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가면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그 가족들의 원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고구려가 신하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거나 백성을 학대했다거나 오래 놔두면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는 3가지 사실이 아니라면 중국을 번거롭게 할 일이 없다. 안으로는 전왕을 위해 부끄러움을 씻어주고 밖으로는 신라를 위해 복수해준다고 하나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게 크겠는가.
원컨대 폐하는 황조(皇祖, 노자가 이씨의 시조라 하여 이렇게 일컬었다) 노자가 말한 지족(知足)의 가르침을 받들어 만대에 우뚝 솟은 이름을 지키시오. 퍼붓듯이 은혜를 베풀고 관대한 조칙을 내려 봄기운에 따라 못물이 펼쳐가듯 고구려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시오. 물결을 헤쳐나갈 배들은 불사르고 응모한 군중을 헤쳐버리면 자연이 중국과 오랑캐가 경축하며 서로 의지하여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편안해 질 것이다.’
당 태종은 이 표문을 읽고 방현령의 며느리가 된 자신의 딸인 고양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위중한데 아직도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있구나.”
방현령의 죽음을 앞둔 최후 충간이 당 태종의 마음을 상당히 흔들어 놓았던 듯하다. 그래서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려는 쪽으로 정책을 바꿔나간다.
신라 태종이 당 태종을 만나다
이에 가장 다급해진 것은 신라였다. 그래서 동지사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에서는 윤 12월에 김춘추를 특사로 파견하여 고구려 정벌을 계속해줄 것을 간청한다. 이때 김춘추는 18세가 된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 631∼665년)을 데리고 갔는데, 당 태종은 김춘추가 실제로 신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광록경(光祿卿) 유형교(柳亨郊)를 보내 성대히 맞아들인다. 그리고 김춘추의 영웅다운 생김새에 반하여 더욱 이를 후대한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 45세였다.
김춘추가 국학(國學; 현재의 대학)에 나아가서 석전(釋奠; 공자께 드리는 제사) 의식 및 강론하는 것을 보고싶다 하니 당 태종은 이를 허락한다. 그리고 김춘추가 학식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문장 실력과 글씨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 전 해인 정관 21년(647) 7월에 스스로 짓고 써서 돌에 새겨놓은 최초의 행서비(行書碑)인 <온천명(溫泉銘)>(도판 2)과 <진사명(晋祠銘)>(도판 3)의 탑본과 자신이 칙명을 내려 새로 편찬하도록 하여 근일에 갓 간행해 낸 ‘진서(晋書)’ 한 벌을 선물하여 자신의 문예 실력을 과시한다.
사실 이제까지 비문 글씨는 전서나 예서·해서 등 해정한 글씨로만 써왔던 것인데 당 태종은 <온천명>과 <진사명>을 자유분방한 행서체로 써내 최초의 행서비 형식을 창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서비 형식이 창안되자마자 바로 그 다음 해에 당 태종 본인의 손에 의해 김춘추에게 선사됨으로써 신라에 직접 전해지게 되었다.
김춘추가 마음에 든 당 태종은 연회를 베풀어 환영하며 많은 금과 비단 등을 선물로 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한다. 이때 김춘추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신의 본국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으나 중국 섬기기를 여러 해 해왔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마음대로 침략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도 대거 침입해 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여 조공하러 다니는 길조차 막아 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가 군대를 빌려주어 흉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될 터이니 배타고 와서 직분을 다하는 것도 다시 바랄 수 없습니다.”
당 태종은 정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며 군대 20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김춘추는 또 의복을 당나라 제도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 당 태종은 당장 내궁으로부터 김춘추와 그 일행이 입을 수 있도록 품계에 맞는 옷을 내다 입히도록 한다. 김춘추가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며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한심한 대목이다.
기분이 좋아진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특진(特進)이라는 최고위 벼슬을 내려 변방 국왕 이상의 예우를 하고 이제 겨우 18세밖에 안된 김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내려준다. 그리고 정관 23년(649) 2월 계사일에 김춘추가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3품 이상의 조관은 모두 나와 전별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린다. 일찍이 볼 수 없던 파격적인 예우였다. 김춘추는 감격한 나머지 “신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으니 폐하를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하게 하겠다”고 맹세하며 당장 김문왕으로 하여금 남아서 당 태종을 숙위하도록 한다.
