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청량리역 추억, 노년의 都心‘회춘 프로젝트’ |
동대문구엔 동대문이 없다. 정확히 33년 전인 1975년 10월 종로구에게 뺏겼다. 사람이 없어서 뺏긴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뺏겼다. 당시 동대문구에 살던 인구는 74만명에 달했다. 서울시내 15개 구에서 단연 1위. 일부 지역은 성북구와 성동구로 편입됐고, 지금의 동대문이 자리한 지역은 종로구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구 인구가 한때 100만명에 육박해 결국 2개 구로 나눠졌다. 중랑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2008년 10월 현재, 동대문구민은 38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쇠락을 거듭했던 것. 지역도 세월만큼 쪼그라들고 초라하고 옹색한 모습으로 변했다. 1943년에 구가 설립돼 올해로 65세가 된 노년의 도심, 동대문구는 이제 그 속에서 껍질을 벗듯 변화의 용틀임을 꿈꾸고 있다.
청량리 서울약령시 · 경동시장
10월의 청량리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햇빛은 맑고, 바람은 투명했다. 그 바람을 타고 향긋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동대문에서 청량리를 잇는 왕산로엔 ‘서울약령시 한의약 문화축제’를 알리는 청사초롱이 가득했다. 축제는 올해로 14회째. 동대문구 제기동 서울약령시와 경동시장은 전국에서 가장 큰 한약재 시장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한약재의 80%가 이곳을 거쳐간다. 이 지역에 한약재 시장이 형성된 것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다. 교통 여건과 관계가 깊다. 박상종 서울약령시협회 회장의 이야기다. “중앙선, 경춘선 등을 통해 강원도와 경기도 동북쪽에서 많이 생산되는 한약재들이 청량리역과 성동역(1971년에 사라졌다. 현재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옆 한솔동의보감(구 미도파백화점) 건물 자리가 바로 역사가 있던 곳)으로 집결되면서 자연스레 시장이 생겼어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근처 동마장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서도 한약재가 많이 들어왔죠. 처음에는 6, 7개에 그쳤는데 1970년대 들어서면서 급증했어요.” 오늘날 한약방은 1100여 개에 이른다. 초창기 한약방 중에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 있다. 경동시장 사거리 인근의 우신원한약방이 그중 하나다. 한약재와 40년 가까이 함께해온 이형신 우신원한약방 원장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약재는 무엇일까? 바로 인삼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구하기 힘들면 소용이 없다. 병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능히 구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올해는 특별히 서울약령시를 상징하는 약령문이 만들어졌다. 약령문 준공 기념식이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장 어디에서도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불경기 탓일까?
|
서울약령시 맞은편에는 지상 18층 규모인 국내 최대 건강백화점 ‘동의보감타워’가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건물 지하 2층부터 지상 8층까지 10개 층이 한약방은 물론 한방체험관, 요가, 건강클리닉 등 건강관련 업체들로 가득 찼다. 그 옆 비슷한 규모의 주상복합건물 ‘한방천하’는 상가건물 대부분이 한약업체들이었다. 그런데 두 건물의 상가 모두 폐업상태다. ‘동의보감타워’는 건물 자체가 문을 닫아걸었다. 정문은 값싼 옷이나 생필품, 청과물 등을 파는 노점상들에게 점거당한 상태. 건물 주차장만 영업 중이었다. 주차장 관계자는 “장사가 안 돼 1년 전부터 건물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충격이었다. 한약업계가 겪고 있는 불황의 골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청량리 재래시장 · 청과물시장 경동시장과 청과물시장, 재래시장은 시장과 시장 간에 조그만 골목들로 얽히고설켜 있다. 사실 처음엔 하나의 시장이었다. 그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경동시장은 인삼 전문시장으로, 일부 지역은 청과물과 재래시장으로 분화됐을 뿐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이곳엔 쌀과 보리, 고추, 기름 등 식료품은 물론 과일, 채소, 순대, 돼지족발 등 모든 먹을거리와 생필품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다. 6·25전쟁 직후, 경기 북부와 강원도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물건을 사고파는 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시장이 형성됐다고 한다. 서울시가 이곳에 공식적으로 시장을 허가한 것은 지금부터 48년 전인 1960년 6월이다. 지금도 시장 구석구석엔 40여 년 전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멘트 벽돌 담과 다 쓰러져가는 한옥지붕, 허름한 나무 대문은 1960년대 도심 골목의 풍경을 담은 낡은 흑백사진처럼 다가왔다. 30, 40대 아주머니들이 70, 80대 할머니로 바뀌었을 뿐 방앗간 창고 마당에 모여 앉아 마른 고추 꼭지를 따는 모습은 옛날 그대로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청량리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시골할머니밥상’이다. 순대골목과 고추시장 사이, 두 사람이 간신히 비켜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란 골목길 끝에 있다. 원래 주인은 전영순 할머니였지만 3년 전 허리디스크로 몸이 불편해진 후 며느리 김도희 씨가 도맡아 운영한다. 김씨는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한 때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30년 이상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식당에서 일한 지도 올해로 10년째다.
