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여름아침 입에 문 얼음 한조각

醉月 2008. 8. 14. 08:10

연재를 시작하며/ 정민[한양대 교수]

말의 값이 없는 세상이다.
제 말만 하는 소음, 귀를 막은 아우성뿐이다.
소리만 지르고 들을 줄 모른다. 말씀이 되고, 죽비 소리가 되는 말,
흐리멍하던 정신을 화들짝 깨어나게 하는 말이 그립다.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달고 고마운 말을 생각한다.
머리 말고 가슴이 먼저 아는 침묵의 말씀은 어디에 있나?
옛글을 읽다가 밑줄 그어 새긴 말씀을 적어본다.
그들의 삶도 팍팍하기는 지금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한 세상 건너가는 일 녹록치도 않았을 터.
그때 이 땅을 살았던 이들의 말씀 속에서 지금 여기를 사는 내가 길을 찾는다.
세상은 다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똑 같다.
그래서 선인들의 말씀은 지금도 힘이 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에게 볶이고 사람에게 다치고 사람에게 절망한다.
매일은 똑같이 지나간다. 똑같은 매일 속에서 삶의 격조, 올곧은 잣대,
치열한 정신과 만나 새 힘을 추스른다. 그는 누군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군가. 어디로 가는가.
달콤한 말의 향연을 즐기자는 것이 아니다. 갈림길,
때로 막힌 길 앞에서 길을 묻는 우리에게 몇 백년 전 이 땅의 지성들은 어떤 지도를 내밀까?
때로 향기롭고, 서슬 푸르고, 칼끝 같은 말들 앞에서 반성문 쓰듯 내 삶을 돌아보는 그런 여정이기를 바란다.

 

1. 종경(鐘磬)

나는 무엇인가?  夫我何器也.
쇠북이요 경쇠다. 鐘磬也
쇠북이나 경쇠는 두드려야 운다. 鐘磬也者, 叩之則鳴,
두드리지 않으면 비록 일년 내내라도 울지 않을 수 있다. 不叩則雖終歲不鳴可也.
예전에 형님인 남유상(南有常)이 두드리고, 오원(吳瑗)이 두드리면 내가 울었다. 昔者太華叩之, 月谷叩之則鳴.
두 사람이 죽고 나서 나는 울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二子者亡, 而吾之不鳴久矣.

   출처 : 남유용(南有容, 1698-1773)〈임계백시발(臨溪百詩跋)〉

쇠북과 경쇠는 저 혼자 우는 법이 없다.
공이가 몸을 세게 두드리면 그제서야 울림을 맞받아 운다.
혼자서는 못 운다.
예전 내 형님이 나를 두드리고,
오원이 나를 두드리면 나는 서슴없이 우렁우렁한 큰 소리를 허공에 울리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울 수가 없구나.
나를 두드려 줄 공이가 없어졌으니.
누가 나를 좀 두드려 다오.
젓가락으로 냄비 뚜껑 두드리듯 하지말고,
한 번 울리면 좀체 여운이 가라앉지 않는 큰 공이로 나를 두드려다오.
꽝꽝 두드려 다오. 엉엉 울게 해 다오. 안으로만 머금는 침묵은 너무 외롭다.


※남유용은?

본관 의령(宜寧). 자 덕재(德哉). 호 뇌연(雷淵)·소화(小華). 1721년(경종 1) 진사(進士)가 되고,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대사헌(大司憲) 대제학 예조참판 역임. 문장과 시에 뛰어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에 뇌연집, 저서에 ‘명사정강’(明史正綱) 등이 있다.

 

2. 허실(虛實)

근자에 동네에 도둑이 많이 들었다.
중문(重門)에 담을 튼튼하게 둘러친 집 치고 도둑질을 면한 경우가 드물었다.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허허실실의 꾀라는 것이다.
제갈공명이 일찍이 성문을 활짝 열고서 거문고를 연주하니, 적군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近日洞內多樑上君子.
重門厚墻之家, 鮮免其偸.
獨我無墻者尙免. 此在兵法, 虛虛實實之術也.
諸葛孔明嘗開門鼓琴, 賊不敢犯.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잡설(雜說)〉


솟을대문에 높은 담을 둘러친 집은 도둑이 노리는 바가 된다.
담도 없고 대문도 없는 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소중한 재물 안 뺏기려 한 것이 도리어 도둑질의 빌미가 되었다.
저만 누리려 드니 같이 누리자고 훔쳐간다.
다 가져가라 하면 가져갈 것도 없다며 그냥 간다.
잘 익은 알곡이 고개를 숙인다. 자신을 낮춘다.
든 것도 없이 쟁그렁거리다가 공연히 도둑을 부른다.
성문을 활짝 열고 혼자 나와 거문고를 연주해도,
적들이 제 발 저려 범접치 못하고 달아났다.
높은 대문, 두터운 담장 안에 고작 재물이나 쌓아두고 큰소리 쳐 봤자 알아주는 사람은 도둑뿐이다.
하물며 그 재물이 제것이 아님에랴. 훔친 것임에랴.

 

◆김창흡은 본관 안동. 자 자익(子益). 호 삼연(三淵). 시호 문강(文康).
서울 출생.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壽恒)의 셋째 아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 창집(昌集) ·창협(昌協)과 함께 은거했다.
1721년(경종 1) 집의(執義), 다음해 세제시강원진선(世弟侍講院進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이(李珥)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3. 속임

영남 사람들이 이원익과 유성룡을 두고 말했다.
“이원익(李元翼)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柳成龍)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嶺南人稱李完平柳西厓曰 : 完平可欺而不忍欺, 西厓欲欺而不可欺. -남학명(南鶴鳴1654-1722), 《회은집(晦隱集)》


병법에서는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智將)과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德將)과 불감기(不敢欺),
감히 못 속이는 맹장(猛將)으로 지휘관을 나눈다.
한 집단의 지도자는 차마 속이지 못하는 사람과,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는 사람과, 무서워서 감히 속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은 무능한 사람이니 논할 것이 없다.
천벌을 받지 어떻게 그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렇게 평했다던 이원익이 나는 늘 궁금하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여러 해 째 모아오고 있다. 

◆남학명은 본관 의령(宜寧). 자 자문(子聞). 호 회은(晦隱). 영의정 남구만(九萬)의 아들.
벼슬을 거부하고 평생 학문에 매진. 문집에 ‘회은집’ ‘회은잡지’(晦隱雜識),
편저에 ‘와유록’(臥游錄) ‘남판윤유사’(南判尹遺事) 등이 있다.


4. 논쟁

망녕된 사람과 논쟁하는 것은 얼음물 한 사발을 들이켬만 못하다.

與妄人辨, 不如喫氷水一碗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논쟁에도 예의가 있다. 토론에도 규칙이 있다.
제 귀는 꽉 막고 입만 벌려 떠드는 사람,
제 주장만 펴고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과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
막무가내로 제 말만 하는 사람을 납득시켜 뜻을 꺾을 생각은 하지를 마라.
차라리 아무 말 말고 돌아와 냉수 한 사발 마시는 것이 낫다.
논쟁하여 꺾는다면, 승복하기는커녕 도리어 앙심을 품을 것이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을 인생에서 진 것쯤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으면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막상 윗자리에 올라서면 아랫사람을 들들 볶는다.
그를 설득해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않는 것이 좋다.
대체로 망녕된 사람의 특징은 자신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남이 그 믿음에 동의해 주지 않는 것을 도무지 참지 못한다. 

