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자재 사다 농가주택 리모델링
서창보씨 부부가 가꾼 주말주택을 본 사람은 농촌 빈집이 이렇게 훌륭한 주말주택으로 변한 것에 먼저 놀라고, 생각보다 저렴한 리모델링 비용에 다시 놀랍니다. 칠곡의 주말주택을 찾아보았습니다. |
#손수 자재 사고 사람 고용해 리모델링
대구에 살고 있는 서창보씨 부부의 집에서 차로 3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이들 부부의 칠곡 주말주택이 있습니다. 14평의 작은 집이지만, 불필요한 공간이 없어 가족이 주말을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는 곳입니다.
2002년 서창보씨는 퇴직금을 중간정산받아 농촌 빈집과 땅 207평을 평당 26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주위 시세보다는 3~4만원 정도 비싸게 산 것이었는데, 같은 마을 땅들 중 제일 위치가 좋고 경관이 뛰어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빈집을 리모델링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했기에 업체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자재는 서창보씨가 직접 구해오고, 그때 그때 필요한 일용직 일손을 구해 함께 작업을 하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손재주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방법을 몰랐기에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순서를 눈여겨보기도 하고, 인부들에게 타일 붙이는 법이나 페인트 칠하는 법 등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재는 어디서 얼마에 살 수 있는가도 현장을 다니며 물었습니다.
한 예로 처마에 청동으로 물받이를 두르려고 하니 전문 업체에서는 70만원을 부르더랍니다. 가만 보니 공구만 있으면 자신도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물받이 자재를 13만원에 사고, 어느 정도 기술을 갖춘 사람을 한명 고용해 총 20만원이 안 되는 가격에 공사를 끝냈습니다. 업체에 맡기는 것의 1/3도 안 되는 값으로 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발품을 팔며 부지런히 정보를 찾아다닌 덕분에 800만원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리모델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울타리나 책장 등의 가구 역시 서창보씨가 손수 만들었는데, 기성품보다 운치가 있고 소박한 맛이 있어 집에 잘 어울립니다.
집 옆에는 4평짜리 황토방도 만들었습니다. 흙벽돌은 경남 고성에서 구해온 것이고, 황토는 좋은 흙이 있다는 산을 수소문하여 직접 캐왔습니다. 벽체는 황토벽돌을 쌓은 뒤 황토 몰타르로 마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황토와 모래로 마감을 하려 했으나 빗물에 잘 씻겨나갔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구들을 깔고 아궁이로 불을 때는데, 구들돌을 구하기 어렵자, 무너진 폐가를 몇만원에 사서 폐가의 구들돌을 갖고 오는 등 제대로 된 황토방을 만들려고 정성을 들였습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데 생각과는 달리 아랫목만 따뜻하고 다른 곳은 잘 데워지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뜯어봐도 해결이 안 돼 대구종합유통단지를 수소문하며 방법을 알아본 끝에 농가환풍기를 사서 달았더니 금새 방이 후끈후끈하게 데워지더군요."
지금은 겨울이 되면 거의 황토방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이런 재미를 누리려고 시골에 내려온 것이니만큼 뜨끈한 황토방 아랫목에서 등을 지지고 있노라면 그렇게 안락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력 강한 야생화와 허브 기르기
정원과 텃밭은 300평 정도 됩니다. 처음 산 땅 200여평에 1년 뒤 옆집 100평을 더 구입했습니다. 정원 전체에 잔디를 직접 심었고, 구석에는 작게 텃밭을 만들어 각종 채소와 포도, 배, 살구 등 과실수 몇그루를 키우고 있습니다.
울타리를 따라서는 개나리를 심었는데, 전라도에서 공수해온 귀한 개나리입니다. 과실수는 경상도요, 꽃나무는 전라도라는 말을 듣고 전라도까지 가서 구해온 것입니다. 내년 봄이면 가지가 담 밑으로 늘어져 온통 개나리꽃 노란 커튼으로 담벼락을 장식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꽃 가꾸기가 취미인 이인숙씨는 정원 곳곳에 허브와 야생화를 심었습니다. 화분에서 키우는 꽃과는 다르게 야생화의 강인한 생명력에는 매번 놀라고 맙니다. 몇포기를 조금 사다 심은 것이 어느새 화단 가득 번져 화사한 꽃무더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원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단지들은 대구 시내의 재개발 지역을 찾아가서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어르신들에게 부탁하여 공짜로 얻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얻은 단지를 서너개 쌓아 탑 모양도 만들고, 화분 대용으로도 사용합니다.
공짜로 얻은 것은 단지들뿐만이 아닙니다. 정원에 심은 나무 역시 이사하려는 집 마당의 나무를 달라고 하여 옮겨 심은 것들입니다. 마당가의 50년 넘은 고무나무 같은 것은 1년을 기다려서 받은 나무입니다.
"한참 집과 정원 가꾸고 있을 때, 지나가다가 집 구경 좀 하자고 손님도 많이 왔죠. 전원주택 잘 가꿔놓은 집들 보고 집 참 잘 꾸며놓았네요, 라고들 하시는데 그런 말 들을 정도쯤 되면 집주인이 그 동안 뼈빠지게 일한 결과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손이 보통 가는 게 아니에요. 집 가꾸느라 아주 죽어나는 거죠."
그러면서도 서창보씨는 싫은 기색이 아닙니다. 전원생활에 있어 돈이나 기타 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본인의 취미에 맞느냐 안 맞느냐인 것 같다는 그는 분명 전원생활 체질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처음에는 부동산 업자로 오해받아
서창보씨 가족이 자리잡은 칠곡군 도개리 마을은 평균 연령이 70대로 노인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처음 이곳에 집을 사고 공사를 할 때만 하더라도 젊은 사람이 여기 와서 무엇 하려고 그러느냐, 비싸게 집 팔고 나갈 부동산업자가 아니냐 하는 오해도 많이 샀죠. 하지만 매주 주말이면 새벽같이 내려와 하루 종일 일하다보니 나중에는 어르신들도 저 친구는 이 마을에서 계속 살려는 모양이라며 마을 식구로 인정하고 도움도 많이 주시더라구요."
새해에는 아이들이 동네를 돌면서 세배를 했고, 경로잔치 등의 마을행사가 있으면 꼭 참석하여 얼굴을 보였습니다. 서창보씨네 집 앞은 예전부터 동네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인데, 그럴 때면 집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여 차나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프로젝터를 빌려 동네사람과 함께 마당에서 영화상영회도 갖고,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이제는 서창보씨 가족도 어엿한 마을의 일원이 되었으며, 아예 자리 잡고 내려오라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시에서 지낼 때는 바쁘게 살다보니 가족간에 대화가 부족했는데, 주말마다 내려와서 함께 일하며 얘기를 나누니 사이도 더 좋아지고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아이들 독립하고, 직장에서 은퇴하고 난 뒤에는 내려와야죠."
서창보씨와 이인숙씨는 당연한 듯 입을 모읍니다. 실보다는 득이 훨씬 더 많은 전원생활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근터골에서 1천평 주말농원 가꾸는 재미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윤경현씨는 주말이면 춘천에 내려와 농부로 변신합니다. 농사일에는 생초보인 그는 4년 동안 주말농장을 가꾸며 은퇴 후의 전원생활에 대한 준비를 차곡차곡 하고 있습니다. |
춘천 남산면 광판리의 근터골에 도착하자 호박을 따고 있던 윤경현씨가 쑥쓰러운 듯이 말하며 맞았습니다.
광판리는 춘천과 홍천, 가평의 경계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팔봉산과 남이섬, 김유정역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서울에서 1시간 10분 거리이며, 서울~춘천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30분 정도 시간이 단축될 예정입니다. 그 중 윤경현씨의 주말농원이 자리잡은 근터골은 꼬깔봉이라는 봉우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계곡을 끼고 있어 아늑한 지역입니다.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계곡 사이에 4년 동안 그가 힘들여 가꾼 1천평 주말농원이 있습니다.
윤경현씨는 땅의 첫인상을 밖에서 볼 때 썩 좋지는 않았다고 회상합니다. 건너편엔 광산이 있어 산이 깎여나갔고, 멀지 않은 곳에 축사와 재활용품 가공공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에 들어와서 땅을 보니 아래가 계곡이라 깨끗하고, 아늑하면서 자연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곡 안쪽으로는 더 이상 집이 없고, 주위에 민가도 띄엄띄엄 있어서 고즈넉한 것도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도시에서만 살아온 윤경현씨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골에 고향같이 의지할 땅이 없는 것이 허전했다고 합니다. 천식으로 기관지가 좋지 않아 깨끗한 공기에서 푹 쉴 곳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으로 시골 땅을 알아보던 중 아는 사람을 통해 근터골 땅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평당 3만원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총 3천평의 땅을 구입했습니다. 덩치가 커서 동서와 함께 공유지분으로 샀고, 그 중 윤경현씨의 땅은 1천평 정도 됩니다.
지목은 밭이지만 7~8년 동안 돌보지 않아 묵밭이 돼 있었고, 그 전에는 낙엽송 농장이었다고 하여 온갖 잡목이 우거진 상태였다고 하니 농사짓기에 썩 좋은 땅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경사도 심해 처음에는 땅을 평평하게 고르느라 전부 파헤쳐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밭에 첫해 300평 정도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땅 고르고, 나무뿌리 캐내고, 샘에서 밭까지 관을 묻어서 농수도 마련하고요. 땅 정리하는 데 엄청나게 힘이 들었어요. 지금 다시 그렇게 하라 그러면 힘들 것 같아요. 첫해엔 맨땅에 깃발만 꽂은 셈인데요, 기계로 죄다 파헤쳐놔서 그런지 땅이 망가져서 농사가 잘 안되더라구요. 유기농법으로 지어보려고 비료도 변변히 주지 않았구요."
경험이 없다보니 요령도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매형과 이웃에 사는 노부부에게 조금씩 코치를 받곤 했지만, 첫해 농사는 고스란히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음해에는 조금 더 면적을 넓혀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작은 중고 포크레인도 사서 손수 조금씩 밭을 넓혀갔습니다. 직접 먹으려고 키우는 것이니 배추, 옥수수, 수수, 호박, 콩, 고추, 박, 고구마 등 되는 대로 여러가지를 조금씩 심어보았습니다.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으니 잡초가 우거지고 벌레도 많습니다. 제대로 농사짓는 농부가 본다면 어찌 저렇게 짓누, 하며 혀를 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4년, 올해로 네번째 농사에 이르자 제법 솜씨도 늘었고, 굵직굵직한 수확물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밭이 보잘 것 없다고 농지원부도 못 만들었어요. 올해 들어서야 만들게 된 거예요. 한 3년간 가족들한테 제대로 농사도 못 지으면서 쓸데없는 고생한다고 구박도 많이 받았는데, 올해에는 그런 소리를 안 하더라구요. 3년까지가 고비였던 것 같고, 이제는 조금씩 농사에 대해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윤경현씨는 주중에 일을 하고, 또 주말에 춘천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자니 처음엔 몸이 너무 고생스러웠다고 합니다. 하루 일을 하면 3일은 근육통으로 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얘기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주말에 일을 안 하면 허전하고 몸이 근질거려서 좀이 쑤십니다.
#산짐승과 싸워가며 짓는 농사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약을 치지 않는 대신 목초액이나 석회를 뿌리고, 은행잎과 한약찌꺼기를 밭에 주는 등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1천평이나 되는 밭을 가꾸자니 사실 약을 안 치고는 힘들겠다 싶을 때도 많습니다. 특히 틈만 보이면 자라나는 잡초 때문에 풀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폐비닐이 환경문제가 된다고 하여 비닐도 씌우지 않고 농사를 지었는데, 6월까지는 열심히 보이는 대로 풀을 뽑지만 여름에는 도저히 손도 못 댈 정도입니다.
그래도 올해에는 인근 축사에서 축분을 얻어 듬뿍 주었더니 그쪽은 농사가 아주 잘되었다며 그가 뿌듯해합니다.
밭 구석에는 닭장을 만들어 닭을 40마리 정도 키우고 있습니다. 달걀을 걷어가고 사료를 주려면 1주일에 한번은 꼭 와야 합니다. 가끔 귀찮아서 빼먹고 싶더라도 닭들을 생각하면 안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임계철선인 셈입니다.
그런데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짓다보니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야생동물들의 습격입니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와서 밭을 다 밟고 가기도 하고, 너구리나 오소리가 닭들을 잡아가기도 합니다. 닭장 주위에 철망을 쳐놓아도 뜯고 들어오는 바람에 닭들을 잃고 닭장을 3번이나 옮겼습니다.
피해도 만만치 않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보니 이것도 시골에 사니까 겪을 수 있는 일이라 하고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요즘엔 가물어서 고민이지만, 얼마 전 여름 폭우 때는 산사태가 나서 밭둑이 무너지고 애써 파놓은 연못도 토사로 덮여버렸습니다. 비록 주말에만 오는 농부지만 비가 많이 오면 걱정하고 비가 너무 안 와도 걱정하는 그 마음은 남 못지 않습니다.
"할 일 없어서 농사 짓는다고 할 정도면 농사 지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돈도 안 되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었겠죠."
밭 위에는 6평짜리 컨테이너를 농막으로 갖다놓고 생활합니다. 덩그러니 컨테이너 하우스만 있는 것이 허전해서 벌목한 통나무로 그늘막도 만들고 싸리담과 평상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집을 지을 땐 후회 없이 제대로 지어보고 싶어서 주택박람회도 가고 책도 보면서 틈틈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몇 년 후 정착할 그 날을 위해
윤경현씨는 5~6년 후 은퇴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 근터골 주말농원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동서 셋이 함께 꾸며나간다는 뜻으로 서삼농장이라는 이름도 지었습니다. 은퇴 후에는 친지들과 마음 맞는 사람들 대여섯집 정도가 함께 모여 살고 싶습니다.
남는 땅은 주말농장으로 분양하고, 농장에 오는 사람들이 텃밭 가꾸기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을 누리면서 푹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어나갈 생각입니다.
"전원생활을 하려고 집부터 지어놓는 것보다는 이렇게 주말주택으로 쓰면서 연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집을 크게 지으면 무르기도 힘든데, 모든 사람이 다 시골생활이 맞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시골에 며칠 놀러가서 좋다고 하는 것과 실제로 와서 사는 것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그 역시 4년쯤 지난 요즘에서야 전원생활에 대해 감을 잡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힘든 농사일에도 적응되었고, 웬만한 것은 모두 직접 만들고 고치는 버릇도 들었습니다.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오니 기관지 질환도 거의 낫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경수도 심고 경관 정리도 하면서 집을 짓기 위한 준비를 해나갈 것입니다. 마음 맞는 전원생활 동지를 만나 함께 땅을 가꾸어가고 싶다는 윤경현씨는 10년 정도 시간을 두고 준비를 해나간다면 그만큼 마음도 든든해지지 않겠느냐며 그때를 위해 차근차근 그리고 천천히 침으로 설탕을 녹여나가는 심정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말했습니다.
18년 전원생활과 4번째 전원주택
"톡톡톡" 망치를 두드려서 시멘트를 바른 돌을 벽에 붙입니다. 부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하나씩 돌을 붙이면서 집과 함께 부부간의 정도 가꿔나갑니다. |
"대한민국에서 발 안 닿은 곳 찾기가 힘들걸요. 아마 역마살이 있나봐요."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다녀본 길을 색칠해나가면 아마 새까맣게 칠해질 것이라고 설현숙씨가 자신할 정도입니다.
경찰로 근무하던 당시에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으로 발령받아 집을 옮기며 살았고, 때문에 아이들은 7, 8번씩 전학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김명환씨 부부가 퇴직 후에 전원생활을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도시생활은 편하긴 하지만 답답하게 느껴졌고, 아파트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시골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체질에 맞았습니다.
# 18년 전 퇴임 후 전원생활 시작
88년 김명환씨가 정년퇴임을 한 후, 이들 부부는 청평에 자리를 잡고 처음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조립식 농가를 저렴하게 사서 큰 돈 들이지 않고 시작한 소박한 첫걸음이었습니다.
농사일은 해본 적이 없어 자신이 없었고, 대신 김명환씨 부부가 시골 소일거리로 선택한 것이 집꾸미기입니다. 초라한 주택 외관과 볼품없는 마당을 단장해 남부럽지 않은 전원주택으로 꾸미려고 마음 먹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동네 뚝방에 널려 있는 막돌들입니다. 작은 뚝방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돌들을 보고 냇가 정리도 할 겸 저 돌
을 이용해 집을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을 주워와 시멘트를 발라 조립식 주택 외벽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아 진도도 느리고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퍼즐을 채우듯 여러가지 크기의 돌들을 알맞게 이어붙여야 하는데 눈대중을 못 해 엉성하게 쌓아지기도 했고, 한번에 욕심을 부리다가 미처 굳지도 않은 시멘트 때문에 붙인 돌이 줄줄이 흘러내리기도 했습니다.
부부가 직접 돌을 가져다 서툰 공사나마 하고 있자니 신기하게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구경을 하다 가곤 했습니다. 그런 막돌을 가져다가 꾸미면 얼마나 꾸미겠냐고 의심하던 사람들도 집이 차츰 완성돼가고, 더불어 돌을 깐 오솔길이며 연못이 만들어지자 손재주가 용하다며 감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돌을 모두 붙여 완성하게 된 것은 3년 가까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김명환씨와 설현숙씨 둘이서 마주 앉아 매일같이 조금씩 작업을 진척해낸 결과입니다.
"한번은 마을 아주머니가 마을 냇가의 돌 가져다가 집을 꾸몄으니 돌값을 내야 하지 않느냐고 우스개소리로 그러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우리가 오히려 공짜로 냇가 청소를 해준 거 아니냐고. 지저분하던 뚝방이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보라구요."
설현숙씨가 웃으며 말합니다. 사실 개울의 돌 하나만 주워가도 불법은 불법입니다. 그래도 시골에서는 우리 마을 사람이 우리 마을 돌을 쓰는 데 뭐가 어떠냐고 많이 봐주는 편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또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은 돌만 사용합니다.
# 돌을 사용해 직접 외벽 마감
청평에서 몇년을 지낸 김명환씨 부부는 좀더 산이 깊은 곳으로 가고자 가평 명지산 계곡 입구로 이사를 했습니다. 돌과 무슨 인연이 있었던 듯 새 집 근처에는 여름 홍수로 계곡의 돌들이 마을까지 흘러내려와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남들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돌무더기야. 그것도 홍수 때문에 밀려들어왔으니 볼썽사나운 꼴이지. 그런데 우리는 그 돌을 보니까 또 이거다, 싶은 거야."
김명환씨는 지금도 길을 가다 적당한 돌을 발견하면 눈이 번쩍 뜨인다며 웃습니다. 집을 지으면서 업체에서는 뼈대와 내부마감만을 하고, 외부마감은 이번에도 부부가 직접 돌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건축비도 훨씬 절약되고, 조경도 돌을 이용해 손수 꾸미니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았습니다.
5년 후 아들의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집을 팔고 DMZ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비무장지대의 고성 명파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집을 저렴하게 지은 데다 땅값이 올라 몇년 사이에 2배 가까운 값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1억원이 넘는 돈은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팔 수 있었고, 재테크도 된 셈이라고 합니다.
김명환씨 부부는 고성에서 4년을 산 후 올해 4월 다시 홍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고성은 너무 멀어 걱정이 된다고 하여 중간쯤 되는 곳인 홍천으로 터를 옮긴 것입니다.
홍천강에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홍천군 두촌면 역내리에 새로이 자리를 잡은 부부는 요즘 집단장에 한창 열중해 있습니다.
# 목수인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건축
18여년의 전원생활 기간 동안 이사를 여러번 다니고, 집을 여러차례 꾸며온 그 동안의 노하우가 녹록치 않습니다. 설현숙씨는 전통한옥 도목수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것이 있어 건축에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을 지을 때나 리모델링할 때 설계는 거의 직접 하고, 연못이며 작은 다리, 정원 등도 디자인합니다. 돌을 사용하여 돌탑도 쌓고, 평범한 단지에 돌을 붙여 멋진 화병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돌을 붙일 때에도 요령이 생겼습니다. 조립식 샌드위치 벽에 바로 시멘트를 바르고 돌을 붙이면 잘 붙지 않습니다. 벽에 벽돌을 쌓고 피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서 벽돌과 샌드위치벽을 고정시킨 다음 돌을 붙이면 잘 떨어지지도 않고 단열도 잘됩니다.
물, 모래, 시멘트로 적당한 점도를 맞춰야 하는데 너무 되면 잘 떨어지고, 너무 무르면 흘러내립니다. 이제는 대충 눈대중으로 보더라도 비율을 딱 맞출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다양한 특색과 풍습 따라
홍천 역내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마을 옆으로 4차선 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집들이 모여 있지 않고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 전원생활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사 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동네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일을 열심히 해서, 남들 못지 않게 부지런하다고 자부해온 김명환씨 부부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니 마을 분위기가 좋고, 텃세도 없어 적응하기가 쉬웠습니다.
시골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살아온 김명환, 설현숙씨 부부지만 어디를 가든 적응기간은 필요합니다. 동네마다 고유의 특색과 풍습이 있는데 사실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는 잘 모르는 것들이 태반입니다.
설현숙씨는 적응기간을 줄이고 이웃과 잘 지내기 위해 이사 오기 전부터 마을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마을사람들 얼굴을 전부 익혀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 이사 풍습이 있어, 동네 어르신에게 꼭 여쭈어봅니다. 어느 동네는 기금을 낼 때도 있고, 어느 동네는 고기를 사다가 신고식을 하기도 합니다.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풍습에 참여해야 텃세를 겪지 않습니다.
그 동안 살아본 마을 중에 이곳 역내리가 가장 인정이 많고 사람 사귀는 재미가 느껴진다는 김명환씨는 이제 70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힘들다고 느끼던 참에 정착하게 된 이 마을이 참 마음에 듭니다.
"언젠가 전국에서 이름 난 관광지의 사장이 찾아와서 얘기를 나누는데, 우리 사는 걸 보고 부럽다고 하더라 이거야. 아니, 그렇게 큰 땅에서 멋지게 가꿔놓고 살면서 뭘 그러냐고 하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부부가 오손도손 앉아서 돌 붙이고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게 참 좋아보인다고 하대."
이제는 힘들어서 집을 꾸미는 것도 예전 같지 않다면서도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얼굴로 웃음 짓는 김명환, 설현숙씨 부부였습니다.
싫다는 남편 반강제로 설득해 시골 산지 7년
싫다는 남편을 반 강제로 설득해 이덕자씨가 충주 신안리에 자리잡은지 7년째입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남편 이흥길씨도 어느덧 시골 매니아가 됐습니다. 투자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자연에게서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이 전원생활의 즐거움 아니겠냐고 이덕자씨는 말합니다. |
이런저런 설명을 겻들이지 않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집입니다. 단층 벽돌집은 단정하면서도 운치가 있고,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시화판과 각종 조각들을 보면 살림집이 아니라 전시장인가?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갤러리인줄 알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며 웃는 이덕자씨는 수필과 소설로 등단하였고, 현재는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문인입니다. 5년 넘게 충주 KBS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최근까지 컬럼방송과 시와 책 소개 방송 등을 맡았었습니다.
그 동안 한번도 시골경험이 없던 그녀와 남편 이흥길씨가 이곳 신안리로 들어와 전원생활을 누리게 된지도 벌써 7년째가 되어갑니다.
# 남편 반대 설득하느라 어려움
이들 부부의 집은 신안리 족동마을 끝자락에 들어서 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길게 한줄로 인가가 들어서 있는 마을입니다.
숲이 깊고 나무가 많아서 예전에는 나무를 하거나 숯을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곳 땅은 그야말로 얼떨결에 샀어요. 그 전에는 시내의 아파트에서 아무 불만 없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는 사람이 시골에 땅을 사서 귀농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가보니까 참 좋아보였어요. 그 때 처음 시골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곗돈 200만원을 탄 터라 농담 삼아 이걸로 시골 땅을 사볼까 하고 말했더니 지인이 괜찮은 땅이 있으니 보러가자며 데려온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뒤로는 이름 그대로 긴 병풍처럼 생긴 장병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100리가 넘는 곳의 음성 가섭산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공기가 좋고 앞이 트인 땅이었습니다. 양쪽에는 소나무숲이 있어 경치도 좋았습니다.
당시는 과수원을 하다가 3년을 버려둔 터라서 못 쓰게 된 사과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땅을 내놓은지 3년이 지났는데 아무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하지만 땅에도 임자가 있는 모양인지, 이덕자씨의 눈에는 안성맞춤인 명당터로 보였습니다.
한눈에 터가 마음에 든 그녀는 남편 이흥길씨의 설득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부부들은 남편이 시골로 가자고 하면, 부인은 반대를 하여 고생을 한다는데 어째 이들 부부의 사정은 반대였습니다.
절대로 안 내려온다고 반대하는 남편을 온갖 감언이설로 꾀어가며 설득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 이덕자씨는 말합니다.
"고향이 서울이고, 시골에서 살아보질 않은 사람이라 질색을 하는 거예요. 꿈도 꾸지 말라고 버티는 걸 제가 고집이 세서 마구잡이로 한달만에 토지 계약을 했어요."
#출퇴근하며 누리는 전원생활
어렵사리 1997년 700평의 땅을 사고 조금씩 터를 다듬어나갔습니다. 잡목이며 썩은 과수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컨테이너 하우스를 하나 갖다놓았습니다. 온갖 야생화는 다 심어보고, 20가지가 넘는 채소도 심었습니다.
3년 후 벽돌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들어와 전원생활을 시작했는데, 처음 1, 2년은 남편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힘든 일이 많으니까요. 그렇게 안 내려오려고 했는데,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왔다면서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몰라요."
큰 준비도 안 하고 대책 없이 들어온 거라 할 말이 없었다는 이덕자씨. 지금은 어떠냐는 질문에 남편이 더 시골 매니아가 됐다며 웃습니다.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시골 산다고 자랑해요. 왜 도시에 사냐고, 시골 들어오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난리예요."
친정이고 시댁이고 사돈에 팔촌까지 주위에 시골 사는 사람이 없었다는 그녀는 시골 친척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참 부러웠습니다. 나중에 손자·손녀들에게 시골 외가집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도 시골행에 한몫을 한 듯싶습니다.
충주시내까지는 차로 20분 거리인데, 처음에는 먼 듯 느껴졌지만 매일같이 다니다보니 이제는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충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이흥길씨나 방송일과 동호회 때문에 자주 시내에 나가야 하는 이덕자씨나 오고갈 일이 많지만, 직접 운전을 하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전원생활이 뭐 별 건가요. 남들은 아파트 살고, 빌라 살듯이 우리는 시골집에 사는 거예요. 귀농을 하거나 도시 생활을 접고 내려오지 않더라도 시내 가까운 곳에서 일과 병행하며 사는 것도 전원생활의 한 형태 아니겠어요?"
#눈 오는 날이면 자연스레 마을 잔치
이덕자, 이흥길씨 부부가 정착한 족동마을은 한창 때는 60가구가 넘은 적도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20여가구만이 남아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혼자 사는 노인 가구가 많고 아이 있는 집이 없어서, 이덕자씨 부부가 이사를 왔을 때 젊은 이웃이 생겼다며 반가워했다고 합니다.
배타적이지 않고 조용조용한 마을이라 족동마을에는 대문이나 높은 담이 있는 집이 없습니다. 일 때문에 집을 비우더라도 도둑 걱정 때문에 불안한 적은 한번도 없었답니다.
그녀가 도시 친구들을 만나면 두고두고 자랑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바로 눈 오는 날이면 자연스레 벌어지는 마을모임입니다. 눈이 내리면 집집마다 빗자루를 들고 나와 집 앞부터 눈을 쓸기 시작합니다. 골짜기의 구불구불한 외길을 따라 길게 마을이 형성돼 있기 때문에 길을 따라 비질을 하며 내려오면 마을 입구에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게 됩니다. 그렇게 모여서 개울물로 라면도 끓여 먹고, 매운탕도 끓여 먹고, 각자 집에 있는 음식 한두가지를 안주 삼아 술도 한잔씩 나눕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눈이 오는 날이 기다려지고, 눈만 오면 빗자루를 들고 나가 길을 쓴다는 것이 이덕자씨의 말입니다.
이렇게 마을사람들끼리 사이가 좋고, 인심이 넉넉해 기껏해야 고추 몇 그루, 상추 몇 포기로 작게 텃밭 농사를 짓는 이덕자씨 집이지만 채소며 과일이 모자란 적이 없습니다. 버섯, 사과, 배, 고구마, 참기름 등 오고가며 이웃들이 주는 것만 해도 두 식구 먹기 벅찰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부는 명절 때 생필품이나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하여 이웃들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직접 기른 야생화로 즐기는 차
야생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덕자씨는 정원 한쪽을 전부 야생화밭으로 만들어 사시사철 풍성한 야생화를 볼 수 있게 꾸몄습니다. 하지만 몇달 전 교통사고로 2달 동안 입원하여 집을 비운 후 돌아와보니, 야생화밭이 온갖 잡초 때문에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고 그대로 놔두자니 지저분해서, 얼마 전에 야생화 몇 포기만 뽑아 채마밭에 옮기고, 나머지는 전부 밀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아파트는 몇달 비워도 먼지만 닦아내면 되지만, 시골 집은 1주일만 비워도 티가 나더군요. 제가 지인들에게 꼭 하는 말은 시골살이가 도시살이보다 훨씬 바쁘다는 거예요. 도시에서는 집 안만 쓸고 닦으면 나머지는 자유롭게 보낼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일년 열두달 계절별로 챙길 일이 많아요. 집이며 정원이며 끊임없이 할 일이 눈에 띄니 쉴 틈이 없죠."
틈날 때마다 그녀가 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야생화로 차 만들기입니다. 꽃을 따서 말린 후에 병에 담아 보관해도 좋고, 딴 꽃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냉동실에 밀봉하여 보관했다가 뜨거운 물에 담가 먹어도 좋습니다.
골담초, 달맞이꽃, 아카시아꽃, 찔레꽃 등은 이렇게 먹으면 향이 좋고 달짝지근한 맛이 납니다. 연꽃의 경우 꽃봉오리에 녹차를 넣은 상태로 얼려놨다가 큰 사발에 뜨거운 물을 붓고 얼린 연꽃을 띄우면 보기에도 아름답고, 손님이 많이 왔을 때 차대접에도 좋습니다.
한가지 꽃으로만 따서 모아도 좋지만, 여러가지 꽃을 한꺼번에 얼려놨다가 띄우면 갖가지 꽃들이 가득 핀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차로 쓸 야생화를 채취할 때는 과수원이나 논 근처의 야생화는 농약이 있을 수 있어 피하고, 논밭이 없는 곳이나 산에서 채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연을 100% 즐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시골에 살면서 얻는 가장 큰 축복인 것 같아요. 돈은 요만큼 들이고, 보이는 것은 전부 얻을 수 있잖아요."
지척에 있는 산과 들로 나가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즐기는 재미와 마당에 앉아 계절 가는 걸 보는 즐거움으로 살고 있다는 이덕자씨는 그것이 바로 전원생활의 축복이 아니겠냐고 말했습니다.
아침엔 전원카페 주인, 오후엔 체육관 관장
단양 두악산 소나무 숲에 세워진 통나무로 만든 원뿔형의 집입니다. 젊은 부부가 직접 오솔길을 만들고 공원을 꾸미며 가꿔가는 숲 속의 쉼터인 전원카페를 찾아 집 지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선암계곡에 위치한 소선암 자연휴양림 옆에 고깔 모양의 독특한 건물이 하나 섰습니다. 소나무 숲 사이의 뾰족한 꼭대기가 눈에 띄는 전원카페 숲속의 휴식입니다.
2년 동안 부부가 공들여 지은 카페
얼핏 보면 인디언 천막 같기도 합니다. 그 형태 때문에 멀리서 보면 지레 천막처럼 작은 건물이겠거니 싶지만, 막상 실내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훨씬 높은 천장과 넓은 내부에 놀랍니다. 천장 높이가 10m가 넘고, 바닥에서 천장까지 뻗은 나무 기둥 하나의 길이가 12m나 됩니다.
임병렬, 정순녀씨 부부가 꼬박 2년에 걸쳐 직접 지은 카페입니다.
