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수직갱도·까치발 건물… 폐광서 태어난 ‘레트로’

醉月 2024. 7. 31. 14:19

강원랜드가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자리에 조성하고 있는 탄광문화공원.

거대한 수직갱 철탑과 광업소 사무동 건물을 비롯해 탄광 시대의 유물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건물 앞의 버스는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통근 차량이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역사 속 저무는 태백·삼척·정선 ‘120년 탄광’… 예술로 꽃피다

장성광업소 최근 폐광… 내년엔 도계광업소도 문닫아
‘광부 저항 상징’ 사북광업소, 강원랜드가 문화공간 개발중
통근버스·장비·서류 ‘녹슨 유물’ 고스란히… 가슴 뭉클

정암광업소 ‘삼탄아트마인’ 변신… ‘레일 바이 뮤지엄’ 명소
‘철암탄광역사촌’도 가볼만… 30 ~ 40년전 타임슬립
광산사고 희생 4118명 기린 위령탑… 압축성장 비극 담겨

정선·태백·삼척=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탄광이 ‘역사’가 되는 걸 목격하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석탄생산지인 강원 태백의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가 지난 6월 30일 문을 닫았다. 장성광업소는 한때 탄광 근로자만 6000명이 넘었을 정도로 번성했던 탄광이었다. 전성기에 이곳에서만 한 해 227만5000t의 석탄을 캤다. 국내 탄광 중 연간 최대 석탄 생산기록이다.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탄을 캤던 근로자는 460여 명. 그들마저 다 떠난 장성광업소 입구에 광업소장 명의의 이런 펼침막이 걸려있었다. “지나온 세월보다 더욱 행복한 앞날을 기원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전국의 석탄광산은 딱 두 곳만 남았다. 그중 한 곳이 강원 삼척의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인데, 여기도 2025년 문을 닫기로 예정돼 있다. 도계광업소가 폐광하면 공기업 대한석탄공사도 폐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는 건 민영 탄광인 도계의 경동 상동광업소, 딱 한 곳이다. 여기도 문을 닫는 건 기정사실이다. 변수는 채산성이 아니라, 폐광을 전제로 한 보상이나 지원에 대한 정부와 회사 간 합의다.

경동탄광까지 문을 닫고 나면 우리나라의 석탄생산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이 땅에서 탄광개발이 시작된 지 120여 년 만의 일이다. 탄광이 사라지면 석탄산업은 이제 ‘역사’가 된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지금 장성광업소 폐광을 지켜보는 이들은 석탄산업이 저물어 역사가 되는 걸 목격하고 있는 세대다. 이제부터는 그 자취를 보러 가는 여정의 얘기다.

탄광촌 이야기라면 지루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기 쉽다. 칙칙하고 우울한 공간이 여행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건 선입견이다. 폐광된 탄광에는 공간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다른 공간으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탄광만의 분위기다. 역동적이면서 어쩐지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연민의 느낌과 비애감까지 살짝 깔려있다. 단순히 ‘레트로’란 단어로 정리하기에는 복잡한 감상이다.

레트로를 표방하는 여행지에서 보는 건 대개 ‘공간에 깃든 시간’이다. 하지만 문 닫은 탄광과 쓰러져가는 탄광촌의 자취에서는 더불어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체온’까지 느껴진다. 사람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한 법인데, 탄광촌에는 그런 얘기를 잘 다룬 공간이 많다. 탄광촌 여행이 재미있는 이유다. 문 닫은 탄광의 적요한 공간을 미술로 메운 미술관에서도, 탄광촌 천변에 기둥을 세워 지은 ‘까치발’ 건물을 옛 탄광촌 전시장으로 꾸민 공간에서도, 주인공은 늘 사람이다. 빛 한 줌 새어들지 않는 지하 막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가족을 건사했던 가장들의 뭉클한 삶이라니. 오래된 추억을 뒤적이다가 때로는 가슴 뭉클해지거나 아련해지곤 하는 이 기분을, 여행이 아니라면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예술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삼탄아트마인의 ‘레일 바이 뮤지엄’ 공간.

채굴한 석탄을 끌어올려 실어내던 퇴락한 조차장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으로 미술적 의미를 부여했다.