◆이덕무는? 본관 전주(全州). 자 무관(懋官). 호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
서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 박지원 등과 사귀고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다.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했고, 많은 시편도 남겼다.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아정유고’(雅亭遺稿) 등의 저서가 있다.

 
5. 시비(是非)
일이 생기기 전에 말을 하면 요망한 말이라 하고,
일에 닥쳐서 말하면 헐뜯는 말이라 한다.
간사한 자를 총애하는 것을 지적하면 무고하여 헐뜯는다고 배척하고,
감춰진 간특함을 논하면 올곧다는 명성을 사려한다고 밀친다.
마땅히 옳다 할 것을 옳다하면 옳지 않다고 하면서 반드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만 옳다고 하고,
마땅히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면 그른 것이 아니라면서 반드시 자기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만 그르다 한다.

先事而言, 則以爲妖言;
當事而言, 則以爲謗言;
論其嬖倖, 則以爲誣罔而斥之;
論其隱慝, 則以爲沽直而排之;
所當是而是之, 則以爲非是, 而必以己之所是爲是;
所當非而非之, 則以爲非非, 而必以己之所非爲非. -신흠(申欽, 1566-1628), 〈치란편(治亂篇)〉


일이 생기기 전에 충고해주면 재수 없는 소리 작작하라고 타박한다.
일이 닥친 뒤에 말하면 지금까지 뭘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한다.
나쁜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충고하면 왜 남을 헐뜯느냐고 하고,
바른 말을 해주면 너 잘났다 한다. 옳은 것을 옳다 하면,
그것이 어째서 옳으냐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면 그것이 어째서 그르냐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에게도 옳아야 하고,
내가 그르다고 여기면 남도 그르다 해야 한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이 그르다 하니 화가 나고,
내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이 옳다고 하니 역정이 난다.
내 옳은 것만이 옳은 것이 아니다.
내 생각만 바르란 법이 없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옳고 그른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생각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 신흠은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1599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됐다.
인조 재위기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 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1651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등을 남겼다.


6. 고식(姑息)

하던 대로 따라하고, 잠시의 편안함만 취한다. 구차하게 놀고, 임시변통으로 때운다.
천하의 온갖 일이 이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

因循姑息, 苟且彌縫, 天下萬事, 從此墮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과정록(過庭錄)》


인순고식(因循姑息)이란 예전 해오던 그대로 따라하고,
잠시 제 몸 편안한 것만 생각하여 바꿀 생각이 없고,
향상할 욕구도 없는 상태다. 그저 세 끼 밥이 입에 들어가니 사는 것이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더 뭘 바라겠는가 하는 마음이다.
구차미봉(苟且彌縫)은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은 않고
어찌어찌 술수를 부려 넘어갈 궁리만 하고,
임시변통을 세워 대충 없던 일로 하고 지나가는 태도다.
인순고식도 나쁘지만 구차미봉은 더 나쁘다. 대충 꿰맨 자리는 언젠가는 다시 터지고,
구차하게 술수를 부려 넘어간 일은 다음번에는 통하지 않는다.
변화할 줄 모르는 삶, 향상을 거부하는 나날은 밥벌레의 삶이다.


◆박지원은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1780년(정조4년) 친족형 박명원을 따라 중국을 방문.
귀국 후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해 발전한 청의 문화를 소개하고
조선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
북학파(北學派)의 영수가 됨.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7.법도

벌 한 통을 오동나무 그늘에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살펴보니,
법도가 몹시 엄격합디다. 나라 꼴이 벌만도 못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풀이 꺾이게 하는구려.
蜂一桶置于梧陰, 觀朝夕衙, 法度甚嚴. 國而不及蜂, 令人短氣.

?허균(許筠, 1569-1618), 〈복남궁생(復南宮生)〉


함열 땅에 유배가 있을 때 벗에게 부친 짧은 편지다. 속도 상하고 무료하기도 했겠지.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는 하루 종일 꿀벌이 잉잉거립니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잠시도 쉴새없이 연신 들락거립니다.
처음엔 제멋대로 나고드는 줄 알았지요. 가만 보니 그런 것이 아닙디다.
차례는 어찌 그리 정연하고, 질서는 얼마나 짜여 있던지요.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위계도 정연하고요. 자꾸 제 눈길이 그리로 갔던 것은 아마도 한심한 나라꼴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도무지 손발이 안맞고,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민생은 언제나 뒷전이고 달콤한 꿀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나라꼴 말씀입니다.
그 생각만 하면 입맛이 떨어지고, 한마디로 김이 팍 샙니다.”

◆허균은

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 본관 양천(陽川), 자 단보(端甫),
호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광해군에 항거하여 하인준 김우성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나 1618년 참형당함.
시문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의 동생이다.
‘홍길동전’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8.강하(江河)

힘만 믿고 날뛰는 사람은 제 명에 못 죽는다.
이기기만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적수를 만난다.
도둑은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은 윗사람을 원망한다.
군자는 천하의 위가 될 수 없음을 알아 아래에 처하고,
뭇 사람의 선두가 될 수 없음을 알므로 뒤에 선다.
강하가 비록 아래로 흐르지만,
온갖 시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자기를 낮추기 때문이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다.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경계할지어다.

强梁者, 不得其死. 好勝者,
必遇其敵. 盜憎主人,
民怨其上. 君子知天下之不可上也,
故下之. 知衆人之不可先也, 故後之. 江河雖左, 長於百川,
以其卑也. 天道無親, 常與善人. 戒之哉. -허목(許穆, 1595-1682), 〈기언서(記言序)〉

남을 꺾기 좋아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적수를 만나 큰 코 다친다.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은 마침내 제 발등을 찍고 만다. 주인된 자리, 윗 자리는 지키기가 어렵다.
도둑이 노리고 아랫 사람이 원망한다.
군자는 이를 잘 알아 자신을 낮추고 조금 뒤에 쳐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강하(江河)는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낮추면 높아지고, 높이면 낮아진다. 하늘의 도는 특별히 편애함이 없다.
다만 착한 사람 편에 설뿐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허목은

본관 양천. 자 문보(文父) ·화보(和甫). 호 미수(眉 ). 시호 문정(文正).
1660년(현종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했다.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에 오른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문집 ‘기언’(記言), 역사서 ‘동사’(東史), 예서(禮書) ‘경례유찬’(經禮類纂) 등을 남겼다.


 9. 칭찬 
마을 사람이 모두 좋아해도 안되고,
다 미워해도 안 된다. 좋은 점은 좋아하고,
나쁜 점을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

鄕人皆好之未可也,
皆惡之未可也. 不如其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也.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역옹패설》


명나라 황순요(黃淳耀)는 《자감록(自監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끄러움을 지니고 있는데 남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기뻐해서는 안 된다.
내게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데 남들이 나를 헐뜯는다고 해서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在我者有愧焉, 不可以人之譽我而輒喜也. 在我者無愧焉, 不可以人之毁我而輒懼也)”
모든 사람이 다 칭찬하면 칭찬이 아니라 욕이거니 생각하라.
하지만 사람마다 욕을 한다고 덩달아 가세해서는 안 된다.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는데 덮어놓고 잘했다고 하면 이미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누구나 잘못이라고 손가락질하는데도 그가 태연히 그 길을 간다면 무언가 미처 살피지 못한 연유가 있을 터이다.
무조건의 칭찬과 손가락질은 믿을 것이 못된다. 모든 사람의 비위를 다 맞추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이제현은

본관 경주,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역옹·실재(實齋),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10. 선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 어디있나

몸에 역량을 간직하고 나라에 쓰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선비다.
 선비는 뜻을 숭상하고, 배움을 도타이 한다. 예를 밝히고, 의리를 붙든다.
청렴을 뽐내고, 부끄러워 할 줄 안다. 하지만 세상에 흔치가 않다.

