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연평해전 비화

醉月 2008. 6. 16. 20:40
박정성 전 해군 2함대사령관의 연평해전 비화
“전투 앞두고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상부 지시에 곤혹”
 
 
‘NLL 도발’ 예상하고 7개월 전부터 실전 훈련
“너무 조이지 말라”는 기무사령관의 ‘충고’
‘먼저 맞고 싸우라’는 이상한 교전수칙
장병 목숨 내놓는 고속정 근접기동
육군·공군 지원 요청하자 “문제 생기면 당신이 책임져라”
그나마 말 통하는 국방장관과 직접 작전 협의
연평해전 직후 교전수칙 변경 건의했으나 묵살
 
 

1999년 6월15일 오전 9시28분. 연평도 서남방 NLL(North Limit Line·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에 포 사격을 시작했다. 이에 해군 고속정은 곧바로 반격했다. 이어 양측 함정 20여 척 간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이른바 ‘연평해전’이다.

전투는 우리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북한 해군은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했다. 반면 우리 해군은 2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인명 피해도 작았다. 북한군은 수십명이 전사했으나, 한국군은 장병 11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연평해전은 치밀한 준비와 작전으로 북한 해군에 완승을 거둔 교과서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지난 4월8일 국방부는 ‘서해교전’의 명칭을 ‘제2연평해전’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연평해전과 똑같이 서해 NLL을 사수한 점을 감안해서라는 것이다. 이는 서해교전을 정부 차원의 행사로 치르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에 발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관계자는 “올해부터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행사가 정부 주관으로 격상되는 것을 계기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그간 서해교전 추모행사는 해군 2함대사령부가 주관해왔다.

2002년 6월29일 발생한 서해교전은 연평해전에 대한 북측의 앙갚음이나 다름없었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촉발된 이 전투로 우리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장병 6명이 전사했으며 19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비해 북한 해군은 큰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측은 경비정 한 척에 화염이 일자 곧바로 물러갔다.

NLL 갈등으로 빚어진 연평해전은 끝난 전쟁이 아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군사적 도발을 암시하는 발언을 일삼으면서 대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연평해전의 무대인 서해 NLL은 한반도 최대의 화약고로 꼽힌다. 북한이 또다시 NLL 도발을 해올 경우 우리 해군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9년 전처럼 완벽하게 제압할 준비가 돼 있는가.

“손발 묶어놓고 싸우라니…”

연평해전의 승전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무엇보다도 박정성(朴正聖·59)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의 뛰어난 작전지휘를 빼놓을 수 없다. 기자가 쓴 NLL 기사(‘신동아’ 2008년 1월호)를 계기로 올 초 만난 박 전 제독은 인터뷰 요청을 번번이 거절했다. “공을 내세우는 것처럼 비치는 게 싫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연평해전과 서해교전이 일어난 ‘6월’을 앞두고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 인터뷰에 응한 그는 “NLL의 중요성이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말문을 열었다.

“적 함정에 대한 경고방송은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제공격도 방어의 일환입니다. 적이 눈앞에서 도발하는데도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건 먼저 맞기를 기다리라는 얘기죠. 손발 묶어놓고 싸우게 한 겁니다. 그러면서 NLL을 고수하라는 건 말이 안 되죠.”

그가 2함대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은 1998년 11월20일. 강화도 간첩선 침투사건에 대한 작전 실패로 장병들의 사기가 매우 저하된 상황이었다. 박 제독은 그간 북한이 여러 차례 해상 도발을 일으킨 점을 고려해 1999년에 NLL 도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북한의 해상도발이 증가했다는 게 당시 군 당국의 분석이었다. 주요 사례를 살펴보면, 먼저 6월5일 서해 NLL 근해에서 북한 함정이 우리 함정에 함포 3발을 쏜 사건이 있었다. 전투로 이어지지는 않았기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6월21일엔 북한의 유고급(70t) 잠수정이 강원도 양양 앞바다 어망에 걸려 아군에 포획됐다. 이때 북한 공작원 9명이 자폭했다. 7월11일엔 동해시 묵초동 해안에서 간첩 시체 1구와 수중추진기가 발견됐다. 11월20일엔 강화도 선수리에 소형 간첩선이 침투하다 발각돼 북한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남해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12월17일 전남 여수 돌산도 앞바다에서 간첩을 접선해 태우고 복귀하던 북한의 반잠수정이 격침됐다.