# 탄광촌에 가면 왜 미안해지는가

탄광촌에 가면 부채의식이 느껴진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1960∼1970년대는 물론이고, 1980년대까지도 그랬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은 고되고 또 고됐다. 탄광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봉제공장도 그랬고, 건설현장도 그랬고, 새벽시장도 그랬다. 그 시절 모든 일터에서는 야근과 특근과 잔업이 일상처럼 이어졌다. 하루도 쉬지 못하는 ‘주 7일 근무’도 드물지 않았다. 압축성장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초를 떠받치던 모든 혹독했던 노동은, 좀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뼈를 갈아 넣는’ 일이었다. 되돌아보면 지금의 풍요로운 삶은, 그때의 고된 노동에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뭐라 잘 설명할 수 없는 부채의식이 탄광 앞에서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도, 건설현장에서도, 오래된 공장에서도 그런 느낌은 없는데, 탄광촌이나 탄광의 흔적 앞에 서면 가슴속에 추가 매달린 양, 마음이 무거워진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 대한 안쓰러움, 거기다 미안함을 ‘반 스푼’쯤 섞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왜 그럴까. 고된 노동의 ‘산업 역군’은 다른 곳에도 많았는데, 유독 광부들에게만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정선과 태백, 도계의 탄광촌을 찾아다니며 한때 광부였던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해를 보지 못하는 깜깜한 곳에서 일해서’라는 답도 있었고, ‘빈번한 탄광 사고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어서’라는 대답도 있었다. 대답은 저마다 다 달랐는데, 어느 것도 흔쾌한 정답이라 하기 어려웠다.

정답이 없으니, 나름대로 짐작을 말할 수 있겠다. 탄광마을의 자취를 둘러보고 얻은 결론(아니 확신할 수 없으니까 ‘잠재적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은 이거다. ‘그 시절 탄광은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불평등했다’는 것. 탄광이 차별받기도 했지만, 더 치명적이었던 건 ‘탄광 안에서’ 광부들끼리도 불평등했다는 점이다. 뒷배가 없고 배우지 못했으면 광산사고로 죽은 뒤에도 보상금조차 차별받았다. 안전장치 미비와 허술한 보안관리로 인한 사고로 다쳐도 스스로 ‘자기 책임’임을 진술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느끼는 불편함은 그 시절 불평등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닌가 싶다. 그게 직접적인 ‘우리’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강원랜드가 거기에 있는 이유

강원 정선 사북읍에서 강원랜드로 올라가는 고갯길 초입에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있었다. 지금은 ‘강원랜드 아래’ 사북광업소가 있었다고 설명하지만, 그때는 ‘사북광업소 위에’ 강원랜드가 들어선다고 했다. 내국인 출입 카지노 강원랜드가 사북읍과 고한읍의 경계쯤에 들어섰던 건, 국내 최대 탄광으로 쌍벽을 이루던 두 개의 탄광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사북읍에 국내 최대 탄광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있었다면, 고한읍에는 이와 쌍벽을 이뤘던 라이벌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있었다. 애초에 탄광으로 생겨나서 탄광으로 먹고살았던 사북과 고한은, 폐광과 동시에 그야말로 ‘단번에 숨통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런 사북과 고한에 폐광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한 카지노 리조트 강원랜드가 들어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북광업소는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인 2004년 10월 31일 문을 닫았다. 광업소는 폐광 직전 출범한 광부와 시민들로 구성된 석탄유물보존위원회에 의해 소규모 ‘탄광문화관광촌’으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강원랜드가 인수해 ‘탄광문화공원’으로 꾸미고 있다. 내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지금 한창 공사 중이다.

강원랜드는 최근 새 호텔신축, 웰니스센터 조성, 호텔과 콘도를 연결하는 스카이브리지 건립, 복합문화공간 조성 등을 골자로 한 글로벌 복합리조트 도약을 위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사북광업소 자리에 조성하고 있는 탄광문화공원이다.

탄광 얘기를 시작하면서 개관은커녕 공사도 끝나지 않은 탄광문화공원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역사가 된’ 탄광산업을 이곳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사북광업소는 규모와 석탄 생산량 면에서도 그렇지만, 광산의 상징적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1980년 정치적 격변기에 일어났던 이른바 ‘사북사태’를 기억하시는지.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기, 강원랜드가 탄광문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다.