藏器於身, 待用於國者, 士也.
士所以尙志,
所以敦學,
所以明禮,
所以秉義,
所以矜廉,
所以善恥, 而又不數數於世也.
-신흠(申欽, 1566-1628), 〈사습편(士習篇)〉

 

선비란 올바른 뜻을 지니려 노력하는 자다.
그는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잘못된 길을 밝혀 그 까닭을 살핀다.
그의 행동은 의로움에 바탕하며, 욕심을 부려 탐욕에 물들지 않는다.
바르지 않은 행동에는 부끄러워 할 줄 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
마음 밭은 돌보지 않고,
새로운 배움에는 관심이 없다. 하던대로만 하고,
제게 좋은 일이면 염치(廉恥)를 불고(不顧)한다. 앞뒤도 물불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소인이다. 

 

◆신흠은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1599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됐다.
인조 재위기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 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1651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등을 남겼다.


11. 심지

공주의 초는 나라에서 유명한 것이다. 그 정결하고 투명함이 보배론 구슬과 다름없다.
근래 누가 보내준 것이 있길래 밝혀서 책을 비추었더니 어두워 글씨를 분간할 수 없었다.
돋울수록 더 어두워지고, 파낼수록 점점 흐려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기름도 깨끗했고, 초를 만든 것도 아주 정밀했다.
타서 줄어듦도 더뎠다. 다만 문제는 심지가 거칠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마음이 거친자는 비록 좋은 재료와 도구를 지녔다 해도 사물을 살필 수 없음을 말이다.

公州燭, 國中之有名稱者, 其淨潔明徹, 無異寶珠.
近有見遣者, 燃以炤書, 昏不可辨其行墨. 挑之彌暗,剔之愈 .
 細察之, 取非不潔也,造燭非不精也, 燒短非不遲也, 直孼由心莖之耳. 始悟心粗者, 雖有好材具, 不可以察事物.

?홍길주(洪吉周,1786-1841), 《睡餘演筆》

공주산의 밀초는 맑고 투명해서 그것으로 전국에 이름 높았다.
그 투명한 밀초로 불을 밝혔는데, 정작 불빛은 환하지 않았다.
깨끗한 기름을 써서 정밀한 솜씨로 만들었지만, 나쁜 심지를 쓰는 바람에 모든 공이 빛을 바래고 말았다.
다 좋았는데 심지가 올바로 박히지 않았던 것이다.
좋 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할 자태를 지녔다 해도
마음이 올바로 박히지 않으면 지닌 바 물질이나 지위로 인해 사회의 좀이 되고,
남에게 해악을 끼친다. 아무 짝에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손가락질을 받는다.
심지가 옳게박혀야 한다.


◆홍길주는 본관 풍산, 자 헌중(憲仲), 호 항해(沆瀣). 1807년(순조 7년) 생원·진사 향시에 합격한 뒤 학문에 전심.
만년에 잠시 군읍(郡邑)을 다스렸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했다.
저서에‘항해병함(沆瀣丙函)3, ‘숙수념(孰遂念)3 등이 있다.거친 심지에 정결한 기름 소용있으랴


12. 그림

어제도 할 수 없고 오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삼가 마음이 열리는 길한 날을 가려 선생의 축수(祝壽)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난 하나 바위 하나 그리기가 별을 따기 보다 어렵군요.
참담하게 애를 써 보았지만 허망함을 느낍니다.
비록 아직 그리지는 못했지만 그린 것이나 같습니다.
昨日不可, 今日不可. 謹擇開心吉日, 擬爲先生壽供. 一蘭一石,
難於摘星. 慘憺經營, 從覺索然. 雖未畵, 猶畵耳. -조희룡(趙熙龍, 1789-1866),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편지 글이다. 누군가 축수(祝壽)의 그림을 청해왔던 모양이다.
그리기는 해야겠는데 신명이 나지 않는다. 먹 갈아 붓을 끼적거려 보아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안 나온다.
붓하고 종이만 있으면 저절로 글씨가 써지고 그림이 그려지는 줄 아는 사람들은 이 마음을 모른다.
흥이 돋아 붓끝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 삽시간에 몇 장이고 끝마칠 그림이,
몇날 며칠을 끙끙대도 난초 하나 바위 하나를 그릴 수가 없다.
오죽 괴로웠으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그러다 문득 마음이 환하게 열리면, 먹물이 튀고 붓이 춤춘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답답하게 꽉 막혀 있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예술을 한다는 것, 학문을 한다는 것,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현듯 다가오는 짧은 격정의 순간을 위한 기다림일 따름이다.

 

◆조희룡은

서화가. 본관 함안(咸安), 자 치운(致雲), 호 호산(壺山)·우봉(又峯)·철적(鐵笛)·매수(梅 ). 진주(晉州) 출생.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 1813년(순조 13)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고,
1844년(헌종 10) 박태성 등 41명의 전기를 수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를 편찬했다.
추사체를 잘 썼고, 매화를 잘 그렸다. ‘홍매도’(紅梅圖) ‘강안박주도’(江岸泊舟圖)
‘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 등의 그림과, ‘석우망연록’(石友忘年錄)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등의 문헌을 남겼다.


13.벽지
문순공 이황(李滉)이 단양군수로 있다가 떠났을 때 일이다.
아전이 관사를 수리하려고 들어가 방과 창을 보니,
도배한 종이가 맑고도 깨끗하여 새것 같았다.
요만큼의 얼룩도 묻은 것이 없었다. 아전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李文純滉治丹陽, 及其去也, 吏人欲修理衙舍, 入見房 ,
塗紙明潔如新, 絶無涕唾點抹. 吏民大悅. -이식(李植, 1584-1647), 《택당집(澤堂集)》

늘 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아전과 백성들이 기뻐했다니 무엇이 기뻤던 걸까?
몇 년을 거처했던 방인데, 마치 어제 도배한 방처럼 깨끗했다.
그의 성리학에 대한 도저한 학설보다, 신화처럼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보다,
이런 작은 기록을 통해 나는 퇴계 선생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새로 도배한 벽이 1년도 못되어 땟자국에 지저분해지는 우리네야 이런 경(敬)으로 점철된 삶을 넘볼 수가 없다.
더러워지면 닦아낼 줄 모르고, 덮어 가리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식은 본관 덕수(德水), 자 여고(汝固), 호 택당(澤堂), 시호 문정(文靖).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좌천됐고,
1642년(인조 20) 김상헌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청국에 잡혀갔다가 탈주하여 돌아왔다.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에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14. 외양