“절대 선제사격 말라”

박 제독은 북한이 동해와 남해에 잠수함과 반잠수정을 보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음엔 서해를 노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해 NLL 근해는 예전부터 어로활동을 두고 남북 어선 간 충돌이 잦은 수역이었다. 아울러 북한이 최악의 식량난을 맞고 있어 북미, 혹은 남북 간 협상에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내부 체제 단속을 하기 위해서라도 도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동쪽을 막으면 서쪽으로 들어오게 마련이죠. 함대사령관에 부임하기 석 달 전부터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40년 동안 바다에서 일어난 북의 도발 사건을 꼼꼼히 검토했죠. 북한 해군의 전력 배치와 훈련 상황, 전술을 분석해 12가지 예상 도발 시나리오와 대응책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중 4가지가 맞아떨어졌습니다.”

박 제독은 인천항에 정박한 모든 함정의 장교들과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북의 도발에 대비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했다. 낮에는 실전 훈련, 밤에는 교육이었다. 지휘관과 참모는 자정 무렵까지, 일반 장병은 오후 8시까지 교육을 받고 토론을 벌였다. 실전상황을 가상한 전술 토의를 벌이고 전장 환경과 북한 해군의 동향을 분석했다. 하사 이상의 모든 장병은 고유 임무를 부여받아 숙달훈련을 했다. 실제 전투상황에서 지휘관의 지시가 따로 없더라도 자동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햇볕정책 영향으로 군이 마냥 풀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내가 워낙 조이니까 주변에서 말이 많았죠. 장병들 사이에서 불만도 제기됐고. 당시 이남신 기무사령관이 부대로 나를 찾아와 ‘너무 조이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이 되고 싶지 않다’고 응수했죠. 그랬더니 ‘소신껏 하라’고 격려하고 돌아갔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무장한 2함대사령부 장병들은 1999년 4월 말까지 전투 준비를 완료했다. 연평도 수역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난 것은 그해 6월 초순. 북한 어선 20여 척이 선단을 이뤄 연평도 서남방 NLL 근처까지 남하했다. 북한 어선들이 그처럼 떼 지어 NLL에 다가온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때맞춰 등산곶 근해에 대기하는 북한 함정이 한 척에서 2~3척으로 늘었다. 이 함정들이 북한 어선들과 합류해 남진과 북상을 거듭했다.

   

1999년 6월15일 한국 고속정에 선제공격을 했던 북한 경비정(왼쪽)이 포사격을 받고 침몰하고 있다.

6월6일 현충일 아침 6시. 박 제독은 북한 경비정의 NLL 월경(越境) 보고를 받았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곧바로 사령부 지휘통제실로 가보니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 20여 척을 이끌고 NLL 이남 2~3㎞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함포를 우리 함정에 조준한 상태였다. 도발이 시작됐다고 판단한 박 제독은 함대 소속 모든 함정을 비상소집하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당시 NLL 침투 등 북측의 도발에 대한 우리 해군의 대응 작전은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진행됐다. 하지만 사격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NLL을 고수하되 절대로 선제사격은 하지 말라는 게 상부 지침이었다. 즉 어떠한 경우에든 적이 쏘기 전엔 먼저 쏠 수 없었다. 거기에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확전을 하지 말라’는 주문이 덧붙여졌다.

이에 대해 박 제독은 “상부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려면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먼저 맞지 않으면 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며 “이 같은 지침은 현장에서 작전을 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됐다”고 개탄했다.