"못 하나, 나뭇가지 하나에도 손때가 안 묻은 곳이 없어요. 전문기술은 없지만 남 부럽지 않은 집 하나 지어보려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단양 시내에서 태권도 체육관을 운영하는 임병렬, 정순녀씨 부부는 요즘 2개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침에는 일찍 카페로 출근하여 집 단장과 테마공원 꾸미기에 열중하고, 오후가 되면 임병렬씨는 단양에 있는 체육관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정순녀씨도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인 어린 자녀들 뒷바라지에 쉴 틈이 없습니다.
이렇게 도시와 시골을 왔다갔다하며 2년간 집 짓는 데 힘을 쏟았고, 비록 카페는 오픈했지만 아직까지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앞으로 1, 2년은 더 지나야 한숨 놓을 것 같습니다.
단양8경의 아름다움 간직한 집
임병렬씨 부부가 선암계곡에 땅을 사서 전원생활을 준비한 것은 6년 전입니다. 지금은 소선암 자연휴양림도 생기고, 주위에 펜션과 전원주택도 몇채 들어섰지만, 그때만 해도 집도 한채 없는 고즈넉한 산이었습니다. 이 땅을 살 때 주위 사람 10명 중 9명은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뭐를 할 거냐,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데다 투자를 하라며 기가 막혀 했습니다.
"저는 수석 모으는 것이 취미라서 산이나 계곡을 참 좋아했고, 집사람은 야생화 가꾸기를 좋아해서 동호회 활동을 하고, 야생화 공부도 많이 했거든요. 둘다 전원이 체질에 맞아서 이런 곳에서 꼭 살아보고 싶었어요. 또 5년, 10년 지나다보면 전원생활하는 사람도 더 늘지 않겠느냐고, 이곳 입지가 워낙 좋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했지요."
선배의 소개를 통해 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썩 눈에 드는 땅이 없었는데, 이곳은 오자마자 아늑하고 편안한 게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살면 어떻겠구나, 하고 저절로 그림이 떠오르는 곳이었습니다.
풍수적으로도 뒤로는 명산인 두악산이 둘러싸고, 앞으로는 선암계곡과 월악산 줄기가 펼쳐져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하는 명당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부부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약을 했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전원생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전원생활을 누리면서 소득이 있어야 할 것 같기에 전원카페를 해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는데, 카페로 정하게 된 것엔 좋은 입지조건도 한몫을 합니다.
단양 나들목에서 10분, 북단양 나들목에서 20분 정도로 교통이 좋았고, 단양8경 중 구담봉, 옥순봉,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5경이 계곡 위에 있어 관광객도 많습니다.
가평이나 청평 등을 다니면서 전원카페 답사도 많이 하고, 주택박람회도 다니면서 부부가 함께 그림을 그려나갔고 건축물 자체가 테마가 될 수 있는 카페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 지으며 많은 고생과 시행착오 겪어
인근 마을에 집 짓는 것을 도와주러 왔던 골조 전문가와 인연을 맺게 되어 얘기를 나누던 중 원뿔형의 통나무집을 지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독특한 모양뿐 아니라 바닥은 둥글게 하여 우주를 상징하고, 천장은 뾰족하게 하여 피라미드처럼 하늘의 기를 받는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세부사항을 의논 끝에 골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건축주 직영으로 짓기로 했습니다. 통나무를 사용하여 원뿔형으로 짓는 집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일 것이라는 설레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건축해보니까 특이한 집이 짓기도 힘들고, 돈도 많이 들면서 시간도 오래 걸리더라구요."
정순녀씨는 이런 말로 집을 지으면서 겪었던 고생담을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토지의 경사가 심해 토목공사비만 6천만원이 들었습니다. 토목공사 한다 하는 사람들을 불러다 상담을 받았는데, 워낙 난공사여서 자신있게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업체를 찾기도 힘들었답니다.
땅을 고른 뒤에는 자연미를 살리기 위해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비가 오니 침하현상이 일어나 돌들이 무너져내리려고 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콘크리트로 다시 옹벽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또 집을 지으려면 골조의 중심을 이루는 통나무 기둥을 옮겨와야 했는데 산 속이라 길이 변변치 않고 워낙 나무가 길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힘들었습니다. 나무에 로프를 매달아서 포크레인으로 간신히 끌어올렸지만 엄청난 무게 때문에 로프가 터지기도 했고, 옮겨온 나무를 부부가 일일이 손으로 깎아내고 다듬느라고 또 한번 진을 뺐습니다.
처음 짓는 형태의 집이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나무 기둥 사이에 자동 개폐형 창문을 달아 따뜻한 날이면 날개를 펼치듯이 창문을 열 수 있게 하고 싶었는데, 전문가와 상담을 해봐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유리로 전체를 밀폐하고,
창문은 따로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현재 카페는 붉은색 드라이비트로 마감 처리되어 있으나, 원래는 통나무와 황토를 그대로 노출해 숲과 잘 어우러지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니 물이 새고, 황토가 여기저기서 갈라지고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드라이비트로 보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못내 아쉬운 점입니다.
남들은 몇개월이면 짓는 집을 2년 동안이나 고생하며 지었습니다. 고생스러워서 후회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냐고 물으니 단호하게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남이 지어줬다 생각하면 이만큼 애착이 안 들었을 것 같아요. 집사람하고 둘이서 곡괭이 들고 땅 파고, 나무 다듬고, 톱질하면서 지은 집이라서 그런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제 자식 같습니다.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도 참 재미있고요. 오늘 와서 이거 만들고,
내일은 저거 만들고…"
이렇게 카페를 완성해서 올해 9월 오픈을 했지만, 아직 다듬을 곳이 많습니다. 단순히 의자에 앉아서 차만 마시다 가는 카페가 아니라, 숲을 느끼면서 산책도 하고 아이들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등산을 가다 주워온 나뭇가지 하나, 돌 하나도 부부의 손에 의해 꾸며지면 훌륭한 소품이 됩니다.
카페 옆으로는 테마 공원과 야생화 정원을 만들어서 산책로를 마련하고, 뒤의 소나무 숲에는 쉬어 갈 수 있는 방갈로도 만들 생각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부부가 직접 삽과 톱을 쥐고 하다보니 진행은 더디지만, 과정 자체가 즐거운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자연 속에서 노는 법 배우는 아이들
40대 초반으로 젊은 임병렬, 정순녀씨 부부는 아직은 어린 아이들 때문에 시내와 시골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근처에는 학원이나 중학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정리하고 내려와 살림집으로 쓸 집도 지금은 펜션으로 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시골에 오는 것을 싫어하느냐면 그것은 아닙니다. 주말이면 부모님과 함께 내려와 일도 거들고 산을 뛰어다니며 마음껏 놉니다. 인터넷도 게임도 텔레비전도 없기에 자연 속에서 노는 법을 배웁니다. 곤충을 좋아하는 두 아이들은 참나무에 꿀을 발라놓고 밤에 플래시를 들고 나가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를 잡습니다. 큰 아이는 이렇게 잡은 곤충을 친구들에게 분양도 하고, 곤충 기르는 데 필요한 톱밥이나 참나무 조각 등을 자기가 직접 잘라 몇백원씩 받고 팔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집 한채 없던 곳에 3년 전부터 어느덧 전원주택과 펜션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고, 앞으로 5년 정도 뒤면 자연스레 전원마을이 형성될 것 같다고 임병렬씨는 말합니다.
일찍부터 자연에 꿈을 두고 준비를 시작한 임병렬, 정순녀씨 부부는 전원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계획한 것도 많습니다. 조금씩 계단을 밟아간다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집을 꾸미겠다며 부부는 똑같이 입을 모았습니다.
호수가 마당인 전원주택에 살며 노후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원마을에서 살고 있는 허상범, 이효영씨 부부는 1년 전까지 용인에서 살다가 좀 더 깊은 시골을 찾아 횡성으로 내려왔습니다. |
테이블에 앉아 정원을 내다보면 넓은 저수지와 첩첩이 쌓인 산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침이면 물안개에 수묵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해가 좋은 날이면 하늘 만큼이나 맑고 푸른 물빛의 저수지가 아름다운 곳. 허상범, 이효영씨가 자리잡은 횡성군 우천면 오원리의 전원주택단지의 풍경입니다.
용인 전원주택에 살다 횡성으로 이사
S자형으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전원주택들이 들어선 경원호수마을에는 총 18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도로보다 지대가 낮아 외부에서는 이곳에 마을이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하지 못하는 위치입니다. 큰 오원저수지가 단지와 접해 있어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허상범, 이효영씨의 집은 이런 전원주택단지 안에서도 제일 아래쪽인 저수지와 접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넓은 잔디 정원이 바로 저수지와 맞닿아 있어 가히 그림 같은 호수의 집이라고 할 법합니다.
이제는 은퇴 후 횡성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지만, 허상범씨는 3년 전만 해도 서울 한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30년 넘게 교편을 잡아 아이들을 가르쳤고, 대통령 표창도 수상하였습니다.
횡성으로 내려오기 전에 부부는 용인에서 전원주택을 지어 살면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했습니다. 은퇴 후에 전원생활을 누리고자 먼저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용인이 점점 개발됨에 따라 처음의 시골스러운 멋은 사라지고, 전원생활도 도시생활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되었습니다. 필지 당 토지 평수가 120평으로 작아서 정원을 가꾸며 전원생활의 재미를 제대로 누리기 힘든 것도 아쉬웠습니다. 그러던 중 허상범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명예퇴직을 한 뒤, 이들 부부는 좀더 시골로 내려가 공기 좋은 곳에서 휴양을 하자고 생각하고 다른 터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이 서울이고, 자식들도 모두 서울에 있어, 처음에는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양평쪽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마땅한 땅이 나타나지 않아 점점 강원도 가평, 청평 그러다가 횡성까지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각 지역 부동산을 돌아다니면서 터를 물색하다보면 부부를 보고 꼭 "두 분이 의논해서 알아보는 거예요?" 하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전원주택지를 보러 오는 부부 중에는 싫다는 부인을 억지로 데려온 경우가 많아서 나중엔 싸우면서 나가는 일이 태반이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나도 시골 살고 싶어서 함께 보는 거니까 그런 걱정은 말고 좋은 땅이나 소개시켜달라고요."
이효영씨가 웃으며 말합니다.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인 그녀는 젊어서부터 시골에 내려가 정원을 가꾸고 전원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사는 것이 꿈이었기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선 편입니다.
부부가 원래 보러 온 집은 이 전원주택단지의 끝에 위치한 집이었으나, 오히려 지금 집이 경관이며 위치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딱 맞아떨어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멀다고 생각했던 횡성이지만 막상 다녀보니 서울까지 1시간 반으로 적당한 거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친구나 친지들은 지금도 이들 부부를 보고 무식이 용감이라고들 합니다.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들이 연고도 없는 시골까지 내려간 용기가 가상하다는 것입니다.
모여 사니 이웃 도움 많이 받아
대지 250평에 전원주택단지 안에 지어져 있던 기존 주택 25평을 합쳐 2억 5천만원 정도가 들었습니다.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있으니 위급상황 발생시 되도록 근처에 사람이 많은 곳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뇌졸중 후유증으로 다리가 조금 불편한 허상범씨의 건강 문제 때문에라도 외따로 떨어진 곳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단독주택에 살면 집에 수리할 일도 많고 손볼 곳도 많은데, 옆집의 젊은 부부들이 많은 도움을 주어서 역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단지에는 허상범씨 부부처럼 상주하면서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 주말주택으로 사용하는 사람, 펜션을 운영하는 사람 등 총 18가구가 입주해 있습니다.
각 가구마다 지하수를 파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의 지하수를 공동으로 사용하는데 여름 성수기철에는 펜션에 손님들이 많아 물이 부족할 때가 종종 있는 것이 불편한 점입니다.
근처에 구멍가게도 하나 없어서 급하게 장을 보려고 해도 시내까지 나가야 한다는 것과, 경조사가 주로 서울에서 열려 오고 가는 것이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교직에 있었던 30여년 동안 한결같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녁 때 들어오는 생활이 몸에 베어 있었는데, 은퇴를 한 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답답하고 좀이 쑤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년 정도 이곳에서 살다보니 시골의 여유를 느긋하게 즐기는 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몸이 건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감기약을 끼고 살았던 이효영씨는 시골에 내려온 다음부터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목을 붕대로 감고 살았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아침의 단 공기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 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사계절별로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작년에는 단풍이 얼마나 예쁘게 들었는지 혼자 보기 아까워서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함께 즐겼습니다. 전에는 매년 설악산에 단풍구경을 갔는데, 이제는 집 밖에 단풍이 지천이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 온 다음부터는 빨리 하루가 지나갔으면 이러고 살았어요.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달라지니까 내일이면 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서요. 아침이면 계절 바뀌는 것을 보려고 뛰어나가곤 했지요."
그러다보니 횡성에 온 첫해인 올해 1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렸다는 허상범, 이효영씨 부부는 이제는 눈이 내리는 겨울의 설경을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며 미소지었습니다.
산골 목사가 농사 지으며 사는 법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 힘쓰겠다 시골로 내려온 30대 젊은 목사가 어느덧 20여년이 흘러 50대가 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가 깨닫고 이룬 것은 무엇인지, 정선 봉양리의 정선베다니농장을 찾아갔습니다. |
정선 조양강의 초록 물길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는 시멘트 길. 조심조심 차를 몰고 산을 타서 700m 정도 올라가면 흑염소가 뛰어다니고 콩 삶는 냄새 물씬 풍기는 정선베다니농장의 입구가 나옵니다.
15년 전 서울에서 목회를 하던 유광종 목사가 농촌운동을 위해 정선군 봉양6리에 내려와 두채의 작은 토담집에서 첫걸음을 시작한 2만여평의 복합영농농장입니다.
가족들의 이해로 시골생활 시작
비스듬한 산중턱에 위치한 농장에서 내려다보니 조양강과 영월읍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여름내 농장 가득 피었던 야생화와 허브들은 이제 지고, 산 위에는 다른 곳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2만여평의 농지와 200만평의 방목 산, 살림집과 숙소, 건조장, 식당 등의 건물 8동과 흑염소 농장 등으로 이루어진 농장의 전경은 고원의 평화로움과 농사꾼의 부지런함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정선 산골짜기에 살면서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농장을 가꿔온 유광종 목사의 23년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교사로 근무하다가 신학대학에 진학해 목사가 된 유광종 목사는 30대 초반의 젊은 시절 부인 김인복씨와 네딸을 데리고 정선군 정선읍 봉양6리로 내려왔습니다. 이농현상이 심하고 농촌살림이 어려운 가운데, 산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노인들과 함께 살면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농촌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지인 강원도 정선의 폐광지역에 터를 잡고, 이곳에서 남은 생을 농민과 더불어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 23년 전인 83년입니다.
그 때 내려오면서 잡은 계획이 10년입니다. 10년 후에는 사회가 많이 변하여 산골 오지라도 찾는 사람이 있고, 농촌도 좀더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때 그가 그렸던 꿈은 아직 멉니다.
지금이야 산 위의 농장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차로 오고가기 쉽지만 처음 내려왔을 당시 그와 가족들의 고생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부인 김인복씨의 이해와 불평없이 따라와준 어린 네딸 덕분에 시골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지, 가족이 반대를 했다면 차마 억지로 떠밀기 힘든 결정입니다.
"처음에는 곱게 자란 딸을 시골에 데려가서 고생시킨다면서 처갓집에서 미움 많이 받았어요. 여기 온 다음 몇년 동안은 장인, 장모님이 오시지도 않았죠. 그런데 이제는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해 이해해주시고 잘 내려왔다고들 말씀해주세요."
특히 유광종 목사는 결코 편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자라준 딸들이 고맙다고 말합니다.
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낡은 토담집에 살면서 밭을 개간하고, 5천마리 정도 되는 토종닭을 방목하여 키웠는데, 닭 치는 것을 돕고, 계란을 걷어서 상자에 담는 일은 딸들의 몫이었습니다.
정선에 온 것은 큰 아이가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일 때입니다. 지금은 산 위 농장까지 도로가 포장돼 있어 자동차로 15분 정도면 읍내에 나갈 수 있지만, 그때는 꽃 피고 뱀 나오는 비포장길을 아이들끼리 1시간 반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옛날 산골사람들이 개나리 봇짐을 매고 장날에 다니던 길을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지고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닌 것입니다.
남들은 학원이다 유학이다 하는데 그런 것 없이도 농장일 도우면서 공부도 잘한 딸들입니다. 덕분에 힘들고 어려웠지만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그는 갖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농촌 공동체 회복이 우선
봉양6리에는 골짜기 곳곳에 걸쳐 탑골, 관음동, 세대, 기동골 등 6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말이 마을이지 마을당 많아야 20집, 적게는 3~4집으로 면적은 넓지만 살고 있는 가구는 전부 40가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창 때는 100가구가 넘게 살 때도 있었다고 하지만 옛날 이야기입니다.
유광종 목사가 봉양리에 내려와 처음 한 것이 농촌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골이 깊고 마을 사이가 먼데다, 자동차가 귀한 80년대 당시 이 집에서 저 집을 가려면 걸어서 산을 넘어야 할 판이니 마을간의 교류도 적었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마을 공동체도 농촌이 붕괴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습니다.
그는 해바라기 영농공동체를 조직하여 농사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친목도 다지고 마을 간에 협력도 하면서 농촌의 희망을 찾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마을주민들이 그를 잘 받아들여줬고, 그 후 마을주민들과 함께 선진농업 견학도 가고, 공동판매도 하고, 생산할 때 서로 도우면서 지금까지 해바라기 영농공동체는 쭉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는 농장의 밭 3~4천평 정도를 은퇴 후 귀농하여 농사도 짓고 전원생활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분양하려고 합니다.
각각 100평, 200평 정도의 땅에 작게 집을 지어 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영농기술도 배우고, 재배한 농작물들을 함께 판매하면서 기존 농촌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전원마을로 계획할 생각입니다. 농촌 정서와 동떨어진 도시민들만의 성이 아닌 우리 농촌을 발전시키고 이어갈 수 있는 전원마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품질, 다품목, 소량생산이 사는 법
유광종 목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농업의 방향은 바로 고품질, 다품목, 소량생산 입니다.
친환경으로 고품질의 농작물을 생산하되 기계를 사용한 대량농업이 아닌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환경에 걸맞는 소량생산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또한 이것저것 짓기 귀찮고 효율이 없다고 한가지 농작물에만 올인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올해처럼 배추값이 폭락했을 경우, 배추 하나만 바라보고 산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친환경농업을 해온 그는 처음에는 일일이 밭의 풀을 매느라고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여름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으로 풀을 뽑고 있으려니 무리를 해서 병이 날 정도로 몸이 고달팠고, 인건비도 많이 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려고까지 했어요. 제초제 조금 뿌린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 회의가 들었구요. 그래서 한해는 뽑다 뽑다 지쳐서 풀 뽑는 걸 그만둬버렸지요. 자라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뒀더니 한여름에 얼마나 잡초가 빨리 자라는지요. 그런데 그 해 여름 엄청난 가뭄이 든 거예요. 다른 밭은 마르고 갈라질 정도로 비가 안 왔는데, 우리 밭은 오히려 만져보니 땅이 축축한 겁니다. 잡초가 그늘이 되어 수분증발을 막았던 거죠. 밭은 풀밭이 됐는데 콩은 콩대로 잘 자라구요."
그 다음부터 그는 풀 매는 것을 최소화하면서 콩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물론 수확량은 정석대로 짓는 것보다는 적습니다. 하지만 풀을 매느라 드는 인건비를 절약한 만큼 약간의 손실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퇴비만 주었더니 땅의 힘이 길러져서 작물이 건강하고, 예전에 비해 수확량도 늘었습니다.
마을에서도 이런 친환경 농업의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겨 친환경 농업 모임을 결성하여 정보도 나누고, 연구도 하고 있습니다.
농산물을 가공하여 높은 부가가치 얻어
농산물을 생산하는 1차 생산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가공하여 판매하면 좀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습니다. 콩을 심어 메주를 만들고, 메주를 만들어서 된장을 만들면 더욱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것입니다.
유광종 목사는 밭농사뿐만 아니라 산에서 자라는 나물과 약초도 채취합니다. 이런 임산자원이야말로 순수한 자연의 정수이며 농가에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물과 약초 채취는 지식이 있고 익숙하기 때문에 시골의 노인들이 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단지 나물을 캐서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공시설을 몇 가구마다 하나씩이라도 마련해서 2차 가공품으로 팔면 훨씬 부가가치가 높아집니다.
그의 농장에서는 청국장가루, 청국장환, 캡슐청국장 등의 청국장류와 된장, 간장 등의 전통장, 흑염소 엑기스, 호박즙과 산야초 엑기스, 민들레환, 민들레뿌리 커피, 인진쑥환 등 각종 건강식품을 가공하여 판매하고 있습니다.
생협을 통해 판매하기도 하지만 주로 인터넷 쇼핑몰로 직거래를 합니다. 이처럼 여러가지 품목을 생산하려면 웬만한 규모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농장을 꾸려나가는 사람은 목사 부부와 어머니, 세식구가 전부입니다. 바쁠 때는 딸들이 찾아와 거들어주기도 하고, 마을사람들과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서로 일을 돕고 있습니다.
"가족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져서 이 사람 저 사람 고용하고, 농장이 회사나 공장처럼 바뀌게 되면 위험한 겁니다. 사람을 많이 쓸수록 소득은 줄어들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요령을 피우게 되니까요. 이익에 농사가 따라가서는 안되지요, 농사에 이익이 따라와야지."
그는 농장을 친환경 농업과 가공품 생산, 흑염소와 토종벌 축산에 민박 등의 관광농업을 병행하는 복합영농으로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단지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는 이런 변화가 우리 농촌에 희망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젊은 시절 정선에 내려와 정신없이 농촌 살리기에 매달리다보니 어느덧 청춘이 흘러갔더라는 유광종 목사. 아이들 재롱 피우며 자라는 것도 제대로 못 봤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50대가 되었습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자연 속에서 일하며 농민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갖고, 농촌을 잘 사는 마을로 만들려는 소망을 품고 사니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할 힘이 난다며 그는 웃었습니다.
정선베다니농장(www.goats.co.kr, 033-562-1726)
속 편하게 유닛모듈라주택 짓고 사는 부부
지난 9월 국내 최초의 유닛모듈라 주택이 평창군 속사리에 들어섰습니다.유닛모듈라 주택에 살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김정구, 고현숙씨 부부를 찾아가 유닛모듈라 주택을 시공하게 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속사리 마을 끝길의 산 밑에 자리잡은 하얀 전원주택은 겉보기에는 일반 주택과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시멘트타일로 외벽을 마감하고 아스팔트슁글을 얹은 단정한 1층 전원주택인 이 집이 바로 하루만에 짓는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닛모듈라 주택 1호입니다.
유닛모듈라 주택은 정확히 말하면 모든 공정을 하루만에 뚝딱 마치는 것은 아닙니다. 콘크리트 기초공사 기간과 철골구조와 단열·마감재, 전기배선과 창호까지 설치된 박스 형태의 유닛모듈을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간, 생산된 모듈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기간까지 모두 합하면 2~3주 정도가 소요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조립하는 데는 단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평창 유닛모듈라 주택의 건축주인 김정구, 고현숙씨 부부는 올해 9월에 입주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단열이나 방음이 뛰어나 만족스럽다고 합니다.
유닛모듈라 주택에서 전원생활 하는 부부
특수학교 교사로 30여년 동안 근무한 김정구씨와 고현숙씨는 2004년 속사리에 터를 사고 전원생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평창에 사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이 땅은 마을 끝에 외따로 떨어진 곳이라 한적하고, 앞은 트여 전망이 좋고 옆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어 전원생활터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땅을 사고 2년 후에는 은퇴하여 집 짓고 살자고 부부가 함께 꿈을 그리던 중, 작년에 갑작스레 김정구씨의 건강이 악화되어 1년 정도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병실 벽에 평창 터 사진을 붙여두고 퇴원하면 여기에 집 짓고 살 거다 이 생각 하나에 힘든 줄도 몰랐어요. 희망이 있었던 거죠."
명예퇴직을 하고 퇴원 후 김정구씨의 꿈대로 집을 지으려고 하니 주위 친지들이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집 하나 지으려면 10년을 늙고 사람 성질도 다 버린다고 하는데, 몸도 안 좋은 상황에서 집을 짓다 보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시골에 내려가겠다면 차라리 남이 지어놓은 집을 사서 살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구씨는 일평생 살면서 자기가 설계해서 지은 집에서 사는 기쁨을 한번 누려봐야 하지 않겠느냐 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스틸하우스를 지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스틸하우스 전문 시공업체인 시스템건축을 찾아가 상담을 하던 중에 유닛모듈라 주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설명을 들어보니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우리집을 그걸로 지어주십사 부탁한 거예요."
김정구씨 부부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용기가 대단하다며 놀랍니다. 국내에선 아직 검증된 것도 없고, 처음으로 짓는 집이라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선뜻 결정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짓다가 실패하면 그만인 샘플하우스도 아니고, 퇴직금으로 짓는 평생 단 한번 지을까 말까한 집인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이상하게도 그런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고,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얘기 듣고 나서야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싶더라며 고현숙씨가 웃습니다.
주택 조립하는 데 하루면 뚝딱
김정구씨 부부의 집이 국내 유닛모듈라 주택 1호라고는 하지만 100% 국내 기술과 자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외벽마감재와 창호 등은 일본에서 생산되었고, 일본 기술자들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내년 8월경부터는 국내에서도 양산체제를 갖추고 완벽한 국내기술과 자재로 유닛모듈라 주택을 시공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이 우리나라 기술로 짓는 최초의 유닛모듈라 주택이 될 것입니다.
유닛모듈을 공장에서 생산하는 데에는 2주 정도가 걸렸습니다. 일본에서 건자재를 들여오는 등 일본과 국내 일정을 맞추다보니 시간이 좀더 걸렸고, 비가 많이 내려 작업이 늦춰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보다는 오래 걸린 것이라고 합니다.
5월 23일 공장에서의 작업이 완료되고, 유닛모듈을 하나씩 실은 5톤 트럭 14대가 줄줄이 평창에 도착했습니다. 외장에서부터 창호, 전기배선 심지어는 화장실 변기와 수전까지 미리 설치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기초 위에 대형 크레인으로 유닛모듈을 들어 앉힌 다음 설계에 따라 모듈끼리 조여서 완성하는데 아침 7시 반에 시작하여 오전에 다 끝났으니, 반나절이 채 안 걸린 셈입니다.
유닛모듈라 주택은 모든 것이 완성되어 조립만 하면 되는 만큼 정밀시공이 필수적입니다. 모듈과 모듈 사이에 허용되는 최대 오차는 2mm로 그 이상은 단 1mm라도 오차가 있으면 안 됩니다. 평창 주택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공한 주택인데, 50년을 넘게 유닛모듈을 작업해온 일본 기술진도 감탄을 할 정도로 정밀하고 순조롭게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유닛모듈이 조립된 다음에는 실내에 벽지와 타일 등으로 마감을 하고, 붙박이장과 싱크 작업을 하여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단열과 방음 성능에서 만족
주택이 완성된 후 데크작업과 석축쌓기를 하던 중 평창에 폭우가 내려 큰 수해를 입었습니다. 김정구씨 부부의 집도 옆에 흐르는 작은 계곡이 넘쳐흘러 아름드리 나무가 몇채씩 뽑혀나가고, 산에서 바윗돌이 굴러내려오는 등 수마의 발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주택 외벽에 구멍이 뚫려 흙탕물이 집안까지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오히려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맞은편 계곡의 목조주택의 경우 홍수로 떠내려가서 다시 짓고 있는 집이 있을 정도로 심한 수해 속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오히려 유닛모듈라 주택의 튼튼함을 시험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2개월 동안 살아보니 단열효과나 방음에 있어서도 만족할 만합니다. 창호를 2중창으로 설치하지 않았는데도, 우풍이 없고 단열이 완벽해 추운 줄을 모르고 삽니다. 현장에서 샷시 공사를 하다보면 틈이 생길 수도 있지만, 공장에서 딱 맞게 조립되어 나오는 유닛모듈라 주택의 경우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주택 평수는 40평 정도로 계획했는데, 기존 평면을 유지하면서 조립될 유닛모듈의 크기에 맞추다보니 50평으로 늘어났습니다. 유닛 모듈이 총 14개가 들어간 집입니다.
일본의 경우 보통 집 한채 짓는 데 7개 정도를 사용한다고 하니 유닛모듈라 주택 중에서도 규모가 꽤 큰편입니다.
유닛모듈라 주택은 일정한 크기의 모듈을 설계에 맞게 재배치하고 조립하여 짓는 것이니만큼 설계상의 제약이 있습니다. 이 주택의 경우 고현숙씨는 거실에 큰 통창을 내어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싶었지만, 거실이 2개의 모듈로 나눠지기 때문에 창문 역시 2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택의 평면은 계속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아파트와 유사하게 하되, 프라이버시를 위해 거실과 주방 등의 공용공간과 침실, 서재 등의 개인 공간을 현관과 복도로 분리했습니다. 지붕 밑 공간에는 넓은 다락을 만들고, 필름난방을 설치하여 손님용 침실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건축주가 속 편한 유닛모듈라 주택
김정구씨는 유닛모듈라 주택의 또 다른 장점 한가지로 건축주가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꼽습니다. 집을 지으면서 현장에서 부딪치는 여러 문제와 일하는 사람들과의 마찰 때문에 속을 썩이는 경우가 많은데, 공장에서 모든 공정이 완료되어 조립만 하면 되기 때문에 특별히 참견할 일이 없습니다.
특히 막 퇴원하여 몸이 좋지 않았던 터라 신경 쓸 여력이 되지 않고,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악화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 부부에게 딱 맞는 주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는 말합니다.
또한 정밀한 시공을 요하기 때문에 하자가 적고, 집을 짓고 나오는 폐자재며 쓰레기가 거의 없으며, 구조 변경이 쉽고, 심지어는 분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재조립할 수도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50평 주택을 짓는 데 토목공사와 내부마감을 포함하여 총 1억9천만원이 들었습니다. 평당 400만원 꼴로, 토목공사나 각종 옵션 등을 제외하면 비싼 편은 아니지만 싼 편도 아닙니다. 일본 마감재와 창호를 사용하고, 아직 양산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춰지지 않아 단가가 높아졌지만, 앞으로 공장 시스템이 갖춰지고 수요가 늘면 좀더 저렴한 집짓기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사실 하루만에 뚝딱 조립하여 짓는다고 하면 과연 튼튼하겠느냐, 날림으로 엉성하게 짓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많습니다. 샌드위치패널로 짓는 조립식 주택과 마찬가지 아니냐는 인식도 있습니다. 유닛모듈라 주택이 제대로 인정받고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대중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올 여름에 집중호우 때문에 수재민이 많이 발생했잖아요. 집을 잃은 분들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힘들게 살고 계신 걸 보고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럴 때 빠르게 지을 수 있고 주택으로서 기능도 뛰어난 유닛모듈라 주택이 보급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김정구, 고현숙씨 부부는 다시 집을 짓는다고 해도 유닛모듈라 주택을 택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유닛모듈라 주택 1호로서의 자부심과 만족감을 나타냈습니다.
집값 오르는 것보다 삶의 질이 중요
서울 강남에서 30년을 살다가 아파트를 팔고 용인으로 내려와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강남 아파트가 아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김원일, 홍계옥씨 부부는 오히려 서울 생활을 포기하니 다른 행복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
용인시 양지면 대대리의 한터마을. 마을 아래쪽으로는 옛날부터 살아온 50여 가구의 시골집이 늘어서 있고, 마을에서 산쪽으로 들어가면 십여세대 정도의 한터전원마을 과 그 외에도 산자락을 따라 전원주택들이 띄엄띄엄 들어선 곳입니다.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한적하고 전원 분위기를 누리고 싶은 전원생활자들은 자연스레 마을 외곽에 자리를 잡았고, 몇대째 대대리에서 살아온 마을주민들은 마을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런 마을 정경에 이채롭게도 김원일, 홍계옥씨 부부의 전원주택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수백년된 느티나무가 드리워진 마을회관의 옆집입니다.
400년된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은 집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김원일씨 부부가 용인시 양지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4년전에 이곳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방문하면서 부터입니다.
