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_02

醉月 2012. 7. 4. 05:44

‘나는 아버지 무덤을 모르지 않았다’

공자, 부친묘 무지(無知)설은 사료 오독의 결과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史記)’에서 ‘공자는 야합(野合)에 의해 태어났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아 아버지 무덤을 몰랐다’고 기술했다. 이후 여러 대가가 이 내용을 자신의 책에 인용했고, 성현으로 추앙되는 공자가 어떻게 사생아일 수 있고, 아버지의 무덤을 모를 수 있느냐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먼저 숙제 검사. 지난번 숙제를 내드렸다. 자신이 겪은 일 하나를 떠올려 적어보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도, 중요한 일도 상관없다. 기억할 만한 어떤 사건을 A4용지에 적어본다. 양도 상관없다. 그리고 한 주나 한 달 뒤에 같은 사건을 다시 적어본다. 두 글을 비교해본다. 이게 숙제였다. 먼저 필자의 숙제를 보여드린다.

 

숙제

필자는 전주대학교에서 매주 목요일 아침 7시에 세미나를 연다. 학생, 시민이 함께하는데 10명 정도 참여한다. 이번에는 여섯 달 동안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유강은 옮김, 2008)를 읽었다. 어떤 시대의 역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사료(史料)를 이용할 것이냐 하는 역사학의 기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역사에 대한 인상(印象)을 반성하게 만들어주는 깨달음까지, 많이 배웠다. 아침 시간 세미나라서 그동안 멤버들끼리 식사도 못했다. 세미나가 끝나면 직장으로, 강의실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거리를 겸해 모처럼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학교 근처 설렁탕집에서. 〈기억1〉은 그날 있었던 일을 일기장에 의거해 재구성한 것이고, <기억2〉는 재구성한 내용을 3주 뒤에 기억해서 다시 쓴 것, 즉 숙제로 적은 내용이다.

 

〈기억1〉

오: 뭘 먹을까? 각자 좋은 거 시키지요.

유: 전 설렁탕이요.

문: 저도요.

박, 한, 설: 저도요.

오: 회비 얼마 남았나?

한: 오늘 잊고 안 가져왔어요.

오: 그럼 오늘 내가 내지. 난 꼬리곰탕.

유: 그럼 저도 꼬리곰탕이요.

문: 저는 불고기뚝배기요.

박: 저는 갈비탕이요.

한, 설: 저희는 그냥 먹을래요.

오: 치사하게 내가 낸다니까 비싼 거 먹는 건가?(참고로, 설렁탕 7000원, 갈비탕 8000원, 불고기뚝배기 1만 원, 꼬리곰탕 1만2000원이다. 그리고 점심 때, 이 일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오:(아침 일을 쭉 설명하고) 글쎄 인간들이 치사하단 말이야. 내가 낸다니까 비싼 걸로 바꾸더라고. 참 내.

한: 저는 안 바꿨어요. 저하고 설은요.

오: 그랬나? 그럼 바꾼 게 누구지?

 

〈기억2〉

오: 뭘 먹을까? 난 꼬리곰탕.

유: 전 설렁탕이요.

문: 저도 설렁탕이요.

박: 저도요.

오: 회비 가져왔나?

한: 깜빡 잊고 안 가져왔는데….

오: 그럼 오늘 내가 내지.

유: 그럼 저도 꼬리곰탕이요.

문: 저는 불고기뚝배기요.

박: 저는 갈비탕이요.

한: 저는 그냥 설렁탕이요.

오: 치사하게 다른 사람이 낸다니까 비싼 거 먹는 건가?

(점심 때 대화는 기억에 희미했다. 대신 나는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오: 남이 낸다니까 비싼 걸 시켰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 비싼 것이 먹고 싶었던 걸까? 정말 비싼 게 맛있는 걸까? 비싸니까 맛있다고, 먹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혹시, 가격과 맛의 소외(疎外)?

 

   

 

중국 태산 정상에 자리 잡은 공자묘.