“박 제독을 괴롭히지 말라”

고속정의 임무인 차단기동은 사실 장병들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근접 상태에서 북한 함정이 먼저 쏘면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으로 때우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6월6일 아침 일찍부터 남진한 북한 함정은 우리 고속정이 진로를 차단하자 선체공격을 시도했다. 이에 고속정들은 고속 포위기동으로 북한 함정의 장비 고장과 기름 소모를 유도했다. 북한 함정은 우리 고속정보다 덩치는 컸지만 속도는 느렸다.

“타이탄 트럭에 그랜저 승용차로 맞설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고속정으로 하여금 적선의 꽁무니를 뒤쫓게 했습니다. 선체가 무겁고 기름 사정이 좋지 않은 북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을 잡으려다 기관고장을 일으키곤 했죠.”

북한 함정들은 밤에 철수했다가 다음날 날이 밝으면 다시 NLL을 넘었다. 포위기동으로 맞선 우리 고속정들과 물고 물리는 대치상태가 6월8일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북한 함정은 6척으로 늘었고 대담하게도 NLL 남방 11㎞까지 내려왔다. 그 뒤로 북한 어선 20여 척이 붙어 다녔다. 노골적인 영해 침범이었다.

6월9일 우리 고속정 한 척이 북 함정에 들이받혀 왼쪽 현측(뱃전)이 4m가량 찢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해군사관학교 축구선수 출신인 고속정 편대장이 선체 충돌을 시도하는 북 함정에 맞서 “박을 테면 박아보라”고 버티다가 피해를 본 것이다.

이날 밤 북한 함정 1척이 NLL 남방 13.7㎞까지 침범해 새로운 도발을 감행했다. 자신들이 1973년부터 주장해온 12NM 영해선의 기준인 해상경계선 꼭짓점에 어망 부이 7개를 묶은 뭉치를 설치한 것이다.

“그 보고를 받는 순간 ‘이건 전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꽃게 도발이 아니라 NLL 무력화를 노린 의도적인 도발로 판단됐기 때문이죠. 즉각 상부에 보고해 ‘국지전 가능성이 높으니 육군과 공군의 지원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위에선 묵묵부답이더군요. 한 상급 지휘관으로부터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책임지라’는 말도 들었죠.”

당시 작전 지휘계통은 2함대사령관-작전사령관-합참의장-국방부 장관-청와대였다. 보고나 지시가 단계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電文) 형태로 통신망을 타고 모든 지휘라인에 동시에 전파되는 시스템이었다.

어뢰정 출현에 전투임박 예감

박 제독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 지시였다. 군에서 명령은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지시는 간결하기는 해도 명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슬기롭게 싸워서 이기라는 건지, 슬기롭게 타협하라는 건지, 슬기롭게 피하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지시였다.

그나마 얘기가 통하는 사람은 육군 대장 출신인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었다. 박 제독은 조 장관과 하루에도 몇 차례나 통화하면서 작전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조 장관은 박 제독의 상급 지휘관들에게 “박 제독에게 자꾸 전화해 괴롭히지 말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뜻이었다.

   

북한 함정의 NLL 월경에 따른 양측의 공방은 10일에도 계속됐다. 11일에는 북한 경비정 10척이 떼 지어 우리 고속정들에 달려들었다. 이에 우리 고속정들은 북한 함정들의 함미를 들이받아 4척에 손상을 입혔다.

양측의 접전은 13일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맞았다. 그날 오후 박 제독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적의 어뢰정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연평도 서북방에 있는 북한 해안 사곶에서 발진한 어뢰정 3척이 우리 함정에 고속 접근했다.

어뢰정의 고속 접근은 공격행위에 해당되므로 자위권을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해군은 확전 금지라는 상부 지침에 따라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차단 기동만 했다. 북 어뢰정들은 한 차례 기동시위를 한 후 해주항의 개머리 기지 쪽으로 북상했다. 6월14일에도 북한 경비정들과의 치열한 기동 공방전이 계속됐다.