전원주택단지인 한터전원마을에 자리잡은 친구의 집을 여러번 드나들다보니 자연스레 전원생활을 꿈꾸게 되었고, 이왕이면 같은 마을에 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한터마을은 조선시대 때부터 이어온 400년된 마을입니다. 원주민은 50가구였는데, 몇년 전부터 전원생활자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해 이제는 외지인도 50가구나 됩니다. 시골이지만 서울에서 40분 거리로 멀지 않아 출퇴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나이 드신 층까지 연령대가 고루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이 생긴지 수백년이 됐다고 하는데요. 오래된 마을은 사람이 살기 좋은 동네라고 보면 되지 않겠어요? 마을 곳곳에 큰 나무가 많아서 마을이 참 예쁘구요. 산 밑에 자리잡아 아늑하고 살기 좋게 느껴졌어요."
부인 홍계옥씨는 가끔씩 이곳의 친구 집에 내려오면 공기도 좋고 편안하여 올라가기 싫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자연스레 전원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김원일, 홍계옥씨 부부는 근방에 땅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마을 외곽에 떨어진 집이 아닌, 마을 안에서 살고 싶었던 부부는 마침 팔려고 내놓은 시골집을 동네주민의 소개로 사게 되었고, 3년 정도 시간을 두며 집 지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마을 가운데에서 살다보면 기존 주민들의 텃세나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있어 대부분 전원생활자들은 마을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이런 땅을 찾았느냐는 질문에 김원일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부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서, 처음부터 다른 집들과 떨어진 곳은 원하지 않았어요. 조성된 전원주택단지는 대지가 200평이더라도 도로랑 공유지로 빠져나가면 70% 정도밖에 활용을 못하더군요. 여기서는 350평 땅을 샀지만 하천부지나 옆의 자투리 땅을 활용할 수 있어서 넓게 쓸 수 있어요. 또 도시에서 시골 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한다 생각하고 적응해나가자는 결심이었습니다."
마을에 비슷한 또래가 많고, 기존 전원생활자들이 많기 때문에 외지인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는 분위기도 한몫을 했습니다.
저렴하고 실용적인 집 짓기 원칙
작년 4월 부부는 터에 있던 기존 농가를 허물고 48평 목조주택을 지었습니다. 부부와 두 아들이 함께 지내는 2층 집입니다. 집을 짓기 전에 김원일씨 부부가 정한 두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돈을 많이 들이지 말 것이고, 둘째는 실용적이고 편리할 것입니다.
은퇴를 하고 내려오는 것이다보니 집 짓는 데 큰 돈을 투자할 수 없었고, 오랫동안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와 비슷한 생활공간을 원한 것입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건물 구조는 되도록 심플하게 구성했습니다.
심플한 전원주택이란 일단 지붕 숫자가 적은 집을 말합니다. 모양을 내기 위해 지붕 숫자를 늘리면 집이 커보이고 화려해보이는 효과는 있지만 그 만큼 비용이 많이 들고 구조가 까다로워 하자가 생기기 쉽습니다.
김원일씨 부부의 집은 현관 지붕까지 포함하여 단 3개의 지붕만을 두었지만, 데크와 발코니로 외관을 꾸며 허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또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자재를 규격화하고, 설계 단계부터 규격화된 자재에 맞추어 설계를 했습니다. 규격품으로 판매하는 창호를 사용했더니 가격도 저렴하고, 단열효과도 더 뛰어났습니다. 데크 역시 데크용 나무 사이즈에 맞춰 자투리가 남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집을 설계할 때 기본 레이아웃은 김원일씨가 직접했습니다. 부부 욕실이나 드레스룸, 복도 공간과 현관을 줄이고 대신 거실을 크게 함으로써 집이 훨씬 넓어보이고 쓰임새도 좋습니다. 각 공간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실과 주방 사이에 계단을 두어 두 공간을 분리했고, 2층에는 아들들의 방을 하나씩 만들었습니다. 동선이 복잡하지 않고 현관에서부터 거실, 부엌, 계단이 바로 연결되는 실용적인 구조입니다.
"굳이 아쉬운 점 중에 하나를 꼽자면 돌출창을 더 많이 넣었으면 하는 거죠. 안방 창문을 돌출창으로 했는데, 방이 넓어보이고, 햇빛이 잘 들고, 여름에 통풍도 훨씬 잘 되더라구요. 미관도 좋고 실용성이 있는 창문이에요."
아무리 잘 지어도 살다보면 단점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집에 살면서 90% 이상 만족을 한다며 이처럼 건축주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짓기는 힘들 거라고 김원일씨는 말합니다.
재테크 위해 전원생활하면 안 돼
용인으로 이사를 하고 난 후, 올 여름에만 손님을 150명도 넘게 맞은 것 같습니다. 말만 하면 필요한 것 다 사가지고 내려 갈테니 초대만 해달라는 게 친구들의 애원이랍니다.
"서울에 살면서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친구들이 참 많아요. 다들 꿈은 많이 꾸는데 엄두가 안 나는 거죠. 경조사도 다녀야 하고, 문화생활도 해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하는데 시골에 오면 혼자 동떨어진 것 같을까봐."
서울 강남의 아파트에서 30년 이상을 살았다는 김원일, 홍계옥씨 부부도 내려오기 전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설계까지 받아놓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심사숙고를 했습니다. 집을 짓고 나면 물릴 수도 없는데, 정말 내려와도 좋을까 하고 득과 실을 아무리 머릿속으로 계산해봐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한 막연할 뿐이었습니다.
"한참 고민을 하는데, 시공을 맡은 회사가 강남의 집을 팔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거예요. 이 말에 그제서야 결심을 하게 되었죠. 강남의 아파트를 팔고 나면 그 돈으로 땅 생기고, 집 생기고, 밭 생기고, 생활비도 나오는데 왜 그 아파트를 붙잡고 아웅다웅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을 떠나 그 때 생활을 돌아볼 여유를 갖게 된 김원일씨는 시골에 있으니 도시에서는 안 보이던 여러가지가 보이더랍니다.
남하고 경쟁할 일도 없고, 부대낄 일도 없어 좋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엔 참 스트레스 받으면서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에서 31평 아파트에 살았어요. 가격으로 따지자면 지금 집의 몇배는 되죠. 그런데 공간은 여기의 10%밖에 안되잖아요. 삶의 질적인 면에서 봤을 때, 그렇게 사는 것하고 이렇게 사는 것하고 어느 것이 낫겠어요?"
사실 용인지역이 개발되면서 땅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4년 전에는 대지를 평당 50만원에 샀는데, 지금은 밭도 평당 100만원씩입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땅값이 올라도 크게 좋은 줄 모르겠답니다. 평생 여기서 살며, 땅을 팔 것도 아닌데 세금만 더 나올 뿐 이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동산으로 돈 벌려고 했으면 서울을 떠나면 안됐죠. 강남 아파트 값이 요즘 얼마나 올랐어요. 귀농하고 전원생활 하려는 사람들은 재테크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할 것 같아요. 그거 생각하면 못 내려오죠.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고 답답하다고 하는데, 삶의 기준 자체가 다른 거예요."
아파트 값 오르내리는데 일희일비 하는 사람들과는 추구하는 삶이 다릅니다. 행복한 삶이 무엇이고 참다운 삶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생활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부부는 진지해 집니다.
난(蘭) 기르며 은퇴 후 전원생활 준비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의정부 방면으로, 거기서 또 송추 방향으로 복잡한 도로를 타고 갑니다. 안내받은 길을 따라 가는데도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만 보일 뿐, 좀처럼 전원생활을 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
문화재보호구역과 군사보호구역 내 건축
회사의 정년을 6개월 앞두고 있는 한상구씨는 요즘처럼 신이 나는 때가 없습니다. 휴가를 내고 지은 전원주택이 완성되어 한달 전에 이사를 했고, 지금은 파주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하며 전원기분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개월 후 은퇴를 하고 나면 시골에서 할 일거리들도 벌써부터 여러가지 계획해두었습니다.
"전에는 서울 은평구의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지금은 아파트는 팔고 아예 이곳에 정착을 했죠. 처음엔 아무리 그래도 아예 서울 생활 정리하고 여기에서 사는 건 무리 아닐까 싶었는데... 아파트 팔고 들어오니까 간단하더라고요."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 하루 이틀 노래 부른 게 아니었다는 그는 은퇴 후를 대비해 틈틈히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바다가 좋아 동해안 가까이에 살고 싶은 생각에 강릉, 속초에서 서울 사이를 죽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주말엔 차가 밀려 오고 가기 힘들고, 서울에 사는 아이들이 내려오기도 벅찰 것 같아 좀 더 서울 근교로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땅 보러 다니면서, 무인도에서도 살아보고, 남해안 바닷가에서도 살아보고, 강원도 산골에서도 살아보고... 다 살아봤어요. 물론 그냥 상상 속에서요. 땅 보러 가서 여기가 좋다 싶으면 어떻게 집 짓고 살 것인지 혼자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과정이 참 재밌었어요."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다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의 땅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고개 아래는 주택가고 아파트도 있어 도회지 분위기지만, 고개만 올라오면 흡사 강원도 산골 같은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습니다. 고개 아래까지는 시내버스도 대여섯 노선씩 다니지만, 그 위로는 시골버스 한대가 몇 번 오갑니다.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산촌이었습니다.
2년 동안 땅을 보러 다니면서 이리저리 재고 고민을 했었는데, 딱 와서 이 터를 보고는 여기다 싶어 바로 계약을 했습니다. 너무 마음에 들어 다른 궁리 안 하고 고추 모종부터 사다 심었답니다.
하지만 고개 위에 근방에 군부대와 봉덕사가 있어 군사시설보호구역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땅이었습니다. 주택허가를 받기가 까다로워 전주인이 허가를 내는 데 5년이나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상구씨가 땅을 샀을 때는 건축을 해야 하는 기간이 한달 채 안 남았을 때였습니다.
다행히 명의변경을 하니 1년이 연장되었고, 그 때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시피 하여 집 지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전문가 컨설팅을 받아 주택 시공
집을 지으려고 견적을 받아보니 업체마다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기초공사 비용만 해도 1천400만원에서 2천800만원까지 두배나 차이 나기도 했습니다. 너무 싸도 의심스럽고, 너무 비싸도 의심스러워 어느 곳을 믿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OK시골에서 전원생활교육 강의를 들은 내용을 토대로 하여 업체들을 만났습니다.
"짓고 싶은 집과 예산을 말한 뒤 이 가격으로 이런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묻자 괜찮다고 하기에, 말 나온 김에 우리 집 좀 지어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업체는 계약서를 따로 쓰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자재 들어오면 비용은 직접 결재하고, 인부들 임금도 제가 주는 식으로 하자고요. 이런 점에선 건축주 직영과 비슷하지만 대신 지을 때 전문가로서 감독과 현장지휘는 맡아서 컨설팅 해주겠다는 거였죠."
이렇게 집을 지으니 업체에 일괄적으로 맡기는 것보다 저렴하고 자유롭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집을 짓다 설계나 자재의 등급에서 실랑이할 일도 없고, 중간에 원하는 대로 변경하기도 쉬웠습니다. 업체와 실랑이 안하고 훨씬 편하게 집을 지었다는 것이 한상구씨의 총평입니다.
집 짓기전 컨테이너에 살며 예행연습
땅은 총 200평인데 전주인이 토목공사비까지 마쳐 놓아 평당 70만원에 샀습니다. 원래는 동호인 마을로 분재 동호회 네가구가 함께 모여 살려고 나란히 땅을 사놓은 곳입니다. 한상구씨가 들어오기보다 1년 먼저 옆집에 교수 부부가 집을 지었고, 지금은 두 집이 나란히 전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땅을 사놓고 집 짓기까지 1년 동안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농사도 짓고 땅도 가꾸고 개를 키우며 지냈습니다. 살던 아파트에서 25분 거리입니다. 자기 전에 개밥을 주러 갔다오고, 아침에 일어나서 농사 짓고 출근하고, 매일 그렇게 살다보니 부인이 왔다갔다 하기도 귀찮으니 아예 옮겨버리자고 먼저 말하더랍니다.
처음에는 아파트를 처분하지 않고 두려고 했는데, 컨테이너에 얼마간 살다보니 아예 아파트를 정리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1년 동안 그렇게 농사를 짓고 살다보니 집을 짓고 이사를 온 것은 한달밖에 안되지만 벌써 웬만한 전원생활의 요령은 익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년 동안 취미로 난을 키워왔는데, 전원생활을 하면서 난재배 비닐하우스를 따로 두고 본격적으로 난을 키울 생각입니다. 난은 2평의 땅을 가지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품종에 따라 몇 십만원에서 몇 백만원까지도 거래되는 난은 노후에 소득사업으로도 좋습니다. 또 집 앞산에는 참나무가 많아 표고버섯을 35그루 정도 키우고 있으며, 주변에 꽃나무와 야생화도 심을 생각입니다.
"노후를 대비한다고 하면서 연금 같이 일정한 수입만 마련해 놓고 그것을 소비하며 산다는 것은 사람이 먹을 것만 갖고 산다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죠."
전원생활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일을 통해 작으나마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전원생활이 즐거울 것이라 말합니다. 이제 그렇게 바라던 전원주택을 완성했으니, 앞으로 전원생활을 즐길 일만 남았다며 그는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진동리 화가의 깊은 산골짜기 찾기 10년
바람에 누운 갈대밭, 파도가 몰아치는 바위... 거칠게 그은 듯한 선에서 자연의 힘과 웅장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산이 좋아 산골짜기만 돌아다니며 살았다는 최용건 화백은 지금 인제 내린천 골짜기에서 바람이 묻어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
내린천을 따라 난 31번 국도 주위에는 래프팅 업체와 펜션, 식당 등이 많이 들어서 있어 몇년 전만 해도 강원도 깊은 산골이었던 이곳의 변화를 실감케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린천 주위에만 국한된 얘기일 뿐, 아직도 좀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면 하루에 한두 사람 찾아 올까말까한 산골 마을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화가 최용건씨가 깊은 산골을 찾아 자리잡은 곳도 그런 오지 중에 하나인 봉덕동입니다.
히말라야 라다크에서 1년간 체류
라다크, 레, 창스파, 라마유르, 장스카르... 쉽게 발음되지 않는 이국적인 이름들. 최용건씨와 부인 안복실씨가 오지 중의 오지를 찾아 1년 동안 머무른 인도 북부의 지명들입니다.
히말라야 고원에 자리잡은 소박한 마을 라다크는 풀도 나무도 변변치 않은, 오직 바위와 눈뿐인 척박한 곳입니다. 웅장한 히말라야 산세와 쪽빛 하늘 아래 살아가는 라다크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검소한 삶은 세계에 이곳을 마지막 샹그리라로 알려지게 했습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다룬 헬레나 노르베리의 책 오래된 미래 를 읽고 최용건씨가 라다크에 가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3년 전입니다.
이미 인제 진동리에서 7년째 살고 있던 그는 내린천 주위가 점차 개발되고 번잡스러워지면서 좀 더 한적한 산골로 들어갈 필요를 느꼈고, 그러던 참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인 히말라야에 마음이 닿은 것입니다.
"인제 진동리에서 7년 동안 살면서, 도시에서는 맛보지 못한 마음의 평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얻었어요. 인제 산골짜기가 그럴지언데 히말라야의 산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울까? 그런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 그런 낭만적인 바람이 있었지요."
도시에서 산골로, 또 좀 더 산골로... 이렇게 오지를 찾아다니던 그였습니다. 히말라야 라다크로 출발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최용건, 안복실씨 부부가 이렇게 라다크에서 머문 기간은 1년이나 됩니다. 보통 여행객이라면 며칠, 길어야 1주일 정도 머무르다 떠날 산과 눈밖에 없는 이곳에서 그들은 1년이나 있었습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좀 더 깊숙히 느끼고자, 그 속에서 정서적인 환기와 깨달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인제 진동리에 자리를 잡은 부부는 라다크풍의 집을 짓고 히말라야 사람들 만큼이나 소박하고 평화로운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같은 도회지에서의 삶
최용건씨는 서울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나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명문고에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그의 행보는 그런 엘리트적인 삶과는 사뭇 다릅니다. 도시에서 누군가 쫓아내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영월, 정선, 평창 등 시골이라는 시골은 다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강원도에서 보낸 그는 교직에 있는 아버지를 따라 삼척, 속초, 춘천 등지에서 자랐습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마쳤지만, 언제나 도회지 구조가 갖는 한계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도시에서 살 때는 안정이 안 되고, 버스 터미널에서 서성거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표를 사들고 어디로 갈까? 이러고 있는 듯했어요. 언제나 그런 이방인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안되겠다, 최종적인 정착지를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처음에는 춘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춘천 시내, 그것도 아파트에서 살다보니 서울생활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다 마침내 정착한 곳이 인제입니다.
인제 진동리에서 7년을 보낸 그는 히말라야 라다크에서 1년간 체류 끝에 다시 인제로 돌아와 좀 더 깊은 봉덕동 산골짜기에 새로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ALC블럭으로 라다크풍 주택 건축
내린천 국도변에서 봉덕동으로 가려면 다리를 하나 건넌 뒤 산을 향해 꼬불꼬불 올라가는 좁은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마을길로 보이던 그 길이 어느덧 양쪽으로 수풀과 나무 무성한 등산로처럼 변하고, 수해로 인해 곳곳이 파이고 끊긴 시멘트 포장로를 3km 정도 올라오면 탁 트인 고원을 내려다보는 곳에 상자처럼 반듯하고 하얀 집이 보입니다.
넓은 골짜기에 전부 6가구만이 살고 있는 봉덕동은 고도가 높아 겨울이 빨리 찾아옵니다.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승용차로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첩첩이 쌓인 산맥 저편으로는 설악산 대청봉도 눈에 들어옵니다. 최용건씨는 라다크에서 지내면서 아내와 결심한 것처럼 봉덕동에 자리잡으면서 라다크풍 집을 지었습니다.
라다크풍 집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사각형 형태에 창문은 목재창호, 그 위에 3단으로 돌출되어 나온 창호 눈썹 그리고 벽에 하얀 회칠을 하면 그것이 라다크풍의 집입니다. 그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모양이 준엄한 산세와 퍽 잘 어울립니다.
하얀 눈이 내리면 그야말로 어디가 눈밭인지, 어디가 집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단열이 좋고 공정이 빠른 ALC블럭으로 지은 2층 집입니다. 1층은 작업실과 민박용 원룸, 2층은 살림집으로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부인 안복실씨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토박이라 시골 생활은 결혼 후에야 처음 겪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계속 시골에 가야겠다. 나는 서울에서는 못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지요. 이혼을 해서라도 가겠다고 하니까 내가 반대해서 될 일이 아니겠다 싶어 따라왔어요. 처음에는 못 살겠으면 다시 올라오면 되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의외로 제게 잘 맞고 재밌는 거예요. 인생 전반부는 도시에서 살았으니, 후반부는 시골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시골에서 사니 무엇이 제일 좋냐는 질문에 부부는 한참을 생각하다 "특별히 한두가지를 꼬집어 말하기보다는 이곳에서의 온전한 삶 그 자체로 참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산골짜기까지 불어오는 개발 바람
봉덕동 산골짜기에 어둠이 내리면 적막감이 주위를 감쌉니다. 얼마 전에 설치된 가로등 하나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이웃집의 불빛 몇 개 외에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이 전부입니다.
이런 적막감과 고요함을 사랑해 이곳에 들어온 부부에게 마냥 오지라고 여겨지는 이곳 봉덕동은 가끔씩 바깥 세계에서 풍파가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내린천이 관광명소로 유명해지면서, 래프팅 외에도 산악오토바이 업체들도 찾아왔습니다. 관광지도 아닌 조용한 봉덕동까지 오토바이를 몰고 들어 온 업체때문에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 속을 많이 썩이다 업체와 의논 해 앞으로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것은 막았지만, 조용한 산촌도 시끄러워질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땅덩어리 참 좁아요. 여기가 굉장히 오지고 산골짜기 같죠? 그런데도 간간히 이곳이 골프장을 하기에 좋다느니 하면서 개발 소식이 들려오기도 해요. 서울서 양양까지 고속도로가 뚫리다보면 인제도 점점 개발되겠지요. 가장 안전한 은신처라고 생각했던 봉덕동도 언젠가는 개발될 거라는 생각에 씁쓸합니다."
몇개월 전에도 골프장 개발 업체가 찾아와 조사를 하여 금방이라도 골프장 부지로 선정될 것처럼 마을이 들썩거리더니 지금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라앉았습니다. 골프장이 하나 들어서면 봉덕동 전체가 없어지게 될지 모른다며 한동안 가슴을 졸이고 살았습니다. 개발의 물결이 밀려오면 다른 곳으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최용건, 안복실씨 부부.
조용히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인제 봉덕동의 하늘밭 화실에서 도란도란 부부의 이야기는 깊어갑니다.
하늘밭 화실(www.hanlbat.co.kr)
최용건 화백의 라다크 체류기 중에서...
장스카르는 라다크의 어느 골짝보다도 가난한 골짝으로 지난 여름 장스카르 트레킹 땐 주로 민가의 지붕 위에 올라 흙 바닥 위에 자리를 펴놓고 먼지투성인 채로 잠을 잤었다.
눈만 뜨면 얼굴 위로 마구 쏟아져내려 마마자국을 남기고 사라질 것만 같던 황홀한 별자리들,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려 첨벙거리며 뛰놀고 싶던 은하수... 여행길에서 오리온, 천칭, 거문고, 궁수, 처녀, 전갈, 물병자리들을 쫓으며 밤이 새도록 은하수를 거슬러 내리다보면 어느덧 나의 고향 내린천까지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여튼 밤하늘의 모든 것들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 내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몰아 쉴 때는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했었다.
밤이 늦도록 잠이 오질 않아 아내와는 귀국 후의 계획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늘밤처럼 지붕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라다크식 집을 지어놓고 살자고... 정원엔 하얀 초르텐도 세우고, 웬만하면 지붕 위에 타르쵸 깃발도 날려 달밤이면 멀리 히말라야의 신령스러운 기운이나 마음껏 불러들여 살자고...
표고버섯농장 운영하며 즐기는 전원생활
영양소가 풍부하고, 항암효과까지 있는 표고버섯은 참나무를 이용하여 자연 속에서 직접 재배할 수 있으며 방법도 비교적 간단합니다. 10년째 표고버섯 농장을 운영하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리을농산의 이명수 대표에게 표고버섯 재배법을 들어봤습니다. |
낮은 산 밑에 28동의 비닐하우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한무더기 쌓인 참나무 더미가 눈에 들어오고, 나무의 향긋한 향이 풍깁니다. 충주시 노은면 법동리에 위치한 리을농산의 풍경입니다.
군 생활 접고 표고버섯 농장 운영
리을농산을 운영하는 이명수씨는 전직 군인입니다. 96년 친구의 권유로 표고농장 사업을 처음 알게 되었고, 사업 아이템으로 괜찮다고 판단하여 표고농사에 뛰어들었습니다.
96년이면 우리나라에 표고농가가 한참 성장하던 시기입니다. 단순히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이라기보다는 체계적으로 표고를 생산해낼 수 있는 산업화된 시설을 갖추면 승산이 있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 접근한 것이 톱밥으로 재배하는 표고버섯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일반화된 기술이지만, 당시만 해도 톱밥 재배는 개발된지 얼마 안 된 신기술이었습니다. 연중생산이 가능하고, 회전이 빠르므로 생산량이 많은 것이 장점이지만 대신 톱밥을 생산하는 기계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배양실 등의 기반 시설 투자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현재는 톱밥재배와 원목재배를 반반씩 나누어서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원목재배 표고버섯의 수요가 더 높을뿐더러, 표고버섯은 건조 상태로 많이 유통되는데 건표고의 경우 원목재배를 한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톱밥재배보다는 원목재배가 수분 함량이 적어 말린 후 중량이 더 많습니다.
요즘에는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표고버섯의 수요도 늘었습니다. 표고버섯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약용의 개념으로도 쓰입니다.
전원생활에 알맞은 표고버섯 재배
표고버섯 농장을 하려면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표고버섯이 자라기까지 2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투자비에 대한 회수 기간이 깁니다. 또 원목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명수씨는 표고버섯이 노후에 소득사업으로 선택하기에 썩 좋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원생활을 하면서 텃밭처럼 조금씩 재배하기에는 표고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버섯 중에 전원생활을 하면서 기르기 좋은 것이 나무를 이용하여 재배되는 품종입니다.
그 중 제일 대표적이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표고입니다.
느타리나 새송이 등 버섯 종류는 모두 가능하지만, 자연재배나 시설재배나 한결같은 모양과 맛을 유지하는 것은 표고가 최고입니다. 또한 느타리버섯 같은 경우 재배하는 원목의 수명이 1회에 국한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병을 이용한 경우(이때도 생산성과 회전율을 고려)고 나무에 접종할 경우는 수년동안 수확가능합니다.
표고버섯은 한번 종균을 집어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포자를 뿌려 접종한 균이 나무에 배양되는 정도에 따라 잡균의 피해가 없다면 몇년(3~7)동안 수확합니다. 그 나무에서 10번 정도 다시 채취할 수 있습니다.
표고버섯은 참나무(상수리,신갈,갈참,굴참,졸참나무)가 최적이고 서어나무,밤나무,자작나무,오리나무등이 사용 가능하고, 자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취미 삼아 하기에는 오히려 좋습니다.
전원생활을 하다보면 참나무 벌목하는 것을 접할 기회가 많고, 또 표고 재배에는 시설이 필요 없고 손이 별로 안 가므로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수씨는 표고농사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맞는 농사라고 합니다. 한번 씨를 뿌려놓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안달하지 않는 사람, 몇 개월이고 배양 과정 중에 눈으로 보이는 소득이 없어도 꾸준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맞는 농사입니다.
이명수씨는 표고버섯 농장을 운영하며 생표고와 건표고 외에도 표고버섯을 직접 재배하기 위한 원목, 종균 등을 따로 판매하고, 가족 단위나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표고버섯 재배 강의도 열고 있습니다. 표고버섯 키우는 것을 체험해본 다음은 직접 종균한 나무를 가져가서 버섯이 나오는 것을 볼 수도 있어 호응이 높습니다.
표고버섯을 직접 재배하여 먹으면 전원생활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키우는 법이 비교적 간단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리을농산(www.mushrae.com, 043-853-6999)
오랜 방황 끝에 자연휴양림에 정착해
도시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늘 떠돌기만 하던 남자는 아내의 고향인 금강산 자락으로 들어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자연휴양림 안 계곡 옆에 집을 짓고 약초 연구를 하며 건강도 되찾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
그런 방황의 세월 속에서 나이는 이미 중년을 훨씬 넘기고 정신과 몸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갔습니다. 정신이 무거우니 몸도 무거웠습니다. 내려놓고 싶은데 내려놓을 곳도 없었고 내려놓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늘 산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만 하였고 지리산 자락 어디쯤 산청이나 하동 등지를 돌며 정착할 곳을 찾았지만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마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시장도 겨우 다녀올 정도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조금만 걸으면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도시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힘들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가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는 어차피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할 거라면 고향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남자와 결혼해 25년간 살던 부산을 떠나 남편과 함께 고향인 강원도 인제로 오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함께 자란 고향친구들과의 만남도 좋았고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살며 건강을 되찾을 수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자연휴양림 안 사유지 매입해 지은 집
백담사와 황태로 유명해진 고장인 인제 용대리는 설악산 미시령과 진부령 고개가 시작되는 마을입니다. 넘어 가는 산은 설악산이지만 마을이 터를 내리고 있는 산은 금강산입니다.
금강산 자락에 용대자연휴양림이 있고 휴양림 안쪽에 연화동 계곡이 있습니다. 계곡 안 풍경은 바깥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볼품없이 앙상한 산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계곡을 따라 난 길엔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별천지였습니다.
부산에서 살던 권세우 오형자씨 부부가 이곳에 집을 지은 것은 2년 전입니다. 4년 전에 인제로 이사를 한 후 셋방살이를 하며 2년 만에 발견한 곳이 바로 용대자연휴양림 안쪽 연화동계곡이었고 터를 만난 후 1년에 걸쳐 집을 지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사는 집의 이름은 권가락지(權家樂地) 입니다.
남편의 성을 따서 권씨 가문의 낙원 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속내가 있는데 가운데 글자 가락 은 범어에서 물고기를 뜻합니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잔다하여 불교에서 밤낮없이 정진하며 항상 깨어있다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결국 권가락지 는 권씨가 항상 깨어있는 땅 이란 철학적 의미도 됩니다. 주인이 무엇인가에 정진하며 항상 깨어있는 기도도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 권세우씨는 항상 공부를 하며 이곳서 살고 있습니다. 독학으로 전통민약연구와 한글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공부한 덕분에 산야초와 경락에 대해서는 수준급입니다.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공부지만 전문가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줄 정도는 되었습니다. 민박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집은 통나무와 황토를 소재로 하여 지었습니다. 2년간 살며 지역적인 특성과 자연환경 등을 공부하고 연구해 가족들이 직접 지은 집입니다. 세련되고 화려한 전원주택은 아니지만 가족의 손때가 묻은 집입니다. 단층집으로 다락을 포함하면 약 40여 평됩니다.
집은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용대자연휴양림 내에 있어 관리사무소를 지나야 갈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자연휴양림 안의 사유지에 집을 짓다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우스개 소리로 "산림청에서 집을 관리해준다"고 하지만 공사과정에서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원래는 길이 없어 집을 지을 수 없는 땅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길을 낼 수 있게 되는 행운도 잡았습니다. 길을 만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주택이었고 지역 주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 집이 없어 자신의 땅에 집을 짓겠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어 자연휴양림 안에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기둥은 큰 잣나무와 낙엽송으로 하고 벽은 황토로 했습니다. 나무로 골격을 잡고 그 사이에 황토벽돌을 쌓았으며, 벽돌 사이 미장을 기존의 황토미장과 달리 미색 계통으로 했습니다. 내부는 거실과 주방, 3개의 방과 침실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또한 2층은 다락방으로 만들었는데 공간이 하나 더 생기는 것도 좋지만 추운 지방이라 지붕이 겹집이 되어 보온의 역할도 합니다. 아들 둘은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KAIST 대학원생으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한국농업전문학교에 다니며 장차 버섯을 재배, 판매하는 벤처사업가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아들들도 부모님들이 살고 있는 이곳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공부를 마치면 함께 자연을 가꾸며 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도시생활을 털고 이곳으로 들어올 때 스스럼없이 받아준 것도 이곳 자연이었고, 이들 가족이 이곳 자연에 얹혀살며 얻는 것, 얻고 있는 것들은 너무 많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들의 삶이었습니다.
특히 도시에서 많이 해쳤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값진 삶입니다.
3대가 쉬어갈 수 있는 펜션을 꿈꾸며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퇴직금 중간정산으로 마련해 둔 땅이 있었기에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가족 3대가 찾아와 쉬었다 갈 수 있는 펜션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홍종욱씨의 집짓는 이야기입니다. |
문막에서 오크밸리로 가는 중간쯤에 간현유원지를 만나게 되는데 경관이 수려합니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한수를 돌아드니 섬강이 어디메뇨 치악이 여기로다 라며 섬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바로 그곳입니다.
간현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도가 있어 열차가 다니며 색다른 운치를 자아냅니다. 지금은 청량리와 원주를 잇는 전철공사가 한창이기도 합니다.
행정구역은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인데 개발로 인해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곳입니다. 원주 기업도시 부지로 지정면이 확정되었고 오크밸리 스키장이 개발되면서 조용했던 시골마을도 투기 열풍이 지나갔습니다. 스키장 주변의 도로변은 평당 100만원 이상을 호가하고 있으며 인근 지역들도 30만원은 넘습니다.
홍종욱씨가 이곳에 땅을 구입한 것은 개발 소문이 돌기 전, 투기 열풍이 불기 이전입니다. 서울의 종합병원에 근무하며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아 여유돈이 생기면서 조용한 시골에 집 짓고 노후생활을 하자며 1천600평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땅을 요긴하게 쓸 기회가 왔습니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쉬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다 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 둘 수 있는 힘은 바로 퇴직금 중간정산으로 마련했던 이곳 땅이었습니다. 간현유원지 바로 옆이며 오크밸리 스키장 입구로 펜션으로서의 입지가 매우 좋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은 집이 바로 펜션 지인 입니다.