 

그럼 숙제를 검사해보자. 〈기억1〉과 〈기억2〉의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사실에 대한 기억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대화내용이나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고, 어떤 부분은 기억에서 지워졌다. 심지어 <기억1〉은 같은 날조차 사실에 대한 기억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기억2〉에서는 〈기억1〉에 없었던 사실에 대한 해석이 덧붙여졌다.

 

먼저 첫 번째 사실 차이. 만일 기억이라는 것이 창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오듯이 저장되어 있는 무엇을 꺼내오는 행위라면 적어도 그 사실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같아야 한다. 아예 빼먹는 것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물건을 도둑맞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기억하는데 그에 대한 표현이 달라지는 것은 기억이 실체가 아닌 구성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설렁탕집에서 먹었고, 그 식사비를 누가 지불했고, 누구는 뭐 먹었고, 하는 몇몇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다시 말해 기억이 구성되면서 달라져도 여전히 남는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남는 사실 또한 과연 언제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까? 바위도 침식되듯이, 세월에 의해 그 남은 사실조차 기억에 의해 침식되어가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답하기 어렵다. 앞으로 분자생물학의 연구와 역사학의 숙고를 통해 납득할 만한 답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기억2〉에서 덧붙여진 해석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과 해석이 겹쳐 있어서 애매한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실과 해석을 나누는 것을 보면 둘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학 전통에서는 가급적 사실과 해석을 나누어 기술했다. 말하자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대한 사실을 쭉 기록하고,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고 하여 자신의 해석, 즉 사평(史評)을 적어놓은 사마천(司馬遷)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하면 후대 사람들이 볼 때 사실과 사평(해석)을 그래도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리라.

 

그런데 역사학에서 해석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종종 사실을 무시하고 해석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학은 사실을 기초로 해석하는 거다. 사실이 없으면 해석 자체가 없다. 때로는 사실 자체도 비판한다. 이는 사실에 담긴 진실을 더 분명히 드러내주는 과정이다. 진실에 대한 비판이 오류를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사실 비판이 마치 오류의 합리화라도 되는 양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기억2>에 붙은 해석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해석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필자의 숙제에서도 〈기억1〉에 해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점심시간의 대화를 보면, 필자는 〈기억1〉의 사실을 두고 인간의 이기심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이 사준다니까 비싼 걸 먹는 이기심 정도에서 그친 해석이 <기억2〉에서는 그 이기심보다 맛이나 기호조차 가격에 의해 표현된다고 믿는 화폐의 물신성(物神性)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 숙제를 내드린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겪는 일상이 곧 역사학의 핵심적인 아포리아이자 연구주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하긴 그러니까 역사학이 보편적인 학문이 됐을 것이다. 우리 일상의 생각과 질문이 철학을 구성하고 우리가 일상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이 문학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다.

 

무지

지난 호에서 기억 또는 기록의 진실과 오류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로, 과거의 재현불가능성,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기록의 유실, 선입관과 악의에 의한 왜곡 등 여러 요인을 꼽았다. 오늘은 이들 요인에 한 가지 추가되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역사학의 기초적인 오류 사례를 들어보자. 그것은 바로 몰라서 저지르는 오류다. 무지, 또는 무식의 소치이다. 그중에서도 또 기초적인 오류는 글을 몰라서 저지르는 오류다. 왜냐하면 많은 역사는 기록, 문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료와 야합

그래서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공부를 하려면 언어 능력이 중요하다. 필자도 서양사를 전공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선배들로부터 독일어, 불어를 배워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한국사로 전공을 바꾸면서 선배에게 또 한문을 배웠고, 졸업 후엔 청명 임창순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지곡서당(현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에 들어가 사서삼경을 배운 뒤에야 더듬거리며 사료를 읽을 수 있었다. 언어 능력은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초니까.