김춘추가 당 태종을 격동시켜 고구려 침략을 부추기려고 당나라에 간 사실을 안 고구려는 서해 바다에 순라선을 배치하여 중국에서 돌아오는 김춘추를 잡아 죽이려 한다. 결국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수군 소속의 순라선에 김춘추 일행이 탄 배가 붙잡히고 김춘추는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온군해(溫君解)라는 시종이 김춘추와 의관을 바꿔 입고 대신 죽으매 김춘추는 그 틈을 타 작은 배에 몸을 숨기고 위기를 겨우 모면하여 환국한다. 온군해의 용모가 김춘추와 비슷하여 고구려 군사가 속아 넘어 갔다니 이것도 미리 대비했던 계책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뒷날 신라의 태종이 되는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인 이세민과 직접 면대하여 외교 교섭을 벌이고 의도했던 외교적 성과를 만족할 만큼 얻고 돌아오게 되니 신라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오르고 고구려와 백제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20만 원병이 곧 파견되리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삼국을 진동시켰기 때문이다.
보살의 시대는 가고
그러나 당 태종은 김춘추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김춘추가 떠난 지 석달 만인 5월 기사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제일 낭패한 것은 김춘추였고 더욱 실망한 것은 신라 백성들이었다. 당 태종이 유조(遺詔)를 남겨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라 했다 하니 이제 신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백제는 때를 놓치지 않고 8월에 장군 은상(殷相)이 정병 7000을 거느리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여 함락한다. 진덕여왕은 김유신과 김죽지(金竹旨), 김천존(金天存) 등으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니 김유신은 적의 첩보를 역이용하는 첩보전으로 이를 물리친다.
신라는 어떻게 하든지 다시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683년)의 비위를 맞춰 당나라 원군을 끌어와야 했으므로 고종 영휘(永徽) 원년(650)부터 스스로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6월에는 김춘추의 장자인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진덕여왕이 직접 지어 비단에 무늬 놓아 짜낸 대당태평송(大唐太平頌) 5언 시축(詩軸)을 선물로 가져간다.
당나라의 융성과 번영을 칭송한 시였으니 당 고종이 그 정성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영휘 2년(651) 2월에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인 23세의 청년 김인문(金仁問, 629∼694년)이 조공사겸 숙위 왕자가 되어 당나라로 떠난다. 바로 밑의 아우인 김문왕과 교대하기 위해서였다. 김인문이 마음에 들었던 당 고종은 바다를 건너온 노고와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며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벼슬을 특별히 내려준다.
이로부터 김인문은 한 살 아래인 당 고종과 깊은 인연을 맺어 우정어린 신뢰를 바탕으로 신라와 당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외교적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나가는데 진력하게 된다. 그는 대부분의 세월을 당 고종 측근에서 보내다가 결국 66세로 당 고종보다 11년 후에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고 시신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능 아래에 배총(陪)으로 묻히게 된다.
장차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오직 조국을 위하는 마음으로 아우를 대신해 숙위왕자로 잠시 머물다 가겠거니 하고 온 걸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진덕여왕 8년(654) 3월에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부친 김춘추가 신라왕으로 추대되어 그는 진짜 왕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동안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라서 신라를 불국토로 이끌어 나갔던 것인데 두 여왕을 거치면서 그들을 구심점으로 하는 화랑 조직이 충분히 그 진가를 발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하여 진흥왕 시절에 확장해 놓은 국토를 잘 지켜 왔었다.
선덕여왕을 원화로 받들며 성장한 화랑 1세대인 김유신 세대가 벌써 60대로 접어들어 국가 원로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원화의 기능은 이제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미륵보살의 출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당이라는 의지할 만한 우방이 생겨 고구려와 백제를 확실하게 견제해 주니 이제 구차스럽게 미륵보살에 의지하여 민심을 결집시키지 않아도 백성들의 사기는 충천하고 민심은 하나로 결집되게 되어 있었다.
선덕여왕 말년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보수 반동세력들이 모두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일망타진된 것도 민심을 결집하는데 더 없이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러니 이제 진골 세력이 국정을 뜻대로 움직여갈 수 있었다.