펜션으로 지정이 가능한 면적으로 하다보니 총 45평 규모의 집이지만 2채로 하여 실제 평수보다 훨씬 커보이게 지었습니다. 집을 짓기 전에 우선 한 일은 공부였습니다. 인터넷사이트와 잡지 등 관련 서적, 집짓기 교육 등을 통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덕분에 설계를 직접 하였고 직영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통나무주택으로 계획을 했으나 준비과정에서 목조주택으로 변경했습니다. 구조는 2×4인치, 2×6인치 목재로 하였고 전체적으로 통나무 느낌이 날 수 있도록 베벨(목재) 사이딩으로 마감했습니다. 지붕 각도는 한옥 선을 본 따 경사도를 줄였고 실내 디자인과 공간 구성, 인테리어 등은 아내의 의견을 많이 따랐습니다.
아직 서울에 살며 직장에 나가고 있는 아내는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 집을 가꾸고 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고생하는 것이 애처롭기도 하지만 노후의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생각에 부부는 힘든 줄 모르고 있습니다.
홍종욱씨는 이 집을 지으면서 자연을 잠시 빌리는 것이란 생각으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최대한 어우러질 수 있는 집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직영으로 목수 등 기술자들과 일을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최대한 그들 의견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목수들은 이 집을 지으면서 주인보다 많은 애착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집에는 일반적인 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1층 화장실 뒤쪽으로 계단을 만들어 진입할 수 있도록 하여 2층 다락방의 아늑함과 활용도를 높였고 거실 창문 앞으로 턱을 만들어 경치를 감상하며 가족들이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자재는 고급으로 마감을 했는데 이유는 집이 가치가 있어야 그곳에 사는 사람이 가치있어지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품격도 높아질 것이란 집주인의 생각 때문입니다.
집이 완성된 지 2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아직 조경을 하지 않아 봄이 되면 조경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집주인 홍종욱씨는 서울을 떠나 이곳에 살며 시골에서 또 하나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곳을 단순히 사람들이 하룻밤을 지내고 가는 펜션이 아닌 3대의 가족들이 함께 찾아와 머물렀다 갈 수 있는 가족들의 휴식처로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핵가족 사회에서 3대의 가족이 머물렀다 갈 수 있는 펜션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펜션으로 이룬 전원생활의 꿈
박광남, 송민정씨 부부는 펜션을 통해 전원의 꿈을 이룬 경우입니다. 시골생활이 그리웠지만 시골생활이 처음이고 적적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한 망설임에 용기를 준 것이 바로 펜션입니다. 펜션을 오픈한지 이제 5개월째라고 합니다. |
매일 쓸고 닦는 건 기본예요. 미덥지 못해 남한테 맡기지도 못하고 혼자 다 하는데, 컵이며 수저도 끓는 물에 깨끗이 소독을 해야 마음이 놓여요. 손님들이 좋아하시니 힘든 것도 모르겠어요"
경기도 양평 루스펜션의 안주인 송민정씨는 자신의 깔끔한 성격이 펜션 운영에 제격이라며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루스펜션을 오픈한 지 이제 5개월째. 그동안 가정주부로 살림만하다 보니 천성적으로 깔끔함과 정리정돈이 몸에 배어 펜션 내부 어디에서도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음식 솜씨도 남달라 오는 손님마다 부침을 해서 음료와 함께 내는데, 그 인기가 짱 이랍니다.
이미, 송민정씨의 친절과 음식솜씨에 대한 찬사가 후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며 단박에 인기 펜션으로 부상했습니다.
펜션을 통해 이룬 전원의 꿈
박광남, 송민정씨 부부는 서울 강동구에서 살다 루스펜션을 오픈하며 전원생활을 시작한 경우입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펜션이 목적이었던 게 아니고 전원생활이 목적이었습니다.
전원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많았지만 오래도록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쉽게 용기를 낼 수 없었답니다. 서울 도심에서 살다보니 시골 생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덩그러니 시골집에 있을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던 것이지요.
사람이 일을 해야 건강하고 생활의 리듬도 유지할 수 있는데, 서울 토박이가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어보였답니다. 그러다, 시골 행에 용기를 준 것이 바로 펜션이었습니다.
펜션을 운영하다보면 일도 많아지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펜션은 그렇게, 두 부부의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마음의 확신이 서자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땅은 가끔씩 지나다니며 눈 여겨 보았던 곳이 낙점됐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도장리 바로 지금의 루스펜션 자리입니다.
도장계곡 을 끼고 있고 마당과 맞닿아 앞쪽으로 반딧불이 공원 이 있습니다. 줄곧 살았던 서울 강동권과도 아주 가깝고 가끔 바람 쐬러 지나던 곳이라 낯설지도 않았습니다. 지대가 높아 주변으로 내려다보는 느낌도 남다른 곳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계곡과 공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펜션 운영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문외한에게 닥친 시련, 그리고 기쁨
그렇게 결심이 서고 땅을 구입한 뒤 3년이 지난 2006년 이른 봄, 비로소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건축은 주변에서 소개해 준 분을 통해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녹록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지대가 높고 경사가 제법 있어 집을 짓기 위해선 축대도 쌓고 옹벽도 쳐야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건축업자가 직접 할 수 있다는 말에 축대와 옹벽 공사도 건축업자에게 모두 일임했습니다.
그러나 가볍게 생각했던 축대와 옹벽 치는 일은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2천여만원이면 된다던 공사는 점점 시간이 지나며 몇 곱절로 늘었습니다. 쏟아 부은 흙만도 6백차에 이르렀습니다. 애초 토목이나 축대 전문가들에게 의뢰했어야 했는데 건축업자에게 일임하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고 일은 일대로 어렵게 처리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부동산이나 건축에 문외한이다 보니 마음고생도 컸고, 수업료 치고는 꽤나 부담스런 비용도 지불해야 했습니다. 어렵사리 기반을 다지고서야 설계와 본격적인 건축이 이뤄졌습니다. 설계는 설계사무소에 의뢰해 진행했는데, 건축 유형은 철근콘크리트 주택을 택했습니다.
기존의 목조주택이 예쁘기는 한데 방음도 걱정이 됐고 정서적으로도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 본채엔 살림집과 3개의 객실을, 별채엔 2개의 객실이 들어서도록 설계했습니다.
골조를 철근콘트리트로 하는 대신에 외벽은 예쁜 치장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벽지와 루바로 마감했습니다. 특히 본채 거실을 루바로 마감해 나무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루바로 마감한 것은 아니었고 벽지로 마감한 후, 궁리 끝에 루바로 다시 마감을 한 것입니다. 시간도 비용도 이중으로 들어간 셈이나 해 놓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애초엔 본채 거실에도 다락이 없었지만, 다락 없는 거실을 생각해 보니 너무 휑한 느낌이 들어 건축업자에게 제안해 다락을 뒤늦게 들여놓게 됐다고 합니다. 다락이 들어서자 쓰임새도 많고 거실도 더욱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이 또한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곳곳에 배어있는 송민정씨의 손길
이러한 아이디어는 모두 집안을 정리하고 꾸미는 게 큰 즐거움이었던 송민정씨의 아이디어입니다. 펜션 내부의 가전제품이나 집기류를 최고급으로 선택하고 고급 크리스탈 전등을 잘 활용한 것도 모두 송민정씨의 생각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별채 1층 객실에 있는 흔들의자는 루스펜션의 가장 이색적인 풍경 중 하나이자 가장 인기 있는 곳입니다.
야외용이었던 흔들의자를 소파 대용으로 실내에 두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실내로 들여 놨는데, 그 반응이 가히 폭발적일 정도로 호응이 좋습니다. 일단은 편하고 재미있는 곳이자 필수 기념촬영 장소가 됐습니다. 다른 객실에도 소파 대용으로 이 흔들의자를 놓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객실 벽체의 디자인에도 송민정씨의 감각과 손길이 돋보입니다. 나무로 사각 틀을 짜서 벽체에 부착하고 여러 문양과 색감의 천을 떠 붙였더니 그럴듯한 현대 미술의 한 장르가 형성됐습니다.
패턴의 강렬한 느낌과 원색적인 분위기가 잘 어우러지며 마치 현대 미술관에 발을 들여 놓은 느낌입니다. 크리스탈 전등도 이런 분위기를 부각시키는데 한 몫 거듭니다.
이러한 노력과 감각이 발휘 된지 8개월 만에 건물이 완성됐습니다. 루스펜션 이란 이름표를 달아 지난해 10월 비로소 펜션을 오픈했습니다. 루스펜션을 오픈한 것은 몇 달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3년 전 땅을 사놓고부터 텃밭을 일구며 오갔으니 시골생활로 치면 이미 3년차를 지나 4년차에 접어든 것입니다.
지난 3년간 시골 공부를 많이 했으니 이 곳에서의 생활이 전혀 낯설거나 서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펜션을 다 짓고 나니,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는 게 박광남, 송민정씨 부부의 말입니다. 지금은 아들 내외까지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살겠다며 이 곳에서 생활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제 오픈 5개월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직 손익 계산을 해 보면 분기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욕심 없이 그저 손자 손녀, 아들 딸 같은 사람들이 와서 편하고 즐겁게 쉬다 가는 모습을 보면 그 것이 보람이고 삶의 큰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저는 이 생활이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잘 쉬고 갔다는 장문의 후기를 읽노라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사회생활을 꾸준히 했던 주부라면 오히려 답답해했을지도 모를 텐데, 저는 가정주부로만 지내와 이 생활이 즐겁고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의 활력창구입니다"
펜션과 함께하는 전원생활이 즐겁고 적성에 맞는다는 송민정씨는 봄이 오면 텃밭에서 직접 기른 부추로 맛있는 전을 부칠 터이니 꼭 들리라며 함박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 모습이 오픈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6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이는 박광남씨와 송민정씨 부부의 표정과 생각 속에서 젊어 보이는 비결을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 65세, 64세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련된 퍼머 스타일에 청바지 차림의 아저씨, 주름살을 찾아보기 힘든 단아한 모습의 아주머니.... 젊고 긍정적으로 사는 그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연을 닮아 새도 되고 꽃도 되고
자연에서 자연으로 살다보면 자연이 되는 가 봅니다. 박새며 솔새, 딱새를 손바닥이나 어깨 위로 불러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생화에 빠져 살던 그가 이제 새와 친구가 되어 새처럼 가볍게 전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꽃샘추위의 끝에서 맞는 봄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달콤했습니다. 나뭇가지들은 봄볕에서 푸른빛이 배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쯤 산촌에서는 꽃이 피겠다는 생각에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산촌은 아직 황량한 봄이었습니다. 양지바른 밭에서는 푸릇푸릇 풀들이 더러 머리를 내밀고 있었지만 주변은 여전히 헐벗은 겨울 모습이었습니다.
산촌의 봄은 늘 그렇게 더딥니다. 봄을 찾아 떠난 길에 들른 곳이 황대석씨 댁입니다. 영월의 산동네에 통나무집을 짓고 야생화를 기르며 사는 황대석씨 댁에 가면 이른 야생화라도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주인은 출타 중인지 아무도 없는 집 정원의 연못가에는 버들개지 몇 개가 피어 있었습니다. 돌담장에 기대어서는, 봄을 맞는다는 꽃 영춘화가 눈물만한 꽃 봉우리를 터트렸습니다. 복수초는 이미 잎사귀까지 푸르렀고 보라색 동강할미꽃 한 무더기 소담스러웠습니다.
그곳에서 이른 봄을 찾고 있는데 박새와 딱새들이 어깨에도 오르고 손에도 날아듭니다. 솔새도 앞에서 길을 막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새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함께 꽃을 보고 같이 봄을 찾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겁 없는 녀석들이란 생각으로 신기해하고 있는데 출타했던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거실로 들어가 땅콩 한 움큼을 들고 나옵니다.
"모이를 주지 않으면 저 녀석 성화에 배겨날 수 없어요."
새 모이를 주다가 어느새 새들과 친해지게 되었다는 사연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새들은 사람만 오면 겁 없이 모이 달라며 달려든다는 거였습니다. 땅콩을 손바닥에 놓자 새들이 손바닥에 앉아 땅콩을 쪼아 먹기도 하고 한 알씩 물고 날아가기도 합니다. 더러 겁 많은 놈들은 주변을 빙빙 돌다 제 동료들의 그런 모습을 몇 번 지켜보다 용기를 내 손바닥으로 내려옵니다.
전원생활을 시작하고 난 후 10여년을 야생화에 뻐져 살던 황대석씨가 요즘은 그렇게 새들과 친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집 주변에 있는 박새와 딱새들에게 모이를 주자 이 녀석들은 아예 황대석씨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어깨에도 날아오르고 손도 쪼아댑니다. 거실로 들어오면 문밖에서 조잘대며 주인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면 자연은 스스로 닮게 되는가 봅니다. 스스로 야생화가 되고 박새가 되고 딱새도 됩니다. 그래야 자연과 친구가 된다는 말이 진정 어울립니다. 그것이 전원생활을 하는 참맛이라며 웃는 황대석씨의 표정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황대석씨는 자연에서 살며 스스로 자연이 되고 나니 마음은 때론 야생화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새처럼 가볍다고 말합니다.
전원주택 계획세울 때 가장 행복했어요"
남이섬에서 북한강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금대리가 되는데 이곳에 북한강변을 정원삼아 펼쳐진 전원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이목희, 주금숙 부부를 찾았습니다. |
이목희, 주금숙 부부는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다 북한강변에 펜션을 짓고 전원생활을 시작한지 5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남편인 이목희씨는 17년의 회사생활과 5년의 개인사업을 했습니다. 광고 관련 사업을 하다보니 특히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찌들었던 도시생활에 벗어나 이제는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전원생활을 하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부인인 주금숙씨도 적극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오히려 부인이 더 좋아 했습니다. 5년간 차근차근 준비를 했습니다.
우선 땅부터 찾아나섰습니다. 강원도는 너무 멀 것 같아 서울서 거리가 가까운 경춘국도 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북한강변의 ING전원마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리상 서울에서 한 시간 반이면 도착을 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전원마을 단지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지가는 높지만 대지공사를 완료해 놓아 제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어 신경 쓸 일이 줄어들어 만족했습니다.
당시 평당 가격으로 75만원에 300여 평을 매입 했습니다. 지금은 땅값도 거의 배로 올랐습니다.
땅 사놓고 누가 땅 퍼가지 않을까 걱정
부지 정면으로 북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근처에는 유명한 남이섬 관광지도 있어 펜션을 하기에는 꽤나 좋은 위치였습니다. 자연히 전원생활을 하며 펜션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설계와 건축을 했습니다. 설계만 2년을 고심할 만큼 정성을 쏟았습니다.
다른 집과의 차별성을 위해 모양을 특이하게 하고 펜션으로 사용할 객실은 독립적인 공간배치에 신경을 썼습니다. 크게 건물을 짓고 벽으로 객실을 나눈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독채로 객실을 배치했습니다. 출입구도 각각 입니다.
이들 부부는 "지금까지의 전원생활 중 집을 지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을 합니다.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집을 지어 나갈까? 어떤 집을 지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들떴습니다.
처음 땅을 사 놓고는 누가 땅을 퍼가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했을 정도로 그 기대가 컸습니다. 종종 건축업자를 잘못 만나 고생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초보자의 눈으로 봐도 정말 내 집처럼 꼼꼼히 시공하는 목수들을 보고 안심을 하였습니다. 주위의 다른 현장에 있던 목수들이 와서도 감탄을 할 정도였습니다.
핀란드산 홍송을 사용하여 내부를 마감해 아직도 은은히 나무 내음이 배어 나왔습니다. 친 환경적인 소재를 사용하기 위해 돈도 많이 들었지만 만족감은 정말 큽니다. 130여 평의 건축비가 집기류를 제외하고 평당 500만원 정도 들었습니다.
이목희씨는 만성적인 알레르기, 재채기, 비염이 있었지만 이곳에 온 후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왜 사람들이 병 고치러 시골로 가는지 조금이나마 느꼈습니다.
서울에서는 걸레질을 하면 까만 먼지가 수북이 나오지만 이곳은 몇 일만에 걸레질을 해도 그런 것이 안 보입니다.
요즘 이 부부는 주위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아졌습니다. 친구들 중 전원생활 1호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전원생활을 시작하다보니 너도나도 이곳에 오겠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자기네들끼리 "거기로 갈까?"하면 이곳으로 오는 날입니다. 무작정 가도 반겨주는 부부가 있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와서 보고는 나도 전원생활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친구들에게 전원생활의 전도자가 된 셈입니다. 목적지가 없어 나오기 힘들었던 친구들에게 하나의 목적지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이들 부부는 참 뿌듯하게 여깁니다.
과장되지 않는 솔직함으로 펜션 운영
텃밭에서 무공해 채소를 가꾸어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 중에 하나입니다. "흙에 산다는 느낌! 사람이 흙을 밟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았어요."
부인 주금숙씨의 말입니다.
"정원을 가꾸고 잔디를 가꾸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부지런하게 일하다 보니 지루한 전원생활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한 여름에 잔디를 깎다 보면 뒤쪽으로 엊그제 깎은 자리는 다시 자라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시골살이가 만만치 않지만 자연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들 부부가 살고 있는 전원마을에는 펜션을 지어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저절로 펜션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여러 펜션이 모여 있으니까 좋은 점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홈페이지를 만든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홍보를 한 적이 없습니다. 다녀간 사람들이 인터넷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과 사진을 보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름 휴가철과 연말에 그리고 주말에는 꾸준히 손님들이 있습니다.
펜션 운영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이들 부부는 과장되지 않은 솔직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입니다.
홈페이지 사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부러 방이 크게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 올려놓지 않고 실제 봤을 때 사진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대로 보여 줍니다. 실망감이 들어 기분 상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목희씨는 홈페이지를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참 즐겁다고 합니다. 이곳에 오려고 길게는 몇 달 전부터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여러 가지 문의를 하며 기대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답글을 쓰면서 재미도 느끼고, 펜션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손님들을 직접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기다려지기도 하는 것이 펜션지기의 재미라고 말합니다.
펜션지기와 소주 한잔을 나누며 진솔한 대화의 장을 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주길 바라며 펜션이 단순히 잠만 자고 가는 곳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만남의 장소로 만들어 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1층은 펜션 2층은 주택으로 시작한 전원생활
인생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늘 사고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 건강을 많이 해쳐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울산에 살다 강원도로 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
1층은 펜션 2층은 살림집으로 사용
이 부부는 울산에서 이곳으로 작년도에 이사를 왔습니다. 남편인 이성재씨가 태어난 고향은 충청도입니다. 학창시절을 강원도 원주에서 보냈습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안 있어 직장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울산으로 옮겨 줄곧 그곳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에서 28년을 근무하고 정년을 맞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으로 왔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공기 좋은 전원주택지를 찾아 처음엔 지리산 자락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터를 찾았습니다. 산청, 하동, 구례 등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은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딱히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들면 살 수가 없는 땅이거나 국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어 개발이 힘들어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영월에 동강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딱 이곳이다 하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습니다. 서둘러 계약을 했습니다.
자식들은 몸이 좋지 않은 부모님들이 병원도 먼 시골로 간다니 걱정이 많았습니다. 도로 상황이 좋아 병원까지 4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라 안심할 수 있겠다 싶어 두 분의 전원생활을 응원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이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겠다는 자식도 있습니다. 공기 좋은 곳에 살면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전원생활을 시작 했지만 그냥 덩그러니 집 한 채 짓고 살기에는 시골은 심심한 곳입니다.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소소한 일거리도 있는 펜션을 같이 하기로 하고 집을 지었습니다. 설계를 할 때는 평소 책을 통해 보았던 부분들을 토대로 부부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습니다.
집을 지으면서도 여러 번 설계를 바꾸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짓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공사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민원이 들어가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무리 없이 집은 만들어 졌습니다. 집은 1층 40평을 펜션으로 쓰기로 하고 2층은 살림집을 30평으로 지었습니다.
죽을 고비 넘기며 부부 금슬은 깊어져
이성재씨는 인생에서 참으로 여러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결혼을 한 것입니다. 결혼 전까지는 거칠고 와일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대도 해병대를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런 성격들은 누그러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회사에서 일하던 중에 화재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상태는 무척 심각해 생명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전신의 95%가 화상을 입었고 4달여간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병원에서는 치료가 힘들다며 부인 최준자씨에게 다른 병원을 가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옮겨간 병원에서 2년이 넘게 입원을 하며 치료를 받았고 차츰 몸 상태도 나아져 갔습니다. 그 동안 부인의 지극한 간호와 고생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완치가 되었지만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 번째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이성재씨의 신장이 양쪽 모두 기능이 멈춰 혈액 투석을 해야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이때 부인은 자신의 신장 한쪽을 남편에게 이식했습니다.
부부간에는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조직의 일치율이 낮은 편인데 부부는 거의 100%에 가까웠습니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했습니다. 벌써 6년도 넘은 일입니다. 이때만 해도 부부간에 신장이식을 한다는 것은 꽤 드문 일이었기에 그 당시 매스컴에 보도될 만큼 주위의 관심이 컸습니다.
신장을 이식하면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몸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무리한 운동도 삼가야 하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부부 모두 무리한 일은 자제하고 몸 관리에 늘 신경을 씁니다. 또 다른 사건도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자재를 구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사고가 나 2달 가까이 입원을 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집짓기를 시작하는 당일 교통사고가 나 그 차를 폐차 시킨 일까지 한사람이 겪었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부부가 함께 했기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금슬이 전원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과 눈 오는 풍경의 아름다움
울산에 살 때는 밤하늘에 별 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공업시설들이 많다보니 공기가 탁해 별을 본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살았습니다. 이곳에 온 후에는 마음껏 자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 동안 거처가 없어 고생스러울 때 옆에 먼저 와 살던 이웃의 도움으로 몽골텐트를 빌려 3개월 정도 살았습니다.
그 텐트의 좋은 점이 천장에 창이 있어 누워서도 밤하늘에 별을 실컷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여름의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에 빠져들 만큼 한마디로 기막히게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손주들이 놀러 와서는 "누가 하늘에 불을 켜놨냐?"고 해 배꼽을 잡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건너편 장군바위에서는 밤마다 부엉이가 울어 시골 분위기를 한껏 내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눈 많이 오는 강원도에 오니 울산에선 몇 년에 한번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오는 눈을 시도 때도 없이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울산에선 실제로 유치원 꼬마아이가 눈을 한번도 못 봤다고 할 만큼 눈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 겨울 집안 거실에 앉아서 함박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하다가는 사진을 많이 찍어 남겨 두었습니다. 봄이 되면 근처 빈 땅은 텃밭으로 가꾸어 채소를 심어 먹으려고 합니다.
주인이 있는 땅이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못해 빌려달란 말도 못하고 우선 땅부터 갈아 놓았습니다. 설마 심어놓은 채소를 뺏어가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입니다. 설사 다 내놓으라고 해도 미련 없이 줄 생각입니다. 이럴 땐 부지가 작아 텃밭을 따로 만들지 못한 게 조금 아쉽습니다.
1층을 펜션으로 쓰고 있지만 손님을 많이 받아 돈을 벌 목적이 아닙니다. 적당한 노동을 운동 삼아 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또 방이 여러 개 있으면 손님이 와도 부담 없고 친구들도 초대해 만날 수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집을 완공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벌써 다녀간 친구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집들이를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엊그제는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친구들이 단체로 다녀갔습니다. 부인 최준자씨의 친구들인데 밤늦게 도착해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경치를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정면에 보이는 장군바위와 기암괴석, 바위 틈새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보고도 믿기지 않을 경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생활이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이 곳을 바라보면 흐뭇함에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이들 부부에게 전원생활은 큰 축복이고 시골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정년퇴직 후 펜션으로 제2의 인생을
강화도 황청포구 쪽에 들꽃이 있는 바다 펜션이 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붉은 노을이 한가득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의 주인은 인천에서 살다 정년퇴직을 하고 강화도로 이사 온 김성수 최정숙씨 부부입니다. 펜션을 지어 운영을 시작한지 이제 6개월째라고 합니다. |
정년퇴직은 가까워 오고, 집안에서 우두커니 둘이 있을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서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골 가서 텃밭 가꾸며 살 계획을 세웠던 거예요. 근데, 와서 보니까 주변에 펜션도 많고 다 잘 되는 것 같더라구요"
강화 들꽃이 있는 바다 펜션의 최정숙씨는 애초부터 펜션을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면서 노후를 보낼 생각으로 왔는데, 주변에 펜션이 많은 것을 보고 뒤늦게 펜션을 시작한 경우입니다. 지난해 9월부터 운영을 했으니 이제 6개월 쯤 됐습니다.
들꽃이 있는 바다 펜션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 있습니다. 서울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를 가로질러 그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데 입지조건이 훌륭합니다. 황청포구를 앞에 두고 그 너머로 강화 앞바다와 석모도가 훤히 내려 보이는 높직이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막상, 펜션을 시작해 놓고 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점도 많고, 나름대로 재미있는 점도 많다고 합니다. 주말은 빈방이 없을 만큼 거의 차는 편이고 주중에는 거의 비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애초 큰 돈 벌겠다고 시작한 게 아닌 만큼 수익에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주중까지 손님이 찬다면 힘에 부쳐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보람이라면, 잘 쉬고 가는 모습을 보면 모두가 아들, 딸 같고 손자 손녀 같답니다. 하룻밤의 정성으로 편안하게 쉬고 밝게 웃으며 떠나는 가족들을 보면 흡족하고 모두가 내 새끼 같은 정겨운 생각이 든답니다.
정년퇴직과 함께 시작된 전원의 꿈
김성수, 최정숙씨 부부가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0년 무렵이었습니다. 인천제철(지금의 현대제철)에 다니는 남편 김성수씨의 정년퇴직이 가까워오면서부터입니다. 퇴직 후 부부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서더랍니다.
뭔가 일 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먼저 떠 오른 것이 전원생활이었습니다. 도심보다는 시골에서 조금씩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면 무료함도 없고 건강에도 좋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바쁘고 급하게 살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좀 더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최정숙씨는 당연했고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대체로 전원생활 여부를 남편 쪽에서 결정하고 아내 쪽에서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김성수씨 댁의 경우는 아내 최정숙씨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아내 최정숙씨는 텃밭 가꾸는데 취미가 있어 인천 단독주택에 살 때도 텃밭에 온갖 푸성귀를 키웠습니다. 더구나 경기도 안성이 고향이어서 어려서 줄곧 농촌생활을 해왔던 터라 농촌의 문화나 생활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후, 부부가 의기투합하여 주말이면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인천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강화에서 당진까지 서해안선을 따라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인천에서 오래 살았었고, 아들 내외도 인천에 거주하고 있어 심리적으로 인천과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만난 땅이 지금의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펜션 자리입니다. 우연히 이 곳까지 오게 됐는데 바로 앞에 바다가 있고 높직한 곳에 자리 잡아 전망도 매우 좋았습니다. 특히, 저녁 무렵의 환상적인 노을은 억만금을 주어도 얻지 못할 특별한 자연의 조화였습니다. 단박에 바로 이 곳 이라는 확신에 매입을 결심했습니다.
땅 주인을 만나 매입 의사를 밝히고 그 다음날 계약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음날 계약하기로 한 중개사무소에 갔더니 땅주인이 나오질 않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전화통을 붙잡고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땅주인이 나왔습니다. 결국 애초 가격에 5백만원을 더 얹어 주는 것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땅을 보고 너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니 집주인이 욕심이 좀 났고, 배짱 한번 부려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땅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너무 좋아라 내색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펜션이 가져다 준 특별한 행복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게 2002년쯤이니 그 사이 한 2년정도 땅을 보러 다녔던 셈입니다. 계약을 하고 나니 주변을 보는 느낌이 또 달라집니다. 처음엔 전원주택을 지을 생각이었는데, 주변에 들어선 펜션이 차츰 눈에 들어오고 자연히 관심도 갖게 됩니다.
그 후, 김성수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인천집도 정리하면서 2006년 초 본격적인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계획도 바뀌어 전원주택 대신 펜션을 짓기로 했습니다. 이 일대가 관광지인데다 주변으로 펜션도 많고 운영도 잘 되는 편인 것 같았습니다. 펜션을 운영하다보면 수입도 생기고 무료함이나 적적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건축은 건축회사에 맡기지 않고 직접 짓기로 했습니다. 시일에 쫓겨 빨리 집을 지어야할 이유가 없었던 만큼 즐겁게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공정별로 맡길 것은 맡기고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설계사무소에 땅의 인허가 문제와 건축물의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설계가 끝나자 주변에서 소개해 준 골조(철근콘크리트) 업체에 의뢰해 설계도대로 골조와 벽체를 완성했습니다.
예쁜 목조주택도 좋지만 바닷가여서 수선하는데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유형을 고려해 철근콘크리트 주택을 택했습니다. 이어 지붕은 지붕 얹는 회사를 불러 지붕 공사를 마쳤습니다.
건물의 내부는 벽지, 외부는 하디사이딩인데 이 공정은 사람을 사서 직접 진행했습니다. 데크 공사 역시 손수 자재를 구입해 인부를 불러 직접 시공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조금씩 건물이 모양을 갖춰나가는 게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모든 공정을 손수 진두지휘해 짓다보니 성취감도 남달랐습니다. 건물은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제법 모양새를 갖췄습니다. 여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인 9월 중순쯤엔 비로소 손님을 받아도 될 만큼 1층 단체실을 제외하고 6개의 룸의 완성됐습니다.
내외부 마감이 끝나고 객실에 집기류를 배치하면서 이내 영업도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주말이면 손님들이 그냥 찾아와 묵기도 하고, 이웃 펜션에서 소개를 해 줘서 오는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펜션을 오픈하고 영업을 시작한지 이제 6개월여가 지났습니다. 개별 룸은 모두 완성돼 운영을 하고 있지만 단체실은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손님이 없는 주중에 남편 김성수씨가 손수 내부 마감공사를 진행 하고 있습니다. 언제 완성될지 기약은 없지만 이 과정 또한 김성수씨에겐 특별한 경험이자 즐거운 소일거리입니다.
그 사이 홈페이지도 생기고 제법 홍보도 하면서 주말이면 빈방이 없을 만큼 안정적인 운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김성수 최정숙씨의 전원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앞마당이 다 내 텃밭이고 매일 저녁 환상적인 노을이 마당 앞을 한가득 메웁니다. 주말이면, 찾아오는 아들 딸 같은 손님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보냅니다.
뭘 더 바랄게 있겠냐 는 김성수 최정숙씨 부부의 표정에 노년의 여유와 즐거움이 마당의 노을만큼 가득합니다.
직접 설계하는 집, 아쉬움도 많이 남아
홍천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춘천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팔봉산 유원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옵니다. 이 길을 따라 노일강변 펜션마을에 다다르면 이은흥, 이정희씨가 사는 집이 있습니다. 맑고 깨끗한 홍천강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높직한 언덕에 자리 잡은 펜션 라스뗄라는 이태리어로 별이라는 뜻입니다. |
직접 설계하다보니 아쉬움이 더 남아
이은흥씨는 홍천강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깨끗한 강이라고 말합니다. 주변에 오염원이 거의 없고 수량도 많아 푸른 물속이 깊이가 가늠이 안 됩니다. 강이 바라보이는 깨끗하고 조용한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좋아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강을 바라보면 아무 생각이 없이 차분한 마음이 들고 평화로워 집니다.
서울과 춘천에서 살다 3년 전 이곳 부지 2천 평을 구입했습니다. 전원주택 부지로 매우 큰 평수지만 펜션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하다보니 주택 이외에 시설들이 필요해 면적이 넓어졌습니다. 건축 관련 설계 일을 했던 남편이 직접 계획을 세워 건물을 5동으로 나누고 펜션을 구상했습니다.
남편 이은흥씨는 설계를 직접 했습니다. 직접 하다보니 생긴 문제는 작은 부분까지 잘 하려는 마음에 정작 큰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남들이 의뢰해 맡겨오는 설계도는 척척 그려내던 이은흥씨는 설계를 하면 할수록 힘이 들었습니다.
설계는 수차례 변경을 했습니다. 자신의 집이라는 생각에 객관성을 잃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어느 한 방향으로 생각이 치우치게 되면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설계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중이 제머리 못 깍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듯 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잘 했다고 하지만 완벽하길 바랬던
이은홍씨에게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주위에서 건축 관련 일을 문의해 오면 상담을 해줄 만큼 지식이 많았지만 그게 설계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자신의 집을 설계하게 된다면 기필코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다고 합니다.