사북사태는 비상계엄 아래 민주화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광산노조의 어용 시비와 함께 노조활동을 감시하고 억압하던 경찰과 광산노동자의 갈등까지 곪아 터지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결국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유혈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노·사·정 대표의 합의로 사태는 일단락됐으나 사건 직후 계엄사 산하 합수부는 이 사건을 ‘광부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주모자를 폭도로 몰아 구속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침해와 가혹 행위 국가의 사과를 권했으며, 2015년에는 법원이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의 주모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 자취와 기록이 사북광업소에 고스란히 다 남아있다.

광부들이 탄가루로 가득한 몸을 씻던 목욕탕.



# 사북광업소, 박물관이 되다

탄광문화공원은 이제 겨우 건물만 완공됐을 뿐이다. 건물은 사북광업소의 시설물 등을 그대로 두고 그 위를 덮는 방식으로 지었다. 사무실부터 목욕탕까지 광부들이 사용했던 내부공간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사북광업소 시절의 설비도 그대로이고, 자료도 다 보관돼 있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한 사람의 역할이 컸다. 당시 광업소 하청업체였던 원창기업의 송계호 대표다. 정선군의회 의장을 역임했던 그는 폐광을 한 해 앞두고, 직원들을 설득해 함께 흩어진 탄광의 유물들을 모으고 지켰다. 다들 폐광에 따른 생존권 투쟁에 매달릴 때도, 송 대표는 직원들과 함께 자칫 흩어질 수 있었던 사북광업소 자료를 모았다. 크고 작은 장비는 물론이고, 작은 팻말이나 서류 한 장까지도 다 모았다. 제 것도 아니면서, 제 것보다 더 소중하게 다뤘다. 입버릇처럼 그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다 역사이고, 보물’이라고 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남겨놓을 수 있었을까 싶었던 게 사북광업소 광부들을 실어나르던 통근버스였다. 통근버스는 두 대인데 대형버스는 광부들이 많이 사는 광산 주변을 다녔고, 중형버스는 광산에서 먼 곳까지 운행하던 것이었다고 했다. 이제는 오래돼서 붉게 녹슬어 금세 주저앉을 것 같지만, 이 버스도 한때는 광산촌의 고갯길을 힘차게 넘어다니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공사장은 출입이 통제되지만, 울타리 바깥에서도 세워둔 통근버스를 볼 수 있다.

유물 보관창고로 쓰고 있는 공사장 옆 컨테이너 부스 안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차곡차곡 쌓아놓은 여러 개의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이었다. 광부들은 탄광 작업장에 한번 들어가면 일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서 갱도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면 지하 막장 휴게소에서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었다.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갱도 안에서 먹는 밥이라고 해서 광부들은 도시락 점심을 ‘사지(死地)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먹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탄광촌에서 광부들의 대표 음식은 단연 삼겹살과 돼지껍데기였다. 탄가루를 마셔야 했던 광부들은 목의 탄가루를 씻어낸다며 비계가 잔뜩 붙은 삼겹살과 돼지껍데기 구이를 먹었다. 편평한 돌을 불판 삼아 구워 먹었다고 해서 광부들은 삼겹살을 ‘돌구이’라고 불렀다. 돼지고기가 거의 필수품에 가까운 부식이어서 탄광 사택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회사에서 돼지고기를 일괄 공급해주고 월급에서 ‘고기 값’을 제하기도 했다.

쌀도 회사에서 나눠줬다. 탄광촌에는 ‘석공쌀’이라는 게 있었다. 대한석탄공사가 품질 좋은 쌀을 대량으로 구매해 싸게 공급하는 쌀이다. 민영 탄광에서도 광부들에게 월급 대신 주던 쌀이 있었는데, 그건 ‘광산미(米)’라 부르던 질 낮은 값싼 쌀이었다. 탄광촌에는 불평등한 취급을 당할 때면 ‘석공쌀’과 ‘광산미’를 빗대 말하기도 했단다.