말을 살핌은 비쩍 마른 데서 놓치게 되고 선비를 알아봄은 가난에서 실수가 생긴다.
相馬失之瘦, 相士失之貧.  김득신(金得臣), 《종남총지(終南叢志)》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처음 온달이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삼가 시장 사람의 말은 사지 마시고,
나라 말로 병들어 비쩍 말라 쫓겨난 놈을 고른 뒤에 이것을 사십시오.”
겉보기에 살지고 번드르르한 말은 시장 사람의 말이다.
병들어 비쩍 말라 뼈가 다 드러난 말은 나라의 마굿간에 있다가 병들어 쫓겨난 말이다.
하지만 혈통이 다르다.
시장 사람 말은 기껏해야 마차 끄는 데나 쓸 수 있지만,
전장에 나가 싸우는 장수의 말이 될 수는 없다. 세상에 천리마가 없었던 적은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없었을 뿐이다.
혈통 좋은 천리마도 기르는 사람을 잘못 만나면 비루먹어 병든 말이 된다.
겉만 보고는 잘 알 수가 없다. 비쩍 말랐다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말 가운데 명마가 있다.
꾀죄죄한 행색 때문에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가난한 선비 가운데 숨은 그릇이 있다.
하지만 우리 눈은 언제나 껍데기만 쫓아다닌다. 번드르한 겉모습에 현혹되어 속는다.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김득신(1604-1684)은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柏谷). 당시 한문4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문명(文名)이 세상에 알려졌다.
공부할 때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주력했고
특히 <백이전(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지었다.
저서에 ‘백곡집’(柏谷集) ‘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 화가 김득신(1754~1822)과는 다른 인물.


15.미봉

하는 일마다 미봉책을 써서 부딪치는 곳마다 파탄을 일으키는 자는 재주 없는 소인이다.
단지 새로 알게 된 사람을 농락하려 드는 까닭에 몇 달 가는 벗이 없다.

事事彌縫, 觸處破綻者, 是無才之小人也. 只?弄新知之人, 故無時月之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사소절(士小節)》

카드 빚에 몰린 사람은 새로 카드를 만들어 대출 받아 앞선 빚을 갚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새 카드를 만들다가 마침내는 파산에 이른다.
목돈을 손에 쥐려고 자동차를 할부로 사서 사자마자 되파는 사람도 많다.
이런 것이 미봉(彌縫)이다.
우선 급한 김에 눈앞에 불을 끄기에 급급해서,
이러한 되풀이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외면한다.
어떻게 되겠지, 그러다 말겠지 하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이 이 미봉 때문에 생겨난다.
정면돌파하지 않고 그때그때 우선 땜질로 넘어가다가 나중에는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문제가 터져 한순간에 침몰하고 만다.
이런 소인들은 자꾸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접근 의도가 불순하므로 단물이 빠지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알아채고 멀리 한다.

 

◆이덕무는 조선 후기 실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신천옹(信天翁).
가난하게 자랐지만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 달통했으며,
개성이 뚜렷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했다. ≪관독일기(觀讀日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등의 저서가 있다.


16.속임

사람이 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귀하게 여길 것은 성실에 있다.
어떤 것도 속일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다.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며, 농사꾼이 동료를 속이거나
장사꾼이 동업자를 속임에 이르러서는 모두 죄에 빠져 어그러지게 되고 만다.
오직 한가지 물건만은 속일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입이다.
모름지기 거친 음식을 속여넘겨 잠시 슬쩍 지나치는 것,
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올 여름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일이다.
상치 잎으로 밥을 싸서 움켜쥐고 삼켰다. 손님이 물었다.
“쌈 싸 먹는 것이 절여 먹는 것과 다른 점이 있나요?”
내가 말했다. “이것은 선생이 입을 속이는 방법이라네.”

人生兩間所貴在誠. 都無可欺, 欺天最惡. 欺君欺親, 以至農而欺?,
商而欺伴, 皆陷罪戾. 唯有一物可欺, 卽自己口吻. 須用薄物欺罔,
瞥過暫時, 斯良策也. 今年夏, 余在茶山. 用??葉包飯, 作搏而呑之.
客有問者曰: ‘包之有異乎菹之乎?’ 余曰: ‘此先生欺口法也.’ -정약용(丁若鏞, 1762-1836)〈우시이자가계(又示二子家誡)〉

성실은 가장 든든한 나의 동반자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제 입을 속이는 것만은 괜찮다.
상치잎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밥을 한 숫갈 듬뿍 얹는다.
그 위에 장을 두고 주먹만하게 싸서 한 입에 우겨 넣는다.
두 볼이 미어지게 우물거리다 보면, 다른 반찬 하나도 없어도 진수성찬이 부럽지가 않다.
이것이 가난하여 먹을 것 없던 다산 선생이 유배지에서 개발한 입 속이는 방법이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정신의 넉넉함을 잃어버리는 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종이 되어 이리저리 질질 끌려 다니는 일이다.
거친 밥, 헤진 옷, 초라한 집은 내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다. 이것들은 얼마든지 속여먹을 수가 있다.

 

◆정약용은
자 미용(美鏞). 호 다산(茶山)·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7.속물

옛날에 백성의 기림을 받고자 하나, 실은 재물을 탐하는 자가 있었다.
일찍이 문에다 방을 내걸었다. “아무 날은 내 생일이니, 삼가 선물을 바치지 말도록 하라.”
이윽고 고을 사람을 모아 놓고 백로를 제목 삼아 각각 시를 짓게 하였다.
대개 그 결백함을 칭송케 하려 함이었다. 한 사람이 문득 읊었다.
“날아올 적에는 학인가 여겼더니, 내려앉아 어느새 고기를 찾네.”

古有欲要民譽, 而實則瀆貨者. 嘗揭榜於門曰:
"某日是余生日, 愼勿有獻也.”旣而會邑人, 以白鷺爲題, 而使各賦詩. 蓋欲稱其潔也.
 一人輒吟曰: “飛來疑是鶴, 下處却尋魚.”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옥천군이망재기(沃川郡二罔齋記)〉

 

마음은 가볍게, 두 손은 무겁게.
예전 군대 시절 제 상관 이야기라며 껄껄 웃던 후배 얼굴이 생각난다.
생일인데 선물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옆구리 찔러 절 받자는 수작이다. 그런데도 선물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고,
나는 받지 않으려 했는데 굳이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은 것으로 하겠다는 속셈이다.
이 마음이 백로와 같이 고결하지 않느냐고 하자, 대번에 톡 쏘았다.
“멀리서 뵈올 적에는 학처럼 고결하신 분인가 했더니,
자리를 잡자마자 먹을 것부터 챙기시는군요.”쩝! 입맛이 쓰다. 속물은 어딜 가나 속물이다.

 

◆송시열은

본관 은진(恩津). 호 우암(尤庵).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자 노론(老論)의 영수.
성격이 과격해 정적이 많았으나 문하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1689년(숙종 15) 세자(훗날 경종) 책봉을 반대하다 사사(賜死)됐다.
저서에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등이, 문집으로 '우암집(尤菴集)'이 있다.

 
18. 위엄

삼가면 뉘우침이 적고, 청렴하면 위엄이 선다.
지극히 험한 일이 닥쳐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여기라.
몸가짐에 줏대가 있으면 마침낸 바르게 되리.
양덕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 맡은 일 찬찬히 살피시게나.