그래서 진흥왕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계승하고 있던 김춘추가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처남인 김유신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추대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김유신은 화랑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전 신라의 군사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진골 귀족의 수장이던 김알천 장군이 보위에 오르기를 극구 사양하고 김춘추를 추대하여 보위에 오르게 하였던 것이다. 혈통으로 보아도 그는 진흥왕의 방계였을 터이니 순수 진골 혈통이어야 한다는 명분에 맞지도 않았다. 이래서 여왕은 양대에서 끝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진정한 부계 중심적 진골왕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김부식의 유교사관과 일연의 불교사관의 한계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여왕이 양대만 출현했다는 피상적인 현상으로만 파악한다면 여왕 출현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이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해 내면서 성골(聖骨)이라는 허상(虛像)의 골품을 하나 더 추가하고 그 골품이 끝나가는 현상으로 여왕의 출현을 합리화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유교사적 안목으로 볼 때 이런 방법 외에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부식은 진덕여왕이 돌아간 사실을 기록한 다음 아래와 같은 주석을 덧붙여 놓고 있다.
“나라 사람들이 일컫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에 이르기까지 28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왕에 이르기까지를 진골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도 ‘신라기(新羅記)’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왕족은 제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부른다고 하였다.(國人謂 自始祖赫居世 至眞德 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王 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 新羅記曰 其國王族 謂之 第一骨, 餘貴族 第二骨.)”
나라 사람들의 말이라 하여 그 말의 출처를 모호하게 얼버무린 것부터가 김부식이 꾸며낸 말인 것을 보여주는데, 당나라 사람 영호징이 쓴 ‘신라기’를 구차스럽게 인용하고 있으나 제1골과 제2골의 의미가 성골과 진골의 존재를 의미한다기보다 오히려 진골과 그 밖의 귀족을 의미하는 내용이라서 성골이라는 골품은 없었고 진골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런데 이런 김부식의 유교사적 합리성 부여가 뜻밖에 불교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삼국유사’로 이어지면서 더욱 뚜렷하게 윤색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와 이를 확실한 역사사실로 굳혀 놓고 만다. 고려 충렬왕(1275∼1308년)때 석일연(釋一然, 1206∼1289년)이 중국측 불교 역사책인 ‘고승전(高僧傳)’과 ‘불조통기(佛祖統紀)’의 체제를 혼합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불교사적 안목으로 편찬해 놓은 것이 ‘삼국유사’인데, 거기서 성골의 존재를 재확인해 주었다. ‘삼국유사’ 권 1 왕력(王曆)에서 신라 제 27 선덕여왕조의 세주(細註)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성골 남자가 다하였기 때문에 여왕이 섰다.(聖骨男盡, 故女王立.)”
김부식이 처음 꾸며내느라 모호하게 표현했던 내용을 한층 분명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다. 아마 일연은 김부식이 모호하게 표현해 놓은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놓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700여년 전의 신라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연이 당시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여왕 출현의 배경을 굳이 불교사적인 시각으로 교정하여 보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김부식이 모호하게 표현해 놓은 사실을 더 간명직절(簡明直截; 간단하고 명쾌하게 일직선으로 끊어냄)하게 표현해 놓는 것을 자기 몫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런 능력은 오히려 일연이 타고난 역사가다운 자질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
김춘추는 진지왕의 장손이자 이찬 용수(龍樹)의 장자이며 진평왕의 외손자로 가장 순수한 진골 혈통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제2의 석가로 불리는 대승불교의 중흥조인 용수보살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었다.
용수보살은 용궁에 들어가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러니 김춘추는 신라를 화엄불국세계로 만들어 나갈 자격을 타고난 인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의 용모는 매우 잘생겨서, ‘용과 봉의 모습이요 하늘에 뜬 해와 같은 얼굴(龍鳳之姿, 天日之表)’이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잘생겼던 당 태종조차 한눈에 반할 정도였으니 그만한 기대는 걸어볼 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물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도량이 넓고 지혜가 출중하며 덕이 높고 문무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를 겸전했었다 한다. 그러니 거의 전인적인 덕목을 갖춘 현군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 이런 어진 임금이 등극했다는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에 위협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무열왕 원년(654) 10월에 말갈병을 이끌고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북쪽 33성을 빼앗는다.
