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감행케 하는 건 때로 ‘구실’입니다. 이른 봄에는 ‘꽃구경’이, 여름에는 ‘피서’가, 가을에는 ‘단풍놀이’가 여행의 좋은 구실이 돼 줍니다. 오래 묵은 일을 마무리했거나 새로운 일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훌륭한 ‘여행의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는 20일 전남 순천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개막합니다. 다양한 정원을 한자리에 펼쳐 보여주는 정원박람회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갯벌로 대표되는 순천의 생태지역과 개발되는 도심의 사이에 완충지대로 기능할 거대한 정원형 녹지를 만들어냈다는 의미도 깊습니다. 게다가 6개월여 동안 열리는 박람회는 남도 땅으로의 여정에 훌륭한 ‘구실’이 돼 줄 것이란 기대도 있습니다. 순천이 품고 있는 그윽한 절집 송광사며 선암사, 낙안읍성이나 순천만이야 설명을 더 보태지 않는대도 알아서들 찾아가실 것이니,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대신 지금 가면 딱 좋을 곳 중에서 박람회장에서 멀지 않되 발길이 덜 닿은 곳을 찾아봤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진달래 꽃사태가 난 여수 영취산과 복사꽃 개화를 앞둔 순천 월등면이었습니다. 순천의 국제정원박람회를 찾아가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남도 땅의 명소를 찾아가겠다면 이 두 곳을 자신있게 추천합니다. 지금, 혹은 열흘쯤 뒤에 찾아간다면 최고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 아우성치며 피어난 영취산 진달래 오는 20일 전남 순천에서 개막하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남도로 떠나는 여행의 ‘구실’이 된다는 뜻은 박람회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개막을 앞두고 미리 둘러본 정원박람회장은 다양한 조경과 거대한 규모만으로도 풍성했다. 박람회 개최를 위해 조성한 정원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갈수록 더 우거지고 푸르러질 것이니, 명실상부한 ‘남도 여행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이즈음 하루하루 무르익고 있는 남도의 봄 정취를 다 놔두고 정원박람회만을 목적지로 삼는다는 건 아무래도 안 될 말이다. 순천에는 늙은 매화가 이제 막 꽃을 틔우기 시작한 선암사와 그윽한 절집 송광사, 그리고 따스한 봄볕 가득한 낙안읍성 같은 내로라하는 명소들이 있다. 게다가 인접한 보성이며 여수, 하동 등지의 명소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허다한 명소들 중에서 ‘지금’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고 있는 곳들을 찾아나섰다. 기왕에 익히 알려진 곳은 빼고 발길이 덜 닿은 숨은 곳들을 주로 살폈다. 그렇게 찾은 두 곳이 여수의 영취산과 순천의 월등마을이다. 여정의 훌륭한 구실이 되어주는 순천만정원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따로 하기로 하자. 개막과 함께 박람회를 찾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추천할 곳이 바로 여수의 영취산이다. 영취산은 경남 창녕의 화왕산과 창원의 무학산과 함께 3대 진달래 명산으로 꼽힌다. 영취산의 산정과 능선에는 지금 온통 연분홍 진달래 꽃사태가 났다. 능선의 한쪽 사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꽃불이 가히 ‘장관’이다. 정원박람회와 일정을 이어 붙인다면 순천에서 여수로 행정구역을 넘나들어야 하지만, 박람회장에서 영취산 입구까지는 차로 3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같은 순천 땅에 있는 선암사나 송광사, 낙안읍성까지 거리보다 더 짧다. 봄꽃이 다 그렇긴 하지만 유독 영취산의 진달래 개화는 극적인 마술과도 같다. 진달래가 피기 전까지 영취산은 여천공단을 발치에 두고 있는 관목 숲 가득한 우중충한 잿빛의 산일 뿐이다. 그러나 벚꽃이 막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이면 영취산 북서쪽 사면의 5분 능선쯤에서 진달래 꽃이 하나 둘 꽃망울을 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다. 삽시간에 산은 옮겨붙은 꽃불로 분홍색 물감을 엎지른 것처럼 활활 타오른다. 진달래는 서글픔, 혹은 처연함을 떠올리게 하는 가녀린 순정의 꽃이지만, 한데 모여서 아우성치며 피어나니 저리도 뜨겁다. 올봄은 매화부터 줄줄이 이르게 당도했으니, 진달래도 예외일 리 없다. 여수시의 영취산 진달래축제는 12일에야 개막하지만, 꽃은 이미 절정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도 매화나 벚꽃을 찾아가는 여정처럼 조바심낼 필요는 없다. 아우성치며 피었다가 일제히 낙화하는 매화나 벚꽃과 달리 진달래는 순차적으로 피고 지며 꽃이 피어있는 시간도 긴 축에 속하니 말이다. 그러니 개막 무렵 정원박람회를 찾는다면 영취산에 꼭 올라볼 일이다. 아니 반대로, 영취산의 진달래를 보기 위해서 정원박람회를 일찍 다녀올 일이다. # 절집 문고리를 잡아 죄업을 벗다 다들 영취산이라 묶어서 부르지만 실제로는 진례산과 영취산 두 개의 산이다. 두 산은 자주 헷갈린다. 해발고도로 보면 진례산이 510m로 영취산(439m)보다 더 높지만 어찌된 셈인지 이름은 두 산 중에서 낮은 쪽인 영취산으로 통칭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행락객들이 진례산만 올랐다 내려오지만, 다들 “영취산을 다녀왔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니 여기서도 구분하지 말자. 