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숨은 설화를 찾아서 "전북 임실"

醉月 2018. 9. 6. 07:49

전북 임실이 보유한 유일한 보물인 진구사지 석등. 신평면 용암리의 빈 절터에 저 홀로 온전히 남아서 당당하게 서 있다. 이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의 크기와 비교해보면 이 석등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난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큰 석등은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다.


뜻밖에도 임실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노산 아래 낙향한 선비에 의해 단종의 이름이 호명되고, 세상과 돌아앉은 칩거는 ‘술이 솟는 샘(酒泉)’의 이름으로 비유됐습니다. 새 왕조의 정통성이 이곳에서 시작됐으며, 그 뒤로 꼭꼭 숨은 천하 명당의 기도 터가 있습니다. 술 취한 주인을 화마에서 구한 의로운 개, 스님만 1000명이 넘었다는 절집의 자취인 거대한 석등, 이를 드러내고 웃는 해학적인 호랑이 바위까지…. 임실에서 만난 수많은 이야기를 따라 길을 이어봤습니다.


# 노산(蘆山)과 노산(魯山), 그 지명에 담긴 명분

목숨보다 중한 건 ‘명분’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그랬다. 명분을 위해서라면 선비들은 기꺼이 목을 내놓았다. 명분에 죽고 살았던 조선 선비들의 자취가 그곳에 있다. 임실 오수면의 노산(蘆山). 노산은 그다지 높은 산도 아니고, 산세가 훌륭한 것도 아니다. 오죽했으면 등산로조차 변변히 없다. 뭐하나 특별할 게 없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산이다. 존재감이 없는 게 어디 노산뿐일까. 노산이 있는 임실부터가 존재감이 희미하다. 임실은 뭐하나 내세울 게 없다. 이웃한 전주나 남원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지금이야 임실이라면 대번에 ‘치즈’를 떠올리지만, 딱 그것뿐이다. 임실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존재감이 없는 임실에서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노산. 그 산 이래 조선 초기에 선비들이 잇따라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털끝만 한 연고 하나 없는 자그마치 15개 가문이 여기로 낙향한 것이다. 왜 하필 그곳이었을까. 비밀은 최근에서야 풀렸다. 임실군청 학예연구사 김철배 박사의 얘기. “노산 아래 살던 선비들의 지리적 중심이 ‘노산’이었어요. 어떤 곳의 지리를 말하면서 ‘노산에서 서쪽으로 몇 리에 있다’ 뭐 이런 식이었지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자그마한 산이 왜 중심이 됐던 것일까. 궁금했지요.”

노산 아래에는 문중의 조상을 모시는 재실과 제각이 스무 곳이 넘을 정도로 유독 많다. 의문은 노산 아래 현풍곽씨의 제각 ‘귀로재(歸魯齋)’의 기문(記文)에서 풀렸다.

처음 노산 아래 자리를 잡은 조상의 행적을 담은 기문에는 “노산(魯山·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는 날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노산 아래 내려가서 노재를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고 적혀있었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다른 이름인 ‘노산군’의 노산과 같은 지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연고 없는 전북 임실의 노산 아래로 내려와 거처를 삼았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명분에 죽고 사는 선비의 삶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태조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는 임실 성수산의 상이암. 암자 마당 앞에는 성수산 아홉 개의 능선이 흘러내려 만나는 여의주 형상의 암봉이 있다. 그곳에 올라서 찍은 사진이다.




# 도리를 목숨처럼 여긴 이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벼슬을 버렸던 선비들은 고향으로 귀향할 수 없었다. 벼슬을 던지며 항의했던 건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륜과 천륜의 배반을 목격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 차마 ‘배부르고 등 따시게’ 지낼 수도 없었다. 이들은 누추한 거처와 거친 밥상을 받을 곳을 찾았다. 그러던 중 임실에서 폐위된 단종의 다른 이름인 ‘노산군’의 이름과 같은 지명을 찾아냈던 것이었다. 노산이란 이름의 산은 전국에서 이곳밖에 없다.

