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0

醉月 2009. 9. 12. 08:30

  박두진「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
   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
   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
   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
   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
   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
   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열대와 사막지대에 있는 나라치고 태양을 국기로 삼고 있는 경우는 없다.대개는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파키스탄 알제리 튀니지같
은 아랍국가들이 그 본보기다.만국 공통의 적십자기마저도 이슬람 문화권에 오면 붉은초승달로 바뀐다.모든 것을 태워 죽이는 열
사의 햇빛보다는 서늘한 달빛이 더 고마운 풍토탓이다.인도에 연원을 두고 있는 불교 역시 달의 상징성이 해를 앞지른다.

 

그래서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라향가에서는 해보다 달이 절대우위를 차지한다.「찬기파랑가」에서 화랑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구름을 열치고 나타나는 달인 것이다.  한국문화의 뿌리는 남방적인가 북방적인가.

이런 문제를 이 자리에서 다루기란 힘겨운 일이다.하지만 한국문화의 원형은 북방과 남방,그리고 유목과 농경의 양극 문화를 융합한 매개형문화라는 것만은 밝혀둘 필요가 있다.


  북방적인 온돌방과 남방적인 마루방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처럼 조선조의 궁중 상징물인 오봉일월도(五峰日月圖)
에서는 해와 달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다.한국민족의 정서와 그 시가의 주류가 달쪽에 치우쳐 온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생활
문화의 기층을 이루어온 십장생도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달이 아니라 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시점에서 보면 한국시에서 해를 복권한 박두진의 시 「해」는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태백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그 시에서 처음으로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라는 달빛 부정의 선언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대신 애띤 것 고운 것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으로 향한 대낮의 화살표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박두진의 「해」가 「존재의 절정」을 추구하는 말라르메의 태양과 같은 것은 아니다. 시의 첫 행만 읽어봐도 그것이 세계의 모든 그림자를 소멸시키는 정오의 태양, 사물의 정수리위에서 빛나는 그 절대의 태양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박두진이 노래하고 있는 해는 「솟아 있는 해」가 아니라 「솟아라 !」고 말하고 있는 화자의 욕망속에 잠재해 있는 해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눈앞에는 해가 아니라 달이, 그리고 대낮이 아니라 밤이 있다. 즉 달밤속에서 노래부르는 해라는 사실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아 솟아라」로 시작되는 그 첫 행은 「해」라는 말과 「솟아라」는 말이 무려 3번씩이나 반복되어 있다. 반복은 시에 있어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소리의 층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의미론적 층위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날자 날자 날자-」라고 외치는 이상의 「날개」 의 마지막 절규가 오히려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날 수 없는 절망의 말
로 들리는 것처럼 「해야 솟아라」는 반복속에서 우리는 깜깜한 밤이나 쓸쓸한 달빛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해야 솟아라」라는 말은 바로 그 다음 시행…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란 말과 대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해」는 「달」로,「낮」은「밤」으로, 그리고 「솟아라」라는 희망의 말은 「싫여」라는 부정의 말로 뒤집혀 있다. 더구나 우리는 「눈물같은 골짜기」와 「아무도 없는 뜰」이란 말에 서 달의 공간성과 의미소를 추출해 낼 수가 있다. 달의 무대는 골짜기와 빈 뜰의 폐쇄성과 공허성이며, 그 의미소는 슬픔과 고립감(아무도 없는)이다. 그러나 그와 대응하는 해의 공간과 그 의미소는 바로 그 시행뒤를 잇는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싫여」는 「좋아라」가 되고, 눈물과 아무도 없는 쓸쓸함은 깃을 치는 춤과 신명으로 바뀌어진다.
특히 중요한 것은 「눈물같은 골짜기」와 「아무도 없는 뜰」에 대응하는 「청산」 공간의 의미소이다. 그것은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노는」 교감과 공존 그리고 열려져 있는 개방성이다. 슬픔의 골짜기, 고립의 뜰과는 정반대의 공간이다. 밤의 공간에서는, 만남은 놀이가 아니라 도주이며 살육이다.역리로 말하자면 박두진의 「해」는 음(달)과 양(해)의 두 텍스트로 구
성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양의 텍스트는 해를 찬미하고 있고 속에 숨어 있는 음의 텍스트는 달밤을 혐오하고 있다.


  그리고 양의 텍스트는 상상과 자연과 관념의 축을 나타내고, 음의 텍스트는 현실과 사회적 상황축을 이룬다. 시제를 봐도 달의 텍스트 는 「달밤이 싫여」와 같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해의 텍스트는「솟아라」 「늬가사 오면」 「누려 보리라」처럼 모두가 권유 가정 미래 추정으로 되어 있다. 박두진의「해」는 바로 「달」을 뒤집은 것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텍스트를 바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해의 마지막 시행을 보면 시의 통사적 축은 아무 것도 발전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로 첫 행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어원을 통해서「산문(PROSE)이 앞으로 나가는 행진이라면 시(VERSE)는 뒤로 되돌아 오는 회귀」라고 풀이했던 야콥슨의 말 그대로다. 의미론적으로 그것은 끝이 아니라 첫 머리의 언술로 회귀하고 있는 되풀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두진의 「해」를 읽는다는 것은 매일 매일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처럼 바로 그러한 반복과 그 반복이 자아내는 차이를 읽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해와 대립항을 이루는 달이라는 범열축(paradigm-aticaxis)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의 시적 의미는 통사적 서술이 아니라 달과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아무도 없는 달밤의 그 빈뜰과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 을 누리게 하는」, 「청산」의 차이… 해의 시적 의미는 그 빈 것과 채워져 있는 것, 폐쇄성과 개방성의
공간적 대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해는 어둠이 있어야 말갛게 얼굴을 씻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살라먹고 애띤 얼굴의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그래서 박두진에게 있어서 해란 청산까지도 새처럼 깃을 치게 하는 생령의 힘이며 인간과 사슴과 칡범이 한자리에서 교감하고 조응하며 살아가는 십장생도의 새로운 가상공간이다. 그리고 박두진에게 있어서 시란 눈물의 골짜기에서 해를 솟아나게 하는 주술인 것이며 꽃과 새와 짐승을 한자리에 앉히
는 마법의 조련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