탄광촌에서는 작은 물건 하나로도 추억의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아직 유물 전시의 주제나 방식 등에 대해서는 결정된 게 없지만, 탄광문화공원이 완공되면 전시장에서 탄광촌의 이런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 탄광촌까지 스며들었던 지역감정

이번에는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얘기다. 정암광업소는 인근 사북광업소와 그야말로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다. 당시 광부들은 두 광업소가 ‘영호남 대결구도’라고 믿었다. 정치권에서 획책한 지역감정 구도가 이 깊은 탄광마을까지 비집고 들어왔던 것이다.

1980년대까지 사북·고한지역에서는 동원탄좌가 전라도 기업이고, 삼척탄좌는 경상도 기업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동원탄좌의 설립자 이연 회장은 전북 익산 출신이니 동원탄좌는 전라도 기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삼척탄좌 설립자는 충북 청원 출신인 대한생명 설립자 임창호다. 1970년 삼척탄좌를 인수한 ‘삼천리연탄기업사’의 공동창립자 이장균, 유연성은 둘 다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삼척탄좌를 경상도 기업이라 여겼던 건, 삼척탄좌의 실소유주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헛소문 때문이었다. 탄광촌 주민들은 영세기업이던 삼천리연탄이 자기보다 수십 배나 큰 삼척탄좌를 인수한 데 박 전 대통령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이런 데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두 번이나 삼척탄좌를 방문했으니 오해는 더 깊어졌다.

사북사태 이후 광산업자들은 사태 재발 방지뿐 아니라 권력의 눈치를 봐서라도 복지에 신경 쓰고 있다는 시늉을 해야만 했다. 당시 광산에서는 한 달 동안 결근 없이 만근한 근로자들에게 돼지고기를 나눠줬는데, 사북광업소에서 두 근을 주면 정암광업소에서 세 근을 주는 식으로 경쟁했다. 정암광업소는 1975년 삼척 맹방해변의 군용시설을 임대, 하계휴양소를 개설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보다 늦은 1981년 강릉 경포대에 휴양소를 설치한 사북광업소는 여름휴가 때마다 하계 휴양 열차를 대절해 공짜로 태워주기도 했다.

삼탄아트마인의 원시미술관. 탄광 갱도에 신선한 공기를 밀어넣던 공기압축기실을 개조해 만들었다.



# 예술로 폐광을 지키다

정암광업소는 사북광업소보다 3년 앞선 2001년 10월 31일 폐광했다. 문 닫은 광산은 대책 없이 방치됐다가 창조적 문화예술단지로 거듭났다. 지난 2013년 정암광업소는 문화예술복합공간인 ‘삼탄아트마인’으로 다시 문을 연 것. ‘삼탄’은 삼척탄좌를 뜻하고, ‘아트(ART·예술)’와 ‘마인(MINE·광산)’을 조합한 이름이다. ‘공간 재생’이란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전적으로 개인의 힘으로 이뤄진 혁신적인 시도였다.

삼탄아트마인은 정암광업소 건물과 시설을 활용해 레일뮤지엄과 현대미술관, 아트 레지던시, 체험관 등으로 리모델링해 운용하고 있다. 광부들이 생활하던 공간에다 들여놓은 미술관과 전시장도 인상적이지만, 삼탄아트마인의 하이라이트는 수직갱과 권양기가 있는 조차장 구역을 다듬어 만든 ‘레일 바이 뮤지엄’이다. 여기서는 탄가루로 뒤덮인 수직갱의 철 구조물과 강철 로프, 가동을 멈춘 컨베이어 벨트 등이 하나의 압도적인 조형예술작품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삼탄아트마인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이곳이 돈벌이의 욕심이 아니라 소명의식 하나로 문 닫은 광산을 꿋꿋하게 지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지고 흩어질 뻔했던 산업 유산을 지켜온 것만 해도 대견한데, 그걸 넘어서 초기의 어려움을 이기고 공간을 새롭고 창의적으로 해석하며 좋은 미술 전시를 지치지 않고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삼탄아트마인이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건 노동하는 이들의 고된 삶이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폐광에 차곡차곡 쌓인 치열했던 삶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훌륭한 질료다.