‘노산의 발견’의 의미는 작지 않다. 향토사 연구가 거둔 주목할 만한 성과다. 조선 600년 동안 임실의 문과 급제자는 고작 15명. 이웃 전주가 95명, 남원이 94명인 것에다 대면 형편없다. 하지만 노산의 발치 아래 기거하며 세상의 명리나 출세를 꿈꾸지 않고 살았던 선비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임실에는 깊이 숨어 살면서 평생 노산을 우러러보겠노라 다짐했던 이들, 도리를 목숨처럼 여기던 대쪽같은 선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귀로재가 있는 노산의 동쪽 자락 아랫마을의 이름이 ‘주천(酒泉)’이다. ‘술이 솟는 샘’이란 뜻이다. 주천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솔숲과 대숲을 끼고 제각과 재실이 마을 곳곳에 있고, 돌담을 끼고 유연하게 굽은 길이 있다. 주천이란 이름은 중국의 고사에 등장한다. 진나라 때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는 송섬의 은거지였다. 그렇다면 노산 아래 주천은 선비들이 은거하던 땅을 빗댄 이름이 아닐까.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 영월에 똑같은 이름의 주천면(酒泉面)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는 아닐까.


# 왕조의 정통성을 증거하다…상이암

역사로 적셔진 이야기는 임실의 성수산에도 있다. 성수산에는 암자 상이암이 있다. 암자에는 고려와 조선의 건국설화가 깃들어 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정통성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니 지세나 기운이 보통은 넘는 곳이다. 암자가 깃든 산 이름조차 ‘성스러울 성(聖)’자를 쓰는 성수산이 아닌가.

상이암에는 고려 왕건의 건국설화가 깃들어 있다. 왕건이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여기 성수산에서 백일치성을 드리고 사흘을 더 기도하니 홀연히 동자가 나타나 문답을 나누고 사라졌고, 이에 왕건은 부처의 현신인 동자와의 기이한 만남을 기념해 ‘환희담’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글을 새긴 지 24년이 지나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상이암에 얽힌 조선 건국 스토리는 이보다는 더 잘 짜여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 권유로 이곳 성수암에서 치성을 드렸는데, 부처의 현신과 마주한 뒤 이곳이야말로 삼업(三業)이 청정한 곳임을 깨닫고 빗돌에 삼청동(三淸洞)이란 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삼청동 글씨가 새겨진 빗돌은 비각 안에 있다. 전설은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개성으로 개선할 무렵에 뿌려진 이야기였을 것이었다.

일대의 허다한 산과 암자 중에서 하필 성수암에 500년의 시차를 두고 고려 태조와 조선 태조의 설화가 깃들게 된 건 아마도 땅의 기운 때문이리라. 암자가 들어선 자리는 부챗살처럼 펼쳐진 성수산의 9개 지맥을 등 뒤로 두고 있다. 이 지맥이 아홉 마리 용의 형상이며 성수암 무량수전 앞의 향로봉이 여의주의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환희담과 삼청동 비석은 아홉 마리 용이 다투는 여의주 아래 있는 셈아다.


# 천하제일 기도명당이 그곳에 있다

이쯤에서 성수산에 꼭꼭 숨어 있는 전설 같은 기도 터 얘기를 보탠다. 상이암 산신각 뒤로 이어진 희미한 길을 따라 40분쯤 성수산을 오르다 보면 9분 능선쯤에 깎아지른 바위 아래 누추한 집 한 채가 있다고 했다. 산 아래로 탁 트인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유일한 자리에 매달리듯 들어선 데다 바람을 막아주는 손바닥 모양의 바위까지 있어 ‘천하제일의 기도 터’로 불리기도 한다는 곳이다. 실제 이성계가 기도했던 자리가 여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도 터는 찾을 수 없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 덩굴이 산길을 모두 지워버린 탓이다. 영험한 기도 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는 이가 적지 않다는데, 풀이 삭는 늦가을이나 겨울 아니고서는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기도 터의 영험함은 소문일 뿐이라는 얘기도 있다. 상이암 주지 동효 스님은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하지만 그곳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터”라고 했다. 40년 전쯤에 한 스님이 이곳에 처음 암자를 짓고 수도를 했는데, 결국 속가로 환속했고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스님이 꺼내놓은 사진 한 장만으로도 언제고 다시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기도 터는 매혹적이었다.