“북한군의 전술에 따르면 어뢰정 공격은 전투의 맨 마지막 단계입니다. 어뢰정이 나타난 것을 보고 ‘D-데이가 닥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예하 지휘관들에게 암호로 전투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6월15일 오전 북한 경비정 7척이 NLL을 넘어 남하했다. 이에 우리 해군의 23전대 함정 5척이 충돌공격을 시도해 이전과 마찬가지로 물고 물리는 접전이 이어졌다. 이어 해주항 입구 개머리 기지에서 출항한 북한 어뢰정들이 고속으로 남하했다. 어뢰발사관을 개방한 상태였다. 교전규칙에 따르면 어뢰정이 공격침로를 취하고 어뢰발사관을 열면 공격으로 간주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 제독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장기 교전에 대비해 소변을 봐두고 5분간 기도했다.

“훈련을 많이 했으니 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전사자가 발생할까봐 걱정이었습니다. 수병인 아들 친구가 상황실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원하건대 한 집에 한둘밖에 없는 귀한 자식들을 한 명도 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소원을 들어주면 남은 삶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박 제독은 기도를 마친 후 예하 지휘관들에게 작전지시를 내렸다.

“곧 적의 선제공격이 있을 것이다. 각 함정은 예상 목표를 정해 락온(rock-on·레이더에 의한 자동추적) 상태를 유지하고 적이 공격하면 즉각 대응사격해 격파하라.”

박 제독은 함대사령부 지휘통제실에서 NTDS(Naval Tactical Data Sistem·해군전술정보망)를 통해 전투를 지휘했다. 바다에 있는 우리 함정과 북한 함정의 움직임이 전광판과 같은 대형 스크린에 비춰지기 때문에 입체적인 지휘를 할 수 있었다. 스크린에 나타난 어떤 함정에 커서를 들이대면 그 함정의 속도와 방향이 곧바로 제시됐다. 이를 보면서 박 제독은 편대장, 전대장 등 현장 지휘관들에게 작전 지침을 하달했다.

76㎜포의 위력

해군의 각 함대는 전대 단위로 편성돼 있다. 전대는 크게 행정 편제인 유형조직과 태스크 포스인 전술조직으로 구분된다. 유형조직에 따르면 2함대의 경우 4개 전대로 구성된다. 21전대는 구축함 전대, 22전대는 초계함 전대, 23·25전대는 고속정 전대다. 하지만 전술훈련이나 실제 전투에서는 각 전대에서 차출한 함정들을 짝짓기해 새로운 전대를 구성한다. 이것이 전술조직이다.

연평해전 당시 NLL 현장 교전에 참가한 우리 해군 함정은 2개 전술전대 10척이었다. 1개 전대는 초계함(PCC) 한 척과 고속정(PKM) 4척으로 구성됐다. 대령인 전대장 2명이 각각 초계함에 승선해 현장 지휘를 했다.

아울러 구축함 등 대형 함정들은 현장에서 다소 떨어진 완충구역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과 해안포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고속정의 경우 크기도 작은 데다 북한 함정들과 뒤섞여 있었기에 미사일이나 해안포에 당할 가능성이 낮았다. 하지만 중형급인 초계함이 전면에 나선 것은 위험부담을 감수한 것이었다.

전투의 시작은 선체 충돌이었다. NLL 이남 완충구역에 대기하던 우리 해군의 25전대 소속 함정 5척이 남진하는 북한 어뢰정들을 가로막았다. 그 과정에 우리 고속정 한 척과 북한 어뢰정 한 척이 충돌하면서 북 어뢰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연평해전이 끝난 후 60대 노인(양복 입은 사람)이 소 2마리를 이끌고 2함대사령부를 방문했다. 왼쪽에서 네 번째가 박정성 제독.

거의 동시에 우리 고속정 325, 328호정에 함미를 부딪친 북한 경비정 381호정이 25㎜, 14.5㎜ 기관포로 선제공격을 했다. 첫 공격을 당한 고속정은 325호정이었다. 곧 우리 해군 함정 10척과 북한 해군 함정 10여 척 사이에 숨가쁜 교전이 벌어졌다. 이때가 9시28분.