 

기초라는 말은 ‘중요하다’ ‘기본이다’ 라는 의미와 함께 항상 논란이 되는 영역이라는 뜻도 내포한다. 즉 기초를 강조하는 이유는 누구나 틀릴 수 있고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대가(大家)들이 저지른 실수,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데 일조했던 일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했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공방숙이다. 공방숙이 공백하를 낳았고, 공백하는 숙량흘을 낳았다. 숙량흘이 안씨 집안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니구에서 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 공구가 태어나자 숙량흘은 죽었고, 방산에 장례 지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어서, 이 때문에 공자는 자신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을 궁금해했지만 어머니가 확실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 공자 어머니가 죽자 오보의 사거리에 빈소를 차렸는데, 대개 신중히 하기 위해서였다. 추땅 사람 만보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가르쳐준 뒤에 방산에 가서 합장했다.[孔子生魯 昌平鄕 ?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禱於尼丘得孔子. …… 丘生而叔梁紇死, 葬於防山. 防山在魯東, 由是孔子疑其父墓處, 母諱之也. …… 孔子母死, 乃殯五父之衢, 蓋其愼也. ?人輓父之母誨孔子父墓, 然後往合葬於防焉.]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 그는 저서 ‘사기’에서 공자를 아버지 무덤도 모르던 사람으로 폄하했다.

 

위의 사료는 사마천의 명저 ‘사기(史記)’권 47 ‘공자세가(孔子世家)’ 첫 대목을 요약한 것인데, 대개 위와 같이 해석한다. 다만 해석 중 ‘대개 신중히 하기 위해서였다(蓋其愼也).’는 ‘천장(淺葬)을 한 것이다’가 옳다. 뒤에 보겠지만, 여기서 신(愼)은 신중하다는 뜻이 아니라, 가묘를 의미하는 빈(殯)과 같은 뜻이다.

 

공자는 송나라 사람이다. 송나라는 은나라가 망한 뒤 유민(遺民)들로 구성된 나라다. 사마천에 따르면 공자의 선대는 공방숙(孔防叔 증조부) - 공백하(孔伯夏 조부) - 숙량흘(叔梁紇 아버지)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버지 숙량흘이 어머니 안 씨를 맞아 공자를 낳았다고 했다.

 

그런데 사마천이 남긴 위의 기록 때문에 후대에 독자들은 의심에 휩싸였다. 우선 숙량흘이 안 씨와 ‘야합(野合)’해서 공자를 낳았다는 기록을 인정하면, ‘지고한 성인께서’ 한 명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사마천은 그 아래에, ‘공자는 자신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을 궁금해했지만 어머니가 확실히 대답해주지 않았다’고 기록해놓았다. 이치로 보나 정리로 보나, 자식이 자기 아버지 묘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조차 일러주지 않았다면, 누가 그 관계가 합당하거나 정상적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주석을 다는 후학들이 이를 합리화하려고 애를 써도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예기

오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실, ① 공자는 야합에 의해 태어났다 ② 어머니 안 씨가 가르쳐주지 않아서 공자는 아버지 무덤을 몰랐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남긴 ‘공자세가’ 기록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식으로 접근해보자.

공자가 아버지 묘소를 몰랐다는 고사는 ‘예기(禮記)’ ‘단궁(檀弓)’편에 최초로 나온다. 물론 사마천 시대에는 예기니, 단궁이니 하는 책명이나 편명은 없었다. 장순휘(張舜徽· 1911~1992)는 사마천이 흩어져 돌아다니는 ‘예기’를 보았을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해서 ‘공자세가’를 지었다고 보았다. 현존 ‘예기’의 원문이 ‘공자세가’보다 앞선 기록임을 전제로 한다.(‘중국고대사적교독법(中國古代史籍校讀法’), 2004, 雲南人民出版社, 16쪽)

‘예기’는 원래 한(漢)나라 학자들이 예경(禮經)에 대한 해설을 뽑아 모은 저서로, 후한에 들어서야 현존 ‘예기’의 형태를 띤다고 한다. 다만 현재 학계에서는 대부분 한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거기에 자연히 한나라 사람의 저술도 섞여 있다고 본다. 반고(班固)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육예략(六藝略)’의 ‘예기(禮記) 131편’ 아래 주(注)에, “공자 70제자 이후의 학자들이 기록한 것이다”라고 한 진술은 객관적이라고 인정받는다. 공자의 고사가 실린 ‘예기’ ‘단궁’편의 대목을 인용해보자.