집을 방문하는 주변 분들에게 집을 이렇게 지으라고 조언을 해주면 이은흥씨에게 오히려 "그럼 당신은 왜 이렇게 안 지었냐"고 되묻는 분들이 있어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구두방 사장 마누라가 구두가 없고, 대장간에 부엌칼 없다"고 하며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꽃 피는 5월을 기다리는 정원
아쉬움을 남긴 설계였지만 집이 지어졌습니다. 펜션 건물 5채가 널찍하게 가로로 강을 향해 배열되어 있고, 갖가지 꽃나무, 과실수와 넓은 잔디밭이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앞 데크에는 야외 풀장이 마련되어 있어 있는데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펜션은 전부 15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는데, 방 이름을 별자리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12별자리와 7자매별자리, 견우와 직녀성 이렇게 15가지 입니다.
이제 5월이 되면 직접 가꾼 정원이 1년 중 가장 아름다워 집니다. 장미, 야생화, 배나무, 사과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등 그 종류도 다양하게 꽃을 피웁니다. 각각 피어있는 기간은 다르지만 이때가 1년 중 가장 예뻐 손님들도 많이 찾아옵니다. 조팝나무 꽃도 활짝 피면 어느 꽃 보다 예쁘다며 남편 이은흥씨는 말합니다. 특히 가을에 조팝나무 잎에 단풍이 들면 참 예쁘다고 합니다.
넓은 집을 관리하다 보면 힘에 부쳐 사람을 쓰고 싶은데도, 한적한 시골에서 일손을 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는데, 엊그제도 잔디밭에 마사를 뿌리느라 3일을 꼬박 일했다고 합니다. 나무를 전지를 하더라도 일을 하다보면 하루해가 금방 지나갑니다.
펜션을 하다보니 시간적 여유는 없지만 재미있고 즐겁게 생활하니 좋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가꿔나가는 과정이 보람이 있고, 해놓고 보면 큰 즐거움입니다. 집안 여기저기 손때 묻지 않은 곳이 없고 땀이 배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여행하는 모습 보면 부러워
펜션을 하다보니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지 만남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 중에 특히나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젊은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들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이은흥씨는 효도가 별거 아니라고 말 합니다. 가끔 3대가 같이 오는 분들도 있는데, 이렇게 "가족이 같이 어울려 지내는 게 효도가 아닐까"라고 말합니다. 부부 모두 막내라 이미 부모님들이 모두 고인이 되어 더 이상 뵐 수 없어 이런 가족들을 만나면 가슴이 찡 하면서, 같이 모시고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맘이 절로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손님들 중 열에 아홉 이상은 친정 부모님이라고 합니다.
오시는 모든 손님들에게는 아침식사를 서비스로 제공합니다. 직접 지은 농산물로 반찬을 만들어 내는데, 밑반찬이 7~8가지나 되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농사일이 힘은 들지만 한 뼘씩 자라는 모습이 새롭고 재미있습니다. 어느 해 취미삼아 농사일을 배우는 차원에서 방울토마토를 길러 먹었는데 20포기를 심어서 손님들과 함께 실컷 먹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욕심이 생겨 70포기를 심었는데 직접 따 먹기도 하고 오시는 손님들에게 마음껏 따 먹으라고 해도 남아서 처치 곤란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더구나 한번 풀이 나기 시작하니 손으로 뽑아주는데도 한계가 있어 관리하기도 힘들고 고생을 했습니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시골서 욕심 내지 않고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크는 아이 보면 흐뭇
이들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큰 딸은 대학교에 다녀 같이 살지는 않지만, 막내인 연수는 이곳 노일분교 5학년입니다. 춘천에서 2학년 때 전학을 왔습니다. 춘천에선 가장 학생수가 많던 학교를 다녔지만, 지금 다니는 노일분교는 전교생이 9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4학년부터는 언니 오빠들이 졸업을 하면서 급기야 최고 학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전학을 올 때 적응을 잘 할지 부부는 걱정이 많았었는데 그런 걱정은 지금은 싹 사라졌습니다. 잘 적응해 지내는 딸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더 어른스러워진 듯 합니다. 비록 수학이나 영어 성적은 시내 아이들보다 부족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인생에서 배울 많은 것들에 비하면 작은 일부분이라고 부부는 생각합니다. 이곳 시골생활이 올바른 인성을 형성하고 감성을 키우는 데는 더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더욱 호기심과 탐구욕을 자극합니다. 연수는 길을 가다 모르는 식물이 나오면 직접 식물도감에서 찾아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고양이 키우는 방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부부는 답을 가르쳐 주기보다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교육적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인가는 죽어있는 까치를 주워 와서는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은흥씨는 예전 춘천에 거주할 때부터 마라톤을 취미로 하며 평소에 연습을 꾸준히 했습니다. 봄부터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연습을 해서 가을쯤엔 꼭 풀코스에 도전을 했습니다. 1년이면 10번 이상씩 마라톤 대회에 출전을 했습니다. 풀코스 출전 성적을 보면 3시간 30분대에 골인을 한다고 하니 아마추어로선 대단한 성적입니다. 2만명이 뛰면 그중 1000등 안에는 들 만한 성적입니다.
예전에는 등산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해 전국을 안 가본 곳 없이 많이 다녀보았습니다. 이곳에 온 후로 펜션 일이 바빠서인지 아직 특별하게 하는 것은 없지만 다시 마라톤 연습을 할 예정입니다. 적당한 취미 생활은 전원생활에 더욱 활력을 줍니다.
봉사활동으로 더 보람 있는 전원생활
경기도 양평군 어느 조그만 계곡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넓은 집이 있습니다. 한여름 밤에도 추워서 창문을 꼭꼭 닫고 자야하는 양평 청운면 갈운리. 이계업, 서일순씨 댁을 찾아 시골살이를 즐기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
전라도가 고향이고 결혼 후 서울로 올라가 이제까지 서울에서만 생활하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전원생활이 하고 싶어 이곳에 온지도 4년째가 되었습니다.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특히 자식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처음 올 때만 해도 공무원 생활을 하던 남편 이계업씨가 아직 정년퇴직 전이라 서일순씨는 막내아들과 같이 내려와 펜션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들은 옆에서 2년을 같이 있었고, 지금은 직장 때문에 곁을 떠나 있습니다. 또 집을 지을 때는 큰며느리와 같이 셋이 아이디어를 내 건축을 하였습니다.
이 집은 전체 부지가 계곡을 끼고 길쭉하게 늘어져있습니다. 부지 면적은 2,000평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입구부터 차례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건축면적은 100평 정도입니다. 펜션과 살림집을 분리해 건축을 하다보니 면적이 넓어졌습니다. 건축비는 평당 350만원 정도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아쉬운 점은 건축을 할 때 건축업자에게만 공사를 맡겨 놓은 것입니다. 서울에서 주말에만 오가며 지켜보았던 게 큰 실수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건축자재를 나쁜 것을 쓰거나 기준에 미달되는 자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다시 추가공사를 하게 되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집주인이 곁에서 꼭 지켜보며 건축을 해야 한다."는 말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건축공사비를 전부 결제해 줬더니 하자보수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 이계업씨의 성격상 남에게 빚지고는 못살아, 달라는 대로 다 준 것이 실수였습니다. 이미 받을 돈 다 받았으니 건축업자들이 차일피일 시간만 미루며 나 몰라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추가로 보수공사를 해서 해결을 하였습니다.
또 건축설계도가 없이 밑그림만으로 건축을 시행해, 실제로 입주해 생활해보니 방 배치도 아쉽고 화장실 설치 부족 등 생활에 불편한 점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이후 돈을 더 들여 리모델링을 해서야 불편이 많이 줄었지만 생각 같아서는 집을 다시 짓고 싶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 집을 짓는다면 누구보다도 잘 할 자신이 있다고 합니다.
"나눠 먹으면 더 맛있어요!"
동네주변 산을 돌아다녀보면 산나물도 참 많다고 합니다. 두릅, 고사리 등이 많은데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좀 늦어지고 있답니다. 이곳은 특히 버섯 중에 으뜸으로 치는 능이버섯이 많답니다. 채취한 나물들은 항상 주변 친한 사람들과 나눠 먹습니다.
남편 이계업씨는 지난해부터 벌통을 사다놓고 토종벌을 키우고 있습니다. 벌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토종꿀을 먹을 수 있겠냐는 생각에 3통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한통에 10만원이면 벌이 들어있는 벌통을 살 수 있습니다. 무작정 저지른 일 치고는 그해 수확이 아주 괜찮았습니다.
지금은 전부 5통을 관리하고 있는데 2통은 친척들이 위탁을 한 것입니다. 토종벌은 매년 가을에 한번씩 꿀을 딸 수 있습니다. 벌통 하나당 한 되 정도의 꿀이 나온답니다. 서일순씨는 작년에 수확한 꿀을 오는 손님들마다 한잔씩 타주다보니 정작 자신이 먹을 것도 없더라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는 닭장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닭을 80여 마리나 사놓았습니다. 닭이 너무 예뻐 보여 무작정 산 것입니다. 우선은 야외에 방사해 키웠는데 너무 많다보니 개중에는 적응을 못하고 죽기도 하고, 추위에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산짐승이 못 오게 개도 두 마리 묶어 두었습니다. 너무 개체수가 많다보니 일일이 관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워낙 닭이 많으니 계란이 떨어질 날이 없어 좋았습니다. 손님들 마다 나눠줄 정도였습니다.
간혹 닭을 잡아서 팔라고 하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그동안 손수 먹이를 주며 키운 것들이라 차마 직접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알아서 가져다 먹으라고 주다보니 이제 몇 마리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음식이 있으면 나눠주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이라고 서일순씨는 스스로 말합니다.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베푸는게 좋아 손님들만 오면 이것저것 갖다바칩니다.
펜션에는 방이 7개입니다. 방이 꽉 차는 날은 정신없이 바쁩니다. 방방마다 찾아다니며 된장찌개나 나물무침, 비 오는 날은 부침개 등을 직접 조리해 서비스합니다. 손님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되니 아주 좋습니다. 이 펜션이 자랑하는 메뉴는 서일순씨가 직접 담근 식혜입니다. 사시사철 항상 손님이 오면 한잔씩 대접하곤 합니다. 무한정 리필해 줍니다.
봉사활동으로 더 보람 있는 전원생활
서울에 살 때 대장에 있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재발하거나 합병증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요즘 서일순씨의 친정 부모님이 와서 지내고 계십니다. 공기가 좋아 소화도 잘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신답니다.
서울에서는 쉽게 느껴보지 못한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돈벌이 때문에 바쁜 생활에 쫓겨 여유를 찾을 틈이 별로 없었습니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시골로 오면 문화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서일순씨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곳 청운면에는 지난해부터 면사무소에만 가면 왠만한 문화생활을 다 즐길 수도 있습니다. 요일별로 각각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서일순씨는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자치단체에서 주관하는 김치를 담그는 일, 독거노인들의 빨래나 청소 등을 합니다. 그렇게 전원생활을 더 보람있게 즐기고 있습니다. 더러 노래교실에 나가 소리쳐 스트레스도 풉니다.
전원으로 내려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전원생활을 하는 이들도 여럿 있어 공감대가 일치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활하기에 더 즐겁습니다. 쾌적하고 여유있는 전원에서, 좋은 이웃들을 만나니 생활이 더욱 즐겁습니다.
마당 넓은 집 031-774-7380
'서정원선수 장모님' 산성에 마지막 닻을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산성 이란 말은 왠지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며 오대양을 누비던 윤용덕씨에게 이곳은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닻을 내린 항구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이 배에서 내리면 꼭 공기 좋은 전원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부인 이옥희씨는 입버릇처럼 이말을 되뇌었습니다. 부부는 그 굳은 약속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이제 산성 안 평화로운 마을에 그 마지막 닻을 내렸습니다. |
부산의 국립해양대학교를 졸업한 윤용덕씨는 큰 배의 선원으로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습니다. 범양상선에서 처음 입사해 3등 항해사로 일을 시작, STX사에서 기관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0여년 가까운 세월입니다. 부부는 중매결혼을 하고 난 후 6개월 만에 생이별을 했습니다. 첫째 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일을 나가야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나긴 기다림의 전조였습니다.
첫 항해를 마치고 오니 뱃속에 있던 딸은 어느 새 첫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2녀 1남을 두었습니다. 항해를 다녀올 때마다 아이들은 몰라보게 자랐습니다. 1988년도에 처음으로 배를 같이 타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남편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외로운 생활을 하는지 처음 보고 느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부인 이옥희씨는 더 남편을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식들에게도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큰딸이 대학에 합격하고 얼마 후 "엄마도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시라"며 문화센터 수강권을 끊어다 주었습니다. 접수를 하러가서는 결국 또 가족들을 위해 제과, 제빵 기술을 배우는 수업만을 신청했습니다. 딸은 화를 내며 서운해 했지만 남편을 생각하면 자식들 잘 키우는 것만이 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 항해를 떠나던 남편이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자던 그 말.
사위의 고향에서 전원생활
일찍부터 은퇴 후 살게 될 보금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강화도, 가평, 강원도 등이 우선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강원도 인제의 내린천 상류에 전에 사두었던 땅이 있어 남편은 그곳으로 가자고 했지만, 자녀들이 찾아오거나 할 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면 부담이 되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곳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큰사위의 고향인 이곳, 남한산성이었습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서정원선수가 바로 큰사위입니다. 서정원선수는 이곳에서 태어나 남한산성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유난히 달리기를 잘해서 현역시절부터 날쌘돌이란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이후 운동을 하느라 고향을 떠나 생활했지만 서정원선수도 이곳에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부부는 이곳에 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레 큰딸이 살고있던 집주변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마땅한 땅을 용케 찾아냈습니다. 계곡도 옆에 있고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계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가족이 모두 모였던 어느 날 지금의 땅을 보러 왔는데 이상하게도 햇살이 이 땅만을 비추더랍니다. 전부터 이 땅이 팔려고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으나 그 광경에 마음을 정하고 이곳으로 올 결심을 했습니다. 벌써 1997년의 일입니다. 이렇게 땅부터 사두고 2000년도엔 그린벨트 내에서 건축을 하기위해 건축을 할 수 있는 딱지를 구해 건축허가도 미리 내어 놓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린벨트 안에 어떻게 집을 지었냐며 궁금해 한다고 합니다.
1층은 작은딸 별장, 2층은 큰딸 별장
집 설계는 조용우 건축사가 맡았습니다. 주택 설계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분인데 아주 고집이 있는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설계는 자연을 최대한 살리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언덕의 장점을 잘 살려 경치를 마음껏 볼 수 있도록 했고, 문만 열면 바로 꽃이 가득한 뒷마당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창문마다 화분대를 만들어 놓아 창문마다 화분을 놓아두었습니다. 꽃이 피면 건물 전체가 꽃밭같습니다. 지붕 처마에는 물받이를 달지 않았습니다. 낙숫물이 흘러내리는 대로 자연스럽게 보며 즐기는게 전원생활이 아니겠냐는 설계자의 의도였습니다.
부부의 공간을 빼고 1층은 작은딸 별장으로, 2층은 큰딸 별장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언제라도 가족들이 함께 와서 쉬어갈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에서 입니다. 방을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더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특히 큰딸 가족이 해외에 나가있어 자주 오지 못해 더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환갑의 나이에 손주들 소식을 듣기 위해 인터넷에 미니 홈피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나를 낮추는 마음으로...
작년까지만 해도 남한산성은 국립공원이라 매표소를 통과하려면 돈을 내야했습니다. 하지만 서정원 장모집 에 간다면 무사통과였습니다. 유명한 사위의 고향에 오다 보니 이런 좋은 점도 있지만, 행동 하나에도 더 신경 쓰게 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만큼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다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드렸고 집에 놀러 오시는 분들께는 뭐라도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살더라도 기존에 살던 사람들보다 나는 항상 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을 낮추고 나니 주민들과도 쉽게 친해지고 편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이집에는 담이 없어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니 새로 집짓고 들어와 살면서도 이웃들과 마찰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좋아한다고 합니다.
목표를 이룬 삶
이제 두 딸의 별장으로 만든 방을 이용해 자그마한 펜션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나던 사람들이 집이 예쁘다며 자고갈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해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가족처럼 방문해서 부담이 없이 쉴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또 젊은 사람들이 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빵 만드는 기술이나 쿠키 만드는 법 등도 알려주며 같이 나누는 방법을 생각중 입니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면 꼭 꿈을 가지고 살아라. 그러면 꼭 이루어진다."라고 늘 자식들에게도 이야기 했습니다. 남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을 했고 어느 정도 꿈을 이룬 것 같아 행복합니다. 천천히 자연을 즐기며 남한산성 안 장수마을에서 서정원 선수의 장모님 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리디아의 정원 www.redia.co.kr
도시로 향한 열린 공동체, 귀농 삼총사
박천창씨는 요즘 힘은 들지만, 신이 납니다. 지난해 농림부로부터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지로 선정된 데다, 내년에는 산너머에 조성중인 전원마을 새울터로 도시민 100여명이 살러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 일이 되는가 싶습니다. 이제 마을은 생활공동체를 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득공동체, 경제공동체로 가지않고서는 안됩니다. 마을주민들도, 도시 귀농인들도 마을에서 도대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일에 오로지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을 경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천창씨는 이곳이 고향입니다. 지금은 마을 도농교류센터이자 산골체험학교로 바뀐 능길분교 졸업생입니다. 젊은 날을 타향에서 일하고 고향마을을 지키겠노라 십수년전 귀향했습니다. 그동안 몸 고생, 마음 고생, 돈 고생, 사람 고생이 적지 않았음을 40대후반의 잔뜩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충분히 말해줍니다.
"농촌은 농촌다워야 하고, 그냥 관광버스 타고 와 음주가무하고 고성방가하려면 마을에올 필요가 없다."는 게 박천창씨의 마을경영 지론입니다.
그래서 능길마을에 그런 사람들은 이제 오지 않습니다. TV도 시원치 않고, 노래방도 없고, 술집도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에 왜 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도시민들이 가장 가고싶어하는 손꼽히는 마을이 됐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은, 농촌마을가꾸기 경진대회 대상으로 마을지도자 박천창씨의 그동안의 열정과 수고를 인정해줬습니다. 그리고 40대 동지 두 사람이 힘을 보태려 마을로 달려왔습니다. 2년전, 40대 초반의 한기영씨가 능금-학선마을 간사직으로 마을만들기에 합류했습니다.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즘 실현지 산안 공동체마을에 살면서 십수년동안 쌓아온 내공과 노하우를 마을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의 한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던 40대 후반의 김성일씨가 능길마을 사무장 자리를 채웠습니다. 내년 새울터 전원마을에 입주 예정인 한씨는 앞으로 1년여 능길마을에서 귀농실전을 제대로 한번 겪어 보겠다는 각오입니다.
능길마을에 이들 귀농 삼총사가 있어 능길마을은 자꾸 힘이 납니다. 살 맛이 납니다.
젊은 도예가 부부, 어린 세 딸과 밤나무골로 귀향
충주 양성면 목미리 하율마을 밤나무골. 초등학생 딸 셋을 둔 젊은 도예가 부부가 고향마을을 지키며 살고있습니다. 서울의 좋은 대학에서 도예를 공부하다 만난 부부는 둘 다 도자기를 만든 지 십수년씩 되는 프로들입니다. 그런데 굳이 밤나무 밖에 없는 골짜기에 내려와 사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잡지의 소재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을공동체 보다는 나를 만들어가기도 벅찬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고 보니 마을에 접목 될 만한 거리도 없고요. 워낙 흙 파먹고 사는 직업이오니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옵소서. 언제고 오시면 차 한잔 드리겠습니다."
밤골도예 또는 일중요라 불리우는 터의 바깥주인인 이준우씨의 첫인상은 막사발을 빚는 조선시대 도공의 재림을 보는듯 합니다. 밤골도예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흙으로 지은 전통가마의 주인이 바로 저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여기저기 꽤 알려졌나봐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관광공사 여행정보 사이트에서 보고 찾아오는 분들까지 있고요. 언젠가는 충주시에서 수십억원을 들여 이 마을에 도예를 테마로 한 체험장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예산이 없는지 지금은 어찌 된지 모르겠습니다만… "
이준우씨는 이곳이 고향마을입니다. 서울의 대학에서 도예를 공부하고 그곳에서 부인 서원주씨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외국까지 나가 공부하고 온 도예 엘리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인사동도, 청담동도 아닌 고향 밤나무골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향마을을 위해 뭔가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아요. 더군다나 집안의 손윗분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한참 아래인 처지에 나서기도 그렇고요. 그래서 귀농해 농사를 짓는 몇 농가와 의기투합해 앙성농군 이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어요. 도시민들을 마을로 초대해 농사나 도예 체험 행사도 하고 농산물도 직거래하고 했지요. 하지만 그중 몇 가구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도 했고요. 많이 가지지 않고 귀농해서는 살기 어렵잖아요? "
농사를 생업으로 삼지는 않지만, 농촌에서 나고 살고 있는 이준우씨는 농촌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을이 하나되어 해야한다는 마을만들기나, 서로 다른 여럿이 모여 서로 같은 하나처럼 살아야 하는 공동체마을이니 하는 이른바 마을사업의 어려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 참, 요 옆 마을에도 신문에 귀농일기도 연재하고 책도 펴낸 알만한 귀농인 부부가 집과 땅을 내놓았다고 해요. 그만큼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렇지않아도 언젠가 TV에 나와 화제가 된 전라도 무주 산골의 젊은 귀농부부가 얼마전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던 참이라 더욱 씁쓸했습니다.
전통 장작가마를 지으려 귀향
집터는 3천평의 대지 위에 넓직한 작업장과 살림집이 한데 붙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앞마당에까지 그동안 이준우씨 부부가 땀으로 빚어낸 역작들이 즐비합니다. 저마다 자유롭게, 그러나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무지개 빛인듯 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도자기들이 빼곡합니다.
"가마는 두 개가 있습니다. 석유가마와 장작가마입니다. 석유가마는 일률적인 색깔을 내야할 때 주로 씁니다. 장작가마는 연기와 온도의 변화를 가해 다양한 색의 작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같이 씁니다."
이준우씨는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뒤 유럽으로 건너가 공부할 때 집중한 화두가 전통 이었다고 합니다. 유럽은 아주 사소한 물건도 전통 그대로 전해져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 도자기는 전통적인 것이라고는 목물레 정도만 겨우 남아있는 현실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전국을 돌며 전통 도자기의 흔적을 찾아다녔어요. 예전엔 소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면 어김없이 장작가마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흔적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고요. 전통적인 가마의 각도와 만드는 법 조차 전해지지 않습니다. 고향마을에 귀향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드디어 고향마을로 내려온 그 이유를 들려주는 이준우씨 부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습니다.
"일단 전통적인 장작가마를 짓고 작업하기에 도시는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향마을로 내려와 이렇게 전통가마를 직접 짓고 작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ㄱ 자로 꺾인 작업장 건물은 도예가 이준우씨 부부의 작업장이자 도예를 배우려는 이들의 체험공간입니다. 체험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가마를 열기 한달전 쯤부터 인터넷을 통해 알리고 불러모으기도 합니다.
"누구든 30분 이상 흙을 만지면 모양이 나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어떤 모양의 도자기를 만드느냐 보다 흙의 질감이나 존재감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한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체험작품들은 가마에서 구워 부쳐줍니다. 작업장은 황토흙으로 마감한 외벽, 큰 통나무를 쓱쓱 잘라 세운 기둥이나 서까래까지 전통과 자연스레 어울립니다. 집 주인의 깊은 뜻이 그대로 읽히는 구조입니다. 지붕도 나무를 얇게 켜 마치 너와집처럼 켜켜이 얹어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집을 지은 이유를 물어보니 명쾌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편하게 작업하고 싶어서요. 잘 지은 공간에 매이면 작업하기 불편하니까 그냥 대충지었어요. 일중이라고 지은 호도 날마다 중간만 살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중간 쯤 하고 사는 게 오히려 더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어느 곳 하나 대충 넘어간 공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무로 지어 습도조절도 잘되고 작품을 건조시키거나 보관하는데도 좋고 내부공간은 황토로 마감해 작업공간이 쾌적하다고 합니다."
세 아이도 키우고, 항아리 소금도 굽고
"날마다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한답니다. 작업도 많이 하는데다가 도예를 배우러오는 수강생들 전시회 준비도 해야하고, 가마에 불도 때야하고 말썽부리는 기계도 고쳐야하고…"
안주인 서원주씨는 오월이 되니 더 정신이 없습니다.
"어제는요, 초등학생 두 녀석의 운동회날이었어요. 둘째 딸이 44명인가 되는 작은 초등학교의 전교회장입니다. 그러니 안 가 볼 수가 없지요. 이번 운동회에서 풍물패의 상쇠까지 맡았다니까요. 나도 모르게 은근히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거 있죠. 애들 운동회였지만 열심히 같이 뛰었지요. 카메라도 집에 빠뜨리고 가서 사진 한장 못 찍는 정신없는 엄마였지만 덩달아 신이 났어요."
정신없는 안주인은 큰 일거리가 더 생겼습니다. 항아리 소금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항아리소금은 1,000도에 가까운 장작가마의 고온에서 구워요. 그래서 이렇게 눈처럼 하얗지요. 저온에서 구우면 회색빛이거나 심지어 다이옥신까지 검출될 수 있다고 해요. 소금은 850도에서부터 녹기 시작해 1,350도에서는 기화됩니다. 1,000도 고온에서 일중요에서 흙으로 빚은 항아리에 넣어 전통 장작가마에 구우니 소금에 들어있는 수분과 불순물이 깨끗이 제거돼 쓴맛은 없고 짠맛은 덜한 깔끔한 소금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부부는 좋은 천일염 소금을 찾기 위해 전라도 신안 앞바다의 염전마다 샅샅이 뒤지며 다녔다고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이요? 아이들이 다 크면 더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일하며 살고 싶어요."
중간만 가려는 일중 이준우씨의 장래 계획은, 보다 제대로 살고, 보다 제대로 창조하려는 장인으로서의 욕심, 진정 그것 뿐입니다.
장도 담그고 민박도 치고 꽃밭도 가꾸고
강원도 원주에서 가장 오지로 치는 귀래면,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미륵산 산중턱 메주골에 메주도 빚고 장도 담그는 미륵산농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륵산에 단풍이 들 때면 박종원씨 부부가 산골에 들어와 메주를 빚은지 어느덧 아홉 해가 돌아옵니다.
"남편이 부천에서 프레스 찍는 중소기업을 경영했어요. 돈도 좀 벌었는데 어느 날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싶었어요. 그리고 4년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어요. 9년전 이 터를 만났지요.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나 봅니다."
이름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부인은 지난 이야기를 하며 감회에 젖습니다.
"처음 내려왔을 때, 마을 주민들이 많이 경계를 했어요. 지금이야 이 골짜기에 전원주택이며, 펜션이며, 별장 들이 여러 채 들어섰지만, 그때만 해도 외지인은 우리 말고 없었거든요."
지난 이야기를 하다보면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힘들고 여러웠던 기억이 으레 앞서게 마련인가 봅니다. 부인은 낯선 방문객 앞이지만 익숙한 이웃에게 하듯이 지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처음 내려와서는 근처 농가를 빌려 살았어요. 그러다 지금 이 터에 농원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지요. 땅은 모두 1,500평쯤 될거예요.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일이야 도시에서도 해왔던 일이라 자신은 있었지요. 하지만 집 짓는 일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었지요. 지금에서야 이렇게 쳐다만 봐도 보람도 있고 뿌듯하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예요. 무엇보다 아랫마을 주민들이 민원이다, 고발이다 나서는 데에야…"
부인이 그때로 다시 돌아간듯 한숨을 깊게 내쉬자 원주 시내로 볼 일 보러 나갔던 박종원씨가 돌아왔습니다. 장모님을 모시고 다녀오는 길이었나 봅니다.
"아내나 저나 모두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강아지가 탈이 나서 장모님 모시고 바람도 쐴 겸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지요. 시내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 있지만 이제 다 커서 키우는 재미가 없고 강아지 네 마리 키우는 재미가 적지 않아요."
개든, 소든,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듯이 사람좋은 인상의 박종원씨는 연신 아픈 강아지 걱정입니다.
남편은 공장장, 아내는 농장장
목재로 견고하게 지어놓은 살림집 옆에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만드는 공장이 붙어 있습니다. 장 담그는 기술은 사실 아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같이 살지는 않지만 자주 들려 지내다 간다는 친정어머니에게 전수받았을 법 합니다. 박종원씨도 아내에게 기술을 배워 부부가 함께 장을 담그고 있습니다. 어쨌든 부천에서 공장을 경영해 본 남편이 공장장 노릇을 하는 셈입니다.
"아주 바쁜 철에는 마을 주민들의 손을 빌리지요. 시골 품삯이라 많이 드리지는 못하지만 늘 아쉬운 농촌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고요. 콩도 마을에서 나는 순 우리콩을 사서 쓰고요. 무엇보다 장맛은 햇빛, 물, 공기가 좋아야 하는데 이곳 황산마을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고 심지어 반목을 하기도 했던 아랫 마을 주민들과도 자연스레 일과 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농원의 메주는 농원이 있는 주포리 황산마을에서 재배한 순 우리콩을 원료로 씁니다. 황산마을은 친환경농사를 짓는 생태마을이예요. 옛 조상들이 하던 방식대로 메주를 띄워 각지에서 사 모은 살아 숨쉬는 장독에 담급니다. 환경과 전통과 깔끔함을 고집해 우리 고유의 맛인 된장, 고추장, 간장을 빚어내려고 합니다."
농장장인 부인은 된장만드는 강의를 시작합니다.
"우선 재래식으로 메주를 만들어 햇볕과 바람으로 자연 건조시키고 띄웁니다. 일년중 볕이 가장 좋은 6월에 거둬들인 전남 남해안의 천일염을 간수가 빠진 다음 다시 불에 구워냅니다. 그리고 이 골짜기의 맑은 물로 간장을 담고 눈 녹은 봄이 되면 메주와 간장을 갈라 맑은 공기와 햇볕속에서 2년간 숙성합니다. 고추장은 이곳에서 재배하여 수확한 고추를 태양볕에서 정성스럽게 말려 메주와 엿기름, 쌀을 섞어 담아 1년간 숙성하고요. 장맛은 담그는 방법과 물과 공기, 햇볕 등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곳은 최적의 터라 할 수 있지요."
부인은 된장 만드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꽃밭을 가꾸는 기술도 가히 농장장급인듯 합니다. 향이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라벤더 꽃밭과 민박을 친다는 황토방이 어우러져 농원이 아닌 식물원 같기도 합니다.
"황토방은 이곳에 다니러 가는 지인들이 하루라도 편히 묵어갈 수 있도록 일종의 게스트하우스로 지은 것인데요. 지금은 민박도 치고, 아픈 사람들이 쉬어가는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장도 담궈 내다팔고, 민박도 치고 전원생활자의 수익구조 치고 꽤 튼실해 보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는 마을에서 귀한 삶을
이들 부부가 사는 미륵산은 이른바 유서깊은 곳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준 후 미륵산의 고자암에서 시름을 달래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또 귀래라는 지명도 귀한 손님인 경순왕이 찾아왔다는 데서 유래했고 마을 이름이 된 황산도 임금이 거처했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터에 살고 있는 박종원씨는 올해 쉰다섯, 부인은 마흔아홉입니다. 외동딸도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 자식농사도 마무리 단계입니다. 몸에 좋은 장도 담궈 사람들과 나누고, 쉬고싶은 사람들에게 황토방 쉼터도 마련해주고, 꽃과 강아지도 사랑하는 미륵산농원 부부. 이들에게 구태여 다른 욕심은 엿볼 수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사시면 참 보기 좋겠습니다."
미륵산농원(033-900-3030, www.imeju.co.kr)
시 쓰듯 황토 통나무 집 짓는 가족들
중생대 백악기에 터진 화산분화구가 이제 넉넉히 마을을 이룬 곳, 경남 통영시 산양읍 남평리 야소골. 통영 앞바다가 멀리 바라보이는 마을 뒷산 미륵산 중턱에 시 쓰는 목사님, 또는 목회하는 시인이 황토와 통나무로 새 보금자리를 손수 짓고 있습니다. |
시 쓰는 목사, 목회하는 시인 류우림씨. 겉으로는 집짓는 데 이골이 난 목수의 모습입니다. 지금 본채 바깥으로 사랑채를 붙이는 추가 공사가 한창입니다. 이번에는 장인어른이 빠진 대신 이웃에 사는 마을 분과 단 둘입니다.