그러자 무열왕은 2년(655)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둘째 왕자인 김인문이 당 고종 측근에서 숙위왕자로 시위(侍衛)하고 있었으므로 이 요청은 바로 받아들여져 3월에 당 고종은 영주(營州)도독 정명진(程明振, ?∼662년)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 592∼667년)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니 이들은 5월에 귀단수(貴端水)를 건너가 신성(新城)을 함락하여 불지르고 돌아온다.
그런데 무열왕은 등극하면서 자신의 재위 기간에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자신과 한 약속을 결행하려 한다. 백제 의자왕 손에 잡혀 죽은 큰딸과 큰사위 및 그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대장부로서 스스로 약속했던 ‘백제 삼키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우선 큰 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셋째 왕자 문왕을 이찬(伊), 넷째 왕자 노단(老旦)을 해찬(海), 다섯째 왕자 인태(仁泰)를 각찬(角), 여섯째 왕자 지경(智鏡)과 일곱째 왕자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아 왕실의 지위를 튼튼하게 한 다음 손위 처남인 김유신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인 지조(智照)공주를 환갑이 된 김유신에게 처녀로 시집보낸다.
백제를 멸망시키자면 신라의 군사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는 김유신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신은 9월에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빼앗는데 이미 그전부터 부산(夫山)현령으로 있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의 권신인 좌평 임자(任子)의 종이 되어 있던 조미곤(租未坤)을 간첩으로 삼고 임자를 포섭하여 백제의 기밀을 모두 탐지해내고 있었다.
이에 백제를 삼키는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그런데 의자왕은 신라의 계속되는 불행에 안도하며 신라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교만과 사치 및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세월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에도 세태를 바르게 보는 눈이 있었으니 좌평 성충(成忠)이 그런 사람이었다. 성충은 의자왕이 환락에 탐닉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의자왕 16년(656) 3월에 이를 극간하게 되는데 의자왕은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어 죽게 한다. 성충은 죽기 전에 이런 상소를 올려 백제의 멸망에 대비하라고 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원컨대 한마디 하고 죽게 하십시오. 신이 일상 시운의 변화를 관찰해보니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겠는데 무릇 용병에는 반드시 그 지세를 택하여 상류를 차지하고 적을 맞아야 그런 연후에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국의 군대가 쳐들어 오면 육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기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험악하게 막힌 곳에 의지한 연후에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의 이런 충간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임자와 같은 간신의 말을 믿고 기고만장하여 환락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신라는 무열왕 3년(656) 숙위왕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軍主)에 임명하고 7월에는 김인문 대신 셋째 왕자인 우무위장군 김문왕을 숙위왕자로 당나라에 보낸다.
그러나 김인문과 정이 깊었던 당 고종은 다시 김인문을 불러들이는데, 귀국하여 부왕의 백제 병탄 의지를 확인하고 돌아간 김인문은 당 고종을 움직여 백제 정벌군을 발동하도록 막후에서 교섭한다. 신라에서는 이와 때를 맞춰 백제를 정벌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나간다.
그런데 마침 무열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경북 인동 지역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을 침공해 온다. 신라는 이것을 빌미삼아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군사를 빌리는 한편 8월에는 아찬 김진주(金眞珠)를 병부령(兵府令)으로 삼아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다. 때 맞추어 다음해인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전시 내각을 김유신 중심으로 일원화시킨다.
드디어 백제를 병탄할 기회가 온 것이다. 현경(顯慶) 5년인 이 해 3월 신해일에 당 고종은 김인문의 말을 듣고 13만 대군을 발동하여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神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산동반도의 내주(萊州) 성산(城山)을 출발시킨다.
그리고 무열왕을 우이도(夷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본국 병사를 이끌고 협공하도록 한다. 이에 무열왕은 5월26일에 김유신, 김진주, 김천존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왕경인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18일에 현재 경기도 이천인 남천주에 도착한다. 죽령을 넘어 남한강 줄기를 따라 충주·여주를 거쳐 왔을 것이다.