메뉴는 백반 한 종류. 가격은 단돈 2500원. 이것도 지난해 6월 500원 인상한 금액이다. 그 값싸다는 3000원짜리 햄버거보다도 저렴하다. 밥은 양심껏 ‘리필’이 되지만, 많이 먹는 손님들은 알아서 밥 한 공기를 추가해야 한다고. 3평 남짓한 홀과 2평 정도의 쪽방이 전부인 식당은 아무리 손님을 많이 받아도 20명을 채우기 힘들 만큼 비좁다. 하지만 그 공간은 각박한 바깥세상과는 달리 사람 사는 인심과 정으로 넉넉하다. 청과물시장 큰길 건너편엔 수산시장과 청과시장이 이어져 있다. 이 일대는 재개발 공사에 들어갔지만 가게들은 공사장 담에 가건물을 짓거나 아직 헐리지 않은 건물에 남아 새벽부터 여전히 장을 열고 있다. 허허벌판에 터를 닦고 무일푼으로 시작해 수십 년간 삶의 터전을 일궈온 시장상인들의 억척스러움이 이런 것 아닐까.
|
청량리역 · 미주아파트
가을바람이 발 앞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20년 전 대학시절, 청량리역 광장에는 시계탑이 있었다. 방학 때면 강원도 강촌으로 MT를 떠나는 대학생들과 춘천, 강릉 등으로 여행을 가는 무리로 북적였다. 그 사이사이 전방 부대에서 휴가 나온 군인들과 이들을 유혹하는 청량리역 뒤편 사창가 ‘청량리 588’ 호객꾼들, 커다란 짐 꾸러미를 머리에 인 채 역을 나서는 주름 깊은 할머니들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역설이 역설을 낳던 시절,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청량리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시 동북지역의 관문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작고 초라해졌던 청량리역이 공사비 3900억원을 들여 지하 4층, 지상 9층의 매머드급 민자역사로 재탄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화물열차의 운행이 크게 줄었지만 요즘도 경춘선과 중앙선, 태백선 등을 오가는 열차가 매일 220여 차례 청량리역을 지나간다. 여기에 역 한쪽으로 지하철 1호선이 수시로 드나든다. 건설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한화청량리역사 건설본부 백승우 차장은 “청량리 민자역사가 완공되면 서울시 동북부 지역의 거점이 될 뿐만 아니라 강북지역 교통의 중심지로 거듭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2006년 5월 시작한 역사 공사는 2010년 8월 완공이 목표다. 청량리역 뒤편 사창가도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사창가 일부 지역은 철거가 시작됐다. 이 일대는 지상 250m까지 건축이 가능한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대규모 재개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청량리역 공사현장 길 건너편엔 한때 강북 최고급 아파트였던 미주아파트가 있다. 30년 전인 1978년 지어져 동대문구에서 가장 오래된 이 아파트는 일대가 강남 부럽지 않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절을 증명해주는 흔적이다. 주력 평형대가 135~164㎡(40평형), 가장 큰 평수가 185㎡(56평형)으로 당시 웬만한 부유층이나 고위층이 아니고는 입주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 아파트 한 관리원은 “옛날에는 정부부처 국장급이나 감사원 부원장 이상 공무원과 기업체 사장 등 최고위층 인사들만 살았다. 경찰서장도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지금 고위층 인사들은 떠나고 입주민 대부분이 중산층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청량리역사와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또 한 번 과거의 영화를 기대하고 있다.
|
정릉천변 새마을동네
“뭔 천이 뭔 천이여, 그냥 개천이지. 우리는 그렇게 알고 살았어.” 제기동을 남북으로 가르는 내부순환도로 아래를 흐르는 개울이 정릉천이다. 이 개울 좌우에는 낡고 오래된 연립주택이 줄지어 있다. 언제인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는 70대 할머니는 평생 집 옆으로 흐르는 개울 이름도 모르고 지내왔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데 그걸 알아서 어디에 써먹겠냐”는 퉁명스런 할머니의 반응에 잠시 머쓱해졌다. 용기를 내 한마디 더 물어봤다. “여기는 재개발 안 해요?” “우리는 관심 없어. 세 사는데 개발하면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개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도로를 떠받치는 시멘트 구조물 그늘 아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연립주택들, 그 앞에 모여 앉아 가을 햇볕을 쬐는 70, 80대 노인들의 모습이 저 멀리 빼곡히 올라간 아파트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27년째 이곳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윤순석 약사에 따르면 과거 이 지역은 대부분 천막과 판자촌으로 이뤄져 있었다. 서울 도심에서 밀려나고 청량리시장과 청량리역 주변에서 하루살이를 하는 극빈층이 주를 이뤘다는 것. 그러다 1978~79년 정부 차원의 도시 정비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됐다. 한때 이 지역은 ‘새마을동네’ 시범지구로 지정돼 전국에서 견학을 왔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주변 도시와 달리 이곳은 30년 전 그때 그 시간에 멈춰 있는 듯했다.