"저 분도 통영에 직장 일로 왔다가 아예 마을에 눌러앉았다고 해요. 저 아랫마을을 한번 내려다보세요. 화산분화구 자리에 90호 가까운 마을을 이룬 야소골이예요. 사람사는 마을의 모습이죠.
저 멀리 저수지만하게 보이지만 남해바다도 어른거리고요. 무엇보다 이 촌구석에 번듯한 공공도서관과 학교들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어요. 산양읍이 바로 붙어있어서 그런 덕을 보는거죠. 지난해 이 마을, 이 땅을 보자 바로 여기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오죽하면 집을 어서 지어 살고 싶어 한 겨울에 공사를 시작했겠어요."
3일 굶으면 살 방법이 생긴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또 시인이 된 류씨. 30대 후반쯤 충남 연기군 어느 마을에서 3년 동안 하루종일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쬐며 칩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결혼을 해야 목사 일을 할 수 있다며 안타까워하던 지인의 소개로 주문진에서 유치원 교사 일을 하던 정경미씨를 아내로 맞았고 바로 딸 우경이를 나았습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툇마루에 앉아 시나 쓰던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천연덕스러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무는 해오겠다고 했어요. 3일만 굶으면 살 방법이 나온다고도 하고… 결국 결혼한 직후 실제로 같이 이틀인가를 굶어본 적도 있어요. 그러고 있으려니 누군가 쌀을 갖다주고, 누구는 먹을 거리를 챙겨오고 그러더군요."
더군다나 처가가 대대로 절엔 다니는 집안이라 반대가 아주 심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의 할머니가 저를 부르더니 그만 결혼하라고 하시대요. 종류는 다르지만 진실한 믿음을 가지신 분들이니, 또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사람에게 소중한 믿음을 나눠주신 것으로 생각해요."
그리고 첫 부임한 곳이 절해고도 울릉도 나리분지.
"가 보니 교회 살림을 꾸리는 기금이 13만원인가 남았다고 그래요. 가난한 마을이라 목사 사례비도 따로 줄 형편이 안된다고 걱정만 하고, 참 막막하더군요."
류씨는 교회도, 마을도, 그리고 아내도 함께 먹고 살 길을 생각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관광객을 상대로 한 식당이었습니다. 신도들과 직접 힘을 합쳐 식당을 지었습니다. 이때부터 자연스레 집을 짓기 시작한 셈입니다. 울릉도와, 특히 독특한 식생이 알려진 나리분지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장사는 잘 됐습니다.
"집 짓는 법을 울릉도에서 스스로 터득했어요. 방에 모셔둔 작은 나무의자도 그때 아이를 위해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고요. 저 의자만 보면 그때 생각이 생생히 살아나죠."
잠시 살아온 감회에 젖는 류씨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이지를 물었습니다.
삼동볕도 나눠 쬐며 소박하게…
"도자기 가마를 지어서 도자기를 좀 구워보려고요. 교회는 굳이 따로 세울 생각이 없고, 신도들 집을 돌면서 하는듯 안 하는듯 소박한 목회를 꾸려갈 겁니다."
내 요람 야솟골은 씨알만한 동네/ 산울림이 뇌이는 동화속에 잠기어/ 세월이 비켜가는 그런 동네/ 법보다 먼저 순리를 익히어/ 우러러 섬기고 굽어 아끼며/ 울타리 넘나드는 치차향기 이웃/ 눈만 주면 풀빛도 따라와 주고/ 삼동볕도 나누어 쬐는 사람들/ 세상 눈치 안보고 옛말 하면서/ 까치밥 한 알 감도 남겨두는 동네
마을 입구에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느 시인이 마을에 바쳤다는 야솟골찬가 가 큰 바위에 새겨져있습니다. 목사시인 류우림씨가 이 마을에 살러올 것을 미리 예감한 듯한 시에 류씨는 자작시 바람 으로 화답합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바람은/ 무수히 많은/ 작은 날개를 가진 커다란 새이지 싶다/ 바다에 가 서면/ 은빛 등지느러미에 유연한/ 꼬리지느러미를 가진,/ 푸른 아가미로 숨을 쉬는/ 물고기이지 싶다/ 그래서일까/ 한 사람은 바다로 가고 한 사람은 산으로 갔다/ 한 사람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한 사람은 어디선가 돌아왔다.
가족들이 만들어 가는 허브 테마 공간
전원생활을 시작할 때는 어디에서 할 것을 고민하기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우선 고민해야 합니다. 전원생활 7년째 허브 가꾸는 일을 하며 허브에 빠져 사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들 가족들이 가꾸어 가는 허브 테마마을을 찾았습니다. |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호영이. 너무 고생 많으시죠? 맘은 항상 매주 가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 속상하고 또 가서 도와드리면 두 분 그리고 동생이 너무 고생하는 거 같아 맘이 아파요. 엄마, 아빠가 허브농장하신다고 서울을 떠나신지 어언 7년 됐나요? 그 때도 너무 속상해 많이 울었는데 그 척박한 땅을 일구시며 고생하시는 당신들의 모습을 보며 변변한 도움도 드리지 못하는 이 딸은 속으로 얼마나 목이 메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을 오로지 신앙과 용기와 땀으로 일궈내신 아빠! 힘든 일을 말없이 내조하시는 강한 우리 엄마! 그리고 두 분 곁에서 돕느라 고생하는 우리 착한 호영이! 이젠 7년간의 눈물겨운 고생이 행복으로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허브가든으로 자리 잡도록 기도할게요. 이 글이 아빠, 엄마, 동생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라며…"
좀 더 빨리 전원생활 시작할 걸...
서울에 있는 딸이 강원도 횡성 오지에서 허브가든을 만들어 가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한 글을 홈페이지에서 보았습니다. 산촌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동생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횡성 갑천면 상대리 느릅재마을에서 글로리아 허브 리조트를 만들어 가는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글로리아 허브 리조트라 하여 흔히 대하는 호화로운 리조트 단지가 아닙니다. 말이 리조트지 현재의 모습은 허브농장, 허브정원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이곳을 직접 가꾸고 있는 이건영, 박영숙 씨 부부가 허브에 공을 들인 것도 벌써 7년이 돼 갑니다. 처음 이씨가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속에 들어가겠다며 아내에게 말했을 때 아내는 "그 험한 산골에서 어떻게 사느냐?"며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런 아내를 설득하는데 10여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전원생활의 첫 번째 관문은 아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시골생활을 할 거였다면 그 때 바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아내의 협조는 시골생활의 가장 큰 의미였기에 아내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습니다. 아내의 동의를 얻어 시골로 내려온 지 1년이 지났을 때 남편은 아내에게 "시골생활이 힘드니 다시 서울에 가 사는 것이 어떻겠냐?"며 넌지시 떠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반색을 하며 도시에 가면 답답해 못 살 것이라며 이곳 생활이 도시생활보다 훨씬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원생활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전원생활에 관심이 있다면 하루라도 젊었을 때 시작하라"고 충고합니다. 도시를 떠나면 못 살 것 같이 반대하던 아내는 그렇게 자연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남편은 허브가든 만들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한 부모님들의 생활을 보며 자연스럽게 서울서 직장생활 하던 아들도 뒤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집짓기 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
이건영씨는 시골행을 결심한 후 가장 우선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대부분 전원생활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떤 땅에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데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건설관련 사업을 했던 그에게 허브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시골생활을 하며 빠져들 수 있는 재미있는 아이템이었고 비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4년간 허브에 대해 준비를 했습니다.
생태적인 부분과 마케팅 방법 등을 공부한 후 횡성에 15만㎡ 규모의 땅을 구입해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허브농사를 지으며 또다시 6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비닐하우스 하나, 화단 몇 개 만들어 허브농장이란 간판을 달고 돈벌이에만 급급 하는 것들과는 차별하겠다는 생각으로 제대로 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허브를 기를 때는 시행착오도 많았고 실패도 겪었습니다. 허브 전문가들을 찾아가 물어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오픈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전문서적도 내용이 제각각이고 국내 실정에 맞지 않아 손수 깨우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농장에 매달려 직접 허브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4년이 돼서야 허브가 보였습니다. 들여온 허브들도 땅에 제대로 안착을 했고 허브 하나하나의 특성과 나름대로의 성격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골생활을 시작하고 허브가든 만들기를 시작한지 6년이 지난 2005년 7월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리아 허브리조트 란 이름을 달고 정식으로 오픈을 했습니다.
힘들여 터득한 허브에 대한 지식들 공개
글로리아 허브리조트 는 동서양에 널리 분포된 허브식물들을 샘플가든, 테마가든, 이벤트가든에 모아 조경과 차경을 고려해 조화롭게 배치해 놓은 정원입니다. 이곳에서 자라는 허부는 200여종이며 5만㎡ 정도 규모로 샘플 가든이 꾸며져 있습니다. 이건영씨는 "고대로부터 허브는 선진국들의 왕실 귀족, 부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해 한국허브산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허브가 인간에게 주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서민들에게까지 넉넉히 이용되는 유익한 식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허브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직접 허브농사를 지으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정원을 가꾸어 갑니다. 허브 정원에는 식물마다 명패가 달려 있습니다. 관람과 체험학습에 필요한 허브정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인들이 궁금하고 답답해했던 허브식물들에 대한 기본지식은 물론 고급 정보도 공개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서로 공유하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스스로 허브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할 때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해 무진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어 이렇게 정보를 공개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허브를 기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상담도 해주고 농장이나 조경 등도 직접 해주고 있습니다. 글로리아 허브리조트 는 친환경적인 생태 속에서 차별화되고 다양화된 허브체험 프로그램을 연구개발해 선진국 허브농원과 다른 한국식 허브농원의 독특한 동양미를 선보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허브 레스토랑, 카페, 펜션, 3천㎡ 규모의 잔디 광장 등을 준비하고 각종 문화, 예술, 행사, 전시, 공연은 물론 웨딩 이벤트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펜션을 이용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허브를 좀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정원을 공개하고 각종 허브 용품들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마을주민들과의 관계도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주민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허브가든이 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판매하기도 하고 이건영씨 스스로 마을 행사나 마을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전원생활을 하며 소일거리 없이 심심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템을 찾지 못했거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원생활 7년째 이건영씨 가족은 이룩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은 아니었지만 이룩한 것에 보람은 큽니다. 전원생활을 준비하며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았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확실한 비전도 가졌습니다. 용기도 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원생활은 소비적이 아니라 생산적이었습니다. 스스로는 허브 전문가가 되었고 허브동산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허브를 주제로 한 테마 가든, 문화공간, 체험학습장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허브리조트 로, 작은 테마마을로 탈바꿈 하고 있습니다.
글로리아허브 리조트(www.gloriaherb.co.kr, 033-345-5114)
반도체교수가 반도체처럼 설계해 짓는 귀틀집
제천 청풍면 학현마을 학고개에 학고개 숲 이야기 라는 귀틀집이 들어섰습니다. 마치 학이 날아가는듯 한 이 집의 주인 김원찬씨는 지난해까지 서울대에서 반도체설계를 연구하고 가르치던 교수님이었습니다. 이제 학고개에서 자연을 배우고 집을 짓고 있습니다. |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태천이라는 곳이죠. 그러니 고향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셈이죠. 터를 잡느라 남쪽까지 돌아봤는데 이곳을 발견하고 참 느낌이 좋았어요. 마음이 편해졌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이제 돌아갈 고향이 생긴 기분이었어요. 이제 이 학고개를 고향 삼아야죠."
김원찬씨는 70년대초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헨대학교에서 전기공학으로 석사, 박사를 받았습니다. 1982년 모교 교수로 부임해 지난해 8월 퇴직할 때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른바 권위있는 국제학술지에 논문만 100여편이 넘게 등재된 국내 반도체설계분야의 석학입니다.
"언제부턴가 몸에 힘이 없어지는 거예요. 어쨌든 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너무 에너지를 많이 쏟아부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병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스스로를 멈춘 셈이죠. 그 전까지는 이렇게 내려와 살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려와 이렇게 좋은 자연에 집도 짓고 몸과 마음을 의탁해 살아보니 너무 좋은 거예요. 이런 경우를 전화위복이라고 하나 봅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온다고 할 때 첼리스트인 부인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22자 폭의 거실에 12자짜리 서까래가 드리워진 황토집 마루바닥을 무대삼아 둘만의 첼로연주회를 즐길 정도로 아주 만족스러워 한다고 합니다. 길이 좋아져 볼일 보러 서울에 올라가는 일도 그리 번거롭지 않으니 외딴 곳에 내려와서 살고 있다는 부담도 많이 없어져서 그럴 것입니다.
반도체 설계하듯 직접 설계한 귀틀집
김교수는 대학노트 세권에 빼곡이 스케치된 설계도면을 펼쳐보입니다. 반도체설계 전문가의 내공을 발판삼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 같지도 않고 펜션 같지도 않은 황토 귀틀집 을 직접 설계하고 직영으로 시공한 것입니다.
"집을 설계한다기보다 삶을 다시 설계한다고 여기고 애를 썼어요. 듣도보도 못한 설계도 때문에 지난해부터 같이 일하는 목수아저씨가 저 때문에 참 고생 많이 했을 거예요. 도대체 집 짓는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설계도라고 가져와서는 집을 짓자고 이러쿵저러쿵 시어머니 노릇을 했으니…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차라리 이제는 친구 같아요."
아닌 게 아니라 집짓는 동안 붙어살다시피한 김교수와 목수아저씨는 어느새 친구 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평당 비용이요? 물어보지 마세요. 말 안 할래요. 물론 당초 계획보다는 더 많이 들어갔지요. 비용 생각하면 집은 애초에 못 짓는 거다 싶어요. 집을 짓다보니 이것도 해야겠고, 저것도 해야겠는데 퇴직금이야 뻔하고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가용비용이라는 것이 나오질 않는거예요. 아래채에서 아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게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 판이 끝나봐야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상황변화가 일어났어요. 여기저기 널려있는 나무에 저쪽 한 구석으로 밀려난 낙엽송 더미,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공들여 찍었지만 이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침실에 쌓여 잠들어 있는 그 많은 황토벽돌들이 눈에 들어왔지요. 그걸로 별채를 지을 요량을 하게 됐지요."
아름다운 마을도 더불어 가꾸려는 꿈
"초가지붕을 얹은 별채는 목심을 넣어 원형 황토방으로 만들었어요. 지붕 한쪽을 핀세트로 끌어올리듯 약간 위로 들어올렸어요. 일단 채광이 좋아지라고요. 종이비행기 모양이 되니 그럴듯해보이고요. 이 집은 사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지은 집이예요. 하루종일 밭일로 몸이 고단한 마을주민들에게 좀 쉬면서 일하라고 구들을 넣어 사각 찜질방까지 만들었지요. 초가도 얹고 자연친화적으로 지으려고 더 정성을 들였지요. 그런데 제가 몰라도 뭘 몰랐었나봐요. 그 분들이 그렇게 쉴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요. 해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지면 집에 들어가 고단한 몸을 누이기 바쁜 삶을 평생 살아온 분들한테는 어색한가봐요. 이용을 잘 안하시네요."
김교수는 부부가 살아갈 집도 집이지만, 몇 가구 살지않는 마을도 살기좋게 꾸밀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현마을은 금수산 자락과 청풍호 사이에 자리잡은 학 모양의 분지형 마을입니다. 행자부의 아름마을로 선정돼 마을에서 공동으로 펜션을 운영합니다. 웃 마을 아랫마을 다 합쳐봐야 30호 안팎이고 여느 마을처럼 노인들만 남아 힘겹게 살아가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최고의 자산인 전형적인 산촌마을입니다.
"저 창밖으로 보이는 소나무숲을 한번 보세요. 창문이 아니라 그림이죠. 이 복받은 자연을 선물받은 아름다운 마을에 나무도 심고, 꽃도 심고, 길도 좀 꾸미고, 집도 좀 살기 편하게 고치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가난한 노인들한테 돈 들어가는 일을 하자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돈을 대서 할 일도 아니니..."
김교수의 바램은 소박합니다. 비현실적이도 않습니다. 국립 서울대 교수입네 혼자만 따로 떨어져 잘 살아보려고 내려온 게 아닙니다. 이제 어엿한 학고개마을의 주민으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아보려고 내려왔습니다. 멀지않은 날, 김교수의 바램은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소도시에 살다보니 전원생활은 한결 쉬워
바다와 산과 강이 있는 강릉으로 이사를 한 후 처음 살림을 꾸린 곳은 아파트였습니다. 하지만 한두해 살아보니 주변에 터를 잡고 살만한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도시도 작다보니 도심으로 출퇴근 하는 것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노희일 씨는 강릉 아산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직장생활을 위해 처음 강릉에 왔을 때는 남들처럼 아파트에 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아파트에서 한두해 살다 보니 강릉이란 지역 특성상 경관 좋은 곳이 많았습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바다고 산이고 계곡이었습니다. 굳이 시내에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파트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을 지어보자는 생각에서 무작정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특히 한참 뜀박질을 해야 하는 두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산과 어우러진 조그만 마을의 땅 660㎡를 구입했습니다. 집은 건축에 조예가 있는 작은 형의 도움을 받아 짓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언덕 위에 가족들이 살 집을 짓기 시작할 때의 설레임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노씨 부부는 이렇게 강릉의 위촌리와의 작은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위촌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만 강릉 도심과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차로 10분정도만 나가면 아파트단지가 있어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강릉에서 유명한 경포대까지는 25분 정도 걸리지만 현재 도로 상황이 개선되고 있어 조만간 10분대로 좁혀질 것 같습니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차로 약 20분 정도의 걸립니다. 맞벌이를 하는 노희일씨의 부부는 아침에 출근할 때 아내와 아이들과 같이 집을 나섭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아내의 근무하는 곳에 들렀다 노씨의 직장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40분 정도입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바쁘게 생활하지만 퇴근하면 곧바로 전원생활입니다. 도시사람들이 그렇게 꿈꾸는 전원생활을 이곳 중소도시로 오니 자연스럽게 해결됐습니다. 전원생활의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고 출퇴근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이곳은 더없이 좋은 공간입니다. 아파트에서의 생활과 달리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 놉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행복합니다. 아파트에 살았다면 아이들의 쿵쾅거리는 소리로 인해 아랫집 사람들이 숱하게 올라왔을 텐데 그런 염려가 없습니다. 또한 주변사람들에게 그러한 피해를 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이 마을아이들과 함께 누구네 마당이든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주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집을 짓고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정원 가꾸는 일이 큰 일이며 큰 즐거움
노씨 가족들이 사는 집은 작은형의 도움을 받아 직접 지은 집입니다. 그래서 애착이 남다릅니다. 처음 집을 짓다보니 집 구조에 대해서는 작은 아쉬움도 있습니다. 살다보니 집 구조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고민해 지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내 집을 짓는데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보람입니다.
집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저것 조사도 해보고 물어도 보았습니다. 마침 건축에 조예가 있는 작은형이 자문을 해주었기 때문에 공간의 구성과 여러 가지 자재에 대해 다른 사람들 보다 쉽게 이해가 되었고 집도 수월하게 지었습니다. 비용도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들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집은 대지 660㎡에 연면적 139㎡의 2층 집입니다. 1층은 89㎡이고 2층은 50㎡로 1층에는 거실, 방 2개, 부엌, 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방과 화장실을 두었습니다.
2층에서 거실이 훤히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어 거실의 오픈감을 살려 지었습니다. 부엌에서는 거실을 거치지 않고 정원으로 나갈 수도 있는 미닫이문을 두어 정원활동을 수월하게 했습니다. 1층과 2층을 완전히 막는 것보다 2층에서 1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덕분에 집이 훨씬 넓어 보입니다.
1층에는 벽난로를 두어 겨울에 운치를 더할 수 있게 했고 사용하지 않는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건으로 앞을 가려둡니다. 난방은 기름과 나무 겸용보일러로 2가지 연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조경은 집주인이 손수 했습니다. 지금도 틈날 때 마다 하나하나 추가하고 있습니다. 작은 마당이지만 조경용으로 심은 나무나 꽃을 가꾸는 데 은근히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것도 큰 일이고 큰 즐거움입니다.
휴일을 이용해 조금씩 나무도 가꾸고, 아이들 좋아하는 꽃도 심습니다. 포도나무 같은 과실수도 구해서 심어서 지금은 정원이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노희일씨는 큰 도시에 생활했다면 어림도 없을 전원생활을 강릉이란 중소도시로 이사를 하여 만끽하고 있습니다. 전원주택에 살아도 직장까지 출퇴근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연에 더욱 잘 자라줍니다. 조금만 움직이면 도심 기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주변이 모두 바다고 산이고 강이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재미가 몇 배입니다.
글 | 김준환(글쓴이 김준환님은 OK시골 회원으로 OK시골학교교육 수료후 펜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전원주택을 답사하며 직접 취재해 보내 온 것입니다.)
보고싶은 것 보고 마음 닿는대로 살고 싶은 집
맑은 날 가리왕산 정상에서는 동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그렇게 높고 깊은 산의 품에 도시사람 하나가 안겼습니다. 산과 더불어 살겠다는 생각으로 터를 잡고 집을 짓습니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 입구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
비 그치자 볕이 보였습니다. 며칠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였습니다. 그렇게 내리던 비가 그친 자리에 볕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비가 오지만 언젠가는 볕이 드는 것은 이치입니다. 마냥 비일 수도 마냥 볕일 수도 없습니다.
인생도 그렀습니다. 비가 오다 볕이 드는 것을 반복하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가리왕산 아랫마을에 터를 잡은 김전원씨를 만나러 갔을 때 날씨는 사람 사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원생활은 볕입니다. 아니 볕이라야 합니다.
도시의 비를 피해 자연의 볕을 쬐며 사는 것이 전원생활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으로 전원생활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이의신청으로 규제에서 벗어나
평창에서 정선으로 가는 길은 산과 계곡으로 이어집니다. 미탄을 지나면 비행기재를 넘게 됩니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 비행기를 탄 것처럼 높고 아슬아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게 비행기재를 넘어 산을 내려가다 보면 동강의 물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만난 동강을 가로질러 마을이 있습니다. 산길과 물길이 숨바꼭질 하는 산속에 있는 마을입니다. 가리왕산이 품고 있는 정선 회동이라 했습니다.
가리왕산 품안에 있는 마을은 올 여름 무르도록 내리는 비에 촉촉이 젖어있습니다. 젖은 채로 있어 더욱 푸릅니다.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자리잡은 김선원씨의 집의 이름은 관아재(觀我齋) 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집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아 자를 빼면 그냥 바라보는 집입니다.
김전원씨는 "무엇을 보는 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속뜻은 스스로를 뚫어지도록 보아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 는 뜻도 있을 겁니다. 또 지금까지 도시의 삶에서는 보기 싫은 것도 보고, 보고 싶은 것도 눈 감고 살았던 것이라면 이곳에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마음 닿는 대로 살고 싶겠다 는 뜻도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별을 바라볼 수도 있고, 달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도 떨어지는 낙엽의 파문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보고, 마음 가는대로 살고 싶은 집입니다. 좋은 것만 보며 살고 싶은 집입니다."
김선원씨는 10년전부터 전원생활을 준비했습니다. 그때부터 뿌리내리고 살만한 터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 5년 전에 이곳 가리왕산 입구 땅을 만났습니다. 고향이 정선읍내라 고향에서도 멀지 않고 친구며 선후배, 친척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생소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처음 매입했을 때는 이 땅은 보전임지라 개발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개발이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보전임지는 말 그대로 보전할 가치가 있는 땅입니다. 그런데 김선원씨의 땅은 말이 임야지 돌밭에 잡초들만 무성하고 화전민들이 살다 버리고 간 집터가 드문드문 있는 임야로 겉모양만 보아도 가치가 전혀 없는 땅이었습니다.
무허가인 채 지어놓은 집들이 팽개치듯 내동댕이쳐진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의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청을 찾아 보전할 가치가 없는 땅이 묶여 있어 이용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자 보전임지에서 풀어주었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개발을 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관광농원으로 허가 받아 펜션 건축
작년에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터에 있던 무허가 낡은 빈 집을 적당히 수리해 임시거처로 사용하며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하나하나 추진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집을 짓는 것이나 그 집을 이용해 무엇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법률과 제도에서 걸리는 것도 많고 이웃의 눈치도 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규모가 있고, 좀 더 체계적으로 터를 개발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관광농원 허가를 받았습니다.
관광농원으로 허가를 받으면 전용이나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의 건축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그가 살고 있는 낡은 농가주택 관아재 외에도 펜션 2동과 20㎡ 남짓한 황토집이 있습니다.
집 이름 하나는 소란재(素蘭齋) 이고 또 하나는 단(丹) 입니다. 소란재에 대한 집주인의 뜻풀이는 지고지순한 소심난초의 순결한 마음으로 집을 짓고 난초와 같이 향기로운 사람들의 휴식처 란 뜻입니다.
김전원씨는 오랜 시간 난을 기르고 있습니다. 취미를 넘어 전문가 수준입니다. 집의 이름과 그의 취미가 그런 이유로 연결됩니다. 단이란 집 이름은 집터가 가리왕산의 단, 즉 배꼽에 해당된다는 의미입니다.
가리왕산은 강원도 정선과 평창에 걸쳐있는 명산입니다. 예전 맥국의 갈왕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고 하여 갈왕산이라 하다 가리왕산이 되었다 합니다. 지금도 주민들은 갈왕산이라 부릅니다.
가리왕산은 남한강의 발원지입니다. 갖가지 진귀한 약초가 많아 약초꾼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며 정상부의 경사가 완만하고 또한 맑은 날 동해바다가 보일 정도로 경관이 좋아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좋은 산입니다. 그래서 펜션의 이름을 가리왕산이야기 라고 붙였습니다.
펜션으로 지은 집은 목조주택입니다. 여행객들의 구미에 맞추어 깔끔한 외관과 객실이 현대적이고 이국적입니다. 정원 한가운데는 무대도 꾸몄습니다. 펜션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음악회도 열어주고 영화도 상영해 줍니다.
전원생활 위해 세 번의 대학 공부
김선원씨는 전원생활을 준비하며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원래는 경영학을 공부해 회사에서는 관리 쪽 일을 주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원생활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다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전원생활을 하며 글을 써볼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농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골에 정착해 살려면 농업에 대한 지식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대학만 세 번을 다시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내가 썩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곳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반쪽 생활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도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직도 도시에 남아있습니다.
이따금씩 이곳에 내려와 일을 도와주고 올라가기는 하지만 남편이 하는 일이 달갑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김선원씨는 언젠가는 마음이 동할 것이란 생각으로 참고 기다립니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외지인이 아닌데도 이곳에 정착하려니 주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상대편에서는 그게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김선원씨는 이따금씩 그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로 이웃과 마찰이 생길 때도 있는데 그것은 원주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영역을 침해당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펜션을 하는 것에 대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못마땅해 하고 관광농원을 하는 것도 못마땅해 합니다.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이웃과도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며 어울려 사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렇게 서툴고 모자라는 전원생활의 시작입니다.
오랫동안 내리던 비도 때가 되면 햇살로 바뀌듯 김선원씨가 이곳서 꿈꾸는 전원생활도 기다리다 보면 가리왕산 꼭대기가 훤히 보일 정도로 하늘이 열리고 좋은 볕이 들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 가리왕산 이야기(www.mtvill.com)
200㎡ 집에 살며 다시 83㎡ 황토집 짓고…
살면서 너무 큰 집을 지은 것을 후회를 하면서 올해 또다시 83㎡ 황토집을 지었습니다. 펜션으로 쓰다 손님이 없으면 작은 집에서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남편과 경상도가 고향이 아내가 강원도 산마을에서 살며 느낀 전원생활이야기입니다. |
남쪽 끝 제주도가 고향입니다. 서울서 사업을 하던 것을 83년도에 강원도 원주로 옮겼습니다. 그때는 서울서 원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정리할 때가 됐습니다.
집이 있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 있어 굳이 같이 살 필요도 없었습니다. 원주에서 살아보니 서울과 비교했을 때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원주 주변에 터를 잡고 전원생활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치악산 자락에 터를 마련한 후 서울에 있는 아내를 불러 내렸습니다. 그것이 2000년 말이었으니 벌써 7년이 돼갑니다.
집 너무 크게 짓고 많이 투자한 것 후회
김태홍, 김위순씨 부부가 치악산 자락인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 이렇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남리는 치악산 국립공원 입구마을입니다. 치악산을 쳐다보고 있어 경관이 좋고 상류지역이라 물이 맑습니다.
이렇듯 경관 좋은 곳에서 살다보니 펜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습니다. 5년전 이들 부부는 일본에 가 2년 정도 살았습니다. 일 때문에 가게 되었는데 이곳 집은 비워두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대학 다니는 막내딸이 여름방학을 맞아 부모님들이 일본으로 떠나며 놀고 있는 집을 민박을 해도 좋으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자 막내딸은 인터넷에 올려 민박을 쳤는데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민박이 일본에서 일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계속 이어져 펜션이 됐습니다. 올해는 뒷마당에 황토집도 하나 지었습니다. 본채는 200㎡의 2층 집인데 새로 지은 황토집을 83㎡ 짜리입니다. 그것이 올 여름 히트작입니다.
펜션에 온 손님들이 황토집에 묵어보고는 오픈한지 불과 한달도 안돼 좋다며 2번씩 다녀간 사람들도 몇 명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펜션을 하게 되었지만 펜션을 해보니 재미있습니다.
우두커니 두 부부만 있는 것이 적적한데 손님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일도 생기고 말동무도 되어 생활에 활력이 됩니다. 게다가 일년 생활비도 너끈히 생기기 때문에 괜찮은 일입니다. 또 집을 크게 짓고 살다보니 부부만 사는 공간으로는 너무 넓어 외부사람들에게도 인심을 쓰고 있습니다.
자식들도 편하게 쉬었다가고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편한 공간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좋지만 결국은 그것이 전원생활에서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집을 너무 크게 지었다는 것, 집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는 것이 7년 전원생활의 가장 큰 실수입니다.
김태홍씨는 자식들이나 친척, 친구들이 오면 그래도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을 정도는 돼야 된다는 생각에 큰 집을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인 김위순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작게 투자하자는 쪽이었는데 결국 남편의 생각대로 큰 집, 최고급 집을 지었습니다. 살다보니 그렇게 덩치 큰 집이 짐이 됐습니다. 청소하고 관리하며 집을 받들며 사는 꼴이 되었습니다.
투자란 쪽에서 보았을 때도 크게 지으면 지을수록 감가상각으로 잃는 것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김위순씨는 전원생활을 시작할 때 소규모 투자를 권합니다. 금액으로는 1억2천만원에서 1억5천만원정도 투자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합니다. 집은 20~60㎡ 정도가 적당한 면적이라고 말합니다.
시골에서 크게 쓰는 것 없이 살아도 수익이 없기 때문에 벌어놓은 것으로 생활해야 하고 그렇게 생활하다보면 쌓아놓은 것 허무는 것은 잠깐이라는 것이 김위순씨의 충고입니다. 그렇게 땅과 집에 투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부부 사이라 말합니다. 부부가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있으면 시골집에서 두 사람만이 많은 시간을 갖고 살아도 겉돌게 됩니다.
노후에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는 마음이 전원생활을 하는데 무엇보다 종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원생활 초기 손님 치르느라 힘들어
그렇게 큰 집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 가운데 남편은 올해 황토집을 또 하나 지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커 평상시에는 작은 집에서 생활하고 본채는 펜션으로만 이용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 여름엔 본채와 함께 펜션으로 운영해도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 추가고 집을 짓게 됐습니다.
이 집을 짓는데 건축비만 8천만원 정도 들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한 인건비에 대해서는 계산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나무와 흙으로만 지은 집인데 제대로 지었습니다.
이 집을 지으려고 김태형씨는 2년 동안 집짓는 현장을 쫓아다니며 배웠습니다. 그리고 난 후 직영해 지은 집입니다.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황토블럭으로 벽을 쌓았습니다. 지붕은 너와로 올렸습니다.
“황토집을 지어놓으니 좋긴 좋은데 부담이 돼요. 남자들은 이렇게 벌려 놓으면 뒷바라지를 여자들이 해야 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게 되죠.”
아내는 남편이 지어놓은 황토집이 좋기는 한데 관리하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는 눈치입니다.