그리고 태자 김법민을 신라 수군 기지인 남양으로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현재 덕적도인 덕물도(德物島)로 가서 소정방 군대를 맞이하게 한다. 덕적도는 고구려 수군이 점거하고 있는 강화만과 백제 수군기지인 아산만 및 신라 수군 거점인 남양만을 견제할 수 있는 서해상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이 전략적 요충지를 탈취당했다는 것은 벌써 해전에서 승기를 놓친 것이었다. 태자의 안내를 받으며 덕적도 앞 소야도(蘇爺島)에 정박한 소정방은 7월10일에 신라 군대와 백제 왕도인 사비성 아래에서 만나 이를 함락하자는 군기(軍期)를 정한다.
이 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곧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김품일(金品日), 김흠춘(金欽春)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이끌고 이에 응하게 한다. 아마 김유신은 왕의 행재소가 있는 이천에서 음죽, 죽산, 진천, 청주, 문의, 회덕을 거쳐 지금의 연산인 황산(黃山)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것이고 상주에서 추풍령을 넘은 군사는 황간, 영동, 옥천을 거쳐 연산으로 진격해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7월9일에 황산벌에 이르렀는데 백제 장군 계백(階伯)이 5000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요지에 진치고 있어 좀처럼 이를 격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장군 품일은 이제 겨우 16세 난 소년이던 아들 화랑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게 하는 용맹을 보여줌으로써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백제 장군 계백이 관창을 사로잡고 보니 겨우 16세밖에 안된 미소년이라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다가 다시 쳐들어오므로 할 수 없이 죽여 목을 말에 매달아 보냈다는 얘기는 지금도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전쟁 비화(悲話)이다. 이때 장군 김흠춘의 아들 반굴(盤屈)도 소년 화랑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관창처럼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다 한다. 대장군 김유신의 친조카였다.
결국 계백의 결사대 5000인은 황산벌 싸움에서 김유신의 5만 군사에게 전멸당하고 마는데 어찌나 용감히 싸웠던지 김유신의 대군은 소정방과 약속한 날짜인 7월10일에 대어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정방과 김인문이 거느린 군대는 의자왕이 지금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瓦草里, 기와풀 즉 기벌) 부근이라고 생각되는 기벌포(伎伐浦)의 요새를 막지 않고 당나라와 신라 선단으로 하여금 이를 통과하게 함으로써 쉽게 1만 백제 수비군을 격파하고 사비성 남쪽까지 진격해 올 수 있었다.
이에 소정방은 군기(軍期)를 못맞추고 7월11일에 당도한 신라군에 책임을 물어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군문(軍門)에서 참수하려 한다. 대로한 김유신은 황산벌의 격전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군기에 늦었다 하여 죄를 삼는다면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먼저 당군과 결전을 벌인 다음에 백제를 격파하겠다고 소리친다.
그때 김유신의 머리칼은 하늘로 솟구치고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빠져 나왔다 한다. 이 정경을 본 소정방은 겁을 먹고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의 권고에 못 이기는 체 김문영을 놓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12일에 나당연합군은 사방으로 사비성을 포위공격해 들어갔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성충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한없이 후회하며 몇차례 중신을 소정방에게 보내 퇴군해줄 것을 애걸해보았으나 들어줄 리가 없다. 애당초 이 침공은 신라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감행한 것인데 그에다 대고 퇴군을 애걸했다니 이렇게 상황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사비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7월13일에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扶餘隆, 615∼682년)과 함께 밤을 도와 웅진성으로 달아나고 사비성은 왕자 태(泰)가 자립하여 지키다가 미구에 항복하고 만다. 이에 웅진성으로 달아나 있던 의자왕은 더 버티지 못하고 우선 태자 부여융과 대좌평 천복(天福)을 보내 신라 태자 김법민에게 항복하게 한다.
법민은 진외가로 6촌 형에 해당하는 부여융을 말 아래에 꿇어앉게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렇게 꾸짖었다 한다.
“전에 너의 아비가 죄 없는 내 누이동생을 죽여 옥중에 묻었기에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 때리게 했었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수중에 있구나.”
부여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한다.
웅진성으로 피란해 있던 의자왕은 할 수 없이 7월18일 태자와 좌우를 거느리고 나와서 소정방에게 항복하고 만다. 무열왕은 금돌성에 총본영을 차려 놓고 전쟁을 총지휘하다가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7월29일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所夫里城), 즉 사비성(泗城)으로 나와 전승을 알리는 노포문(露布文)을 당나라에 보내고 8월2일에는 대연을 베풀어 장병을 위로하고 승리를 경축한다.