謹則寡悔, 廉則威兮. 事遇至險, 視若夷兮. 操之有要,
終允臧也. 陽德必昭, 采宜詳也.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증신정언연행(贈申正言燕行)〉

중국 사신 길에 오르면서 한 마디 덕담을 부탁하자, 써준 글이다.
자네! 먼 길 떠나니 부디 귀한 몸 보중하시게. 더욱이 아랫 사람 이끌고 가는 길이 아닌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삼가고 삼가시게. 그래야만 후회할 일이 적을 것이야.
혼자 다 하겠다는 생각,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 잠시 접어 두시게.
공연히 재물 욕심일랑은 부리지도 말게.
윗사람이 탐욕스러우면 아랫사람에게 위엄이 서지 않는 법이라네.
생각지 못한 힘든 일도 적지 않을 것이네. 침착하게 아무 일도 아닌 듯 대범하게 처리하시게.
무턱대고 허둥대기만 하다가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말지.
무엇보다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네.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 한다면 누가 자넬 믿고 따르겠나.
음덕이야 가리워져 잘 드러나지 않겠지만, 양덕은 밖으로 환한 빛을 발하기 마련일세.
자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말고 꼼꼼히 살피시게나.
돌아오는 날 모두들 자네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싶네.

 

◆권상하 : 본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송시열의 수제자.
숙종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좌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이(李珥)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를 지지했다.
글씨에 능해 〈기백이태연표 箕伯李泰淵表〉〈부사과이숙표 副司果李塾表〉등의 작품이 전하며,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수재집》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19.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다

천지는 만물에 있어 그 아름다움만을 오로지 할 수는 없게 하였다.
때문에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 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로 뛰어나게 되면 공명이 떠나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天地之於萬物也, 使不得專其美.
故角者去齒, 翼則兩其足, 名花無實, 彩雲易散. 至於人亦然.
之以奇才茂藝, 則革功名而不與, 理則然矣.

-이인로(李仁老, 1152-1220), 《파한집(破閑集)》

뿔이 있는 소는 윗니가 없다.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범은 뿔이 없다.
예쁜 꽃 치고 열매가 변변한 것이 없고, 열매가 귀한 것은 꽃이 시원찮다.
날개 달린 새짐승은 다리가 두 개 뿐이다. 좋은 것만 골라서 다 갖는 이치란 없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곳이 있게 마련이고, 많은 경우 장점이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친구와 적은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을 수는 없고, 받으려 해서도 안 된다.

 

◆이인로는
고려 때 학자 문인. 호 쌍명재(雙明齋). 가문은 고려 전기 3대 가문의 하나였던 경원이씨(慶源李氏)로
누대에 걸쳐 왕가의 외척이 된 문벌귀족 출신. 문장이 뛰어나 저서《파한집》을 남겼다.


20.바깥말에 솔깃하느니 스스로를 들어라

 
21. 시청(視聽)

남을 살피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살피고, 남에 대해 듣기보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들으라.

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 -위백규(魏伯珪,1727-1798), <좌우명(座右銘)>

10살 때 지었다는 좌우명이다.
그 조숙함이 참 맹랑하다.
자꾸 눈길을 밖으로 향해 기웃거릴 것 없다.
남 잘못하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제 허물은 덮어 가린다.
남 비방하는 말은 솔깃해서 듣고, 남이 제 말 하는 것은 못 견딘다.
반대로 하면 어떨까? 내가 남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듯,
그 남들도 나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하겠지?
내가 남을 하나 하나 평가하듯, 그들도 나를 이러쿵저러쿵 저울질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남은 내가 아니고, 나도 남은 아니니, 나는 나요 남은 남일 뿐이다.
공연히 바깥 말에 혹해 솔깃하기 보다, 내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나를 보고,
내 귀를 열어 놓고 내가 나를 듣는 것이 백 번 낫지 않을까?

 

◆위백규는
조선 후기 실학자. 본관 장흥.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
과거에 수차 응시했지만 모두 낙방하고 호남의 벽지에서 무명의 선비로 지내다
68세에 이르러서야 정조의 눈에 들어 벼슬길에 올랐다.
학통은 이이 김장생 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으로 인해 학문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다.


22. 상하(上下)

위 아래는 정해진 위치가 없고, 낮고 높음은 일정한 이름이 없다.
아래가 있으면 반드시 위가 있게 마련이다. 낮은 것이 없고 보면 어찌 높은 것이 있겠는가?

夫上下無定位, 卑高無定名. 有下則必有上. 無卑則安有高. -강희맹(姜希孟,1424-1483),〈승목설(升木說)〉

위 아래는 상대적인 이름이다.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높고 낮은지를 따지는 것은 그래서 쓸데없는 짓이 된다.
누구에 비해 얼마나 더 높고 낮은지는 또 다른 누구 앞에 서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높았던 사람이 저기서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된다.
동네에서 폼 잡다가 큰물에 나가 망신만 당한다.
스스로 높다고 생각해 젠체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이 없다.
내가 힘겹고 어려우면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자세를 다 잡아야 한다.
내가 넉넉하여 힘이 생겨도 저 밑바닥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옛말하며 살 때가 있게 된다. 조금만 힘들어도 남 원망이나 하고,
못 참고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람이 있다.
향상의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는 사람이 있다. 높아지려 하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진다.

 

◆강희맹은
본관 진주.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 등.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해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다.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23.방심(放心)

학문의 길은 방심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눈감고 오도카니 앉아 오로지 방심만을 구하려 든다면,
타고난 자질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불교의 좌선(坐禪)이나 도가(道家)의 수신(守神)이 될 뿐이다.
그만 못한 사람은 도리어 마음에 병이 되는 빌미가 되지 않음이 드물 것이다.

學問之道, 求其放心而已矣. 然閉目兀坐, 而唯放心之是求, 則天資高者,
爲釋氏之坐禪, 道家之守神而已. 其下者, 鮮不及 其心疾.

-홍석주(洪奭周·1774~1842), 《학강산필(鶴岡散筆)》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마음이 제멋대로 놀러 나가면 큰일이다.
세상에는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면, 그 자리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본래의 마음은 텅 비고 투명한 것이어서, 들어오는 사물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 마음에 헛생각이 들어오면 사물도 옳게 보지 못하고, 자꾸만 판단을 흐리게 된다.
생각은 마음의 얼룩이다. 거울 위에 덕지덕지 묻은 때다.
얼룩을 지워내고 더깨 앉은 때를 걷어내면 사물이 투명하게 비친다.
명상을 한다면서, 침묵을 한다면서 그 속에서 헛생각이나 짓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을 구하려다 마음을 놓아 버리는 것이 된다.
자칫하다가는 명상 속에서, 침묵 속에서 생각에 짓눌려 제 마음을 잃고 헤매게 된다.


◆洪奭周는

본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하는 남다른 총명함으로 유명했지만,
정승이 된 후에도 평민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저서로는 ≪연천집≫ ≪학해(學海)≫·≪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등이 있다.

 
24.문장
옛 사람을 지금에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성품의 높고 낮음과 마음가짐의 그르고 바름은 마땅히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문장을 통해 볼 수가 있다. 문장이란 것은 그 성품과 마음가짐의 그림이다.

古人今不可見矣. 然則其性度之高下, 心術之邪正, 當於何見?
見於文章. 文章者性度心術之畵也.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안노공마고단기첩발(顔魯公麻姑壇記帖跋)〉

글은 그 사람이다.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든 사람인지 난 사람인지,
된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려다 깡통소리를 내는 글도 있고,
무언가 뽐내려는 현학 취미가 덕지덕지 묻은 글도 있다.
반대로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글이 있고,
밑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아 담백한 속에서도 읽는 사람을 압도해 오는 그런 글도 있다.
글을 보면 다 알 수가 있다. 감출 수가 없다.