“여자들이야 남편 하나보고 전원생활 하러 들어오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남편은 시골에 내려와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집 짓는다며 무리하는 것을 보면 건강이 걱정돼요. 그래서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자고 시작한 전원생활인데 그런 것들로 건강을 해치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김위순씨는 전원생활에서 여자들이 할 일이 많다며 남편들이 그것을 얼마나 도와주고 그런 일들을 얼마나 줄여주는가가 전원생활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전원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간 손님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처음 몇 년간은 그것이 곤욕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들 부부의 천성에 집도 넓고 편하기 때문에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손님 입장에서는 일년에 한번 다니러 오는 것이지만 맞는 입장에서는 하루가 바쁘다보니 사람 좋아하는 이들 부부에게도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해 여름에는 집을 잠가두고 울릉도로 피신(?)을 갖다온 적도 있다고 웃습니다.
그래서 전원생활을 하게 되면 손님을 맞는 것도 요령껏 해야 한다는 점을 귀뜸합니다. 특히 손님으로 갈 때는 자기가 먹을 것은 준비해가는 것이 예의고 사용하고 난 후에는 깨끗하게 청소와 설거지를 해주는 것도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이 좋다고 합니다.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오면 말할 상대도 생기고 그것이 또한 이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것이 늘 즐겁습니다. 게다가 시골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이 흔치 않은데 그것이 수익도 가져다 주는 것이 매력입니다.
새로 지은 황토집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뿌듯합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집을 지어보고 싶다며 물어오는 것도, 그것을 설명하는 것도 김태홍씨에게는 즐거운 일입니다.
“시작할 때 계획을 잘 세워 적당히 투자하고, 살면서 부부가 서로 도와가며 집도 가꾸고 터도 가꾸며 산다면 도시생활보다 몇 배 즐거운 것이 전원생활입니다.”
이들 부부는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무리한 투자를 경계하라며 부부가 마음을 맞추어 살면 도시에서보다 몇 배 재미있고 가치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땅과 주민과 친해지는 것을 먼저 했습니다. 조그만 이동식 농막을 우선 갖다놓고 주말이면 내려와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한 6년을 그렇게 보내자 주민들과도 가까워졌고 땅도 알만했습니다. 그 때 집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주말주택으로 이용하지만 퇴직하면 정착할 생각입니다. 평창 금당계곡에서 주말주택을 짓고 사는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
펜션이 한창 무르익었던 재작년 여름, 평창의 금당계곡을 찾았을 때 백일홍과 벌개미취 꽃이 만발한 주말농장을 만났었습니다. 농장 한 켠에는 조그만 농막이 있었고 주변으로는 솟대며 항아리, 맷돌과 같은 민예품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곳 꽃밭을 가꾸며 농사를 짓고 있는 주인은 화가였습니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인 이선열씨는 주말과 방학 때 부인과 함께 금당계곡을 찾아 그렇게 농사를 짓고 있는 주말농부였습니다. 산중턱 농장에서 내려다보면 앞으로는 금당산 바위벽이 펼쳐져 있어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였습니다.
늦은 장마가 질척이는 가을의 문턱에서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이들 부부는 금당산을 내려다보기 알맞게 창을 낸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집터로 잡은 곳은 경치 아름답기로 소문난 금당계곡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집터로는 전국의 어디를 내놓아도 경관을 자랑할 만한 곳입니다.
1층은 주택, 2층은 펜션으로 지은 집
이선열 김영복씨 부부가 평창군 봉평면 유포리 산동네에 땅 3천여평을 구입한 것은 햇수로 8년 전입니다. 요즘은 이곳이 펜션과 래프팅으로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경치 좋고 한적한 시골 동네였습니다.
교사인 이선열씨는 퇴직을 하면 이곳에서 전원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땅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전원주택을 짓고 그 옆에 작업실을 만들고, 전시장도 짓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쉴 수 있는 카페가 있는 테마파크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것을 아트밸리라 이름을 짓고 하나하나 가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선열씨는 개인전을 아홉번이나 개최한 중견의 동양화가입니다. 경력도 화려합니다. 수원미협지부장과 경기미협지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경기, 전남 등 각종 미술대전의 심사위원과 대회장, 초대작가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재직하며 다년간 대학출강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부러웠던 것이 있습니다. 화가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미술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시골에도 이런 것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년퇴임하고 난 후 시골에 살면서 외국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작은 미술관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전원생활에 푹 빠져 살고 있는 아내 김영복씨는 남편의 이런 생각에 처음에는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시골에 내려가 산다는 것이 우선은 못마땅했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일이니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손에 이끌려 주말농사를 짓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습니다. 봉사단체인 한국청소년마을의 경기지회장으로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주말이면 갈 곳이 있다는 생각으로 늘 들떴습니다. 지금은 이곳 생활이 무척 행복합니다.
이들 부부가 이곳에 전원주택을 지은 것은 작년 11월입니다. 농막 하나에 의지한 채 6년간 주말농장으로 이용하다 터 660㎡을 전용 받아 150㎡ 크기의 목조주택을 지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까지 사용하던 농막은 방갈로형 별채로 마당가에 놓았고 창고로 사용하던 비닐하우스는 황토집을 꾸몄습니다.
집을 계획할 때는 단순한 전원주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짓는 과정에서 주변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펜션 구조의 방을 몇 개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고 하여 2층 방 2개는 펜션으로 꾸몄습니다.
굳이 펜션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2층을 1층 실내에서도 연결이 되고 외부에서 별도로 출입할 수 있는 현관을 만들었습니다. 펜션으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왔을 때도 서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기 때문에 좋습니다. 2층을 펜션으로 한 것을 매우 잘 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현직에 있어 이 집은 주말과 방학 때 이용하는 주말주택입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이곳 전원주택에서 농사를 지으며 전원생활을 즐기다 월요일 아침 근무하는 학교로 출근을 합니다. 퇴직한 후에는 이곳에 내려와 정착할 생각입니다.
주말농사 지으며 땅과 이웃주민과 친해져
이선열 김영복씨 부부는 이곳에 땅을 구입한 후 집을 지은 것은 꼬박 6년을 보내고 난 후였습니다. 집을 짓기 전에 땅과 친해지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농장으로 사용하며 집터부터 가꾸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 부부는 이웃 주민들과도 친하게 되었고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지역의 특징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선열씨는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쉬웠다고 말합니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는 선생님이지만 이곳에서는 영락없는 농부로 변신을 합니다. 이웃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 밭에 나가다보니 이웃들까지도 자신들보다 더 열심이 농사를 짓는다며 감탄해 합니다.
이렇게 농부로 적응해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 자연스럽게 주민들과도 친해졌습니다. 마을 체육대회나 행사가 있을 때면 스스럼없이 참석할 수 있었고 그런 어울림이 즐거웠습니다.
집을 짓기 전에 주말농사를 지으며 먼저 땅과 친하고 마을과 친하고 나자 집 짓는 일은 쉬웠습니다. 마을주민들도 이것저것 도와주려고 하여 아무 어려움없이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부인 김영복씨는 사람을 좋아하는 부부의 천성이 이곳 생활을 더욱 재미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손님 맞을 일이 많지만 그 자체를 즐기고 있습니다. 펜션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좋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렇게 전원주택을 지은 것은 이들 부부가 이곳에 이루려는 아트밸리의 꿈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가 이곳 마을에서 땅을 일구고 주민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것은, 찾아오는 사람들과 무엇인가 나누며 사는 것은 그 꿈의 전부일 것입니다.
■ 금당산 아트밸리(033-332-7048)
프랑스로 떠난 화가와 집을 지키던 여인
국내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유명한 고암 이응로 화가가 해방 전해에 구입해 15년 정도 살던 집입니다. 화가의 전원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얼마가지 못해 화가는 떠났습니다.
화가가 프랑스로 떠나자 그 집에 남은 아내는 여관을 운영하며 평생 집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 집과 인연이 되었던 화가도 여인도 모두 세상을 떠나자 모양을 바꾸어 미술관을 열었습니다.
수덕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시(新詩) 여류시인이었던 일엽스님이 출가해 거처했던 사찰 쯤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수덕사와 연관하여 수덕사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수덕여관입니다. 수덕사 일주문 앞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덕사와 담장을 나누어 쓰는 수덕여관은 그 역사로 보았을 때는 수덕사를 빼고 여관만으로도 충분히 유명합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 고암 이응로 화백이 살던 집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은 나이 마흔 살이던 1944년에 이 곳 수덕사에 터를 잡고 수덕여관을 열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수학여행차 수덕사를 들른 학생들은 으레 수덕여관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ㅁ자 형태의 키가 자그마한 한옥 여관이었던 그곳은 문화예술인이 즐겨찼았던 산실입니다.
귀국한 화가, 부인 곁에 머물며 암각화 새겨
이응로 화백과 수덕여관의 인연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혼의 상처를 달래려고 수덕사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 스님을 찾아왔던 나혜석이 이곳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선배 화가였던 나혜석을 만나면서 이응로 화백은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었고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뜨자 여관을 사들여 정착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전원생활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혜석으로부터 이응로 화백으로 인연이 된 수덕여관은 또 하나의 여성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말년까지 수덕여관을 지켰던 화가의 본래 부인인 박귀희 여사인데 프랑스로 떠난 이응로 화백을 기다리며 말년까지 산 곳입니다.
이응로 화백은 이곳에 정착한 후 수덕사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다가 박귀희 여사를 남겨둔 채 후배 여류화가인 박인경씨와 함께 1958년 프랑스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여관은 박귀희씨가 혼자 운영했고 그러던 중 이 화백이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 뒤 몸을 추스르기 위해 귀국해 박인경 여사의 곁에 2개월간 머물게 됩니다. 이때 화가는 뒤뜰 너럭바위 두 곳에 추상문자로 암각화 2점을 새겨놓고 다시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여관의 현판도 이 화백이 직접 쓴 것입니다.
2002년 화가의 부인 세상 뜬 후 방치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수업한 화가는 1935년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 남화의 대가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받고 근대적 교육기관인 도쿄 기와바타학교와 혼고연구소에서 동서양화를 수학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와 인연이 깊습니다. 1959년 프랑스로 가서 1989년 숨을 거두기까지 30여년간 수십 차례 세계유명 전시에 출품,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1963년 프랑스 살롱도톤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알려졌고 1968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난 1969년부터는 파리에 정착하며 동양의 서예와 문인화를 바탕으로 서양의 콜라주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화풍의 세계도 일궜습니다.
수덕여관은 1989년 이 화백이 작고한 뒤 소유권이 그의 장조카에게 넘어갔습니다. 2002년까지 이곳을 관리하며 살던 박귀희 여사마저 세상을 뜨자 관리가 안돼 방치되면서 훼손이 심했습니다.
그러던 것을 충남도는 여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그해에 도기념물 103호로 지정했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수덕여관을 ‘보존해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예전의 여관 운치 사라진 듯한 아쉬움
이런 과정에서 충남도는 아예 이 건물을 사들인 후 4억여원을 들여 올 10월 5일 ‘수덕사 선(禪)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문패를 달았습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입구에 자리한 ‘수덕사 선미술관’ 수덕여관은 1천54㎡ 부지에 건평 182㎡ 크기의 ‘ㄷ’자형 초가입니다. 7개의 방, 장지문, 툇마루, 부엌, 구들을 깔아놓은 온돌 등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고 했지만 옛날의 운치는 담아내지 못한 듯하여 아쉽습니다.
화가의 물감이 묻어있고 다른 여자랑 프랑스로 남편을 떠나보낸 부인의 기다림이 서린 기둥과 벽, 툇마루는 사라졌습니다.
예전의 겸손하고 소박하던, 정갈하기까지 하던 집은 사라지고 겉치장은 그렇게 해놓았지만 새로 지은 집이라 그런지 왠지 거만하고 윤택해 보여 거부감이 듭니다. 예전 손때묻은 여관의 운치가 그립습니다.
대문 위에 걸린 ‘수덕여관’이란 고암 친필 옥호는 그대로입니다. 마당에는 예전 그 자리에 예전 모습 그대로 누워 손님을 맞는 암각화가 국화꽃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미술관으로 바뀐 수덕여관에는 고암의 미공개 작품 20여 점과 서찰, 낙관, 제자 금동원의 작품 등 40여점을 전시되어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에 머물 때 그린 고암의 습작들입니다. 수덕여관 다락방에서 발견된 희귀본이라고 합니다. 수덕사 정경을 편안하고 넉넉한 붓질로 보여준 수묵담채는 당시 수덕사의 고즈넉함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평입니다.
최고의 체험농장 만드는 젊은 부부의 '꿈'
네 살짜리 아들을 둔 젊은 부부가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아 체험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원도 평창의 흥정계곡 입구인 봉평면 원길리에 자리잡고 있는 ‘메밀꽃천연염색체험농원’은 최근 문을 연 체험농장이며 펜션입니다. 젊은 부부가 가꾸고 있는 농장을 찾았습니다. |
평창에 있는 ‘메밀꽃천연염색체험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강희도, 강주선씨 부부는 도시에 살 때 주말부부였습니다. 남편 강희도씨는 직장이 있는 인천에서 살았고 부인 강주선씨는 친정이 있는 청주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강희도씨의 고향인 흥정계곡으로 들어와 부모님들이 살고 있는 땅에 체험농장을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오는 것이 좋았지만 부인 강주선씨는 시골생활이 처음에는 부담이 됐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렸는데 막상 와서 생활해 보니 도시에서보다 더윽 보람있다고 합니다.
특히 부인은 아동미술을 전공하고 천연염색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천연염색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공예관의 천연염색과정도 마쳤습니다. 이런 특기를 살려 농장을 천연염색체험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 펜션을 운영하고 손님들이 왔을 때 체험을 진행하는 사람은 부인입니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남편은 근처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직원으로 출퇴근을 합니다. 부부가 체험장에 매달려 있기에는 아직 자리가 덜 잡혔습니다. 남편은 부인이 하는 펜션일이나 농장일을 퇴근한 후나 휴일에 도와 줍니다.
농장에는 체험학습장과 펜션 등의 시설이 있습니다. 목구조로 지은 건물들은 서구형 스타의 외관을 하고 있습니다. 체험장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116㎡입니다. 1층은 체험학습장이며 2층은 숙박시설입니다.
체험학습장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쪽에는 펜션동이 있습니다. 펜션의 이름은 쪽빛하늘입니다. 원룸과 투룸, 독채형이 있으며 총 규모는 150㎡입니다. 펜션 앞으로는 연못이 있습니다. 남편 강희도씨가 집 짓고 남은 자재로 직접 지었다는 15㎡ 규모의 바비큐장도 있습니다.
총 부지면적은 9천900여㎡이며 가운데 넓은 마당이 있는데 봄부터 정원으로 가꿀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마당 한 켠에는 실습장과 식당이 있습니다.
이곳 체험농장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천연염색체험 외에도 압화체험, 규방공예 등이 있습니다. 모두 안주인인 강주선씨가 직접 진행합니다. 도자기와 목각(서각) 등의 체험프로그램도 준비 중입니다.
패키지형 프로그램도 운영 중입니다.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 등 단체고객에게 적합한 체험학습 패키지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 동아리, MT, 단체, 기업체 등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기간도 당일 코스에서 1박 2일~3박 4일까지도 가능합니다. 계절별로도 프로그램은 달라집니다.
젊은 부부는 하나하나 배워 가며 자신의 공간도 직접 가꾸고 있습니다. 그 공간을 운영할 프로그램도 직접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최고의 체험농장을 만들겠다는 꿈은 그렇게 영글어 갑니다.
■ 메밀꽃천연염색체험농원 033-335-2934
노년의 두 자매가 살며 운영하는 충주호반 펜션
부모님께 경치 좋은 충주호반에 전원주택을 지어드리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펜션이 됐습니다. 운영이 너무 잘 돼 한 채를 더 짓게 됐습니다.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것이 오히려 주인의 불만입니다. 노년의 두 자매가 살며 운영하는 펜션을 찾아보았습니다. |
충주시내에서 충주댐방면으로 가는 길은 산이 하나 가로막고 있습니다. 충주의 명산인 계명산인데 마즈막재란 고개가 있습니다.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 충주시 목벌동입니다.
목벌동은 충주호반에 붙어 있는 마을로 충주호가 생기며 수몰된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호수변에 마을을 형성하고 사는 곳입니다. 충주시내에서 마즈막재를 넘어 호수변을 따라 난 길을 타고 가면 포장길이 끝나는 곳에 작은 마을이 나옵니다. 이곳 마을 초입에는 기존 마을의 집과 다른 분위기를 한 통나무집이 두 채 있습니다. 충주호반을 내려다보고 있는 충주호반펜션입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직장동료들이 모여 호수변에 동호인주택을 짓겠다는 생각으로 사두었던 땅입니다. 동호인들 중 가장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은 이영훈씨입니다. 분당 아파트에 사는 부모님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전원생활을 원해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왕 전원주택을 지을 것이라면 부모님들이 적적하지 않게 일도 하고 용돈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펜션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충주호반펜션이 탄생했습니다.
펜션을 오픈 하고 난 후부터 그야말로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년 매출액이 7천만원을 육박했습니다. 작년에는 펜션 예약을 대행하는 ‘저스트고365’란 사이트의 최고 매출 펜션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펜션에 손님이 많아지면서 작년에 옆에 또 한 채의 펜션을 지었습니다. 두 채가 된 것입니다. 대지면적은 각각 496㎡(150평), 595㎡(180평)이며 건물은 119㎡(36평), 150㎡(45평)입니다. 다락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에 실평수는 훨씬 넓어 한 동이 230㎡(70평) 정도 됩니다. 펜션 객실수는 총 7개이며 관리동이 별도로 있습니다. 핀란드산 최고급 통나무를 이용해 지은 집이라 특히 펜션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이 펜션은 처음 이영훈씨의 어머님 김순자씨가 전원생활을 하며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져 마산에 살고 있는 화가인 언니 김영자씨를 공기 좋은 곳에서 함께 살자며 불렀습니다. 그렇게 자매는 충주호반에서 펜션을 관리하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쉬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전원생활이었는데 노인네들에게는 노동의 양이 너무 많습니다. 서울에서 사는 아들 이영훈씨가 주말마다 찾아와 집도 가꾸고 어머님이 하시는 일도 도와드리지만 노인네 두 분이 관리하기에는 너무 힘에 벅찹니다.
펜션을 통한 수익이 목적이었다면 즐거운 비명이었겠지만 전원생활이 우선이다 보니 자매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아 사는 것은 정말 좋아요. 펜션도 운영할 만한데 단골손님들이 점점 많아져 힘에 부칩니다. 옆에 조그맣게 집을 짓고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요.”
김순자씨는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 것이 즐겁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러면서도 돈 버는 재미는 쏠쏠하다고 말합니다.
“충주 시내까지 5분이면 나갈 수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 체육관에 가서 수영도 시장도 보는 등 이것저것 일을 보고도 오전이면 펜션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때면 펜션에 묵었던 손님들도 퇴실을 하고 청소를 시작합니다. 손님들이 많지 않다면 시내도 가깝고 공기며 경치가 좋은 곳에 사는 것이 더 없이 좋습니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서울에는 정말 가기 싫어졌어요.”
이영훈씨는 펜션 손님들이 늘면서 어머님이 힘들어하자 고민이 생겼습니다.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올 형편이 못됩니다. 그러기에는 직장에서 할 일이 많고 나이도 젊습니다. 그래서 펜션을 매각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원하는 사람에게 적당한 펜션입니다. 펜션 두 채의 올 예상 매출액은 1억5천만원 정도입니다. 이영훈씨는 펜션 마케팅과 관련한 모든 노하우를 넘겨줄 예정이며 매각 이후 지속적인 관리도 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펜션 홈페이지는 방문객이 많습니다.
충주호반펜션은 충주호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뒤쪽으로는 계명산이 있고 앞은 충주호입니다. 멀리 충주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펜션의 모든 객실에서 충주호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 충주호반펜션 018-242-2031
하오개마을서 야생화와 더불어 사는 화가
전원생활하면서부터 자연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캔버스도 돌입니다. 돌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자연이 됩니다. 돌에 그린 그림들로 전시회도 열 계획을 하며 야생화와 더불어 살고 있는 권영택 화가 부부를 만났습니다. 평창 진부의 산속 오지 하오개마을에서 입니다. |
화가는 막다른 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진부나들목을 나와 정선으로 가는 국도를 갈아타고 구불구불 계곡을 따라 산길을 갑니다. 가다가 다시 산길을 갈아탑니다. 정말로 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비포장길을 따라, 정말 사람이 살고 있을까를 몇 번이고 의심하며, 꾸역꾸역 산을 오릅니다. 핸드폰은 이미 죽었습니다.
화가는 그랬습니다. 국도에서 당목이재 쪽으로 넘어오면 좀 더 가까운데 도로공사 중이라 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도로 4km를 더 내려가 ‘할아버지 꿀 집’을 끼고 마랑치교를 우회한 도로를 따라 오라고 했는데 그 길도 험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게 한참 들어간 산속에 사람들이 여럿 살고 있었습니다. 도시사람들의 별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습니다. 화가가 말하던 삼거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도심의 삼거리는 번화합니다. 신호등에 따라 자동차들이 줄을 서 멈춰서는 도심의 삼거리와는 달리 산속의 삼거리에는 나무판에 보일 듯 말 듯 써 놓은 ‘하오개그림터’란 간판 하나만 덜렁 있습니다.
화살표를 따라 얼마를 더 가야 할지를 모르는 산을 오르고 고개를 넘습니다. 막다른 길이란 안내판이 있습니다. 길의 끝이었습니다. 화가가 사는 집이 거기 있었습니다.
산동네인 평창군 진부면 화의리, 하오개마을에 있는 집입니다. 집 앞 데크에서는 백석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민중화가 권용택 씨 부부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2001년도입니다. 수원에 살던 화가 부부는 막내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수도권 어디에 터를 잡으려 찾아다녔는데 땅값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주 문막을 거쳐 이곳 진부의 산동네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자연환경이나 경관은 다른 곳에 비할 데 없이 최고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지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도시를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집을 짓고 작업실 겸 전시장을 만들었습니다.
“전원주택을 처음 짓는 사람들은 흙집이나 통나무집과 같이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많이 선택하는데 우리는 가장 편한 집을 선택했습니다. 집을 짓기 전에 농촌 빈집, 황토집에 살아봤거든요. 그랬더니 시골에 집을 지을 때는 멋보다는 관리하기 편하고 따뜻한 집이 최고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주부들이 생활하기 편한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경험에 따른 실속 있는 집짓기를 택한 것입니다. 농사 욕심을 내 텃밭도 많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반듯한 땅만 있으면 농사를 지을 욕심을 냈지만 막상 그렇게 해보니 힘만 썼지 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빈 터만 보이면 야생화를 심습니다.
부인 이향재씨는 야생화에 취미를 붙여 살다보니 이곳 생활이 몇 배 재미있다고 말합니다. 이들 부부가 강원도 산속에서 정붙여 사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야생화 기르기입니다.
물론 권용택씨에게는 그림이 있습니다. 개인전을 10회를 열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중견작가입니다. 미술교사와 미술학원 운영을 했습니다. 진부로 들어오면서부터는 학원까지 접고 전업작가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사회참여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환경문제, 농촌문제 등이 그의 작품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주변의 자연이 소재가 되었습니다.
캔버스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입니다. 돌에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돌에 자연을 덧씌워 훨씬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그림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자연입니다. 조만간 돌에 그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도 열 계획입니다.
이런 권용택 화가의 작업과 부인 이향재씨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해 주는 것은 이곳에서 씨 뿌려 가꾸는 야생화와 자생식물들입니다. 그것들이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 모두가 삶의 질을 높여 살게 하는 경이로움이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도시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이들 부부는 때때로 불만입니다. 도시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몇 시간을 못 버티고 오락거리를 찾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찾아왔을 때 자신들이 가꾸고 기른 꽃과 나무들을 보여 주고 싶어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주지만 감동까지는 아니라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곳 자연에서 사는 화가 부부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서 격차입니다. 소중함에 대한 시각의 차이입니다.
그런 차이로 사는 것이 이들 부부의 산속생활 재미입니다. 도시민들이 느낄 수 없는 것까지 즐기며 사는 것이 자랑입니다. 그래서 이젠 이곳 산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간혹 예전에 살던 도시에 다니러 갈 때도 도시 사람들이 산에 와서 그러 듯이 얼마 못 버티고 이내 산으로 달려옵니다.
도시보다 산이 훨씬 좋고 산에 훨씬 재미있는 삶이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쉬워지는 전원생활
집 모양이나 정원이나 그저 소박하기만 합니다. 모양을 낸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무척 많은 신경을 써서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집의 모자람을 가꾸며 채워가는 것으로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뒤에는 처남이 함께 집을 짓고 살고 있어 의지도 됩니다. |
경기도에서는 어느 지역을 가 보아도 공장과 창고들이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특히 도심에서 가까운 지역이나 고속도로 진입이 쉬운 곳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이런 곳들은 어김없이 땅값도 비쌉니다. 전원생활을 위해 터를 잡기는 좀 망설여지는 지역입니다.
경기도 이천시 율면은 이런 수도권의 분위기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 그대로의 풍경입니다.
이천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율면입니다. 동쪽으로는 이천시 장호원읍과 충북 음성군 생극면이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안성시 일죽면이 되고 남으로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과 생극면이 됩니다. 북으로는 이천시 설성면입니다. 이천시 지도에서 남쪽으로 길게 꼬리를 내리고 있는 곳입니다.
수도권 외곽지역에다 변변한 고속도로 나들목 하나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자연환경은 잘 보존되었습니다.
교직에 있다 정년퇴임한 종청수씨가 전망이 좋은 야산 언덕인 율면 본죽리에 전원생활터를 잡은 것은 3년 전입니다. 퇴직 후 전원생활을 하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가지고 있던 그는 손위 처남이 전원생활을 목적으로 이곳에 밭을 사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이 살자며 터를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처남도 흔쾌히 승낙을 하여 660㎡ 규모의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퇴직과 동시에 집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집을 지으며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군더더기를 빼고 경제적인 집을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전원주택 중에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모양이나 색상과 같이 외관에 무리하게 투자하는 경우가 많은데 종청수씨는 그런 부분을 과감히 털어냈습니다. 규모는 두 부부가 살기에 적당하겠다는 생각으로 99㎡로 했고 별도로 창고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살기 편하고 관리하기 쉬운 집이면서 되도록이면 저렴한 비용으로 짓겠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습니다.
우선 설계는 농촌공사에서 제공하는 표준설계도면을 참고해 직접 했습니다. 거실을 넓게 하고 방 2개와 화장실 1개가 있는 구조입니다. 현관 공간을 넓게 했습니다.
전원생활은 바깥 활동을 많이 하게 되는데 현관이 좁으면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우선 답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작업복도 편하게 벗어놓고 거실로 들어오는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게 만들었습니다.
난방은 전기를 연료로 합니다. 배관이 필요 없어 겨울에 며칠 집을 비워도 얼어터질 염려가 없고 깨끗하며 보일러실이 필요 없습니다. 설치비는 조금 비싸지만 결국 경제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난방 제어 시스템도 꼼꼼하게 하였습니다. 각 방마다 별도의 제어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거실도 등분을 나누어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도록 계획했습니다.
벽은 황토로 했습니다. 외관상 보기에는 구운 벽돌처럼 보이지만 고압으로 찍은 순수황토 블록입니다. 모서리는 편안함을 주기 위해 원형으로 돌렸고 지붕은 콘크리트로 했습니다.
실내 벽면은 주방과 욕실을 빼고는 황토 그대로입니다. 한지도배를 하였지만 거실 한쪽 벽은 황토를 노출시켰습니다.
집을 짓는 공사는 시공업체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살면서 직접 하는 것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를 들어 현관 입구의 계단을 만드는 것은 직접 하지 못했지만 계단 난간을 세우는 일은 시간을 갖고 손수 하는 식입니다.
거실 앞에 있는 데크도 자재상을 찾아가 배워가면서 직접 만들었습니다. 마당가에 있는 나무 울타리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집을 지으니 건축비를 줄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심할 새가 없었습니다. 일도 재미있었고 직접 노동을 투자해 집을 가꾸자 집은 모양을 갖추어 갔습니다. 보람이었습니다.
마당은 자갈을 깔고 되도록이면 깔끔하게 했습니다. 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아내 박명선씨는 아직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전원생활을 위해 시골에 오는 것 자체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깥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처럼 살림하고 집안 가꾸는 것이 익숙해 바깥에서 할 일이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만약 마당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었다면, 화초라도 많이 심었다면 그것을 가꾸는 것도 큰 부담이 될 것 같아 우선은 자갈을 깔아 생활하기 편하도록 했습니다. 살면서 아내가 시골생활에 좀 더 적응해 바깥일에도 취미를 붙이면 정원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를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집 뒤에는 처남이 삽니다. 그에게 같이 집 짓고 살자며 땅을 떼 준 바로 그 손위 처남도 집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집을 짓고 남은 농토가 많습니다. 그 농토를 텃밭으로 씁니다. 처남네와 같이 집을 짓고 들어와 사니 서로 의지가 되고 좋습니다.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큰 땅에 큰 집, 화려한 집을 생각하다보니 쉽게 움직이지 못해요. 좀 편하게 생각하고 시작하면 돈도 많이 안들이고 쉽게 전원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천시 율면 본죽리에 정착하기 위해 투자한 자금은 1억2천만원 정도입니다.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당있는 황토집을 마련하는데 든 돈입니다.
그가 터를 내리고 사는 이천 율면지역은 ㎡당 20만원 정도면 집 지을 수 있는 땅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땅값이 저렴한 편입니다. 작은 면적의 땅을 구할 수 없다면 어울려 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면 좀 더 쉽게 전원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합니다.
약 3천㎡ 정도의 땅을 세 사람이 어울려 산 후 나누어 전원주택을 짓는다면 비용도 많이 줄일 수 있고 정착하기도 쉬울 것이란 얘기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전원생활은 아주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것인데 꿈만 꾸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종청수씨가 이렇게 집을 짓고 사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 친구나 옛 동료 후배들은 부러워합니다. 자신들도 이렇게 작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준비해야겠다고 말합니다.
모두 전원생활을 무거운 주제로 여겼던 사람들이었는데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쉬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 실려 마당에 퍼집니다. 텃밭 가장자리 덤불에는 찔레꽃도 한창이었습니다.
내년 이맘 때 쯤 집의 모습은 또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전원생활의 즐거움입니다. 그때의 향기가 궁금합니다.
귀농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능길마을’
마을 대표는 고향으로 귀농한지 15년을 넘겼습니다.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가 폐교된 것을 인수해 체험학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을의 중심이 돼 도시민들이 들어와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에 나섰습니다. 귀촌한 사람들이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해 마을 가꾸기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전북 진안의 능길마을을 찾아보았습니다. |
능길마을은 전북 진안군 동향면 능길리를 이릅니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의 덕유산나들목을 나서서 무주 쪽으로 10여분 정도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마을입니다.
53가구 150여 명이 사는 덕유산 자락의 전형적인 작은 농촌마을입니다. 특별함이 있는 마을도 아닙니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물 맑고 공기 좋은 마을, 인심 좋은 사람들이 마을의 자랑거리입니다. 다른 농촌마을처럼 젊은 사람들은 떠나고 마을 구성원들 대부분이 노인네들이란 것도 똑 같습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도 아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근에 큰 도시가 있어 도시민들의 진입이 쉬운 마을도 아닙니다. 주변에 개발 이슈가 있는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마을의 뒷산이 되는 국사봉 산자락을 따라 집단으로 촌락이 형성돼 있고 앞쪽으로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농경지를 가로질러 구량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 눈길을 돌리면 멀리 소백산맥의 자락들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무주가 아마 거기 어디쯤일 것이고 전북의 오지인 장수도 그쯤일 겁니다. 능길마을과는 연계가 될 수 없는 곳들입니다.