이 자리에서 무열왕과 소정방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당하에 앉게 하였는데 그도 부족하여 가끔 의자왕으로 하여금 돌아다니며 술을 따르게 하였다 하니 그 수모를 받고도 목숨을 끊지 않은 의자왕이 측은하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다. 그런 용렬한 인물이니 망국의 왕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백제 좌평 등 중신들은 이 광경을 보고 흐느껴 울지 않는 자 없었다 하는데 그들에게 그만한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다 하니 다행한 일이었다.
9월3일 소정방은 군사 1만을 남겨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사비성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10여 만의 남은 군사를 이끌고 의자왕 등 백제 왕족과 신료 93인, 백성 1만2807인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귀환하니 백제는 건국 678년 만에 그 사직이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의 국세는 5부 37군(郡) 200성(城) 76만호(戶)였다 한다.
부여 정림사탑에 새겨진 비명
부여에 가면 금성산 아래 읍내 중심부 길가 평지에 정림사지(定林寺址)가 있고 그 사지 안에 국보 9호인 <정림사지오층석탑>(도판 4)이 서 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탑으로 현존하는 두 기의 석탑 중 하나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국보 11호 <미륵사지구층석탑>(9회 도판 6)이다.
<미륵사지구층석탑>이 목조 탑을 석조로 번안한 초기 양식으로 아직 번잡한 목조적 결구의 흔적을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했던 데 비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복잡한 목조적 결구를 대담하게 생략하여 함축함으로써 단순 경쾌하면서도 전아한 석탑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일러도 무왕(600∼640년) 말년 경이거나 의자왕(641∼660)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기단과 초층 탑신에 별개의 기둥을 썼을 뿐 2층 이상의 탑신에서 기둥을 돋을새김으로 표시한 것이라든지, 소루(小累)나 첨차(詹遮) 형태로 돌을 깎아 지붕 추녀를 상징한 옥개석을 받침으로써 포작(包作)을 상징한 것 등이 <미륵사지구층석탑>보다 한 단계 진전한 양식 기법이기 때문이다. 탑신석 크기의 체감률을 급격하게 줄여간 것도 탑의 경쾌미를 드높이는 세련도라 할 수 있고, 옥개석을 얇게 쓰면서 그 크기의 체감률을 완만하게 한 것 역시 경쾌미를 증대시켜 주는 세련된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미륵사지구층석탑>보다 진전한 양식 기법이다.
따라서 이런 정도의 양식 진전이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30년에서 50년쯤의 시차는 있어야 할 듯하니, 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의자왕 말년에 사치와 호사를 일삼던 일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림사(定林寺)라는 절 이름이 ‘계림을 평정한다(平定鷄林)’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이 탑의 초층 탑신석 4면에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공적을 찬양하는 글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비문)>(도판 5)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평제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건립된 지 얼마 안되는 새탑에 소정방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문을 새기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듯하다.
소정방이 현경 5년(660) 7월29일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다음 백제의 옛 땅에 5도독 37주 250현을 설치해놓고 9월3일에 회군하였다고 하는데, 이 비문은 8월15일에 지었다 하고 있다. 그러니 이 비문은 대강 글을 지은 날부터 초층 탑신석 4면에 새겨 나가기 시작하였을 듯하다. 그래서 소정방이 회군해 가는 9월3일 이전에 그 새기는 작업을 끝냈을 것이다. 침략군 총사령관의 서슬퍼런 명령에 노예로 전락한 백제 각공들의 노역(勞役)은 밤낮없이 어어졌을 터이기 때문이다.
비문을 지은 이는 종군문사였던 능주장사(陵州長史) 하수량(賀遂亮)이고 글씨를 쓴 이는 낙주(洛州) 하남(河南) 출신 권회소(權懷素)라 밝히고 있다.
글의 내용은 백제를 정벌한 이유와 그 과정을 밝히고 의자왕과 태자융 및 대좌평 사타천복(沙咤天福) 등 700여 명의 왕족과 귀족을 포로로 잡아간다는 등 그 뒤처리 과정도 대강 밝히는 것인데, 문체는 당시에 유행하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 형식이다. 글씨도 역시 당시에 최고의 발전을 이루고 있던 해서체이다. 그런데 짜임새가 매우 엄정하고 힘찬 기운이 가득하되 지나치게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특징을 보이는 것이 초당 삼대가 중 맨 마지막 명필에 해당하는 저수량(楮遂良, 596∼658년)의 글씨와 방불하다.