 

사진 왼쪽은 임실 오수면의 의견공원에 세워진 미국의 전설적인 썰매견 발토 동상. 발토는 1925년 알래스카에서 혈청을 실은 썰매를 끌고 1100㎞를 달렸다. 가운데는 술에 취해 잠이 든 주인을 불길에서 구한 오수 의견. 오른쪽은 해학적인 모습의 신평면 호암리 호랑이 바위.



# 800여 년 전의 의로운 개 이야기

노산과 상이암 이야기를 먼저 꺼내긴 했지만, 사실 임실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바로 ‘오수 의견’에 대한 것이다. 오수 의견이란 ‘오수면의 의로운(義) 개(犬)’ 이야기를 말한다. 고려 때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 실려서 전하는 의견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임실에 살던 김개인이 개를 데리고 장에 갔다가 술에 만취해 길에 누웠는데, 들불이 그가 누운 자리까지 번져오자 개가 몸을 개울 물에 적셔 주변을 뒹굴면서 불을 끄고 기진맥진해 죽었다.’오수 의견 얘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건 1973년 간행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처음 실리면서부터다.

주인을 화마에서 구한 개를 기리는 ‘의견비’는, 오수읍 한복판의 공원 원동산에 단청이 칠해진 번듯한 비각 안에 있다. 비각 안의 화강석 비석은 개를 위한 것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다. 비석의 높이가 2m를 훨씬 넘고 너비도 1m에 육박한다. 비석 뒷면에는 의견 비석을 세우는 데 돈을 보탠 이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숫자만 65명이 넘는다. 주인의 목숨을 구한 개를 사람들이 얼마나 기특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오수의 개는 과연 어떤 품종이었을까. 오수란 지명에 단서가 있다. 오수는 ‘개 오(獒)’자에 ‘나무 수(樹)’자를 쓴다. ‘의로운 개의 무덤에다 지팡이를 꽂으니 싹이 나서 거목으로 자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獒)자는 ‘큰 개’를 뜻하는데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서쪽 아프가니스탄 남쪽과 네팔 중북부 곤륜산맥 등에 분포돼 있는 짱아오(藏獒·장오) 품종을 오수 개의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의견비 옆에 세워진 의견 동상은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오수면은 의견 스토리를 활용해 ‘반려견과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 특화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개 훈련장, 반려견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캠핑장 등을 갖춘 오수의 의견공원도 이런 취지에서 만들어진 곳이다. 공원에서 눈길을 끄는 건 세계 각국 명견의 동상. 알프스 산에서 조난자 40여 명의 목숨을 구한 스위스의 ‘배리’, 항혈청 운반작업의 리더로 선발돼 개썰매를 이끌고 눈보라 치는 영하 50도의 날씨에 1100㎞를 120시간 30분에 주파한 미국 알래스카의 ‘발토’,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차역에서 주인을 기다린 일본 도쿄(東京)의 ‘하치’ 등의 동상이 공원 곳곳에 사연과 함께 세워져 있다.


# 석등과 호랑이 바위, 그리고 섬진강

임실에 국보는 하나도 없지만, 보물은 딱 하나 있다. 신평면 용암리의 석등이다. 본래 지명을 따서 용암리 석등이라고 불렸지만, 근래에 진구사(珍丘寺)라는 절집의 이름이 나와 ‘진구사지 석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이 석등은 비례와 균형도 훌륭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크기다. 그냥 봐서는 그 크기가 실감 나지 않는다. 석등 앞에 서보면 그게 얼마나 거대한가 비로소 알 수 있다. 진구사지 석등의 높이는 5.18m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크다. 가장 큰 석등은 전남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 앞 석등으로 높이가 6.4m에 달한다. 그럼에도 진구사지 석등이 각황전의 것보다 더 커 보이는 건, 석등이 빈 절터에 저 홀로 당당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크기뿐만 아니라 석등의 큼직한 귀꽃이며 좌대석의 연화문 등의 장식도 훌륭하다. 일부러라도 꼭 찾아가 보길 권하는 이유다.