 

◆유한준(兪漢雋) 자는 만청(曼瘦) 여성(汝成), 호는 저암(著菴) 창애(蒼厓).
조선 후기의 뛰어난 문장가. 송시열을 추모하여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 ≪저암집≫이 전해온다.

 
25.자극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은 사람에게 좋지 않다.
먹어도 또한 맛이 없다. 담백한 음식을 오래 먹다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사람에게 해로울 것이 별로 없다.

飽厚味不益人. 食亦無味, 淡食之久時, 喫膏粱味, 別不害人. -장붕익(張鵬翼·1646∼1735),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중

며칠을 담백한 음식만 먹다가,
가끔 가다 한번씩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면 모두들 달고 맛있어 한다.
하지만 그 단 음식도 매일 똑같이 먹으면 질리고 물려서 젓가락이 가질 않는다.
더욱이 진한 맛의 음식은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기름이 끼게 하여,
부족하니만 못하게 되기 쉽다.
우리가 매일 갈비찜을 먹지 않고 흰밥을 먹는 까닭이다.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매일 매일이 신나는 모험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자극의 연속일 수는 없다.
평범한 나날들 속에 불시에 끼어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삶의 윤활유가 될 수 있다.
매일 매일이 모험이라면 그것은 이미 전쟁이지 신나는 그 무엇일 수는 없다.

 

◆張鵬翼은...
본관 인동(仁同). 자는 운거(雲擧). 조선후기 무신(武臣).
1727년(영조3) 훈련대장 재직시 무신으로서 파당(派黨)에 관여한 혐의로 일시 파직되었지만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북한산성을 지키며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26.희로(喜怒)

기쁠 때의 말은 신의를 잃기 쉽고 성났을 때의 말은 체모를 잃기 쉽다.

喜時之言, 多失信. 怒時之言, 多失體.
-유계(兪棨, 1607-1664), 〈잡지(雜識)

기쁜 일이 있어 기분이 좋을 때는 마음이 들떠 지키지도 못할 말을 쉽게 한다.
화가 나서 평정을 잃으면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넘치게 해서 체모를 잃고 만다.
청나라 주석수(朱錫綬)는 《유몽속영(幽夢續影)》에서
“근심이 있을 때는 술을 함부로 마시지 말고,
성났을 때는 편지를 쓰지 말라. 憂時勿縱酒, 怒時勿作札”고 했다.
또 “잠깐의 분노로 남을 꾸짖지 말고, 잠시 기쁘다고 덜컥 승낙하지 말라.
乍怒勿責, 乍喜勿諾”고도 했다. 다 같은 말이다.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의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 한때의 기분에 좌우되어 큰 일을 그르치기 쉽다.
감정은 조절할 줄 알 때 빛이 난다.

 

◆兪棨는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과 더불어 충청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하다 유배됐고,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 대신 종(宗)으로 할 것을 요구하다 다시 유배됐다.
저서로는 ≪시남집≫·≪가례원류≫·≪여사제강≫·≪강거문답≫ 등이 있다.


27.이해(利害)

개구리는 시내나 도랑에서 나는데 꼭 계단이나 뜰 사이에 숨는다.
닭들이 마구 뒤져 잡히기만 하면 죽는다. 나는 말한다.
왜 수풀 사이에 가만 있지 아니하고,
인가에 가까이 와서 재앙을 면치 못하는 것일까.
생각건대 사람 가까운 곳에는 땅이 기름지고,
땅이 기름지면 벌레가 많으니, 개구리는 벌레를 쫓아 온 것이었다.
아! 이로움이 있으면 해가 뒤따른다는 말을 이에 있어 징험할 수 있겠다.

蛙生溪瀆. 必藏於階庭之際. 群鷄恣索得便致命. 翁曰:
何不任在林藪之間, 輒來近人家, 而禍殃之不免哉!
意者, 近人則土沃, 土沃則蟲繁, 蛙所以逐蟲至也.
噫! 有利則害隨, 於此可驗. -이익(李瀷, 1681-1763), 〈관물편(觀物篇)〉

저 있어야 할 데 안 있고, 딴 데를 기웃거리다 목숨을 재촉한다.
인가 근처의 많은 벌레는 개구리에게 탐나는 먹이지만,
닭들에게는 개구리가 더 없는 먹이다. 벌레를 얻으려면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하지만 개구리는 눈앞의 이익에 팔려 앞뒤 가리지 못하고 죽을 땅으로 뛰어든다.
한 두 끼의 배부른 식사와 목숨을 바꾸고 만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항상 예기치 못할 해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얻고 잃는 즈음에 손익의 계산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일이 가져다 주는 이로움이 이 일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해로움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세상에도 인간 개구리들이 너무 많다. 

 

◆李瀷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성호(星湖).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鼻祖).
둘째 형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는 것을 본 뒤 벼슬에의 뜻을 접었다.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실학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로 꼽힌다.


28. 득의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 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에 있다.
물고기가 물을 사랑함을 가지고 새를 깊은 못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새가 숲을 사랑함을 가지고 물고기를 깊은 숲으로 옮겨서도 안 된다.
새로써 새를 길러 숲 속의 즐거움에 내맡겨두고,
물고기를 보아 물고기를 알아 강호의 즐거움을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어,
한 물건이라도 있어야 할 곳을 잃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각기 마땅함을 얻도록 해야 한다.

鳥樂在於深林, 魚樂在於深水. 不可以魚之愛水, 徙鳥於深淵,
不可以鳥之愛林, 徙魚於深藪. 以鳥養鳥, 任之於林藪之娛, 觀魚知魚,
縱之於江湖之樂, 使一物不失其所, 群情各得其宜. -이자현(李資玄, 1061-1125), 〈제이표(第二表)〉

나를 제발 내버려 두어 다오. 숲에서 마음껏 노래하는 새처럼,
물 속에서 뛰노는 물고기처럼 기쁘게 살고 싶다.
나를 상관하지 말아다오.
깊은 숲이 좋지 않으냐고 물에서 물고기를 건져내 땅위에 놓는 일,
물 속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며 새를 물 속에 집어 넣는 일,
그런 일은 이제 너무 지겹다.
새는 창공에서 놀고, 물고기는 물 속에서 논다.
나는 공부하며 놀고, 누구는 노래하며 놀며,
누구는 돈을 세며 논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끌어들이지 말아다오.
이번 한 번만이라고 말하지 말아다오.
티끌 세상 그물은 질기기만 해,
소박한 삶을 누리고픈 소망조차 이제는 너무 사치스런 꿈이 되어 버렸구나.

 

◆李資玄은
본관은 인주(仁州). 호는 식암(息庵) 청평거사(淸平居士) 등.
1089년(선종 6) 과거에 급제했지만 관직을 버리고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서 나물밥과 베옷으로 평생을 살았다.

 
29.탐학

중종 때 정평부사 구세장이 탐욕이 끝이 없었다.
말안장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부(府)의 뜰로 들어오게 하여,
직접 가격을 따지며 싸니 비싸니 야단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관가의 대금으로 이것을 샀다.
광대가 정초에 그 형상을 놀이로 공연하였다.
임금께서 물으시자 이렇게 대답했다. “정평부사가 말안장 사던 일이옵니다.”
마침내 잡아오라 하여 심문케 하고 장물죄로 처벌하였다.
광대 같은 자도 또 능히 탐관오리를 규탄하여 공박할 수가 있다.