꼭 다녀오길 권하는 첫 번째 장소가 삼탄아트마인이라면, 두 번째는 태백 철암역 앞의 ‘철암탄광역사촌’이다. 여기는 옛 탄광촌 상업시설을 복원해 보존한 생활사 박물관이다. 바닥 면적을 최대한 늘리려 한껏 뒤로 밀어 천변에 기둥을 세워 ‘까치발 건물’로 불리는 쇠락한 건물 11개 가운데 6개를 전시 공간으로 꾸며 조성했다. 폐업한 상점의 업소간판과 실내공간을 그대로 두어서 그 앞을 걷는 것만으로도 타임머신을 타고 30∼40년 전쯤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시절의 대폿집이나 판잣집, 탄광촌 골목 등을 재현해놓기도 했다.

태백 철암역 앞의 철암탄광역사촌의 옛 건물 내부에 전시해놓은 광부들 사진.



# 그들의 죽음을 다시 호명하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태백의 황지에는 순직산업전사위령탑이 있다. 탄광 사고로 사망한 광부들을 추념하는 탑이다. 이곳에 광부 4118위가 모셔져 있다. 믿어지는가. 베트남 전쟁 9년 동안 참전한 국군 전사자가 5099명인데, 탄광에서 일하다 굴이 무너지거나 화약 사고 등으로 죽은 사람이 4118명이나 된다는 것을. 진폐증이나 탄광 노동의 간접 피해로 죽은 이를 뺀 숫자가 이렇다. 1975년 한 해에만 광산에서 270명이 사망했다. 그저 광산에 석탄을 캐러 들어갔던 이들이 이처럼 일상적으로 떼죽음을 당했던 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광부들은 부실한 안전시설의 열악한 갱도에서 목표량과 책임생산량 달성으로 내몰렸다. 한쪽 갱도에서 사고가 나서 주검을 수습하는 동안, 다른 갱도에서는 생산량 달성을 위한 채탄작업이 진행됐을 정도였다. ‘먹고사는 일’이 다급했던 시절. 산 사람은 살아야 했고, 그저 죽은 이들만 억울했다.

태백은 사방이 고개다. 싸리재, 송이재, 연화재, 백산…. 그 고갯마루마다 화장장이 있었다고 했다. 죽은 광부들은 여기서 화장해 뼛가루가 돼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광산사고 희생자 4118명 가운데 상당수의 신원이 유실됐다. 후손에 의해 정확한 신원이 파악된 경우는 전체 사망자의 20% 남짓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나이도, 주소도 없이 위패에 이름 석 자로만 남아있다. 사정이 이러니 동명이인을 가려낼 수조차 없다. 더 기막힌 건, 사고로 세상을 뜬 광부 중에는 적잖은 ‘의사자(義死者)’가 있는데도, 누구도 그걸 가려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탄광 매몰 사고가 발생하면, 구조작업의 맨 앞에는 대부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섰다. 갱도 내부의 지리와 탄광의 특수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의무가 아니니 위험한 사고현장을 외면했을 법도 하지만,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가 갱 속에 매몰됐다는데 그걸 모른 척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광부들은 모두 단순 ‘광산 사고 사망자’로 처리됐다. 타인을 위한 의로운 죽음이었지만, 탄광에서는 그저 ‘개죽음’일 따름이었다.

석탄산업이 종언을 고하고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압축성장의 그늘 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새삼 다시 기리고, 그들의 죽음을 걸맞은 예우로 다시 호명해야 하지 않을까. 순직산업전사위령탑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봐야 하지 않을까. 위령탑 앞에서 내려다본 태백 시내가 온통 황혼으로 물들고 있었다.



■ 탄광촌의 카페 두 곳

오래전부터 예고됐던 폐광이어서 그랬을까.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았는데도 장성동은 평온했다. 장성동은 최근 도시재생 뉴딜 사업으로 몰라보게 달라졌다. 1978년 지은 낡은 화광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 임대아파트와 수영장까지 갖춘 복합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장성중앙시장 주변은 30∼40년 전 탄광촌 모습 그대로다. 동네가 다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마을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화신촌 믹스카페’가 있고, 산동네 교회 자리에 카페 ‘로드앤드’가 있다.