진구사지 석등에서 가까운 신면사무소 담장 안 독립건물에 ‘생활사 박물관’이 있다. 단일 면에서 지역주민이 사용했던 유물만을 수집해 정리해놓은 국내 유일의 박물관이다. 작은 박물관이지만 시설도 훌륭하고 전시품의 종류도 생활도구부터 고문서까지 다양하다.

신평면 호암리 두류마을의 호랑이 바위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호랑이 바위는 돌을 호랑이 형상으로 깎은 바위인데, 둥그런 얼굴에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민화 속의 해학적인 호랑이를 연상케 한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저절로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호랑이 바위는 신평면 호암리 두류교차로 인근의 군부대 철조망 아래 있는데, 논둑길을 걸어 들어가는 깊은 자리에 숨어 있어 동네 주민에게 묻지 않으면 여간해서 찾을 수 없다. 문제는 도난을 우려한 주민들이 외지인들에게 호랑이 바위의 위치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점. 퉁명스럽게 물어서는 대답을 듣기 어렵다.

임실에는 덕치면의 섬진강 정취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천담마을에서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섬진강 구간의 풍경은 우리 강의 원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구간을 대표하는 경관은 천담마을을 지나 강변길 끝인 구담마을의 느티나무 언덕에 있다. 거기서 굽어보는 섬진강 물길은 가슴이 다 저릿해질 정도다.

돌이켜보건대 근방에서는 물론이고 섬진강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강변 풍경이 남아있던 곳은 진메마을에서 천담마을까지의 강변길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 그득한 초록의 숲이 이룬 서정적 풍경의 흙길이었던 이 구간은, 4대 강 사업의 토목공사로 그만 아스팔트를 바른 삭막한 자전거도로가 되고 말았다. 예전의 경관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아쉬움을 넘어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다. 임실의 섬진강이 새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이런 강변의 서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한순간에 망쳐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임실은 숙소사정이 열악하다. 호텔이나 리조트는 없고 고작 모텔 몇 곳뿐이니 펜션이나 민박을 택하는 편이 낫다. 천담마을에서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섬진강 변에 계영당민박(010-3667-1351) 하늘정원펜션(010-7118-4657) 반디민박(010-8545-9813) 등이 있다.

강진면 버스터미널 인근의 강진시장 안에는 옛날 방식으로 햇볕에 널어 만드는 백양 국수를 삶아서 멸치육수에 내는 물국수로 이름난 ‘행운집’이 있다. 임실의 대표적인 관광지라는 사선대는 그저 그런 공원 수준이라 건너뛰어도 상관없으나 사선대 안에 있는 해물칼국수집(063-644-9070)을 빼놓기는 아쉽다. 국산 검정서리태를 맷돌에 갈아 민든 콩국수가 훌륭하다. 옥정호에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 등을 내는 옥정호산장(063-222-6170)도 알려진 맛집이다.

임실까지 갔다면 강진면 필봉리의 필봉문화촌에서 필봉농악 공연을 관람하는 건 필수 코스다. 여기서 공연을 한 번 보고 나면, 농악이나 전통 음악이 지루하거나 따분하다는 생각을 거둬들이게 된다.

필봉문화촌을 찾았던 날 100명이 넘는 중·고생이 공연을 관람했는데. 공연이 진행되는 1시간 30분여 동안 놀랍게도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늘 손에 쥐고 사는 스마트폰을 잊을 만큼 공연에 몰두했다는 얘기다. 필봉농악보존회는 이달 말까지 토요일 오후 8시에 야간 상설공연으로 전통연희극 춤추는 상쇠7 ‘히히낭락 필봉’을 공연하고 있다. 1940년대 필봉 마을을 배경으로 급변하는 시대 속 농촌을 떠나는 마을 사람들과 마을을 찾아온 쇼단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한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