中廟朝, 定平府使具世璋貪 無厭. 有賣鞍子者, 引來府庭, 親與論價,
詰其輕重者數日. 卒以官貸買之. 優人於歲時, 戱作其狀. 上問之,
對曰: 定平府使買鞍子事也. 遂命拿來 訊, 竟贓罪. 若優者又能彈駁貪汚矣. 어숙권(魚叔權,조선전기),《패관잡기(稗官雜記)》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말안장 사겠다고 장사치를 직접 불러다 며칠을 값 깎자고 실갱이 하다가,
그나마 공금으로 대납하였다. 하도 더러운 꼴을 보다 보니, 사람들이 침 뱉고 욕했겠지.
그 소문이 금세 쫙 퍼졌겠지. 그걸 광대는 코메디로 만들어 공연으로 올리고,
왕은 격분하여 당사자를 잡아들이고, 이렇게 해서 구세장 그의 이름은 길이 길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魚叔權은
본관은 함종(咸從). 호는 야족당(也足堂) 또는 예미(曳尾).
외국어에 능하여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나 시평·시론에 일가를 이루어 이이(李珥)를 가르칠 정도였으나,
서출이란 벽에 막혀 큰 출세를 하지 못했다.

 
31.영단(靈丹)

책 속에 엄한 스승과 두려운 벗이 있다.
읽는 사람이 진부한 말로 보아 버리는 까닭에 마침내 건질 것이 없을 따름이다.
만약 묵은 생각을 씻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보면
넘실대는 성인의 말씀이 어느 것 하나 질병을 물리치는 영약(靈藥)이 아님이 없다.

黃卷中自有嚴師畏友. 而讀者以陳言看了, 故無得力處. 若濯去舊見, 以新心靜看, 則洋洋聖謨, 無非却疾之靈丹.

-김굉, 1739-1816), 〈각재하공행장(覺齋河公行狀)〉


책 속에 길이 있다. 그런데 그 길을 오래 방치해 두니 온통 가시덤불로 막힌 길이 되었다.
읽는 사람도 심드렁해서 으레 고리타분한 말만 써 있으려니 한다.
읽어도 건질 것이 없고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앉아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건 무슨 뜻일까?
하며 내 거울에 찬찬히 비추어 보면, 준열한 나무람에 정신이 화들짝 돌아온다.
말씀이 물결이 되어 내 몸을 적신다.
진땀이 흐른다. 말씀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귀와 눈이 막혀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일 뿐이다.
눈앞의 영약을 던져두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처방만 찾아 이리저리 우르르 왔다갔다 한다.


◆김굉은
본관은 의성(義城). 단양군수,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지방관 재직시 서리(胥吏)를 엄단하고 청렴하여 군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으며,
문학에 남달리 뛰어났고 필법이 높았다.

 
32. 용의(用意)

소동파가 말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듯, 글을 지으려면 뜻을 써야 한다.
" 참으로 맛이 있는 말이다. 대저 시장 가운데 물건이 숱하게 많지만,
돈이 없고 보면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옛사람의 책 속에 문자가 수도 없지만 뜻이 없으면 내가 가져다 쓰지 못한다.
뜻을 버리고서 옛 책을 읽는 것은 돈 없이 저자의 가게를 어슬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東坡云: ‘販貨須使錢, 作文須使意.’ 斯言眞是有味. 夫市中物貨非不多,
而無錢則不可爲我有; 古人書中文字非不多, 而無意則不得爲我用. 捨意而讀古書, 何異於無錢而歷市肆哉.

-임상덕(林象德, 1683~1719), 〈통론독서작문지법(通論讀書作文之法)〉

돈 없이는 시장통을 백날 어슬렁거려봐도 배고픈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
필요한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한다. 생각 없이 그저 읽기만 해서는 백 권 천 권을 읽어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뜻[意]이 없이는 소용이 없다. 뜻이 없으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되지만,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 맥을 놓고,
정신을 팔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돈 없이 따뜻한 밥 한 그릇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먹을 수야 있겠지만, 그나마 먹으려면 거지 취급을 받아야 한다.
손가락질을 견뎌야 한다. 정신을 딴 데 두고 하는 공부는 백날 해봤자 도로아미타불이다.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林象德은

본관은 나주(羅州). 홍문관교리를 거쳐 진산군수 능주목사 등을 역임,
대사간에 올랐으나 37세에 병사했다. 경세(經世)의 뜻을 품고
당시의 제도와 시책들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많은 건의책을 내놓았다. 
 
33. 자재(自在)

설령 그대가 비록 불행하게도 동량의 재목이나 배의 노로 쓰임을 얻지 못한다 해도,
또한 스스로 깊은 산 큰 골짝에서 지낼 뿐이다.
하늘을 우러르거나 넘어지고 엎어짐을 한결같이 바람과 이슬이 생성하는 바에 내맡길 것이니,
누가 썩은 흙 사이에서 싹을 틔워 억새나 다복쑥과 더불어 높고 낮고 마르고 무성한 것을 다투기를 즐기겠는가?
대저 그렇다면 다만 다북쑥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억새 또한 넘볼 수 없을 것이다.

使夫子雖不幸不得托棟樑舟揖之用, 亦自在深山大壑而已. 昻宵偃 ,
 一任風露之生成, 孰肯芽茁糞壤之間, 與莪蒿占高下枯 哉? 夫然則不但蒿不可爲, 莪亦不足尙已.
-신대우(申大羽·1735~1809), 〈호암기(蒿菴記)〉

내 품은 재주를 세상이 알아 주지 않는다. 섭섭하다. 마음껏 포부를 펼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그저 깊은 계곡 시냇가의 소나무로 하늘을 우러러 길게 손을 뻗을 뿐이다.
하기야 안목 있는 목수의 눈에 띄어 베어져 궁궐의 대들보로 쓰인다 한들 그것은 내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나무의 쓰임은 베어져 기둥이 되는데 있는가?
아니면 저 타고난 수명을 마음껏 누리며 숲속의 삶을 즐기는 데 있는가?
똑같이 다시 묻는다.
인간의 쓰임은 명예와 지위를 얻어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데 있는가?
아니면 저 타고난 삶을 기뻐하며 인간다운 나날을 누리는 데 있는가?
썩은 흙 속에서 새 싹을 틔워 억새나 다북쑥과 키를 겨루지는 않겠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좀 알아 달라고 아등바등대는 것처럼 민망한 꼴이 없다.

◆ 申大羽는

1799년에 학문과 덕행의 훌륭함을 인정받아 원자궁(元子宮)의 요속(寮屬)으로 발탁되어 동궁(뒤의 순조)을 보필했으며,
훗날 순조가 즉위한 뒤에 그 공로로 우부승지에 제수됐다.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능했고,
저서로는 ≪완구유집≫이 전한다.


34. 복어

다섯 해 전이다. 내가 산음 땅에서 서울로 와,
산여 박남수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데 안주로 복어를 삶았다.
객이 말했다. “복사꽃이 하마 졌으니, 복어를 먹는 것은 조심하는 게 좋아!”
산여가 술 한 사발을 다 마시고 말했다.
“그만 두게! 선비가 절개를 지켜 죽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복어를 먹고 죽는 게 낫지,
데면데면 못나게 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내가 이제 와 그 말을 생각하니, 농담인 듯 심히 이치가 있으니, 슬프도다.