홍릉수목원 · 걷고 싶은 거리
청량리역을 뒤로하고 홍릉길을 걷다 보면 파란만장했던 조선 말 역사의 흔적들과 만날 수 있다. 영휘원은 고종황제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다. 명성황후 민비의 시위상궁이던 엄 상궁으로 더 유명하다. 엄 귀비는 1895년 을미사변 때 민비가 일본군에게 시해되자 위기에 처한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도록(아관파천, 俄館播遷)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휘원 안에는 엄 귀비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인 숭인원이 함께 있다. 이진은 일본의 볼모로 끌려갔던 영친왕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생후 1년 만에 사망했다. 능은 소박하면서 한적했다. 가을바람에 갓 떨어지기 시작한 낙엽들이 외로움을 더했다. 높고 청량한 하늘과 따스한 햇살은 애처롭고 슬펐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그때, 그 시절도 지금과 같았으리라. 세종대왕기념관을 지나 홍릉길 끝에는 홍릉수목원이 있다. 이곳엔 한때 명성왕후 민비의 무덤 홍릉이 있었다. 이 일대 도로와 지명에 홍릉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명성왕후 무덤은 1919년 고종 사후 현재의 경기 남양주 금곡으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 대신 임업시험장이 들어섰다. 그 이후 능 주변의 산림은 버드나무와 오리나무, 고산식물 등 수목원으로 발전해 관리돼오다 6·25전쟁 당시 대부분 소실됐다. 지금 울창하게 남아 있는 나무 대부분이 전쟁 직후인 1960년대부터 심어진 것들이다. 수목원은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만 개장하다가 올해 5월부터 토요일에도 연다. 단, 교육 목적이라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다. 홍릉수목원을 등지고 오른쪽 길은 고려대로 이어지고, 왼쪽 길은 경희대와 맞닿는다. 지나는 차들이 별로 없어 길은 호젓하다. 큼지막한 은행나무들이 늘어선 이 길은 서울에서 선정한 ‘걷고 싶은 거리’ 중 하나다. 가을날씨가 완연한 요즘, 나뭇잎들이 저마다 노랗게 가을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다.
|
경희대 앞 파전골목과 센강 개발은 추억을 덮는다. 40년 전 경희대 앞에는 조그마한 개천이 흘렀다. 그 물길은 지금의 회기역을 돌아 중랑천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때는 기차역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곳에 조그맣고 허름한 판잣집 한 채가 있었다. 몸집이 뚱뚱한 사람은 기어들어가야 할 정도로 대문도 비좁고 낮았다. 그곳이 바로 회기역 주변에 형성된 파전골목의 원조격인 ‘나그네파전’ 집이다. 주인장은 올해 72세인 공경자 씨. 독립문이 고향이라는 그는 6·25전쟁 때 피란을 갔다가 돌아와 이곳에 터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파전 장사를 시작한 것은 피란 중에 부산에서 동래파전을 맛본 것이 계기가 됐다고. 이곳은 1970~80년대 군부독재로 암울했던 시기에 운동권 학생들과 가난한 고학생들의 배고픔과 시름을 달래주던 곳으로 유명했다. 주인 공씨의 이야기다. “학생들이 앞 개천을 ‘경희대 센강’이라 불렀고, 우리 집을 ‘워커힐 나그네’라고 불렀어. 참 운치도 있었고 정도 많았지. 지금도 가끔 옛날 생각나서 오는 사람들이 있다우.” 요즘 이곳에서는 불황기인데도 10여 개 파전집이 성업 중이다. 여전히 주머니 사정이 두둑하지 못한 학생들이 주 고객이다. 하지만 개천은 복개공사로 사라지고, 판잣집은 현대식 건물로 개·보수된 지 오래다. 옛 모습은 동네 토박이들과 이곳을 기억하는 이들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
몽골 체험기_서울신문 심재억기자 (0) | 2008.10.26 |
---|---|
어디서, 어떤 범죄가 기승 부리나 (0) | 2008.10.25 |
천연기념물 454호 미호종개 (0) | 2008.10.24 |
한국화가 박대성 (0) | 2008.10.23 |
암환자들의 ‘대기실’ 환자방 24시 (0) | 2008.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