전투결과는 장비와 화력에서 우세한 우리 해군의 한판승이었다. 적의 함포는 수동이고 우리 해군의 함포는 자동이었다. 정교한 사격통제 레이더에 의해 조종되는 76㎜, 40㎜, 20㎜포가 적 함정에 비 오듯 포탄을 퍼부어댔다.

교전은 14분 만에 끝났다. 북한 해군은 어뢰정 한 척과 경비정 한 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어뢰정은 우리 해군 초계함의 주포인 76㎜포 19발을 맞고 가라앉았다. 경비정들은 고속정에서 발사한 40㎜, 20㎜포탄에 초토화했다.

북한 함정들이 더 이상 대응을 못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한 기색이 역력하자 박 제독은 공격을 중단시켰다. 전과(戰果) 확대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격을 멈춘 것은 ‘확전 금지’라는 상부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지만,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적에게 인명구조 기회를 준다는 뜻도 있었다. 북한 함정들은 서둘러 NLL 이북으로 도주했다.

우리 해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고속정 한 척과 초계함 한 척이 북한 함정의 포격으로 선체의 일부가 파손됐다. 수십명이 전사한 북측과 달리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11명이 부상했는데 그중 6명이 총상이었다. 파편을 빼내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활하는 데 크게 불편할 정도의 부상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기적의 주인공은 기습공격을 당한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대위였다. 함교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안 대위는 적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당했다. 포탄 파편이 턱 밑과 목 뒤로 스쳐 지나갔다. 또 가슴에 총탄 4발을 맞았는데 방탄복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충격에 안 대위는 조타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정장님, 졸면 죽습니다!”

통신병이 안 대위의 뺨을 때리며 “정장님, 졸면 죽습니다!” 하고 외쳤다. 포탄 파편에 맞아 안 대위의 얼굴과 목 주변이 피범벅이었다. 그런데 통신병이 자세히 살펴보니 총탄에 맞은 게 아니었다. 이에 다시 “정장님, 총알 안 맞았습니다” 하고 외쳤고 그 소리에 안 대위는 정신을 차렸다.

안 대위는 그로부터 8년 뒤인 지난해 6월 윤영하함의 초대 함장으로 임명됐다. 현 계급은 소령. 국내 유도탄고속함(PKG) 1호인 윤영하함은 서해교전 당시 고속정 357호 정장으로 장렬히 전사한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부사관 한 명은 포탄 파편에 고환을 다쳤다. 군 통합병원에서 ‘성기능에는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발기할 때 통증이 있었다. 군병원 의술로는 치료가 힘들었다. 박 제독은 의무감을 시켜 해군 군의관 출신이 병원장인 삼성의료원에 입원해 진료를 받도록 조처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연평해전 용사’라는 사실이 알려져 다른 환자들과 면회객들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연평해전이 끝난 직후 열린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북측은 “연평해전의 남조선 책임자를 처벌하라”며 박 제독의 문책을 요구했다. 교전 책임도 남측에 떠넘겼다. 이후에도 북측은 NLL 부근으로 함정들을 내려 보냈다. 하지만 연평해전으로 기가 꺾였는지 선을 넘지는 않았다. NLL 대치 상태는 7월말에야 풀렸다.

해군 관계자의 다음 얘기가 아니더라도 연평해전이 군사(軍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6·25전쟁 이후 남북 간에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해상전투에서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나오지 않은 건 하늘이 도운 겁니다. 그동안 우리 장병들이 북한군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햇볕정책 여파로 정신적으로도 흔들리고 있었는데, 연평해전의 전과로 자신감을 갖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죠. 대적(對敵) 교육에 이상 없다는 결론을 얻은 겁니다.”

한국군의 주력인 육군의 야전 지휘관들은 연평해전의 용장에게 기꺼이 찬사를 보냈다. 사단장 26명과 군단장 4명이 박 제독에게 편지를 보내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늘 육군의 그늘에 가려 있던 해군의 위상이 한껏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국민의 반응도 뜨거웠다. 충북 음성의 한 농협에서는 트럭 2대에 수박을 가득 실어 함대사령부로 보냈다. 이 수박들은 전투에 참가한 고속정 장병들에게 전달됐다.