이런 마을이 최근 몇 년간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농촌 체험관광을 오는 어린아이들부터 마을 견학을 오는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공무원들, 거기다 최근 들어서는 도시를 버리고 들어와 살겠다며 찾아오는 도시민들도 많이 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마을의 중심이 되고 있는 산골체험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학교를 끌고 가는 마을의 박천창 대표와 부인 김미아씨 부부가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마흔여덟인 박천창 대표 부부는 귀농한 사람들입니다. 이곳 능길마을이 고향으로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능길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989년 말에 고향으로 귀농을 하여 폐교된 모교를 인수해 산골체험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인 김미아씨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 한 후 남편을 따라 능길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지금은 마을 부녀회 총무일을 맡고 있으며 산골체험학교에서 천연염색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인원이 체험학교를 다녀가지만 수익은 크게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래서 인진쑥 가공공장을 차려 생협을 통해 유통을 하면서 연간 4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다른 곳들이 100억 이상씩 정부지원을 받아 유명세를 치를 때 능길마을은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박천창 대표는 정부의 지원보다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자립심을 키우다보니 마을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농림부에서 주관하는 농촌마을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으며 박천창씨 대표는 농민의 날에 대통령 표창도 받았습니다.
폐교에 마을 도서관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
능길마을과 마을 대표 박천창씨가 관심을 갖는 것은 도농교류와 도시민 유치입니다. 젊은 사람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도시민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마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이 서서히 결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시민들이 하나둘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서 체류형주말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
이미 새울터 마을에 입주 예정들이 능길마을에서 박천창 대표와 함께 일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마을 간사인 송영철씨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현재 공사 중인 새울터마을이 완공되기 이전에 이미 능길마을로 내려와 터를 잡아 살고 있습니다. 가족들도 함께 내려와 아이들은 시골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능길마을 사무장 일을 보는 김성일 씨도 귀농한 사람입니다. 서울의 한 기업체 이사로 퇴직을 한 후 능길마을로 내려와 박천창 씨와 함께 마을일을 보고 있습니다.
능길마을은 ‘지역마을과 함께 하는 순환형 자립마을’을 표방하여 마을 가꾸기를 하고 있습니다. 외지인들이 귀농을 했을 때 마을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 귀농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는 친환경 장류와 지역 특산물을 가공하는 공장 설립 및 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박천창 대표는 인진쑥 가공공장을 설립해 생협을 통해 판매하고 있으며 이런 경험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수익사업을 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마을에 이주한 지 5년이 되는 유재철 씨는 능길마을 가공공장의 공장장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민들의 귀농과 전원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귀농자나 전원생활 하는 사람들이 마을로 이주해 함께 살면서 마을 가꾸기도 함께 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각종 행사들을 개최하고 있는데 올 여름 계획돼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7월 21일부터 25일까지 ‘원어민과 함께하는 팜스테이 경어캠프’가 예정돼 있으며 ‘한여름 귀농귀촌체험축제’가 8월 11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됩니다. 8월 15일부터 19일까지는 아토피 제로캠프도 열립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도시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할 계획입니다.
■ 문의 : 능길마을(063-432-0367)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기르며 시골살이 10년째
충주 쪽에서 원주시내로 들어오는 마지막 고개가 양안치입니다. 양안치 고개를 넘기 직전 고개 아랫마을이 운계리인데 산과 계곡이 좋습니다. 이곳 산자락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것으로는 꽤 오래 되었고 규모도 있으며 방문객도 많은 곤충농장이 있습니다. 벅스팜을 찾아 곤충농장을 가꾸며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
과거 곤충이라고 하면 징그러운 벌레나 해충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곤충이 산업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농업이나 기타 산업에 이용을 하기 위해 사육하는 곤충에서부터 애완용으로 기르는 곤충까지 다양한 형태의 곤충사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애완용 곤충 기르기는 전원생활을 하면서 취미로 즐기거나 사업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아이템이며 펜션이나 테마랜드 등에 접목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곤충을 전문적으로 기르는 업체가 급속도로 생겨나고 있으며 곤충을 소재로 한 자연학습원과 체험학습장 등이 지역별로 여러 곳 생겼습니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 귀뚜라미 등 애완곤충을 기르는 인구가 많이 늘었고 해충의 생물적 방제를 위한 천적곤충, 한약재 등의 질병치료 목적의 약용곤충과 식용곤충, 환경정화곤충 등 다양한 곤충들이 사육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방문하면 동호회 회원들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애완곤충은 기르는 재미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연과 생태계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학습교육교재로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애완곤충 시장은 1천억원 이상의 잠재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높은 분야입니다.
벅스팜은 장수풍뎅이와 왕사슴벌레, 넓적사슴벌레 등의 애완곤충을 사육하고, 곤충을 통한 체험학습을 실시하고 있는 곤충농장입니다.
안상호씨와 부인 김경희씨는 애초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살다 산속에 곤충농장을 차리고 귀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곤충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곤충 관련 일을 해본 경험이 없이 시작했습니다. 단지 어렸을 때부터 곤충을 좋아해 산으로 채집을 하러 가기도 하고, 딱정벌레를 잡아서 키우는 걸 즐겼을 정도였습니다.
안상호씨는 유통관련 일을 하다 1996년 일본으로 출장을 간 것이 계기가 돼 곤충농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애완 곤충 산업이 확산되어 있었고, 40년 전부터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애완곤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향후 수요가 늘 것이란 예상을 하고 1999년 과감하게 곤충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애완곤충을 판매하는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아직 대중화되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1년간 곤충을 사육한 후 직접 판매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들고 다니며 곤충을 팔았습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앞에 좌판을 펼쳐놓고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를 팔기 시작해 전단지를 돌리고,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배달해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아 사업적으로 차츰 자리를 잡아가면서 홈페이지 오픈해 곤충 관련 정보도 제공하며 인터넷상에서 곤충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안정이 되고부터는 지금까지 한 달에 1천 마리 이상 꾸준히 판매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곤충을 키우는 인구는 초기 대학생 매니아들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연령이 내려오기 시작해 요즘은 초등학교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아이들이 키우다보니 부모들도 함께 키우게 되고 그렇게 하여 어른들까지 곤충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상호씨는 원주 귀래면 미륵산 자락에서 처음 농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운계리로 자리를 옮겨 농장과 전시장, 체험장 등을 마련했습니다.
곤충농장은 2만 여 평 정도의 부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뒤쪽에는 숲이 있어서 곤충 채집도 하고, 아이들에게 체험학습도 실시합니다. 애벌레를 관찰하고 만져도 보고, 곤충이 자라는 모습을 과정별로 보기도 하고, 나무조각으로 곤충 모형을 만들기도 합니다. 숲에서는 나무의 종류와 구별법, 곤충들이 좋아하는 나무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유치원이나 학교, 가족단위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숙식을 할 곳이 마땅찮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펜션과 식당에 투자를 하고 싶어도 그 정도의 투자여력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 펜션을 짓든가 식당을 하겠다고 하면 자신이 갖고 있는 농장 내 부지를 잘라서 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안상호씨는 곤충농장의 창업도 컨설팅해주고 있습니다. 곤충을 기르는 기술, 노하우, 경험, 판매법, 체험학습 요령 등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창업을 도운 농장이 20여 곳 됩니다.
사업을 목적으로 농장을 꾸민다면 약 3~4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초기 투자 비용은 5천만원 정도듭니다. 수익성을 생각하면 1만 마리 이상은 키워야 합니다. 판로는 많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소매보다 도매로 나가는 것이 많습니다.
사육실은 큰 시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온도 조절이 가능하고 보통 곤충이 서식하는 환경인 25~27℃ 정도로 보온과 습도조절이 되는 공간이면 충분합니다. 애벌레와 성충을 사육할 수 있는 폐목이 필요한데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난 참나무를 주로 사용합니다.
부가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곤충농장을 운영하는 것은 취미로 곤충을 키우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논밭 농사처럼 고되지는 않지만 농한기는 없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일을 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것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 벅스팜 033-762-8421~2
해발 700m 장수 팔공산 자락에 흙집을 짓고
전북 장수 팔공산 자락의 마을길을 따라 또 들어가다 보면 저수지 뒤편, 언덕 위에 띄엄띄엄 집이 있습니다. 도시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집이란 것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김영희, 신정순씨 부부가 흙집을 짓고 사는 마을입니다.
전북 장수는 호남권의 최고 오지입니다. 지금이야 대전-진주간, 익산-장수간 고속도로가 뚫려 교통요지가 됐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개를 몇 구비 돌아 찾아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무진장 찾아가기 어려운 곳, 무진장 오지였습니다. 무진장이란 말은 무주, 진안, 장수 등 3개 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무진장 중에서도 가장 오지이며 가장 때 묻지 않는 곳이 전라북도의 동부에 자리잡은 장수입니다. 동쪽으로는 장안산과 덕유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서쪽은 팔공산, 남쪽은 대망산, 북쪽은 장등산 등 빙 둘러 큰 산들이 감싸고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오지에 속하는 곳이며 읍소재가 해발 400m에 이르는 고원지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고속도로가 속속 개통되면서 주변 대도시와 교통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전주까지는 32㎞, 남원 43㎞로 30분 이내 거리에 있으며 광주까진 96㎞, 대구 142㎞ 거리로 1~2시간 정도 걸립니다. 부산 192㎞, 서울까지는 245㎞입니다.
이렇게 교통이 좋아지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보니 최근 들어 전원생활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장수읍 서쪽 팔공산 자락인 송천리에 자리 잡은 김영희, 신정순씨 부부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입니다.
이들 부부는 익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원광대학교 근처의 단독주택은 전원주택이나 마찬가지로 환경이 좋습니다. 하지만 남편 김영희씨의 건강이 나빠 나이가 좀 더 들면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동네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은퇴 후 전국에 전원생활 하기 좋다는 곳은 모두 찾아다녀보았습니다. 강원도 평창에서부터 영월, 충북 단양 등 잡지나 신문에 전원생활 이야기만 나오면 방문을 하여 사람도 만나고 이것저것 정보도 얻으며 살만한 터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자리를 택했습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곳이며 교통도 편리했습니다. 장수나들목에서 20분이면 닿을 수 있고 장수읍에서는 10분 거리입니다. 살기 좋은 곳이란 700m 해발에 주변의 계곡이나 전망이나 전원생활의 터로 어디 하나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 살고 있는 익산에서도 가까워 쉽게 오갈 수도 있는 곳이라 터를 마련했습니다.
국도에서 한적한 마을길을 타고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만나는 작은 마을의 언덕입니다. 팔공산 자락이 뒤를 받치고 있으며 마당가로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한 계곡이 되어 흐르는 곳입니다.
원불교 사업단에서 손으로 직접 찍어 판매하는 황토를 구해 집을 지은 것이 작년 이맘때쯤입니다. 집 지은 지 일 년 정도 됐습니다.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놓고 두 부부가 기거를 하면서 직영 공사를 했습니다. 목수 등 집 짓는 기술자들을 직접 불러 공사를 했습니다. 밥도 직접 해주었습니다.
집을 지으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이 남들에게 보여줄 집이 아니니 두 부부가 살기 편하게만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용적인 집 짓기였는데 막상 짓는 과정에서 욕심을 좀 냈다고 합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을 지키지 못하고 욕심을 낸 것에 대해 김영희씨는 후회합니다.
욕심이란 다름 아닌 집의 크기가 커졌다는 것과 내부 마감 자재가 생활에 필요치 않는 부분에서 고급화 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익산에서 살고 있으면서 이곳은 주말주택이나 별장처럼 이용할 생각으로 집을 계획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들어와 살 생각도 했지만 우선은 도시와 시골생활을 번갈아 할 생각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집을 계획했는데 막상 지으면서 면적이 좀 커졌습니다.
주말주택으로 살아보니 현재 본채로 지은 73㎡의 집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황토로 지은 별채와 집을 짓기 전에 임시로 기거하던 컨테이너 집도 별도로 있습니다.
집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은 7천만원 정도, 이것저것 하다 보니 1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시골생활에 어울리도록 전통공법으로 손으로 찍은 황토만 사용해 집을 지었으며 방바닥도 한지로 직접 만든 전통식 장판을 깔았습니다.
마당 앞으로는 계단식으로 텃밭이 있는데 정돈이 매우 잘 되어있습니다. 부인 신정순씨의 텃밭 가꾸는 솜씨입니다. 애초에 남편이 이곳으로 터를 잡았을 때 따라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워 반대를 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전원주택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시골에서 살겠다고 나서는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곳 생활이 새록새록 재미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텃밭을 가꾸는 것은 남편보다 아내의 몫이 되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 정도로 텃밭 농사를 짓는 것이 싫지 않습니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 집 짓는 일도 직접 한 것들이 많습니다. 텃밭 한쪽 언덕에는 흄관을 이용한 토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당가에는 그네도 만들어 놓았고 바람개비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계곡에는 평상이며 물레방아를 손수 만들어 놓았습니다.
김영희씨 부부가 사는 곳처럼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모기 없이 살 수 있는 장수읍 주변의 토지 가격은 3.3㎡에 4만~6만원 선입니다. 이 정도 생각하면 전원주택지로 좋은 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때가 묻지 않은 곳이라 더욱 가치가 있는 지역입니다.
가족들이 가꾸어 가는 정원 아름다운 펜션
겨울이 끝나가는 2006년 3월 겨울, 횡성 태기산 자락의 마을은 아직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배순호 씨 가족은 펜션을 지어 이사온지 얼마 안 된 초보 시골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집은 매우 썰렁했습니다. 그 집을 한 가족 네 식구가 2년 동안 살며 아름다운 집으로 가꾸어놓았습니다. 가족들이 손수 가꾸며 사는 정원 아름다운 집을 소개합니다. |
서울서 사업을 하던 배순호씨는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횡성의 둔내 삽교리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습니다. 노부부가 공기 좋고 물 좋은 산촌에서 편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내와 둘이 그림 같은 집에 꽃밭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할 생각이었는데 살다보니 주변에 있는 농사 짓는 사람들은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일을 했습니다. 혼자만 놀고먹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여 집 옆에 펜션을 지었습니다.
별무리펜션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밤하늘의 별이 무리를 지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입니다.
가볍게 생각한 펜션이었지만 막상 아내와 단둘이서만 운영하려니 힘에 부쳤습니다. 그때 마침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던 큰 아들 내외가 참여의 뜻을 비쳐 가족 넷이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큰 아들은 펜션에 관심이 많았고 부인 한영주씨는 평소 시골생활을 동경했던 터라 남편의 결정을 순순히 따랐습니다.
이들 가족들은 손님이 있는 주말이나 손님이 뜸한 평일이나 항상 바쁩니다. 손님이 있을 때는 펜션을 운영하기 바쁘고 손님들이 없을 때는 청소하고 잔디 가꾸며 정원 손질하기 바쁩니다.
처음 집을 지었을 때는 주변이 정돈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녹지도 없었지만 살면서 집도 정돈이 되고 화단도 만들고 정원도 가꾸어져 집은 점점 아름다워졌습니다.
건물은 배순호씨 부부가 직접 디자인을 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전원주택 모양에서 탈피해 독특하게 지었습니다. 덕분에 지나가다 길을 멈추고 들리는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건축자재 사업을 오래 한 배순호씨의 남다른 안목과 부인 유지민씨의 세련된 감각이 어우러져 지어진 집입니다.
펜션의 구성에는 10년 넘게 일본에서 유학을 한 며느리 한영주씨의 경험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펜션 역사가 20~30년 정도 앞섰습니다.
세 동으로 나누어 지은 집은 테크로 연결했습니다. 목구조로 하여 외부는 천연원목으로 마감했으며 내부는 천연페인트로 마감했습니다.
펜션 입구에는 휴게실을 만들었습니다. 이 휴게실에서는 식사와 커피를 제공하고 손님들이 모여 담소하는 장소입니다.
3천㎡ 되는 정원에는 꽃과 나무들이 가득합니다. 집 뒤 동산도 꽃을 심고 정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손님들의 산책로입니다.
별무리펜션 033-345-6166
친환경농사 짓는 재미로 주말 보내는 부부
울산에 사는 손익출, 김순기씨 부부는 주말이면 포항 탑정리의 주말주택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습니다. 취미와 실익, 건강까지 챙길 수 있어 일석삼조라는 것이 부부의 말입니다. |
안전한 곳이 최고의 터
울산에 살며 현대중공업에 근무하고 있는 손익출씨와 부인 김순기씨 부부는 금요일이면 괜시리 마음이 바빠집니다. 주중에는 울산의 아파트에서 지내지만, 주말은 포항 탑정리의 주말주택에서 보내며 500평이 넘는 밭과 1천평 논을 가꾸는 농부로 변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부부가 탑정리의 폐가를 산 것은 손익출씨가 정년퇴직을 5~6년 앞둔 99년입니다. 노후를 위해 시골생활을 준비하던 손익출씨 부부는 알맞은 터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다 고향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의 빈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비학산, 많은 유명인들을 배출하여 영험하다고 소문난 이 산의 날개 끝에 앉은 집입니다. 집의 정면으로 겹겹이 산이 보이며 계곡이 집쪽으로 향해 있어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터라고 합니다. 집터를 본 3명의 풍수전문가들이 하나같이 명당이니 필히 사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50년도 넘은 슬레이트집으로 6.25 때 맞은 포탄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쓰러져가는 폐가였지만 손익출, 김순기씨는 망설임 없이 이 집을 구입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라는 것 외에도 평소 생각하고 있던 전원생활터의 조건을 고스란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익출씨가 꼽는 전원생활터의 조건 첫째는 재해에서 안전한 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불이나 홍수, 산사태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교통이 편리하고, 병원이 가까워야 하며, 공기·땅·물이 깨끗한 청정지역이어야 합니다.
탑정리는 서포항IC에서 10분이면 도착하며 대구 40분, 포항 30분 거리로 교통이 편리하고, 땅이 붉은 황토흙으로 토질이 좋은 곳입니다. 또 근처에 공장이 없으며, 마을 전체에서 우렁이 농법으로 친환경 벼를 키우고 있어 수질도 깨끗합니다.
고향에서 30분 거리로 멀지 않은 점도 이곳을 선택하게 된 한가지 이유입니다.
"시골 땅을 구하려면 우선 고향 근처의 땅부터 알아보는 게 낫지. 나이 먹어 사회생활하면서 사귄 사람들은 퇴직하고 나면 남남이 될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고향에서 어릴 때 같이 컸던 친구들은 무슨 일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고, 또 집안 대소사도 함께 의논할 수가 있거든."
이렇게 손익출씨 부부는 탑정리에 집과 함께 밭 500평, 논 1050평을 함께 사서 전원생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시골 살면 마을 발전 이바지 의무
터를 마련한 뒤 2년 후에 폐가 리모델링에 들어갔습니다. 기존 집에서 크게 바꾸지 않고, 디딤돌이 있던 자리만큼만 증축했습니다. 기둥은 거의 손대지 않고 페인트만 칠해주었고, 오래된 소나무 대청마루도 그대로입니다. 대신 나이 들어서도 오랫동안 살려고 문턱을 낮추고 단열재와 방음재를 보강했습니다.
특히 방음벽과 이중창으로 방음에 신경을 썼는데, 이는 이웃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농촌주민들은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도시생활 패턴으로 생활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이웃에 폐를 끼칠 수 있습니다. 또한 친구들이 놀러와 밤 늦게까지 떠들고 술을 마시는 것도 큰 소음입니다.
손익출씨에게는 그 나름의 전원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아무리 도시에서 돈이 많고 성공했다고 해도,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집을 지어놓고 위화감을 조성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농촌주택이나 폐가를 리모델링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며 마을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도 내고, 마을 일에 참여하면서 농촌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 시골에 살려는 사람의 의무가 아니겠냐고 그는 묻습니다.
작년에 경상북도에서 5도2촌 장려금 500만원을 지원받은 그는 집 옆에 방갈로를 지었습니다. 1층에는 화장실과 욕실, 2층에는 손님방이 있는 이 방갈로는 마을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마을에 마땅히 쉴 만한 그늘이나 쉼터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 TV나 장기판, 바둑판, 침구 등을 가져다놓고 누구라도 와서 놀다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것입니다. 손익출씨 부부의 집에는 대문도 없고, 열쇠를 걸어잠그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언제나 들어와서 쉴 수 있으며, 창고 큰채의 열쇠까지도 마을 부녀회장에게 주고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집이 잘 지켜지고 서로를 믿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인 김순기씨는 마을주민들과 우애를 기르기 위해 녹색회라는 친목계를 만들었습니다. 한달에 한번 모여 수다도 떨면서 친목을 다질 뿐만 아니라, 마을 입구에 무궁화나무를 쭉 심어서 무궁화길을 가꾸는 등마을 미화 활동도 합니다. 주말이 되면 울산에서 탑정리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이제 손익출씨 부부만이 아닙니다.
손익출씨가 지인들에게 마을에 있던 폐가를 사라고 권해, 이곳에서 주말전원생활을 즐기게 된 집이 5가구나 됩니다. 모두 천만원대의 저렴한 가격에 폐가를 사서 알차게 꾸며나가고 있는 집들입니다. 마을 입장에서는 흉물스러운 폐가가 없어지니 좋고, 그들로서도 동지가 있는 곳에서 부담없이 전원생활을 즐기게 되었으니 일거양득인 셈입니다.
우렁이농법으로 친환경 쌀 재배
비록 주말에만 내려와 농사를 짓는 주말농부지만 손익출, 김순기씨의 농사이력을 보면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친환경으로 논 1천평과 밭 500평 농사를 짓고 있으며, 무시 못할 소득도 올리고 있습니다. 우렁이를 사용해 약을 치지 않고 재배한 쌀이 20가마니 정도 되는데, 이것을 울산의 같은 아파트 주민들에게 알음알음 직거래로 판매합니다. 믿을 만한 친환경 쌀인 데다 인공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부부가 일일이 태양볕에 말린 쌀이어서 찰지고 윤기가 돕니다.
"첫해 가을에 우렁이벼를 콤바인 포대로 95포대를 수확했어. 어렸을 때 굉장히 가난해서 평생 땅 한평 갖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벼를 수확하고 나니 눈물이 저절로 나는 거야. 친지들에게 한포대씩 나눠주는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
손익출씨가 첫 수확의 기쁨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참 벼를 수확하는 시기인 요즘 부부는 새벽 5시면 일어나서 벼를 베러 논으로 갑니다. 해가 뜨지 않아 밤이나 다름 없는 데도 더듬더듬 낫질을 하며 기계가 벨 수 없는 부분을 베어내는 것입니다.
밭에서는 올해 감자를 27상자나 캐었습니다. 손익출씨네 밭이 약을 안 쓰고 깨끗하게 짓는다고 소문이 나서 같은 농사를 짓는 이웃주민들도 한상자씩 사가더니, 정작 부부가 먹을 감자는 거의 남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사실 손익출씨는 작년에 정년퇴직을 한 후, 아예 이 마을에 내려와 농업연구를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콩을 직접 길러서 장도 담고, 콩나물 공장을 자동으로 만들어볼까 생각도 했고, 솔잎과 오가피로 기능성 달걀을 개발할 계획 등 몇가지 아이템을 농업기술센터와 함께 연구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년퇴직을 한 후에 회사에서 다시 근무해달라고 요청해와서 예정에 없이 3년 정도를 더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미 퇴직을 한 사람을 다시 부를 정도로 인정받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손해가 많다며 웃습니다. 특허 내려고 했던 아이템도 이미 하나 선수를 뺏겼고, 그가 빨리 내려와 마을 발전에 기여해주기를 바라던 마을 사람들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취미와 실익을 겸한 시골생활
"시골생활하는 게 참 재미있어요. 씨앗 심어놓고 일주일 있다 와보면 이만큼씩 자라 있거든요. 배추가 얼마나 자랐는가, 고추가 얼마나 자랐는가 매번 설레고. 한밤중에 왔더라도 플래시 들고 나가 밭을 먼저 살펴봐야지, 다음날까지 못 기다려요."
김순기씨는 작물 키우는 게 아기 키우는 것과 똑같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정성을 쏟고 있으며 보람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한편 손익출씨는 시골생활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도시에 살면서 취미로 골프 치러 나간다고 하면 하루에 20~30만원은 들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시골 내려와서 주말을 보내면 기름값 정도밖에는 안 들지. 밭에서 채소도 캐서 먹고, 등산도 하고, 봄이면 약초도 캐고, 건강도 챙기고. 어느 것이 낫겠어?"
올 여름엔 회사 동료들이 놀러와 휴가를 보내고 갔는데, 도무지 갈 생각을 안 하더라며 그가 웃습니다. 집 뒤의 도랑에서 30cm 되는 메기를 잡고, 다슬기 잡아서 매운탕 끓이고, 근처 저수지에서 낚시도 하면서 지내다가니 다들 떠나기 아쉬워하더라는 것입니다.
손익출, 김순기씨 부부에게 이제 이곳은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년 후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에는 이 마을에 내려와 살 생각이라는 그들은 이미 훌륭한 탑정리 주민이었습니다.
전통한옥 산촌으로 옮겨와 다시 짓는 이유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전호상 박사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정감 있는 마을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의 전통마을과 오늘의 농촌마을은 물론, 국내외 생태마을과 최근에 조성된 새로운 개념을 적용한 마을들을 둘러보고 연구도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친근감 있고, 주변 환경과도 조화가 되는 전통 한옥이 오늘날 친환경 주거에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런 한옥이 여러 채 이웃하면 전통과 현대가 조화되는 새로운 농촌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위해 올 봄부터 첫 번째 한옥을 직접 짓기 시작했습니다.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유동리 애고지 마을의 머우네골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가능성의 미래를 꿈꾸며 의욕적으로 한옥을 짓고 있는 전호상 박사를 만나보았습니다.
최근의 농촌은 1차 생산물의 생산지로서 뿐만 아니라, 전원생활을 위한 도시인들의 휴양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지원하고, 확산시키기 위하여 전원마을이나 귀농, 귀촌자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특히 농촌의 경관은 도시민을 끌어들여 농가의 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지자체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촌의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 형성과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잘 사는 마을이 되기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횡성 머우네골에서 집을 짓고 있는 전호상 박사는 이런 농촌마을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를 오늘의 농촌에 적용시켜 보려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생태산촌만들기 모임’에서 운영위원을 맡아오면서 앞으로의 농산촌의 변화와 새로운 공간 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조성되는 마을은 수십 수백년을 이어오며 만들어진 전통마을과는 달리 비교적 빠른 시간에 계획되고, 조성됩니다. 또한 긴 세월을 통해 조성된 오늘날의 농촌 마을은 이농 ? 이촌으로 사람들은 빠져나가 가옥들이 허물어지고, 마을의 모습이 깨어져 예전의 모습이나 정감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전호상 박사는 이런 농촌의 현실을 고민하면서 농촌마을의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기 위한 연구를 하여 ‘계획공동체마을의 공간구성’이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불어온 환경문제를 풀기위해 생태마을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마을을 방문해보고 알게 된 것은 마을 형성에 참여한 입주자들이 생태적으로 살고자 하는 점은 강조되었을지 몰라도 자연소재의 건축 재료를 사용하여 자연경관이 좋은 농산촌 지역에 지어진 전원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커뮤니티를 중요시하는 구성원들이 새로운 마을의 공간을 계획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한 것입니다.
전호상 박사는 처음부터 전통건축을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현대건축을 전공하다가 1990년대 초부터 ‘초록바람’이라는 작은 환경모임에서 활동하면서 현대를 풀어갈 화두를 전통에서 찾으려고 전통건축과 마을을 공부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친환경적인 삶을 위한 생태건축, 생태마을을 우리의 전통적인 가옥과 마을 속에서 찾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한옥은 규모나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줍니다. 특히 구성원 수에 비해 너무 넓은 실내공간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공간 활용과 달리 전통 한옥의 공간은 넓지 않지만 다양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고,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외부에서 볼 때는 그 집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래등같은 기와집이라도 실제 면적을 따지면 그다지 큰 면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배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심리적 안정감을 줍니다.
한옥이 가지는 규모의 적정성과 공간의 합리성은 양옥에서도 적용 가능하지만, 적용된 사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전통마을은 이웃과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특징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면서 생기는 것이 마을의 활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외국에서 조성되는 생태마을, 공동체마을 등에서 잘 나타나는데, 정작 우리의 농촌마을에서는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한옥의 공간구성을 잘 활용하여 새로운 마을조성에 활용하려고 합니다.
최근의 농촌 주택의 경우 외형이나 공간구조에 있어 이국적인 형식의 전원주택을 선호하여 대체로 박스형태의 뾰족지붕을 가진 집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대안적으로 한옥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구현해 보고자 직접 지어보기로 했습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전호상박사는 거의 대부분 도시 생활을 했습니다. 고향에 대한 미련이 많았지만 떠난 지 오래라 아는 사람도 없었고, 서울에서 너무 멀어 자주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또 아이들을 위해 도시의 아파트가 아닌 농촌지역에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모가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자녀들이 방학 때면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을 새롭게 만들 생각을 하다가, 강원도 횡성을 택했습니다. 횡성읍내에서도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한참 들어간 곳이 청일면이며 면소재지에서 또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이어가며 한참 산속으로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애고지 머우네골에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곳에 자신이 생각했던 생태적이고, 전통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한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농촌에 짓고 있는 집, 특히 전원주택이라고 불리는 집들은 대부분 사각형 평면을 하고 있습니다. 현관을 들어가면 거실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방, 주방, 화장실 등이 배치됩니다. 거실 한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평면이고 집짓기 편한 구조입니다. 이런 집들은 전통 한옥이 가지고 있는 아늑한 마당공간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편안한 안쪽 공간이 없으며 모두 바깥을 향하게 돼 집 구조가 단순한 덩어리 형태로 외부공간에 대해 내부공간이 단절되게 보입니다. 이런 경우 집을 감싸는 담장이나 정원을 만들지 않으면 사방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는 구조입니다. 결국 건물 내부로 들어와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ㄱ’자, ‘ㄷ’자 형태로 지어진 전통한옥은 대청을 중심으로 마당안쪽 모서리 공간이 생기고, 안모서리 중심으로 앞마당은 건물들로 감싸지게 되어 안정되고, 아늑한 마당공간을 얻을 수 있어 사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전호상박사가 한옥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공간이었고,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내고 싶어 집짓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 집의 주요 개념은 복원과 재활용 그리고 수수함과 정갈함입니다. 구옥을 헐어 새가옥을 짓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그 집의 이력이 살아 있다는 의미가 있으며, 세월의 때와 향기가 남아 수수하고, 내부는 단순하면서 정갈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헐린 한옥 2채의 목재와 기와, 석재 등을 구입해 머우네골로 옮겨 썩은 부분은 도려낸 후 보강하고, 모자라는 것들은 새로 구입해 안채와 사랑채 두동의 한옥을 짓고 있습니다. 990㎡ 면적의 부지에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 안채는 뒤쪽으로 바짝 밀어 붙이고 한쪽 변으로는 ‘一’자형 사랑채를 앉혀 전체적으로 ‘ㄷ’자형 배치로 동남향(乾坐巽向)의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ㄷ’자 형태로 집을 펼쳐놓아 규모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99.2㎡입니다. 고작 30평 밖에 안 되는 면적이지만 대청에 안방과 사랑방, 누마루 등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71.66㎡은 안채는 거실격인 대청을 가운데 두고 방 3개와 주방&식당, 화장실 2개가 있고, 사랑채는 방 2개, 화장실, 누마루가 있으며 그리고 콘테이너를 이용한 창고가 있습니다.
방의 규모는 전통한옥의 크기 그대로 사용하여 오붓한 공간이 되게 하였고, 전화나 TV 등은 각 방마다 세간살이들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에 두어 수납공간의 문을 닫으면 단정하게 정돈된 정갈한 방만 남게 됩니다.
올 5월부터 집짓기를 시작해 7월 27일 상량을 했습니다. 현재 지붕과 벽체 등의 공사는 마무리 짓고 내부 마감 및 보일러 등 설비부분 공사, 마루공사 등을 남겨두고 있어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입주는 한 달 후 쯤 가능하겠지만 변수는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기간은 늘어났고, 비용은 많이 추가되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제대로 된 기술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호상박사는 이 집을 지으며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에 주변에 있는 기술자들을 수소문해 함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숙련도가 떨어졌고 집 짓기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미흡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책임감 없이 대충 마무리 하는 데 익숙한 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약속대로 공사 진행이 되지 않아 시간은 흘러가고, 잘못된 것들을 다시 하면서 비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진행 중인 한옥이 완성되고 나면 공동체와 생태적인 삶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머우네골을 ‘한옥골’로 만들어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하게 진화되고 있는 오늘에 지어지는 한옥을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고, 농촌지역 경관과 한옥의 어우러짐을 연출해보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전통 가옥이 절대 불편한 집이 아니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 집인지, 그렇게 모여 더불어 사는 마을이 얼마나 좋은 마을인지 보여주고 싶고, 그리고 확인도 해보고 싶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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