 

孔子少孤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人之見之者蓋以爲葬也其愼也蓋殯也問於?曼父之母然後得合葬於防.

 

송나라 때 ‘예기’에 대한 주석을 모으고 자신의 주석을 단 ‘예기집설’의 저자 진호(陳澔· 1261~1341)는 위의 구절을, “공자는 어려서 고아(아버지가 없는 어린 아이)가 되었으므로 아버지의 묘소를 알 수 없어서 (어머니의 상례 때) 오보의 사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 추땅 만보의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난 뒤에야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방산에 가서 합장했다.[孔子少孤, 不知其墓, 殯於五父之衢. …… 問於?曼父之母然後得合葬於防.]”고 해석했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어머니 안 씨가 죽었을 때 공자는 15세를 넘긴 지 이미 오래였다. 성인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빈틈없거늘, 어찌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가 묻힌 곳을 찾지도 않았으며,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할 때까지 아버지의 묘소를 몰랐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성인인 공자가 그럴 리 없다, 즉 아버지의 묘소를 몰랐을 리가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당연히, “‘예기’란 책은 뭇사람의 기록이 뒤섞여 있어서, 거기에는 사실로 여길 수 없는 것도 많다”고 덧붙였다.

 

표점

게다가 공자에 관한 거의 모든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최술(崔述·1740~1816)도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 ‘원시(原始)’(이재하 역, 2009, 한길사, 97쪽)에서 공자의 조상과 출생에 대해 변증하면서 ‘진호의 변증이 옳다’고 맞장구쳤다. 성인 공자가 아버지 묘소를 모를 리 없다는 변증에 대한 동의다. 공자가 야합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결합되면서, 아버지 묘소도 몰랐던 공자에 대한 당혹감이 느껴진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이 되었을까?

상식 하나 짚고 가자. 위에 ‘예기’ 원문을 인용했는데, 쭉 한자만 나열되어 있고 어떠한 문자부호도 없다. 당초 ‘예기’의 저자들은 표점(標點)을 찍지 않았다. 또 필자가 인용한 사마천의 ‘사기’ 역시 문장부호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필자가 인명 지명 서명에는 밑줄을, 그 밖의 문장에는 쉼표, 마침표, 인용부호 등을 나중에 표시한 것이다. 조선시대 문집에도 이런 표점이 없다.

 

오독

이는 한문만이 아니다. 한글 역시 문장부호가 없었다. 그전에 이두(吏讀)나 간단한 구두점(句讀點) 표시는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부호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오는 1930년 이후가 아니었을까? 필자의 경험을 하나 소개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편지를 우연히 얻어 보았다. 할머니가 친정으로 보낸 편지였는데, 아뿔싸! 한글은 한글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한글 배우고 써온 내가 읽지를 못하겠던 것이다.

 

그때 할머니 편지를 보고 있다는 감격보다는 내가 할머니가 쓰신 한글 편지를 읽을 수 없다는 문화적 충격이 더 컸다.

이렇듯 원문이 다닥다닥 붙여 쓰여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후세 사람들은 문장을 끊어가며 읽어야 하고, 그에 따라 표시를 하게 되었고, 이를 구두점 또는 표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다닥다닥 붙은 원문을 읽는 과정에서 잘못 끊음으로써 한 사람을 사생아로 만들고 후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사례를 보는 중이다.