60대 노인이 소 2마리를 끌고 찾아오기도 했다. 부친이 6·25전쟁에서 사망했다는 그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이라며 감격했다. 소 2마리는 연평해전에 참가한 장병들이 쇠고기 파티를 벌이기에 충분했다.

   

연평해전·서해교전 명칭 논란
“서해교전 의미 격상은 좋지만 억지스러운 면도…”


국방부와 해군은 서해교전 명칭을 제2연평해전으로 바꾸면서 “서해교전은 국가 목표인 NLL 사수를 달성했기 때문에 승전”이라고 강조했다. 명칭 변경에 대해서는 “해상에서 벌어진 해군의 전투라는 점에서 주로 지상 전투에서 쓰는 용어인 교전보다는 해전이 적합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전에 연평해전과 서해교전이라고 달리 이름 붙인 것에 대해서는 군에서 공식 결정한 것이 아니라 언론의 표기가 일반화해 통용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해군 주변에서는 연평해전과 서해교전을 같은 명칭으로 묶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시각이 있다. 둘 다 전장(戰場)이 연평도 해상이고 NLL 분쟁으로 빚어진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과(戰果)에 비춰 하나는 승전이고 하나는 냉정히 말해 패전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국지적 전투를 뜻하는 교전과 달리 해전은 대규모로 맞붙은 싸움이라는 점에서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연평해전에서는 양측 함정 20여 척이 전투를 벌였다. 반면 서해교전은 남하한 북한 함정 2척 중 1척이 기습공격을 하는 바람에 시작됐고 우리 고속정 한 척이 침몰하면서 끝난 전투다. 해군의 한 장교는 “서해교전의 의미를 격상하는 건 좋지만, 패전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연평해전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억지스럽다”고 꼬집었다.
전투 기간이 다르다는 것도 차이점으로 거론된다. 연평해전은 장기전이고 서해교전은 단기전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연평해전의 경우 교전은 6월15일 오전에 발생했지만 6월6일부터 양측 군함이 기동전과 선체 충돌 등 전투행위에 돌입했기에 총 전투 기간이 열흘이다. 이에 비해 서해교전은 6월29일 오전 사전 충돌 없이 곧바로 교전이 시작돼 25분 만에 끝났기 때문에 전투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군 일각에서는 이상희 국방부 장관이 서해교전 당시 최고 지휘계통인 합참 작전본부장이었다는 점에서 명칭 변경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서해교전은 정부 차원에서 기리면서 승전인 연평해전 기념식은 해군 함대사령부 행사로 치르는 것이 군의 사기를 위해 적절한 것이냐는 비판도 있다. 북한 눈치 보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국방부에 따르면 서해교전의 명칭 변경은 유가족의 뜻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일부 네티즌들과 유가족은 줄곧 서해교전의 의미를 격상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들은 ‘해전’과 비교되는 ‘교전’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모름지기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추모의 성격일 것이다.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다 희생당한 이들을 정부 차원에서 최대한 예우하고 국민이 진정으로 기리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서해교전의 상처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가슴속 깊이 추모하는 이들은 명칭 변경에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보수층을 의식한 정치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면 서해교전 전사자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근접기동의 위험성

연평해전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조성태 의원은 “가장 완벽한 해전”이었다고 회고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사흘 전 현장을 순시하면서 연평도에 주둔한 해병부대의 화력 지원과 수원과 오산에 있는 공군 부대의 전투기 지원 태세를 직접 점검했다는 그는 “완벽한 준비를 했기에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며 당시 2함대사령부의 전투준비 태세를 높게 평가했다.

연평해전이 끝난 후 해군은 합참에 교전수칙인 5단계 대응전략을 바꾸자고 건의했다. ‘밀어내기’라는 근접기동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하면서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일단 얻어맞고 싸우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연평해전에서 먼저 공격을 당하고도 전사자가 안 나온 것은 전투를 峠構?못하고를 떠나 해군 관계자의 말마따나 운이 따른 면도 있었다.