前五年, 余自山陰來京師, 與山如飮, 烹河豚. 客言: “桃花已落, 服河豚者,
當忌.” 山如喫一碗, 且盡曰: “(口+矣)! 士旣不能伏節死, 則寧食河豚死, 豈不愈於碌碌而生耶?”
余至今思其言, 似戱而甚有理, 悲夫!

-남공철(南公轍·1760~1840),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

“뜻을 세워 그 뜻을 지켜 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복어를 먹고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어찌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단 말인가?
이렇게 안타깝게 사느니 차라리 복어 독을 마시고 싶네 그려. 녹록하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고 싶진 않단 말일세.
” 문득 지나가는 글 속에서 만난 이런 푸념 속에 한 시대의 표정이 얼비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
한 번씩 정신이 번쩍 들며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 南公轍은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 운동에 동참했다.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했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35. 지미(知味) 

신맛은 알면서 단맛은 모르는 자는 맛을 알지 못하는 자다.
단맛과 신맛을 저울질하여 헤아리고,
짠맛과 매운맛을 짜맞추어 억지로 채우는 사람은 가려뽑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바야흐로 시어야 할 때는 지극히 신맛을 뽑고,
달아야 할 때는 아주 단맛을 가려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맛에 대해 말할 수 있다.

夫知酸而不知甘者, 不知味者也.
秤量甘酸, 間架鹹辛, 而苟充之者, 不知選者也.
方其酸時極酸之味而擇焉, 其甘也極甘之味而擇焉. 然後可以語於味矣.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시선서(詩選序)〉


단맛만 좋다 하고 신맛은 찌푸리고,
매운 것을 즐긴다고 짠것을 내친다면 맛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신맛 단맛 다 보고, 매운맛 짠맛 다 맛보아,
짤 때 짜고 싱거울 때 싱겁고, 매울 때 맵고 담백할 때 담백할 줄 알아야 음식이 제맛이 난다.
신맛이 싫다고 단맛을 섞고, 짠맛이 안 맞아 매운맛을 더하면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고 만다.
시를 가려뽑는 방법을 말한 것이지만, 어디 시만 그렇겠는가?
사람도 똑같다.
올곧은 사람은 융통성이 부족하고,
순박한 사람은 대체로 멍청한 구석이 있다.
굳센 사람은 속이 좁고, 민첩한 사람은 뒤가 무르다.
말 잘하는 사람은 건방을 떨고,
입이 무거운 사람은 말에 얽매여 큰 일을 하지 못한다.
올곧은 사람에게 융통성을 요구하고,
순박함이 좋다면서 멍청함을 싫다 하면 피곤해진다.
적재적소(適材適所), 다소 부족한 점이 있어도 장점을 취해 마침맞게 제맛을 내게 할 뿐이다.

 

◆朴齊家
조선 후기의 실학자. 소년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났고
박지원·이덕무·유득공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36.물욕(物欲)

여헌 장현광(張顯光)은 젊은 시절 호방하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깜깜한 밤중에 그 집을 찾았지만,
문은 벌써 닫혀 있었다. 인하여 문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은 못이 거울 같은데,
가을 달빛이 일렁이고 나무 그림자가 들쭉날쭉하여 수면을 번갈아가며 가리는 것을 보았다.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본시 고요한 것인데,
물욕 때문에 미끄러져 어지럽게 되는구나.” 즉시 옷소매를 떨치고 돌아왔다.

張旅軒少時豪放, 嘗有所戀.
抵黑而訪其門, 門已閉. 因逍遙門外, 見澄潭如鏡, 秋月 彩, 樹影參差, 互蔽潭面. 歎曰:
“人之丹府本靜, 爲物欲滑亂.” 卽絶袂而還.
-박재형(朴在馨,1838∼1900),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거울 같은 맑은 연못 위로 가을 달빛이 노란빛을 물들이며 일렁인다.
마음이 덩달아 설렌다.
못 가를 둘러선 나무 그림자들은 기우는 달빛에 들쭉날쭉 그림자를 드리워 그 달빛을 가려 선다.
일렁이는 달빛, 흔들리는 그림자.
본래 고요하던 연못은 달빛과 나무 그림자의 드잡이 질에 승강이가 한창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을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겠지.
막상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망연하기도 했겠다. 문을 두드릴까?
혹 다른 손님이라도 있게 되면 피차에 민망하겠지. 그냥 돌아설까?
왠지 서운하고 허전하다.
두드리고 싶은 마음과 돌아서야겠다는 생각이 내 속에서 싸우는 동안,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승강이하는 동안, 나는 욕망에 사로잡힌 비루한 사내일 뿐이다.
연못은 본디 고요했는데,
외물이 들어와 그 평정을 깨뜨려 버렸다. 본디 마음은 고요했는데 욕망이 들어와 흔들어버렸다.
해 뜨고 나면 달빛도 그림자도 흔적도 없을 것을.
백주 대낮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온통 부끄러워 얼굴도 들 수 없을 것을.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옷소매를 탁탁 털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朴在馨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백옹(伯翁), 호는 진계(進溪).
조선 말기 학자.
선유(先儒)들이 경(敬)에 관해 의론한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제목을 <집경요람(執敬要覽)>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진계문집>이 있다. 
 
37.득실(得失)
정승 남지(南智)는 정승 남재(南在)의 손자였다.
음직(蔭職)으로 감찰이 되었다. 퇴근하면 할아버지는 일한 것을 물었다.
하루는 돌아와 이렇게 여쭈었다.
“하급관리가 창고에 들어가더니 몰래 비단을 품에 넣고 나왔습니다.
도로 창고에 들어가게 했는데 이같이 하기를 세 번 했더니,
관리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비단을 두고 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어린 나이에 벼슬을 하므로 그래서 매번 물어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아보려 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묻지 않아도 되겠다.”

南相智, 相國在之孫, 蔭補監察. 自公退, 祖問其所事.
一日歸白曰: “有下吏入藏, 潛懷錦段而出. 使之還入藏. 如是者三, 吏識其意, 置錦段而出.”
 祖曰: “汝以童子備官, 是以每有問, 欲知其得失. 自今吾可以無問.”
-안종화(安鍾和,1860-1924)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다.
마침내 그 손자도 할아버지를 이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아랫사람의 잘못을 보고 그 자리에서 야단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젊어서부터 노성(老成)한 기운을 나타냈다.
그 즉시 터져나오는 불같은 노여움보다 말하지 않는 침묵의 일깨움이 더 무섭다.
불같은 노여움은 불평과 불만을 사서 앞에서만 굽신대는 면종복배(面從腹背)를 불러오지만,
침묵의 일깨움은 두려움과 공경심으로 아랫사람이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한다.
어린 사람이 벌써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높은 지위에서도 삼가고 삼가는 할아버지의 두터운 마음이 나는 더 고맙다.


◆安鍾和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응(士應), 호는 함재(涵齋).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와 5적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100여종의 문헌을 이용하여 조선시대 인물의 전기를 약술한 ≪국조인물지≫는
≪국조문헌 國朝文獻≫ 등과 함께 조선시대 인물연구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