 

전후 사정은 이러하다. 우선 앞에 인용한 ‘예기’에 대한 진호나 최술의 표점은 오류다. 어디가 오류인가? 바로 “공자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므로 아버지의 묘소를 알 수 없어서 (어머니의 상례 때) 오보의 사거리에 빈소를 차렸다[孔子少孤, 不知其墓, 殯於五父之衢]”라고 한 데서 틀렸다. 이곳은 “공자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묘소를 오보의 사거리에 천장(淺葬)했는지 어떤지 몰랐다[孔子少孤,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부지기묘빈어오보지구(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라는 열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빈(殯)이란 빈소를 차린다는 뜻도 있지만, 당시에는 얕게 묻는 천장을 의미했다. 임시로 묻는 가묘(假墓)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런 가묘를 초빈(初殯), 가빈(家殯)이라고 하여 빈(殯)자를 그대로 쓰고 있다. 한편 깊이 묻는 심장(深葬)은 옮기지 않고 영원히 묻는 묘소를 말한다. 그러니까 공자는 아버지 묘소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보의 사거리에 있는 아버지 무덤이 천장인지 심장인지, 임시 무덤인지 영원히 쓸 무덤인지 몰랐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임시 무덤이라면 무덤을 파고 수습해 다른 곳에 어머니와 합장해야 할 것이고, 영구 무덤이면 그곳에 어머니와 합장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정현

공자가 아버지 무덤을 몰랐다는 사마천의 ‘공자세가’ 기록, 그리고 그 근거가 되었던 ‘예기‘의 기록은 오랫동안 공자가 야합으로 태어난 결과이자 역으로 그 사실성을 강화해주는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진호나 최술의 연구 말고도, 최근 연구에서도 이런 경향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김용옥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 씨에 대한 논증을 거쳐, ‘야합’을 인류학의 ‘남편이 아내에게 들르는 혼인 형태(visiting husband marriage 訪婚)’라고 생각했다. 풍부한 논증과 자료를 통해 전통적인 야합에 대한 해석을 지지하면서도 해석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렇지만 공자와 안 씨가 숙량흘의 무덤을 몰랐다는 기록은 그대로 인정했고, 그 결과 공자와 안 씨 모자는 부계(父系)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모자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1, 2008, 통나무, 120쪽)

‘논어’와 공자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 성가를 올리고 있는 리링(李零·1948~) 역시 다르지 않다. 리링은 사마천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야합이란 무슨 뜻인가? 과거에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댔다. ‘성인이신 공자께서 어찌 야외에서 일을 치러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말이다. …… 정식 배우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관을 오보의 네거리에 놓고 아버지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이곳저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다가 알게 된 후에 부모님을 합장했던 것이다.”(황종원 역, ‘논어 세 번 찢다[論語縱橫讀]‘, 2011, 글항아리, 103~104쪽)

 

우리는 공자가 아버지의 무덤을 몰랐다는 해석이 구두점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천장, 심장을 고려하지 않고,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를 ‘不知其墓, 殯於五父之衢’로 끊어 진호, 최술, 김용옥, 리링으로 이어지는 오류를 낳은 근원은 사마천에게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후한(後漢) 때 경학(經學)의 마스터, 정현(鄭玄)에게 있었다. 그는 ‘不知其墓, 殯於五父之衢’라고 끊어 읽고, ‘不知其墓’ 아래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안 씨의 딸 징재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그 사실이 부끄러워 공자에게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孔子之父?叔梁紇與安氏之女徵在, 野合而生孔子. 徵在恥焉, 不告]” 정현은 ‘예기’ 원문 중 ‘不知其墓’에서 구두를 끊고,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또 사마천이 말했던 야합을 떠올리며, 그 이유를 바로 야합에 의한 공자의 탄생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공자는 야합에 의해 태어난 것이 맞는 듯하다. 현재로서는 반대 증거가 없다. 그러나 공자가 아버지 무덤을 모른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근 2000년 뒤 청(淸)나라 옹정(雍正) 연간(1723~1735)에 손호손(孫濩孫)이 지은 ‘단궁논문(檀弓論文)’에 이르러 바로잡혔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과 藥의 道를 말하다_04  (0) 2012.07.09
경남의 재발견_01 함양  (0) 2012.07.07
한의학의 원류를 찾아서_03  (0) 2012.07.02
조용헌의 영지 기행_06  (0) 2012.06.30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_01  (0) 2012.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