그래서 일찍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는 그 문집에서 이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우리 동쪽나라에 이르러서는 신라나 고려의 금석문 일체가 모두 구양순(歐陽詢, 557∼641년)법이었는데, 평백제탑비는 저수량체로 되었다.”
또한 청나라 말기의 금석학 대가인 강유위(康有爲, 1858∼1927년)도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 이 비문 글씨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짜임새가 엄정하니 육조체를 일변시켜 벌써 안진경(顔眞卿, 709∼785년)과 유공권(柳公權, 778∼865년)의 선구를 열어 놓았다.”
이 비문이 새겨지는 것이 당 고종 현경 5년으로 저수량이 죽은 뒤 2년 만의 일이므로 당시 서도계를 주름잡던 저수량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 뒤를 이어서 세워지는 것이 <유인원기공비(柳仁願紀功碑)>(도판 6)이다. 이 비의 비문 글씨 역시 굳세고 산뜻하며 아리따워 저수량체임을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당시 유행하던 글씨체로 새겨진 것이다.
<유인원기공비>는 백제 멸망 후 부여에 머물러 있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부여복신(扶餘福信)과 부여풍(扶餘豊)을 정점으로 한 백제 광복군들을 물리치고 그 전승 기념으로 부여에 세운 전승기공비이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체로 문무왕 3년(663) 경이라고 추정되는데 비석이 비바람에 쉽게 마멸되는 대리석질이라 글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짓고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원래는 부여 부소산성 안에 있던 것을 지금은 부여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귀부는 잃어버렸고 비신은 세로로 갈라져 철심으로 이를 접합해 놓고 있다. 웅혼한 조각 기법으로 새겨 놓은 이수(首; 용틀임으로 장식한 비석 머리)에는 중앙에 전액(篆額)을 썼던 부분만 남아 있고 전서 글씨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든 이 두 비석 글씨는 우리 손으로 한 것이 아니고 당나라 사람이 짓고 쓴 것이지만 우리나라 영토 안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장차 우리 글씨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등 왕족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서해를 건너 장안으로 개선해 돌아가 당 고종에게 바치니 당 고종은 소정방의 무례를 꾸짖고 의자왕 등 왕족과 귀족들을 그 지위에 맞게 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노경에 접어들어 참혹한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의자왕(600년 경∼660년)은 수치와 공포, 분노 등 심리적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역만리 장안에서 곧 병들어 죽는다.
수모를 당하기 전에 고국에서 망국의 순간 자결한 것만 못한 죽음이었다. 당 고종은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장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며 남조 진(陳)나라 마지막 황제로 수나라의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와 죽은 진숙보(陳叔寶, 553∼604년)의 무덤 곁에 묻어주도록 한다. 비석을 세우는 것도 허락했다 하니 지금 서안 부근의 고총 속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혹시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한편 이종사촌형인 백제 의자왕을 파멸시킨 신라 무열왕은 9월3일 의자왕과 그 일족이 당나라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나서 곳곳의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해 가며 회군하기 시작하여 11월22일에 서라벌로 돌아온다. 곧 논공행상을 베푸는데 백제의 중신으로 신라에 항복하여 귀순한 자들에게도 상당한 지위와 재물을 내려주게 된다.
그러나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켜 자신의 큰딸과 그 가족을 몰살한 이종사촌형 의자왕의 몰락을 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좌우불고하고 한길로만 치달려 오다가 그 목표를 이루어내자 갑자기 삶의 의욕을 상실했던 듯하다. 그래서 의자왕이 파멸한 그 다음 해인 무열왕 8년(661) 6월에 58세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채 1년도 못산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이민족의 군대를 끌어들여 무고한 동족의 생명을 수없이 빼앗고 또 포로로 잡혀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종이 되어 헤매게 한 과보가 그의 생명을 단축시켰을지도 모른다.