영취산이든 진례산이든 진달래꽃을 만나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영취산을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가장 오래 화사한 진달래를 만나는 건 ‘돌고개’ 코스다. 흥국사 역에서 ‘진달래로(路)’를 따라가는 길의 너른 주차장이 돌고개 코스의 들머리. 흥국사에서도, 한전 사옥 쪽에서도 오르는 길이 있지만, 이 길에서는 거의 정상에 당도해야 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돌고개 쪽에서는 길게 진달래를 만날 수 있다. 등산로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꽃으로 벌겋게 물든 능선이 올려다보인다. 하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 돌고개 코스는 된비알의 연속이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이제 막 산행을 시작한 이가 하산하는 이들을 줄줄이 붙잡고 “얼마나 이렇게 더 가야 하냐”고 물을 정도다. 팽팽하게 세워진 경사도가 슬쩍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진달래 군락이 마중을 나온다. 어른 키높이를 넘는 20∼30년생 진달래 관목이 아예 꽃터널을 이루고 있다. 진달래 꽃터널을 통과하는 구간에서는 탄성이 그칠 새가 없다. 지금 진달래 절정의 순간은 여수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진례봉까지다. 그 너머로 도솔암을 지나 가마봉, 영취봉에 이르는 구간에도 진달래 군락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지만, 이쪽의 꽃들은 아쉽게도 지난 주말쯤부터 져가고 있다. 그렇다고 진례봉을 넘어가는 게 영 보람없는 일만은 아닌 것이 그쪽의 산자락에 유서깊은 절집 흥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원박람회 개막 때면 흥국사 주변에 한창인 벚꽃은 이미 다 지고 말겠지만, 따스한 봄볕 속에서 산사의 고즈넉한 정취를 즐기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흥국사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깊은 내력도 내력이지만, 대웅전의 거대한 ‘문고리’로도 유명하다. 흥국사 대웅전 문고리는 한 번 잡는 것만으로도 삼악도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불가에서 삼악도란 죄지은 중생이 사후에 떨어지는 세 가지 고통의 세상. 지옥의 세계를 이르는 ‘지옥도’, 동물로 환생하게 된다는 ‘축생도’, 굶주림의 괴로움을 겪는다는 ‘아귀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는 400여 년 전쯤 대웅전 중창에 힘을 보탠 마흔 한 명의 스님들이 문고리를 잡는 중생들이 삼악도를 면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1000일 기도를 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서너 사람이 두 손으로 돌려가며 쥔대도 남을 정도로 쇠를 두드려 만든 문고리는 거대하다. 그 문고리를 손에 쥐면 스님들이 문고리에 세운 원력의 뜻이 죄업의 면탈이 아니라 그간의 악행을 되돌아보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는다. # 월등에서 만나는 무릉도원 순천에는 허다한 명소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선암사와 송광사, 그리고 낙안읍성이다. 이맘때 딱 맞춰 찾아갈 곳으로는 단연 선암사다. 선암사 무우전 앞의 600년 묵은 고매화에 지난 주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섬진강의 매화가 다 지고 난 뒤에야 무우전 앞에서 온통 가지를 뒤틀고 있는 늙은 매화 나뭇가지 끝에 고매화가 꽃을 틔운다. 선암사의 고매화는 매화농원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매화꽃과는 아예 그 격조가 다르다. 꽃을 성글게 틔우지만 검게 마른 가지 끝에 힘겹게 피워올린 매화에서는 그윽한 ‘문향(文香)’이 느껴진다. 그 꽃은 화사한 외양으로 눈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더없이 맑은 정신처럼 마음을 두드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매화는 이번 주말쯤이 절정이겠다. 정원박람회가 개막할 때면 이미 매화는 꽃잎을 분분히 떨구며 지고 말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껏 무르익은 봄날 황홀한 봄 풍경을 보여주는 순천의 월등면 일대를 찾아가보면 어떨까. 순천 서북쪽 전남 곡성과 경계를 이루는 월등면까지는 순천시내에서 차로 30분 남짓. 희아산의 산줄기를 병풍처럼 둘러친 낮은 분지에 들어서 있는 월등면 일대는 이른 봄 매화가 필 때면 무릉매원(武陵梅源)이요, 봄이 더 무르익어 복사꽃이 피어나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황홀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곳의 매화는 아직 한창인데 이 꽃이 다 지고 나면 복사꽃이 이어받는다. 매화의 정취도 나무랄 데 없지만, 월등면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복사꽃이 필 무렵이다. 봄날 이른 아침이면 분지의 마을은 운해로 가득차 수묵화의 풍경을 빚어내는데 여기에 복사꽃까지 꽃등을 환하게 밝히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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