하지만 햇볕정책의 그늘 아래 군사논리가 정치논리에 눌린 탓인지 교전수칙은 바뀌지 않았다. 그 무모함과 어리석음은 2002년 6월 서해교전에서 장병 6명의 희생을 낳았다. 당시 군 지휘부가 적의 기습 가능성을 짐작하면서도 고속정에 차단기동을 지시한 것은 연평해전의 교훈을 무시한 안이한 대응이었다. 장병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무책임한 작전이었다. 우리 고속정이 지나치게 접근한 것도 불운이었지만.

해상 150m 거리에서 적함이 포를 발사하면 누군들 피할 수 있으랴. 18년 전 고속정 작전관으로서 서해 NLL을 두고 북한 해군과 여러 차례 대치한 경험이 있는 기자는 사건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거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하고 눈물이 핑 돈다.

문제의 교전수칙 5단계는 서해교전 이후 수정됐다.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3단계로 바뀌면서 근접기동 개념이 사라졌다.

   

박 전 제독은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영토선 발언’으로 촉발된 NLL 논란에 대해 “논쟁에 휩싸이는 것 자체가 북의 전략에 휘말리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실과 유리된 학문적 분석으로 군사작전에 지장을 주면 안 됩니다. NLL 이남 수역은 6·25 전쟁 이후 확보한 점령지입니다. 당연히 통일 직전까지 지켜야 합니다. NLL은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으로, (국제법적인) 영해선은 아니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사실상 영해선 구실을 합니다. NLL이 뚫리면 해상안보가 무너집니다. 당장 수도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북한과의 경제협력도 중요하죠. 하지만 경협과 안보는 별개입니다. 경협을 빌미로 안보를 양보할 순 없어요. 선군(先軍)정치를 하는 북이 여전히 대남적화 전략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안보는 확실히 챙겨야 합니다.”

그는 남북 군사회담의 주요 의제인 공동어로구역 문제에 대해서도 부정적 견해를 나타냈다.

“실효성 없는 제안이에요. 공동어로구역이 설정되면 남북 간 충돌 위험이 지금보다 증가할 겁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NLL이 무너지는 효과가 생긴다는 겁니다. 게다가 북한은 공동어로를 할 능력도 없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어장을 팔아넘기고 있잖아요. 막상 공동어로를 시작하면 우리 어민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조용한 제대’

그는 또 군에 대한 국민의 성원을 강조했다.

“북의 도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언제 또 연평해전과 같은 충돌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걸 우리 군이 잘 막아낼 수 있도록, 자신 있게 싸울 수 있도록 국민이 성원해야 합니다. 군인의 전투의지는 국가와 국민의 의지에 영향을 받습니다. 국민이 지지할 때 군은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박 제독은 연평해전이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난 1999년 10월 ‘해군본부 대기’라는 뜻밖의 인사발령을 받았다. 이어 참모총장 특별보좌관이라는 한직에 6개월간 파묻혀 지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어라”는 게 상부에서 설명한 인사 배경이었다.

이후 군수참모부장과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군수사령관을 지냈다. 하지만 끝내 중장 진급은 하지 못한 채 2004년 4월 예편했다. 이에 대해 조성태 전 국방부 장관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연평해전 승전 지휘관이 진급되지 않는 걸 보고 해군 인사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고 당시의 군 지휘부를 비판했다.

햇볕정책을 강하게 비판해온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은 2004년 10월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국군의 희생으로 지켜온 이 땅에…’라는 글에서 박 제독의 인사 문제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제 아둔한 사람의 머리로도 4월 박정성 해군 소장이 끝내 중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제대해야만 했던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1999년 6월15일 서해 북방한계선 남쪽 우리 영해에서 북한 해군 경비정의 도발로 시작된 연평해전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서해함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런 해군 제독에 대한 보답이 겨우 ‘조용한 제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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