중국식 비석인 태종무열왕릉비
이에 태자 김법민이 36세로 왕위에 오르니 이제야 진골왕통이 자연스럽게 부자세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진덕여왕 이전에는 생전에 왕호가 있었지만 무열왕부터는 중국식을 좇아 왕호를 갖지 않았기에, 돌아가자 무열(武烈)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또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까지 올린다. 이렇게 독자 연호를 세우지 못하고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무열왕이었고 시호와 묘호를 최초로 받은 것도 태종무열왕이었다.
그는 이미 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고 그 아들들을 당나라 조정에 상주하게 하는 등 당문화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중국식 시호와 묘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왕릉을 법흥왕 이래 김씨왕들의 세장지(世葬地; 대를 물려가며 장사 지내는 곳)인 서라벌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쓰면서 그 앞에 최초로 중국식 비석을 만들어 세우게 된다.
그 비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 당시까지만 해도 비록 파손된 채나마 남아 있었던 모양인데, 퇴계가 경주 유생들이 그 비석을 깨뜨려 벼루를 만들어 쓴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로 이를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 비석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현재는 그 쪼가리 하나 찾을 수 없으나, 비석을 짊어지고 있던 귀부(龜趺; 거북 모양을 한 비석 받침)와 용틀임으로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首)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국보 25호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도판 7)라는 이름으로 능 앞에서 잘 보존되고 있다.
백색 화강암으로 거북이 막 목을 빼고 움직이려는 듯한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귀부는 힘주어 딛고 있는 앞·뒤 발에서나 힘차게 뽑아내는 귀두(龜頭)의 기세에서 통일의 힘찬 기상을 실감할 수 있다. 또 4겹 육각형의 귀갑(龜甲)무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귀갑 둘레의 구름 무늬 띠 장식의 날렵하고 산뜻한 표현에 이르면 절도 있는 화랑정신이 대강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는 듯하다.
여섯 마리의 용이 좌우 세 마리씩 나뉘어 머리를 가지런히 땅에 댄 채 서로 꼬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듯 여의주(如意珠) 하나를 각기 뒷발로 받쳐든 모습으로 표현된 이수의 조각기법 역시 용틀임에서 힘찬 기상이 넘쳐 흐른다. 특히 버팅기는 발의 표현이나 팽팽하게 힘주어 뒤틀고 있는 몸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짜릿한 쾌감이 전해져 오는데, 이런 표현 능력을 아마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 했던 모양이다. 재질 선택도 신중을 기하여 귀두 부분에 은은한 붉은 기가 엿보이는 돌을 씀으로써 더욱 생동감 넘치는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비석을 통해서 당시 신라가 초당(初唐, 당나라를 4기로 나누는 시대 구분 명칭, 618년에서 712년 사이를 말한다.)문화를 직수입하여 자기화할 수 있는 고도의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초당시기에 글씨의 발전이 극치를 이룬 것과 때를 같이하여 또한 비석 양식이 완벽한 발전을 보이니 이수와 비신(碑身), 귀부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는 전형(典型)이 이루어진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바로 이런 초당 비석 형식에 가장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 3년(663)경에 세워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이 비석은 문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 629∼694년)이 짓고 썼다 한다.
김인문은 유(儒), 불(佛), 선(仙)에 통달하고 시문(詩文)은 물론 사(射), 어(御, 말타기), 서(書)에 능통한 재사로 당나라 제실에 22년이나 숙위하다가 그곳에서 돌아간 당나라통 왕자였다. 그러니 초당 삼대가의 글씨를 충분히 익혀 글씨가 몹시 아름다웠을 터인데 비신이 흔적 없이 사라져 비문 글씨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혹시 어느 기회에 이 비신의 파편들이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출토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김인문의 글씨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수에 남아 있는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전액(篆額; 비석에서 이수의 중앙에 전서로 비의 이름을 새기는 것)의 필법이 마치 삼국시대 오(吳)나라에서 만들어 남긴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도판 8)와 같이 예서(書) 필법으로 전(篆)을 내어 서리듯 나르는 신묘한 필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아, 본문 글씨도 초당 삼대가의 그것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해서의 극치였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현존한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와 귀부의 조각이 거의 동시대에 세워지는 당나라 <이적비(李勣碑; 677년 건립)(도판 9)를 비롯한 많은 당나라 비석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사실적이며 활기에 차 있고 날렵하고 산뜻한 무늬로 장식되어 조각 기법면에서 훨씬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는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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